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 씨, 나 피곤해. 자자.”심미연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이불 속에서 웅얼거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애교를 부리는 듯 나른하고 달콤했다.하지만 속으로는 온지유가 빨리 강지한에게 전화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강지한은 잠옷을 들고 침대에 올라 이불을 잡아당겨 심미연을 앞으로 밀었다.그 바람에 그녀는 침대 위에서 굴렀고 이불은 풀어졌다.그녀는 황급히 잠옷을 움켜쥐었다.끝났다!더는 버틸 수 없었다.온지유는 정말 도움이 안 돼!“지...”심미연이 입을 열자 남자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내가 갈아입혀 줄까, 아니면 네가 갈아입을래?”그는 꼭 보겠다는 심산이었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고 그를 유혹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안 갈아입으면 안 돼?”아까 그녀는 강지한을 유혹해서 신하린을 봐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근데 열심히 유혹했더니 결국 손만 더럽히고 신하린도 구해내지도 못했다.만약 이제 와서 이 잠옷을 입는다면 강지한은 순식간에 짐승으로 돌변할 것이다.그녀는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절대 입을 수 없었다.강지한은 그녀와 길게 말하기 귀찮아 그녀의 옷을 벗기고 빨간색 잠옷을 억지로 입혔다.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잠옷을 입었다.그러자 남자는 그녀를 안은 채 화장대 거울 앞으로 데려가 뒤에서 껴안고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오늘 밤, 거울 속에 비친 네 모습을 보면서 널 괴롭혀 줄게!”야한 빨간 잠옷은 그녀의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와 묘하게 어우러져 남자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심미연은 부끄럽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함정을 판 결과, 강지한에게 묻히게 생겼으니 말이다.강지한은 말을 마치고 그녀의 상체를 화장대에 밀어붙였다.심미연의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었다.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미연아, 긴장 풀어.”심미연은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하며 몸을 더 웅크렸다.강지한은 아픔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지유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실을 왜 집안에 숨겼어? 그 애가 지금 임신 중인 거 몰라! 그것도 네 형의 아이를! 잘못되기라도 하면 미연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문소영은 따지듯이 물었다.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렸다.“별일 없었는데 왜 호들갑이에요?”그는 성무진에게 온지유의 교통사고 소식을 막으라고 지시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네가 숨긴 건 미연을 감싸주려는 거잖아! 네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아?”심미연 이야기만 나오면 문소영의 기분은 나빠졌다.강지한은 차분하게 말했다.“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지유가 걱정되면 사람을 많이 붙여서 돌보던가요.”그는 온지유의 교통사고를 조사하고 있었다.심미연의 행동을 보면 그녀가 사고를 낸 것 같지는 않았다.비록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싶지도 않았다.“내가 네 엄마인데 어떻게 네 일에 신경을 안 써! 그리고 너 미연이랑 언제 이혼할 거야? 그날 백화점에서 이씨 가문 사모님을 만났는데, 그 집 막내딸이 돌아왔대. 지금 그 애한테 어울릴 만한 집안 아들을 찾고 있다던데, 예전에 걔가 너 쫓아다녔던 거 기억나? 차라리 너희 둘이 잘해 보는 건 어떻겠니?”문소영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강지한은 코웃음을 쳤다.“내 가정을 박살 내고 나를 다른 여자에게 넘기려고 이 밤중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밤중에 찾아오다니, 정말 어이없었다.“넌 미연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가정은 무슨 가정이야!”강지한은 짜증을 냈다.“늦었으니까 가보세요. 나 잘 거예요!”“미연은? 내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해? 꼭 거지 같은 집안에서 자란 티를 낸다니까. 예의도 모르고!”문소영은 위층을 보면서 빈정거렸다.그녀의 말에 강지한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연은 내 마누라인데 그녀를 무례하다고 하는 건 나를 무례하다고 욕하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한밤중에 와서 왜 미연에게 시비예요? 걔가 뭘 잘못했다고?”그의 면전에서 아내를 욕하다니, 정말 어처
가까이 다가간 강지한은 여자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허리를 굽혀 침대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열은 없었다.“미연아,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아?”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방금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잠깐 사이에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심미연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지한 씨, 배가 아파.”정말 너무 아팠다!병원에 가고 싶었다.“병원에 데려다줄게!”강지한은 말과 동시에 그녀를 안아 올리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이때 심미연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내려줘, 병원에 안 갈 거야!”병원에 가면 임신 사실이 들통날 것이다.그러면 아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그럴 순 없었다!강지한은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자 얼굴이 굳어지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어도 내 집에서는 안 돼! 밖에 나가서 죽어!”아파도 병원에 안 가다니,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심미연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화를 냈다.“살살 하라고 했잖아! 꼭 그렇게 힘을 줘야 했어? 지금 내 배가 아픈 게 누구 때문인데! 왜 나한테 화를 내!”다 그가 저지른 일인데 이제 와서 밖에 나가 죽으라니, 정말 너무했다.강지한의 얼굴에 잠시 어색한 기색이 스쳤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말했다.“병원에 가서 검사받아 보자.”‘부부끼리 조금 친밀한 행동을 했다고 병원에 가야 할 정도라니, 정말 유난스러운 여자야.’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그렇게 말하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아래층에 도착했다.심미연은 초조해졌다.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바로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심미연에게 말했다.“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 좀 꺼내 줘.”심미연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마지못해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
심미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안 아파.”지금 그녀는 어떻게든 남자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니 배가 아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지한은 입술을 깨물더니 허리를 굽혀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혼자 방으로 돌아가. 난 간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가버렸다.심미연은 남자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빨리 배에 손을 얹었다.“아가야, 얌전히 있어. 엄마가 금방 병원에 데려가 줄게!”이때 임혜자가 방에서 나와 심미연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다급하게 물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임혜자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사모님, 정말 괜찮겠어요?”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런데 지금 잠깐 나갔다 올게요. 만약 내가 돌아오기 전에 지한 씨가 먼저 오면, 거짓말 좀 해 주세요.”임혜자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했다.임혜자와 작별 인사를 한 후, 심미연은 서둘러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하린은 전화를 곧바로 받았다.“미연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급한 일이야?”보통, 그들은 늦은 시간에 통화하지 않았다.그러니 분명 심미연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짐작했던 것이다.“하린아, 빨리 나 좀 데리러 와 줘. 방금 너한테 위치 보냈어!”심미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배가 너무 아파. 빨리 병원에 가야 해. 안 그러면, 아기가 위험할지도 몰라!”아이가 이런 때에 오기로 했다면 그건 인연이 있다는 뜻일 테니, 그녀는 당연히 아이를 잘 보살펴야 했다.“강지한은 집에 없어?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안 들어왔어?”신하린은 연달아 물었다.심미연은 매정하게 떠나버린 강지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이 씁쓸해졌다.“방금 온지유한테서 전화가 와서 가버렸어.”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하린이 수화기 너머로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진짜 머리가 돌았나! 자기 마누
‘지한이 녀석, 어떻게 엄마보다 남을 더 챙겨!’하지만 그녀는 온지유에게 이 말을 할 수 없었다.“어머니, 지한 씨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온지유는 눈이 번쩍 뜨이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안 돼! 지한 씨는 심미연을 사랑할 리가 없어! 설령 사랑한다고 해도, 난 두 사람이 함께하게 둘 수 없어. 축복해 준다고? 절대 못 해!’“어. 그렇게 말했어! 자,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넌 어서 자!”문소영은 온지유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온지유, 이 여자는 강지한에게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뭔가 이상해! 설마...’문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그만두었다.온지유는 전화를 끊자마자 화를 냈다.이때 간병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하마터면 그녀가 던진 재떨이에 맞을 뻔했다. 간병인은 혼비백산하여 벌벌 떨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온지유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돌보던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고 없었다.다만 그녀는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온지유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참고 견디고 있었다.그녀가 한창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씨 주무세요?”“온지유 씨는... 지금 화내고 계세요!”간병인은 말을 마치고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던진 재떨이에 하마터면 이마에 맞을 뻔했어요!”그녀는 고자질하고 있었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쉬러 가세요. 다른 사람이 올 거예요.”그의 기억 속 온지유는 상냥한 여자였다. 말투도 나긋나긋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화를 낸다고?간병인이 헛소리하는 게 틀림없다.“네!”간병인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온지유의 간병인은 여러 명이라 교대로 돌봤는데, 금방 다른 간병인이 왔다.강지한을 보자마자 간병인은 인사했다.“오셨어요.”간병인은 강지한과 온지유가 약혼한 사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비싼 옷차림을 보고 부자인 것을 눈치채고는 아주 공손하게 대했다.강지한은 간병인을 흘끗 보고 병실 문을 열었다.온지유는
바로 그때, 신하린은 갑자기 잠에서 깼다. 살기 가득한 눈과 마주치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그녀가 갑자기 깨어날 줄 몰랐던 남자는 입을 막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상황을 판단하고 재빨리 문밖으로 도망쳤다.너무 급한 나머지, 주사기와 바늘이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바닥에 떨어진 주사기와 바늘을 본 신하린은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심미연의 손에 꽂힌 바늘을 뽑았다.방금 깨어난 심미연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 어리둥절했다.“하린아, 무슨 일이야?”신하린은 주사기와 바늘을 주워들고 심미연에게 말했다.“방금 누가 들어와서 네 링거병에 뭔가를 주입했어. 어쨌든 링거는 빼자. 이 안에 든 걸 검사해 봐야겠어.”신하린은 어려서부터 부잣집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일들을 많이 봐 왔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 사람들도 보았다.비록 심미연의 임신 사실은 외부에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다른 누군가 알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나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방금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봤어?”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온지유였고 오직 온지유만이 이처럼 악독한 짓을 할 수 있었다.“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고 눈만 봤어.”신하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심미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하린아. 뭔가 이상해. 링거병이랑 주사기, 바늘 잘 챙겨 놔. 내가 아는 사람한테 검사를 맡겨야겠어.”신하린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링거병과 주사기, 바늘을 봉투에 담아 보관했다.바로 그때, 의료진이 들어왔다.신하린은 간호사에게 서둘러 말했다.“손등에서 피가 나니까 지혈 좀 해 주세요.”방금 바늘을 너무 급하게 뽑다 보니 손등에서 피가 났다.심미연은 의사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혈액 검사를 해 주세요.”만약 그 사람이 링거병에 낙태약을 넣었다면, 방금
박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갔고 신하린은 그의 뒤를 따라 병실을 나섰다.그런데 이때 박유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신하린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의 부딪힐 뻔했지만 간신히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며 빠르게 감정을 가라앉힌 후 그를 쳐다보았다.“박유진 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오늘 밤 일은 제가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연이 곁에 제 사람을 붙여 놨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 지르세요. 바로 도와줄 겁니다.”박유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오늘 심미연이 무사해서 다행이지, 만약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자책감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신하린은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아마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을 시켜 심미연을 몰래 보호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오늘 이렇게 빨리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하지만 이 사실을 심미연이 알게 된다면 그녀는 좋아하지 않을 게 뻔했다.“미연은 2년 동안 변호사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만큼 원한도 많이 샀어요. 그녀를 노리는 사람이 많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전해주세요.”박유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 때문에 척을 진 사람들 외에도 강 씨 가문의 큰 사모님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네, 전해줄게요.”신하린의 얼굴도 심각해졌다.“다만 미연의 동서랑 시어머니도 문제예요. 그들도 미연을 해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나마 박유진 씨가 사람을 붙여주신 덕분에 마음이 좀 놓이네요!”“그럼, 병실로 돌아가서 미연의 곁에 있어 주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저에게 바로 전화하시고요. 시 정부의 조경 설계 건은 제가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이달 말쯤 결과가 나올 것 같으니, 그때 알려드릴게요.”박유진은 말을 마치고 떠났다.신하린은 그의 뒷모습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후 주변을 살폈다.하지만 몰래 심미연을 보호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미르 파크, 침실에서.강지한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안녕하세요. 고객님이 전화하신 번호는 전원이 꺼져 있어...”수화기 너머로 기계적인 안내 음성이 들려오자 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심미연 이 여자는 전화를 꺼놓으면 자기를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잠시 후, 강지한은 드레스 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휴대폰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에 전화를 받은 성무진은 하는 수 없이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차에 오른 그는 일부러 심미연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들려왔다.그의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왠지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병실 안에서 심미연의 손에는 수액 성분 분석 결과지가 들려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차가운 눈빛은 강지한과 똑 닮아 있었다.역시 부부는 부부였다.신하린은 분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대체 어떤 파렴치한 놈이 뒤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너무 비열하잖아!”심미연은 숨을 들이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일단 소문내지 마. 내가 사람을 시켜서 알아볼게.”만약 온지유의 짓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신하린은 그녀를 달랬다.“천만다행이야. 빨리 알아채서 바늘을 뽑았으니.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걱정하지 마,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안 낼게.”심미연은 배를 쓰다듬으며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쳤다.빨리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조금만 늦었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수술대에 누워 있었을지도 모른다.“미연아, 얼른 자. 시간도 늦었어.”신하린은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1시 반이었다“임산부는 밤샘하면 태아에게 안 좋아.”심미연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강지한이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나 급히 덧붙였다.“맞다, 지한 씨가 네 작업실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신하린은 잠시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사실 그녀도 이 일에 대해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그쪽에서는 경성의 어떤 거물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며 어쩔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
전화를 받자마자 박유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미연아,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오늘 실검에 너 이름이 올라서...”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한마디에도 목소리에는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기다림 끝에 다가온 것은 예상했던 이별이었다. ‘결국 우리는 엇갈릴 운명이었던 걸까?’언젠가 마주할 결말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감정은 휘몰아쳤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기사를 본 뒤 그는 두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겨우 전화를 걸었던 이유는 사실 아직 남아 있는 미련 때문이었다. 끝이라면 끝이라도 적어도 그 이유는 알고 싶었다. 심미연은 자신이 지시한 기사 내용을 떠올리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 표정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실검에 오른 그 기사, 내가 일부러 퍼뜨린 거야.”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온지유가 나왔어. 태하가 위험해질까 봐... 그 여자를 끌어내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어. 어쩔 수 없었어.” 온지유는 어둠 속에 숨어 있고 그녀는 그 빛 속에 서 있다. 상대는 그녀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 불안한 감각이 점점 가슴 속 깊이 스며들며 심태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온지유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모습을 드러내길 바랐다. 심미연은 그 여자가 강지한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자신과 강지한이 다시 만났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바로 온지유를 붙잡을 기회가 될 것이다. 박유진은 그녀의 설명을 들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의 목소리에 힘이 조금 실렸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사람 몇 명 더 붙일게. 미연아, 정말 조심해야 해. 그 여자는... 완전히 선을 넘은 사람이야.”
심미연은 신하린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 아침을 다 먹고 난 후 심미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심태하도 유치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한편, 백선영은 휠체어를 밀며 신하린을 거실로 데려왔다. “신하린 씨, 여기서 편하게 쉬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네. 고마워요. 가서 일 보세요.” 백선영은 식탁 정리를 하러 주방으로 갔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어쩌다 다리를 잃은 거야...’ 그때 심미연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심태하도 유치원복을 입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세 살짜리 아이지만 늘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녔다. 엄마를 보자마자 심태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달려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 우리 이제 가요.” 심미연은 그런 아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열정적인 반응이었다. “너 유치원 가기 싫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가고 싶어 하는 거야?” 뭔가 이상했다. 심태하는 순간적으로 등을 꼿꼿이 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더 많은 걸 배워야 엄마를 잘 지켜줄 수 있지.” ‘이 녀석,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거야?’ “내가 강해지면, 아무도 우리한테 함부로 못 할 거예요.” 진지하게 말하는 아들을 보자 심미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 꼬맹이,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워 온 거야... 눈물 날 것 같네.’ 신하린은 그런 심미연을 보며 속으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따뜻한 아들이 있다니. 진짜 부럽다...’ 심미연은 생각을 멈추고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신발을 신고 나가기 전 신하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린아, 나 간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심미연은 심태하에게 당부했다. “낯선 사람하고 말하지 마. 그리고 모
“입 닥쳐.” 강지한이 짜증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들이 돌아오길 제일 바랐던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박시훈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전처랑 완전히 끝난 거 맞지?” ‘그렇다면 이제 자기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 “너, 한 마디만 더 해봐.” 강지한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새파래졌다. 설령 심미연이 자신과 끝난다 해도 박시훈 같은 놈을 허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겠어. 그럼 내가 직접 물어보러 가지 뭐.” 박시훈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강지한은 핸드폰을 쥔 채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심미연, 박유진 하나로도 모자라서 또 다른 남자까지 꼬드기고 있는 건가?’ ‘정말 남자를 끌어들이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군.’ 심미연의 저택.아침 식사 도중 심미연은 재채기를 했다. “엄마, 여기.” 심미연이 재채기하자마자 심태하가 재빨리 휴지를 뽑아 건넸다. 그의 작은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엄마, 감기 걸린 거야?” 엄마가 아프면 힘들어하니까 심태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냐. 감기 안 걸렸어. 걱정 안 해도 돼.” 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심태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린은 괜히 가슴이 찡했다. ‘이런 기특한 아들을 키우는 기분은 대체 어떨까?’ ‘나도 아들 하나 낳고 싶어지네.’심미연은 사용한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아들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마는 어른이니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태하는 엄마 걱정 안 해도 돼. 알겠지?” 다른 집 아이들은 이 나이면 그저 먹고 놀기에 바쁠 텐데 심태하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그게 안쓰러워서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때 심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남자는 여자를 챙겨줘야 하는 거라고.”
“다 말했어? 다 했으면 이제 가.” 심미연은 강지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강지한이 찾아온 목적이야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이나 그의 말에 넘어간 결과가 뭔가? 아들이 끌려갔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이제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미안해해도 그가 아무리 후회해도 그녀에게는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상미가 아무리 불쌍하다고 해도 결국 남의 집의 아이였다. “그럼 난 가볼게.”강지한은 심미연이 최소한 한 번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냉정했다. 그녀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애초에 갈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착잡한 감정을 느꼈다. 눈앞에 어린 딸의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이 아려왔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초래한 일이었다. 그는 수없이 그 모자를 상처 입혔고 이젠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심미연이 문을 닫고 들어가자 그는 무심코 문틈을 바라봤다. 잠시 스치듯 보인 것은 심태하의 밝게 웃는 얼굴이었다. 순간, 가슴이 답답했다. 그 아이가 자기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엔 오직 차가운 증오만 담겨 있었다. 조용히 문을 바라보다가 강지한은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차에 올라탄 순간,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성무진의 전화였다. “대표님, 임지혜 씨가 들어올 때 영상 찾았습니다.” “지금 당장 회사로 갈게. 사무실에서 기다려.” 그는 단숨에 차를 돌려 회사를 향해 달렸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사무실로 향했고 들어가자마자 성무진이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띄웠다. 화면 속에서 문소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럽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