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말한 성민은 잠시 회상하다가 말을 이었다.“다들 맛있다고 했습니다.”“뭐라고요...”성민의 이 얘기를 들은 소영은 더는 웃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그녀는 원래 이 도시락을 성민에게 주려고 했었다. 수현이 바쁠 거라 생각되어 조수에게라도 좋은 인상을 남겨주고 싶었다.하지만 점심때 수현이 돌아왔다. 심지어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조수와 사무실 직원들에게 나눠 주었다.소영은 순간 자신의 성의가 짓밟혔다고 느껴졌다.“아가씨, 왜 그러십니까?”성민은 앞에 서 있는 소영을 보며 물었다.“괜찮으십니까?”이 말을 듣자, 소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간신히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괜찮아요. 그러면 전 먼저 수현 씨 보러 갈게요.”“네.”소영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성민은 얼굴의 웃음기를 사악 지웠다.똑똑--“들어오세요.”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소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늘한 얼굴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수현이 눈에 안겨 왔다.일하고 있는 수현은 특별한 아우라를 풍기며 더 잘생겨 보였다. 검은색 셔츠 깃이 살짝 흐트러졌고 넥타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으며 단추도 두 개 풀려 매끈한 목선을 드러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그의 눈동자는 매우 짙었고 아무 감정도 엿볼 수 없었던 평소와는 달리, 지금의 그는 더 날카로웠고 매력적이었다.소영은 늘 알고 있었다. 수현의 외모는 탁월했고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완벽한 몸매에 어마어마한 집안까지 더했으니, 그야말로 완벽했다.이런 남자야말로 소영의 마음에 꼭 들 수 있었다.소영은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서서 넋을 잃은 채 수현을 바라보았다. 들어온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챈 수현이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소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소영아.”일 처리를 하면서 찡그러졌던 눈썹은 소영을 보자 많이 펴졌다.“웬일이야?”이 말을 할 때, 수현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던 차가운 공기는 점점 누그러졌다.소영은 옅게 웃음을
할 수만 있다면...강소영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하마터면 정말 수현에게 원하는 걸 말해버릴 뻔했다.‘지금은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야. 냉정해져야 해.’소영은 얼른 화제를 바꿔 어르신의 병세에 관해 물었다.“그러고 보니 나 귀국하고 한번도 할머님을 뵙지 못했네. 괜찮으시면 조만간 한번 찾아뵙고 싶은데 어때?”수현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거절했다.“나중에. 할머니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 봐 그래.”그의 말을 들은 소영은 입가의 웃음이 옅어졌다. 매번 이런 식이다. 왜인진 모르지만 선월은 소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수현을 구해준 은인이기에 예의를 갖추는 정도다. 그녀를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은 분명 소영을 그저 은인으로만 생각한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영과 달리 심윤아는 친손녀처럼 대한다는 사실이 소영을 더욱 안달 나게 했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소영은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_휴가를 마친 윤아는 회사로 돌아왔다.연차를 급하게 쓰는 바람에 휴식 전 인수인계를 잘했어도 일손이 모자랐다. 윤아가 돌아왔을 땐 업무상의 허점들을 이미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돌아쳐야 했다. 윤아 앞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일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어야 간신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임연수는 바쁜 윤아를 위해 중간중간 마실 음료를 가져다주곤 했다. 윤아는 바쁜 와중에 연수가 가져다준 커피를 들어 한입 마셨다가 커피의 씁쓸한 맛이 입안 전체에 퍼지는 감각에 불현듯 뭔가 떠오른 듯 잔을 내려놨다. 연수가 다시 돌아왔을 땐 그 뒤로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아 차게 식은 커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윤아 님. 커피 새로 타서 그릴게요.”연수의 말에 윤아는 드디어 일에 파묻혀있던 머리를 들며 말했다.“연수 님. 앞으로 커피 대신 따뜻한 물로 주세요.”“네?”연수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커피 안 마시게요?”“네.
윤아는 서늘해진 눈빛과는 달리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괜찮으니까 먼저들 먹어요.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가 남아서요. 기다릴 필요 없어요.”말을 마친 윤아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윤아는 그때 마침 나가려던 연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연수 님. 식사하시러 가는 거죠?”“네. 윤아 님. 같이 드실래요?”“네. 같이 가요.”윤아는 가방과 핸드폰을 챙기고 연수와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연수는 윤아와 함께 걸어가는 내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잔뜩 설레었다. 사실 그녀는 윤아와 함께 구내식당에 가는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방방 뛰는 참새같이 윤아의 곁에서 말이 끊이질 않았다.“윤아 님. 구내식당에 음식을 입에 맞으실까요? 별로면 밖에서 먹어도 되는데.”“괜찮아요.”윤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구내식당이 가깝잖아요. 먹고 바로 일해야 하니까 여기가 편해요.”“아...”일 얘기에 연수는 자책하며 말했다.“죄송해요. 다 제가 부족한 탓이에요. 제가 능력 좋은 직원이었다면 지금처럼 일이 많지도 않으실 텐데.”연수의 말에 윤아는 그녀를 한 눈 보기만 할 뿐 별다른 위로는 하지 않았다.이제 진수현과 이혼을 하고 나면 윤아는 이 일도 그만둘 생각이다. 윤아의 사람은 임연수밖에 없으니 그녀가 이 회사를 떠날 때면 반드시 연수도 데려갈 것이다. 예전의 윤아는 연수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느슨하게 대했다. 대부분 일은 윤아가 다 하고 연수는 옆에서 천천히 가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는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그렇게 미안하면 오후부턴 공부량을 늘리도록 하죠.”연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힘껏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저 꼭 열심히 해서 윤아 님 부담을 덜어드릴게요.”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당에서 줄을 섰다.밥을 가지러 가는 내내 주변에서는 윤아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윤아가 자리에 앉고 나서는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말이 돼요? 대표님 부인이 우리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게? 이
결국, 연수는 윤아의 잔잔한 호수 같은 표정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다시 앉긴 했지만, 연수는 여전히 화가 사그라지지 않은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윤아 님. 저 사람들이 하는 말 못 들으셨어요? 정말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정말이지 당장 달려가 저 인간들 입을 찢어버리고 싶어요.”반면 윤아는 느릿하게 말했다.“그리고 나서는? 저 사람들 말 몇 마디에 반응했다가 구내식당으로 쫓겨나 밥 먹는 것도 모자라 저들이 하는 말에 찔려서 손까지 댔다는 소리 듣게 할거예요?”윤아의 말에 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윤아 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알아요. 그런 뜻 아닌 거. 하지만 지금 저 사람들한테 따지러 간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연수 씨가 반격하든 안 하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까지 막을 순 없어요.”연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렇다고 윤아 님이 저런 모욕을 당하는 걸 듣고만 있으라고요? 전 못해요.”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는 연수의 모습에 윤아는 마음이 찡해났다. 평소에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겁쟁이인 줄만 알았는데 관건적인 순간에는 이렇게 불같은 사람일 줄은 몰랐다.윤아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모욕이라고 할 수는 없죠.”그의 말에 연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윤아 님. 뭐라고요?’“저 사람들이 한 말 다 맞죠. 우리 집이 망한 것도, 수현 씨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도.”“그럴 리가요...”연수는 계속해서 윤아를 대신해 말해줬다.“윤아 님이 회사에서 제일 도움이 많이 되는 사람인걸요. 능력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어느 회사든 윤아 님을 원할걸요. 윤아 님만 계시면 범이 날개를 얻은 격이니까요. 저 사람들 하는 말 하나도 안 맞아요.”“됐어요.”윤아가 서둘러 수연의 말을 멈췄다.“어서 먹어요. 그 정성으로 돌아가서 더 많이 배우세요.”연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윤아의 모습에 뭐라 더 말하기도 무안해 그저 화를 삭이며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윤아는 무표정을 유지
연수는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때, 옆에 함께 앉아있던 윤아가 맞은 쪽에 앉은 그 인간을 서늘하게 바라보더니 말했다.“대표님. 공적인 얘기 하실 거 아니면 저흰 시간 낭비 안 하고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윤아는 아직도 얼이 빠져있는 연수를 일으켜 대표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선선한 바깥공기가 윤아와 연수의 얼굴을 식혀주었지만 연수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심...심비서님. 저희 그냥 이렇게 가도 괜찮은 거예요?”윤아는 그런 연수를 한 눈 보고는 말했다.“안 그럼요? 계속 있고 싶어요?”연수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아니...아뇨.”“그럼 됐어요. 가요.”윤아는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세워 연수를 데려다줬다.“저와 함께 일하는 동안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절대 참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저런 뻔뻔한 인간들만 더 기고만장해질 뿐이에요.”덕분에 연수는 윤아와 함께 일했던 긴 시간 동안 이런 일은 더는 당하지 않았다.윤아가 지금 그녀에게 많은 양의 업무를 내주는 것도 아마 그녀를 잘 가르쳐보려는 것일 거다. 연수는 윤아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힘차게 스스로 다짐하고는 일에 몰두했다.‘똑똑’누군가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연수가 고개를 들었다. 웬 아름다운 여성이 문 앞에 서 있었는데 흰 드레스에 어깨까지 드리워진 고운 머릿결이 인상적이었다.“안녕하세요. 심 비서님 찾으러 왔는데요.”연수는 그녀를 한 눈 보자마자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연수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날, 진수현 대표님과 함께 사무실에 있었던 여자. 최근 회사 내에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인 강소영이다.연수는 강소영이 요즘 들어 부쩍 회사에 자주 드나드는 바람에 윤아가 식당에서 그런 일을 당한 거라 생각해 그녀를 곱게 볼 수 없었다.연수가 대답이 없자 소영이 한 번 더 물었다.“저기요?”연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새초롬하게 말했다.“저희
윤아의 말에 소영은 잠시 멈칫했다.생각 못 해본 일은 아니다. 이미 여러 번 눈치를 줬는데도 진수현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 못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소영은 직접 말했다가 수현이 자신을 가벼운 여자로 생각 할까 봐 천불이 나는 걸 꾹 참고 있었던 거다.소영이 낯빛이 어두워져서는 말이 없자 윤아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혹시 불러내지 못해서 절 찾아와 부탁하는 건가요?”그 말에 소영은 머리를 들어 불쾌한 기색이 역력해서 윤아를 쳐다봤다. 그러나 소영의 시선에도 꿈쩍 않는 윤아.“제 말이 틀렸나요? 이런 쓸데없는 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절 싫어하면서도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건 수현 씨 앞에서 대인배 행세를 하고 싶은 건가요? 그런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 아량이 넓지 못하다고 싫어할 남자라면 이참에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어요?”윤아의 말은 소영의 속내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 소영은 주먹을 꽉 쥐며 당장 윤아를 능지처참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윤아는 입꼬리를 올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일을 해야 해서요. 별일 없으면 이만 가시죠.”소영은 분노로 부글거렸다. 대인배 행세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미치게 후회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윤아에게 날카로운 말 몇 마디라도 날려주고 싶었지만 윤아의 심기를 건드려 수현의 앞에서 막말이라도 할까 봐 간신히 참아냈다. 소영은 차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윤아 씨. 제게 이렇게까지 적대적일 필요 없어요. 윤아 씨가 제 요구를 들어준다고 약속했을 때부터 우리 관계는 이제 다 풀린 거예요. 전 그냥 윤아 씨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서 잘 챙겨주려는 거예요. 나이로 따지면 사실 제가 언니인데...”소영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윤아가 싸늘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강소영 아가씨. 우리 집 딸은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그래요. 제가 준비한 반찬이 윤아 씨 입맛에 맞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봐요. 똑똑히 들어요. 진 씨 그룹에서 연수 님은 그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그리고 저와 연수 님이 무슨 사이라고 절 대신해 화를 내주는 거죠?”연수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간신히 참고 있었다.사무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큼, 큼.”이때, 밖에서 누군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윤아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다. 언제 왔는지 강찬영이 문어구에 서 있었다.윤아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연수에게 말했다.“가서 일 보세요.”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그가 강찬영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찬영은 연수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걸 보았다.연수가 나간 후에야 윤아는 찬영에게 물었다.“찬영 오빠. 무슨 일이에요?”찬영이 문을 닫으며 윤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윤아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못되게 해? 그러다 너 호의도 다 곡해되는 수가 있어.”윤아는 아무 표정 없이 그저 시선을 떨궜다.“상관없어요. 어차피 전 얼마 안 가 떠날 거니까요.”좋게좋게 말했다가 연수가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성장하지 못하면 어떡한단 말인가.윤아의 담담한 모습에 찬영은 잠시 멈칫했다. 이윽고 들고 있던 파일을 윤아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무심한 척 말했다.“간다고? 언제?”윤아는 강찬영에게 수현과의 가짜 결혼과 임신 사실을 제외하고는 딱히 숨기는 게 없었다. 그녀는 잠시 입을 앙다물더니 이내 말했다.“구체적인 시간은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아마 곧 갈 거예요.”찬영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곧 떠난다는 그 말에 조금 전 연수를 대하는 태도까지... 찬영은 이런 정황들로 보아 윤아가 한 달 안에 회사를 떠날 거라 짐작했다. 그는 아무래도 다른 수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생각에 잠긴 찬영의 모습에 윤아도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찬영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찬영은 윤아의 사무실에서 한참을 머물다 떠났다.그녀의 사무실에서 나올 때 그는 마침 함께 대표실에서 나오는 진수현과 강소영과 마주쳤다.강찬영의 모습을 보자 순식간에 표정이 굳는 수현. 그는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찬영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소영도 금세 수현의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저 멀리 윤아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강찬영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찬영 씨는 윤아 씨와 사이가 참 좋나 봐. 며칠 전 둘이 함께 밥을 먹는 모습도 봤었던 것 같은데.”수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영은 그런 수현을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사실 생각해보면 찬영 씨가 윤아 씨에게 참 잘해줘. 심씨 가문이 망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다 윤아 씨를 멀리했는데 찬영 씨만 윤아 씨와 같이 회사에 들어왔잖아. 지금까지도 자주 보는 것 같고. 예전에 사람들이 윤아 씨 아버님이 찬영 씨를 사위로 생각한다고 하던데 그땐 그저 농담일 줄 알았지 뭐야.”소영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소영은 윤아를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니 수현의 옆에서라도 손을 쓰는 수밖에.역시나 소영의 말에 급격히 낯빛이 어두워지는 수현이다. 그녀의 말을 정말 받아들인 듯 보였다.그러나 소영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수현의 이런 반응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소영은 이런 이유로 더더욱 윤아의 임신 소식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소영은 아무래도 일을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_그날 밤,샤워를 마친 수현은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상체를 훤히 드러내며 욕실을 나왔다. 그는 수건을 들어 물기를 가득 머금은 머리를 탈탈 털며 안방으로 향했다.안방의 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윤아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업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낀 채 침대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네. 이 부분은 한 번 더 보고 수정한 후에 보내주세요.”그는 청아한 목소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