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하린이 말고 내 친구가 또 누가 있는데?”‘나는 지금 분명 하린이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이 인간은 또 누구를 끌어들이려는 거야? 유진인가?’“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강지한은 그녀와 박유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박유진에 관한 이야기를 피하며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이 여자는 분명 뭔가 숨기고 있었다.심미연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나와 유진은 예전에 이웃이었고 지금은 그냥 아는 사이일 뿐이야.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그녀의 이런 설명이 강지한을 만족시킬지는 알 수 없었다.강지한은 웃으며 말했다.“듣자 하니, 박씨 가문에서 널 며느리로 점찍었다던데?”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속마음을 읽어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물었다.“남들이 하는 농담에도 그렇게 신경 쓰여?”그녀와 박유진 사이의 농담은 아주 오래전 이야기였고 지금은 다시 꺼낼 만한 가치도 없었다.게다가 열다섯 살에 처음 강지한을 본 이후로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만이 자리하고 있어 다른 누구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그녀에게 박유진은 오빠 같은 존재일 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강지한은 그녀의 눈을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난 당신이랑 결혼했잖아?”만약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박유진이었다면 어떻게든 그와 함께하려고 했을 것이다.그런데 중요한 건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강지한이었으니 박유진과 결혼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것이다.강지한이 오늘따라 이 얘기를 꺼내는 건 혹시 그녀가 쓴 이혼 서류 때문인가?그녀는 이혼 서류에 강지한을 유책 배우자로 명시하고 재산분할을 요구했다.만약 그녀가 외도해서 유책 배우자가 된다면 재산분할을 요구할 자격이 없어진다. 이런 생각에 심미연은 웃음이
남자의 차가운 숨결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심미연은 의사의 말이 떠올라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며 소리쳤다.“지한 씨, 배 누르지 마! 아파!”어제 강지한 때문에 배가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분명 자신에게도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자꾸만 거부하는 모습이었다.아까도 그랬다. 차라리 손으로 해결해 줄지언정 그와 잠자리를 하려 하지 않았다.그러니 이 여자가 다른 마음이 없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강지한의 시선에 심미연은 등골이 오싹해져 다급하게 말했다. “나... 배 아파.”“어제도 배 아프다더니 오늘 또 아프다고? 내일 무진에게 연락해서 병원 검진 예약해 놓으라고 할게.”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당연히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잠자리할 때마다 배가 아플 리가 없었다.분명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기 위한 핑계였다.심미연은 반사적으로 즉시 거절했다.“아니... 괜찮아!”성무진이 병원 검진을 예약하면 임신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만약 강지한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낙태를 강요할 것이 뻔했다.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이니 그녀는 반드시 낳을 것이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미연아, 너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이 여자의 반응은 너무 이상했다.심미연은 몰래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요즘 재판이 몇 건이나 잡혀 있어서 자료 준비에 현장 조사까지 해야 돼. 너무 바빠서 병원 갈 시간도 없는데 일 끝나고 검사받으면 안 될까?”그녀는 어떻게든 빨리 강지한과 이혼해야 했다.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관계를 하면 안 되는데 그는 그쪽으로 워낙 혈기왕성한 사람이라 한두 번 거절하는 건 가능해도 여러 번 거절하기는 힘들었다.자칫 잘못하면 아이를 유산할 수도 있었다.설사 3개월 동안 강지한과의 관계를 피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는 임신
“지한 씨, 나 피곤해. 자자.”심미연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이불 속에서 웅얼거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애교를 부리는 듯 나른하고 달콤했다.하지만 속으로는 온지유가 빨리 강지한에게 전화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강지한은 잠옷을 들고 침대에 올라 이불을 잡아당겨 심미연을 앞으로 밀었다.그 바람에 그녀는 침대 위에서 굴렀고 이불은 풀어졌다.그녀는 황급히 잠옷을 움켜쥐었다.끝났다!더는 버틸 수 없었다.온지유는 정말 도움이 안 돼!“지...”심미연이 입을 열자 남자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내가 갈아입혀 줄까, 아니면 네가 갈아입을래?”그는 꼭 보겠다는 심산이었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고 그를 유혹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안 갈아입으면 안 돼?”아까 그녀는 강지한을 유혹해서 신하린을 봐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근데 열심히 유혹했더니 결국 손만 더럽히고 신하린도 구해내지도 못했다.만약 이제 와서 이 잠옷을 입는다면 강지한은 순식간에 짐승으로 돌변할 것이다.그녀는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절대 입을 수 없었다.강지한은 그녀와 길게 말하기 귀찮아 그녀의 옷을 벗기고 빨간색 잠옷을 억지로 입혔다.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잠옷을 입었다.그러자 남자는 그녀를 안은 채 화장대 거울 앞으로 데려가 뒤에서 껴안고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오늘 밤, 거울 속에 비친 네 모습을 보면서 널 괴롭혀 줄게!”야한 빨간 잠옷은 그녀의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와 묘하게 어우러져 남자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심미연은 부끄럽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함정을 판 결과, 강지한에게 묻히게 생겼으니 말이다.강지한은 말을 마치고 그녀의 상체를 화장대에 밀어붙였다.심미연의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었다.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미연아, 긴장 풀어.”심미연은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하며 몸을 더 웅크렸다.강지한은 아픔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지유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실을 왜 집안에 숨겼어? 그 애가 지금 임신 중인 거 몰라! 그것도 네 형의 아이를! 잘못되기라도 하면 미연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문소영은 따지듯이 물었다.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렸다.“별일 없었는데 왜 호들갑이에요?”그는 성무진에게 온지유의 교통사고 소식을 막으라고 지시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네가 숨긴 건 미연을 감싸주려는 거잖아! 네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아?”심미연 이야기만 나오면 문소영의 기분은 나빠졌다.강지한은 차분하게 말했다.“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지유가 걱정되면 사람을 많이 붙여서 돌보던가요.”그는 온지유의 교통사고를 조사하고 있었다.심미연의 행동을 보면 그녀가 사고를 낸 것 같지는 않았다.비록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싶지도 않았다.“내가 네 엄마인데 어떻게 네 일에 신경을 안 써! 그리고 너 미연이랑 언제 이혼할 거야? 그날 백화점에서 이씨 가문 사모님을 만났는데, 그 집 막내딸이 돌아왔대. 지금 그 애한테 어울릴 만한 집안 아들을 찾고 있다던데, 예전에 걔가 너 쫓아다녔던 거 기억나? 차라리 너희 둘이 잘해 보는 건 어떻겠니?”문소영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강지한은 코웃음을 쳤다.“내 가정을 박살 내고 나를 다른 여자에게 넘기려고 이 밤중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밤중에 찾아오다니, 정말 어이없었다.“넌 미연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가정은 무슨 가정이야!”강지한은 짜증을 냈다.“늦었으니까 가보세요. 나 잘 거예요!”“미연은? 내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해? 꼭 거지 같은 집안에서 자란 티를 낸다니까. 예의도 모르고!”문소영은 위층을 보면서 빈정거렸다.그녀의 말에 강지한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연은 내 마누라인데 그녀를 무례하다고 하는 건 나를 무례하다고 욕하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한밤중에 와서 왜 미연에게 시비예요? 걔가 뭘 잘못했다고?”그의 면전에서 아내를 욕하다니, 정말 어처
가까이 다가간 강지한은 여자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허리를 굽혀 침대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열은 없었다.“미연아,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아?”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방금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잠깐 사이에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심미연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지한 씨, 배가 아파.”정말 너무 아팠다!병원에 가고 싶었다.“병원에 데려다줄게!”강지한은 말과 동시에 그녀를 안아 올리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이때 심미연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내려줘, 병원에 안 갈 거야!”병원에 가면 임신 사실이 들통날 것이다.그러면 아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그럴 순 없었다!강지한은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자 얼굴이 굳어지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어도 내 집에서는 안 돼! 밖에 나가서 죽어!”아파도 병원에 안 가다니,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심미연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화를 냈다.“살살 하라고 했잖아! 꼭 그렇게 힘을 줘야 했어? 지금 내 배가 아픈 게 누구 때문인데! 왜 나한테 화를 내!”다 그가 저지른 일인데 이제 와서 밖에 나가 죽으라니, 정말 너무했다.강지한의 얼굴에 잠시 어색한 기색이 스쳤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말했다.“병원에 가서 검사받아 보자.”‘부부끼리 조금 친밀한 행동을 했다고 병원에 가야 할 정도라니, 정말 유난스러운 여자야.’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그렇게 말하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아래층에 도착했다.심미연은 초조해졌다.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바로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심미연에게 말했다.“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 좀 꺼내 줘.”심미연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마지못해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
심미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안 아파.”지금 그녀는 어떻게든 남자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니 배가 아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지한은 입술을 깨물더니 허리를 굽혀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혼자 방으로 돌아가. 난 간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가버렸다.심미연은 남자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빨리 배에 손을 얹었다.“아가야, 얌전히 있어. 엄마가 금방 병원에 데려가 줄게!”이때 임혜자가 방에서 나와 심미연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다급하게 물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임혜자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사모님, 정말 괜찮겠어요?”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런데 지금 잠깐 나갔다 올게요. 만약 내가 돌아오기 전에 지한 씨가 먼저 오면, 거짓말 좀 해 주세요.”임혜자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했다.임혜자와 작별 인사를 한 후, 심미연은 서둘러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하린은 전화를 곧바로 받았다.“미연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급한 일이야?”보통, 그들은 늦은 시간에 통화하지 않았다.그러니 분명 심미연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짐작했던 것이다.“하린아, 빨리 나 좀 데리러 와 줘. 방금 너한테 위치 보냈어!”심미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배가 너무 아파. 빨리 병원에 가야 해. 안 그러면, 아기가 위험할지도 몰라!”아이가 이런 때에 오기로 했다면 그건 인연이 있다는 뜻일 테니, 그녀는 당연히 아이를 잘 보살펴야 했다.“강지한은 집에 없어?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안 들어왔어?”신하린은 연달아 물었다.심미연은 매정하게 떠나버린 강지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이 씁쓸해졌다.“방금 온지유한테서 전화가 와서 가버렸어.”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하린이 수화기 너머로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진짜 머리가 돌았나! 자기 마누
‘지한이 녀석, 어떻게 엄마보다 남을 더 챙겨!’하지만 그녀는 온지유에게 이 말을 할 수 없었다.“어머니, 지한 씨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온지유는 눈이 번쩍 뜨이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안 돼! 지한 씨는 심미연을 사랑할 리가 없어! 설령 사랑한다고 해도, 난 두 사람이 함께하게 둘 수 없어. 축복해 준다고? 절대 못 해!’“어. 그렇게 말했어! 자,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넌 어서 자!”문소영은 온지유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온지유, 이 여자는 강지한에게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뭔가 이상해! 설마...’문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그만두었다.온지유는 전화를 끊자마자 화를 냈다.이때 간병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하마터면 그녀가 던진 재떨이에 맞을 뻔했다. 간병인은 혼비백산하여 벌벌 떨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온지유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돌보던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고 없었다.다만 그녀는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온지유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참고 견디고 있었다.그녀가 한창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씨 주무세요?”“온지유 씨는... 지금 화내고 계세요!”간병인은 말을 마치고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던진 재떨이에 하마터면 이마에 맞을 뻔했어요!”그녀는 고자질하고 있었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쉬러 가세요. 다른 사람이 올 거예요.”그의 기억 속 온지유는 상냥한 여자였다. 말투도 나긋나긋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화를 낸다고?간병인이 헛소리하는 게 틀림없다.“네!”간병인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온지유의 간병인은 여러 명이라 교대로 돌봤는데, 금방 다른 간병인이 왔다.강지한을 보자마자 간병인은 인사했다.“오셨어요.”간병인은 강지한과 온지유가 약혼한 사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비싼 옷차림을 보고 부자인 것을 눈치채고는 아주 공손하게 대했다.강지한은 간병인을 흘끗 보고 병실 문을 열었다.온지유는
바로 그때, 신하린은 갑자기 잠에서 깼다. 살기 가득한 눈과 마주치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그녀가 갑자기 깨어날 줄 몰랐던 남자는 입을 막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상황을 판단하고 재빨리 문밖으로 도망쳤다.너무 급한 나머지, 주사기와 바늘이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바닥에 떨어진 주사기와 바늘을 본 신하린은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심미연의 손에 꽂힌 바늘을 뽑았다.방금 깨어난 심미연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 어리둥절했다.“하린아, 무슨 일이야?”신하린은 주사기와 바늘을 주워들고 심미연에게 말했다.“방금 누가 들어와서 네 링거병에 뭔가를 주입했어. 어쨌든 링거는 빼자. 이 안에 든 걸 검사해 봐야겠어.”신하린은 어려서부터 부잣집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일들을 많이 봐 왔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 사람들도 보았다.비록 심미연의 임신 사실은 외부에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다른 누군가 알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나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방금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봤어?”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온지유였고 오직 온지유만이 이처럼 악독한 짓을 할 수 있었다.“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고 눈만 봤어.”신하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심미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하린아. 뭔가 이상해. 링거병이랑 주사기, 바늘 잘 챙겨 놔. 내가 아는 사람한테 검사를 맡겨야겠어.”신하린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링거병과 주사기, 바늘을 봉투에 담아 보관했다.바로 그때, 의료진이 들어왔다.신하린은 간호사에게 서둘러 말했다.“손등에서 피가 나니까 지혈 좀 해 주세요.”방금 바늘을 너무 급하게 뽑다 보니 손등에서 피가 났다.심미연은 의사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혈액 검사를 해 주세요.”만약 그 사람이 링거병에 낙태약을 넣었다면, 방금
[한 잠 자고 일어났을 때 위치 정보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어요. 여러 번 시도했지만 도저히 위치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동생분의 핸드폰에 접근해 통화 기록을 확인했죠.][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강씨 사모님이었어요.] 심미연은 눈을 반쯤 감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심서연은 무슨 일로 문소영을 찾았을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친한 관계였나?’[보스, 지금 심서연 씨가 소식이 끊긴 상태인데 계속 추적할까요?] [네. 추적하세요.] 심미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을 느꼈다. ‘심서연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알겠습니다. 바로 사람을 찾아서 추적하겠습니다. 그럼 신하린 씨 교통사고는 어떻게 할까요?] [제가 일이 끝나면 그 사람 정보를 다시 확인하고 진짜 신원을 정확히 파악해볼게요.] [네. 알겠습니다.]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벽에 기대 섰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때 병실 안에서 심태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빨리 와요!”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급히 생각을 정리한 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엄마, 빨리 와서 이모 다리 어디 갔는지 찾아봐요.” 심태하가 그녀를 보고 급하게 달려왔다.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어 심미연을 애타게 바라봤다.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그를 부드럽게 안아 올리며 심태하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말했다. “이모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어. 이제 의족으로 대신해야 해. 그러니까 이모 앞에서 다리가 없다고 말하면 안 돼.”심태하는 눈가가 갑자기 붉어지며 목소리가 떨렸다. “이모는 다리를 잃었어. 이모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서 이모가 요즘 그렇게 기운도 없고 얼굴이 안 좋았던 거구나.’ ‘다리를 잃은 거였어.’어린 아이는 마음이 먹먹하고 아픈 감정이 밀려왔다. “태하가 불어주면 이모가 안 아플 거야.” 신하린은 웃으며 말했다. 마음속에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간병인은 이미 출근해 신하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고 있었다. 심태하는 병실 문을 열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 나 왔어요!”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치며 병상으로 달려가자 신하린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간병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침 준비해 주세요.” 간병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심태하는 침대 곁으로 뛰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침대에 누워 있는 신하린을 바라봤다. “이모, 저 보고 싶었어요?” 부드럽고 귀여운 목소리에 신하린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엄청엄청 보고 싶었지.” 심태하는 까치발을 들고 침대에 올라가려고 애썼지만 키가 닿지 않자 포기하고 조그만 얼굴을 숙여 신하린의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저도 엄청 보고 싶었어요.”심미연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시리게 아려왔다. 손에 든 죽을 옆의 서랍장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혹여 자신의 감정이 신하린에게 전해질까 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짧은 말만 남긴 채 병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신하린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담긴 쓸쓸함이 선명하게 느껴져 마음 한쪽이 시큰해졌다.지금 심미연이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신하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미연이 조금이라도 덜 걱정하도록 신하린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묵묵히 치료에 임했다.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서 병원을 나가고 싶었다. 그래야 심미연이 더는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을 테니까.심미연은 병실을 나온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보스, 신하린 씨 사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심미연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누구예요?] [한유나 씨 아버지입니다.]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경비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박유진과 언젠가는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박유진은 심미연이 멍하니 있는 걸 보며 잠시 마음이 조금 씁쓸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띠고 말을 이어갔다. “농담이야. 결혼 강요하려던 건 아니었어. 이렇게 하자. 오후에 시간이 되면 같이 보러 가자. 마음에 들면 내일 바로 이사도 가능해. 어때?”그는 심미연의 마음속에 강지한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건 심미연이 그와 함께 평생을 살아갈 만큼 감정이 깊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심미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오빠...” 심미연은 박유진이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 모습에 마음속 깊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박유진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지금은 오빠한테 결혼을 약속할 수 없어.” 그녀는 아직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박유진을 평생 고통 속에 두고 싶지 않았다. “알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돼.” 박유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말했다. “내가 너무 서둘렀어.”심미연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마음의 병이 있다고 말하며 그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유진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진성에 있을 때였다면 이렇게 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경성에 돌아온 후 강지한이 언제든지 심미연과 심태하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아 점점 더 초조해졌다.“나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치료 받을 거야.” 심미연은 그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확신시키려 애썼다. 매번 의사 말을 순순히 따르며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심미연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를 조심스럽게 품에서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심미연은 세수를 하고 간단히 준비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박유진은 이미 아침을 준비해 놓고 거실을 정리하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 조금 더 자.” 박유진은 청소기를 끄고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할 일이 많아서 더 이상 못 자. 정신없이 바쁠 거야.” 심미연은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먼저 아침 먹어. 나는 위층 가서 태하 깨울게.” 박유진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알겠어. 오빠가 태하 깨워줘.” 심미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살짝 비벼댔다.박유진과 함께하는 시간은 평온하고 따뜻했다. 그저 이런 일상이 이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아침 먹어. 난 위층 가서 좀 보고 올게.” 박유진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으며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심미연은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걸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박유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깊은 숨을 내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심미연의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심태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박유진의 마음은 저절로 따뜻해졌다. 심미연과 심태하를 돌보는 건 그에게 큰 행복이자 기쁨이었다.심미연은 식탁에 앉아 보온병을 열었다. 따뜻한 우유와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기가 퍼졌다. 빵은 부드럽고 입 안에서 살살 녹으며 그 맛이 정말 좋았다. 박유진은 예전엔 찐빵이나 만두 같은 것만 만들 줄 알았고 빵과 케이크는 나중에 배우게 된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녀와 심태하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심미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무거웠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심미연은 복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아침을 마치고 거실로 나가자 박유진이 심태하를 안고
신하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를 바라봤다. 눈동자에 스친 냉소는 차갑고 깊었다. ‘내가 멀쩡할 때는 단 한 번도 결혼 얘기 안 하더니. 이제 다리 하나 못 쓰게 되니까 그제야 날 데려가겠다고?’ ‘날 데려가서 네 부모한테 실컷 조롱당하게 하려고?’“왜 그렇게 봐?” 이진영은 신하린의 시선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숨을 삼키듯 숨을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물었다. 신하린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이진영 씨, 난 예전에도 당신과 만나겠다고 한 적 없어요.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 없을 거고요.” “당신과 결혼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예요.”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내뱉는 말들이 조금의 여지도 없이 이진영을 꿰뚫었다.이진영은 허리를 숙여 수건을 적셨다. 꾹 짜낸 뒤 조용히 걸음을 옮겨 신하린 앞에 섰다. 수건을 조심스럽게 들어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데려가겠다고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갈 거야.” “예전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너한테 약속할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제 모든 일 정리되는 대로 너랑 결혼할 거야.” “한 말은 반드시 지킬 거야.”지난 4년 동안 이진영은 많은 일을 해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만들어낸 적도 많았다. 그의 곁에 신하린이 있으면 그만큼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고싶어도, 미칠 듯 그리워도 끝내 연락하지 않았다. “전 안 해요. 절대 당신이랑 결혼 안 해요.”“이진영 씨, 당장 나가세요.” 그날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억지로 눌러왔던 감정이 터져 나오듯이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이 쏟아졌다. 그녀가 견뎌온 모든 고통은 전부 이진영 때문이었다. 이진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낸 뒤 손까지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네가 기분 안 좋다는 거 알아. 그럼 나 한 대 쳐서라도 기분 풀래?” 신하린은 그 손을 냉정하게 뿌
강지한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얼굴의 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심미연은 분명 병실에 와서 강상미를 만났지만 의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 독한 여자야.’“시간도 늦었고 나도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 먼저 간다.” 이진영은 담배를 끄고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갔다. 강지한은 술을 따라 마시며 심미연에 관한 생각에 잠겼다. ‘심미연은 언제 의술을 배운 거지?’ ‘이 3년 동안 이 여자는 도대체 뭘 했던 걸까?’이진영이 차에 올라타자 기사가 물었다. “도련님,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이진영은 미간을 문지르며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순간 마음 속이 답답해졌다. “병원으로 가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엔진을 돌렸다.신하린의 병실 앞에 도착한 이진영은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이진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들어가서 잠깐 보고 올게요.” “신 대표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심미연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론은 한 마디였다. 그들은 명령을 따랐기에 규칙을 어길 수 없었다.이진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여기는 내 병원인데 병실도 맘대로 들어가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돌아가 주세요.” 경호원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하지만 그때 병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진영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말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어요. 들어가게 해줘요.” 경호원은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때 또 한 번 병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경호원도 놀라서 급하게 병실 문을 열었다.이진영은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신하린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조명 아래서 그 모습은 다소 섬뜩하게 보였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다가가 신하린을 침대에 눕히고 몸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면서 옆에 멍하니 서 있던 경호원에게는 급히 소치쳤다. “의사
“너희 아버지가 최근에 한석훈과 많이 가까워졌다고 들었어. 내가 알기로 한석훈과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더라.” 강지한은 박시훈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이진영에게 전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사실 지난 4년 동안 그는 한석훈의 배후 세력을 조사해왔고 조사할수록 그 배후는 점점 더 복잡하고 충격적인 사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너와 한유나 씨 사이의 일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야?” 이진영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혼약을 해제할 생각이야.” 그는 이미 한유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한유나는 최근 들어 그를 피하는 듯했다. 그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구아정은 어떻게 할 거야?” 강지한이 다시 물었다. “네 첫사랑이라고 했지?”“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던 사람이야.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고 그 뒤로 그냥 끝났어.” 이진영은 무의식적으로 신하린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 지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신하린이었다.이제 그녀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느꼈다. 그녀의 다리가 이렇게 된 지금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녀를 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구아정, 그 여자에 대해 조사해본 적 있어?” 강지한이 상기시키듯 말했다.“조사 중이야.” 이진영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겠어.”구아정은 분명 그를 찾으러 온 거였다.‘왜일까?’“신하린 씨의 일은 잘 해결됐나?” 강지한은 그녀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물었다.“하린이 오른쪽 다리가 절단됐어.” 이진영은 말하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흡입했다. 연기가 흩어질 때 그는 다시 한 번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강지한은 잠시
문소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나를 살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두 명의 아들을 뒀다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할 거야. 그럼 당신도 명예를 잃고 끝장날 거라고.” 그녀는 지금 이 남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두 아들을 뒀다고? 증거 없이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남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며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당시 내 임신 검진서도 여전히 남아 있고 병원에 가면 내 출산 기록도 확인할 수 있어. 그 아이들의 혈액형은 당신이랑 똑같아.” 문소영은 그동안 이 모든 것을 철저히 보관해 왔다.“문소영, 나를 망치려고 하는 거야?” 남자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나는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래.” 문소영은 감정을 정리한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갈수록 나에게 유리해.” “내가 원칙을 깨고 너를 돕기를 바란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남자는 술잔을 비운 후 탁자 위에 쿵 하고 내려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소영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며 부르지 않았다. 오늘은 그에게 경고만 준 것뿐이다. 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한 대로였다.잠시 후 문소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모님, 지시하신 대로 사람을 공해에 던졌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해외로 잠시 숨어 있어. 여기 상황이 정리 될 때까지 기다려.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된다.] 문소영의 얼굴엔 차가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들이 돌아올 때쯤 심서연의 죽음은 이미 잠잠해지고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문소영은 전화를 끊고 술을 따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진영은 술을 많이 마셨고 잠간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버지를 닮은 듯해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발걸음
문소영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없이 있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TV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미칠 듯했다. 문소영은 자신이 더 이상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믿어왔다. 남자는 그녀의 침묵을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문소영은 깊은 생각을 떨쳐내고 몸을 곧게 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필요해서 왔어. 우리 아들에 관한 일이야.” 남자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아들이 있다고? 그럴 리가...” “쌍둥이였어. 작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납치됐고 큰 아이는 강지성. 몇 년 전에 사고로 죽었어.” 문소영은 눈물을 훔치며 말을 급히 이어갔다.이건 그녀가 삼십 년 넘게 숨겨온 비밀이었다. 그녀는 이 생에서 절대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간 이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내뱉게 되었다. 문소영의 말은 마치 폭탄처럼 남자의 가슴 속에 떨어졌고 남자는 동공이 급격히 축소되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문소영과 자신이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사실 처음 내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당신에게 말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집에서 강제로 나를 강우석과 결혼시키려 했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러자 부모님은 나를 감금하고 내 핸드폰도 압수했어.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어.” 문소영은 말하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그녀는 부모님의 강요로 강씨 가문에 보내졌었다. 강우석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우석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강우석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 상대가 바로 강지한의 어머니였다. 7개월 후 그녀는 쌍둥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그 중 한 명이 사라졌다. 그녀는 30년 동안 그 아이를 훔쳐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그 사람이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