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 때문에 그녀는 주상과 몇 번이나 다투긴 했으나, 민씨 가문 사람들이 맹영지를 이렇게 대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그녀가 맹영지와 가깝든 그렇지 않든, 맹영지는 그녀를 이모라고 불러야 했다.민태훈이 맹영지를 학대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녀를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중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도 더 이상 공주를 막지 않았다.이에 서원 공주가 입을 열었다. “민태훈을 불러오거라!”“예!”하인 하나가 대답을 한 뒤 물러갔고, 민태훈의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주의 침소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하지만 서원 공주는 그를 바로 만나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민태훈은 꼬박 한 시진을 기다렸으나 끝내 인내심이 바닥나 옆에 있는 소복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공주 마마께서 오늘 신을 뵐 겨를이 없으신 듯합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국사를 그르칠까 염려되오니, 다음 기회에 다시 오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예를 표하고 떠나려 했다.하지만 소복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이런 무례한! 공주 마마께서 자네를 보려 하시는데 감히 핑계를 대고 거부하다니, 마마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오?”민태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공주 마마께서 한참을 기다려도 안 만나주시지 않습니까! 소인은 아직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았는데, 국사를 그르친다면 대감께서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하지만 소복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이 어사대부지, 매일 다른 사람 잘못을 들추거나 약점을 잡아 주상 전하께 아뢰어 이간질이나 하는 자가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오?”“대감!”민태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감히 우리 본관을 모욕하는 것입니까?!”“굳이 내 앞에서까지 관직을 내세워 거들먹거릴 필요 없소. 대감은 영의정 대감의 그늘 아래에 있었기에 조정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을 뿐이오. 하지만 아무리 대감이 영의정 대감의 친손자라 할지라도, 우리 공주 마마께서는 주상 전하의 친따님이시자 우리 대정의 유일한 공주 마마시오! 공주
민태훈의 표정을 본 김단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대감께서는 제가 이 일을 공주 마마께 말씀드릴 거라 생각 못 하신 겁니까?”일을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정말 고작 몇 개의 무기로 그녀를 겁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그녀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민태훈은 고개를 숙이고 끝까지 부인했다. “낭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어쨌든 떳떳한 일은 아니었기에 어사대부인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벌할 빌미를 줄 수 없었다.그들에게는 어떠한 증거도 없지 않은가!서원 공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감이 부인한다고 해서 내가 자네를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오?”그녀가 주상에게 말하면 증거가 없더라도 민태훈에게 호된 벌을 내릴 수 있었다!민태훈도 이를 똑똑히 알고 있기에 끝내 고개를 숙였다. “공주 마마께서는 소신이 어찌해야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공주가 그를 불렀음에도 곧장 주상에게 고하지 않은 것을 보니, 공주는 아직 이 일을 주상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그러니 이 일에는 아직 반전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과연 공주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간단하오. 김씨 낭자에게 사과하시오.”이 말을 들은 민태훈은 깜짝 놀랐다.영의정의 손자인 그가, 일개 칠품 의녀에게 사과하라니?그는 죽기보다도 싫었다.하지만 서원 공주의 심술궂은 표정을 본 민태훈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김 낭자, 미안하오.”김단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서원 공주가 굳이 민태훈을 불러낸 이상 단순한 사과만으로 끝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서원 공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성의가 없어서야 되겠소? 사과는 머리를 조아려야 하지 않소?”민태훈은 깜짝 놀랐다. 김단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이는 명백히 그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닌가?!순간 그의 두 눈이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 찼다.김단은 서원 공주의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서원 공주가 정말로 사람을 모욕하는 방법을
조선의 어느 음력 12월 28일.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오전에 시작했던 빨래를 간신히 마친 김단은,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파랗게 질린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세답방의 나인에게 불려갔다.“어서 가보게. 진산군댁에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나인의 말에 김단은 자리에 얼어붙었다.진산군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한때 그녀도 그 댁의 귀한 여식으로 15년을 자랐었다. 3년 전, 자기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정2품 진산군댁의 안주인인 정부인 임씨와 같은 해에 출산했던 유모는 임종 직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자기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김단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부부가 자신의 친딸, 임원을 상봉한 것에 감격스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녀와 부녀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었다.진산군은 안색이 어두워진 김단에게 앞으로도 이 집안의 여식으로 남아 임원의 언니로서 살아가도 좋다고 했다. 임씨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하겠다고 약조했다.하나, 궁궐에 들어 공주자가의 유리그릇을 깨트린 임원을 발견한 부부는, 임원의 몸종이 김단을 모함할 때조차 임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수양딸이었던 김단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공주는 분에 겨워 그녀를 세답방의 무수리로 쫓아냈으나, 한때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임원의 옆에 서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그날, 김단은 그들이 자신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그 댁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나인의 독촉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세답방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친 문 쪽에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그 목소리에 김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전 무감각해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은 익숙한 목소리에 활력을 얻은 듯 천천히 뛰었다.그녀는 천천히 마차 안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 호국 장군이 된 그녀의 옛 정혼자, 소한이다. 그녀는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장군님이시군요.”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한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향했다. “낭자, 진산군댁에 가는 길이었소?”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소한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는 항상 곁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여인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집안에서 정해준 혼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견뎠었다. 가끔은 지치지 않고 떠드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떡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그 순간조차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던 그녀였다. 떡으로 입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반 시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활달했던 여인이었다. 못 본 사이, 김단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처럼 떠들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소한은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냉랭하게 말했다. “마침, 궐에 들던 길이었소. 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시오.”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가 한마디 더 했다. “다쳤으면 무리하지 마시오. 본인은 몰라도, 그 댁 큰 마님께서 속상해할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조모님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무수리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조모님께서 중전마마께 간청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돌아온 그녀를 보게 되면, 조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 여긴 김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 장군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가까이선 본 소한은 3년 전과 달리 키가 훌쩍 커져 있었고 체격도 다부져졌다.최근 전쟁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도 전
김단이 전에 묵었던 별당은 매화당이었다.정원에 무수한 매화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꽃샘추위가 찾아올 즈음 핀 매화꽃들은 초봄까지 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매화라는 소리에 진산군은 조선 팔도로 사람을 보내 매화나무를 구해왔고 그 종류는 다양했다. 그 후로 매년 수백 냥의 은자를 들여가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나무를 극진히 돌봤다. 하지만 매화당에 핀 매화꽃이 아름답다는 임원의 말 한마디에 매화당은 곧 임원의 별당이 되었다.그 순간에는 자기 별당을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이 집안의 친딸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었다. 이 집안의 물건과 사람들은 전부 임원의 것이었다.김단, 그녀야말로 남의 자리를 꿰찬 외부인이었다. 길을 안내하던 몸종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씨를 모셨던 몸종이 혼인하여 출가하는 바람에 마님께서 쇤네를 아씨께 보내셨습니다. 쇤네는 숙희라 하옵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쇤네를 불러 말씀하시면 됩니다.”숙희는 통통한 볼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단은 그녀가 눈에 익었다.“혹 전에 오라버니를 모시지 않았더냐?”숙희가 놀란 듯 답했다.“쇤네를 알아보시겠습니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예전에 임학의 외별당에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임학의 몸종을 자기에게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분명 3년 전만 해도 임학은 그녀가 임원을 해치려 한다고 오해하며 그녀에게 적대심을 품었다.그런 사람의 몸종을 붙인 거로 보아, 감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새로 안내받은 별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연꽃이 활짝 피어 꽤 아름다웠을 테지만, 지금은 연꽃이 다 지고 시든 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다행히 실내에 불을 지핀 덕에 따뜻했다.미리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둔 숙희는 김단의 목욕을 돕기 위해 나섰으나, 김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하면
임원이 선의로 건넨 말을 날카롭게 받아치는 김단을 본 임학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말에 씨가 있구나. 몸에 상처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뭣 하러 숨긴 것이냐?”그녀가 미리 말만 했어도 임학은 내의원에 들러 약을 받아왔을 것이다.“도련님께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오라버니라 칭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분개한 임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 집에서 어릴 때부터 네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세답방에 과연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었기에 이리도 다친 것이냐?”그의 말에 김단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천천히 끌어내린 그녀도 서늘하게 대꾸했다.“처음에는 반항도 하였지요. 도련님 말씀처럼 세답방 나인들은 소인의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 그들의 수법도 점점 다양해지더군요. 깊이 잠든 사이 차가운 물을 부어버린다거나, 밥을 먹을 때 남들은 국을 퍼가지만 소인에겐 하수구 물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빨래한 옷들을 뒷간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자신들의 일을 소인에게 떠넘기기도 했더이다.”임학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궁마마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소인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저항도 하지 않게 되었고 침구가 젖으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하수구 물이라도 먹었습니다. 한 번은 상궁마마께서 하도 심하게 구타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 진산군댁 수양딸이라는 신분 덕에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요. 그 뒤론 전처럼 심한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깜짝 놀란 임학의 표정에 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혹 소인이 못 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그런 고초를 당했다고 여기신 겁니까?”“괴로워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분을 가진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괴로워할지언정, 소인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분들이라는 거 잘 알고 있나이다. 어쩌면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은 게 이 댁 아씨가 아니라 소인이라 안도하셨을 수도 있겠지요.”임학은 자신을
소한이 손에 든 약재 함을 내려다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임학은 불안한 듯 재촉했다. “금일 전하께서 궐에 들라는 전교를 내린 적 없는 줄로 아네만, 혹 김단을 마중간 것이오?”임학은 소한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였고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임학이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제정신이오? 전에 김단이 좋다고 매달릴 땐 미동도 하지 않던 인간이, 원이의 정혼자가 된 지금 다시 김단에게 흔들리는 게 정상이오? 내 누이들을 불장난에 끌어들일 생각 마시게! 그땐 우리의 우정도 끝날 테니.”소한은 조롱 어린 시선으로 임학을 쳐다보았다.“자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첫째 누이를 신경을 쓰는 것 같군.” 사실 소한의 말처럼 누구보다 김단을 신경 쓰는 것은 임학이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소한의 말에 임학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고고한 척하지 마시오. 3년 전 그날, 그 자리에 자네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저 아이는 날 원망하기도 하지만, 자네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알고 있소.”소한이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마차 안에 있던 수정과는 건드리지도 않더군.”수정과는 고사하고 난로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만약 큰 마님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소한의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소한을 보자마자 예를 갖춰 인사하며 거리를 뒀다.전처럼 만나서 좋다며 인사하지도 않았고 그를 연모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소한은 마음이 어지러웠다.누구보다 소한에게 다정했던 누이가, 소한을 연모하던 누이가 더는 그에게 미련 없이 돌아섰다는 말에 임학도 큰 충격을 받았다. 누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딴사람이 되자, 임학도 상당히 놀랐다. 그녀의 발에 가득 자리 잡은 흉터들이 떠오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세답방 궁인에게 화가 났다. 공주자가의 명이라 할지언정, 김단은 진산군의 여식이었다. 임학은 불편한 기색을 띠며 소한을 흘겨보았다.“전쟁터에서
그날 밤, 김단은 새벽녘까지 잠에 들 수 없었다.방 안의 난로가 뜨겁게 타올라서일 수도 있고, 3년 동안 추위에 떨며 비가 새는 음침한 오두막과는 달리 너무 포근한 잠자리 때문일 수도 있었으며, 마른 이불이 너무 따뜻해서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황홀하게 느껴질 만큼,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낯선 기분이 들었다.남은 생은 세답방에서 보내게 될 줄 알았으나 다행히 그곳을 벗어났다.이튿날 아침, 눈 부신 햇살이 방 안을 비췄다.그녀는 비로소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임씨 부인이 새로 준비해 준 옷은 그녀의 몸에 알맞지 않았지만 상처는 가려줄 순 있었다.그녀는 아침 일찍 안채로 향했다. 아침 기도를 하시는 조모님을 기다리기 위해 안채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인기척을 느낀 큰 마님은 문밖으로 나와 그녀를 마주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돌아왔느냐?”짧디짧은 말이었으나 무한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김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안채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으며 문안 인사를 올렸다.“조모님, 그간 기체일향하시나이까?”“어서 할미에게 오거라.”큰 마님은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팔을 들었다.김단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큰 마님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많이 여위었구나.”짤막한 한마디의 말에 묵혀뒀던 설움이 밀려 온 김단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몸종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3년 전 진산댁의 모두가 친딸에게 관심을 쏟던 순간에, 한켠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던 김단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큰 마님이었다. 김단은 언제고 당신의 손녀이라며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그녀가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을 때, 중전마마께 간청을 올리려한 것도 큰 마님뿐이었다. 하지만 중전을 뵙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공주가 그녀를 궐 밖으로 내쫓는 바람에 세답방에서 바로 빼내지 못했다.진산군댁 큰 마님의 무모한 성정을 나무라 하는 나인에게 달려든 김단은 결국 그날
민태훈의 표정을 본 김단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대감께서는 제가 이 일을 공주 마마께 말씀드릴 거라 생각 못 하신 겁니까?”일을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정말 고작 몇 개의 무기로 그녀를 겁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그녀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민태훈은 고개를 숙이고 끝까지 부인했다. “낭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어쨌든 떳떳한 일은 아니었기에 어사대부인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벌할 빌미를 줄 수 없었다.그들에게는 어떠한 증거도 없지 않은가!서원 공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감이 부인한다고 해서 내가 자네를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오?”그녀가 주상에게 말하면 증거가 없더라도 민태훈에게 호된 벌을 내릴 수 있었다!민태훈도 이를 똑똑히 알고 있기에 끝내 고개를 숙였다. “공주 마마께서는 소신이 어찌해야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공주가 그를 불렀음에도 곧장 주상에게 고하지 않은 것을 보니, 공주는 아직 이 일을 주상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그러니 이 일에는 아직 반전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과연 공주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간단하오. 김씨 낭자에게 사과하시오.”이 말을 들은 민태훈은 깜짝 놀랐다.영의정의 손자인 그가, 일개 칠품 의녀에게 사과하라니?그는 죽기보다도 싫었다.하지만 서원 공주의 심술궂은 표정을 본 민태훈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김 낭자, 미안하오.”김단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서원 공주가 굳이 민태훈을 불러낸 이상 단순한 사과만으로 끝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서원 공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성의가 없어서야 되겠소? 사과는 머리를 조아려야 하지 않소?”민태훈은 깜짝 놀랐다. 김단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이는 명백히 그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닌가?!순간 그의 두 눈이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 찼다.김단은 서원 공주의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서원 공주가 정말로 사람을 모욕하는 방법을
이 일 때문에 그녀는 주상과 몇 번이나 다투긴 했으나, 민씨 가문 사람들이 맹영지를 이렇게 대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그녀가 맹영지와 가깝든 그렇지 않든, 맹영지는 그녀를 이모라고 불러야 했다.민태훈이 맹영지를 학대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녀를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중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도 더 이상 공주를 막지 않았다.이에 서원 공주가 입을 열었다. “민태훈을 불러오거라!”“예!”하인 하나가 대답을 한 뒤 물러갔고, 민태훈의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주의 침소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하지만 서원 공주는 그를 바로 만나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민태훈은 꼬박 한 시진을 기다렸으나 끝내 인내심이 바닥나 옆에 있는 소복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공주 마마께서 오늘 신을 뵐 겨를이 없으신 듯합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국사를 그르칠까 염려되오니, 다음 기회에 다시 오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예를 표하고 떠나려 했다.하지만 소복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이런 무례한! 공주 마마께서 자네를 보려 하시는데 감히 핑계를 대고 거부하다니, 마마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오?”민태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공주 마마께서 한참을 기다려도 안 만나주시지 않습니까! 소인은 아직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았는데, 국사를 그르친다면 대감께서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하지만 소복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이 어사대부지, 매일 다른 사람 잘못을 들추거나 약점을 잡아 주상 전하께 아뢰어 이간질이나 하는 자가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오?”“대감!”민태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감히 우리 본관을 모욕하는 것입니까?!”“굳이 내 앞에서까지 관직을 내세워 거들먹거릴 필요 없소. 대감은 영의정 대감의 그늘 아래에 있었기에 조정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을 뿐이오. 하지만 아무리 대감이 영의정 대감의 친손자라 할지라도, 우리 공주 마마께서는 주상 전하의 친따님이시자 우리 대정의 유일한 공주 마마시오! 공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밖은 잠잠해졌다.경씨는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차 안을 향해 물었다. “낭자, 다치신 곳은 없소?”김단은 아직도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저는 괜찮습니다. 누구의 소행입니까?”경씨는 마차에서 암살 무기 하나를 뽑아 살피고 나서 말했다. “이 무기를 다루는 솜씨가 조잡한 것을 보니, 전문 자객의 소행은 아닌 듯 하오. 게다가 모두 마차에 박혔고, 일부러 휘장을 피한 것을 보니 낭자를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소.”그럼, 단지 경고하러 온 것이란 말인가?김단은 누가 한 짓인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민태훈이 이렇게 성질이 급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번거롭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무기들을 모두 거두어 주십시오. 내일 궁에 들어가 공주 마마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알겠소.”경씨는 대답을 하고 사방에 꽂힌 무기들을 모두 거둔 뒤 평양원군 저택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김단은 입궁 후 가장 먼저 어젯밤의 암살 무기들을 서원 공주와 중전 앞에 바쳤다.갑자스럽게 무기를 본 서원 공주와 중전은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서원 공주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대담하오! 암살 무기를 가지고 궁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오?”김단은 그제야 말했다. “공주 마마께 아뢰옵니다. 이것은 어젯밤 소신의 마차를 습격한 암살 무기입니다.”이 말을 들은 중전은 깜짝 놀라 물었다. “습격을 당한 것이오?”김단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습격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소신에게 경고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러 소신을 해치려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서원 공주도 어리석지 않았기에 이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낭자의 말은, 민태훈이 한 짓이라는 것이오?”“증거가 없어 감히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민 대감 외에는 소신이 감히 악감정을 살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김단의 말을 듣고 서원 공주는 또다시
“헤헤, 그 아씨께서 분명 마음속에 도련님을 품고 계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희 노점을 보자마자 도련님께 드릴 염주를 사려고 하셨겠습니까!”소하는 고개를 들어 그 노점상을 보며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말하는 동안 허리에서 잔돈을 꺼내 노점상에게 주며 말했다. “날도 저물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노점상은 감격하여 급히 잔돈을 받아들고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소하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떠나갔다.노점상도 기분 좋게 좌판을 정리했다.하지만 갑자기 키가 큰 그림자가 비춰오던 저녁노을을 가로막았다.노점상은 고개를 들었고, 얼굴이 험악하고 무서운 남자가 좌판 앞에 서 있었다.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돈을 빼앗으러 온 건가?하지만 노점상이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는 손을 들어 금강보리 염주 한 움큼을 움켜쥐었다.싸늘한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이딴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손에 힘을 주자 금강보리 염주가 부서져 버렸다.노점상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덩어리의 은자가 노점상 눈앞에 놓여 졌다.노점상은 순간 눈이 휘둥그래졌다.이는 무려 50냥짜리 은자였다!그는 평생 이렇게 큰 은자는 본 적이 없었다!“이것들 전부 다 사겠소.”소한이 말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남은 금강보리 염주들을 움켜쥐고 뒤돌아 떠났다.표정은 서리가 내린 듯 싸늘했다.방금 전 김단과 소하가 연신 기뻐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고, 이내 그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그는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것인데,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두 사람의 사이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가까워졌다!어의원에서는 거의 입을 맞출 뻔하더니, 이제는 염주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이다!그가 계속 손을 놓고 있는다면 그들은 또다시 혼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이렇게 생각
사내 팔찌?소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그는 김단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왜 갑자기 사내의 팔찌를 사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누구에게 주려고?소한인가, 아니면 최지습인가?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하는 무의식적으로 최지습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상인이 말했다. “사내 팔찌는 없습니다만, 염주는 있습니다. 아씨, 한번 보시겠습니까?”“좋소, 보여주시오!”김단은 흔쾌히 대답했고, 노점상은 좌판 밑에서 접시를 하나 더 꺼냈다. 접시 위에는 여러 색깔의 염주가 놓여 있었다. 노점상은 소개했다. “보시지요, 이것들은 모두 금강보리 염주입니다. 귀인들이 차는 것보다는 품질이 좀 떨어지지만, 세공이 정교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무늬를 보시지요!”“딱 보기에도 정말 괜찮군.” 김단은 그 말과 함께 소하를 향해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생각은 어떠세요?”소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음, 괜찮소.”“그럼 이걸로 하겠네!” 김단은 염주 하나를 집어 들고 돈을 지불한 후, 돌아서서 소하의 왼손을 잡았다. “오라버니께서 늘 저를 돕고 지켜 주셨는데, 저는 오라버니께 아무것도 드린 게 없지 않습니까? 이 염주가 제 작은 성의입니다.”그와 동시에 그녀는 금강보리 염주를 소하의 손목에 채워주었다.소하는 이 염주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예상치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나에게 주는 것이오?”“그럼요!” 김단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져 있었다. “오라버니, 너무 하찮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소하는 가슴이 약간 떨렸고, 진정하고 난 뒤 에야 말했다. “어찌 그러겠소.”“그럼 됐습니다. 오라버니, 매일 차고 다니셔야 합니다. 제가 확인할 거예요!”김단은 괜히 어기장을 놓았다.그녀는 소하에게 그가 한빙산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말해 봤자 소하를 걱정시키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이에 그녀는 소하의 중독 상황을 자주 확인할 수 있을 구실을 찾아야 했다.염주를 선물한
더욱이 그 민태훈이라는 자는 성품이 음흉하고 악독하며,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남을 해치고 자신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 짓만 골라서 하니, 영의정이 눌러놓지 않았다면 구서보다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소하는 김단이 영의정 쪽 사람들과 민태훈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히 달려온 것이다.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금군 총령인 그의 신분이 마부보다는 훨씬 쓸모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공주 마마의 지위을 빌린 겁니다!”영의정과 서원 공주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는지 김단은 알지 못했지만, 조정 대신이자 일품 벼슬아치로서 버릇없는 공주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부분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영의정이든 태부든, 혹은 그 밖의 명문가들이든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다만 서원 공주가 아직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다.하필 오늘 김단이 서원 공주와 영의정 가문의 첫 정면 충돌을 일으켰으니, 영의정이 참고만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영의정이 참는다 해도 민태훈은 분명 참지 못할 것이다.소하는 그제야 김단의 속셈을 깨달은 듯했다. “설마 그들을 싸우게 만들려는 것이오?”김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소하가 말했다. “하지만 결과가 낭자의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소.”어쨌든 서원 공주에게든 영의정 가문에게든 이는 사소한 일일뿐이다.이 사소한 일 하나로 한쪽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김단의 두 눈은 정면을 향했다. “모래가 모여 탑이 되고,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공주 마마가 주상 전하의 마음속에 그토록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한 번의 공격으로 쓰러뜨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작은 일들이 쌓여 주상 전하께서 공주 마마에 대한 약간의 불만을 가지게 되고 그때 큰 수를 둔 다면, 단번에 끝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김단의 그 작은 ‘계략’에 소하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내 서재에 있는 병서들을 헛되이 보
“소 오라버니.”김단도 그를 불렀고, 천천히 소하를 향해 걸어갔다.소하는 고개를 들어 영의정 저택의 높은 현판을 바라보고 나서 김단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걷겠소?”김단은 소하가 분명 자신이 맹영지의 일 때문에 온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평양원군 댁의 마부를 바라보았다.마부의 성은 경이고, 평소 김단은 그를 경씨 도령이라고 불렀다.그는 최지습이 김단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둔 사람이었다.지시를 받은 경씨도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김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소하에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쪽으로 가시죠.”소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김단은 그를 따라가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맹 낭자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정신이 맑지 않고 반응도 매우 느려요. 몸에 상처가 있는 걸 보니 오랜기간 민태훈에게 학대를 당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민태훈이 제가 맹 낭자를 치료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중전 마마와 공주 마마를 움직이니 민태훈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 말을 들은 소하의 얼굴은 매우 심각해졌다. “나는 낭자가 영의정 댁으로 시집을 갔으니 좋은 날만 보냈을 줄 알았소.”누가 알았겠는가,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을 줄.김단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네, 제가 세답방에 있었을 때보다 더 비참했습니다.”그 말을 하며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그녀는 문득 소하를 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혹시 맹 낭자를 보고 싶으신겁니까? 제가 내일 영의정 댁에 갈 예정인데, 기회를 봐 두 분을 만나게 해 드릴까요?”김단은 소하와 맹 낭자의 예전 관계를 생각하니 소하가 맹영지를 매우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소하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어찌됐든 맹 낭자는 민태훈의 아내이니, 정으로 보나 이치로 보나 내가 만나는 것은 옳지 않소.”말을 마친 소하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김단을 보며 말했다. “설마 내가
“네 이놈! 주인을 믿고 미쳐 날뛰는구나!”참으로 익숙한 말이었다.김단은 며칠 전 자신이 소복을 보며 그렇게 욕했던 것을 떠올렸다.이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영의정 댁에서 날뛰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아무리 맹 부인을 치료하지 못하게 막으셔도, 저는 기어코 치료할 것입니다! 어디 한번 저를 쫓아내 보시지요, 공주 마마께서 잘난 당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으실지 없으실지 한번 지켜보시지요! 그리고 잘난 당신의 할아버님께서도 당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봅시다!”“네 이놈!”“지나가겠습니다!”김단은 민태훈을 밀치고 맹영지의 방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아침에 한 번 와봤기에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민태훈은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가버렸다.김단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 민태훈의 분노한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바로 이거다. 더 화낼수록 좋다. 민태훈이 공주와 개처럼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일 것이다. 그들이 심하게 싸울수록 그녀는 더욱 기뻤다!맹영지의 어린 하녀는 김단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김단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김단은 그녀를 위로할 시간이 없었고, 다시 맹영지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러다 맹영지의 뒤통수에 작은 혹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건 언제 생긴 것이냐?”김단이 물었다.어린 하녀는 앞으로 나와 한번 보고는 말했다. “오래됐습니다. 아마 3년 전쯤일 거예요. 대감...께서 찻주전자로 뒤통수를 때리셨는데, 부인께서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셨지만 뒤통수에 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부인께 여쭤보니 아프지 않다고 하셔서 의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민태훈이 맹영지가 3, 4년 동안이나 아팠다고 말한 것과 혹이 생긴 지 3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맹영지가 지금처럼 반응
한 시진 후, 김단은 다시 영의정 저택으로 돌아갔다.소복이 앞장서 김단을 데려갔다.궁궐에서와는 달리 소복은 영의정 댁 문을 들어서자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였다.영의정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했고, 소복은 깍듯하게 영의정에게 예를 표하면서도 꽤나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대감, 평안하셨소? 실은 공주 마마께서 사촌 분을 염려하시어 나에게 낭자를 데리고 가 살펴보라고 명하셨네.”맹영지와 서원 공주는 사촌 자매였다.소복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이 커졌음을 직감했다.그는 곧장 옆에 있는 민태훈을 노려보았다.민태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김단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고, 이내 앞으로 나와 소복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대감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제 부인은 이미 병세가 깊어 낭자가 오늘 아침에 와서 보았음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중전 마마와 공주 마마께서도 이미 낭자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소복은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심지어 낭자는 그 때문에 중전 마마의 맥을 짚어 드리는 일정에도 늦었소! 하지만 중전 마마께서도 조카 분을 가엾게 여기시어 꾸짖지 않으셨네.”꾸짖지는 않았지만, 민씨 가문 때문에 중전 마마의 일을 그르쳤다고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격이었다.민태훈의 표정은 이미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사실 그는 시간을 계산해 두었었다. 김단이 매번 사시쯤 중전의 맥을 짚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청하면 전혀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더욱이 그는 김단이 궁궐에 먼저 다녀와 일을 본 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부르자마자 냉큼 올 줄이야!아무래도 역시 영의정 가문의 병을 고치면 자신의 명성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서둘러 온 것일 것이다!그 생각에 민태훈의 음흉한 눈빛이 다시 김단을 향했다.김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소복이 영의정을 향해 말했다. “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