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강서연이 회사로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어찌 된 영문인지 알 리 없는 그녀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가 서류 정리를 마치자마자 안이수가 노크하고 들어오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회사에 소문이 쫙 퍼졌어요... 서연 씨 남편 너무 대단한 거 아니에요?”강서연은 순간 멍해졌다.“그게 무슨 소리예요?”“주식 말이에요.”안이수가 휴대 전화를 흔들었다.“지금 난리도 아닌던데. 못 봤어요?”평소 주식에 별로 관심이 없는 강서연이었지만 안이수의 얘기에 바로 구미가 당겼다.구현수가 주식 시장형세를 제대로 맞춘 것이었다!강서연은 갑자기 밀려든 이상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마케팅팀 사람들이 주성 산업 주식을 샀는데 지금 엄청 떨어졌대요.”안이수가 고소해했다.“이젠 팔려고 해도 못 팔 거예요. 역시 우리 이 총괄님이 대단하세요. 아침에 증권거래소에 있는 친구한테 몰래 팔라고 하고 다른 주식을 샀대요... 지금 아마 입이 귀에 걸렸을걸요?”강서연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어지러운 안개 속을 거닐 듯 머리가 복잡했다.‘현수 씨 말이 전부 사실대로 됐다고? 그냥 우연이겠지. 평소 주식 시장에 관심이 있었다니까, 경제 뉴스 같은 거 자주 보면서 형세를 분석했을 거야. 그리 희한할 것도 없어.’이런 생각을 되뇜에도 불구하고 강서연은 자꾸만 뭔가 찜찜했지만 정확히 무엇이 찜찜한지 알 수 없었다.점심시간,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홀로 식당에 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많은 직원이 그녀를 둘러쌌다.“매니저님,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아니에요. 저는...”강서연이 거절할 틈도 없이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어떤 이는 그녀의 점심까지 받아다 주었고 게다가 평소 그녀가 먹던 메뉴보다 몇 배는 더 비싼 메뉴였다.주변에 그녀에 대한 아부와 칭찬의 목소리가 가득했고 어떤 이는 다음 주에 어떤 주식들이 오르는지 대놓고 물어보기도 했다.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강서연은 밥
강유빈은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강명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자, 옆에 있는 어머니를 슬쩍 쳐다보았다.양연은 그녀에게 눈짓하더니 강명원이 보이지 않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말했다.“조심해.”강유빈은 순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그때 강명원이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싸늘한 눈빛에 강유빈은 등골이 오싹했다.“아빠...”강유빈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빠 오늘 일찍 들어오셨네요? 회사에는 아무 일 없죠?”“흥.”강명원이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내 회사에 관심이 많네?”강유빈이 입술을 앙다물었다.“강진 그룹은 우리 집 건데 당연히 걱정해야죠...”“그럼 내가 죽은 후에 누가 회사를 물려받을지도 관심이 많겠네?”강명원이 책상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강유빈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설명했다.“아빠, 오해하셨어요. 전 그런 생각 한 적이 없어요...”“어디서 발뺌이야!”테이블 위의 찻잔이 쨍그랑하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강유빈은 몸을 움츠린 채 주먹을 꽉 쥐었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연도 감히 그를 말리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지금까지 수년간 늘 이러했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강명원이 곧 왕이고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만약 그의 뜻을 거스른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네가 호정 무역회사에서 협력을 논의할 때 많은 사람 앞에서 우리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고 했다면서?”강명원은 그녀를 날카롭게 째려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정말 둘도 없는 효녀야! 내가 아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벌써 내 돈을 욕심내?”“아빠, 제 말 좀 들어보세요...”“듣긴 뭘 들어!”강명원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누군가 그의 자리를 몰래 노리는 걸 가장 싫어했다.“오늘 말 나온 김에 똑바로 얘기할게.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면 나중에 강진 그룹이 네 것이
강유빈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심장도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아빠, 최연희라면... 최씨 가문의 막내딸 맞죠?”“그래.”강명원이 덤덤하게 말했다.“최연희는 올해 금방 18살이 됐고 아직 대학을 가지 않았어. 최씨 가문에서 가장 막내인데다 최연준이 가장 예뻐하는 여동생이야. 최연희랑 가까워지고나서 최연준 앞에서 네 좋은 얘기 몇 마디만 해줘도 최씨 가문에 시집갈 희망이 생기지 않겠어.”“아빠, 제가 뭘 해야 할지 알겠어요!”강유빈이 입술을 꽉 깨물며 잠깐 고민에 잠겼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아가씨의 행방을 알아보게 한 다음 최대한 빨리 파티를 열게요. 자선 파티를 여는 게 가장 좋겠어요. 최씨 가문에서 자선사업을 좋아하잖아요.”“아주 좋아.”강명원이 드디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최연희를 찾아낸 다음에 네가 직접 초대장 써.”“그거야 당연하죠!”“파티는 빨리할수록 좋아. 시간만 길게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알겠어요, 아빠.”강유빈은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강명원의 한마디에 그녀의 기쁨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서연이한테도 알려서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네?”강유빈이 고함을 지르다시피 큰 소리로 말했다.“아빠, 그건...”“왜? 싫어?”강명원이 목청을 높이며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양연도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지난번 그들 세 식구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오성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최연준의 환영 파티에 참석하려 했지만, 문 앞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체면이 깎일 대로 깎였다고 생각한 강명원은 그 후로 양연에게 줄곧 쌀쌀맞게 대했다.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양연은 나서서 강유빈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유빈아, 아빠 말씀 들어.”그녀가 눈짓했다.“그냥 파티일 뿐이야. 서연이 걔는 뭘 해도 너랑 비교조차 안 돼.”강유빈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핏줄이 다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유빈아.”강명원이 가볍게 말했다.“뭐라 해도 서
어차피 그저 자선행사일 뿐이니까...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냈다. 이따가 아무 핑계나 대고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그런데 호텔 돌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아직 연회장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눈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어머, 진짜 왔네?”강유빈이 팔짱을 낀 채 거만하고 우쭐한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녀를 본 순간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오늘 밤 강유빈은 작정이라도 한 듯 예쁘게 꾸미고 왔다. 타이트한 레드 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분위기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그런 그녀와 달리 일반적인 블랙 화이트 원피스 차림의 강서연은 왠지 모르게 초라해 보였다.“강서연.”강유빈이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저녁에 귀한 하객 최연희 양이 온다고 했잖아. 이렇게 입고 오면 우리 강씨 가문의 체면이 뭐가 돼! 창피해 죽겠어, 정말!”“오늘 저녁 파티는 자선 파티라며.”강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자선 파티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라도 부를 거야?”“뭐라고?”“자선 파티의 주제는 자선 행사이지, 최연희 양이 아니야.”강서연이 그녀를 흘겨보았다.“장소에 맞게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해. 너무 화려한 탓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오히려 자선 행사의 본질을 잃을 수가 있어.”화가 난 강유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주변에 손님이 많아 화를 낼 수 없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천한 년 주제에 지금 날 가르치려 들어?”“내가 어찌 감히 언니를 가르치겠어.”강서연이 코웃음을 쳤다.“파티는 언니가 연 거잖아. 난 그냥 언니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러 왔어.”강유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강서연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한 걸음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지금 하객들이 한창 안으로 들어가는 중인데 이 차림으로 들어가려고? 창피하지도 않아?”“그래?”강서연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그냥 갈게.”“거기 서!”강유빈
강서연은 묵묵히 그녀 뒤를 따랐갔고 그렇게 호텔 건물을 지나 지하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컴컴하고 조용했다. 다들 지하 주차장에 가려면 호텔 안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굳이 먼 길을 빙빙 돌아서 이 길로 오진 않았다.강서연은 불길한 예감에 발걸음을 늦추었다.“뭐 해!”강유빈이 앞에서 재촉했다.“빨리 와! 내 차 저 밑에 있어.”“이 길로 내려가서 찾으면 찾을 수 있어?”“내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내가 왜 몰라? 설마 지금 내가 차를 여기까지 가져와서 널 태우길 바라는 거야?”강유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내가 대놓고 호텔 문 앞에서 널 태웠다간 사람들이 지금 네 꼴을 다 볼 거 아니야!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강서연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블랙홀처럼 밑으로 쭉 뻗어있어 끝이 보이질 않았다.계속 앞에서 종종걸음치는 강유빈을 따라가려니 강서연은 버겁기만 했다. 강유빈은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디까지 왔는지 주변에 등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강서연도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습한 곰팡내가 코를 찔러 불안감이 더욱 엄습했다.“언니...”주변이 메아리 소리로 가득 찼다.“여긴 어디야?”잠시 후, 어둠 속에서 강유빈의 날카롭고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네가 가야 하는 곳이야!”순간 가슴이 움찔한 강서연은 등골이 오싹하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가 상황 파악하기도 전에 뭔가에 밀려 튕겨 나가고 말았다.그녀는 비명과 함께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릎을 쿵 부딪쳤다. 곧이어 대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머릿속이 하얘진 강서연은 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겨우 일어나 달려갔다. 철문 너머로 강유빈이 차갑게 웃었다.“동생아, 오늘 저녁 파티는 참석하지 않아도 돼! 이따가 아빠한테 네가 오기 싫어서 안 왔다고 할게!”“
강서연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쿵쾅거렸고 머릿속도 하얘졌다.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한 어린 소녀의 목소리 같았다.이 소녀는 누구고, 또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걸까?“어휴, 이 자물쇠 열기가 너무 어려워요.”소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저기... 뒤로 좀 물러서요. 제가 돌로 자물쇠를 부숴볼게요.”강서연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소녀의 말대로 구석 쪽으로 몸을 피했다.소녀가 문을 부수는 소리가 지하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쾅쾅하고 두드릴 때마다 심장도 함께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잠시 후 덜컹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자물쇠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문이 열렸지만 강서연은 몸이 경직되어 손발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이봐요, 언니?”아담한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다.“빨리 안 가고 뭐 해요!”“그쪽은...”“얼른 가요!”강서연이 말을 하기도 전에 소녀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지금 이 상황에 강서연은 정신을 부여잡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소녀를 따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문 앞에 죽은 쥐들과 야구 방망이, 그리고 큰 돌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들로 쥐들을 죽인 모양이다.소녀의 손이 작고 가늘었지만 한없이 따뜻했고 절망 속의 마지막 지푸라기 같았다. 소녀의 손을 꽉 잡은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강서연은 소녀를 따라 미친 듯이 뛰었다. 그렇게 어둠 속을 뛰쳐나와 드디어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됐어요. 이젠 안전해요.”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 복도를 거닐었다. 소녀는 그녀에게 히죽 웃더니 그녀를 잡고 엘리베이터에 탄 후 맨 꼭대기 층을 눌렀다.강서연은 그제야 소녀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눈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어찌나 달콤한지 알록달록한 마시멜로 같았다. 그리고...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낯이 익었다.강서연은 멍한 얼굴로 소녀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봤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질
“괜찮아요, 그냥 앉아요.”최연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여긴 저의 방이고 이분들은 저의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예요. 언니도 파티에 참석하러 왔죠? 그런데 지금 이 모습으로 참석하기에는 좀...”강서연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일단 샤워한 다음에 다시 예쁘게 꾸며요. 여기 드레스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마음대로 골라봐요.”강서연은 미안했지만, 최연희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샤워를 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샤워해서 조금 전의 두려움과 더러움을 씻어내고 싶었다.“걱정하지 말아요. 언니를 해치려 했던 나쁜 여자는 절대 여기까지 찾아오지 못해요.”“그거 어떻게 알아요?”강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최연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언니 강씨 가문의 딸 강서연 맞죠?”강서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놀라지 말아요.”최연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강씨 가문의 큰딸이 절 위해 준비한 파티인데 오기 전에 당연히 일일이 다 조사해 봤죠.”강서연도 최연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언니, 얼른 가서 씻어요.”최연희가 해맑게 웃으며 목욕 타월을 그녀에게 건넸다.“전 밖에서 언니가 입을 드레스를 고르고 있을게요. 이 파티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예요.”...자선 파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오늘의 주인공 최연희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강명원은 가끔 강유빈에게 눈빛으로 경고했다. 강유빈도 답답한 나머지 여러 번이나 전화해봤지만 연락을 받은 사람은 최연희가 이미 파티 장소에 도착했다는 대답뿐이었다.“그런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요. 대체 어디 있어요?”강유빈이 휴대 전화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아무 데도 없다고요!”“진정하세요, 강유빈 씨. 중간에서 소통에 문제가 있었나 봐요...”“그럼, 당장 가서 해결해요. 오늘 아가씨가 오지 않는다면 저 아빠한테 죽어요!”강유빈이
“당연히 되죠!”강유빈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허락했다.‘절친을 데려온 게 뭐가 큰일이라고. 게다가 아가씨의 절친이라면 분명 재벌 집 딸일 테고? 오성 4대 가문의 어느 가문일까? 만약 아가씨의 절친과도 친해지면 나야 좋지, 앞으로 인맥이 더 생기는 거니까!’강유빈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더니 최연희 옆으로 다가가 친한 척했다.“아가씨, 친구분 지금 어디 있어요? 괜찮다면 제가 당장 사람을 보내 모셔 오라고 할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가씨. 이 일은 저한테 맡겨요. 아가씨 친구분을 꼭 안전하게 모셔올게요.”“그럴 필요까진 없어요.”최연희가 덤덤하게 웃었다.“제 친구가 저랑 함께 와서 지금 위층에 있어요. 이번 파티는 아무래도 강씨 가문에서 주최하는 거라 데려와도 주최자의 허락을 맡고 데려와야죠.”“아가씨도 참, 별말씀 다 하시네요.”강유빈이 히죽 웃더니 몇몇 종업원에게 분부했다.“지금부터 연희 아가씨의 분부라면 모두 따르도록 해. 그리고 이따가 아가씨의 친구분도 주최석으로 안내해.”“유빈 씨.”최연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유빈 씨랑 유빈 씨 부모님은 메인 테이블에 안 앉아요? 그래도 돼요?”“안 될 게 뭐가 있어요.”양연이 나서서 말을 가로챘다.“오늘 밤 아가씨랑 아가씨 친구분을 초대할 수 있어서 얼마나 영광인지 몰라요. 이 누추한 호텔도 빛이 다 난다니까요!”그저 듣기 좋은 소리는 다 할 기세였다.“아가씨, 친구분 그만 기다리게 하고 얼른 오라고 해요.”“알겠어요.”최연희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파티장의 문이 열렸고 뭇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 다들 최씨 가문 아가씨의 절친이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한 눈치였다.강유빈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목을 빼 들었다. 그런데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강서연?!강유빈은 순간 머리가 돌에 맞은 것처럼 멍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강명원과 양연의 낯빛도 확연히 어두워졌다. 강서연을 쳐다보던 그들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최연희가 말한 절친이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