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식구만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소한도 없고, 김단도 없이...지금부터, 한양에 있는 귀인들은 더 이상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소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는 정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는 강렬히 요구하지 않았다.김단도 알아들었다.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울어서 힘이 빠진 정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손목에 있는 옥팔찌를 뺐다.“제가 이 팔찌를 가질 자격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암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눌렀다. 정암 어머니의 얼굴은 아주 힘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김단을 보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당신에게 줬으면 당신의 것입니다. 내게 돌려주는 것이 오히려 정암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김단은 멍하니 정암 어머니를 바라봤다.그녀에게 이 옥팔찌를 남긴다는 것은 그녀를 아직 정씨 집안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그녀는 이런 일이 있어도 정씨 집안의 가족이 여전히 그녀를 인정할 줄 몰랐다.마음속에 씁쓸함이 솟아오르자, 김단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정암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감격도 있고 미안함도 있었다.정암 어머니는 가볍게 김단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유감하기도 했다.정암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했다.“됐어. 늦었다. 어서 가자!”이 말을 듣자, 김단은 정암 어머니를 놔주었고, 숙희도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해서 옆으로 물러섰다.정암 부모님은 마차에 앉아 정암을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정유이도 따라가면서 김단 옆을 지날 때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 방에 오라버니가 남긴 물건이 있어요.”김단은 멍하니 서 있었고, 다시 뭔가 묻고 싶었지만, 정유이는 이미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정암을 데리고 가는 대열이 작은 점처럼 보일 때쯤에, 김단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뒤돌아서니, 소한은 아직 성문에 있었다.김단이 돌아보자, 소한은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집까지 데려다 주겠소.”김단은 얼굴에 못다 마른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됐어요.
조선의 어느 음력 12월 28일.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오전에 시작했던 빨래를 간신히 마친 김단은,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파랗게 질린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세답방의 나인에게 불려갔다.“어서 가보게. 진산군댁에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나인의 말에 김단은 자리에 얼어붙었다.진산군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한때 그녀도 그 댁의 귀한 여식으로 15년을 자랐었다. 3년 전, 자기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정2품 진산군댁의 안주인인 정부인 임씨와 같은 해에 출산했던 유모는 임종 직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자기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김단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부부가 자신의 친딸, 임원을 상봉한 것에 감격스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녀와 부녀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었다.진산군은 안색이 어두워진 김단에게 앞으로도 이 집안의 여식으로 남아 임원의 언니로서 살아가도 좋다고 했다. 임씨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하겠다고 약조했다.하나, 궁궐에 들어 공주자가의 유리그릇을 깨트린 임원을 발견한 부부는, 임원의 몸종이 김단을 모함할 때조차 임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수양딸이었던 김단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공주는 분에 겨워 그녀를 세답방의 무수리로 쫓아냈으나, 한때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임원의 옆에 서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그날, 김단은 그들이 자신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그 댁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나인의 독촉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세답방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친 문 쪽에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그 목소리에 김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전 무감각해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은 익숙한 목소리에 활력을 얻은 듯 천천히 뛰었다.그녀는 천천히 마차 안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 호국 장군이 된 그녀의 옛 정혼자, 소한이다. 그녀는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장군님이시군요.”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한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향했다. “낭자, 진산군댁에 가는 길이었소?”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소한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는 항상 곁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여인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집안에서 정해준 혼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견뎠었다. 가끔은 지치지 않고 떠드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떡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그 순간조차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던 그녀였다. 떡으로 입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반 시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활달했던 여인이었다. 못 본 사이, 김단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처럼 떠들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소한은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냉랭하게 말했다. “마침, 궐에 들던 길이었소. 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시오.”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가 한마디 더 했다. “다쳤으면 무리하지 마시오. 본인은 몰라도, 그 댁 큰 마님께서 속상해할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조모님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무수리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조모님께서 중전마마께 간청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돌아온 그녀를 보게 되면, 조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 여긴 김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 장군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가까이선 본 소한은 3년 전과 달리 키가 훌쩍 커져 있었고 체격도 다부져졌다.최근 전쟁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도 전
김단이 전에 묵었던 별당은 매화당이었다.정원에 무수한 매화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꽃샘추위가 찾아올 즈음 핀 매화꽃들은 초봄까지 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매화라는 소리에 진산군은 조선 팔도로 사람을 보내 매화나무를 구해왔고 그 종류는 다양했다. 그 후로 매년 수백 냥의 은자를 들여가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나무를 극진히 돌봤다. 하지만 매화당에 핀 매화꽃이 아름답다는 임원의 말 한마디에 매화당은 곧 임원의 별당이 되었다.그 순간에는 자기 별당을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이 집안의 친딸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었다. 이 집안의 물건과 사람들은 전부 임원의 것이었다.김단, 그녀야말로 남의 자리를 꿰찬 외부인이었다. 길을 안내하던 몸종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씨를 모셨던 몸종이 혼인하여 출가하는 바람에 마님께서 쇤네를 아씨께 보내셨습니다. 쇤네는 숙희라 하옵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쇤네를 불러 말씀하시면 됩니다.”숙희는 통통한 볼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단은 그녀가 눈에 익었다.“혹 전에 오라버니를 모시지 않았더냐?”숙희가 놀란 듯 답했다.“쇤네를 알아보시겠습니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예전에 임학의 외별당에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임학의 몸종을 자기에게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분명 3년 전만 해도 임학은 그녀가 임원을 해치려 한다고 오해하며 그녀에게 적대심을 품었다.그런 사람의 몸종을 붙인 거로 보아, 감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새로 안내받은 별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연꽃이 활짝 피어 꽤 아름다웠을 테지만, 지금은 연꽃이 다 지고 시든 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다행히 실내에 불을 지핀 덕에 따뜻했다.미리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둔 숙희는 김단의 목욕을 돕기 위해 나섰으나, 김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하면
임원이 선의로 건넨 말을 날카롭게 받아치는 김단을 본 임학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말에 씨가 있구나. 몸에 상처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뭣 하러 숨긴 것이냐?”그녀가 미리 말만 했어도 임학은 내의원에 들러 약을 받아왔을 것이다.“도련님께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오라버니라 칭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분개한 임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 집에서 어릴 때부터 네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세답방에 과연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었기에 이리도 다친 것이냐?”그의 말에 김단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천천히 끌어내린 그녀도 서늘하게 대꾸했다.“처음에는 반항도 하였지요. 도련님 말씀처럼 세답방 나인들은 소인의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 그들의 수법도 점점 다양해지더군요. 깊이 잠든 사이 차가운 물을 부어버린다거나, 밥을 먹을 때 남들은 국을 퍼가지만 소인에겐 하수구 물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빨래한 옷들을 뒷간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자신들의 일을 소인에게 떠넘기기도 했더이다.”임학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궁마마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소인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저항도 하지 않게 되었고 침구가 젖으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하수구 물이라도 먹었습니다. 한 번은 상궁마마께서 하도 심하게 구타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 진산군댁 수양딸이라는 신분 덕에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요. 그 뒤론 전처럼 심한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깜짝 놀란 임학의 표정에 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혹 소인이 못 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그런 고초를 당했다고 여기신 겁니까?”“괴로워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분을 가진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괴로워할지언정, 소인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분들이라는 거 잘 알고 있나이다. 어쩌면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은 게 이 댁 아씨가 아니라 소인이라 안도하셨을 수도 있겠지요.”임학은 자신을
소한이 손에 든 약재 함을 내려다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임학은 불안한 듯 재촉했다. “금일 전하께서 궐에 들라는 전교를 내린 적 없는 줄로 아네만, 혹 김단을 마중간 것이오?”임학은 소한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였고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임학이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제정신이오? 전에 김단이 좋다고 매달릴 땐 미동도 하지 않던 인간이, 원이의 정혼자가 된 지금 다시 김단에게 흔들리는 게 정상이오? 내 누이들을 불장난에 끌어들일 생각 마시게! 그땐 우리의 우정도 끝날 테니.”소한은 조롱 어린 시선으로 임학을 쳐다보았다.“자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첫째 누이를 신경을 쓰는 것 같군.” 사실 소한의 말처럼 누구보다 김단을 신경 쓰는 것은 임학이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소한의 말에 임학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고고한 척하지 마시오. 3년 전 그날, 그 자리에 자네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저 아이는 날 원망하기도 하지만, 자네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알고 있소.”소한이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마차 안에 있던 수정과는 건드리지도 않더군.”수정과는 고사하고 난로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만약 큰 마님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소한의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소한을 보자마자 예를 갖춰 인사하며 거리를 뒀다.전처럼 만나서 좋다며 인사하지도 않았고 그를 연모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소한은 마음이 어지러웠다.누구보다 소한에게 다정했던 누이가, 소한을 연모하던 누이가 더는 그에게 미련 없이 돌아섰다는 말에 임학도 큰 충격을 받았다. 누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딴사람이 되자, 임학도 상당히 놀랐다. 그녀의 발에 가득 자리 잡은 흉터들이 떠오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세답방 궁인에게 화가 났다. 공주자가의 명이라 할지언정, 김단은 진산군의 여식이었다. 임학은 불편한 기색을 띠며 소한을 흘겨보았다.“전쟁터에서
그날 밤, 김단은 새벽녘까지 잠에 들 수 없었다.방 안의 난로가 뜨겁게 타올라서일 수도 있고, 3년 동안 추위에 떨며 비가 새는 음침한 오두막과는 달리 너무 포근한 잠자리 때문일 수도 있었으며, 마른 이불이 너무 따뜻해서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황홀하게 느껴질 만큼,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낯선 기분이 들었다.남은 생은 세답방에서 보내게 될 줄 알았으나 다행히 그곳을 벗어났다.이튿날 아침, 눈 부신 햇살이 방 안을 비췄다.그녀는 비로소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임씨 부인이 새로 준비해 준 옷은 그녀의 몸에 알맞지 않았지만 상처는 가려줄 순 있었다.그녀는 아침 일찍 안채로 향했다. 아침 기도를 하시는 조모님을 기다리기 위해 안채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인기척을 느낀 큰 마님은 문밖으로 나와 그녀를 마주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돌아왔느냐?”짧디짧은 말이었으나 무한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김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안채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으며 문안 인사를 올렸다.“조모님, 그간 기체일향하시나이까?”“어서 할미에게 오거라.”큰 마님은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팔을 들었다.김단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큰 마님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많이 여위었구나.”짤막한 한마디의 말에 묵혀뒀던 설움이 밀려 온 김단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몸종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3년 전 진산댁의 모두가 친딸에게 관심을 쏟던 순간에, 한켠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던 김단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큰 마님이었다. 김단은 언제고 당신의 손녀이라며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그녀가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을 때, 중전마마께 간청을 올리려한 것도 큰 마님뿐이었다. 하지만 중전을 뵙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공주가 그녀를 궐 밖으로 내쫓는 바람에 세답방에서 바로 빼내지 못했다.진산군댁 큰 마님의 무모한 성정을 나무라 하는 나인에게 달려든 김단은 결국 그날
임학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김단을 쳐다보았다. 김단이 철없다고 여겼던 그는, 자기 모친께서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에 그는 진실을 알 수 있었다.김단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하나뿐인 여식을 누구보다 아끼셨던 부친께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실로 믿기지 않았다.그는 뒤늦게 깨달은 진실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혼자 남은 소한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그는 어색하게 큰 마님에게 인사 올렸다.어린 나이에 늠름한 호국 장군이 된 사내를, 용맹과 지혜를 겸비한 자를, 예의 바른 사내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소 장군, 어서 앉으시게! 어제 보내준 귀한 약재들은 잘 받았네. 내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해야 했거늘.”소한은 임원의 곁에 앉았다. “소인의 부모님들은 정년이라 귀한 약재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상전하께서 하사하신 인삼과 녹용이니 좋은 품질일 것입니다. 큰 마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정말 효심이 깊구려. 마침 소 장군의 혼사에 대해 논의 중이었소. 소 장군이 직접 부모님께 여쭤보게. 적절한 날을 골라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소한의 시선이 임원에게 향했다.임원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임씨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변론했다.“아이고, 아직도 이런 것에 얼굴을 붉히면 어쩌자는 게냐?”임씨 부인은 얼른 소한에게 말을 돌렸다.“나이도 어느 정도 찼으니, 이젠 혼사를 진행할 때가 된 것 같네.”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소한의 시선이 김단에게 닿았다.“낭자 생각은 어떻소?”갑작스러운 질문에 김단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녀는 물론, 옆에 있던 임씨 부인과 임원도 상당히 놀란 눈치챘다.소한과 김단을 번갈아 쳐다보던 임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혹
네 식구만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소한도 없고, 김단도 없이...지금부터, 한양에 있는 귀인들은 더 이상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소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는 정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는 강렬히 요구하지 않았다.김단도 알아들었다.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울어서 힘이 빠진 정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손목에 있는 옥팔찌를 뺐다.“제가 이 팔찌를 가질 자격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암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눌렀다. 정암 어머니의 얼굴은 아주 힘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김단을 보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당신에게 줬으면 당신의 것입니다. 내게 돌려주는 것이 오히려 정암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김단은 멍하니 정암 어머니를 바라봤다.그녀에게 이 옥팔찌를 남긴다는 것은 그녀를 아직 정씨 집안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그녀는 이런 일이 있어도 정씨 집안의 가족이 여전히 그녀를 인정할 줄 몰랐다.마음속에 씁쓸함이 솟아오르자, 김단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정암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감격도 있고 미안함도 있었다.정암 어머니는 가볍게 김단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유감하기도 했다.정암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했다.“됐어. 늦었다. 어서 가자!”이 말을 듣자, 김단은 정암 어머니를 놔주었고, 숙희도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해서 옆으로 물러섰다.정암 부모님은 마차에 앉아 정암을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정유이도 따라가면서 김단 옆을 지날 때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 방에 오라버니가 남긴 물건이 있어요.”김단은 멍하니 서 있었고, 다시 뭔가 묻고 싶었지만, 정유이는 이미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정암을 데리고 가는 대열이 작은 점처럼 보일 때쯤에, 김단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뒤돌아서니, 소한은 아직 성문에 있었다.김단이 돌아보자, 소한은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집까지 데려다 주겠소.”김단은 얼굴에 못다 마른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됐어요.
그녀 때문에 정암 부모님은 아들을 잃고 정유이는 오라버니를 잃었다.모두 그녀의 잘못이다.그러나 정유이가 더 비통하게 울더니 말했다.“그러나 오라버니께서 내가 당신을 탓하는 것을 보면 내게 화낼 것 같아요...”이 한마디는 칼처럼 김단의 마음속에 단단히 꽂혔다.김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유이를 바라보았다. 정유이는 눈물로 말문이 막혔지만, 간신히 입을 열었다.“오라버니가 떠날 때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번 생엔 어떤 여자도 당신처럼 그의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그저 당신이 평안하고 기쁘면 된다고, 목숨을 바쳐도 상관없다고 했어요.”“김단, 내 오라버니가 정말 목숨을 바쳤으니, 당신은 무조건 평안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아니면, 나는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이것은 그녀 오라버니의 마지막 소원이었다.정유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더는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그녀는 왜 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의 목숨으로 다른 한 사람의 평안과 기쁨을 바꿀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 오라버니가 한 말이니, 그녀는 거역할 수 없다.숙희는 급히 다가가서 정유이를 안았고, 정유이도 그녀를 안으면서 땅이 꺼질 듯 울었다.이 말들이 김단 마음에 적중했는지 그녀는 무기력하게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그녀는 그제야 그날 정유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이해했다.정암은 떠나기 전에 이미 가장 나쁜 결과를 예상했던 것인가?그는 분명히 당우리 산적들이 얼마나 흉악한지 알고,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 것인가?왜?왜 그렇게 어리석은 거야?그가 아무런 공훈을 세우지 않아도 그녀는 계속 그의 곁에 지키고 있을 것이다.그녀가 중히 여기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정암 그 자체다!끊임없이 밀려 오는 슬픔이 순간 김단 몸에 있는 모든 힘을 빼앗았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넘어졌는데 정암 아버지가 그녀를 부축했다.김단은 멍하니 고개를 돌려 정암 아버지를 보더니 눈물이 또 쏟아졌다.“
김단은 멍하더니 어젯밤에 산적이 한 말을 떠올렸다. 만약 소한이 사람을 보내 그녀와 함께 가지 않았더라면 산적은 관에 있는 사람이 정암인지 몰랐을 것이다.그럼, 어젯밤의 전투도 없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그녀는 벌써 당우리를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소한의 탓인가?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를 탓하면 안 된다.소한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도 산적을 만날 거라 생각 못 했다.더군다나, 이번 일은 산적이 흉악해서 온 마을의 백성, 심지어 갓난아이까지 도살해서 일어난 것이다.그러지 않으면 주상이 밤늦게 파병할 일도 없고 이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모두 일어났다.정암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죽었다.그녀는 평온하게 ‘당신 탓 아니야’라고 할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일에 관한 모든 사람을 탓하고 있었다.제일 많이 탓하는 것은 그녀다.그래서 그녀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산적이 다시 와서 난리를 칠까 봐, 두 사람은 노상이 파견한 원군을 기다렸고, 대열은 하루 종일 지연되다 저녁이 되어 다시 길을 떠났다.김단과 소한은 길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정암이 죽은 지 12일째 되는 오전에 드디어 한양에 도착했다.아직 성문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김단은 벌써 성문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몇 사람을 봤다.가슴이 갑자기 빨리 뛰었다.정암의 가족이다.소한은 이미 정암이 죽었다는 소식을 한양에 전했다. 그래서 정암의 가족이 지금 성문에서 정암을 데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대열은 멈추지 않았고 김단은 마차에 앉아 안절부절못했다.김단은 돌아오는 내내 정암 부모님을 보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러나, 내내 고민했어도 그녀는 여전히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그들의 아들이 그녀 때문에 죽었는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변명하는가?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몸도 마음과 같이 떨고 있었다.심지어 그녀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했다.그러나 그녀는 도망가면 안 된다는
김단의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경각심이 가득한 소리로 말했다.“다가오지 마!”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김단은 당황해서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소한은 김단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거라 생각 못 하고 급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검은 그의 소매를 그었다.김단은 자기가 상대방을 찌르지 못했다고 느껴서 또다시 휘둘렀지만, 상대방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품에 안았다.“걱정하지 마, 나야!”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김단이 버티던 동작을 갑자기 멈추게 했다.그녀는 몸이 경직되면서 떠보듯 물었다.“소한?”“그래, 나야!”소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끝났어!”끝났다고?김단의 경직된 몸이 드디어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바로 소한의 옷으로 눈앞의 피를 닦고, 그를 떠밀어 산림 밖으로 뛰어갔다.관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김단은 놀라서 마차 위로 기어올랐다. 정암의 시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서야 이번에는 정말 힘이 풀려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그녀는 관에 기대어 앉아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신들을 봤다. 그녀는 멍했다. 모두 병사들의 시신이었다.그들은 그녀와 이틀의 여정을 함께 했는데, 지금 모두 여기에서 죽었다. 바짝 긴장한 마음의 끈이 순식간에 끊어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지 않았다면 이 젋은 병사들은 여기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정암처럼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미안함이 밀려오면서 무수한 손이 그녀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김단은 소리 내어 울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숨을 쉴 수 없어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눈부신 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해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마차는 아직 제자리였지만, 병사들의 시신은 모두 사라졌다.김단은 놀라서 일어나보니 관 뚜껑도 잘
소한은 하루 만에 당우리 쪽의 일을 다 처리했다. 산 채로 잡힌 산적들은 소한의 손에서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모든 일을 다 털어놓았다.소한은 당우리 현령 여만안이 보는 앞에서 모든 고문과 협박 수단은 다 썼다. 여만안은 놀라서 오줌을 지렸고 숨김없이 다 말했다.확실히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있었다.소한은 자세히 조사하는 일을 노상에게 맡겼다.노상은 왼팔이 잘려서 더는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지만,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면 나중에 조정에서 말단 벼슬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다. 당우리에 남아서 현령을 맡는 것도 폐인이 된 몸으로 집에 가서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소한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급히 말을 타고 떠났다.그는 안절부절못했다.김단이 떠난 뒷모습이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 잠시도 기다릴 수 없었다.그가 쉬지도 않고 말을 타고 쫓아갔을 때는, 김단을 보호하라고 보낸 사람이 벌써 다 죽어 있었다.산림 밖에도 시신이 가득했다. 그는 단번에 그중 몇 사람이 도망친 산적이라는 것을 알아봤다.정암의 관도 절반이나 열렸다. 다행히도 시신은 아무도 다치지 않아 그대로 남아 있었다.하지만, 김단이 사라졌다!그는 놀라서 김단이 산적들에게 잡혀갔다고 확신했다.정암이 죽기 전에 그에게 부탁한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다. 그런데 이제 며칠 지났다고 그녀가 벌써 산적 손에 잡혔다니!불안감과 미안함이 솟구치자, 소한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며 땅에서 어떤 단서를 찾고 싶었다. 시신이 아직 따뜻한 걸 보니, 이 사람들이 조금 전에 죽었다는 것을 증명했다.그러니까 그가 산적들이 김단을 데리고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만 알면, 쫓아가서 김단을 구할 수 있다.소한은 쭈그리고 앉아 땅에 있는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보며 김단의 발자국을 찾으려 했다. 어쨌든 여자의 발자국은 남자와 다르다.때마침, 산림 중에서 먹먹한 소리가 들려왔다.‘펑’‘펑’아주 규칙적이다.그는 순간 긴장하더니 검을 뽑고 산림 안으로 들어갔다.오늘 밤의 달빛
산적은 힘으로 억지로 그녀의 팔을 끊어내려는 듯했다.김단은 아픔을 참으면서 죽을 힘을 다해 손을 비틀었다.검이 산적의 몸속에서 비틀기 시작했다.“아!”산적은 아파서 소리 질렀고, 김단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김단도 아파서 고함지르기 시작했다.그녀의 고함은 아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디어,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검으로 산적의 몸속에서 한 바퀴 돌렸다.그 산적은 장이 끊어졌는지, 피를 토하더니 힘이 빠져 꼿꼿하게 뒤로 넘어갔지만, 검은 여전히 김단 손에 쥐어져 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피가 튀겨져서 눈도 못 뜰 정도다. 귓가에 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다섯째, 여섯째!”또 산적이다!김단은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조금 남아 있는 이성이 그녀가 더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있다.하지만, 조금 전에 고함이 그녀의 마지막 힘을 다 써버렸고, 팔도 아파서 얼굴에 있는 피도 닦지 못했다.이렇게, 김단은 넘어지고 말았다.그 산적은 두 명밖에 남지 않은 형제가 김단의 손에 죽은 것을 보고 바로 검을 들어 김단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산림이 너무 어두워져 산적은 정확히 찌를 수 없었다.검은 김단의 쇄골 밑을 찔렀다.격렬한 아픔이 전해지자, 김단은 드디어 손에 힘을 되찾고, 검을 쥐고 산적을 향해 휘둘렀다.산적은 팔에 부상을 입어 급하게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검은 김단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김단은 일어서려 했지만, 검이 어깨를 관통된 탓인지,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김단이 힘이 빠진 모습을 보자, 산적은 오히려 웃으며 눈에 흉악한 기운을 드러냈다.“너를 죽일 것이다!”산적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공격했다. 김단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산적이 발로 그녀의 검을 걷어차고는 그녀 몸 위에 앉아서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망할 것! 내가 너 죽이고, 네 남자 시신과 함께 성문에 버릴 것이다! 너희들 시신에 채찍질을 백 번 해야 내 분을 풀 수 있을 것이다!”먼저 집터가 없어지고, 오늘은 또 형
김단은 얼굴에 아직 병사들의 피가 묻은 산적을 보고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 그러다 뒤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다.이 상황을 본 산적은 더 크게 웃었다.깜깜한 밤에 풍기는 피비린내는 사람을 어지럽게 했다.김단은 아주 놀란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같이 따라가면 날 죽이지 않을 것이오?”김단이 이렇게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산적은 더욱 득의양양했다.“당연하지, 네가 말만 잘 들으면.”김단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말 듣겠소, 근데 내가 발목을 다친것 같소.”이 말을 듣자, 산적은 김단의 발목을 봤다. 조금 전에 무언가에 걸려서 넘어진 거 같아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그는 김단 얼굴에 쓰여 있는 두려움을 다시 보고는 약한 여자일 뿐이고 병기도 없는데 뭐 큰 일이 있겠냐고 생각했다.그래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김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김단 역시 무섭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산적을 잡은 순간, 김단은 순간 힘을 써 산적을 그녀 쪽으로 당겼다.그 산적은 중심을 잃고 김단의 옆에 세게 넘어졌다.그가 일어서기 전에, 김단은 이미 날카로운 비녀로 산적의 목을 찔렀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산적은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한 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산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섯째야, 어디에 있어?”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김단은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옆에 이미 죽은 산적을 보더니,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산적을 그녀 몸 위에 올렸다.그러고는 놀랐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그녀의 목소리는 산적의 시선을 끌었다.몸이 웅장한 산적 한 명이 빠르게 걸어왔다.그가 ‘여섯째’라 부르는 사람이 김단의 몸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리 급해? 빨리해, 넷째 형이 기다리고 있어!”하지만, ‘여섯째’는 움직이지 않았고, 김단은 계속 울면서 발버둥 쳤다.할 수 없어, 그 산적은 다가가서 ‘여섯째’를 잡아당겼다.
그 병사는 놀라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다른 한 병사가 이 광경을 보고 눈썹을 가라앉혔다.“이제 봄이 됐으니, 뱀이랑 벌레들이 나와서 먹을거리를 찾는 것 같소, 별일 아니오.”이 말을 듣자, 모두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회수했다.김단도 살짝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달빛 아래서 그 작은 뱀 머리를 봤다. 뱀 머리는 길가에 잘렸는데도, 계속 움직이려고 애쓰고 있다.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예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불안했다.다행히도, 뒤에 이틀은 아무 탈 없이 순조로웠다.병사들은 행군하는데 습관 되어, 매일 두 시간만 자고, 김단도 잘 보살폈다.하지만 그날 저녁의 불안감은 계속 김단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잘린 뱀의 머리처럼 가끔씩 꿈틀거리며 움직이려 했다.그녀의 불안을 증명하려는 듯, 이튿날 저녁에 길이 막혔다.길 앞에 놓여있는 큰 돌들을 보고, 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옆에 있는 누군가 의아했다.“이렇게 큰 돌들이 왜 길 한복판에 있지?”병사 한 명이 길옆에 있는 산꼭대기를 쳐다봤다.“산길이 미끄러져서 돌이 굴러떨어진 모양이오. 몇 사람은 나랑 가서 돌을 옮기고. 나머지는 남아서 김 낭자를 보호하시오.”“잠깐만!”김단이 제지했다.“그 돌들은 굴러떨어졌다 하기보다는 사람이 일부러 거기에 옮긴 거 같소.”돌들이 굴러떨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딱 맞게 길을 막았다.병사들은 김단의 말을 듣고, 바로 경각했다. 이때, 김단 옆에 서 있던 병사가 갑자기 김단의 몸에 피를 토했다.갑자기 온기가 느껴지자 김단은 온몸이 굳어 고개를 돌려봤다. 그때 병사의 뒤에서 누군가 그의 목을 베었고, 병사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그녀의 몸에 튀었다.“자객이다!”누군가 놀라서 소리쳤다. 산림중에서 몇 사람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상대방의 사람은 그들보다 적지만, 갑자기 쳐들어오는 바람에 이기는 추세였다.김단은 마차에 앉아 가슴이 조여왔다. 주위에서 계속 피 튀기는 것을 보니, 도망간 산적들이 다
두 시간 후.소한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어스레한 촛불도 거의 다 타버려서 불빛이 꺼질락 말락 했다.문밖에서 낮은 소리의 통보가 들려왔다.“장군님, 김 낭자가 떠났습니다.”그녀는 정말로 조금도 기다리기 싫어하군.“알았어.”소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꺼질락 말락 하는 촛불이 그의 냉담한 옆모습을 비추더니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졌다.머릿속에는 모두 그녀가 아무런 미련 없이 결연하게 떠나는 모습이다. 언제부터였나?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소한은 도무지 알 수 없다.분명히, 그녀는 그를 따라다니기를 가장 좋하했는데...그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 식지에 멈췄다. 거기에는 긴 흉터가 있다. 그 흉터는 2년 전에 전쟁터에 갔을 때 적의 칼에 베인 것이다.그가 빨리 반응하지 않았다면 손이 잘렸을 것이다.2년 전에 일도 너무 오래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그녀는?그녀가 자기를 좋아하고 쫓아다니는 일도 너무 오래 전의 일이 아닌가?그의 마음이 갑자기 당황해졌다.소한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촛불이 드디어 꺼졌고, 침울했던 그의 얼굴도 어둠 속에 잠겼다.김단은 혼자서 정암을 데리고 떠난 것이 아니다.소한은 도망치는 산적들을 아직 다 잡지 못해, 김단이 위험할까 봐 열 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그녀와 동행하라 했다. 김단은 혼자서 정암을 데리고 돌아간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거절하고 싶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다니면 오히려 너무 눈에 띈다.하지만, 소한은 그녀에게 두 가지 선택을 줬다.하나는 열 명의 병사가 그녀를 보호해서 한양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당우리의 일을 마치고 그랑 같이 돌아가는 거였다. 김단은 당연히 첫 번째를 선택했다.관청과 산적이 결탁하여 만들어 낸 일이어서 많은 것이 연루되었다. 소한이 일을 다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면 어느 세월인지도 모른다.정암의 시신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다.오작이 전문적으로 관을 싣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