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진 씨가 날 안은 건 그때 내 옷이 다 찢겨져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야. 박유진 씨는 나를 그저 차에만 태워주고 나는 하린이랑 같이 갔어.”강지한이 믿든 말든 심미연이 한 말들은 전부 사실이었다.하지만 그 말을 다 들은 강지한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그런 기사 난 적 없었어.”역시나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내연녀랑 쌍으로 하루가 멀다 하게 기사에 이름을 올릴 때는 자신에게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으면서 고작 자국 하나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점점 더 실망스러워졌다.“왜 말이 없어? 이젠 거짓말도 못 하겠어?”이미 박유진과 심미연이 부정당한 관계일 거라고 확신한 강지한은 두 눈으로 증거를 확인하기 전에는 심미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눈물이 고인듯한 눈으로 강지한을 올려다보던 심미연은 갑자기 웃음을 흘리더니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그럼 성무진 씨한테 어젯밤 고속도로 CCTV랑 내 입원기록 확인해보라고 연락해. 그럼 거짓인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한마디 한마디 내뱉을수록 심미연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전에는 강지한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그를 이해해보려고 몇 년이나 애를 써왔지만 이제는 그런 생활을 끝낼 때가 된 것 같았다.더 이상 강지한을 보아도 그녀의 심장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하지만 심미연을 보는 강지한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만약 심미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를 사지로 밀어 넣은 게 자신이었기에 강지한은 본인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우리 이혼하자.”하지만 강지한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심미연이 눈을 꼭 감은 채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다시 한번 이혼을 언급했다.같이 있으면 괴롭기만 한 사이니 빨리 끝내는 편이 서로에게 좋은 것 같았다.“전에 할아버지한테 절대 이혼 안 하겠다고 맹세하고 결혼한 거 잊었어? 이제 와서 이혼이 가능할 것 같아?”경성에 있는 수많은 여자들은 다 강지한의 아내가 되지 못해서 안달인데 그런 저를 제 손으로 버리겠다는 심미연의 이혼 제의에 강지한
의미심장한 심미연의 말에 강지한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 네가 한 말 똑바로 기억하라고. 화 풀렸으면 넥타이나 풀어, 나 갈거야.”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담담히 말하는 심미연에 강지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버렸다.혹시라도 듣지 말아야 할 걸 듣게 될까 봐 멀찍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신경은 온통 차에 쏠려있던 성무진은 강지한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에게로 다가갔다.“대표님.”“어젯밤 고속도로 CCTV 확인하고 심미연 이틀 동안 입원한 기록 있는지도 알아봐.”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눈앞에 놓인 증거를 더 믿는 것뿐이었다.갑작스러운 제 상사의 지시가 의아했지만 성무진은 알겠다는 대답만 남기고 바로 해당 부문에 연락을 했다.성무진이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강지한은 심미연의 어깨에 새겨진 자국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한편 손이 묶인 채 차에 혼자 남은 심미연은 차 좌석에 넥타이를 마찰하여 끊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문득 차창 너머로 보이는 강지한의 얼굴에 눈이 가버렸다.꿈에도 나올 정도로 9년이나 사랑한 남자였지만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 나니 이 관계를 끝내는 게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다.그때 빠르게 일 처리를 마친 성무진이 CCTV 영상이 담긴 노트북을 건네자 강지한은 30분이나 되는 영상을 클릭해보았다.그 시간 동안 열심히 넥타이를 풀어낸 심미연은 빨리 옷을 정리하고 강지한 몰래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하지만 당연히 인기척을 느낀 강지한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자 성무진은 빠르게 달려가 붙잡으려 했지만 영상을 다 확인한 강지한이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됐어, 그냥 보내줘.”그에 성무진이 바로 발걸음을 멈추자 그에게 노트북을 건네며 미간을 매만지던 강지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회사로 가.”영상을 다 보고 심미연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강지한이 자신이 했던 행동들과 못된 말들이 떠올라 어떻게 그녀를 봤으면 좋을지 몰랐
“대표님께서 사모님과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중요한 일이라는데 혹시 회사로 와주실 수 있으세요?”성무진의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자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일 때문에 바빠요, 급하면 로펌으로 찾아오라고 대표님께 전해요. 별로 안 급하면 일 다 끝내고 갈게요.”예전 같았으면 성무진의 전화 한 통에 바로 강지한의 회사로 달려갈 정도로 강지한이 최우선이었지만 이혼을 논의하는 사이가 된 지금에 와서는 강지한보다 일이 먼저였다.“알겠습니다.”성무진에게서 심미연의 말을 전해 듣던 강지한은 그녀가 거절했다는 게 의외였다.전에는 쿠키나 밀크티를 사 들고 사무실로 오는 걸 아주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단칼에 거절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강지한은 성무진이 제대로 전달을 못 한 건가 싶었다.“중요한 일이라고 얘기했어?”이래 봬도 일 잘하는 비서인데 말 한마디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오해를 받은 성무진은 억울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에 미간을 짓누르던 강지한이 말했다.“조금 있다가 할아버지가 주신 주식 심미연한테로 양도할 거니까 담당자들 불러와, 오늘 내로 해결해야 해.”심미연이 사무실에 오려 하지 않는 건 팔찌 때문일 텐데 주식을 내어준다면 그녀의 화도 풀릴 것 같아서 강지한은 어느 때보다도 서둘렀다.성무진이 일을 처리하러 나가자 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강지한이 심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침 비서와 일 얘기를 하고 있던 심미연은 핸드폰에 뜬 강지한의 이름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성무진과의 통화에서 자신의 의사는 제대로 전달한 것 같은데 또 전화를 해대는 강지한이 귀찮아서 전화를 받지 않고 있자 궁금했던 비서가 넌지시 물었다.“왜 전화 안 받으세요? 설마 심 변호사님 쫓아다니는 남자예요?”심미연이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빠지는 데가 없어서 로펌 내에서도 인기가 많았기에 혹시나 해서 한 질문이었지만 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런 거 아니야.”“일단 서류 먼저 보고 있어, 이상한 부분은
온지유가 매번 문자를 보내서 하는 얘기는 똑같았다.임신 아니면 강지한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떠들어댔기에 심미연은 그녀를 상대하기도 이젠 귀찮았다.이혼을 안 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건 강지한인데 꼭 자신이 매달리는 것처럼 얘기하는 온지유의 말들도 듣기 불편했다.그런데 생각해보면 온지유에 대한 강지한의 사랑이 그녀가 말한 것처럼 큰 것 같진 않았다.임신을 한 걸 뻔히 알면서도 이혼을 안 한다는데 만약 정말 사랑한다면 자신의 여자가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는 걸 견디지 못할 텐데 강지한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심미연을 답장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전화벨이 울렸고 심미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오늘 내 생일인데 밥이라도 같이 먹자, 센추리 파크 근처에 있는 에빈 레스토랑에서 봐.”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온지유에 헛웃음이 나온 심미연이 대답했다.“밥은 됐고 사람 시켜서 선물이나 보내줄게.”매일 눈에 띄지 못해서 안달인 온지유에게 그토록 원하는 관심을 주기로 한 심미연이었다.“선물은 지한 씨가 이미 줬으니까 괜찮아, 너흰 부부잖아, 하나만 하면 되지.”온지유가 가리키는 선물이라는 게 팔찌를 뜻하는 것이었기에 심미연은 단호하게 말했다.“강씨 집안 팔찌 말하는 거야? 며칠 빌려줬다고 해서 그게 네 물건이 되는 건 아니야, 썼으면 돌려줘야지 주인한테. 안 그러면 나중에 찾으러 갈 거야 내가.”말을 마친 심미연은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온지유가 팔찌를 뺏고 우쭐대면 자신은 그녀를 가차 없이 무시할 수 있는 이 관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이 팔찌는 강씨 집안 안주인 거지, 네 건 아니잖아.”강지한 앞에서 연기 좀 했다고 정말 팔찌를 되돌려받으려 하는 심미연이 어이가 없었던 온지유가 톡 쏘아붙였지만 심미연은 화도 내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다.“그 팔찌는 할아버지가 나한테 주신 거야, 강지한은 내 동의도 없이 너한테 줘버린 거고, 그러니까 넌 내 물건을 훔친 거지.”“그 팔찌는 2억 정도 되거든, 형법 제329조에 의하면 절도죄는
진유영은 원래부터 심미연을 존경하는 그녀의 팬이었다.진유영은 팀장직도 심미연에게는 부족한 자리라고 여기며 수석 파트너 변호사쯤은 되어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이런 얘기는 내 앞에서나 하지 어디 나가서 떠들고 다니지 마, 남들 비웃겠다.”심미연은 미소를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로펌에서 다른 사람들과 사이도 별로 안 좋은데 이런 소문이 떠돌다가 혹시라도 승진을 못 하게 되면 한동안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에 그녀는 주위 사람들 입도 단속시켜야 했다.“당연히 변호사님 앞에서만 얘기하죠, 그런데 저녁에 있는 회식엔 참석하실 거예요?”2년 동안 심미연의 비서로 있으면서 얘기도 많이 하다 보니 둘은 이런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진유영의 질문에 시간을 확인하던 심미연이 답했다.“나 지금 잠깐 나갔다 와야 해서, 회식 잡히면 주소 보내줘, 내가 그리로 갈게.”이노하이브의 주식은 할아버지가 선물해주신 건데 심미연이 안 받는다면 또 온지유에게로 갈 게 뻔해서 심미연은 바로 강지한의 회사로 이동하려 했다.“알겠어요.”그에 진유영도 서류를 정리하며 대답하고는 그녀를 배웅해주었다.“좀 있다 주소 보내드릴게요.”서둘러 로펌을 나선 심미연이 한창 이노하이브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강준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 이름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심미연이 전화를 받자 화를 참는듯한 강준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할아버님.”“미연아, 지금 바로 지한이 회사로 와, 할 얘기 있다.”“네, 바로 갈게요.”강준형이 심미연을 이렇게 급하게 부를 일은 이틀 전에 난 기사뿐이었기에 심미연은 빠르게 회사로 향했다.한편 강지한 사무실 소파에 앉은 강준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난 네가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해서 내 후계자 자리를 맡긴 건데, 봐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나!”“병원에서 청혼한 것도 모자라서 강씨 집안 팔찌를 줘?!”“내가 그거 주면서 꼭 미연이한테 전해주라고 했지, 어떻게 그새 외간여자한테
강준형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에 강지한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진짜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요?”“없어!”심미연에게 준 건 심미연의 것이었기에 강준형의 태도는 아주 단호했다.한쪽에서 숨을 죽이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성무진도 심미연의 팔찌를 온지유에게 선물해준 건 강지한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그저 직장인 일뿐인 성무진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그럼 심미연 오면 물어보고 결정하는 건 어때요?”전에 자신이 도망 다니는 처지일 때 제 손에 돈뭉치를 쥐여주던 온지유가 떠올라 강지한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때 그 돈이 없었다면 강지한은 진작 죽었을 텐데 목숨을 빚진 사람이 원하는 게 고작 팔찌 하나인데 강지한은 그것만큼은 해주고 싶었다.“물어볼 필요도 없어!”염라대왕이라는 소문과 달리 우물쭈물하기만 하는 손자에 강준형은 또 소리를 쳤다.“멀쩡하던 놈이 어쩌다 이렇게 됐어!”“지한 씨, 나왔어!”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해맑은 온지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전에 강지한이 온지유가 오면 그냥 들여보내라고 지시한 탓에 회사 내에서 감히 그녀를 막는 이는 없었다.며칠 전 직원들이 탕비실에서 온지유를 부러워하며 빨리 그녀에게 붙어야겠다는 대화를 나누던 게 떠올라 성무진은 만약 그들이 진짜 사모님이 심미연인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일지 문득 궁금해졌다.갑자기 나타난 온지유에 놀라던 강지한은 이내 얇은 외투 하나만 걸친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 그리고 옷은 왜 또 그렇게 얇게 입고 다녀, 임신한 몸이라 면역력도 예전 같지 않은데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 아프다고 또 울 거야?”자신을 타박하면서도 빠르게 옷걸이에 걸려있던 외투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는 강지한을 온지유는 다정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지한 씨, 나 팔찌 돌려주러 온 거야.”팔찌를 빼서 강지한에게 건네주면서도 온지유는 아쉬운지 손에 힘은 풀지 않고 있었다.그 얼굴을 보자마자 화를 내려던 강준형은 팔
그녀는 굳이 눈앞의 손익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강준형은 콧방귀를 뀌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 모습을 보고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며,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말했다.“팔찌 돌려줬으니 나 먼저 갈게.”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강지한을 바라보는 눈빛도 한없이 다정했다.“내가 데려다줄게.”강지한이 말했다.“됐어. 나 혼자 갈게. 지한 씨는 할아버지랑 더 있어.”온지유의 마음속으로는 사실 강지한이 자신을 데려다주길 바랐다. 하지만 속으로는 저 고약한 노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강지한이 자신을 배웅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만 더 키울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강씨 가문에 남아 앞으로 호강하며 살려면 이 노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지금은 조금 참아도 괜찮아. 나중에 저 고약한 늙은이에게 배로 갚아줄 거야!’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항상 남 생각만 해? 바보 아니야?”“지한 씨, 나...”온지유는 목구멍에 맺힌 말을 겨우 꺼내려 했지만, 강준형이 그녀를 가로막았다.“가고 싶으면 얼른 가! 미연이가 오면 너 보는 게 불편할 거 아니야!”그녀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강준형은 속이 상했다.온지유는 금세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이만 갈게...”강지한은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보며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온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며 안쓰럽게 고개를 저은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걷던 그녀는 문 앞에서 막 들어오던 심미연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심미연은 온지유보다 키가 훨씬 컸고, 온지유의 이마는 그대로 심미연의 가슴에 닿았다.“아, 미안!”온지유가 급히 사과하자, 심미연은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온지유는 심미연의 목소리를 듣고 눈빛에 순간 꿍꿍이가 스쳤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싸며
온지유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강지한을 올려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지한 씨, 이건 미연 씨의 잘못이 아니야. 내가 부딪혀서 넘어졌어. 미연 씨한테 사과받을 필요 없어!”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진심 어린 듯 들렸지만, 그 안에는 교묘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온지유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연기를 하고 싶다면 하게 둬야지. 어차피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상관없어.’강지한은 심미연을 힐끔 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너, 걸을 때 앞 좀 보고 다니면 안 돼?”심미연은 대꾸할 의욕조차 없는 듯 무심하게 받아쳤다.“알았어. 다음엔 조심할게.”‘분명 온지유가 날 들이받았는데, 왜 내가 잘못한 게 되는 거야? 강지한,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이젠 내가 숨 쉬는 것도 죄냐?’한편 강준형은 어두운 표정으로 온지유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온지유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강지한이 심미연을 오해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저 계략이 보통이 아니구나. 미연이가 저런 애를 어찌 이기겠어!’강준형의 시선을 느낀 온지유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아차, 이 고약한 노인을 잊고 있었네. 내가 무슨 속셈인지 눈치챘을지도 몰라. 만약 진실을 들추면 어떡하지?’그녀는 더 이상 연기를 이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글썽이며 심미연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미연아, 내 잘못 때문에 지한이가 널 오해했어. 정말 미안해.”심미연은 고개를 살짝 젓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사과는 받겠는데, 용서는 못 해.”‘대놓고 이렇게 속 보이는 연기를 하다니. 강지한, 네가 정말 눈이 멀었구나.’강지한은 그 말에 화가 나 심미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미연아, 너무 심한 거 아니야?”그러면서 온지유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심미연은 두 사람이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온지유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강지한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강지한은 미간을 꾹 누른 채 시선이 옆에 있는 심미연에게로 향했다.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심미연을 편애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노하이브의 지분도, 강씨 가문의 가보도 툭툭 넘겨주었다.심미연 이 여자는 권모술수도 많고 악랄한데 뭐가 좋다고!“병원에 곧 도착하니까 만나서 얘기해요. 심미연이랑 같이 있어요.”심미연도 함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준형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그래, 기다리마.”전화를 끊으며 강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준형이 갑자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린 게 밝혀지면 그도 수단 가리지 않고 상대할 생각이었다.곧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손목이 아프게 꺾이자 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강지한, 손 놔!”강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놓으면 도망가게?”그러면서도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심미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주치의가 전화해서 특효약에 대해 말해줬어. 당신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도 말한 대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억울하더라도 온지유에게 사과할 거니까.”강지한은 경성에서 손으로 하늘도 가릴 사람이라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하지만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온지유의 일방적인 말을 믿고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차라리 순순히 온지유에게 사과하면 강지후가 좋게 봐줘서 다음 약을 얻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부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마음이 씁쓸했다.강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아버지 앞에서 말 제대로 해.”심미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강지한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의 손에 있는 약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지한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심미연은 단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지한보다 다리가 짧아서 빠르게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지유가 임신한 몸으로 혼자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강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온지유가 그를 구해줬고 이제 그녀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당연히 도와줘야 마땅했다.그런데 심미연이 그가 온지유를 도와준 것에 대해 속 좁게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심미연은 그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나랑 이혼만 하면 그 여자를 도와주든지 그 여자랑 결혼하든지 상관 안 할게.”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 사람을 위해 꺼져주겠다는데 이 바닥에서 그녀처럼 너그러운 사람은 둘도 없으니 강지한은 고마워해야 했다.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심미연...”바로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고 강지한은 말을 삼켰다.심미연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형수님 전화 오셨네, 받아.”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았다.온지유의 전화라면 둘이 관계를 할 때에도 전화를 받곤 했다.대체 온지유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면 그럴까.“나랑 지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강지한은 심미연을 노려보았다.‘이 여자 표정은 뭐지?’“그래,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냥 온지유는 임신만 한 거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잡것을.”그녀도 임신 중이었기에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공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강지한이 거듭해서 선을 넘지 않나.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눈빛이 갑자기 살벌해졌다.“심미연, 한 번만 더 잡것이라고 해. 내가 가만 안 둬.”심미연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당신은 날 가만 둔 적 없어.”온지유에 대해 말만 해도 그는 꼬리가 밟힌 것처럼 발끈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최대한 화를 내지 않고 강지한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임신 중이라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배 속의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지한은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정말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그를
온지유가 사고를 당한 건 그녀가 시킨 일이고,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내려는 것도 그녀가 일러바친 거다?한마디로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다 그녀가 했다는 뜻이다.강지한의 마음은 참 변함없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강지한이 화가 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심미연, 제대로 설명해.”심미연은 화를 억누르며 작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강지한, 내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무슨 설명을 하라는 거야?”온지유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자 강지한은 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정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듯 보였다.성무진은 황급히 차 칸막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그 역시 강지한이 심미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을 설득할 수도, 심미연을 도울 수도 없었다.가끔은 정말 심미연이 안쓰러웠다.강지한은 이미 온지유 일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 대꾸하자 순식간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움켜잡더니 험악하게 말했다.“오늘 온지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죽어.”목이 잡힌 심미연은 숨쉬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계속 상처를 줬어! 나도 인간이야, 강철이 아니라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아프고 괴롭다고! 강지한, 이혼하자는 말 진심이야.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진심이고.”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한때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환상을 가졌다.그러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무리 진심을 다 바쳐도 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과거엔 사랑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려 했는데 이제야 자존심도 버린 사랑은 상대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뚝뚝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는
심미연은 그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왜요?”예전에는 강지한을 사랑해서 24시간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던 그녀였지만 조금 전 강지한의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그의 곁에 있겠나.최대한 멀어지는 게 좋았다.성무진은 그녀의 질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이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하나.“그쪽 대표님은 안 바쁘대요? 왜 차에 안 타요? 아니면, 우리가 먼저 갈까요?”심미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할머니에게 일주일 치 약이 있으니 일주일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기꺼이 온지유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그녀를 해친 것에 대해서 나중에 진실을 밝히고 되돌려주면 그만이다.아무리 늦어도 복수를 하기만 하면 되니까.성무진은 두려움에 차 밖을 내다봤다.다행히 강지한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심미연이 또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당연히 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비서에게 그를 놔두고 가자고 하다니, 참 대단한 여자다.허리를 굽혀 차에 앉으려던 그는 심미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뒤에 앉아, 물어볼 게 있어!”심미연은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사과하라고 했는데 대체 왜 화를 내는 건지.’“심미연, 다시 한번 말할게. 뒤에 와서 앉아.”강지한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필사적으로 마음속에 치미는 분노를 삭였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 다 들리니까!”그녀는 이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성 비서, 전화해서 약 다시 가져오라고 해.”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싸늘했다.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강지한은 정말 나쁜 놈이다!성무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뒤에 앉으시죠.” 한순간 홧김에 힘들게 얻은 약을 잃을 수는 없었다.심미연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강지한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심미연은?”성무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여자 화장실에 사람 시켜서 찾아봤는데 아무도 없어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한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다.“전화해서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안 그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성무진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심미연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도대체 사모님이 무슨 짓을 했길래 대표님이 저렇게 화가 난 걸까.강지한은 극도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빨리 전화해!”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그 시각 심미연은 회사 밑 정원에서 통화 중이었다.할머니의 주치의는 누군가 특효약을 일주일 치 보내왔다며 방금 할머니에게 투여해서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전했다.의사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이따가 할머니 뵈러 갈게요,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저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약을 전해준 분께 감사해야죠!” 의사가 겸손하게 말하자 심미연은 의사가 말하는 ‘약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았다.하지만 의사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한참을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심미연은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성무진의 연락이 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성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사실 성무진이 왜 전화를 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사모님, 길 잃으셨나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성무진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직접 묻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나 아래층 정원에 있으니까 오세요.”마음속으로는 강지한이 미웠지만 강지한의 뜻을 거스르는 순간 할머니가 쓰던 특효약은 순식간에 모두 회수될 것이기에 할머니가 더 이상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강지한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성무진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심미연의 말을 강지한에게 전달했다.강지한은 얼굴을 찡그
“미연 씨,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무슨 짓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온지유의 진지한 말투에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요, 그러면 지금 강지한 사무실로 와요. 셋이 함께 얘기하죠.”단지 수작을 부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던 거다. 아니면 온지유가 지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오를 수나 있었겠나.“지한 씨한테 갔다고요? 왜 지한 씨를 찾아갔어요?”온지유가 한층 언성을 높이며 다급하게 말했다.“당연히 내 남편과 부부 사이 친밀한 일을 하려는 거죠.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온지유가 전화를 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절대 사적으로 그녀와 만나지 않을 거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세수하고 손을 닦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사무실 문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육체적 욕구 해결하려고 자는 거예요. 밖에서 만난 여자들보다 깨끗하니까. 그 여자가 이혼을 원하면 어떡하냐고요? 허, 절대 안 되죠. 3년 동안 내가 심전그룹에 얼마나 투자했고 그 여자한테 얼마를 썼는데 이혼하면 내 돈도, 청춘도 다 버리는 거잖아요. 게다가 난 아직 질리지 않았어요. 충분히 갖고 놀다가 질리면 회사 법무팀 통해 소송해서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낼 거예요.”여기까지 들은 심미연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황급히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고 그 남자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알고 보니...강지한은 단지 육체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다.그녀가 밖에 있는 여자들보다 깨끗해서!그리고 아직 충분히 갖고 놀지 못해서 이혼하지 않는 것이고 지겨워지면 그때 소송해서 빈털터리로 쫓아낼 생각이었다.영리한 사업가인 강지한은 그녀를 내쫓기 전에 마지막 남은 가치까지 쥐어짜 내려 했다.그런 남자를 9년이나 사랑했다니.참 우스웠다.그 시각 사무실에서 강지한은
어쨌든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든 증거가 심미연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배후는 그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소하면 심미연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이제 온지유에게 사과만 하면 될 일인데 뭐가 문제일까.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분명하게 말했다.“강지한, 나한테 계속 이렇게 상처를 주면 언젠가 내가 당신한테 너무 상처받아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떠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떠났어야지! 3년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강지한의 말이 맞다.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그에게 계속해서 상처받으면서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곁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전에는 그것이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강지한의 눈에 그녀의 사랑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내가 말 바꿀까 봐 걱정되면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약 보내줄게. 할머니가 약 받고 사과하러 가도 돼.”강지한은 이미 자신이 많이 양보했으니 심미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그녀가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지금 전화해. 난 약을 먼저 받아야겠어.”강지한이 이렇게 말하니 심미연은 아무리 억울해도 삭힐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몸이 더 중요했기에 할머니가 고통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건 불효였다!강지한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고 심미연은 전화를 거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남몰래 결심했다.통화를 마친 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약 곧 올 테니까 앉아서 기다려.”심미연은 그가 뻗은 손을 피해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할머니 주치의한테 특효약에 대해 말하고 올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온지유에게 사과하는 건데, 무릎 꿇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강지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그래.”“그러면 미연 씨가 사과를 하면 내가 직접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취하하는 게 어떨까요, 지한 씨?”달래는 듯한 말투였다.“지한 씨...”머뭇거리는 온지유가 난감한 듯 보였다.“할 말 있어?” 강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심미연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셔츠가 젖어 가슴에 꽉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절제되고 섹시했다.심미연은 수년 전 강지한을 처음 봤을 때 믿기지 않는 그의 얼굴에 반해 바로 넘어갔던 걸 떠올렸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자신이 참 한심했다.온지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미연 씨가 내 번호를 차단해서 연락이 안 돼요.”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데려갈게.”“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요?”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잘못했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지. 됐어,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몸조리나 잘해.”“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 너무 강요하지 마요.”“내가 이따가 데려갈게”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뜻대로 흘러가자 순순히 강지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의 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마음속으로 막연한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온지유가 무슨 말을 했을까.“심미연, 지금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강지한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심미연을 향해 걸어가며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온지유가 또 무슨 짓을!강지한이 말했다.“네가 사람을 시켜서 지유를 차로 쳤잖아. 다행히 지유는 다른 데는 괜찮은데 손만 부러졌고 뱃속 아기도 멀쩡해.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지유에게 사과하면 지유가 바로 고소 취하할 거야.”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경악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일인데 내가 그런 거라고 모함하고 나한테 사과까지 하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허술한 연기에 속아?”이노하이브를 인수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노하이브를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심미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담긴 물을 강지한의 얼굴에 뿌렸다.“당신이랑 그래도 3년 동안 부부로서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잤으니까 여기 오기 전에는 내가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도 당신이 내 결백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네. 이번 일 사실대로 밝히고 싶으면 뒤에서 수작 부리지 마. 내가 꼭 진실을 밝혀줄 테니까.”지금 강지한을 찾으러 여기 올 게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가서 온지유를 한바탕 두들겨 팼어야 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는 검은 눈동자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비웃었다.“그렇게 자신 있는데 왜 나한테 와서 큰소리야?”이 여자가 무슨 배짱으로 그에게 물을 뿌리는 걸까.그와 시선을 마주한 심미연은 진작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이번에야말로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이 일이 밝혀지면 그와 온지유의 소원대로 반드시 강지한과 이혼할 거다.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며 정적을 깨뜨렸고 강지한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심미연은 화면에 뜬 온지유 이름에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심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오붓하게 통화해.’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심미연!”심미연의 발걸음이 살짝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사람 시켜서 교통사고에 대해 조사할 거야.”그가 당황했다.심미연에게 뭘 해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녀가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는 것은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인데 그녀의 감정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까.하지만 이번엔 심미연의 감정이 조금 신경 쓰였다.“전화 받고 얘기해.”3년 동안 심미연은 한가지 규칙을 발견했다. 강지한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풀릴 기세가 보이면 온지유는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둥, 몸이 안 좋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댔고 강지한은 매번 철석같이 믿으며 심미연을 혼자 버려둔 채 온지유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