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속에서 불길이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심미연이 부르잖아. 얼른 가. 난 신경 쓰지 말고!”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기사님이 병원까지 데려다줄 거야. 금방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그는 온지유를 차로 데리고 가 조심히 태웠다.“안정 좀 취하고 있어.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그 후 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한 뒤, 집 안으로 돌아갔다.온지유는 차창 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강지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저 늙은이! 언젠가 내 앞에서 죽어가는 걸 꼭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거야!’강지한이 본가로 들어섰을 때,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심미연은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김 집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둘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해 보였다.강지한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심미연은 본가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 왜 온지유한테는 그렇게 날을 세우는 거지?’그가 들어오는 소리에 심미연이 과일을 입에 넣으며 그를 힐끗 보더니 2층을 가리켰다.“할아버지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셔.”그녀는 강준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담담했다.김 집사는 미소를 거두고 강지한에게 다가왔다.“둘째 도련님, 저를 따라오세요.”김 집사는 속으로 생각했다.‘사모님은 이렇게 온화하고 선한 분인데, 둘째 도련님은 어찌 저리 냉정하고 무심할까. 사모님이 언젠가 참다못해 이혼이라도 요구하면 어르신은... 어휴,난리 나시겠네.’강지한은 짧게 대답한 뒤 계단을 오르며 김 집사에게 물었다.“김 집사님, 왜 지유한테는 큰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미연이한테는 그냥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난 둘째 도련님이니, 미연이가 둘째 사모님이어야 맞지 않나요?”김 집사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예전에 말씀하시길, 자신이 인정하는 손주며느리는 사모님 한 분뿐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호칭은 사모님께만 해당합니다.”강지한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그럼
“난 너랑 내기 같은 거 안 해, 미연이가 너 싫다고 하면 나한테도 다시 찾아오지마, 남자가 여자 마음 하나 못 잡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강준형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심미연은 절대 자신을 떠나지 못한다 확신한 강지한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서류들을 챙겨서 강준형의 뒤를 따랐다.문밖에는 진작 내려온 심미연이 서 있었는데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얼굴에 김종수가 걱정스레 물었다.“사모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아니에요.”강지한이 내뱉은 말들이 모두 상처였는데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지만 심미연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앉아 계세요, 물이라도 갖다 드릴게요.”하지만 김종수는 그런 심미연을 외면할 수가 없어 물을 가지러 갔고 마침 내려온 강준형이 앉아있는 심미연을 보며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둘 다 그냥 여기서 자고 가, 매일 청소도 하고 이불도 바꾸니까 다 깨끗해. 얼른 올라가 봐.”둘을 같이 붙여놓아야 아이가 생길 테니 강준형은 어떻게든 둘을 한방에 밀어 넣고 싶어했지만 심미연은 온화한 목소리로 강준형을 보며 말했다.“내일 법정에 나가야 하는데 자료정리를 아직 못 끝내서요. 저는 그만 가볼게요.”예전에는 본가에 돌아오면 며칠은 있으려고 하던 심미연이 오늘은 돌아가기에 급급해하는 모습이 낯설었던 강지한은 입술을 말아 물며 심미연을 보고 있었다.“일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최우선이야, 몸도 챙겨가면서 해. 오늘은 일이 있다니까 있으라고 강요는 안 하마.”강준형은 말을 하면서도 강지한을 보며 얼른 손에 든 서류들을 심미연에게 전해주라고 눈치를 주었다.“할아버님,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할아버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강준형은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저를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이었기에 심미연은 진심으로 그가 만수무강하길 바라고 있었다.“그래, 얼른 가봐.”그렇게 작별인사를 마친 심미연이 뒤 돌아 걸어가는데도 강지한은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강준형은 그를 발로 차며 말했다.“얼른 가서 우산 씌워줘!”강준형
그에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심미연이 내가 무용 콩쿠르에서 대상 탄 거 다 주작이라고 기사 냈어, 스폰서한테 빌붙어서 상 탄 거라고, 배 속의 아이도 그 스폰서 거라잖아! 명예도 뭣도 다 잃었는데 여기서 내가 더 살아서 뭐하겠어, 나 죽을 거야!”온지유는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있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강지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기사라니? 알아듣게 좀 말해.”“심미연한테 물어, 걔가 한 짓이니까 제일 잘 알겠지!”“알겠어, 일단 흥분하지 말고 진정 좀 해.”울분이 섞인 목소리에 강지한은 온지유를 달래며 일단 전화를 끊었다.눈이라도 조금 붙이려던 심미연도 그 둘의 통화내용을 들어버린 탓에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사실 심미연이 예민해진 것도 다 시도 때도 없이 별 같잖은 일로 강지한에게 전화를 해대는 온지유 때문이었다.그때 예상대로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심미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지유 명성에 먹칠하면 너한테 뭐 좋을게 있다고 이래?”강지한의 말을 들어보니 갑자기 터진 기사 때문에 이러는 것 같은데 심미연은 돈을 쓸데가 없어서 온지유 기사를 돈 주고까지 내보낸 사람이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할아버지가 너 감싸준다고 나까지 널 참아주는 건 아니야.”화가 치밀어오른 탓에 자연스레 막말을 하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귀찮은 듯 대답했다.“네 정보팀 시켜서 내가 한 건지 알아보라고 해 그럼.”심미연은 평소엔 그렇게 똑똑하면서 온지유 말이라면 생각도 없이 믿는 강지한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래서 그런 머리가 배 속의 아이에게까지 유전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마찬가지로 강씨 집안의 모든 사람들과 다 잘 지내면서 온지유에게만은 가족의 정도 없이 날을 세우는 심미연이 이해되지 않았던 강지한은 차를 갓길에 세운 채 말했다.“만약 진짜 네가 한 짓이라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야.”이런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던 심미연이기에 그녀는 이번에도
남자의 손을 힘겹게 피한 심미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난 강지한 아내예요, 강지한을 건드리면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해요.”차도 없고 택시도 못 부르는 이 외진 곳에서 심미연이 부를 수 있는 건 강지한의 이름뿐이었다.강지한은 경성에서 소문이 자자한 염라대왕으로서 매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이들도 그 이름을 들으면 무서워서 자신을 보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남자들은 심미연의 턱을 잡아 올리며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강지한이 온지유랑 한 쌍인 거 경성 사람들은 다 아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해. 우린 강지한 결혼했다는 소리 들은 적 없거든.”“이렇게 꾸물대는 거 보니까 우리가 안아서 차에 태워주길 기다리는 거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거짓말 아니에요,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전화해서 확인시켜줄 수도 있어요.”아까 그러고 내려서 전화를 받을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별다른 수도 없었기에 심미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든 걸 하늘에 맡긴 채 전화를 걸어보았다.“그럼 어디 전화해봐, 우린 어차피 급하지도 않으니까.”심미연이 말이 거짓이라고 확신한 남자는 그냥 장단이나 맞춰주려고 조롱 섞인 말들을 내뱉으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한편 핸드폰을 꺼내든 심미연은 그 위에 가득한 물방울을 보며 천천히 강지한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신호음만 들리고 전화를 받는 이는 없었다.그에 심미연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으로 핸드폰을 꽉 잡고 있었는데 남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강지한 아내라며? 남편이 전화도 안 받는데?”“진짜 속을 뻔했네.”“이제 거짓말 그만하고 빨리 타. 빨리 끝내고 집 가야지.”말을 하던 남자가 팔을 잡아 오자 심미연은 놀라서 팔을 빼려 했지만 남자의 힘은 그녀가 당해낼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오히려 그녀의 옷 소매가 찢겨버렸다.그러면서 드러난 하얀 피부에 빗물이 닿아오자 심미연은 몸을 흠칫 떨었다.“피부가 엄청 하얗네. 만지면 아주 부드
남자의 손이 치마를 들어 올리는 순간, 갑자기 그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떨자 희망을 보아낸 심미연이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곧바로 심미연을 짓누르던 남자가 나가떨어지고 누군가의 외투가 그녀에게로 덮어졌다.은은하게 풍기는 나무 향에 심미연의 마음도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눈 뜨지 마.”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감돌자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눈을 떠버렸다.“유진 오빠?”어떻게 박유진이 마침 여기를 지나친 건지 놀랍도록 신기한 우연에 심미연이 눈을 반짝였다.“응, 나야. 눈 감고 있어, 내 차로 데려다줄게.”다정한 그의 말투에 심미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눈을 감았지만 곧바로 들려오는 파열음과 비명소리에 주먹을 꽉 쥔 채 소리쳤다.“오빠, 경찰 불러줘, 저 인간들 신고할 거야!”“걱정 마, 내가 꼭 다 감방에 처넣어줄게.”다정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한결 안정된 심장 박동에 심미연은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고마워 오빠.”“3년 동안 안 봤어도 나는 언제나 네 오빠였어. 뭘 이런 걸로 고맙다고 그래.”“다음에 또 고맙다고 그러면 나 진짜 화낼 거야.”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박유진에 심미연은 심호흡을 하며 답했다.“알겠어, 안 할게.”동생을 잃어버린 뒤로 부모님의 손찌검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심미연은 종종 박유진의 집으로 도망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박유진은 그녀를 잘 챙겨주며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그녀를 위해 침대 옆에서 기대서 쪽잠을 자며 심미연 옆에 꼭 붙어있어 주었다.그래서 심미연도 박유진을 친오빠처럼 대했었는데 그녀가 17살이 되던 해에 잃어버렸던 동생을 찾은 뒤로 동생이 박유진과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친 탓에 부모님은 심미연과 박유진의 만남을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다가 심미연과 박유진이 우연히 만날 걸 본 동생이 자살소동을 일으킨 뒤로 심미연은 완전히 박유진과의 연락을 끊었고 부모님은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심미연의 결혼을 진행시켰다.상대는 아들을 둘이나 둔 50세 남성이었는데 혼인신고만 하면 10억을
요즘 들어 로펌 사람들이 새로 개업했다는 법무법인 대명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얼핏 듣기는 했지만 심미연은 워낙 바빴던 탓에 그런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서 무시했었는데 해외에서 온 대표라는 게 박유진을 가리키는 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그리고 항공사가 주요사업인 박씨 집안에서 왜 갑자기 로펌을 시작했는지 의아하기도 했다.“이미 들었나 보네. 맞아, 대명이 내가 새로 개업한 로펌이야.”“그러고 보니 오빠도 경인대 법학과 나왔었네. 만약 오빠가 그때 변호사 했었으면 내 라이벌 됐을 수도 있겠다.”“내가 변호사가 됐었어도 우리가 라이벌이 되진 않았을 거야.”‘난 그냥 네 옆에서 너를 도와줬을 거야.’박유진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고 있을 때 신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연아! 미연아, 어딨는 거야?”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감동한 심미연은 열심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하린아! 나 여기 있어!”그때 또 다른 차량 하나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차에 탄 강지한은 결혼반지를 떡하니 끼고 외간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제 아내를 보다가 언짢은 듯 핸들을 돌리며 자리를 벗어났다.애초에 그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괜한 발걸음을 한 것 같았다.박유진은 심미연을 안아 들어 차에 태우며 말했다.“친구한테 내 차 운전해서 가라고 해. 여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말을 마치고 일어서는 박유진에 주먹을 쥐고 있던 신하린이 행동을 멈춘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박유진 씨가 왜 여깄어요?”나쁜 놈인 줄 알고 날리려던 주먹이 무색하게 박유진은 태연하게 차 키를 던져주며 말했다.“먼저 가세요.”“박유진 씨는 안 가요?”“나 신경 쓰지 말고 미연이 얼른 집에 데려다줘요, 저러다 감기 들겠어요.”말을 마친 박유진은 아까 차를 세운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비서에게로 다가갔다.하마터면 심미연을 구하지 못할뻔했는데 만약 심미연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평생의 후회로 남을 뻔한 날이었다.박유진이 뒤로 돌자 신하린은 어쩔 수 없이 차에 타서
기사 제목을 본 심미연은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강씨 집안 가보로 내려오는 팔찌는 할아버님이 심미연의 생일선물로 준다고 약속한 것인데 그것을 온지유에게 줘버렸다는 기사 제목에 심미연은 심호흡을 하며 기사를 클릭했다.기사는 30분 전에 올라온 것인데 아마도 온지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던 강지한의 짓인 것 같았다.기사 속의 강지한은 온지유에게 직접 팔찌를 채워주고 있었는데 온지유는 신난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핸드폰을 손에 꽉 쥔 심미연은 아래에 쓰인 내용은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았다.강준형이 자신에게 선물한 팔찌를 온지유에게 건네준 강지한에 심미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핸드폰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누군가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왔다.사진은 팔찌를 끼고 있는 팔이었고 그 아래의 문자는 팔찌가 잘 어울리냐는 내용이었다.온지유가 보낸 문자임을 알아챈 심미연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감정에 그녀의 도발에 아무런 화도 나지 않았다.심미연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고속도로에 그녀를 버리고 가던 것, 그리고 살려달라고 건 전화도 단번에 끊어버린 것, 하루 사이에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을 떠올리던 심미연은 자연스레 지난 3년의 결혼생활을 떠올렸다.생각해보니 밥 먹고 샤워하고 잠자리를 가지는 게 전부였던 것 같다.밸런타인데이, 1주년, 2주년, 생일 등 그 외의 많은 기념일 들을 강지한은 한 번도 챙겨준 적이 없었다.그때는 강지한이 바빠서 그런 걸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자신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불이 다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심미연은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추워지고 머리까지 아파오자 누구의 번호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전화를 걸어버렸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이 시간에 지한 씨는 왜 찾는 거야?”마치 자신이 본처라도 된 양 새침하게 묻는 온지유의 목소리를 들으니 구역질이 올라온 심미연이 차갑게 물었다.“남편이 밤늦게 안
그에 깜짝 놀란 신하린이 다급하게 구급차를 불렀고 심미연은 빠르게 수술실로 실려 들어갔다.그녀가 혹시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 심미연은 수술을 하는 내내 앉지도 못하고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한편 이노하이브 계열사 중 하나인 인하병원 VIP 병실에서는 강지한이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온지유를 나무라고 있었다.“임산부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심미연이랑 싸우는 게 말이 돼? 이젠 안 무서운 거야?”강지한의 말에 온지유는 서러운 듯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심미연이 아까 전화오니까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지한 씨 찾는 줄 알고 받은 거야. 그런데 전화 받자마자 내가 강씨 집안 팔찌랑 남편을 뺏었다고 날 욕하잖아. 그래서 뭐라고 몇 마디 했는데 이거 다 인터넷에 올려서 나 다시는 춤 못 추게 하겠대.”“미안해 지한 씨,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지한 씨 전화 함부로 안 받을게.”“지금 잘 테니까 화내지 마.”말을 마친 온지유가 이불을 덮어쓰며 눕자 이불 끝을 살짝 들추어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보던 강지한은 마음이 아픈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힘들게 얻은 네 아이잖아. 잘못되면 네가 제일 힘들 거야, 그러니까 몸 좀 챙겨. 심미연 쪽은 내가 잘 얘기해볼게. 다시는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게 잘 해결할게.”“그리고 오늘 기사 같은 일도 다신 없었으면 좋겠어.마지막 말에 유독 힘을 주는 강지한에 온지유는 자연스레 그의 눈을 올려다봤다.담담한 눈빛이었지만 그 눈빛에 제 마음속 깊은 곳마저 들여다보는 것 같아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지한 씨, 사실 그 기사로 전에 났던 내 기사 덮으려던 건데 혹시 지한 씨 신경 쓰이면 지금이라도 정정기사 낼게. 다 그냥 짜고 친 거고 팔찌도 가짜라고. 다들 재미로만 봐달라고 얘기할까?”“얼른 자, 그건 성무진 시켜서 처리하면 돼.”사실 온지유는 지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강지한 앞이라 두 손으로 이불을 꽉 잡으며 불쌍한 척 연기를 이어나갔다.
임혜자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말했다.“성 비서님께서 아까 사모님 유품을 가져왔더라고요. 그리고 둘째 도련님께서는 지금 응급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습니다.”임혜자는 강지한이 너무 걱정되었고 혹시나 그에게 일이 생기면 아무것도 모르는 강준형이 그들을 탓하지는 않을지도 걱정되었다.“네...”강준형을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순간 본가 쪽도 아수라장이 되어 집사들은 그를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와 간호사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강준형은 깨어날 수 있었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김준혁은 그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어르신,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강준형은 겨우 침상에서 일어나 앉더니 온 힘을 다해 집사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성 비서한테 전화해서 그 팔찌를... 가져오라고 해.”성무진도 마침 병원에 있었기에 빠르게 그의 병실로 오게 되었고 오자마자 주머니에서 그 팔찌를 그에게 넘겨줬는데 조명 아래 비치니 더욱 반짝거리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했다.강준형은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건네받고 만져보다가 익숙한 촉감에 결국에는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문득 심미연의 해맑은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의 것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강준형은 마음이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팔찌를 움켜쥐고 몸을 잘게 떨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칼로 찌르기라도 한 듯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순간 그는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 끝없는 공허함과 절망에 빠져버렸다.김준혁은 그의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어르신,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너무 흥분하시면 심장에 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잠깐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떠세요?”그러나 강준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가 그토록 아끼던 심미연이 이렇게 떠나버렸다.시신도 남기지 않고 가버린 사실을 강지한이 깨어나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3일 후, 강지한이 드디어
강지한은 심미연이 이제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는데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살짝 벌렸지만 너무 떨려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 뒤 낮은 신음을 내뱉더니 곧바로 입에서 피를 쏟아내면서 픽 하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그리고 마치 온몸의 모든 공기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힘없이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성무진은 갑자기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손으로 임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머니, 혹시 지금 위층 안방에 가서 강 대표님이 괜찮은지 확인 할 수 있으실까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너무 걱정돼서요.”전화 받은 임혜자도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러나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녀는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킨 뒤 성무진을 위로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강지한은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방안에는 이미 피비린내가 가득 퍼져있었다.임혜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가능한 빨리 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그러나 기다리는 1분 1초가 너무 괴로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집 앞에 도착했고 의료진들은 신속하고 질서 있게 방에 들어가 강지한을 조심스럽게 들것에 옮겨 데리고 나갔다.임혜자는 구급차가 떠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강지한이 이 고비를 빨리 넘길 수 있도록 기도했다.그렇게 강지한은 빠르게 응급실로 옮겨졌다.응급처치가 끝난 뒤 그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는데 여전히 깨나지 못한 채 긴 꿈을 꾸게 되었다.꿈속은 마치 길고 인상 깊었던 영화와 같았는데 프레임마다 그가 심미연과 함께한 3
“미연 씨랑 완전히 깨진 거야? 그럼 찾으면 이제 내 차례네?”박시훈은 어차피 이제 강지한이 심미연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박시훈, 지금 너랑 농담할 기분이 아니니까 빨리 사람 풀어서 찾아봐.”강지한의 마음속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만약 박시훈도 못 찾는 거라면 심미연은 완전히 실종되었다고 봐야 한다.“강지한,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줘. 미연 씨를 아직 사랑하지?”박시훈은 만약 그가 여전히 심미연을 좋아하는 거라면 여기서 깔끔하게 포기하겠다고 다짐했다.친구의 여자를 뺏는 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그러나 강지한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큰 소리로 답했다.“전혀!”그는 여전히 자존심을 부렸다.강지한의 말에 박시훈은 또다시 히죽거리며 말했다.“그럼 미연 씨를 찾아도 나만 볼 수 있게 어디 숨겨둬야겠다.”강지한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박시훈, 싫다는 사람을 왜 억지로 데려가려고 해. 그리고 어디까지나 내 전 아내였던 사람인데 들이대고 싶어?”“난 미연 씨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거야. 그게 네 전 아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데?”박시훈도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됐어. 난 그만 사람 찾으러 가야겠다.”박시훈과의 통화 뒤에 강지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모태 솔로인 박시훈이 심미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그는 모든 잡생각을 다 집어치운 뒤 강준형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바로 수화기 너머에서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연이한테 사과했어? 용서는 받았어?”“혹시 오늘 미연이 만나셨어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어요?”강지한은 다짜고짜 그녀가 사라졌다고 할 수 없었기에 에둘러 물었다.“미연이가 사라졌어?”강준형의 물음에 강지한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에게 거짓말했다.“혹시 할아버지한테 찾아가서 무슨 이야기 나눴나 궁금해서요.”보아하니 강준형을 만나러 가지도 않은 것 같았다.“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그런데 너한테는 비밀이야.”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강지한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설마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건가 싶어 머뭇거리다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미연아, 나 왔어.”들어가 보니 침대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는데 순간 강지한은 깜짝 놀라 온몸이 굳어졌다.침대 머리맡의 결혼사진은 틀이 깨진 채 신부 머리는 잘려 나가고 웨딩드레스만 남겨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온통 유리 파편이 널려져 있었다.강지한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그러다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문을 박차고 아래층에 대고 소리 질렀다.“아주머니, 빨리 올라와 보세요!”임혜자는 무슨 일인지 몰라 부리나케 위층으로 달려갔다.“도련님, 무슨 일이에요?”강지한은 마음속의 화를 애써 억누른 뒤 침실을 가리키며 물었다.“오늘 누가 침실에 들어왔어요?”임혜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그에게 답했다.“오늘 사모님만 침실에 들어갔고 누구도 오지 않았는데요? 왜요? 뭐 귀중한 물건이라도 없어졌을까요?”강지한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미연이는 지금 어디 있어요?”“도련님께서 아까 나가시고 얼마 안 돼서 사모님도 나갔어요. 어디 가시냐고 물어보니까 급한 일이 있다고만 하시고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도련님께 따로 연락하지 않으셨을까요?”임혜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심미연은 어디 가면 꼭 강지한에게 먼저 알려줬던 것 같은데 왜 오늘은 나가면서 아무런 말도 없었는지 의문스러웠다.강지한은 마음속의 불안이 점점 커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내려가서 혹시나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는지 한번 물어봐요.”그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써 덤덤한 척했다.임혜자는 그렇게 방문을 나오자마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강지한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임혜자는 내려가서 모든 사람에게 한 바퀴 물어봤지만 누구도 심미연의 행방을 알지 못했고 그녀는 이제야
온지유는 박시훈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기절했고 경찰은 그녀를 연행해 갔다.박시훈은 차에 앉아 멀리서 사진을 찍어 강지한에게 보여준 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아, 일은 이미 해결됐어.”“그래.”“내가 이렇게 고생한 걸 봐서라도 미연 씨한테 제대로 고백할 수 있게 허락해 줘.”박시훈은 이미 비서 쪽에서 오늘 심미연이 모든 증거를 가지고 혼자 경찰서에 갔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저런 패기 있는 여자와 함께하면 분명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꺼져!”강지한은 어두운 얼굴로 그에게 소리를 쳤다.‘감히 누구 여자를 탐내?’“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잖아. 그럼 남남이고 내가 도전해 보겠다는 데 뭐 어때서? 설마 미연 씨랑 다시 합칠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신경 쓰지 마!”강지한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리가 복잡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밖의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지금껏 심미연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안겨줬기에 아무리 빌어도 이제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문득 심미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이미 흘렀고 후회해도 늦었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강형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한, 당장 온지유를 데려오지 않으면 지금 네 눈앞에서 혀 깨물고 죽어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심미연은 인터넷에 녹음 하나를 공개했는데 내용에는 그날 밤 온지유와 양경자가 죽기 전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이 소식은 이미 널리 널리 퍼져 전 경성의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그리고 드디어 강준형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는데 그는 이 악독한 여자를 한시라도 빨리 감옥에 가두고 싶었다.사람을 죽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이미 경찰서에 잡혀갔어요.”강지한은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박시훈은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미 온지유가 저질렀던 모든 추잡한 일을 다 조사해 냈다.그리고 강지한은
온지유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강지한은 비록 몇 년 동안 그녀 앞에서는 항상 온화하고 다정한 모습만 보여줬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거의 피도 눈물도 없다고 봐야 한다.그런데 강지한은 그날 밤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되었는데도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걸 보면 분명 뭔가가 이상했다.또한 육현성은 분명 그녀에게 내일 저녁에 출발한다고 말했었는데 갑자기 오후에 전화 와서는 오늘 저녁으로 앞당겨졌다고 알렸다.‘함정인가?’온지유는 순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만약 이 모든 게 강지한의 계획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절대 그럴 수는 없다.그리고 그날 강지한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을 살게 할 거란 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설마 진짜 도망칠 수 없단 말인가?’‘아니!’바로 이때, 한 줄기 눈 부신 불빛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비쳤다.순간 깜짝 놀란 심미연은 습관적으로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이미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한 줄로 서서 그녀를 막고 있었다.“온지유 씨, 경찰입니다.”경찰이 신분증을 보여주는 순간 온지유는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고 더 이상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전화 한 통화만 할게요.”그래도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강지한에게 이 판을 짠 사람이 진짜 그가 맞는지 직접 묻고 싶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지한 씨가 직접 전해달라고 했거든요...”바로 이때, 박시훈이 차에서 내리더니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박시훈 씨? 당신이 어떻게...”온지유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외부 소문에 의하면 현재 전 경성의 정보망은 다 박시훈의 손아귀에 있다고 할 정도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다.하여 이번 일도 아마 그가 나섰기에 이렇게 쉽게 들켜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래요. 접니다.”불빛이 그의 앳된 얼굴에 비치니 귀여운 외모 때문인지 날카로운 목소리와 많이 상반되는 느낌이었다.“지
그러다가 문득 괜찮아지면 다시 말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면 신하린이 괜히 걱정만 할 테니까 말이다.“아니면 내가 갈까?”신하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되물었다.“하린아, 나 진짜 괜찮아.”“그래. 알겠어.”그녀의 단호함에 신하린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심미연은 꺼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하린아, 미안해.’경성을 떠나기로 한 일은 당분간 신하린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신하린은 그녀를 도와 연기를 해야 하는데 만약 심미연의 행방을 알고 있으면 연기가 그다지 리얼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하여 일단 신하린에게도 비밀로 하기로 결정했다.심미연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컴퓨터와 신분증, 그리고 파일과 금고 안에 있던 두 개의 상자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그대로 남겼다.아래층에 내려와서 차에 타니 방원호는 고작 배낭만 챙긴 심미연에게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다른 짐들은 왜 안 챙겼어?”“거기 가서 사면 되죠. 일단 외할머니한테 데려다주고 선배님은 바로 가면 돼요.”“그래.”방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심미연이 아무리 멀리 가버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에 벌써 그녀를 압박하기 싫었다.빠르게 심미연은 국화꽃을 사 들고 양경자의 묘비 앞에 도착했고 꽃을 내려놓은 뒤 배를 움켜쥐고 조심스레 앉았다.“할머니, 저는 이제 이곳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해요.”“그리고 저 쌍둥이를 임신했어요. 나중에 아이가 좀 크면 할머니 보러 같이 올게요.”“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온지유는 이제 법의 처벌을 받게 되어서 감옥 안에 갇히게 될테니까요...”그렇게 심미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가 돌아섰다.그리고 병원에 돌아와 보니 박유진은 여전히 혼수상태인 채 누워있었다.심미연은 그의 머리맡에 카드 한 장을 남겨뒀다.그리고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이미자에게 전화를 걸어 펑펑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통화까지 마친 뒤 그녀는 주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홀연
“나도 방금 들었는데 미연 씨가 지금 온지유 씨의 범죄 증거를 입증할 자료들을 가지고 경찰서에 갔대. 아, 그리고 네꺼도...”박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한이 다급히 되물었다.“언제 갔대?”“방금. 분명 네가 위조 여권을 발급해서 온지유 씨를 출국시키려던 일을 알고 신고한 것 같아. 그리고 경찰서에서는 이미 체포영장을 발부했다던데 이제 너랑 온지유 씨는... 꼼짝 못 하고 잡히게 생겼네. 하하하!”눈앞의 남자는 아무리 비열하게 웃어도 얼굴이 너무 동안이라 그런지 전혀 공격적이지 않았다.그러나 그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강지한은 잘 알고 있다.“너도 참, 미연 씨한테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일부러 도와주는 척했던 건 단지 그 여자가 경찰한테 잡혀가게 하기 위함이었다고.”“박시훈, 그 입 안 닥쳐?”강지한은 버럭 화를 냈다.순간, 박시훈은 웃음기를 싹 거두고 매서운 눈빛으로 강지한에게 말했다.“내 이름 부르지 말랬지!”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게 너무 싫었다.“소리 소문 없이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걸 몰라?”강지한은 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혼자 마시고 있어. 난 그만 갈게.”“미연 씨 달래주러 가는 거야?”박시훈은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따르더니 한 모금 마셨다.“미연 씨를 달래주는 것보다 나를 달래주는 게 더 수월할걸?”강지한이 고개를 돌리고 답했다.“아무래도 시간을 앞당겨야 할 것 같아. 오늘 저녁에 당장 갈 수 있게 해. 미리 경찰한테 말해주는 것도 잊지 말고.”“그럼 미연 씨는? 가서 먼저 설명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박시훈은 오늘 경찰서에 가서 증거들을 제출한 강지한의 전 아내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아 보였다.‘아주 간이 부었구만?’“그럴 필요 없어. 온지유가 감옥에 들어가면 미연이 기분도 자연스레 좋아질 테니까.”강지한은 말을 마친 뒤 다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럼 공항에 보낸 사람들은 다시 오라고 할까?”박시훈이 떠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물었다.“아니.”그렇게 강지한의 모습이
“아마 내일 일곱 시쯤 누군가가 지유 씨를 데리러 올 겁니다. 그때 새로운 여권이랑 신분증도 드릴 거고요.”육현성은 그녀의 가슴 쪽 상처를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가는 길에 혹시나 상처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죠?”“제가 약을 좀 더 많이 가져갈게요.”지금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하루빨리 경성을 벗어나야 살길이 있을 것이고 여기서 하루 더 머무르는 것조차 지금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하여 굳이 자기 목숨을 걸고 그런 도박은 하고 싶지 않았다.“맞다. 지유 씨가 저한테 팔아달라고 했던 집이랑 차는 아직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일단 그에 해당하는 돈은 먼저 드릴게요. 제가 나중에 천천히 팔면 되니까요.”말을 마친 뒤 육현성은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제가 드릴 수 있는 전부예요. 10억. 먼저 받아요.”온지유는 순간 감동되었다.심지어 만약 이렇게 쫓겨나듯 떠나는 게 아니면 바로 육현성과 결혼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사실 온지유도 육현성을 떠나면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다.“앞으로 혼자라도 몸조리 잘해야 합니다.”육현성은 낮은 소리로 당부했다.온지유는 순간 가슴이 찡해서 두 팔을 벌려 육현성을 꼭 안고 울먹이면서 말했다.“현성 오빠, 다음 생에는 꼭 오빠 아내로 살고 싶어요.”이번 생은 이미 글렀으니 다음 생에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다.그녀의 말에 육현성도 목이 멨다.자신이 너무 사랑했던 여자가 이제는 그를 떠나 언제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이 시각, 고급스럽게 꾸며진 찻집 룸 안에서 강지한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지한 도련님, 빅 뉴스!”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다급히 그에게 달려왔다.그러나 강지한은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그에게 물었다.“뭔데?”“방금 들은 소식인데 육현성 씨가 내일 저녁 경성을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대.”남자는 어려 보이는 얼굴에 캐주얼 차림이었는데 나이는 많아서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