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병사는 놀라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다른 한 병사가 이 광경을 보고 눈썹을 가라앉혔다.“이제 봄이 됐으니, 뱀이랑 벌레들이 나와서 먹을거리를 찾는 것 같소, 별일 아니오.”이 말을 듣자, 모두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회수했다.김단도 살짝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달빛 아래서 그 작은 뱀 머리를 봤다. 뱀 머리는 길가에 잘렸는데도, 계속 움직이려고 애쓰고 있다.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예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불안했다.다행히도, 뒤에 이틀은 아무 탈 없이 순조로웠다.병사들은 행군하는데 습관 되어, 매일 두 시간만 자고, 김단도 잘 보살폈다.하지만 그날 저녁의 불안감은 계속 김단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잘린 뱀의 머리처럼 가끔씩 꿈틀거리며 움직이려 했다.그녀의 불안을 증명하려는 듯, 이튿날 저녁에 길이 막혔다.길 앞에 놓여있는 큰 돌들을 보고, 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옆에 있는 누군가 의아했다.“이렇게 큰 돌들이 왜 길 한복판에 있지?”병사 한 명이 길옆에 있는 산꼭대기를 쳐다봤다.“산길이 미끄러져서 돌이 굴러떨어진 모양이오. 몇 사람은 나랑 가서 돌을 옮기고. 나머지는 남아서 김 낭자를 보호하시오.”“잠깐만!”김단이 제지했다.“그 돌들은 굴러떨어졌다 하기보다는 사람이 일부러 거기에 옮긴 거 같소.”돌들이 굴러떨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딱 맞게 길을 막았다.병사들은 김단의 말을 듣고, 바로 경각했다. 이때, 김단 옆에 서 있던 병사가 갑자기 김단의 몸에 피를 토했다.갑자기 온기가 느껴지자 김단은 온몸이 굳어 고개를 돌려봤다. 그때 병사의 뒤에서 누군가 그의 목을 베었고, 병사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그녀의 몸에 튀었다.“자객이다!”누군가 놀라서 소리쳤다. 산림중에서 몇 사람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상대방의 사람은 그들보다 적지만, 갑자기 쳐들어오는 바람에 이기는 추세였다.김단은 마차에 앉아 가슴이 조여왔다. 주위에서 계속 피 튀기는 것을 보니, 도망간 산적들이 다
김단은 얼굴에 아직 병사들의 피가 묻은 산적을 보고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 그러다 뒤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다.이 상황을 본 산적은 더 크게 웃었다.깜깜한 밤에 풍기는 피비린내는 사람을 어지럽게 했다.김단은 아주 놀란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같이 따라가면 날 죽이지 않을 것이오?”김단이 이렇게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산적은 더욱 득의양양했다.“당연하지, 네가 말만 잘 들으면.”김단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말 듣겠소, 근데 내가 발목을 다친것 같소.”이 말을 듣자, 산적은 김단의 발목을 봤다. 조금 전에 무언가에 걸려서 넘어진 거 같아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그는 김단 얼굴에 쓰여 있는 두려움을 다시 보고는 약한 여자일 뿐이고 병기도 없는데 뭐 큰 일이 있겠냐고 생각했다.그래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김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김단 역시 무섭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산적을 잡은 순간, 김단은 순간 힘을 써 산적을 그녀 쪽으로 당겼다.그 산적은 중심을 잃고 김단의 옆에 세게 넘어졌다.그가 일어서기 전에, 김단은 이미 날카로운 비녀로 산적의 목을 찔렀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산적은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한 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산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섯째야, 어디에 있어?”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김단은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옆에 이미 죽은 산적을 보더니,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산적을 그녀 몸 위에 올렸다.그러고는 놀랐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그녀의 목소리는 산적의 시선을 끌었다.몸이 웅장한 산적 한 명이 빠르게 걸어왔다.그가 ‘여섯째’라 부르는 사람이 김단의 몸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리 급해? 빨리해, 넷째 형이 기다리고 있어!”하지만, ‘여섯째’는 움직이지 않았고, 김단은 계속 울면서 발버둥 쳤다.할 수 없어, 그 산적은 다가가서 ‘여섯째’를 잡아당겼다.
산적은 힘으로 억지로 그녀의 팔을 끊어내려는 듯했다.김단은 아픔을 참으면서 죽을 힘을 다해 손을 비틀었다.검이 산적의 몸속에서 비틀기 시작했다.“아!”산적은 아파서 소리 질렀고, 김단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김단도 아파서 고함지르기 시작했다.그녀의 고함은 아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디어,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검으로 산적의 몸속에서 한 바퀴 돌렸다.그 산적은 장이 끊어졌는지, 피를 토하더니 힘이 빠져 꼿꼿하게 뒤로 넘어갔지만, 검은 여전히 김단 손에 쥐어져 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피가 튀겨져서 눈도 못 뜰 정도다. 귓가에 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다섯째, 여섯째!”또 산적이다!김단은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조금 남아 있는 이성이 그녀가 더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있다.하지만, 조금 전에 고함이 그녀의 마지막 힘을 다 써버렸고, 팔도 아파서 얼굴에 있는 피도 닦지 못했다.이렇게, 김단은 넘어지고 말았다.그 산적은 두 명밖에 남지 않은 형제가 김단의 손에 죽은 것을 보고 바로 검을 들어 김단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산림이 너무 어두워져 산적은 정확히 찌를 수 없었다.검은 김단의 쇄골 밑을 찔렀다.격렬한 아픔이 전해지자, 김단은 드디어 손에 힘을 되찾고, 검을 쥐고 산적을 향해 휘둘렀다.산적은 팔에 부상을 입어 급하게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검은 김단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김단은 일어서려 했지만, 검이 어깨를 관통된 탓인지,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김단이 힘이 빠진 모습을 보자, 산적은 오히려 웃으며 눈에 흉악한 기운을 드러냈다.“너를 죽일 것이다!”산적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공격했다. 김단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산적이 발로 그녀의 검을 걷어차고는 그녀 몸 위에 앉아서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망할 것! 내가 너 죽이고, 네 남자 시신과 함께 성문에 버릴 것이다! 너희들 시신에 채찍질을 백 번 해야 내 분을 풀 수 있을 것이다!”먼저 집터가 없어지고, 오늘은 또 형
소한은 하루 만에 당우리 쪽의 일을 다 처리했다. 산 채로 잡힌 산적들은 소한의 손에서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모든 일을 다 털어놓았다.소한은 당우리 현령 여만안이 보는 앞에서 모든 고문과 협박 수단은 다 썼다. 여만안은 놀라서 오줌을 지렸고 숨김없이 다 말했다.확실히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있었다.소한은 자세히 조사하는 일을 노상에게 맡겼다.노상은 왼팔이 잘려서 더는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지만,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면 나중에 조정에서 말단 벼슬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다. 당우리에 남아서 현령을 맡는 것도 폐인이 된 몸으로 집에 가서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소한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급히 말을 타고 떠났다.그는 안절부절못했다.김단이 떠난 뒷모습이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 잠시도 기다릴 수 없었다.그가 쉬지도 않고 말을 타고 쫓아갔을 때는, 김단을 보호하라고 보낸 사람이 벌써 다 죽어 있었다.산림 밖에도 시신이 가득했다. 그는 단번에 그중 몇 사람이 도망친 산적이라는 것을 알아봤다.정암의 관도 절반이나 열렸다. 다행히도 시신은 아무도 다치지 않아 그대로 남아 있었다.하지만, 김단이 사라졌다!그는 놀라서 김단이 산적들에게 잡혀갔다고 확신했다.정암이 죽기 전에 그에게 부탁한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다. 그런데 이제 며칠 지났다고 그녀가 벌써 산적 손에 잡혔다니!불안감과 미안함이 솟구치자, 소한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며 땅에서 어떤 단서를 찾고 싶었다. 시신이 아직 따뜻한 걸 보니, 이 사람들이 조금 전에 죽었다는 것을 증명했다.그러니까 그가 산적들이 김단을 데리고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만 알면, 쫓아가서 김단을 구할 수 있다.소한은 쭈그리고 앉아 땅에 있는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보며 김단의 발자국을 찾으려 했다. 어쨌든 여자의 발자국은 남자와 다르다.때마침, 산림 중에서 먹먹한 소리가 들려왔다.‘펑’‘펑’아주 규칙적이다.그는 순간 긴장하더니 검을 뽑고 산림 안으로 들어갔다.오늘 밤의 달빛
김단의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경각심이 가득한 소리로 말했다.“다가오지 마!”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김단은 당황해서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소한은 김단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거라 생각 못 하고 급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검은 그의 소매를 그었다.김단은 자기가 상대방을 찌르지 못했다고 느껴서 또다시 휘둘렀지만, 상대방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품에 안았다.“걱정하지 마, 나야!”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김단이 버티던 동작을 갑자기 멈추게 했다.그녀는 몸이 경직되면서 떠보듯 물었다.“소한?”“그래, 나야!”소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끝났어!”끝났다고?김단의 경직된 몸이 드디어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바로 소한의 옷으로 눈앞의 피를 닦고, 그를 떠밀어 산림 밖으로 뛰어갔다.관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김단은 놀라서 마차 위로 기어올랐다. 정암의 시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서야 이번에는 정말 힘이 풀려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그녀는 관에 기대어 앉아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신들을 봤다. 그녀는 멍했다. 모두 병사들의 시신이었다.그들은 그녀와 이틀의 여정을 함께 했는데, 지금 모두 여기에서 죽었다. 바짝 긴장한 마음의 끈이 순식간에 끊어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지 않았다면 이 젋은 병사들은 여기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정암처럼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미안함이 밀려오면서 무수한 손이 그녀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김단은 소리 내어 울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숨을 쉴 수 없어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눈부신 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해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마차는 아직 제자리였지만, 병사들의 시신은 모두 사라졌다.김단은 놀라서 일어나보니 관 뚜껑도 잘
김단은 멍하더니 어젯밤에 산적이 한 말을 떠올렸다. 만약 소한이 사람을 보내 그녀와 함께 가지 않았더라면 산적은 관에 있는 사람이 정암인지 몰랐을 것이다.그럼, 어젯밤의 전투도 없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그녀는 벌써 당우리를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소한의 탓인가?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를 탓하면 안 된다.소한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도 산적을 만날 거라 생각 못 했다.더군다나, 이번 일은 산적이 흉악해서 온 마을의 백성, 심지어 갓난아이까지 도살해서 일어난 것이다.그러지 않으면 주상이 밤늦게 파병할 일도 없고 이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모두 일어났다.정암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죽었다.그녀는 평온하게 ‘당신 탓 아니야’라고 할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일에 관한 모든 사람을 탓하고 있었다.제일 많이 탓하는 것은 그녀다.그래서 그녀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산적이 다시 와서 난리를 칠까 봐, 두 사람은 노상이 파견한 원군을 기다렸고, 대열은 하루 종일 지연되다 저녁이 되어 다시 길을 떠났다.김단과 소한은 길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정암이 죽은 지 12일째 되는 오전에 드디어 한양에 도착했다.아직 성문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김단은 벌써 성문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몇 사람을 봤다.가슴이 갑자기 빨리 뛰었다.정암의 가족이다.소한은 이미 정암이 죽었다는 소식을 한양에 전했다. 그래서 정암의 가족이 지금 성문에서 정암을 데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대열은 멈추지 않았고 김단은 마차에 앉아 안절부절못했다.김단은 돌아오는 내내 정암 부모님을 보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러나, 내내 고민했어도 그녀는 여전히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그들의 아들이 그녀 때문에 죽었는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변명하는가?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몸도 마음과 같이 떨고 있었다.심지어 그녀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했다.그러나 그녀는 도망가면 안 된다는
그녀 때문에 정암 부모님은 아들을 잃고 정유이는 오라버니를 잃었다.모두 그녀의 잘못이다.그러나 정유이가 더 비통하게 울더니 말했다.“그러나 오라버니께서 내가 당신을 탓하는 것을 보면 내게 화낼 것 같아요...”이 한마디는 칼처럼 김단의 마음속에 단단히 꽂혔다.김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유이를 바라보았다. 정유이는 눈물로 말문이 막혔지만, 간신히 입을 열었다.“오라버니가 떠날 때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번 생엔 어떤 여자도 당신처럼 그의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그저 당신이 평안하고 기쁘면 된다고, 목숨을 바쳐도 상관없다고 했어요.”“김단, 내 오라버니가 정말 목숨을 바쳤으니, 당신은 무조건 평안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아니면, 나는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이것은 그녀 오라버니의 마지막 소원이었다.정유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더는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그녀는 왜 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의 목숨으로 다른 한 사람의 평안과 기쁨을 바꿀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 오라버니가 한 말이니, 그녀는 거역할 수 없다.숙희는 급히 다가가서 정유이를 안았고, 정유이도 그녀를 안으면서 땅이 꺼질 듯 울었다.이 말들이 김단 마음에 적중했는지 그녀는 무기력하게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그녀는 그제야 그날 정유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이해했다.정암은 떠나기 전에 이미 가장 나쁜 결과를 예상했던 것인가?그는 분명히 당우리 산적들이 얼마나 흉악한지 알고,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 것인가?왜?왜 그렇게 어리석은 거야?그가 아무런 공훈을 세우지 않아도 그녀는 계속 그의 곁에 지키고 있을 것이다.그녀가 중히 여기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정암 그 자체다!끊임없이 밀려 오는 슬픔이 순간 김단 몸에 있는 모든 힘을 빼앗았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넘어졌는데 정암 아버지가 그녀를 부축했다.김단은 멍하니 고개를 돌려 정암 아버지를 보더니 눈물이 또 쏟아졌다.“
네 식구만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소한도 없고, 김단도 없이...지금부터, 한양에 있는 귀인들은 더 이상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소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는 정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는 강렬히 요구하지 않았다.김단도 알아들었다.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울어서 힘이 빠진 정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손목에 있는 옥팔찌를 뺐다.“제가 이 팔찌를 가질 자격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암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눌렀다. 정암 어머니의 얼굴은 아주 힘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김단을 보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당신에게 줬으면 당신의 것입니다. 내게 돌려주는 것이 오히려 정암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김단은 멍하니 정암 어머니를 바라봤다.그녀에게 이 옥팔찌를 남긴다는 것은 그녀를 아직 정씨 집안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그녀는 이런 일이 있어도 정씨 집안의 가족이 여전히 그녀를 인정할 줄 몰랐다.마음속에 씁쓸함이 솟아오르자, 김단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정암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감격도 있고 미안함도 있었다.정암 어머니는 가볍게 김단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유감하기도 했다.정암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했다.“됐어. 늦었다. 어서 가자!”이 말을 듣자, 김단은 정암 어머니를 놔주었고, 숙희도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해서 옆으로 물러섰다.정암 부모님은 마차에 앉아 정암을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정유이도 따라가면서 김단 옆을 지날 때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 방에 오라버니가 남긴 물건이 있어요.”김단은 멍하니 서 있었고, 다시 뭔가 묻고 싶었지만, 정유이는 이미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정암을 데리고 가는 대열이 작은 점처럼 보일 때쯤에, 김단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뒤돌아서니, 소한은 아직 성문에 있었다.김단이 돌아보자, 소한은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집까지 데려다 주겠소.”김단은 얼굴에 못다 마른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됐어요.
민태훈의 표정을 본 김단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대감께서는 제가 이 일을 공주 마마께 말씀드릴 거라 생각 못 하신 겁니까?”일을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정말 고작 몇 개의 무기로 그녀를 겁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그녀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민태훈은 고개를 숙이고 끝까지 부인했다. “낭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어쨌든 떳떳한 일은 아니었기에 어사대부인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벌할 빌미를 줄 수 없었다.그들에게는 어떠한 증거도 없지 않은가!서원 공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감이 부인한다고 해서 내가 자네를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오?”그녀가 주상에게 말하면 증거가 없더라도 민태훈에게 호된 벌을 내릴 수 있었다!민태훈도 이를 똑똑히 알고 있기에 끝내 고개를 숙였다. “공주 마마께서는 소신이 어찌해야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공주가 그를 불렀음에도 곧장 주상에게 고하지 않은 것을 보니, 공주는 아직 이 일을 주상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그러니 이 일에는 아직 반전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과연 공주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간단하오. 김씨 낭자에게 사과하시오.”이 말을 들은 민태훈은 깜짝 놀랐다.영의정의 손자인 그가, 일개 칠품 의녀에게 사과하라니?그는 죽기보다도 싫었다.하지만 서원 공주의 심술궂은 표정을 본 민태훈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김 낭자, 미안하오.”김단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서원 공주가 굳이 민태훈을 불러낸 이상 단순한 사과만으로 끝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서원 공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성의가 없어서야 되겠소? 사과는 머리를 조아려야 하지 않소?”민태훈은 깜짝 놀랐다. 김단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이는 명백히 그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닌가?!순간 그의 두 눈이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 찼다.김단은 서원 공주의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서원 공주가 정말로 사람을 모욕하는 방법을
이 일 때문에 그녀는 주상과 몇 번이나 다투긴 했으나, 민씨 가문 사람들이 맹영지를 이렇게 대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그녀가 맹영지와 가깝든 그렇지 않든, 맹영지는 그녀를 이모라고 불러야 했다.민태훈이 맹영지를 학대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녀를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중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도 더 이상 공주를 막지 않았다.이에 서원 공주가 입을 열었다. “민태훈을 불러오거라!”“예!”하인 하나가 대답을 한 뒤 물러갔고, 민태훈의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주의 침소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하지만 서원 공주는 그를 바로 만나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민태훈은 꼬박 한 시진을 기다렸으나 끝내 인내심이 바닥나 옆에 있는 소복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공주 마마께서 오늘 신을 뵐 겨를이 없으신 듯합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국사를 그르칠까 염려되오니, 다음 기회에 다시 오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예를 표하고 떠나려 했다.하지만 소복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이런 무례한! 공주 마마께서 자네를 보려 하시는데 감히 핑계를 대고 거부하다니, 마마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오?”민태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공주 마마께서 한참을 기다려도 안 만나주시지 않습니까! 소인은 아직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았는데, 국사를 그르친다면 대감께서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하지만 소복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이 어사대부지, 매일 다른 사람 잘못을 들추거나 약점을 잡아 주상 전하께 아뢰어 이간질이나 하는 자가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오?”“대감!”민태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감히 우리 본관을 모욕하는 것입니까?!”“굳이 내 앞에서까지 관직을 내세워 거들먹거릴 필요 없소. 대감은 영의정 대감의 그늘 아래에 있었기에 조정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을 뿐이오. 하지만 아무리 대감이 영의정 대감의 친손자라 할지라도, 우리 공주 마마께서는 주상 전하의 친따님이시자 우리 대정의 유일한 공주 마마시오! 공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밖은 잠잠해졌다.경씨는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차 안을 향해 물었다. “낭자, 다치신 곳은 없소?”김단은 아직도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저는 괜찮습니다. 누구의 소행입니까?”경씨는 마차에서 암살 무기 하나를 뽑아 살피고 나서 말했다. “이 무기를 다루는 솜씨가 조잡한 것을 보니, 전문 자객의 소행은 아닌 듯 하오. 게다가 모두 마차에 박혔고, 일부러 휘장을 피한 것을 보니 낭자를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소.”그럼, 단지 경고하러 온 것이란 말인가?김단은 누가 한 짓인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민태훈이 이렇게 성질이 급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번거롭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무기들을 모두 거두어 주십시오. 내일 궁에 들어가 공주 마마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알겠소.”경씨는 대답을 하고 사방에 꽂힌 무기들을 모두 거둔 뒤 평양원군 저택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김단은 입궁 후 가장 먼저 어젯밤의 암살 무기들을 서원 공주와 중전 앞에 바쳤다.갑자스럽게 무기를 본 서원 공주와 중전은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서원 공주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대담하오! 암살 무기를 가지고 궁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오?”김단은 그제야 말했다. “공주 마마께 아뢰옵니다. 이것은 어젯밤 소신의 마차를 습격한 암살 무기입니다.”이 말을 들은 중전은 깜짝 놀라 물었다. “습격을 당한 것이오?”김단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습격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소신에게 경고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러 소신을 해치려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서원 공주도 어리석지 않았기에 이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낭자의 말은, 민태훈이 한 짓이라는 것이오?”“증거가 없어 감히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민 대감 외에는 소신이 감히 악감정을 살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김단의 말을 듣고 서원 공주는 또다시
“헤헤, 그 아씨께서 분명 마음속에 도련님을 품고 계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희 노점을 보자마자 도련님께 드릴 염주를 사려고 하셨겠습니까!”소하는 고개를 들어 그 노점상을 보며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말하는 동안 허리에서 잔돈을 꺼내 노점상에게 주며 말했다. “날도 저물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노점상은 감격하여 급히 잔돈을 받아들고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소하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떠나갔다.노점상도 기분 좋게 좌판을 정리했다.하지만 갑자기 키가 큰 그림자가 비춰오던 저녁노을을 가로막았다.노점상은 고개를 들었고, 얼굴이 험악하고 무서운 남자가 좌판 앞에 서 있었다.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돈을 빼앗으러 온 건가?하지만 노점상이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는 손을 들어 금강보리 염주 한 움큼을 움켜쥐었다.싸늘한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이딴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손에 힘을 주자 금강보리 염주가 부서져 버렸다.노점상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덩어리의 은자가 노점상 눈앞에 놓여 졌다.노점상은 순간 눈이 휘둥그래졌다.이는 무려 50냥짜리 은자였다!그는 평생 이렇게 큰 은자는 본 적이 없었다!“이것들 전부 다 사겠소.”소한이 말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남은 금강보리 염주들을 움켜쥐고 뒤돌아 떠났다.표정은 서리가 내린 듯 싸늘했다.방금 전 김단과 소하가 연신 기뻐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고, 이내 그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그는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것인데,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두 사람의 사이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가까워졌다!어의원에서는 거의 입을 맞출 뻔하더니, 이제는 염주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이다!그가 계속 손을 놓고 있는다면 그들은 또다시 혼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이렇게 생각
사내 팔찌?소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그는 김단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왜 갑자기 사내의 팔찌를 사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누구에게 주려고?소한인가, 아니면 최지습인가?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하는 무의식적으로 최지습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상인이 말했다. “사내 팔찌는 없습니다만, 염주는 있습니다. 아씨, 한번 보시겠습니까?”“좋소, 보여주시오!”김단은 흔쾌히 대답했고, 노점상은 좌판 밑에서 접시를 하나 더 꺼냈다. 접시 위에는 여러 색깔의 염주가 놓여 있었다. 노점상은 소개했다. “보시지요, 이것들은 모두 금강보리 염주입니다. 귀인들이 차는 것보다는 품질이 좀 떨어지지만, 세공이 정교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무늬를 보시지요!”“딱 보기에도 정말 괜찮군.” 김단은 그 말과 함께 소하를 향해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생각은 어떠세요?”소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음, 괜찮소.”“그럼 이걸로 하겠네!” 김단은 염주 하나를 집어 들고 돈을 지불한 후, 돌아서서 소하의 왼손을 잡았다. “오라버니께서 늘 저를 돕고 지켜 주셨는데, 저는 오라버니께 아무것도 드린 게 없지 않습니까? 이 염주가 제 작은 성의입니다.”그와 동시에 그녀는 금강보리 염주를 소하의 손목에 채워주었다.소하는 이 염주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예상치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나에게 주는 것이오?”“그럼요!” 김단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져 있었다. “오라버니, 너무 하찮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소하는 가슴이 약간 떨렸고, 진정하고 난 뒤 에야 말했다. “어찌 그러겠소.”“그럼 됐습니다. 오라버니, 매일 차고 다니셔야 합니다. 제가 확인할 거예요!”김단은 괜히 어기장을 놓았다.그녀는 소하에게 그가 한빙산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말해 봤자 소하를 걱정시키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이에 그녀는 소하의 중독 상황을 자주 확인할 수 있을 구실을 찾아야 했다.염주를 선물한
더욱이 그 민태훈이라는 자는 성품이 음흉하고 악독하며,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남을 해치고 자신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 짓만 골라서 하니, 영의정이 눌러놓지 않았다면 구서보다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소하는 김단이 영의정 쪽 사람들과 민태훈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히 달려온 것이다.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금군 총령인 그의 신분이 마부보다는 훨씬 쓸모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공주 마마의 지위을 빌린 겁니다!”영의정과 서원 공주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는지 김단은 알지 못했지만, 조정 대신이자 일품 벼슬아치로서 버릇없는 공주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부분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영의정이든 태부든, 혹은 그 밖의 명문가들이든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다만 서원 공주가 아직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다.하필 오늘 김단이 서원 공주와 영의정 가문의 첫 정면 충돌을 일으켰으니, 영의정이 참고만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영의정이 참는다 해도 민태훈은 분명 참지 못할 것이다.소하는 그제야 김단의 속셈을 깨달은 듯했다. “설마 그들을 싸우게 만들려는 것이오?”김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소하가 말했다. “하지만 결과가 낭자의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소.”어쨌든 서원 공주에게든 영의정 가문에게든 이는 사소한 일일뿐이다.이 사소한 일 하나로 한쪽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김단의 두 눈은 정면을 향했다. “모래가 모여 탑이 되고,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공주 마마가 주상 전하의 마음속에 그토록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한 번의 공격으로 쓰러뜨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작은 일들이 쌓여 주상 전하께서 공주 마마에 대한 약간의 불만을 가지게 되고 그때 큰 수를 둔 다면, 단번에 끝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김단의 그 작은 ‘계략’에 소하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내 서재에 있는 병서들을 헛되이 보
“소 오라버니.”김단도 그를 불렀고, 천천히 소하를 향해 걸어갔다.소하는 고개를 들어 영의정 저택의 높은 현판을 바라보고 나서 김단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걷겠소?”김단은 소하가 분명 자신이 맹영지의 일 때문에 온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평양원군 댁의 마부를 바라보았다.마부의 성은 경이고, 평소 김단은 그를 경씨 도령이라고 불렀다.그는 최지습이 김단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둔 사람이었다.지시를 받은 경씨도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김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소하에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쪽으로 가시죠.”소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김단은 그를 따라가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맹 낭자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정신이 맑지 않고 반응도 매우 느려요. 몸에 상처가 있는 걸 보니 오랜기간 민태훈에게 학대를 당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민태훈이 제가 맹 낭자를 치료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중전 마마와 공주 마마를 움직이니 민태훈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 말을 들은 소하의 얼굴은 매우 심각해졌다. “나는 낭자가 영의정 댁으로 시집을 갔으니 좋은 날만 보냈을 줄 알았소.”누가 알았겠는가,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을 줄.김단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네, 제가 세답방에 있었을 때보다 더 비참했습니다.”그 말을 하며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그녀는 문득 소하를 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혹시 맹 낭자를 보고 싶으신겁니까? 제가 내일 영의정 댁에 갈 예정인데, 기회를 봐 두 분을 만나게 해 드릴까요?”김단은 소하와 맹 낭자의 예전 관계를 생각하니 소하가 맹영지를 매우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소하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어찌됐든 맹 낭자는 민태훈의 아내이니, 정으로 보나 이치로 보나 내가 만나는 것은 옳지 않소.”말을 마친 소하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김단을 보며 말했다. “설마 내가
“네 이놈! 주인을 믿고 미쳐 날뛰는구나!”참으로 익숙한 말이었다.김단은 며칠 전 자신이 소복을 보며 그렇게 욕했던 것을 떠올렸다.이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영의정 댁에서 날뛰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아무리 맹 부인을 치료하지 못하게 막으셔도, 저는 기어코 치료할 것입니다! 어디 한번 저를 쫓아내 보시지요, 공주 마마께서 잘난 당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으실지 없으실지 한번 지켜보시지요! 그리고 잘난 당신의 할아버님께서도 당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봅시다!”“네 이놈!”“지나가겠습니다!”김단은 민태훈을 밀치고 맹영지의 방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아침에 한 번 와봤기에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민태훈은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가버렸다.김단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 민태훈의 분노한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바로 이거다. 더 화낼수록 좋다. 민태훈이 공주와 개처럼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일 것이다. 그들이 심하게 싸울수록 그녀는 더욱 기뻤다!맹영지의 어린 하녀는 김단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김단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김단은 그녀를 위로할 시간이 없었고, 다시 맹영지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러다 맹영지의 뒤통수에 작은 혹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건 언제 생긴 것이냐?”김단이 물었다.어린 하녀는 앞으로 나와 한번 보고는 말했다. “오래됐습니다. 아마 3년 전쯤일 거예요. 대감...께서 찻주전자로 뒤통수를 때리셨는데, 부인께서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셨지만 뒤통수에 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부인께 여쭤보니 아프지 않다고 하셔서 의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민태훈이 맹영지가 3, 4년 동안이나 아팠다고 말한 것과 혹이 생긴 지 3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맹영지가 지금처럼 반응
한 시진 후, 김단은 다시 영의정 저택으로 돌아갔다.소복이 앞장서 김단을 데려갔다.궁궐에서와는 달리 소복은 영의정 댁 문을 들어서자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였다.영의정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했고, 소복은 깍듯하게 영의정에게 예를 표하면서도 꽤나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대감, 평안하셨소? 실은 공주 마마께서 사촌 분을 염려하시어 나에게 낭자를 데리고 가 살펴보라고 명하셨네.”맹영지와 서원 공주는 사촌 자매였다.소복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이 커졌음을 직감했다.그는 곧장 옆에 있는 민태훈을 노려보았다.민태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김단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고, 이내 앞으로 나와 소복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대감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제 부인은 이미 병세가 깊어 낭자가 오늘 아침에 와서 보았음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중전 마마와 공주 마마께서도 이미 낭자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소복은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심지어 낭자는 그 때문에 중전 마마의 맥을 짚어 드리는 일정에도 늦었소! 하지만 중전 마마께서도 조카 분을 가엾게 여기시어 꾸짖지 않으셨네.”꾸짖지는 않았지만, 민씨 가문 때문에 중전 마마의 일을 그르쳤다고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격이었다.민태훈의 표정은 이미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사실 그는 시간을 계산해 두었었다. 김단이 매번 사시쯤 중전의 맥을 짚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청하면 전혀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더욱이 그는 김단이 궁궐에 먼저 다녀와 일을 본 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부르자마자 냉큼 올 줄이야!아무래도 역시 영의정 가문의 병을 고치면 자신의 명성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서둘러 온 것일 것이다!그 생각에 민태훈의 음흉한 눈빛이 다시 김단을 향했다.김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소복이 영의정을 향해 말했다. “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