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로펌 사람들이 새로 개업했다는 법무법인 대명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얼핏 듣기는 했지만 심미연은 워낙 바빴던 탓에 그런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서 무시했었는데 해외에서 온 대표라는 게 박유진을 가리키는 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그리고 항공사가 주요사업인 박씨 집안에서 왜 갑자기 로펌을 시작했는지 의아하기도 했다.“이미 들었나 보네. 맞아, 대명이 내가 새로 개업한 로펌이야.”“그러고 보니 오빠도 경인대 법학과 나왔었네. 만약 오빠가 그때 변호사 했었으면 내 라이벌 됐을 수도 있겠다.”“내가 변호사가 됐었어도 우리가 라이벌이 되진 않았을 거야.”‘난 그냥 네 옆에서 너를 도와줬을 거야.’박유진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고 있을 때 신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연아! 미연아, 어딨는 거야?”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감동한 심미연은 열심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하린아! 나 여기 있어!”그때 또 다른 차량 하나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차에 탄 강지한은 결혼반지를 떡하니 끼고 외간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제 아내를 보다가 언짢은 듯 핸들을 돌리며 자리를 벗어났다.애초에 그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괜한 발걸음을 한 것 같았다.박유진은 심미연을 안아 들어 차에 태우며 말했다.“친구한테 내 차 운전해서 가라고 해. 여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말을 마치고 일어서는 박유진에 주먹을 쥐고 있던 신하린이 행동을 멈춘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박유진 씨가 왜 여깄어요?”나쁜 놈인 줄 알고 날리려던 주먹이 무색하게 박유진은 태연하게 차 키를 던져주며 말했다.“먼저 가세요.”“박유진 씨는 안 가요?”“나 신경 쓰지 말고 미연이 얼른 집에 데려다줘요, 저러다 감기 들겠어요.”말을 마친 박유진은 아까 차를 세운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비서에게로 다가갔다.하마터면 심미연을 구하지 못할뻔했는데 만약 심미연이 정말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평생의 후회로 남을 뻔한 날이었다.박유진이 뒤로 돌자 신하린은 어쩔 수 없이 차에 타서
기사 제목을 본 심미연은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강씨 집안 가보로 내려오는 팔찌는 할아버님이 심미연의 생일선물로 준다고 약속한 것인데 그것을 온지유에게 줘버렸다는 기사 제목에 심미연은 심호흡을 하며 기사를 클릭했다.기사는 30분 전에 올라온 것인데 아마도 온지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던 강지한의 짓인 것 같았다.기사 속의 강지한은 온지유에게 직접 팔찌를 채워주고 있었는데 온지유는 신난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핸드폰을 손에 꽉 쥔 심미연은 아래에 쓰인 내용은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았다.강준형이 자신에게 선물한 팔찌를 온지유에게 건네준 강지한에 심미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핸드폰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누군가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왔다.사진은 팔찌를 끼고 있는 팔이었고 그 아래의 문자는 팔찌가 잘 어울리냐는 내용이었다.온지유가 보낸 문자임을 알아챈 심미연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감정에 그녀의 도발에 아무런 화도 나지 않았다.심미연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고속도로에 그녀를 버리고 가던 것, 그리고 살려달라고 건 전화도 단번에 끊어버린 것, 하루 사이에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을 떠올리던 심미연은 자연스레 지난 3년의 결혼생활을 떠올렸다.생각해보니 밥 먹고 샤워하고 잠자리를 가지는 게 전부였던 것 같다.밸런타인데이, 1주년, 2주년, 생일 등 그 외의 많은 기념일 들을 강지한은 한 번도 챙겨준 적이 없었다.그때는 강지한이 바빠서 그런 걸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자신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불이 다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심미연은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추워지고 머리까지 아파오자 누구의 번호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전화를 걸어버렸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이 시간에 지한 씨는 왜 찾는 거야?”마치 자신이 본처라도 된 양 새침하게 묻는 온지유의 목소리를 들으니 구역질이 올라온 심미연이 차갑게 물었다.“남편이 밤늦게 안
그에 깜짝 놀란 신하린이 다급하게 구급차를 불렀고 심미연은 빠르게 수술실로 실려 들어갔다.그녀가 혹시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 심미연은 수술을 하는 내내 앉지도 못하고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한편 이노하이브 계열사 중 하나인 인하병원 VIP 병실에서는 강지한이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온지유를 나무라고 있었다.“임산부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심미연이랑 싸우는 게 말이 돼? 이젠 안 무서운 거야?”강지한의 말에 온지유는 서러운 듯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심미연이 아까 전화오니까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지한 씨 찾는 줄 알고 받은 거야. 그런데 전화 받자마자 내가 강씨 집안 팔찌랑 남편을 뺏었다고 날 욕하잖아. 그래서 뭐라고 몇 마디 했는데 이거 다 인터넷에 올려서 나 다시는 춤 못 추게 하겠대.”“미안해 지한 씨,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지한 씨 전화 함부로 안 받을게.”“지금 잘 테니까 화내지 마.”말을 마친 온지유가 이불을 덮어쓰며 눕자 이불 끝을 살짝 들추어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보던 강지한은 마음이 아픈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힘들게 얻은 네 아이잖아. 잘못되면 네가 제일 힘들 거야, 그러니까 몸 좀 챙겨. 심미연 쪽은 내가 잘 얘기해볼게. 다시는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게 잘 해결할게.”“그리고 오늘 기사 같은 일도 다신 없었으면 좋겠어.마지막 말에 유독 힘을 주는 강지한에 온지유는 자연스레 그의 눈을 올려다봤다.담담한 눈빛이었지만 그 눈빛에 제 마음속 깊은 곳마저 들여다보는 것 같아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지한 씨, 사실 그 기사로 전에 났던 내 기사 덮으려던 건데 혹시 지한 씨 신경 쓰이면 지금이라도 정정기사 낼게. 다 그냥 짜고 친 거고 팔찌도 가짜라고. 다들 재미로만 봐달라고 얘기할까?”“얼른 자, 그건 성무진 시켜서 처리하면 돼.”사실 온지유는 지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강지한 앞이라 두 손으로 이불을 꽉 잡으며 불쌍한 척 연기를 이어나갔다.
“얼른 잠이나 자, 심미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텐데 뭐하러 너까지 신경 써.”이불을 잘 덮어준 강지한이 소파로 걸어가며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나도 소파에서 눈 좀 붙일게.”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강지한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온지유는 할 수 없이 잠을 청하기로 했다.“그럼 지한 씨도 얼른 자.”온지유가 눈을 감자 한쪽에 서 있던 강지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병실을 나갔고 그의 인기척이 사라지마 마자 눈을 뜬 온지유는 반드시 심미연에게서 강지한을 뺏어오겠다고 다짐했다.한편 문밖에 선 강지한은 성무진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한참 만에 눈을 뜬 심미연은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자신이 또다시 병원에 왔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미간을 찌푸렸다.“미연아, 일어났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자신을 주려고 사 온 건지 손에 죽을 들고 있는 신하린을 보며 물었다.“나 왜 여기 있는 거야?”심미연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온지유가 한 말 몇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이마에 난 상처가 비 때문에 염증이 생겼대, 그리고 감기까지 걸려서 아까 쓰러졌었어.”말을 하며 침대 쪽으로 걸어온 신하린은 밥상을 올려놓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그래서 바로 구급차 부르고 병원 왔지, 별일 없어서 다행이지 너 잘못됐으면 나 진짜 칼 들고 강지한 찾아갈 뻔했어.”얼굴이 빨개진 채 열 분을 토하는 신하린은 정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심미연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미안해,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놈 이름을 언급해버렸네.”하지만 심미연이 아무 말이 없자 신하린은 그녀가 놀란 줄 알고 바로 심미연의 눈을 보며 사과했다.그래도 신하린의 화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강지한이 차도 없는 고속도로에 심미연을 버려두고 간 일이 자꾸만 떠올라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전에 온지유한테 따지다가 하마터면 심미연을 경찰서에 보낼뻔해서 참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강지한을 반 죽여놨을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 누군가 핸드폰을 들고 신하린 집에 오긴 한 것 같아 심미연은 빠르게 전화를 받아보았다.“양경자 씨 보호자분, 빨리 병원으로 와주세요. 지금 수술 들어가야 되는데 보호자분 동의가 필요합니다.”단호하면서도 냉정한 간호사의 말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심미연은 서둘러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양경자는 심미연의 외할머니였는데 어릴 때 외할머니 집에서 잠깐 살았을 때 심미연을 아주 잘 챙겨주신 분이었다.요즘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각종 수액과 약들을 복용하면서 병원에 계셨는데 며칠 전만 해도 많이 좋아지셔서 퇴원도 기대할 정도였던 상태가 갑자기 수술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심미연은 빠르게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그런데 신하린이 그런 심미연을 붙잡으며 말했다.“의사가 너 며칠 동안 입원하면서 상태 지켜봐야 된다고 했어. 너 지금 아무 데도 못 가.”그 말에 심미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신하린을 바라보았다.“할머니가 수술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대.”그런 심미연의 모습에 할 말이 없어진 신하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심이라도 해. 좀만 기다려, 나랑 같이 가자.”열은 내렸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심미연도 신하린과 동행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었다.“알겠어, 기다릴게.”신하린은 빠르게 정리를 마치고 심미연과 함께 이노하이브 산하의 인하병원으로 향했다.할머니가 수술실로 들어간 뒤 심미연은 안절부절못하고 그 앞을 서성였는데 1분 1초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타들어 가고 있었다.어제 똑같은 상황을 겪어봤기에 지금 심미연이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는 신하린이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할머니 괜찮으실 거야.”몇 년 동안 아프신 할머니를 봐오면서 할머니가 자신의 곁을 영영 떠날까 봐 두려워했던 심미연이 신하린을 붙잡으며 말했다.“하린아, 나 너무 무서워...”“괜찮아, 할머니 꼭 깨어나실 거니까
그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심미연이 주저앉으려 하자 신하린은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어떻게 할 거야 미연아?”별다른 수가 없게 된 심미연은 웃으며 의사를 향해 말했다.“선생님, 약은 제가 어떻게든 구해볼게요. 지금은 할머니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이만 가볼게요.”의사는 신하린을 끌고 가는 심미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돈을 아무리 써도 그냥 목숨만 부지하는 것뿐인데 뭐하러 그런 무모한 짓을 계속하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하지만 의사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심미연이 지키려는 건 할머니 한 분이 아니라 한 가정이라는 것이다.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신의 유일한 집을 잃어버리는 것이기에 홀로 남은 심미연은 더 불쌍해질 것이다.한편 병실로 돌아온 심미연은 온몸에 크고 작은 관들을 연결한 채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할머니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신하린은 그런 심미연이 안쓰러워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미연아, 할머니랑 얘기 나눠, 나 밖에 있을게.”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심미연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할머니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할머니, 꼭 살아계셔야 해요, 나 혼자 두고 가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눈가가 점점 빨개지고 있을 때 간호사가 다른 수액을 들고 나타났고 평소 할머니를 돌봐주시는 간병인 아줌마도 물을 받아서 들어왔다.“미연 씨.”“아주머니, 고생이 많으세요.”심미연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들고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말했다.“제가 바빠서 할머니 뵈러도 자주 못 오니까 할머니 잘 좀 봐달라고 드리는 거예요.”이렇게 통 크고 말도 잘 통하는 고용주는 처음이라 간병인 아줌마도 감동했는지 돈 봉투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미연 씨, 이건 그냥 넣어둬요. 나한테 주는 월급도 이미 충분히 많아요.”하지만 심미연은 굳이 그 돈을 다시 김지영에게 쥐여주며 말했다.“돈은 받아두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하니까 할머니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주세요.”침대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니
온지유와 강지한에 대한 얘기만 듣지 않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는데 공교롭게도 온지유와 마주치게 되었다.“너도 나보러 온 거야?”그에 당황한 심미연이 가만히 서 있는데 온지유는 마치 친한 친구를 만난 사람마냥 심미연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물었다.“의뢰인이 병원에 있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온 거야.”무의식적으로 할머니의 병세를 숨기고 싶었던 건지 심미연은 자연스레 거짓말을 하며 손을 빼내었다.“나 보러 온 게 아니라도 괜찮아, 마침 할 말도 많았는데 앉아서 얘기라도 하자.”온지유는 심미연의 굳은 표정을 못 본 척 계속해서 팔짱을 껴오며 웃어 보였다.그에 어이가 없어진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강지한이 너랑 자고 팔찌도 너한테 줬다 해도 나랑 강지한이 이혼하지 않은 이상 너는 염치없는 내연녀일 뿐이야, 그런 너랑 내가 과연 무슨 할 말이 있을까?”이 나이 먹도록 내연녀가 본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건 처음 보는 심미연이었다.뭐 둘이 진짜 사랑하는 걸 부러워하기라도 해야 하는지 심미연은 이 상황이 어이없기만 했다.한편 소란스러운 그 둘을 보며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둘 온지유를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낭만적인 프러포즈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연녀랑 쓰레기였어? 어떻게 사람이 저래?”“남편을 뺏은 것도 모자라서 팔찌까지, 진짜 하나둘 뺏다 보니까 맛이라도 들린 거야 뭐야.”“전에 기사 난 거 있잖아. 대상도 스폰 써서 받은 거고 스폰서 아이까지 임신했다던데 그게 다 사실이었나 봐.”“진짜 양심이라는 게 없나?”그 말들을 다 들은 온지유는 낯빛이 창백해져 갔다.강지한의 아이를 가졌다고 심미연 앞에서는 당당한 척해도 다른 사람들 눈에 나쁜 년은 온지유였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개를 들지 못하는 온지유를 보면서도 통쾌한 감정이 들지 않는 심미연은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강지한 아이 임신한 거 알아. 둘이 같이 살
강지한을 보자마자 또 좋은 수가 떠오른 온지유는 바로 그의 품 안으로 달려가 울먹이며 말했다.“지한 씨, 미안해. 내가 지한 씨한테 팔찌 달라고만 안 했어도 미연이가 화내는 일은 없었을 텐데.”“의사가 심신안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잖아, 울지 마.”강지한은 언짢은 듯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다정함이 기본으로 묻어나 있었다.그래서 그 말만 들어도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지한 씨, 팔찌는 이만 돌려줘. 나는 이런 거 낄 자격이 없어.”온지유는 강지한의 손을 잡으며 억울하고 서러운 표정으로 팔찌를 그 위에 올려두었다.온지유도 손주며느리인데 자신에게는 선물은커녕 용돈도 주지 않던 강준형이 심미연에게는 이노하이브 주식과 함께 강씨 집안 가보인 팔찌까지 주니 온지유는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걸 심미연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받아냈으니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그렇게 갖고 싶었던 팔찌라 해도 강지한 앞에서는 안 그런 척 연기를 해야만 했다.“내가 너한테 선물한 건 네 거야, 누가 선물을 다시 돌려줘.”그 수법이 통한 건지 강지한이 온지유 손에 팔찌를 다시 넣어주며 나지막하게 말하자 온지유는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심미연을 바라보았다.강지한이 이렇게 말한 이상 심미연은 절대 팔찌를 얻지 못할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그때 심미연은 핸드폰을 들고 그 둘을 빠르게 찍어대며 말했다.“다음에 둘이 잘 때 나 꼭 불러줘, 좋은 카메라 들고 가서 고화질로 찍어줄게. 그럼 이혼소송할 때 재판장님이 나 불쌍해서 재산 분할 좀 더 해줄 수도 있잖아.”심미연은 정말로 기쁜 사람마냥 환하게 웃으며 미어지는 마음을 아무도 볼 수 없게 꽁꽁 숨겼다.자신이 보는 앞에서 팔찌를 온지유에게 전해주며 저런 말을 내뱉는 걸 보니 강지한도 자신을 아내로 보진 않는 것 같아 더 이상 그와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나랑 지한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오해하지마!”이때 항상 강지한과 엮이고
박유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급히 고개를 돌려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은 여전히 변함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유진 오빠, 왔어?” 그녀는 몸을 돌려 그에게 달려가며 목소리는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그녀의 그림자가 불빛에 길게 늘어지며 부드럽고 아련하게 흔들렸다. 강지한은 얼굴에 분노를 가득 담아 박유진을 노려보았다. 박유진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숙여 품에 안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속에 숨길 수 없는 사랑이 가득했다. 강지한은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이 그의 가슴을 조여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켰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괴로움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미안, 방금 전화받느라 늦었어. 이제 가자. 우리 먼저 들어가자.” 박유진은 심미연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목소리는 따스했다. “응. 가자.”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자연스럽게 그에게 맡겼다. 그녀와 강지한은 이미 이혼했고 이제 박유진과 당당히 함께할 수 있었다. “안 돼. 가지 마!” 강지한이 목소리를 높였다. 박유진은 그를 흘낏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이미 약속이 있습니다. 강 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저희가 식사 후에 얘기하죠.”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얼굴에는 변함없이 온화한 미소가 있었다. 심미연은 그를 올려다보며 그의 배려와 사랑이 떠오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은한 따뜻함이 밀려왔다. 그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강지한의 시선 끝에서 심미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치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 강지한의 이성이 뚝 끊어졌다. ‘심미연이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아파!” 심미연이
그때 온지유에 대한 범죄 증거를 수집했을 때 그녀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소 강지한 옆에서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보였던 온지유가 뒤에서는 그렇게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심미연 씨, 온지유를 안에 집어넣고 평생 고통을 받게 만든다고 해서 강지한의 마음에서 지유가 사라질 거라 생각하세요? 심미연 씨는 평생 강지한과 함께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강지한은 눈에 살기를 띄우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에 시선을 두며 조용히 말했다. “육현성 씨, 굳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알아요. 월래부터 강지한과 다시 시작할 마음은 없었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바로 주제를 돌렸다. “오히려 육현성 씨는 이번 생엔 온지유와 함께하고 싶어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겠네요. 정말 안타깝네요.”육현성의 얼굴은 불편하게 일그러졌고 눈빛은 흐릿했다. 오랜 방탕한 생활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며 그의 몸은 심각하게 지쳐 있었다. 그는 온지유 같은 여자를 위해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망가뜨려왔고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미연의 말은 육현성의 가슴을 깊이 찌른 듯했다. 그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찢어지듯 일그러졌고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 년이 죽고 싶냐?” 그는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조르려 했다. 이번 생에서 온지유와 함께할 수 없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었다. 몇 년간 그는 그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심미연은 그 아픈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내려 했다. 심미연이 몸을 피하려던 순간 갑자기 옆에서 한 다리가 튀어나와 육현성의 몸에 정확히 차올랐다. 육현성은 뒤로 몇 걸음 밀려났고 몸을 간신히 가다듬은 뒤에야 강지한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봤다. 강지한은 심미연을 뒤로 숨기듯 서서 위압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육현성을 내려다보았다. “육현성, 내 여자를 때리는 장면 보라고 밥 먹자 했냐?”강지한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는 차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이렇게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질 수가 있나.’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두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한서윤은 남자를 보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기 시작했다. “현성 오빠, 심미연 씨가...”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한서윤은 마치 가련한 여인처럼 보였고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약해지게 했다. “일어나서 말해.” 육현성이 살짝 몸을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한서윤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육현성이 온지유에 대한 깊은 감정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온지유가 부러웠다. 강지한은 온지유의 말이라면 다 들어줬고 육현성 역시 그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남자들이 모두 그녀 주위를 맴돌며 정말 행복해 보였다. 육현성은 한서윤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먼저 들어가.” 그 말은 한서윤에게 한 것이었다. 한서윤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입술을 깨물며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유성 오빠, 오빠랑 같이 들어가고 싶어요.” 심미연은 두 사람의 쿵짝에 관심이 없었고 회원 가입을 하러 갈 준비를 했다. 그때 육현성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심미연 씨, 잠깐만요.”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뭐죠?” “일이 있어요.” “미안해요. 지금 바빠요.” 심미연은 육현성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온지유를 향한 무조건적인 헌신. 온지유가 저지른 큰 죄를 알고도 그녀를 해외로 보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 모습. 그런 사람은 확실히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심미연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현성 오빠, 심미연이랑 무슨 얘기 하려고요?” 한서윤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육현성도 심미연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아니야?’ 육현성은 얼
그는 심미연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태하가 시끄럽게 굴면 아버님, 어머님이 제대로 쉴 수 있을까?” 심미연은 아들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귀여워해 주면 태하는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방방 뛰어다닌다.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박유진은 부드럽게 심미연을 안심시켰다. 박유진의 말을 듣고 심미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위치 보내줘. 내가 차로 갈게. 도착해서 만나자.” 박유진은 잠시 침묵한 뒤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박유진은 곧바로 위치를 보냈다. 심미연은 곧장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가벼운 메이크업을 마쳤다. 능숙하게 준비를 끝내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박유진이 보낸 위치를 따라 심미연은 차를 몰고 산장에 도착했다. 차가 입구에 다다르자 입구에서 차량을 멈춰 세웠다. “안녕하세요. 손님, 회원 카드 부탁드립니다.” 심미연은 이 산장이 회원 전용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 “지금 회원 가입을 할 수 있을까요?” 경성에 살고 있고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아서 회원 가입을 하면 편리할 것 같았다.그때 귀에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림산장의 회원 연회비가 1억 원이 넘는데 심미연 씨는 그 정도 돈이 있나?” 심미연은 고급 브랜드로 치장한 여자를 차가운 눈빛으로 힐끗 쳐다봤다. 온지유의 가장 친한 친구 한서윤이었다. 예전에 온지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제일 먼저 등장하던 사람이었지만 심미연은 그녀를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마주쳐도 아예 모른 척하며 항상 그녀를 무시했다.“너 강지한 씨 찾으러 온 거지? 몇 년이나 죽었는데 아직도 미련 못 버리다니. 진짜 역겨워.” 한서윤은 심미연을 쓰레기라도 보는 듯한 눈초리로 쏘아봤다. 심미연은 그 여자의 악의적인 기운을 똑똑히 느꼈고 아름다운 도화 같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차분히 응시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강지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왜 그 여자한테 물어봐야 해? 이런 건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지.”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미연이 낳은 아들은 결국 그의 아들이고 자신은 아이의 친아빠니까 심미연은 당연히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뭐?” 박시훈은 입을 크게 벌리며 충격을 받았다. 그 입이 너무 커서 닭알 하나 정도는 거뜬히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지한이 이런 말을 하다니...’ 외부인인 그가 듣기에도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는데 심미연이 들으면 얼마나 화가 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입 그렇게 크게 벌리고 뭐 하는 거야. 닫아!” 강지한은 박시훈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 후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들며 무심히 덧붙였다. “상미의 친부모는 빨리 찾아야 해. 찾으면 그들에게 돈이라도 줄 생각이야.” 강상미는 그가 정성껏 키운 아이였다. 비록 강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더라도 그는 그 아이를 절대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친부모가 그때 상미를 버렸다면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찾을 리가 없을 거다.“알겠어. 내가 알아봐 줄게. 하지만 충고 하나 하자.” “네 전처, 이제 예전처럼 너한테 목매는 여자가 아니야. 지금 그 여자에겐 회사도 있고 로펌도 있어. 물론 자산 규모로만 보면 너와 비교가 안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 그녀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 됐어.” 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 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박시훈은 오랫동안 강지한과 협력하며 지냈고 둘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만약 그들 사이에 심미연이 없었다면 그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강지한이 심미연을 되찾으려 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심미연의 편에 설 것이다. “그 여자가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나만 하겠어?” 강지한은
심미연이 방금 한 말이 갑자기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딸이 점점 자신을 닮아가는데 이건 아마도 그 아이를 자신이 키우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전엔 왜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네. 알겠습니다.” 성무진은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그저 더 이상 묻지 않고 강지한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강지한은 전화를 끊은 뒤 차를 몰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박시훈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강지한은 이미 두 잔의 술을 홀로 마신 상태였다. 박시훈을 보자 강지한은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아. 할 말이 있어.” 박시훈은 가슴에 손을 얹고 저항하며 말했다. “지한아, 우리 이렇게 친한데 그건 좀 아니지 않아?” 그는 자신의 성향이 바뀔까 봐 두려웠다. “앉아!” 강지한은 짜증이 난 듯 목소리에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박시훈은 몸을 살짝 떨며 조심스럽게 강지한 옆에 앉았다. 그의 엉덩이를 살짝살짝 의자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강지한은 그런 박시훈의 모습을 보고 짜증이 더욱 커졌다. “박시훈, 제발 좀 정상적으로 행동해.” “난 정상인데 너가 이상한 거지.” 박시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야말로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어 보여.’ “그만해. 이제 입 닫아!” 강지한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박시훈은 손으로 입가에 지퍼를 닫는 제스처를 하며 말했다. “말해 봐.”그 목소리는 코로 나는 듯 매우 이상하게 들렸다. “당시 상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확인해봐. 정확한 출생일도 알려줘.” 그는 그때 문소영과 심서연이 말한 것만 믿고 너무 쉽게 넘어갔다. 사실 처음부터 조사를 했어야 했다. “상미의 출생에 의문이 드는 거야?” 박시훈은 강지한이 자신에게 손대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자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이제서야 깨달았냐?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반응이 너무 느린
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끔찍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벌레처럼 비틀어진 그 흉터 자국이 손목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강지한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머릿속에 억지로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었다. 강지한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심미연은 재빨리 손을 빼고 소매를 잡아당겨 흉터를 가린 뒤 다시 한 번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너랑은 상관없어.” 그 흉터는 그녀가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절 자해의 흔적이었다. 당시 너무 많은 피가 흘렀고 만약 제때 구출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 해 그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매번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박유진이었다. 그녀는 박유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박유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다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오직 박유진과 함께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심미연, 넌 내 여자라는 걸 잊지 마. 당연히 내가 너를 신경 써야지.” 강지한은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논리 속에서 심미연은 그와 결혼하고 함께 잠자리를 가졌으니 평생 그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남자가 꿈꿀 자리는 없었다. 방금 전의 감정이 격하게 흔들린 탓에 심미연은 점차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더 이상 강지한과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가서 꿈이라도 꾸던가.” 그 말을 남기고 심미연은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성 비서가 레스토랑 예약했어. 같이 가자.” 강지한이 뒤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심미연, 넌 도망칠 수 없어. 돌아왔으면 내 곁으로 돌아와서 다시 함께 살아야지.” ‘박유진과 함께 있겠다고?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을 거야.’ 심미연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녀는 이곳을 떠나고
강지한은 그녀를 정말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장난감이라도 된는 것처럼 생각하는는 것 같았다. 원하면 가지겠고 필요 없으면 버리고. “네가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최고의 변호사를 써서 아들을 빼앗아 올 거니까. 심미연, 그때 와서 나한테 구걸하지 마.” 강지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미연은 이미 임현에게서 강지한이 자신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아들 심태하의 양육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듣게 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강지한은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할 수 있지?’ ‘정말 한 점의 인간미도 없네.’“강지한, 너랑 이혼하고 나서 낳은 아이야. 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심미연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분노 어린 시선을 꽂았다. 그 짧은 순간 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괴롭혀왔는지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 남자는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랑 상관있는지 없는지는 친자 검사를 하면 바로 나오겠지. 심미연, 못 하겠어?” 강지한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미 그는 심태하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아들을 자기 품에 데려오는 것뿐이었다. 아들만 손에 넣으면 심미연도 결국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내 아들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친자 검사를 하겠다는 거야?” 심미연은 싸늘하게 웃으며 쏘아붙였다. “그렇게 친자 검사가 하고 싶으면 차라리 집에 가서 네 딸 샘플이나 가져와서 해보는 게 어때?” 이제야 그의 역겨운 속내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걸 알고도 가만히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런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강지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3년 동안 키운 딸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 아이의 친부모를 찾으려 하거나 친자 검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는 애초부터 그가 주운 아이였고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심미연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대표님 사무실로 곧장 들어섰다. 문이 크게 열리며 들린 소리에 강지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졌다. 마치 잘 가꿔진 꽃처럼 눈에 띄게 싱그럽고 매혹적이었다. 강지한은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잠시 숨을 고쳤다. “강지한, 비겁한 놈. 너 진짜 역겨워.” 심미연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울증을 극복하고 나서 이렇게 감정을 폭발시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강지한이 너무 지나쳤다. 강지한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심미연, 여긴 내 구역이야. 내 앞에서 이렇게 난리치면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라는 생각 안 해?” 강지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담담했다. 예전 이 여자는 그 앞에서 항상 온화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여줬다. 그를 향해 화를 내는 일도 없었고 목소리조차 높아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는 그에게 소리치며 거침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에게 유난히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그의 마음속에 뜨겁게 불타는 불씨가 하나 떨어진 듯 그의 심장은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신고 해 봐. 경찰이 그 더럽고 비열한 짓을 한 널 잡을지 아니면 나를 잡을지 한 번 보자고.” 심미연은 망설임 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위에 있던 펜통을 들고 강지한에게 던졌다. “정말 뻔뻔하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평소 그녀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변호사로서 무엇이 가능한지 무엇이 불가능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강지한과 마주한 그녀는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냥 미쳐버려도 상관없다. ‘강지한이 그토록 추악한 짓을 했는데 내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어.’비록 그녀가 미리 뒷문을 통해 프로젝트를 가져왔지만 그것도 그녀의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