어차피 그저 자선행사일 뿐이니까...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냈다. 이따가 아무 핑계나 대고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그런데 호텔 돌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아직 연회장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눈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어머, 진짜 왔네?”강유빈이 팔짱을 낀 채 거만하고 우쭐한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녀를 본 순간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오늘 밤 강유빈은 작정이라도 한 듯 예쁘게 꾸미고 왔다. 타이트한 레드 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분위기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그런 그녀와 달리 일반적인 블랙 화이트 원피스 차림의 강서연은 왠지 모르게 초라해 보였다.“강서연.”강유빈이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저녁에 귀한 하객 최연희 양이 온다고 했잖아. 이렇게 입고 오면 우리 강씨 가문의 체면이 뭐가 돼! 창피해 죽겠어, 정말!”“오늘 저녁 파티는 자선 파티라며.”강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자선 파티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라도 부를 거야?”“뭐라고?”“자선 파티의 주제는 자선 행사이지, 최연희 양이 아니야.”강서연이 그녀를 흘겨보았다.“장소에 맞게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해. 너무 화려한 탓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오히려 자선 행사의 본질을 잃을 수가 있어.”화가 난 강유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주변에 손님이 많아 화를 낼 수 없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천한 년 주제에 지금 날 가르치려 들어?”“내가 어찌 감히 언니를 가르치겠어.”강서연이 코웃음을 쳤다.“파티는 언니가 연 거잖아. 난 그냥 언니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러 왔어.”강유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강서연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한 걸음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지금 하객들이 한창 안으로 들어가는 중인데 이 차림으로 들어가려고? 창피하지도 않아?”“그래?”강서연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그냥 갈게.”“거기 서!”강유빈
강서연은 묵묵히 그녀 뒤를 따랐갔고 그렇게 호텔 건물을 지나 지하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컴컴하고 조용했다. 다들 지하 주차장에 가려면 호텔 안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굳이 먼 길을 빙빙 돌아서 이 길로 오진 않았다.강서연은 불길한 예감에 발걸음을 늦추었다.“뭐 해!”강유빈이 앞에서 재촉했다.“빨리 와! 내 차 저 밑에 있어.”“이 길로 내려가서 찾으면 찾을 수 있어?”“내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내가 왜 몰라? 설마 지금 내가 차를 여기까지 가져와서 널 태우길 바라는 거야?”강유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내가 대놓고 호텔 문 앞에서 널 태웠다간 사람들이 지금 네 꼴을 다 볼 거 아니야!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강서연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블랙홀처럼 밑으로 쭉 뻗어있어 끝이 보이질 않았다.계속 앞에서 종종걸음치는 강유빈을 따라가려니 강서연은 버겁기만 했다. 강유빈은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디까지 왔는지 주변에 등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강서연도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습한 곰팡내가 코를 찔러 불안감이 더욱 엄습했다.“언니...”주변이 메아리 소리로 가득 찼다.“여긴 어디야?”잠시 후, 어둠 속에서 강유빈의 날카롭고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네가 가야 하는 곳이야!”순간 가슴이 움찔한 강서연은 등골이 오싹하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가 상황 파악하기도 전에 뭔가에 밀려 튕겨 나가고 말았다.그녀는 비명과 함께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릎을 쿵 부딪쳤다. 곧이어 대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머릿속이 하얘진 강서연은 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겨우 일어나 달려갔다. 철문 너머로 강유빈이 차갑게 웃었다.“동생아, 오늘 저녁 파티는 참석하지 않아도 돼! 이따가 아빠한테 네가 오기 싫어서 안 왔다고 할게!”“
강서연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쿵쾅거렸고 머릿속도 하얘졌다.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한 어린 소녀의 목소리 같았다.이 소녀는 누구고, 또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걸까?“어휴, 이 자물쇠 열기가 너무 어려워요.”소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저기... 뒤로 좀 물러서요. 제가 돌로 자물쇠를 부숴볼게요.”강서연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소녀의 말대로 구석 쪽으로 몸을 피했다.소녀가 문을 부수는 소리가 지하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쾅쾅하고 두드릴 때마다 심장도 함께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잠시 후 덜컹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자물쇠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문이 열렸지만 강서연은 몸이 경직되어 손발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이봐요, 언니?”아담한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다.“빨리 안 가고 뭐 해요!”“그쪽은...”“얼른 가요!”강서연이 말을 하기도 전에 소녀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지금 이 상황에 강서연은 정신을 부여잡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소녀를 따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문 앞에 죽은 쥐들과 야구 방망이, 그리고 큰 돌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들로 쥐들을 죽인 모양이다.소녀의 손이 작고 가늘었지만 한없이 따뜻했고 절망 속의 마지막 지푸라기 같았다. 소녀의 손을 꽉 잡은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강서연은 소녀를 따라 미친 듯이 뛰었다. 그렇게 어둠 속을 뛰쳐나와 드디어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됐어요. 이젠 안전해요.”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 복도를 거닐었다. 소녀는 그녀에게 히죽 웃더니 그녀를 잡고 엘리베이터에 탄 후 맨 꼭대기 층을 눌렀다.강서연은 그제야 소녀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눈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어찌나 달콤한지 알록달록한 마시멜로 같았다. 그리고...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낯이 익었다.강서연은 멍한 얼굴로 소녀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봤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질
“괜찮아요, 그냥 앉아요.”최연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여긴 저의 방이고 이분들은 저의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예요. 언니도 파티에 참석하러 왔죠? 그런데 지금 이 모습으로 참석하기에는 좀...”강서연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일단 샤워한 다음에 다시 예쁘게 꾸며요. 여기 드레스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마음대로 골라봐요.”강서연은 미안했지만, 최연희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샤워를 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샤워해서 조금 전의 두려움과 더러움을 씻어내고 싶었다.“걱정하지 말아요. 언니를 해치려 했던 나쁜 여자는 절대 여기까지 찾아오지 못해요.”“그거 어떻게 알아요?”강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최연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언니 강씨 가문의 딸 강서연 맞죠?”강서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놀라지 말아요.”최연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강씨 가문의 큰딸이 절 위해 준비한 파티인데 오기 전에 당연히 일일이 다 조사해 봤죠.”강서연도 최연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언니, 얼른 가서 씻어요.”최연희가 해맑게 웃으며 목욕 타월을 그녀에게 건넸다.“전 밖에서 언니가 입을 드레스를 고르고 있을게요. 이 파티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예요.”...자선 파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오늘의 주인공 최연희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강명원은 가끔 강유빈에게 눈빛으로 경고했다. 강유빈도 답답한 나머지 여러 번이나 전화해봤지만 연락을 받은 사람은 최연희가 이미 파티 장소에 도착했다는 대답뿐이었다.“그런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요. 대체 어디 있어요?”강유빈이 휴대 전화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아무 데도 없다고요!”“진정하세요, 강유빈 씨. 중간에서 소통에 문제가 있었나 봐요...”“그럼, 당장 가서 해결해요. 오늘 아가씨가 오지 않는다면 저 아빠한테 죽어요!”강유빈이
“당연히 되죠!”강유빈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허락했다.‘절친을 데려온 게 뭐가 큰일이라고. 게다가 아가씨의 절친이라면 분명 재벌 집 딸일 테고? 오성 4대 가문의 어느 가문일까? 만약 아가씨의 절친과도 친해지면 나야 좋지, 앞으로 인맥이 더 생기는 거니까!’강유빈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더니 최연희 옆으로 다가가 친한 척했다.“아가씨, 친구분 지금 어디 있어요? 괜찮다면 제가 당장 사람을 보내 모셔 오라고 할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가씨. 이 일은 저한테 맡겨요. 아가씨 친구분을 꼭 안전하게 모셔올게요.”“그럴 필요까진 없어요.”최연희가 덤덤하게 웃었다.“제 친구가 저랑 함께 와서 지금 위층에 있어요. 이번 파티는 아무래도 강씨 가문에서 주최하는 거라 데려와도 주최자의 허락을 맡고 데려와야죠.”“아가씨도 참, 별말씀 다 하시네요.”강유빈이 히죽 웃더니 몇몇 종업원에게 분부했다.“지금부터 연희 아가씨의 분부라면 모두 따르도록 해. 그리고 이따가 아가씨의 친구분도 주최석으로 안내해.”“유빈 씨.”최연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유빈 씨랑 유빈 씨 부모님은 메인 테이블에 안 앉아요? 그래도 돼요?”“안 될 게 뭐가 있어요.”양연이 나서서 말을 가로챘다.“오늘 밤 아가씨랑 아가씨 친구분을 초대할 수 있어서 얼마나 영광인지 몰라요. 이 누추한 호텔도 빛이 다 난다니까요!”그저 듣기 좋은 소리는 다 할 기세였다.“아가씨, 친구분 그만 기다리게 하고 얼른 오라고 해요.”“알겠어요.”최연희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파티장의 문이 열렸고 뭇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 다들 최씨 가문 아가씨의 절친이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한 눈치였다.강유빈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목을 빼 들었다. 그런데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강서연?!강유빈은 순간 머리가 돌에 맞은 것처럼 멍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강명원과 양연의 낯빛도 확연히 어두워졌다. 강서연을 쳐다보던 그들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최연희가 말한 절친이
강명원이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어느 쪽에 붙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파티에 참석한 하객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저마다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눈치였다.“강유빈, 계속 여기서 망신이나 당할 거야?”강명원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당장 집에 가! 네 얼굴 보기도 싫으니까.”“아빠...”“꺼져!”시뻘겋게 달아오른 두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강서연을 째려보고는 파티장을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양연은 말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혼나고 있는 딸을 바라보면서 억지웃음을 지어야만 했다.그제야 화가 조금 풀린 강명원은 바로 웃는 얼굴로 최연희에게 말했다.“연희 양, 걱정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유빈이를 엄하게 가르칠게요. 오늘 일은 아무래도 오해 같은데 내가...”“아저씨.”최연희가 싸늘하게 말했다.“아저씨네 집안일은 제가 끼어들 자격이 없어요. 하지만 제 친구 일이라면 무조건 두 팔 걷고 나설 겁니다.”“그럼요, 그래야죠.”강명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최연희는 그를 힐끗 보고는 강서연과 함께 메인 테이블에 앉았다.파티는 계속 진행되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몇몇 사람들이 파티장을 주시하고 있었다.“대표님, 강서연 씨가 어떻게 최연희 양이랑 절친이 됐죠?”“그러게.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건가?”소진명의 두 눈에 어둠이 스쳐 지나가더니 눈살을 찌푸렸다.“강서연이 구현수의 아내인데 최연희랑 절친이라면... 구현수가 바로 최연준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대표님.”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진실이 다 드러났어요. 인제 우리도 움직일까요?”“일단 가만히 있어.”소진명이 손을 들고 말렸다.“구현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여선 안 돼. 안 그러면 어르신께 뭐라 보고드리기 어려워. 또 우리가 실속 없이 허세만 부렸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그럼 이건...”“일단 조용히 지켜보는 게 좋겠어.”소진명이 입술을 잘근잘
유찬혁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특히 구현수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유찬혁이 머뭇거리며 말했다.“형이 지금 구현수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주민 등록증도 구현수의 것이고 혼인신고도 구현수의 주민 등록증으로 했어요. 그러니까 법적으로 봤을 때 서연 씨랑 결혼한 사람은 구현수지, 최연준이 아니에요.”배경원이 가장 먼저 반박했다.“그런데 구현수는 오래전에 죽었잖아.”“그렇긴 한데...”유찬혁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그래서 더 무효라는 거야.”방안이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구현수에게 머물렀다가 또 이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구현수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그렇다. 지금까지 그는 줄곧 이 점을 간과했었다.그때 혼인신고 할 때 그는 직접 현장에 가지 않고 강씨 가문에서 지인을 통하여 두 사람의 주민 등록증으로만 황급히 절차를 마쳤다. 구청 직원도 구현수의 생사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하여 혼인신고서에 처음부터 끝까지 최연준이라는 세 글자는 어디에도 없었다.머리가 지끈거린 구현수는 미간을 어루만졌다.“형, 그래도 괜찮아요.”배경원이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기회 봐서 서연 씨 몰래 혼인신고서를 다시 작성하면 돼요.”“너 머리나 좀 쓰고 얘기할래? 그게 다시 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줄 알아?”유찬혁이 그를 째려보았다.“왜 안 돼?”배경원이 욱하며 고집을 부렸다.“그래, 최씨 가문에서 형수님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건 맞아. 하지만 형만 좋다고 하면 아무 문제 될 게 없어!”말문이 막힌 유찬혁은 그를 힐끗 째려본 후 고개를 돌렸다. 배경원은 여전히 제멋대로 주저리주저리 지껄였다.“찬혁이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인생의 가장 큰 사치가 무엇인지 알아? 바로 사랑이야! 형은 지금 운명의 짝을 만났으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지키려는 거라고...”그의 말이 채 끝
강서연이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베란다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조금 전 뜨거웠던 시간만 생각하면 그녀는 쑥스러워 귀까지 빨개졌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던 그녀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평소에도 그녀에게 매달리긴 했지만, 이성의 끈을 잡고 있어 아까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강서연은 침대에서 살며시 일어나 그에게 백허그를 하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닿자마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괜찮아?”구현수가 황급히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았다. 놀라움도 잠시 강서연은 곧장 그의 품에 안겨 그의 부드럽고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구현수는 웃으며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 야심한 밤에 자지 않고 뒤에서 날 기습하려고?”“그런 거 아니에요.”강서연은 주먹을 쥐고 그를 톡 쳤다. 두 사람이 한창 재미나게 장난치던 그때 구현수의 시선이 갑자기 그녀에게 멈췄다. 강서연은 피부가 하얘 조금만 문질러도 뻘겋게 되었다.구현수는 야릇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내일에는 목을 가리는 옷으로 입어.”강서연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민망함에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주먹으로 냅다 두드렸다.“그만해.”그가 웃음을 터뜨렸다.“분명 때리는 것 같은데 가려워 죽겠어. 내가 한 번 더 이성을 잃길 바라?”“현수 씨, 당신...”그녀가 동그란 두 눈을 부릅떴다.“당신 너무 나빠요!”“나쁘면 안 돼?”“계속 이러면 확 버리는 수가 있어요!”아무 뜻 없이 내뱉은 농담이었지만 강서연이 뒤를 돌아봤을 때 그의 두 눈이 갑자기 빛을 잃은 것 같았다. 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현수 씨, 왜... 왜 그래요?”그는 풀이 죽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농담한 거예요!”강서연이 멈칫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내가 왜 현수 씨를 버려요!”“만약 내가 널 속였다면?”그의 말투가 살짝 싸늘해졌다.“그러면 날 떠날 거야?”강서연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치 보이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