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후.소한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어스레한 촛불도 거의 다 타버려서 불빛이 꺼질락 말락 했다.문밖에서 낮은 소리의 통보가 들려왔다.“장군님, 김 낭자가 떠났습니다.”그녀는 정말로 조금도 기다리기 싫어하군.“알았어.”소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꺼질락 말락 하는 촛불이 그의 냉담한 옆모습을 비추더니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졌다.머릿속에는 모두 그녀가 아무런 미련 없이 결연하게 떠나는 모습이다. 언제부터였나?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소한은 도무지 알 수 없다.분명히, 그녀는 그를 따라다니기를 가장 좋하했는데...그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 식지에 멈췄다. 거기에는 긴 흉터가 있다. 그 흉터는 2년 전에 전쟁터에 갔을 때 적의 칼에 베인 것이다.그가 빨리 반응하지 않았다면 손이 잘렸을 것이다.2년 전에 일도 너무 오래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그녀는?그녀가 자기를 좋아하고 쫓아다니는 일도 너무 오래 전의 일이 아닌가?그의 마음이 갑자기 당황해졌다.소한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촛불이 드디어 꺼졌고, 침울했던 그의 얼굴도 어둠 속에 잠겼다.김단은 혼자서 정암을 데리고 떠난 것이 아니다.소한은 도망치는 산적들을 아직 다 잡지 못해, 김단이 위험할까 봐 열 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그녀와 동행하라 했다. 김단은 혼자서 정암을 데리고 돌아간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거절하고 싶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다니면 오히려 너무 눈에 띈다.하지만, 소한은 그녀에게 두 가지 선택을 줬다.하나는 열 명의 병사가 그녀를 보호해서 한양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당우리의 일을 마치고 그랑 같이 돌아가는 거였다. 김단은 당연히 첫 번째를 선택했다.관청과 산적이 결탁하여 만들어 낸 일이어서 많은 것이 연루되었다. 소한이 일을 다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면 어느 세월인지도 모른다.정암의 시신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다.오작이 전문적으로 관을 싣는
그 병사는 놀라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다른 한 병사가 이 광경을 보고 눈썹을 가라앉혔다.“이제 봄이 됐으니, 뱀이랑 벌레들이 나와서 먹을거리를 찾는 것 같소, 별일 아니오.”이 말을 듣자, 모두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회수했다.김단도 살짝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달빛 아래서 그 작은 뱀 머리를 봤다. 뱀 머리는 길가에 잘렸는데도, 계속 움직이려고 애쓰고 있다.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예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불안했다.다행히도, 뒤에 이틀은 아무 탈 없이 순조로웠다.병사들은 행군하는데 습관 되어, 매일 두 시간만 자고, 김단도 잘 보살폈다.하지만 그날 저녁의 불안감은 계속 김단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잘린 뱀의 머리처럼 가끔씩 꿈틀거리며 움직이려 했다.그녀의 불안을 증명하려는 듯, 이튿날 저녁에 길이 막혔다.길 앞에 놓여있는 큰 돌들을 보고, 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옆에 있는 누군가 의아했다.“이렇게 큰 돌들이 왜 길 한복판에 있지?”병사 한 명이 길옆에 있는 산꼭대기를 쳐다봤다.“산길이 미끄러져서 돌이 굴러떨어진 모양이오. 몇 사람은 나랑 가서 돌을 옮기고. 나머지는 남아서 김 낭자를 보호하시오.”“잠깐만!”김단이 제지했다.“그 돌들은 굴러떨어졌다 하기보다는 사람이 일부러 거기에 옮긴 거 같소.”돌들이 굴러떨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딱 맞게 길을 막았다.병사들은 김단의 말을 듣고, 바로 경각했다. 이때, 김단 옆에 서 있던 병사가 갑자기 김단의 몸에 피를 토했다.갑자기 온기가 느껴지자 김단은 온몸이 굳어 고개를 돌려봤다. 그때 병사의 뒤에서 누군가 그의 목을 베었고, 병사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그녀의 몸에 튀었다.“자객이다!”누군가 놀라서 소리쳤다. 산림중에서 몇 사람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상대방의 사람은 그들보다 적지만, 갑자기 쳐들어오는 바람에 이기는 추세였다.김단은 마차에 앉아 가슴이 조여왔다. 주위에서 계속 피 튀기는 것을 보니, 도망간 산적들이 다
김단은 얼굴에 아직 병사들의 피가 묻은 산적을 보고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 그러다 뒤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다.이 상황을 본 산적은 더 크게 웃었다.깜깜한 밤에 풍기는 피비린내는 사람을 어지럽게 했다.김단은 아주 놀란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같이 따라가면 날 죽이지 않을 것이오?”김단이 이렇게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산적은 더욱 득의양양했다.“당연하지, 네가 말만 잘 들으면.”김단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말 듣겠소, 근데 내가 발목을 다친것 같소.”이 말을 듣자, 산적은 김단의 발목을 봤다. 조금 전에 무언가에 걸려서 넘어진 거 같아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그는 김단 얼굴에 쓰여 있는 두려움을 다시 보고는 약한 여자일 뿐이고 병기도 없는데 뭐 큰 일이 있겠냐고 생각했다.그래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김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김단 역시 무섭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산적을 잡은 순간, 김단은 순간 힘을 써 산적을 그녀 쪽으로 당겼다.그 산적은 중심을 잃고 김단의 옆에 세게 넘어졌다.그가 일어서기 전에, 김단은 이미 날카로운 비녀로 산적의 목을 찔렀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산적은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한 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산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섯째야, 어디에 있어?”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김단은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옆에 이미 죽은 산적을 보더니,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산적을 그녀 몸 위에 올렸다.그러고는 놀랐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그녀의 목소리는 산적의 시선을 끌었다.몸이 웅장한 산적 한 명이 빠르게 걸어왔다.그가 ‘여섯째’라 부르는 사람이 김단의 몸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리 급해? 빨리해, 넷째 형이 기다리고 있어!”하지만, ‘여섯째’는 움직이지 않았고, 김단은 계속 울면서 발버둥 쳤다.할 수 없어, 그 산적은 다가가서 ‘여섯째’를 잡아당겼다.
산적은 힘으로 억지로 그녀의 팔을 끊어내려는 듯했다.김단은 아픔을 참으면서 죽을 힘을 다해 손을 비틀었다.검이 산적의 몸속에서 비틀기 시작했다.“아!”산적은 아파서 소리 질렀고, 김단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김단도 아파서 고함지르기 시작했다.그녀의 고함은 아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디어,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검으로 산적의 몸속에서 한 바퀴 돌렸다.그 산적은 장이 끊어졌는지, 피를 토하더니 힘이 빠져 꼿꼿하게 뒤로 넘어갔지만, 검은 여전히 김단 손에 쥐어져 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피가 튀겨져서 눈도 못 뜰 정도다. 귓가에 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다섯째, 여섯째!”또 산적이다!김단은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조금 남아 있는 이성이 그녀가 더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있다.하지만, 조금 전에 고함이 그녀의 마지막 힘을 다 써버렸고, 팔도 아파서 얼굴에 있는 피도 닦지 못했다.이렇게, 김단은 넘어지고 말았다.그 산적은 두 명밖에 남지 않은 형제가 김단의 손에 죽은 것을 보고 바로 검을 들어 김단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산림이 너무 어두워져 산적은 정확히 찌를 수 없었다.검은 김단의 쇄골 밑을 찔렀다.격렬한 아픔이 전해지자, 김단은 드디어 손에 힘을 되찾고, 검을 쥐고 산적을 향해 휘둘렀다.산적은 팔에 부상을 입어 급하게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검은 김단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김단은 일어서려 했지만, 검이 어깨를 관통된 탓인지,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김단이 힘이 빠진 모습을 보자, 산적은 오히려 웃으며 눈에 흉악한 기운을 드러냈다.“너를 죽일 것이다!”산적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공격했다. 김단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산적이 발로 그녀의 검을 걷어차고는 그녀 몸 위에 앉아서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망할 것! 내가 너 죽이고, 네 남자 시신과 함께 성문에 버릴 것이다! 너희들 시신에 채찍질을 백 번 해야 내 분을 풀 수 있을 것이다!”먼저 집터가 없어지고, 오늘은 또 형
조선의 어느 음력 12월 28일.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오전에 시작했던 빨래를 간신히 마친 김단은,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파랗게 질린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세답방의 나인에게 불려갔다.“어서 가보게. 진산군댁에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나인의 말에 김단은 자리에 얼어붙었다.진산군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한때 그녀도 그 댁의 귀한 여식으로 15년을 자랐었다. 3년 전, 자기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정2품 진산군댁의 안주인인 정부인 임씨와 같은 해에 출산했던 유모는 임종 직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자기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김단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부부가 자신의 친딸, 임원을 상봉한 것에 감격스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녀와 부녀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었다.진산군은 안색이 어두워진 김단에게 앞으로도 이 집안의 여식으로 남아 임원의 언니로서 살아가도 좋다고 했다. 임씨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하겠다고 약조했다.하나, 궁궐에 들어 공주자가의 유리그릇을 깨트린 임원을 발견한 부부는, 임원의 몸종이 김단을 모함할 때조차 임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수양딸이었던 김단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공주는 분에 겨워 그녀를 세답방의 무수리로 쫓아냈으나, 한때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임원의 옆에 서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그날, 김단은 그들이 자신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그 댁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나인의 독촉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세답방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친 문 쪽에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그 목소리에 김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전 무감각해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은 익숙한 목소리에 활력을 얻은 듯 천천히 뛰었다.그녀는 천천히 마차 안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 호국 장군이 된 그녀의 옛 정혼자, 소한이다. 그녀는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장군님이시군요.”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한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향했다. “낭자, 진산군댁에 가는 길이었소?”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소한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는 항상 곁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여인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집안에서 정해준 혼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견뎠었다. 가끔은 지치지 않고 떠드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떡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그 순간조차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던 그녀였다. 떡으로 입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반 시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활달했던 여인이었다. 못 본 사이, 김단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처럼 떠들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소한은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냉랭하게 말했다. “마침, 궐에 들던 길이었소. 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시오.”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가 한마디 더 했다. “다쳤으면 무리하지 마시오. 본인은 몰라도, 그 댁 큰 마님께서 속상해할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조모님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무수리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조모님께서 중전마마께 간청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돌아온 그녀를 보게 되면, 조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 여긴 김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 장군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가까이선 본 소한은 3년 전과 달리 키가 훌쩍 커져 있었고 체격도 다부져졌다.최근 전쟁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도 전
김단이 전에 묵었던 별당은 매화당이었다.정원에 무수한 매화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꽃샘추위가 찾아올 즈음 핀 매화꽃들은 초봄까지 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매화라는 소리에 진산군은 조선 팔도로 사람을 보내 매화나무를 구해왔고 그 종류는 다양했다. 그 후로 매년 수백 냥의 은자를 들여가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나무를 극진히 돌봤다. 하지만 매화당에 핀 매화꽃이 아름답다는 임원의 말 한마디에 매화당은 곧 임원의 별당이 되었다.그 순간에는 자기 별당을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이 집안의 친딸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었다. 이 집안의 물건과 사람들은 전부 임원의 것이었다.김단, 그녀야말로 남의 자리를 꿰찬 외부인이었다. 길을 안내하던 몸종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씨를 모셨던 몸종이 혼인하여 출가하는 바람에 마님께서 쇤네를 아씨께 보내셨습니다. 쇤네는 숙희라 하옵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쇤네를 불러 말씀하시면 됩니다.”숙희는 통통한 볼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단은 그녀가 눈에 익었다.“혹 전에 오라버니를 모시지 않았더냐?”숙희가 놀란 듯 답했다.“쇤네를 알아보시겠습니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예전에 임학의 외별당에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임학의 몸종을 자기에게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분명 3년 전만 해도 임학은 그녀가 임원을 해치려 한다고 오해하며 그녀에게 적대심을 품었다.그런 사람의 몸종을 붙인 거로 보아, 감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새로 안내받은 별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연꽃이 활짝 피어 꽤 아름다웠을 테지만, 지금은 연꽃이 다 지고 시든 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다행히 실내에 불을 지핀 덕에 따뜻했다.미리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둔 숙희는 김단의 목욕을 돕기 위해 나섰으나, 김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하면
임원이 선의로 건넨 말을 날카롭게 받아치는 김단을 본 임학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말에 씨가 있구나. 몸에 상처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뭣 하러 숨긴 것이냐?”그녀가 미리 말만 했어도 임학은 내의원에 들러 약을 받아왔을 것이다.“도련님께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오라버니라 칭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분개한 임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 집에서 어릴 때부터 네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세답방에 과연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었기에 이리도 다친 것이냐?”그의 말에 김단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천천히 끌어내린 그녀도 서늘하게 대꾸했다.“처음에는 반항도 하였지요. 도련님 말씀처럼 세답방 나인들은 소인의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 그들의 수법도 점점 다양해지더군요. 깊이 잠든 사이 차가운 물을 부어버린다거나, 밥을 먹을 때 남들은 국을 퍼가지만 소인에겐 하수구 물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빨래한 옷들을 뒷간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자신들의 일을 소인에게 떠넘기기도 했더이다.”임학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궁마마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소인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저항도 하지 않게 되었고 침구가 젖으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하수구 물이라도 먹었습니다. 한 번은 상궁마마께서 하도 심하게 구타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 진산군댁 수양딸이라는 신분 덕에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요. 그 뒤론 전처럼 심한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깜짝 놀란 임학의 표정에 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혹 소인이 못 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그런 고초를 당했다고 여기신 겁니까?”“괴로워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분을 가진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괴로워할지언정, 소인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분들이라는 거 잘 알고 있나이다. 어쩌면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은 게 이 댁 아씨가 아니라 소인이라 안도하셨을 수도 있겠지요.”임학은 자신을
산적은 힘으로 억지로 그녀의 팔을 끊어내려는 듯했다.김단은 아픔을 참으면서 죽을 힘을 다해 손을 비틀었다.검이 산적의 몸속에서 비틀기 시작했다.“아!”산적은 아파서 소리 질렀고, 김단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김단도 아파서 고함지르기 시작했다.그녀의 고함은 아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디어,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검으로 산적의 몸속에서 한 바퀴 돌렸다.그 산적은 장이 끊어졌는지, 피를 토하더니 힘이 빠져 꼿꼿하게 뒤로 넘어갔지만, 검은 여전히 김단 손에 쥐어져 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피가 튀겨져서 눈도 못 뜰 정도다. 귓가에 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다섯째, 여섯째!”또 산적이다!김단은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조금 남아 있는 이성이 그녀가 더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있다.하지만, 조금 전에 고함이 그녀의 마지막 힘을 다 써버렸고, 팔도 아파서 얼굴에 있는 피도 닦지 못했다.이렇게, 김단은 넘어지고 말았다.그 산적은 두 명밖에 남지 않은 형제가 김단의 손에 죽은 것을 보고 바로 검을 들어 김단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산림이 너무 어두워져 산적은 정확히 찌를 수 없었다.검은 김단의 쇄골 밑을 찔렀다.격렬한 아픔이 전해지자, 김단은 드디어 손에 힘을 되찾고, 검을 쥐고 산적을 향해 휘둘렀다.산적은 팔에 부상을 입어 급하게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검은 김단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김단은 일어서려 했지만, 검이 어깨를 관통된 탓인지,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김단이 힘이 빠진 모습을 보자, 산적은 오히려 웃으며 눈에 흉악한 기운을 드러냈다.“너를 죽일 것이다!”산적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공격했다. 김단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산적이 발로 그녀의 검을 걷어차고는 그녀 몸 위에 앉아서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망할 것! 내가 너 죽이고, 네 남자 시신과 함께 성문에 버릴 것이다! 너희들 시신에 채찍질을 백 번 해야 내 분을 풀 수 있을 것이다!”먼저 집터가 없어지고, 오늘은 또 형
김단은 얼굴에 아직 병사들의 피가 묻은 산적을 보고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 그러다 뒤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다.이 상황을 본 산적은 더 크게 웃었다.깜깜한 밤에 풍기는 피비린내는 사람을 어지럽게 했다.김단은 아주 놀란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같이 따라가면 날 죽이지 않을 것이오?”김단이 이렇게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산적은 더욱 득의양양했다.“당연하지, 네가 말만 잘 들으면.”김단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말 듣겠소, 근데 내가 발목을 다친것 같소.”이 말을 듣자, 산적은 김단의 발목을 봤다. 조금 전에 무언가에 걸려서 넘어진 거 같아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그는 김단 얼굴에 쓰여 있는 두려움을 다시 보고는 약한 여자일 뿐이고 병기도 없는데 뭐 큰 일이 있겠냐고 생각했다.그래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김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김단 역시 무섭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산적을 잡은 순간, 김단은 순간 힘을 써 산적을 그녀 쪽으로 당겼다.그 산적은 중심을 잃고 김단의 옆에 세게 넘어졌다.그가 일어서기 전에, 김단은 이미 날카로운 비녀로 산적의 목을 찔렀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산적은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한 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산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섯째야, 어디에 있어?”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김단은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옆에 이미 죽은 산적을 보더니,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산적을 그녀 몸 위에 올렸다.그러고는 놀랐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그녀의 목소리는 산적의 시선을 끌었다.몸이 웅장한 산적 한 명이 빠르게 걸어왔다.그가 ‘여섯째’라 부르는 사람이 김단의 몸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리 급해? 빨리해, 넷째 형이 기다리고 있어!”하지만, ‘여섯째’는 움직이지 않았고, 김단은 계속 울면서 발버둥 쳤다.할 수 없어, 그 산적은 다가가서 ‘여섯째’를 잡아당겼다.
그 병사는 놀라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다른 한 병사가 이 광경을 보고 눈썹을 가라앉혔다.“이제 봄이 됐으니, 뱀이랑 벌레들이 나와서 먹을거리를 찾는 것 같소, 별일 아니오.”이 말을 듣자, 모두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회수했다.김단도 살짝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달빛 아래서 그 작은 뱀 머리를 봤다. 뱀 머리는 길가에 잘렸는데도, 계속 움직이려고 애쓰고 있다.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예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불안했다.다행히도, 뒤에 이틀은 아무 탈 없이 순조로웠다.병사들은 행군하는데 습관 되어, 매일 두 시간만 자고, 김단도 잘 보살폈다.하지만 그날 저녁의 불안감은 계속 김단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잘린 뱀의 머리처럼 가끔씩 꿈틀거리며 움직이려 했다.그녀의 불안을 증명하려는 듯, 이튿날 저녁에 길이 막혔다.길 앞에 놓여있는 큰 돌들을 보고, 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옆에 있는 누군가 의아했다.“이렇게 큰 돌들이 왜 길 한복판에 있지?”병사 한 명이 길옆에 있는 산꼭대기를 쳐다봤다.“산길이 미끄러져서 돌이 굴러떨어진 모양이오. 몇 사람은 나랑 가서 돌을 옮기고. 나머지는 남아서 김 낭자를 보호하시오.”“잠깐만!”김단이 제지했다.“그 돌들은 굴러떨어졌다 하기보다는 사람이 일부러 거기에 옮긴 거 같소.”돌들이 굴러떨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딱 맞게 길을 막았다.병사들은 김단의 말을 듣고, 바로 경각했다. 이때, 김단 옆에 서 있던 병사가 갑자기 김단의 몸에 피를 토했다.갑자기 온기가 느껴지자 김단은 온몸이 굳어 고개를 돌려봤다. 그때 병사의 뒤에서 누군가 그의 목을 베었고, 병사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그녀의 몸에 튀었다.“자객이다!”누군가 놀라서 소리쳤다. 산림중에서 몇 사람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상대방의 사람은 그들보다 적지만, 갑자기 쳐들어오는 바람에 이기는 추세였다.김단은 마차에 앉아 가슴이 조여왔다. 주위에서 계속 피 튀기는 것을 보니, 도망간 산적들이 다
두 시간 후.소한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어스레한 촛불도 거의 다 타버려서 불빛이 꺼질락 말락 했다.문밖에서 낮은 소리의 통보가 들려왔다.“장군님, 김 낭자가 떠났습니다.”그녀는 정말로 조금도 기다리기 싫어하군.“알았어.”소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꺼질락 말락 하는 촛불이 그의 냉담한 옆모습을 비추더니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졌다.머릿속에는 모두 그녀가 아무런 미련 없이 결연하게 떠나는 모습이다. 언제부터였나?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소한은 도무지 알 수 없다.분명히, 그녀는 그를 따라다니기를 가장 좋하했는데...그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 식지에 멈췄다. 거기에는 긴 흉터가 있다. 그 흉터는 2년 전에 전쟁터에 갔을 때 적의 칼에 베인 것이다.그가 빨리 반응하지 않았다면 손이 잘렸을 것이다.2년 전에 일도 너무 오래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그녀는?그녀가 자기를 좋아하고 쫓아다니는 일도 너무 오래 전의 일이 아닌가?그의 마음이 갑자기 당황해졌다.소한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촛불이 드디어 꺼졌고, 침울했던 그의 얼굴도 어둠 속에 잠겼다.김단은 혼자서 정암을 데리고 떠난 것이 아니다.소한은 도망치는 산적들을 아직 다 잡지 못해, 김단이 위험할까 봐 열 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그녀와 동행하라 했다. 김단은 혼자서 정암을 데리고 돌아간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거절하고 싶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다니면 오히려 너무 눈에 띈다.하지만, 소한은 그녀에게 두 가지 선택을 줬다.하나는 열 명의 병사가 그녀를 보호해서 한양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당우리의 일을 마치고 그랑 같이 돌아가는 거였다. 김단은 당연히 첫 번째를 선택했다.관청과 산적이 결탁하여 만들어 낸 일이어서 많은 것이 연루되었다. 소한이 일을 다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면 어느 세월인지도 모른다.정암의 시신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다.오작이 전문적으로 관을 싣는
김단은 그제야 핏물이 가득한 대야를 들고 시체 안치실에서 나갔다.그녀는 대야 안의 물을 모두 뒤뜰 화단에 있는 흙에 버리고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물에서 다시 물을 떠서 대야를 씻었다.그녀는 소한이 자신 뒤에 따라온 것을 알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소한은 또한 알았다. 분명히 그녀가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고개를 한 번도 돌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옆에서 그녀가 대야와 손수건을 깨끗이 씻고 돌아서기를 기다렸다.그는 그녀가 몸을 돌리면 그를 못 본 척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그를 무시했다. 그녀의 눈빛이 그를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를 무시했다.그는 김단이 그의 옆을 지나칠 때 드디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놔요!”그녀의 극히 냉담한 소리가 들려왔다.소한은 눈썹이 내려앉고, 그녀의 차가운 옆 모습을 보더니 믿기지 않은 듯 물었다.“날 원망하는 것이오?”그가 정암을 구하지 못했다고 원망하는 건가?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는 이미 정암에게 안전한 곳을 찾아서 숨으라 했다!자기도 정암이 왜 갑자기 자기 뒤에 나타났는지 모른다!그는 정암을 구하기 위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당우리에 달려갔고, 그곳에서 산적들의 검에 의해 죽을 뻔했다!자기도 어깨, 등, 가슴에 모두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세 명의 심복 중 두 명이 죽었고, 한 명 역시 왼팔을 잃어 폐인이 되어 그도 마음이 아프다!하지만, 그녀는 관심 어린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정암의 죽음이 그의 탓이라 생각한다.김단은 여전히 앞을 보면서 소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요. 정암이 주동적으로 임무를 맡겠다고 했고, 저도 소 장군이 죽을힘을 다해 정암을 데려온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그녀는 소한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정암의 죽음이 그녀 탓이라 생각한다.만약, 그날 그녀가 너무 감동 받아 그에게 '그가 포
관아의 시체 안치실에는 열 몇구의 시신이 놓여 있다.소한이 도착했을 때, 김단은 정암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 있었다.보고하는 사람은 그녀가 난리 치고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난리 치기는커녕 매우 조용했다.그녀는 물 한 대야를 옆에 놓고 손수건을 적시고 정암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조금씩 닦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암의 얼굴이 깨끗해졌다.김단은 손수건을 씻고 다시 정암의 손을 닦았다.“정암 부모님께 정암의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그녀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지만, 소한은 그녀가 자기에게 한 말인지 알아들었다.그는 눈썹이 내려앉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암을 데리고 한양에 간다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오!”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돼 있으면 시신이 어디에 묻는지는 개의치 말아야 하듯이 이 갑옷을 입는 순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야 한다.정암은 그들이 그를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하물며, 지금 막 봄이어서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질주해서 달려와도 꼬박 5일이나 걸렸는데, 이렇게 시신을 싣고 간다면 밤낮 가리지 않고 계속 달려도 10일 정도는 걸려야 한양에 도착할 것이다. 10일이면 정암의 시신은 썩었을 것이다.정암의 부모님께 아들의 시신이 썩고 구더기가 난 모습을 보게 할 바에는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김단은 세심하게 정암 손가락 세에 있는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무슨 대수롭지 않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저는 소 장군이 뭘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이미 오작에게 물었습니다. 육계, 서미초 등을 갈아서 시신에 바르면 단기간에는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소한은 눈썹이 찌그러지더니 오작을 쳐다봤다.오작은 고개를 끄덕였다.“거기다 관 내에 석회를 한층 더 깔면 시신은 반달 정도 썩지 않을 것입니다.”반달이면 그녀가 한양에 도착하기에 충분하다.소한은 김단의 성격을 너무 잘 안다. 그녀가 하겠다는 일은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그래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럼
“정암...”김단은 작은 소리로 불렀다. 목소리는 가볍고 가늘어서 혹여나 정암을 깨울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그를 깨우고 싶었다!그래서 그녀는 다시 좀 큰 소리로 불렀다.“정암, 저에요, 내가 왔어요.”말 등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그녀는 더 큰 소리로 불렀고, 심지어 정암을 흔들기 시작했다.“정암, 날 놀라게 하지 말고 일어나 봐요!”그러나 정암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영원히 일어날 수 없다.김단이 정암을 너무 흔들어 말에서 떨어지려 하자, 누군가 김단 뒤에 나타나, 그녀를 안았다.“정암은 죽었어!”김단은 믿지 않고 발버둥 치며 정암을 깨우려 했다.하지만, 김단 뒤에 있는 사람은 그녀를 계속 뒤로 끌고 갔다.“정암은 죽었어! 죽었다고!”죽었다...김단은 온몸이 굳었다. 그녀는 정암이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을 때, 한 병사가 급히 다가가 그녀를 안전하게 옮긴 장면을 봤다. 말 등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생기도 없었다.죽었다고?조모처럼 자기를 버린 건가?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김단은 정암의 꼭 감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기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그녀는 드디어 정암이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이때, 뒤에서 익숙한 향기가 다시 전해오자, 김단은 멍하더니 뒤를 돌아봤다. 소한이다.아니야!김단은 소한 몸을 수색하면서 말했다.“돌려주세요! 돌려줘!”그녀가 정암에게 준 향낭의 향기다. 그녀가 직접 고른 향료여서 그녀가 제일 익숙하다. 향낭이 왜 소한에게 있는 거지? 소한은 그 향낭을 가질 자격이 없다! 향낭은 정암의 것이다. 그녀가 정암에게 선물한 것이다!그녀는 소한의 옷을 마구 잡아당기면서도 그의 몸에도 상처투성인 것을 보지 못한 듯싶다.그 산적들은 극악무도한 놈들이고 심지어 소한을 몇 차례 동안 공격했는데, 그는 무사할 수가 없다.하지만, 김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는 소한이 없다.그녀는 소한의 상처를
김단은 사실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부대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며칠 동안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왔다. 소한이 어젯밤 정암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온 것이다!하지만… 부대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녀는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이 수없이 부정했지만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진실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부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그녀는 정암이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달려올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부대도 멈춰 섰다.김단은 놀라 부대의 가장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그림자가 햇빛을 등지고 서 있어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붉게 보였다.저건…소한?김단은 믿을 수가 없었다.김단의 기억 속 소한은 항상 활기차고 당당했는데, 지금은 매우 지쳐 보였다.설마, 진 것인가?소한조차 그 산적들을 이기지 못했단 말인가?그렇다면, 정암은? 김단은 소한 뒤에 있는 부대를 바라보았다.부대원들 모두 소한처럼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다.정암도 다쳤을까?다른 사람들처럼 정암도 피로 얼굴이 엉망이 되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김단은 정확히 볼 수 없었고, 부대가 계속 멈춰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그제야 앞에 있던 병사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정암은 없었다.김단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소한의 곁을 지나갈 때 익숙한 향기가 맡아졌지만, 김단은 애써 무시했다.그녀는 소한을 쳐다보지 않고 계속해서 부대 안으로 걸어갔다.소한은 순간 고삐를 꽉 쥐었다.가슴이 답답하고 아팠지만, 소한은 고개를 숙일 뿐 움직이지 않았다.소한은 김단이 자신을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을 보지 못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김단의 마음에는 오직 정암만 있었다.김단은 부대의 가장 앞쪽까지 가 말에서 내려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정암이 없었다.두 번째 줄에도 없
산에서 내려올 때쯤, 해가 벌써 떠올랐다.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뜰 수 없었다.소한은 무의식적으로 햇빛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눈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고개를 돌렸다.미간은 찌푸려져 있었고, 그의 차가운 분위기는 더욱 어둡게 변했다.부하들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조용히 숲에 숨겨둔 말과 갑옷을 소한에게 가져다주었다.소한은 말에 올라타 고삐를 잡고 서쪽에 있는 성으로 향했다.말이 천천히 걸어갔고, 소한은 위에 올라 자신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이렇게 심하게 그의 그림자가 흔들린 적은 없었다.이전에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 그의 그림자는 줄곧 꼿꼿하고 올곧았다.반면에 왕여는 항상 말 위에서 가만 있지 못하고 노상과 장난을 치곤 했고, 그들의 그림자도 항상 뒤엉켜 있었다.때로는 장난을 조절하지 못하고 소한의 말에 부딪히기도 했기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키곤 했다.그에 비해 정암은 세 사람 중 가장 침착하고 믿음직했다. 정암은 가장 오래 군에 있었고 나이도 가장 많았다.그의 그림자는 항상 곧고 당당했다.한번은 소한이 장난기가 발동하여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정암과 나란히 걸으며 그림자를 비교해 보았고, 자신이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했다.하지만 오늘은 땅 위에는 얽히고설킨 그림자도, 곧고 당당한 그림자도 없었다.오직 고독한 그림자 하나만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마치 전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처량했다.하지만 이번에도 승리를 거둔 것이 분명했다.산적 두목은 이미 죽었고, 부두목은 생포되었다. 돌아가면 심문을 통해 산적들과 결탁한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나머지 산적들은 죽거나 도망쳐 더 이상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마을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산적 문제가 마침내 해결되었다. 그러니, 승리한 셈이다.하…승리라고?그의 형제 두 명이 저 산에서 죽었고, 그중 한 명은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이것이 승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소한의 눈은 붉은 빛을 띄웠다. 그 빛에 앞에 있던 그림자가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