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원이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어느 쪽에 붙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파티에 참석한 하객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저마다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눈치였다.“강유빈, 계속 여기서 망신이나 당할 거야?”강명원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당장 집에 가! 네 얼굴 보기도 싫으니까.”“아빠...”“꺼져!”시뻘겋게 달아오른 두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강서연을 째려보고는 파티장을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양연은 말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혼나고 있는 딸을 바라보면서 억지웃음을 지어야만 했다.그제야 화가 조금 풀린 강명원은 바로 웃는 얼굴로 최연희에게 말했다.“연희 양, 걱정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유빈이를 엄하게 가르칠게요. 오늘 일은 아무래도 오해 같은데 내가...”“아저씨.”최연희가 싸늘하게 말했다.“아저씨네 집안일은 제가 끼어들 자격이 없어요. 하지만 제 친구 일이라면 무조건 두 팔 걷고 나설 겁니다.”“그럼요, 그래야죠.”강명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최연희는 그를 힐끗 보고는 강서연과 함께 메인 테이블에 앉았다.파티는 계속 진행되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몇몇 사람들이 파티장을 주시하고 있었다.“대표님, 강서연 씨가 어떻게 최연희 양이랑 절친이 됐죠?”“그러게.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건가?”소진명의 두 눈에 어둠이 스쳐 지나가더니 눈살을 찌푸렸다.“강서연이 구현수의 아내인데 최연희랑 절친이라면... 구현수가 바로 최연준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대표님.”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진실이 다 드러났어요. 인제 우리도 움직일까요?”“일단 가만히 있어.”소진명이 손을 들고 말렸다.“구현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여선 안 돼. 안 그러면 어르신께 뭐라 보고드리기 어려워. 또 우리가 실속 없이 허세만 부렸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그럼 이건...”“일단 조용히 지켜보는 게 좋겠어.”소진명이 입술을 잘근잘
유찬혁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특히 구현수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유찬혁이 머뭇거리며 말했다.“형이 지금 구현수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주민 등록증도 구현수의 것이고 혼인신고도 구현수의 주민 등록증으로 했어요. 그러니까 법적으로 봤을 때 서연 씨랑 결혼한 사람은 구현수지, 최연준이 아니에요.”배경원이 가장 먼저 반박했다.“그런데 구현수는 오래전에 죽었잖아.”“그렇긴 한데...”유찬혁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그래서 더 무효라는 거야.”방안이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구현수에게 머물렀다가 또 이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구현수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그렇다. 지금까지 그는 줄곧 이 점을 간과했었다.그때 혼인신고 할 때 그는 직접 현장에 가지 않고 강씨 가문에서 지인을 통하여 두 사람의 주민 등록증으로만 황급히 절차를 마쳤다. 구청 직원도 구현수의 생사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하여 혼인신고서에 처음부터 끝까지 최연준이라는 세 글자는 어디에도 없었다.머리가 지끈거린 구현수는 미간을 어루만졌다.“형, 그래도 괜찮아요.”배경원이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기회 봐서 서연 씨 몰래 혼인신고서를 다시 작성하면 돼요.”“너 머리나 좀 쓰고 얘기할래? 그게 다시 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줄 알아?”유찬혁이 그를 째려보았다.“왜 안 돼?”배경원이 욱하며 고집을 부렸다.“그래, 최씨 가문에서 형수님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건 맞아. 하지만 형만 좋다고 하면 아무 문제 될 게 없어!”말문이 막힌 유찬혁은 그를 힐끗 째려본 후 고개를 돌렸다. 배경원은 여전히 제멋대로 주저리주저리 지껄였다.“찬혁이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인생의 가장 큰 사치가 무엇인지 알아? 바로 사랑이야! 형은 지금 운명의 짝을 만났으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지키려는 거라고...”그의 말이 채 끝
강서연이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베란다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조금 전 뜨거웠던 시간만 생각하면 그녀는 쑥스러워 귀까지 빨개졌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던 그녀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평소에도 그녀에게 매달리긴 했지만, 이성의 끈을 잡고 있어 아까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강서연은 침대에서 살며시 일어나 그에게 백허그를 하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닿자마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괜찮아?”구현수가 황급히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았다. 놀라움도 잠시 강서연은 곧장 그의 품에 안겨 그의 부드럽고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구현수는 웃으며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 야심한 밤에 자지 않고 뒤에서 날 기습하려고?”“그런 거 아니에요.”강서연은 주먹을 쥐고 그를 톡 쳤다. 두 사람이 한창 재미나게 장난치던 그때 구현수의 시선이 갑자기 그녀에게 멈췄다. 강서연은 피부가 하얘 조금만 문질러도 뻘겋게 되었다.구현수는 야릇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내일에는 목을 가리는 옷으로 입어.”강서연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민망함에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주먹으로 냅다 두드렸다.“그만해.”그가 웃음을 터뜨렸다.“분명 때리는 것 같은데 가려워 죽겠어. 내가 한 번 더 이성을 잃길 바라?”“현수 씨, 당신...”그녀가 동그란 두 눈을 부릅떴다.“당신 너무 나빠요!”“나쁘면 안 돼?”“계속 이러면 확 버리는 수가 있어요!”아무 뜻 없이 내뱉은 농담이었지만 강서연이 뒤를 돌아봤을 때 그의 두 눈이 갑자기 빛을 잃은 것 같았다. 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현수 씨, 왜... 왜 그래요?”그는 풀이 죽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농담한 거예요!”강서연이 멈칫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내가 왜 현수 씨를 버려요!”“만약 내가 널 속였다면?”그의 말투가 살짝 싸늘해졌다.“그러면 날 떠날 거야?”강서연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치 보이지
소진명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면서 빌었다.배경원은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 살인 같은 것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배씨 가문의 세력도 어마어마하여 설령 배경원이 그를 죽인다고 해도 실종자가 한 명 더 늘어날 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소문없이 묻힐 것이다.그리고 최진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때 가서 입 싹 닫고 되레 모든 죄를 소진명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최진혁이 최씨 가문 회장님 앞에서는 좋은 작은 삼촌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니 말이다.소진명은 이를 꽉 깨물고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바닥에 부딪친 바람에 피부가 벗겨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도련님, 제발 살려주세요! 도련님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그럼. 소 대표의 어르신은 어떡해?”배경원이 다리를 꼬고 가운데 앉았다.“약속할게요.”소진명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최진혁한테는 절대 아무 얘기도 안 하겠습니다!”“흥, 그 약속을 내가 어떻게 믿어?”배경원이 비수와 총을 옆으로 던졌다.“그렇지만 진짜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목숨은 살려줄 수 있어.”“분부하십시오, 도련님.”“강유빈이라는 사람 알지?”배경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강유빈이 형수님을 지하실에 가둔 것도 모자라 쥐까지 넣었다는 사실을 형이 알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는가?하여 소진명더러 강유빈을 처리하게 할 생각이었다. 악인은 자기보다 더 악한 악인으로부터 들볶인다고 서로 물고 뜯게 하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일 것이다.소진명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슬쩍 물었다.“저더러 강유빈을 처리하라는 말씀입니까?”“소 대표, 앞으로 나랑 형이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이 사실을 최진혁한테 조금이라도 흘렸다간... 흥, 셋째 형님이 소 대표를 풀어줬다는 건 다시 잡아서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알겠어?”...며칠 후, 강
“강유빈!” “그만, 그만!”주원효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고 강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만 가세요. 오늘 저는 강유빈 씨 하고만 계약 얘기를 나눌 거예요.”강유빈은 예쁘게 웃어 보이며 주원효와 같이 미팅 실로 움직였고, 그 와중에 잊지 않고 강서연에게 경멸에 찬 눈빛을 아낌없이 보냈다.그때는 강서연도 너무 마음이 상하고 억울했지만, 널브러진 서류를 하나하나 주워 담고 절벅거리는 발로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그러고 나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그 주원효가 사기꾼이었다는 사실!강유빈도 그와 계약을 다 하고 나서 주원효의 회사가 겉만 번지르르한, 속은 텅 빈 페이퍼 컴퍼니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강유빈은 강명원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에 계약을 촉구했고 아예 계약금 일부까지 입금했다고 했다. 그 결정 하나 때문에 강진이 수십억을 허공에 날리게 된 셈이다.그 얘기를 전해 들은 강서연은 한참이나 정신을 못차렸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처음이라.그녀는 믿기 힘든 그 얘기를 구현수에게 말해 주었다.“사실 나 그때 한 번 더 설득하고 쟁취하려고도 했었어요. 주원효 그 사람이 꺼내든 조건이 너무 좋은 조건이었어요. 거의 거저먹는 거였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약간은 의심해 볼 만도 했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갑자기 들이닥친 행운은 불행의 씨앗일지도 모른다고 어른들이 그랬는데...”구현수는 옅은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 앞으로 당신도 공짜라면 한 번 더 고민하고 주의를 기울여서 결정해야 해.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진 않으니까.”“그러고 보면, 이번 일은 유빈 언니가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으면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어요. 아니면 그 수억을 날려 먹은 게 나였을 수도 있는데.”강서연도 은근히 속이 시원한 듯 해 보였다.‘바보, 그게 당신이 될 수가 없지.'구현수의 얼굴에 미소가 더 깊어졌다.‘강유빈이 타깃인 계획적인 일에, 다른 사람이 당할 일은 없지.’다행히 위험한 상황
“연준 형, 형? 형! 듣고 있어요?”배경원은 연속 몇 번이고 구현수를 불렀고, 구현수는 정신을 놓고 있다가 가벼운 기침으로 대응했다.배경원은 그런 구현수를 놀려대며 말했다.“형님, 나는요, ‘혼이 빠졌다’ 는 게 뭔지 지금 알았잖아요! 전화기 너머로도 형의 시선이 우리 형수한테서 떨어지지 않는 게 느껴지네요.”구현수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배경원, 요즘 몸이 쑤시면 말해, 그렇게 돌려서 말하지 말고.”배경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감히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이튿날, 임우정은 강진 빌딩의 야외 레스토랑에서 강유빈을 만났다.“유빈 씨.”임우정은 웃으며 계약 해지 협의서를 꺼내 들었다.“사전에 비서를 통해서 연락했었죠. 여기 유빈 씨 사인만 비었어요. 하시죠.”강유빈은 원래도 안색이 안 좋았는데, 지금은 거의 일그러뜨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녀가 가짜 싱가포르 인간에게 수십억을 사기당한 뒤로, 강진은 업계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강명원은 어디를 가도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 화를 강유빈한테 풀었다. 이사회에서 호되게 꾸짖는 것도 모자라 그녀가 맡고 있던 여러 수익 나는 사업도 다시 회수했다. 집안에서도 강유빈은 전전긍긍하며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살았다.이젠 호정 무역도 흐르는 형세에 따라 다른 회사들처럼 이번 기회에 강진과 관계를 청산하려고 계약 파기를 하러 왔던 거였다.강유빈은 이를 악물고 웃는 얼굴의 임우정을 보며 사인펜을 움켜쥐고 어렵게 서명했다.임우정은 체크해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감사해요.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삼일 안에 귀사에서 계약 해지서를 받아 보실 수 있겠고요, 유빈 씨 협조해 줘서 고마워요. 식사는 제가 살게요!”강유빈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사양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나 아직 밥을 얻어먹을 정도는 아니니깐요!”“이렇게 도와주는데 당연히 제가 사야죠.”임우정은 자진해서 계산하고 돌아와서 강유빈을 향해 동방예의지국의 미소를 보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강유빈
그 그림 같은 장면만 보면 그녀들의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수 있을 정도였다.임우정은 눈썹을 찡그렸고 속은 은근히 불편했다.“에이, 우정 씨만 절친이고 간 쓸개 다 빼주면 뭐 해요. 정작 상대방은 좋은 걸 딴 사람이랑 나누는데! 우정 씨, 저기 강서연이랑 옆에 친구가 누군지 모르죠? 오성에 최상그룹 막내딸 최연희예요. 저번에 우리 집에서 자선 파티 열었을 때도 연희 양이랑 서연이가 서로 팔짱을 끼고 와서는 절친이라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서연이가 당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참!”강유빈은 일부러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말을 했다.“우정 씨의 절친한 친구는 이제 저렇게 높은데 연줄을 댔으니, 당신을 예전만큼 생각이나 할까요? 참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죠. 씁쓸하네요.”강유빈은 임우정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속을 뒤집어 놓고 자리를 떴다.임우정의 눈길은 강서연과 최연희를 계속 쫓아갔다. 솔직히 그녀도 약간은 질투가 솟구쳤다. 아이스크림 가게 역시 그녀가 강서연한테 자주 사줬던 단골 가게였다.여자들 사이의 우정은 때로 사랑보다 더 미묘하고 더 쉽게 부서졌다. 나는 너를 절친이라고 대하는데, 너는 나를 그저 친구라고 생각할 때, 좋은 걸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즐길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질투가 임우정의 뇌리로 퍼져갔다.그리고 임우정의 주의력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의 최연희에게 더 많이 꽂혀 있었다....오후 회사. 강서연과 임우정은 탕비실에서 마주쳤고 강서연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면 임우정은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강서연은 평소처럼 커피 한 잔을 타서 건네주면서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언니, 무슨 일 있어요?”임우정은 빙빙 돌려서 말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점심에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직접 말해줬다.“우리를 봤다고요? 봤으면 부르지, 왜 안 불렀어요? 원래 같이 가려고 언니 부르려고 했는데, 자리에 없더라고요.”강서연은 눈웃음을 보이면서 순진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럼 됐어. 설명 안 해줘
임우정 그녀 역시도 본인이 생각이 많은 거면 좋겠다. 하지만 한 번 보면 기억하는 습관은 학교 때부터 익힌 자기 기술이고, 또 얼굴 인식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라 마스크를 썼다 한들 눈매는 변할 수 없기에 틀림없었다.임우정은 생각할수록 찝찝하여 목소리를 낮추며 강서연한테 당부했다.“아무튼, 서연이 너 잘 눈여겨봐 둬. 최상의 막내딸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강서연은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움을 표현했다.“내 말은... 사람을 대할 때 경계심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조심하라고!”“그렇긴 한데요, 언니.”강서연은 한참 머뭇머뭇하다가 말을 이었다.“만약 가짜 최상의 막내딸이라면, 나한테 무슨 목적이 있다고 접근했을까요? 게다가 지난번 자선 파티는 특별히 최연희 양을 위해 마련되었던 거고, 유빈 언니가 직접 신원을 밝혀줬는데. 나를 속인다고 해도 강진 사람들을 갖고 놀 수야 없지 않을까요?”“너의 그 유빈 언니의 정보력을 아직도 그대로 믿냐?”임우정은 실소하며 말했다.“유빈 씨가 사람 잘못 본 게 전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사기꾼한테 당했지.”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이 없었다.“서연아, 난 정말 널 위해 하는 소리야.”임우정은 성격이 시원해서 말도 숨김이 없었다.“서연이 너는 사람이 착하고, 진실하고 정말 다 좋은데, 융통성이 없어. 아무리 최연희 그 사람이 너를 구해 줬다고 해서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간 쓸개 다 빼주지 않아도 된다고.”임우정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너랑 현수 씨와의 관계에서도 그래. 남편이긴 하지만 마음을 통째로 남김없이 다 주지는 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니까,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면 너부터 잘 챙겨. 만에 하나 결혼에 있어 문제라도 생기면 너만 뼈도 못 추릴 수 있어. 그때 가서 혼자서도 잘 버티려면 그래야 해.”“우정 언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강서연은 눈을 번쩍 치켜올려 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송곳같이 느껴져 임우정의 얼굴이 빨개질 정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