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제목을 본 심미연은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강씨 집안 가보로 내려오는 팔찌는 할아버님이 심미연의 생일선물로 준다고 약속한 것인데 그것을 온지유에게 줘버렸다는 기사 제목에 심미연은 심호흡을 하며 기사를 클릭했다.기사는 30분 전에 올라온 것인데 아마도 온지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던 강지한의 짓인 것 같았다.기사 속의 강지한은 온지유에게 직접 팔찌를 채워주고 있었는데 온지유는 신난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핸드폰을 손에 꽉 쥔 심미연은 아래에 쓰인 내용은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았다.강준형이 자신에게 선물한 팔찌를 온지유에게 건네준 강지한에 심미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핸드폰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누군가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왔다.사진은 팔찌를 끼고 있는 팔이었고 그 아래의 문자는 팔찌가 잘 어울리냐는 내용이었다.온지유가 보낸 문자임을 알아챈 심미연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감정에 그녀의 도발에 아무런 화도 나지 않았다.심미연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고속도로에 그녀를 버리고 가던 것, 그리고 살려달라고 건 전화도 단번에 끊어버린 것, 하루 사이에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을 떠올리던 심미연은 자연스레 지난 3년의 결혼생활을 떠올렸다.생각해보니 밥 먹고 샤워하고 잠자리를 가지는 게 전부였던 것 같다.밸런타인데이, 1주년, 2주년, 생일 등 그 외의 많은 기념일 들을 강지한은 한 번도 챙겨준 적이 없었다.그때는 강지한이 바빠서 그런 걸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자신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불이 다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심미연은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추워지고 머리까지 아파오자 누구의 번호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전화를 걸어버렸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이 시간에 지한 씨는 왜 찾는 거야?”마치 자신이 본처라도 된 양 새침하게 묻는 온지유의 목소리를 들으니 구역질이 올라온 심미연이 차갑게 물었다.“남편이 밤늦게 안
그에 깜짝 놀란 신하린이 다급하게 구급차를 불렀고 심미연은 빠르게 수술실로 실려 들어갔다.그녀가 혹시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 심미연은 수술을 하는 내내 앉지도 못하고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한편 이노하이브 계열사 중 하나인 인하병원 VIP 병실에서는 강지한이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온지유를 나무라고 있었다.“임산부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심미연이랑 싸우는 게 말이 돼? 이젠 안 무서운 거야?”강지한의 말에 온지유는 서러운 듯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심미연이 아까 전화오니까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지한 씨 찾는 줄 알고 받은 거야. 그런데 전화 받자마자 내가 강씨 집안 팔찌랑 남편을 뺏었다고 날 욕하잖아. 그래서 뭐라고 몇 마디 했는데 이거 다 인터넷에 올려서 나 다시는 춤 못 추게 하겠대.”“미안해 지한 씨,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지한 씨 전화 함부로 안 받을게.”“지금 잘 테니까 화내지 마.”말을 마친 온지유가 이불을 덮어쓰며 눕자 이불 끝을 살짝 들추어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보던 강지한은 마음이 아픈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힘들게 얻은 네 아이잖아. 잘못되면 네가 제일 힘들 거야, 그러니까 몸 좀 챙겨. 심미연 쪽은 내가 잘 얘기해볼게. 다시는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게 잘 해결할게.”“그리고 오늘 기사 같은 일도 다신 없었으면 좋겠어.마지막 말에 유독 힘을 주는 강지한에 온지유는 자연스레 그의 눈을 올려다봤다.담담한 눈빛이었지만 그 눈빛에 제 마음속 깊은 곳마저 들여다보는 것 같아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지한 씨, 사실 그 기사로 전에 났던 내 기사 덮으려던 건데 혹시 지한 씨 신경 쓰이면 지금이라도 정정기사 낼게. 다 그냥 짜고 친 거고 팔찌도 가짜라고. 다들 재미로만 봐달라고 얘기할까?”“얼른 자, 그건 성무진 시켜서 처리하면 돼.”사실 온지유는 지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강지한 앞이라 두 손으로 이불을 꽉 잡으며 불쌍한 척 연기를 이어나갔다.
“얼른 잠이나 자, 심미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텐데 뭐하러 너까지 신경 써.”이불을 잘 덮어준 강지한이 소파로 걸어가며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나도 소파에서 눈 좀 붙일게.”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강지한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온지유는 할 수 없이 잠을 청하기로 했다.“그럼 지한 씨도 얼른 자.”온지유가 눈을 감자 한쪽에 서 있던 강지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병실을 나갔고 그의 인기척이 사라지마 마자 눈을 뜬 온지유는 반드시 심미연에게서 강지한을 뺏어오겠다고 다짐했다.한편 문밖에 선 강지한은 성무진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한참 만에 눈을 뜬 심미연은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자신이 또다시 병원에 왔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미간을 찌푸렸다.“미연아, 일어났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자신을 주려고 사 온 건지 손에 죽을 들고 있는 신하린을 보며 물었다.“나 왜 여기 있는 거야?”심미연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온지유가 한 말 몇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이마에 난 상처가 비 때문에 염증이 생겼대, 그리고 감기까지 걸려서 아까 쓰러졌었어.”말을 하며 침대 쪽으로 걸어온 신하린은 밥상을 올려놓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그래서 바로 구급차 부르고 병원 왔지, 별일 없어서 다행이지 너 잘못됐으면 나 진짜 칼 들고 강지한 찾아갈 뻔했어.”얼굴이 빨개진 채 열 분을 토하는 신하린은 정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심미연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미안해,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놈 이름을 언급해버렸네.”하지만 심미연이 아무 말이 없자 신하린은 그녀가 놀란 줄 알고 바로 심미연의 눈을 보며 사과했다.그래도 신하린의 화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강지한이 차도 없는 고속도로에 심미연을 버려두고 간 일이 자꾸만 떠올라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전에 온지유한테 따지다가 하마터면 심미연을 경찰서에 보낼뻔해서 참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강지한을 반 죽여놨을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제 누군가 핸드폰을 들고 신하린 집에 오긴 한 것 같아 심미연은 빠르게 전화를 받아보았다.“양경자 씨 보호자분, 빨리 병원으로 와주세요. 지금 수술 들어가야 되는데 보호자분 동의가 필요합니다.”단호하면서도 냉정한 간호사의 말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심미연은 서둘러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양경자는 심미연의 외할머니였는데 어릴 때 외할머니 집에서 잠깐 살았을 때 심미연을 아주 잘 챙겨주신 분이었다.요즘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각종 수액과 약들을 복용하면서 병원에 계셨는데 며칠 전만 해도 많이 좋아지셔서 퇴원도 기대할 정도였던 상태가 갑자기 수술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심미연은 빠르게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그런데 신하린이 그런 심미연을 붙잡으며 말했다.“의사가 너 며칠 동안 입원하면서 상태 지켜봐야 된다고 했어. 너 지금 아무 데도 못 가.”그 말에 심미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신하린을 바라보았다.“할머니가 수술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대.”그런 심미연의 모습에 할 말이 없어진 신하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심이라도 해. 좀만 기다려, 나랑 같이 가자.”열은 내렸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심미연도 신하린과 동행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었다.“알겠어, 기다릴게.”신하린은 빠르게 정리를 마치고 심미연과 함께 이노하이브 산하의 인하병원으로 향했다.할머니가 수술실로 들어간 뒤 심미연은 안절부절못하고 그 앞을 서성였는데 1분 1초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타들어 가고 있었다.어제 똑같은 상황을 겪어봤기에 지금 심미연이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는 신하린이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할머니 괜찮으실 거야.”몇 년 동안 아프신 할머니를 봐오면서 할머니가 자신의 곁을 영영 떠날까 봐 두려워했던 심미연이 신하린을 붙잡으며 말했다.“하린아, 나 너무 무서워...”“괜찮아, 할머니 꼭 깨어나실 거니까
그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심미연이 주저앉으려 하자 신하린은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어떻게 할 거야 미연아?”별다른 수가 없게 된 심미연은 웃으며 의사를 향해 말했다.“선생님, 약은 제가 어떻게든 구해볼게요. 지금은 할머니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이만 가볼게요.”의사는 신하린을 끌고 가는 심미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돈을 아무리 써도 그냥 목숨만 부지하는 것뿐인데 뭐하러 그런 무모한 짓을 계속하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하지만 의사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심미연이 지키려는 건 할머니 한 분이 아니라 한 가정이라는 것이다.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신의 유일한 집을 잃어버리는 것이기에 홀로 남은 심미연은 더 불쌍해질 것이다.한편 병실로 돌아온 심미연은 온몸에 크고 작은 관들을 연결한 채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할머니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신하린은 그런 심미연이 안쓰러워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미연아, 할머니랑 얘기 나눠, 나 밖에 있을게.”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심미연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할머니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할머니, 꼭 살아계셔야 해요, 나 혼자 두고 가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눈가가 점점 빨개지고 있을 때 간호사가 다른 수액을 들고 나타났고 평소 할머니를 돌봐주시는 간병인 아줌마도 물을 받아서 들어왔다.“미연 씨.”“아주머니, 고생이 많으세요.”심미연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들고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말했다.“제가 바빠서 할머니 뵈러도 자주 못 오니까 할머니 잘 좀 봐달라고 드리는 거예요.”이렇게 통 크고 말도 잘 통하는 고용주는 처음이라 간병인 아줌마도 감동했는지 돈 봉투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미연 씨, 이건 그냥 넣어둬요. 나한테 주는 월급도 이미 충분히 많아요.”하지만 심미연은 굳이 그 돈을 다시 김지영에게 쥐여주며 말했다.“돈은 받아두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하니까 할머니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주세요.”침대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니
온지유와 강지한에 대한 얘기만 듣지 않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는데 공교롭게도 온지유와 마주치게 되었다.“너도 나보러 온 거야?”그에 당황한 심미연이 가만히 서 있는데 온지유는 마치 친한 친구를 만난 사람마냥 심미연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물었다.“의뢰인이 병원에 있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온 거야.”무의식적으로 할머니의 병세를 숨기고 싶었던 건지 심미연은 자연스레 거짓말을 하며 손을 빼내었다.“나 보러 온 게 아니라도 괜찮아, 마침 할 말도 많았는데 앉아서 얘기라도 하자.”온지유는 심미연의 굳은 표정을 못 본 척 계속해서 팔짱을 껴오며 웃어 보였다.그에 어이가 없어진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강지한이 너랑 자고 팔찌도 너한테 줬다 해도 나랑 강지한이 이혼하지 않은 이상 너는 염치없는 내연녀일 뿐이야, 그런 너랑 내가 과연 무슨 할 말이 있을까?”이 나이 먹도록 내연녀가 본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건 처음 보는 심미연이었다.뭐 둘이 진짜 사랑하는 걸 부러워하기라도 해야 하는지 심미연은 이 상황이 어이없기만 했다.한편 소란스러운 그 둘을 보며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둘 온지유를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낭만적인 프러포즈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연녀랑 쓰레기였어? 어떻게 사람이 저래?”“남편을 뺏은 것도 모자라서 팔찌까지, 진짜 하나둘 뺏다 보니까 맛이라도 들린 거야 뭐야.”“전에 기사 난 거 있잖아. 대상도 스폰 써서 받은 거고 스폰서 아이까지 임신했다던데 그게 다 사실이었나 봐.”“진짜 양심이라는 게 없나?”그 말들을 다 들은 온지유는 낯빛이 창백해져 갔다.강지한의 아이를 가졌다고 심미연 앞에서는 당당한 척해도 다른 사람들 눈에 나쁜 년은 온지유였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개를 들지 못하는 온지유를 보면서도 통쾌한 감정이 들지 않는 심미연은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강지한 아이 임신한 거 알아. 둘이 같이 살
강지한을 보자마자 또 좋은 수가 떠오른 온지유는 바로 그의 품 안으로 달려가 울먹이며 말했다.“지한 씨, 미안해. 내가 지한 씨한테 팔찌 달라고만 안 했어도 미연이가 화내는 일은 없었을 텐데.”“의사가 심신안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잖아, 울지 마.”강지한은 언짢은 듯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다정함이 기본으로 묻어나 있었다.그래서 그 말만 들어도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지한 씨, 팔찌는 이만 돌려줘. 나는 이런 거 낄 자격이 없어.”온지유는 강지한의 손을 잡으며 억울하고 서러운 표정으로 팔찌를 그 위에 올려두었다.온지유도 손주며느리인데 자신에게는 선물은커녕 용돈도 주지 않던 강준형이 심미연에게는 이노하이브 주식과 함께 강씨 집안 가보인 팔찌까지 주니 온지유는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걸 심미연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받아냈으니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그렇게 갖고 싶었던 팔찌라 해도 강지한 앞에서는 안 그런 척 연기를 해야만 했다.“내가 너한테 선물한 건 네 거야, 누가 선물을 다시 돌려줘.”그 수법이 통한 건지 강지한이 온지유 손에 팔찌를 다시 넣어주며 나지막하게 말하자 온지유는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심미연을 바라보았다.강지한이 이렇게 말한 이상 심미연은 절대 팔찌를 얻지 못할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그때 심미연은 핸드폰을 들고 그 둘을 빠르게 찍어대며 말했다.“다음에 둘이 잘 때 나 꼭 불러줘, 좋은 카메라 들고 가서 고화질로 찍어줄게. 그럼 이혼소송할 때 재판장님이 나 불쌍해서 재산 분할 좀 더 해줄 수도 있잖아.”심미연은 정말로 기쁜 사람마냥 환하게 웃으며 미어지는 마음을 아무도 볼 수 없게 꽁꽁 숨겼다.자신이 보는 앞에서 팔찌를 온지유에게 전해주며 저런 말을 내뱉는 걸 보니 강지한도 자신을 아내로 보진 않는 것 같아 더 이상 그와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나랑 지한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오해하지마!”이때 항상 강지한과 엮이고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의 말을 듣고 있던 온지유는 강지한이 그럴 리 없다고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는데 그때 심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괜찮은데 나중에 온지유 씨 배 불러오면 그때 가서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까 봐 그래, 그런 모습은 당신도 보고 싶지 않잖아.”심미연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처럼 아량이 넓은 본처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강지한이 그녀의 팔목을 잡더니 그대로 끌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문이 닫히자마자 큰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잡으며 입을 맞추려 하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는데 강지한의 입술이 그대로 손에 닿아오자 손은 금세 뜨거워졌다.강지한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심미연의 손을 치우고 입술을 맞춰왔다.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가는 강지한과 그 사이사이로 풍겨오는 옅은 담배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져 버린 심미연은 그대로 강지한에게 입술을 내어줬는데 1층에 도착해서 문이 열릴 때가 돼서야 소란스러움에 현실을 자각하고 힘을 주어 강지한의 가슴팍을 때렸다.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본 강지한은 심미연의 얼굴을 잡아 제 품 안으로 넣으며 말했다.“움직이지 마, 내가 안아서 나갈 거니까 네 얼굴은 안 보일 거야.”그 말에 심미연이 정말로 가만히 있자 강지한은 그녀를 안아 들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밖에 서 있던 성무진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내 품 안에 있는 여자가 심미연임을 알아챘다.강지한이 안은 여자는 심미연과 온지유 둘뿐이었는데 온지유를 안을 때는 늘 그녀에게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절대 고개를 자신의 가슴에 묻지 못하게 했는데 지금 안겨있는 여자의 자세를 보니 그건 틀림없이 심미연이었다.성무진이 강지한이 올라간 게 심미연을 찾기 위해서였나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장본인은 이미 그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문 열어.”성무진이 차 문을 열자마자 심미연을 뒷좌석에 앉히고 문을 잠근 강지한은 바로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강지한의 얼
강지한은 미간을 꾹 누른 채 시선이 옆에 있는 심미연에게로 향했다.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심미연을 편애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노하이브의 지분도, 강씨 가문의 가보도 툭툭 넘겨주었다.심미연 이 여자는 권모술수도 많고 악랄한데 뭐가 좋다고!“병원에 곧 도착하니까 만나서 얘기해요. 심미연이랑 같이 있어요.”심미연도 함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준형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그래, 기다리마.”전화를 끊으며 강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준형이 갑자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린 게 밝혀지면 그도 수단 가리지 않고 상대할 생각이었다.곧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손목이 아프게 꺾이자 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강지한, 손 놔!”강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놓으면 도망가게?”그러면서도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심미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주치의가 전화해서 특효약에 대해 말해줬어. 당신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도 말한 대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억울하더라도 온지유에게 사과할 거니까.”강지한은 경성에서 손으로 하늘도 가릴 사람이라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하지만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온지유의 일방적인 말을 믿고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차라리 순순히 온지유에게 사과하면 강지후가 좋게 봐줘서 다음 약을 얻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부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마음이 씁쓸했다.강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아버지 앞에서 말 제대로 해.”심미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강지한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의 손에 있는 약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지한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심미연은 단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지한보다 다리가 짧아서 빠르게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지유가 임신한 몸으로 혼자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강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온지유가 그를 구해줬고 이제 그녀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당연히 도와줘야 마땅했다.그런데 심미연이 그가 온지유를 도와준 것에 대해 속 좁게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심미연은 그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나랑 이혼만 하면 그 여자를 도와주든지 그 여자랑 결혼하든지 상관 안 할게.”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 사람을 위해 꺼져주겠다는데 이 바닥에서 그녀처럼 너그러운 사람은 둘도 없으니 강지한은 고마워해야 했다.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심미연...”바로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고 강지한은 말을 삼켰다.심미연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형수님 전화 오셨네, 받아.”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았다.온지유의 전화라면 둘이 관계를 할 때에도 전화를 받곤 했다.대체 온지유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면 그럴까.“나랑 지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강지한은 심미연을 노려보았다.‘이 여자 표정은 뭐지?’“그래,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냥 온지유는 임신만 한 거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잡것을.”그녀도 임신 중이었기에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공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강지한이 거듭해서 선을 넘지 않나.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눈빛이 갑자기 살벌해졌다.“심미연, 한 번만 더 잡것이라고 해. 내가 가만 안 둬.”심미연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당신은 날 가만 둔 적 없어.”온지유에 대해 말만 해도 그는 꼬리가 밟힌 것처럼 발끈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최대한 화를 내지 않고 강지한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임신 중이라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배 속의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지한은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정말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그를
온지유가 사고를 당한 건 그녀가 시킨 일이고,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내려는 것도 그녀가 일러바친 거다?한마디로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다 그녀가 했다는 뜻이다.강지한의 마음은 참 변함없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강지한이 화가 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심미연, 제대로 설명해.”심미연은 화를 억누르며 작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강지한, 내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무슨 설명을 하라는 거야?”온지유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자 강지한은 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정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듯 보였다.성무진은 황급히 차 칸막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그 역시 강지한이 심미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을 설득할 수도, 심미연을 도울 수도 없었다.가끔은 정말 심미연이 안쓰러웠다.강지한은 이미 온지유 일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 대꾸하자 순식간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움켜잡더니 험악하게 말했다.“오늘 온지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죽어.”목이 잡힌 심미연은 숨쉬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계속 상처를 줬어! 나도 인간이야, 강철이 아니라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아프고 괴롭다고! 강지한, 이혼하자는 말 진심이야.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진심이고.”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한때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환상을 가졌다.그러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무리 진심을 다 바쳐도 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과거엔 사랑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려 했는데 이제야 자존심도 버린 사랑은 상대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뚝뚝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는
심미연은 그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왜요?”예전에는 강지한을 사랑해서 24시간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던 그녀였지만 조금 전 강지한의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그의 곁에 있겠나.최대한 멀어지는 게 좋았다.성무진은 그녀의 질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이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하나.“그쪽 대표님은 안 바쁘대요? 왜 차에 안 타요? 아니면, 우리가 먼저 갈까요?”심미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할머니에게 일주일 치 약이 있으니 일주일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기꺼이 온지유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그녀를 해친 것에 대해서 나중에 진실을 밝히고 되돌려주면 그만이다.아무리 늦어도 복수를 하기만 하면 되니까.성무진은 두려움에 차 밖을 내다봤다.다행히 강지한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심미연이 또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당연히 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비서에게 그를 놔두고 가자고 하다니, 참 대단한 여자다.허리를 굽혀 차에 앉으려던 그는 심미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뒤에 앉아, 물어볼 게 있어!”심미연은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사과하라고 했는데 대체 왜 화를 내는 건지.’“심미연, 다시 한번 말할게. 뒤에 와서 앉아.”강지한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필사적으로 마음속에 치미는 분노를 삭였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 다 들리니까!”그녀는 이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성 비서, 전화해서 약 다시 가져오라고 해.”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싸늘했다.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강지한은 정말 나쁜 놈이다!성무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뒤에 앉으시죠.” 한순간 홧김에 힘들게 얻은 약을 잃을 수는 없었다.심미연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강지한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심미연은?”성무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여자 화장실에 사람 시켜서 찾아봤는데 아무도 없어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한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다.“전화해서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안 그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성무진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심미연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도대체 사모님이 무슨 짓을 했길래 대표님이 저렇게 화가 난 걸까.강지한은 극도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빨리 전화해!”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그 시각 심미연은 회사 밑 정원에서 통화 중이었다.할머니의 주치의는 누군가 특효약을 일주일 치 보내왔다며 방금 할머니에게 투여해서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전했다.의사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이따가 할머니 뵈러 갈게요,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저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약을 전해준 분께 감사해야죠!” 의사가 겸손하게 말하자 심미연은 의사가 말하는 ‘약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았다.하지만 의사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한참을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심미연은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성무진의 연락이 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성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사실 성무진이 왜 전화를 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사모님, 길 잃으셨나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성무진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직접 묻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나 아래층 정원에 있으니까 오세요.”마음속으로는 강지한이 미웠지만 강지한의 뜻을 거스르는 순간 할머니가 쓰던 특효약은 순식간에 모두 회수될 것이기에 할머니가 더 이상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강지한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성무진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심미연의 말을 강지한에게 전달했다.강지한은 얼굴을 찡그
“미연 씨,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무슨 짓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온지유의 진지한 말투에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요, 그러면 지금 강지한 사무실로 와요. 셋이 함께 얘기하죠.”단지 수작을 부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던 거다. 아니면 온지유가 지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오를 수나 있었겠나.“지한 씨한테 갔다고요? 왜 지한 씨를 찾아갔어요?”온지유가 한층 언성을 높이며 다급하게 말했다.“당연히 내 남편과 부부 사이 친밀한 일을 하려는 거죠.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온지유가 전화를 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절대 사적으로 그녀와 만나지 않을 거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세수하고 손을 닦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사무실 문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육체적 욕구 해결하려고 자는 거예요. 밖에서 만난 여자들보다 깨끗하니까. 그 여자가 이혼을 원하면 어떡하냐고요? 허, 절대 안 되죠. 3년 동안 내가 심전그룹에 얼마나 투자했고 그 여자한테 얼마를 썼는데 이혼하면 내 돈도, 청춘도 다 버리는 거잖아요. 게다가 난 아직 질리지 않았어요. 충분히 갖고 놀다가 질리면 회사 법무팀 통해 소송해서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낼 거예요.”여기까지 들은 심미연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황급히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고 그 남자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알고 보니...강지한은 단지 육체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다.그녀가 밖에 있는 여자들보다 깨끗해서!그리고 아직 충분히 갖고 놀지 못해서 이혼하지 않는 것이고 지겨워지면 그때 소송해서 빈털터리로 쫓아낼 생각이었다.영리한 사업가인 강지한은 그녀를 내쫓기 전에 마지막 남은 가치까지 쥐어짜 내려 했다.그런 남자를 9년이나 사랑했다니.참 우스웠다.그 시각 사무실에서 강지한은
어쨌든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든 증거가 심미연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배후는 그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소하면 심미연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이제 온지유에게 사과만 하면 될 일인데 뭐가 문제일까.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분명하게 말했다.“강지한, 나한테 계속 이렇게 상처를 주면 언젠가 내가 당신한테 너무 상처받아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떠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떠났어야지! 3년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강지한의 말이 맞다.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그에게 계속해서 상처받으면서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곁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전에는 그것이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강지한의 눈에 그녀의 사랑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내가 말 바꿀까 봐 걱정되면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약 보내줄게. 할머니가 약 받고 사과하러 가도 돼.”강지한은 이미 자신이 많이 양보했으니 심미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그녀가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지금 전화해. 난 약을 먼저 받아야겠어.”강지한이 이렇게 말하니 심미연은 아무리 억울해도 삭힐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몸이 더 중요했기에 할머니가 고통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건 불효였다!강지한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고 심미연은 전화를 거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남몰래 결심했다.통화를 마친 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약 곧 올 테니까 앉아서 기다려.”심미연은 그가 뻗은 손을 피해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할머니 주치의한테 특효약에 대해 말하고 올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온지유에게 사과하는 건데, 무릎 꿇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강지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그래.”“그러면 미연 씨가 사과를 하면 내가 직접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취하하는 게 어떨까요, 지한 씨?”달래는 듯한 말투였다.“지한 씨...”머뭇거리는 온지유가 난감한 듯 보였다.“할 말 있어?” 강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심미연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셔츠가 젖어 가슴에 꽉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절제되고 섹시했다.심미연은 수년 전 강지한을 처음 봤을 때 믿기지 않는 그의 얼굴에 반해 바로 넘어갔던 걸 떠올렸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자신이 참 한심했다.온지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미연 씨가 내 번호를 차단해서 연락이 안 돼요.”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데려갈게.”“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요?”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잘못했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지. 됐어,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몸조리나 잘해.”“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 너무 강요하지 마요.”“내가 이따가 데려갈게”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뜻대로 흘러가자 순순히 강지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의 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마음속으로 막연한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온지유가 무슨 말을 했을까.“심미연, 지금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강지한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심미연을 향해 걸어가며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온지유가 또 무슨 짓을!강지한이 말했다.“네가 사람을 시켜서 지유를 차로 쳤잖아. 다행히 지유는 다른 데는 괜찮은데 손만 부러졌고 뱃속 아기도 멀쩡해.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지유에게 사과하면 지유가 바로 고소 취하할 거야.”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경악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일인데 내가 그런 거라고 모함하고 나한테 사과까지 하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허술한 연기에 속아?”이노하이브를 인수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노하이브를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심미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담긴 물을 강지한의 얼굴에 뿌렸다.“당신이랑 그래도 3년 동안 부부로서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잤으니까 여기 오기 전에는 내가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도 당신이 내 결백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네. 이번 일 사실대로 밝히고 싶으면 뒤에서 수작 부리지 마. 내가 꼭 진실을 밝혀줄 테니까.”지금 강지한을 찾으러 여기 올 게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가서 온지유를 한바탕 두들겨 팼어야 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는 검은 눈동자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비웃었다.“그렇게 자신 있는데 왜 나한테 와서 큰소리야?”이 여자가 무슨 배짱으로 그에게 물을 뿌리는 걸까.그와 시선을 마주한 심미연은 진작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이번에야말로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이 일이 밝혀지면 그와 온지유의 소원대로 반드시 강지한과 이혼할 거다.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며 정적을 깨뜨렸고 강지한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심미연은 화면에 뜬 온지유 이름에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심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오붓하게 통화해.’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심미연!”심미연의 발걸음이 살짝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사람 시켜서 교통사고에 대해 조사할 거야.”그가 당황했다.심미연에게 뭘 해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녀가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는 것은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인데 그녀의 감정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까.하지만 이번엔 심미연의 감정이 조금 신경 쓰였다.“전화 받고 얘기해.”3년 동안 심미연은 한가지 규칙을 발견했다. 강지한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풀릴 기세가 보이면 온지유는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둥, 몸이 안 좋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댔고 강지한은 매번 철석같이 믿으며 심미연을 혼자 버려둔 채 온지유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