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 누군가 핸드폰을 들고 신하린 집에 오긴 한 것 같아 심미연은 빠르게 전화를 받아보았다.“양경자 씨 보호자분, 빨리 병원으로 와주세요. 지금 수술 들어가야 되는데 보호자분 동의가 필요합니다.”단호하면서도 냉정한 간호사의 말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심미연은 서둘러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양경자는 심미연의 외할머니였는데 어릴 때 외할머니 집에서 잠깐 살았을 때 심미연을 아주 잘 챙겨주신 분이었다.요즘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각종 수액과 약들을 복용하면서 병원에 계셨는데 며칠 전만 해도 많이 좋아지셔서 퇴원도 기대할 정도였던 상태가 갑자기 수술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심미연은 빠르게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그런데 신하린이 그런 심미연을 붙잡으며 말했다.“의사가 너 며칠 동안 입원하면서 상태 지켜봐야 된다고 했어. 너 지금 아무 데도 못 가.”그 말에 심미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신하린을 바라보았다.“할머니가 수술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대.”그런 심미연의 모습에 할 말이 없어진 신하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심이라도 해. 좀만 기다려, 나랑 같이 가자.”열은 내렸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심미연도 신하린과 동행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었다.“알겠어, 기다릴게.”신하린은 빠르게 정리를 마치고 심미연과 함께 이노하이브 산하의 인하병원으로 향했다.할머니가 수술실로 들어간 뒤 심미연은 안절부절못하고 그 앞을 서성였는데 1분 1초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타들어 가고 있었다.어제 똑같은 상황을 겪어봤기에 지금 심미연이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는 신하린이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할머니 괜찮으실 거야.”몇 년 동안 아프신 할머니를 봐오면서 할머니가 자신의 곁을 영영 떠날까 봐 두려워했던 심미연이 신하린을 붙잡으며 말했다.“하린아, 나 너무 무서워...”“괜찮아, 할머니 꼭 깨어나실 거니까
그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심미연이 주저앉으려 하자 신하린은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어떻게 할 거야 미연아?”별다른 수가 없게 된 심미연은 웃으며 의사를 향해 말했다.“선생님, 약은 제가 어떻게든 구해볼게요. 지금은 할머니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이만 가볼게요.”의사는 신하린을 끌고 가는 심미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돈을 아무리 써도 그냥 목숨만 부지하는 것뿐인데 뭐하러 그런 무모한 짓을 계속하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하지만 의사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심미연이 지키려는 건 할머니 한 분이 아니라 한 가정이라는 것이다.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신의 유일한 집을 잃어버리는 것이기에 홀로 남은 심미연은 더 불쌍해질 것이다.한편 병실로 돌아온 심미연은 온몸에 크고 작은 관들을 연결한 채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할머니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신하린은 그런 심미연이 안쓰러워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미연아, 할머니랑 얘기 나눠, 나 밖에 있을게.”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심미연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할머니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할머니, 꼭 살아계셔야 해요, 나 혼자 두고 가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눈가가 점점 빨개지고 있을 때 간호사가 다른 수액을 들고 나타났고 평소 할머니를 돌봐주시는 간병인 아줌마도 물을 받아서 들어왔다.“미연 씨.”“아주머니, 고생이 많으세요.”심미연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들고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말했다.“제가 바빠서 할머니 뵈러도 자주 못 오니까 할머니 잘 좀 봐달라고 드리는 거예요.”이렇게 통 크고 말도 잘 통하는 고용주는 처음이라 간병인 아줌마도 감동했는지 돈 봉투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미연 씨, 이건 그냥 넣어둬요. 나한테 주는 월급도 이미 충분히 많아요.”하지만 심미연은 굳이 그 돈을 다시 김지영에게 쥐여주며 말했다.“돈은 받아두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하니까 할머니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주세요.”침대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니
온지유와 강지한에 대한 얘기만 듣지 않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는데 공교롭게도 온지유와 마주치게 되었다.“너도 나보러 온 거야?”그에 당황한 심미연이 가만히 서 있는데 온지유는 마치 친한 친구를 만난 사람마냥 심미연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물었다.“의뢰인이 병원에 있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온 거야.”무의식적으로 할머니의 병세를 숨기고 싶었던 건지 심미연은 자연스레 거짓말을 하며 손을 빼내었다.“나 보러 온 게 아니라도 괜찮아, 마침 할 말도 많았는데 앉아서 얘기라도 하자.”온지유는 심미연의 굳은 표정을 못 본 척 계속해서 팔짱을 껴오며 웃어 보였다.그에 어이가 없어진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강지한이 너랑 자고 팔찌도 너한테 줬다 해도 나랑 강지한이 이혼하지 않은 이상 너는 염치없는 내연녀일 뿐이야, 그런 너랑 내가 과연 무슨 할 말이 있을까?”이 나이 먹도록 내연녀가 본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건 처음 보는 심미연이었다.뭐 둘이 진짜 사랑하는 걸 부러워하기라도 해야 하는지 심미연은 이 상황이 어이없기만 했다.한편 소란스러운 그 둘을 보며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둘 온지유를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낭만적인 프러포즈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연녀랑 쓰레기였어? 어떻게 사람이 저래?”“남편을 뺏은 것도 모자라서 팔찌까지, 진짜 하나둘 뺏다 보니까 맛이라도 들린 거야 뭐야.”“전에 기사 난 거 있잖아. 대상도 스폰 써서 받은 거고 스폰서 아이까지 임신했다던데 그게 다 사실이었나 봐.”“진짜 양심이라는 게 없나?”그 말들을 다 들은 온지유는 낯빛이 창백해져 갔다.강지한의 아이를 가졌다고 심미연 앞에서는 당당한 척해도 다른 사람들 눈에 나쁜 년은 온지유였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개를 들지 못하는 온지유를 보면서도 통쾌한 감정이 들지 않는 심미연은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강지한 아이 임신한 거 알아. 둘이 같이 살
강지한을 보자마자 또 좋은 수가 떠오른 온지유는 바로 그의 품 안으로 달려가 울먹이며 말했다.“지한 씨, 미안해. 내가 지한 씨한테 팔찌 달라고만 안 했어도 미연이가 화내는 일은 없었을 텐데.”“의사가 심신안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잖아, 울지 마.”강지한은 언짢은 듯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다정함이 기본으로 묻어나 있었다.그래서 그 말만 들어도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지한 씨, 팔찌는 이만 돌려줘. 나는 이런 거 낄 자격이 없어.”온지유는 강지한의 손을 잡으며 억울하고 서러운 표정으로 팔찌를 그 위에 올려두었다.온지유도 손주며느리인데 자신에게는 선물은커녕 용돈도 주지 않던 강준형이 심미연에게는 이노하이브 주식과 함께 강씨 집안 가보인 팔찌까지 주니 온지유는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걸 심미연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받아냈으니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그렇게 갖고 싶었던 팔찌라 해도 강지한 앞에서는 안 그런 척 연기를 해야만 했다.“내가 너한테 선물한 건 네 거야, 누가 선물을 다시 돌려줘.”그 수법이 통한 건지 강지한이 온지유 손에 팔찌를 다시 넣어주며 나지막하게 말하자 온지유는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심미연을 바라보았다.강지한이 이렇게 말한 이상 심미연은 절대 팔찌를 얻지 못할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그때 심미연은 핸드폰을 들고 그 둘을 빠르게 찍어대며 말했다.“다음에 둘이 잘 때 나 꼭 불러줘, 좋은 카메라 들고 가서 고화질로 찍어줄게. 그럼 이혼소송할 때 재판장님이 나 불쌍해서 재산 분할 좀 더 해줄 수도 있잖아.”심미연은 정말로 기쁜 사람마냥 환하게 웃으며 미어지는 마음을 아무도 볼 수 없게 꽁꽁 숨겼다.자신이 보는 앞에서 팔찌를 온지유에게 전해주며 저런 말을 내뱉는 걸 보니 강지한도 자신을 아내로 보진 않는 것 같아 더 이상 그와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나랑 지한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오해하지마!”이때 항상 강지한과 엮이고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의 말을 듣고 있던 온지유는 강지한이 그럴 리 없다고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는데 그때 심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괜찮은데 나중에 온지유 씨 배 불러오면 그때 가서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까 봐 그래, 그런 모습은 당신도 보고 싶지 않잖아.”심미연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처럼 아량이 넓은 본처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강지한이 그녀의 팔목을 잡더니 그대로 끌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문이 닫히자마자 큰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잡으며 입을 맞추려 하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는데 강지한의 입술이 그대로 손에 닿아오자 손은 금세 뜨거워졌다.강지한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심미연의 손을 치우고 입술을 맞춰왔다.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가는 강지한과 그 사이사이로 풍겨오는 옅은 담배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져 버린 심미연은 그대로 강지한에게 입술을 내어줬는데 1층에 도착해서 문이 열릴 때가 돼서야 소란스러움에 현실을 자각하고 힘을 주어 강지한의 가슴팍을 때렸다.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본 강지한은 심미연의 얼굴을 잡아 제 품 안으로 넣으며 말했다.“움직이지 마, 내가 안아서 나갈 거니까 네 얼굴은 안 보일 거야.”그 말에 심미연이 정말로 가만히 있자 강지한은 그녀를 안아 들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밖에 서 있던 성무진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내 품 안에 있는 여자가 심미연임을 알아챘다.강지한이 안은 여자는 심미연과 온지유 둘뿐이었는데 온지유를 안을 때는 늘 그녀에게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절대 고개를 자신의 가슴에 묻지 못하게 했는데 지금 안겨있는 여자의 자세를 보니 그건 틀림없이 심미연이었다.성무진이 강지한이 올라간 게 심미연을 찾기 위해서였나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장본인은 이미 그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문 열어.”성무진이 차 문을 열자마자 심미연을 뒷좌석에 앉히고 문을 잠근 강지한은 바로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강지한의 얼
강지한이 박유진을 언급하자 전에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한 사람인데 강지한이 괜히 귀찮게 할까 봐 걱정된 심미연은 다급히 부인했다.“나랑 박유진 씨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해명을 하는 심미연을 보며 표정을 굳히며 손에 힘을 준 강지한이 말했다.“왜, 내가 박유진 귀찮게 할까 봐 걱정돼?”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길을 느끼고 있던 사람이 박유진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표정부터 변하는 걸 보니 심미연이 박유진을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이 가서 강지한은 기분이 더 나빠졌다.강지한에게 속마음을 들켜버린 심미연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제 손에 느껴지는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지자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내 아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거짓말을 잘했지?”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심미연도 그냥 다른 남자를 감싸고 돌았을 뿐인데 강지한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올라 목소리까지 떨려왔다.폭풍전야 같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심미연은 여전히 부정하느라 애썼다.“거짓말 아니야, 나랑 박유진 씨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어제 박유진에게서 빌린 외투도 신하린 집에 그대로 있는데 내일 세탁소에 맡기고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했다.그런데 심씨 집안에서 박유진의 귀국을 알게 되면 사람을 붙여서 미행할 텐데 그러면 다시 만나기도 어려워질 것 같아 심미연은 옷을 어떻게 돌려줄지도 걱정이었다.한편 강지한은 달싹이는 심미연의 입술을 보고 있으니 더 화가 나서 마치 분노를 표출하듯 거칠게 입술을 빨아들였다.“강지한, 아파...”갑작스러운 고통에 심미연이 몸부림을 치자 강지한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뭐 하는 짓이야? 지금 나 밀어낸 거야?”“그게 아니라 아프다고!”심미연의 해명에 고개를 숙이던 강지한이 입을 열려던 찰나, 그는 그녀의 어깨에 새겨진 빨간 자국을 보게 되었다.색깔을 보니 어제 새겨진 것 같아서 강지한은 자연스레 어젯밤 박유진 품에 안겨있던 심미연의 모습이 떠올라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박유진 씨가 날 안은 건 그때 내 옷이 다 찢겨져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야. 박유진 씨는 나를 그저 차에만 태워주고 나는 하린이랑 같이 갔어.”강지한이 믿든 말든 심미연이 한 말들은 전부 사실이었다.하지만 그 말을 다 들은 강지한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그런 기사 난 적 없었어.”역시나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내연녀랑 쌍으로 하루가 멀다 하게 기사에 이름을 올릴 때는 자신에게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으면서 고작 자국 하나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점점 더 실망스러워졌다.“왜 말이 없어? 이젠 거짓말도 못 하겠어?”이미 박유진과 심미연이 부정당한 관계일 거라고 확신한 강지한은 두 눈으로 증거를 확인하기 전에는 심미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눈물이 고인듯한 눈으로 강지한을 올려다보던 심미연은 갑자기 웃음을 흘리더니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그럼 성무진 씨한테 어젯밤 고속도로 CCTV랑 내 입원기록 확인해보라고 연락해. 그럼 거짓인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한마디 한마디 내뱉을수록 심미연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전에는 강지한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그를 이해해보려고 몇 년이나 애를 써왔지만 이제는 그런 생활을 끝낼 때가 된 것 같았다.더 이상 강지한을 보아도 그녀의 심장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하지만 심미연을 보는 강지한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만약 심미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를 사지로 밀어 넣은 게 자신이었기에 강지한은 본인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우리 이혼하자.”하지만 강지한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심미연이 눈을 꼭 감은 채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다시 한번 이혼을 언급했다.같이 있으면 괴롭기만 한 사이니 빨리 끝내는 편이 서로에게 좋은 것 같았다.“전에 할아버지한테 절대 이혼 안 하겠다고 맹세하고 결혼한 거 잊었어? 이제 와서 이혼이 가능할 것 같아?”경성에 있는 수많은 여자들은 다 강지한의 아내가 되지 못해서 안달인데 그런 저를 제 손으로 버리겠다는 심미연의 이혼 제의에 강지한
의미심장한 심미연의 말에 강지한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 네가 한 말 똑바로 기억하라고. 화 풀렸으면 넥타이나 풀어, 나 갈거야.”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담담히 말하는 심미연에 강지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버렸다.혹시라도 듣지 말아야 할 걸 듣게 될까 봐 멀찍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신경은 온통 차에 쏠려있던 성무진은 강지한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에게로 다가갔다.“대표님.”“어젯밤 고속도로 CCTV 확인하고 심미연 이틀 동안 입원한 기록 있는지도 알아봐.”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눈앞에 놓인 증거를 더 믿는 것뿐이었다.갑작스러운 제 상사의 지시가 의아했지만 성무진은 알겠다는 대답만 남기고 바로 해당 부문에 연락을 했다.성무진이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강지한은 심미연의 어깨에 새겨진 자국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한편 손이 묶인 채 차에 혼자 남은 심미연은 차 좌석에 넥타이를 마찰하여 끊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문득 차창 너머로 보이는 강지한의 얼굴에 눈이 가버렸다.꿈에도 나올 정도로 9년이나 사랑한 남자였지만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 나니 이 관계를 끝내는 게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다.그때 빠르게 일 처리를 마친 성무진이 CCTV 영상이 담긴 노트북을 건네자 강지한은 30분이나 되는 영상을 클릭해보았다.그 시간 동안 열심히 넥타이를 풀어낸 심미연은 빨리 옷을 정리하고 강지한 몰래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하지만 당연히 인기척을 느낀 강지한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자 성무진은 빠르게 달려가 붙잡으려 했지만 영상을 다 확인한 강지한이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됐어, 그냥 보내줘.”그에 성무진이 바로 발걸음을 멈추자 그에게 노트북을 건네며 미간을 매만지던 강지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회사로 가.”영상을 다 보고 심미연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강지한이 자신이 했던 행동들과 못된 말들이 떠올라 어떻게 그녀를 봤으면 좋을지 몰랐
어두운 밤, 문도현의 모습이 희미하면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은 약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더욱 단단해 보였고 그 눈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숨겨져 있었으나 그것들이 곧바로 복잡한 감정으로 굳어졌다. 유리창 너머,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그 순간, 심미연은 문도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임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숨기지 않은 가식 없는 관심 그 자체였다. 시간이 이 순간에 마치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매 초마다 늘어나는 듯했다. 결국 문도현이 손을 들어 창문을 다시 두드리며 심미연을 불렀다. 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 깊게 숨을 쉬며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차 안으로 문도현의 낯선 기운이 섞인 바람이 들어왔다. “왔어요? 대담하시네요.” 문도현은 심미연이 혼자 온 것을 보고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음속으로는 심미연의 용기에 대한 감탄이 있긴 했지만 그가 내뱉은 말은 여전히 도발적이고 귀찮게 들렸다. 심미연은 차를 안정적으로 멈추고 차 문을 열었다. 긴 다리를 내딛고 이어서 몸을 날렵하게 차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 아래, 그녀의 모습은 가로등 불빛에 의해 길게 드리워졌다. “문도현 씨, 이제는 제 아들을 데려갈 수 있나요?” 심미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문도현을 향한 눈빛은 마치 두 자루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심장을 겨냥하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고 단지 눈앞의 남자를 평범한 사람처럼 대했다. 문도현은 피식 웃으며 심미연에게 다가가 귀에 가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으세요?” 말을 마친 후, 그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심미연의 뺨을 가볍게 스쳤다. 그 행동은 경솔하고 무례함이 가득했다. 심미연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지며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그녀는 문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그 사람의 손에 있기에 그녀는 그와의
전화기 너머로 낮고도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심연에서 흘러나온 듯한 묵직한 울림이었고 단 한 마디만으로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다. “이제 믿겠어요?” 순간 심미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에 쥔 핸드폰이 한순간에 뜨겁게 달아오른 것만 같았고 목을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에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주변의 공기는 얼어붙었고 들려오는 건 오직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와 멀리서 간간이 울려 퍼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뿐이었다. “지금 당장 추가할게요.” 심미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바삐 움직였고 거의 반사적으로 ‘친구 추가’버튼을 눌렀다. “번호도 저장해요. 헷갈리게 만들지 말고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삭제하지 마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저음으로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묘하게 날카로운 위협이 섞여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한순간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대로 덮쳐올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가 거쳐 온 여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고 직접 손에 쥐고 싶어진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는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면 언젠가는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여자는 결국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니까. 심미연은 급히 연락처 목록을 열어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남자의 속셈이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은 순순히 따르는 게 최선이었다. 망설임 없이 번호를 저장한 뒤 곧바로 캡처를 떠서 그의 카톡으로 전송했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그녀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속 불안과 초조함이 얽혀드는 가운데 시간은 더더욱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톡 알림음이 적막을 깨듯 울려 퍼졌다. 문도현이 보낸 메시지는 단 하나. [실시간 위치 공유.] 정확한 좌표가 찍힌 지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도현 씨? 무슨 일이죠?” ‘지난번에 차에서 걷어찼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나?’ “같이 방 잡을려고요. 이 정도면 충분한 이유 아닌가?” 문도현의 느물거리는 목소리에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할 얘기 없으면 끊겠습니다.” 심미연은 정신 나간 사람이랑 엮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문도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당신 아들 찾고 싶지 않아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미연은 손끝이 떨렸지만 애써 감정을 다잡았다. “무슨 뜻이에요? 내 아들이 당신 손에 있어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녀는 거듭 물었다. “지금 어디예요?”조급한 마음이 앞서 자꾸만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한테 예쁘게 부탁하면 가르쳐 줄 수도 있죠.” 가벼운 웃음이 섞인 장난스러운 말투. 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장난치지 말고. 지금 당장 위치 알려줘요.” “그럼 내 카톡 추가 받아줘요.” 순간, 지난번에 그가 카톡 추가하자고 했을 때 단칼에 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엔 그걸 핑계로 삼으려는 거였다. “좋아요. 아이만 찾을 수 있다면 추가할게요. 아이디 알려줘요.” 문도현이 키득 웃었다. “내 번호도 저장해 둬요. 다음번에도 안 받으면 가만 안 있을 겁니다.”“알겠어요.” 심미연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이부터 찾고 그다음에 번호를 삭제할 생각이었다. “삭제하지 말고. 알겠죠?” 대답도 하기 전에 마치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말이 들려왔다. 심미연은 말없이 침묵했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문도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내 생각이 맞았네요? 당신 나 찾고 나면 바로 번호 지울 생각이었죠? 그런 거라면...” 문도현은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며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당신 아들 다시 못 볼 줄 아세요.” 뇌리를 찌르는 듯한
이진영이 멍하니 서 있는 틈을 타 심미연은 마치 질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신하린을 품에 안고 발걸음을 단단히 다잡고 밖으로 내달렸다. 경호원들은 마치 강철로 만든 성벽처럼 일렬로 서서 단단히 사람들로 이루어진 벽을 형성했고 격분한 이진영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이진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마치 분노한 사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심미연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심미연이 경호원들을 여기까지 데려올 정도라면 분명 완벽한 대책을 세운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손을 대면 심미연의 경호원들이 몰려오면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주위의 공기가 마치 얼어붙은 듯 고요해지고 심미연과 경호원들의 무거운 발걸음 소이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이진영의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며 매 걸음이 전례 없는 좌절과 무력감을 안겨 주었다. 한유나는 한쪽에서 심미연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 기울여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복잡하게 변화하며 질투가 독사처럼 마음속을 감쌌고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심미연은 두려움 없이 당당할 수 있는 걸까?’ 반면, 자신은 마치 쫓겨난 개처럼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심미연은 한유나가 지금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오직 신하린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기만을 생각했다. 그래야 신하린이 더 이상 이진영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될 테니까. 대문 앞에 쌓인 폐허를 보고 신하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대문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심미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시켜서 굴삭기로 밀어버렸어.” 그녀는 이곳에 올 때 이진영이 신하린을 안고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문이 폐허처럼 변한 모습을 보고 신하린은 마치 심장이 꽉 쥐어진 듯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감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달았다. 심미연처럼 좋은 친구를 만난
“그 말은... 결국 나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거군요?”심미연이 차갑게 물었다. 신하린은 본능적으로 심미연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죽어서라도 이진영과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진영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하린이를 남겨두면 심미연 씨는 나갈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은 신하린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동자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빨 사이로 겨우 빠져나온 듯한 그의 말은 반박할 여지 없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신하린이 그를 떠난다면 그것은 마치 끊어진 실처럼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 깊은 감정은 결국 무한한 후회와 고통으로 변할 터였다. ‘반드시 붙잡아야 해.’그 집착은 뜨겁게 불타듯 그의 가슴 속을 태웠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심미연은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의 집착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진영 씨가 하린이를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소와 경멸이 섞여 있었다. 그러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이 손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다. “들어와.”순식간에 문 밖에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일제히 들어왔다. 그들의 발걸음은 일사불란하게 맞춰져 있었고 마치 풀려난 맹수처럼 위압적이었다. 방 안은 긴장감이 감돌며 공기 속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팽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진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경호원들을 훑어보며 비웃었다. 그의 입술에는 섬뜩한 냉소가 떠올랐다.마치 겨울의 날카로운 칼날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누가 강지한의 여자가 아니랄까 봐. 다르긴 다르네요. 지한이의 수단을 그대로 배워 오셨군요. 대단하시네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운 톤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겨우 끌어내듯 말했다. 차가운 콧김이 그의 코에서 터져 나오며 그 소리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 방 안을 진동시켰다. 심미
심미연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한유나를 바라봤다. “미연아, 그 여자가 나를 거의 죽일 뻔 했어.” 그때 신하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심미연은 신하린의 목을 살펴보며 아무런 상처도 보지 못한 채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 여자는 내가 죽기를 바랐어.” 신하린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녀가 의식이 없었을 때 한유나가 멈추지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한유나는 내가 절대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심미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신하린을 부드럽게 안아 밖으로 향했다. 신하린은 매우 가벼웠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안고 있자 심미연도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며 심미연은 발걸음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이진영이 다가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하린이는 데려갈 수 없습니다.” 심미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요? 나한테서 뺏으려는 건가요?” 이진영은 신하린을 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린아, 나한테 와. 다시는 한유나가 널 찾지 못할 거야.” 그는 한유나가 어떻게 집에 들어왔고 어떻게 2층으로 올라갔는지에 대해 계속 조사하고 있었다. 집안의 가정부에게 모두 물어봤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만약 내가 하린이를 당신에게 줄 수 없다면요?” 심미연은 신하린을 더 꽉 안으며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이진영은 사람을 강제로 빼앗으려 했다. 어차피 그는 두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더 악역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이진영 씨, 이렇게 계속 나오신다면 저도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심미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하린이는 내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어야 해요.” 이진영은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는 신하린이 그를 떠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미워하든 말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진
“알았어. 하지만 나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사람이 하나 있어.” 심미연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금방 끝낼게.”“응. 기다릴게.” 신하린은 바닥에 앉아 있는 한유나를 보고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그녀에게 반드시 갚아줘야 한다고 결심했다. 심미연은 몸을 곧게 펴고 한유나에게로 걸어갔다. 심미연은 한유나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봐. 뭘 알고 있어?”심태하 실종 사건은 철저히 은폐됐지만 만약 한유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분명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너 잘났잖아. 직접 조사를 해보지 그래?” 한유나는 그 어떤 것도 쉽게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와 심미연은 원한이 깊은 관계였으니까. “말 안 하겠다? 좋아.” 심미연은 차분하지만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한유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쩍였다. “뭘 하려는 거야?” 한유나는 순간 목이 말라오는 듯한 두려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심미연은 화를 내지 않고도 상대를 압도하는 존재였다.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와 그저 담담한 말 한마디에 한유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 말은 무겁고 날카롭게 다가와 온몸에 서늘한 기운을 퍼뜨렸다. “임지혜가 내 아들을 납치한 걸 알고 있지? 그럼 임지혜가 내 아들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알겠네?” 그녀는 아들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기다림은 점점 더 무섭게 그녀를 짓누르며 그녀의 마음속에 서서히 초조함이 스며들었다. 불안과 초조는 점점 더 강해졌고 그녀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평온할 수 없었다. 순간, 한유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한유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심태하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히 그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엿들고 나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심미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도련님, 어서 가서 보세요! 저 사람들 기세가 장난이 아니에요... 너무 무서워요.” 가정부는 방금 본 광경을 떠올리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대문 앞이 아니라 저택 안쪽에 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아니었다면? 지금쯤 무너진 잔해더미 속에 깔려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이진영은 미동도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단숨에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감히 누가 굴삭기를 몰고 들어왔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정말이지,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차가움보다 더 서늘한 것은 이진영 자신의 살기였다. 가정부는 황급히 감정을 추스르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대문 밖. 깊고 어두운 밤을 뚫고 하얀 조명이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야를 조정했다. 그때 멀리 서 있는 한 사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곳에 심미연이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진영의 발걸음이 아주 잠시 멈칫했다. ‘심미연이 왜 여기에 있지?’ “하린이... 왜 이래요?” 이진영이 신하린을 안고 나오는 걸 본 순간, 심미연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창백하게 축 늘어진 신하린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순간, 숨이 턱 막혔다. “기절했어요. 병원에 데려가려던 참이에요.”이진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심미연이 묻기도 전에 먼저 설명하는 걸 보니 그 역시 그녀의 걱정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심미연은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내 차로 옮기세요. 내가 먼저 상태를 확인해 볼게요.” 지금은 감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신하린이 의식을 잃은 이상, 그녀를 살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진영이 한쪽
그때였다. 문이 거세게 부서질 듯 열리며 이진영이 살기를 가득 안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한유나!”낯선 분노에 찬 그의 외침에 한유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순식간에 그의 손에 붙잡힌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죽고 싶냐?”이진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놓았다. 쿵.“아아악!”한유나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찔거렸다.예상치 못한 충격이 다리부터 허리를 타고 올라오며 뼈가 금이라도 간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숨이 멎을 듯한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졌고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한유나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진영의 시선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두려움으로 그녀를 짓눌렀다. “진영 씨... 진짜 너무해요...”그녀는 울먹이며 애처롭게 말했다. “신하린이 먼저 날 욕했단 말이에요... 나도 그냥...”이진영은 차디찬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누가 하린이한테 손대라고 했어?”말끝에 담긴 살기는 얼음송이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발끝이 한유나의 다리 근처를 가볍게 누르자 한유나는 숨이 멎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제발... 발 좀 빼줘요... 뼈가 부러질 것 같다고요.”그녀는 울먹이며 필사적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진영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죽는 게 소원이야?”그는 낮고 무심하게 말하며 눈빛 하나로 그녀의 숨을 죄었다. “그럼 내가... 아주 만족스럽게 보내줄게.”그는 여자를 때리지 않지만 지금 한유나는 선을 넘었다. 교훈을 주지 않으면 이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진영 씨, 정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돼?”한유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을 쏟아냈다. 강했던 자존심도, 매번 애써 웃던 얼굴도 이 순간만큼은 다 무너졌다.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대체 신하린을 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