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가벼운 기침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지? 연희야, 오성에서 어떤 움직임이 보인다고?”최연희는 구현수를 쳐다보며 말했다.“최근에 둘째 삼촌이 진정을 못 하고 있어. 회사 이사진들과 자꾸 아버지의 꼬투리를 잡는데, 할아버지는 신경도 안 쓰고. 그리고 하는 말이 오빠는 영국에 있으니까 외할아버지 쪽만 챙기고 최상은 신경도 안 쓴다고...”“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형네 할아버지가 믿는다고!”배경원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꾸했고, 구현수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두 번 말해서야 믿지 않겠지만, 그런 거짓말이 몇백몇천 번 반복되면 진짜가 되는 법이잖아. 안 그래?”모두 쥐 죽은 듯 조용했다.“연준 오빠, 이곳에서 몸 조심해야 해야 돼. 작은삼촌뿐만 아니라 지한 오빠도 움직임이 보여. 들리는 소문에 지한 오빠가 위험한 인물들하고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 오빠를 해치려면 가장 클래식한 방식으로 나올 거야. 오빠는 다르잖아, 절대로 저 사람 뜻대로 되게 만들지 말아야지!”“응, 그 정도는 예상해.”최지한은 최진혁의 아들인 만큼 그 둘의 성향은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최문혁은 최씨 가문의 장자임에도 가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할아버지인 회장님한테는 늘 눈엣가시였다. 또한 그는 재혼이라는 풍파를 일으키면서 더더욱 회장님의 눈 밖에 났다. 하여 최근 몇 해는 둘째 최진혁이 영감님 앞에서 한마디 하면 최문혁에게는 늘 한바탕 큰 피해가 닥쳤었다.매서운 눈매를 한 구현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두 부자가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세탁을 해온 사실을 알아냈어.”그는 눈이 더 매서워졌다.“일단 이 사실은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고. 만약 저쪽에서 움직임이 보인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숨은 패야!”최연희는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응. 알겠어.”“언제 오성에 돌아갈 생각이야?”“그건...”최연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일찍 가서 뭐 해. 아직 새언니랑 인사도 못 했는데.”구현수의
전화를 끊은 구현수는 잠깐 마음을 가라앉힌 후 먼저 강서연에게 전화하여 괜찮은지 확인했다.휴대 전화 너머로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여보, 오늘 저녁에 총괄 담당자 두 분이 기어코 바이어한테 식사 대접하겠다지 뭐예요... 어휴, 현수 씨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회사 최대 바이어가 강유빈이잖아요. 난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 괜찮아.”구현수는 강유빈이 그에게 전화했었다는 사실을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약속 장소 어디야? 나한테 주소 보내. 이따가 데리러 갈게.”강서연이 배시시 웃더니 이내 그에게 주소를 보냈다.강유빈이 보낸 주소와 비교해 보니 다행히 같은 주소였다. 처음에는 강유빈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지만 인제 보니 그를 속이진 않은 모양이다.그런데 왜 일부러 전화까지 하면서 구현수더러 식사 자리에 나오라고 한 걸까?구현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그 이유가 뭐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참석하는 게 좋겠다....식사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몇몇 남자들은 강유빈에게 서로 술을 권하며 발림소리를 해댔다.평소 이런 술자리를 싫어했던 강서연은 벌써 슬슬 피곤이 몰려왔다.쉴 새 없이 시간을 확인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1분 1초가 이상하리만큼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술자리는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영업팀과 마케팅팀의 두 총괄 담당자는 서로 끊임없이 옥신각신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핑계를 대고 바람 쐬러 나가려던 그때 강유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다들 잠깐 술잔을 내려놓으시죠!”사람들은 일제히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주목했다.“이따가 한 미스터리한 손님이 오실 겁니다.”강유빈이 강서연을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서연아, 어쨌거나 우린 한 가족이야. 비록 네 남편이 별로이긴 하지만 이미 결혼한 이상 내 제부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 제부도 이런 자리를 많이 경험해 보면 좋잖아, 안 그래?”“뭐라고?”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맛 괜찮은데, 왜?”“입맛에 맞으면 많이 먹어. 먹고 말 좀 아껴!”“너...”강유빈이 두 눈을 부릅떴다.“내가 얼마를 먹든 내가 알아서 해! 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건데. 그리고 네 남편도 뭐라 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 있어?”“아이고, 유빈 씨, 진정해요.”장동민 총괄 담당자가 술잔을 들며 웃었다.“서연 씨가 좋은 뜻으로 많이 드시라고 한 거죠. 자, 이 잔 제가 비우겠습니다.”강유빈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원샷했다.강서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테이블 밑으로 몰래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덤덤한 얼굴로 앉아있는 구현수를 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자책했다.강유빈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구현수를 부른 게 틀림없다. 사실 구현수는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오면 모욕이나 당할 게 뻔하니까... 게다가 이 식사 자리는 지난번 연회처럼 옆문으로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몇 명밖에 없어 대놓고 갈 수도 없었다.“현수 씨.”강서연이 속상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정말 미안해요...”구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집어주었다.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주식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동명 주식, 레이안, 웨스턴 등등...구현수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다들 주식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그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사람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현수 씨도 주식에 대해 알아요?”“하하, 알 리가 있겠어요?”강유빈은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우리가 얘기한 주식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걸요?”“누가 그래!”강서연이 버럭 화를 내며 반박했다.“우리 남편 평소 금융에 관한 뉴스도 많이 보고 여러 나라 언어도 할 줄 알아! 그렇죠? 현수 씨?”구현수가 가볍게 웃었다.“방금 말씀하신 주식들이 그리 핫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
이튿날, 강서연이 회사로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어찌 된 영문인지 알 리 없는 그녀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가 서류 정리를 마치자마자 안이수가 노크하고 들어오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회사에 소문이 쫙 퍼졌어요... 서연 씨 남편 너무 대단한 거 아니에요?”강서연은 순간 멍해졌다.“그게 무슨 소리예요?”“주식 말이에요.”안이수가 휴대 전화를 흔들었다.“지금 난리도 아닌던데. 못 봤어요?”평소 주식에 별로 관심이 없는 강서연이었지만 안이수의 얘기에 바로 구미가 당겼다.구현수가 주식 시장형세를 제대로 맞춘 것이었다!강서연은 갑자기 밀려든 이상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마케팅팀 사람들이 주성 산업 주식을 샀는데 지금 엄청 떨어졌대요.”안이수가 고소해했다.“이젠 팔려고 해도 못 팔 거예요. 역시 우리 이 총괄님이 대단하세요. 아침에 증권거래소에 있는 친구한테 몰래 팔라고 하고 다른 주식을 샀대요... 지금 아마 입이 귀에 걸렸을걸요?”강서연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어지러운 안개 속을 거닐 듯 머리가 복잡했다.‘현수 씨 말이 전부 사실대로 됐다고? 그냥 우연이겠지. 평소 주식 시장에 관심이 있었다니까, 경제 뉴스 같은 거 자주 보면서 형세를 분석했을 거야. 그리 희한할 것도 없어.’이런 생각을 되뇜에도 불구하고 강서연은 자꾸만 뭔가 찜찜했지만 정확히 무엇이 찜찜한지 알 수 없었다.점심시간,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홀로 식당에 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많은 직원이 그녀를 둘러쌌다.“매니저님,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아니에요. 저는...”강서연이 거절할 틈도 없이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어떤 이는 그녀의 점심까지 받아다 주었고 게다가 평소 그녀가 먹던 메뉴보다 몇 배는 더 비싼 메뉴였다.주변에 그녀에 대한 아부와 칭찬의 목소리가 가득했고 어떤 이는 다음 주에 어떤 주식들이 오르는지 대놓고 물어보기도 했다.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강서연은 밥
강유빈은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강명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자, 옆에 있는 어머니를 슬쩍 쳐다보았다.양연은 그녀에게 눈짓하더니 강명원이 보이지 않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말했다.“조심해.”강유빈은 순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그때 강명원이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싸늘한 눈빛에 강유빈은 등골이 오싹했다.“아빠...”강유빈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빠 오늘 일찍 들어오셨네요? 회사에는 아무 일 없죠?”“흥.”강명원이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내 회사에 관심이 많네?”강유빈이 입술을 앙다물었다.“강진 그룹은 우리 집 건데 당연히 걱정해야죠...”“그럼 내가 죽은 후에 누가 회사를 물려받을지도 관심이 많겠네?”강명원이 책상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강유빈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설명했다.“아빠, 오해하셨어요. 전 그런 생각 한 적이 없어요...”“어디서 발뺌이야!”테이블 위의 찻잔이 쨍그랑하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강유빈은 몸을 움츠린 채 주먹을 꽉 쥐었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연도 감히 그를 말리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지금까지 수년간 늘 이러했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강명원이 곧 왕이고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만약 그의 뜻을 거스른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네가 호정 무역회사에서 협력을 논의할 때 많은 사람 앞에서 우리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고 했다면서?”강명원은 그녀를 날카롭게 째려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정말 둘도 없는 효녀야! 내가 아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벌써 내 돈을 욕심내?”“아빠, 제 말 좀 들어보세요...”“듣긴 뭘 들어!”강명원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누군가 그의 자리를 몰래 노리는 걸 가장 싫어했다.“오늘 말 나온 김에 똑바로 얘기할게.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면 나중에 강진 그룹이 네 것이
강유빈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심장도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아빠, 최연희라면... 최씨 가문의 막내딸 맞죠?”“그래.”강명원이 덤덤하게 말했다.“최연희는 올해 금방 18살이 됐고 아직 대학을 가지 않았어. 최씨 가문에서 가장 막내인데다 최연준이 가장 예뻐하는 여동생이야. 최연희랑 가까워지고나서 최연준 앞에서 네 좋은 얘기 몇 마디만 해줘도 최씨 가문에 시집갈 희망이 생기지 않겠어.”“아빠, 제가 뭘 해야 할지 알겠어요!”강유빈이 입술을 꽉 깨물며 잠깐 고민에 잠겼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아가씨의 행방을 알아보게 한 다음 최대한 빨리 파티를 열게요. 자선 파티를 여는 게 가장 좋겠어요. 최씨 가문에서 자선사업을 좋아하잖아요.”“아주 좋아.”강명원이 드디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최연희를 찾아낸 다음에 네가 직접 초대장 써.”“그거야 당연하죠!”“파티는 빨리할수록 좋아. 시간만 길게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알겠어요, 아빠.”강유빈은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강명원의 한마디에 그녀의 기쁨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서연이한테도 알려서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네?”강유빈이 고함을 지르다시피 큰 소리로 말했다.“아빠, 그건...”“왜? 싫어?”강명원이 목청을 높이며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양연도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지난번 그들 세 식구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오성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최연준의 환영 파티에 참석하려 했지만, 문 앞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체면이 깎일 대로 깎였다고 생각한 강명원은 그 후로 양연에게 줄곧 쌀쌀맞게 대했다.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양연은 나서서 강유빈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유빈아, 아빠 말씀 들어.”그녀가 눈짓했다.“그냥 파티일 뿐이야. 서연이 걔는 뭘 해도 너랑 비교조차 안 돼.”강유빈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핏줄이 다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유빈아.”강명원이 가볍게 말했다.“뭐라 해도 서
어차피 그저 자선행사일 뿐이니까...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냈다. 이따가 아무 핑계나 대고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그런데 호텔 돌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아직 연회장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눈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어머, 진짜 왔네?”강유빈이 팔짱을 낀 채 거만하고 우쭐한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녀를 본 순간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오늘 밤 강유빈은 작정이라도 한 듯 예쁘게 꾸미고 왔다. 타이트한 레드 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분위기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그런 그녀와 달리 일반적인 블랙 화이트 원피스 차림의 강서연은 왠지 모르게 초라해 보였다.“강서연.”강유빈이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저녁에 귀한 하객 최연희 양이 온다고 했잖아. 이렇게 입고 오면 우리 강씨 가문의 체면이 뭐가 돼! 창피해 죽겠어, 정말!”“오늘 저녁 파티는 자선 파티라며.”강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자선 파티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라도 부를 거야?”“뭐라고?”“자선 파티의 주제는 자선 행사이지, 최연희 양이 아니야.”강서연이 그녀를 흘겨보았다.“장소에 맞게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해. 너무 화려한 탓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오히려 자선 행사의 본질을 잃을 수가 있어.”화가 난 강유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주변에 손님이 많아 화를 낼 수 없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천한 년 주제에 지금 날 가르치려 들어?”“내가 어찌 감히 언니를 가르치겠어.”강서연이 코웃음을 쳤다.“파티는 언니가 연 거잖아. 난 그냥 언니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러 왔어.”강유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강서연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한 걸음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지금 하객들이 한창 안으로 들어가는 중인데 이 차림으로 들어가려고? 창피하지도 않아?”“그래?”강서연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그냥 갈게.”“거기 서!”강유빈
강서연은 묵묵히 그녀 뒤를 따랐갔고 그렇게 호텔 건물을 지나 지하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컴컴하고 조용했다. 다들 지하 주차장에 가려면 호텔 안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굳이 먼 길을 빙빙 돌아서 이 길로 오진 않았다.강서연은 불길한 예감에 발걸음을 늦추었다.“뭐 해!”강유빈이 앞에서 재촉했다.“빨리 와! 내 차 저 밑에 있어.”“이 길로 내려가서 찾으면 찾을 수 있어?”“내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내가 왜 몰라? 설마 지금 내가 차를 여기까지 가져와서 널 태우길 바라는 거야?”강유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내가 대놓고 호텔 문 앞에서 널 태웠다간 사람들이 지금 네 꼴을 다 볼 거 아니야!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강서연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블랙홀처럼 밑으로 쭉 뻗어있어 끝이 보이질 않았다.계속 앞에서 종종걸음치는 강유빈을 따라가려니 강서연은 버겁기만 했다. 강유빈은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디까지 왔는지 주변에 등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강서연도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습한 곰팡내가 코를 찔러 불안감이 더욱 엄습했다.“언니...”주변이 메아리 소리로 가득 찼다.“여긴 어디야?”잠시 후, 어둠 속에서 강유빈의 날카롭고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네가 가야 하는 곳이야!”순간 가슴이 움찔한 강서연은 등골이 오싹하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가 상황 파악하기도 전에 뭔가에 밀려 튕겨 나가고 말았다.그녀는 비명과 함께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릎을 쿵 부딪쳤다. 곧이어 대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머릿속이 하얘진 강서연은 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겨우 일어나 달려갔다. 철문 너머로 강유빈이 차갑게 웃었다.“동생아, 오늘 저녁 파티는 참석하지 않아도 돼! 이따가 아빠한테 네가 오기 싫어서 안 왔다고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