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훈이 갑자기 연 씨 별장을 언급하자 나는 그가 두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속으로는 아쉬움과 망설임이 교차했다. 석지훈은 내 주저함을 알아채고는 차분히 설명했다.“아이들을 우리 곁에 두더라도 유모만 시간을 내어 돌볼 수 있을 테니 차라리 아이들을 연 씨 별장에 보내는 게 낫지 않겠어. 부모님 두 분 다 별장에서 쓸쓸하게 계시는데 애들 키우면서 시간도 보내시고 손주들 재롱 보면서 즐겁게 지내실 수 있잖아.”나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석지훈은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아가야, 우리 집을 운성에 정하는 건 어떨까? 그러면 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연 씨 저택에 가서 아이들을 볼 수 있으니 곁에 두고 키우는 것과 다름없을 거야.”집을 운성에 정한다라...하지만 석지훈이 좋아하는 건 핀란드였다.그런데 나를 위해 운성에 집을 정하려 한다니.게다가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와 그에게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 부모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였다.더군다나 바로 가까이에 계시니 저녁에는 집으로 데려와 직접 돌볼 수도 있었다. 이 제안은 여러모로 좋은 방법이었다.당시 이 제안을 하는 석지훈은 매우 다정했기에 나는 순진하게도 그가 나를 위해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내가 아이들에게만 신경 쓰는 모습에 석지훈은 묘한 감정을 느꼈고 아이들을 곁에 두고 키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곡하게 나를 설득하여 아이들을 연 씨 저택으로 보내려 했던 것이다.그는 그녀의 사랑이 두 아이에게 너무 많이 분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요 이틀처럼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네. 이틀 더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부모님께 맡길게요. 한 번에 두 명의 외손주를 얻으시니 부모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시겠죠.”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 나도 같이 있어 줄게.”그 후 이틀 동안 운산에 있
“피곤하지는 않은데 앞으로 매일 동성과 운성을 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무겁네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운성에 정착하려고 하니 석씨 가문의 본거지는 동성에 있었다.어떤 일들은 말로는 쉬웠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매우 어려웠다.더군다나 석지훈의 본거지는 유럽에 있었다.“함승윤에게 지시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운성으로 보내 달라고 해. 동성에서 운성까지 몇 시간 안 걸리니까 매일 한 번씩 보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급한 일 있으면 그때 동성에 가면 되고 최악의 경우엔 내가 뒤에서 도와줄게.”잠시 말이 없다가 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석씨 가문은 석씨 가문 나름대로 돌아가는 방식이 있어. 너무 힘들게 할 필요 없어.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서 조금씩 놓아 봐.”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어떻게 놓아요?”과거 석지훈은 석씨 가문을 장악하는 동시에 유럽의 권력까지 쥐고 있었다. 규모는 컸지만 그는 모든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고 자주 외부에서 활동했기에 석씨 가문의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원태웅은 그가 위험 속을 오가는 것을 즐긴다고 말했었다.“착하지, 저녁에 집에 가서 석씨 가문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이제 그는 ‘착하지’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했다.“네. 오빠는 어디에요?”내가 물었다.“너 데리러 가는 중이야. 널 데리고 운성으로 가야지.”나는 전화를 끊고 창밖의 아름다운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모든 것이 보기 좋았다.나는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와 함승윤을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곧바로 일어서서 불렀다.“가주님.”나는 웃으며 물었다.“뭐 해요?”“회사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나는 방금 석지훈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동의하며 말했다.“분명 가능한 방법입니다. 운성에도 석씨 가문의 지사가 있으니 가주님께서 운성에 머무르시고 싶으시다면 강 비서를 그곳에 파견하여 보좌하도록 하겠
공작이 죽었으니 당연히 후계자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왕실에서 나를 초대했다는 것은 내가 그 상속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F 국 공작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함승윤에게 말했다.“일단 보류해 두세요.”그 노인은 사망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아마 며칠 더 걸릴 것이다. 아마도 내가 F 국에 갈 때까지 기다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를 F 국으로 초대하는 것은 엄마의 생각인 것 같았다.어쨌든 이것은 엄마가 나한테 물려주려고 만든 자리니까.나는 엄마가 의식을 되찾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습니다, 가주님.”“일보세요.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지훈 씨 기다릴 테니.”함승윤은 공손하게 말했다.“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가주님.”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아래층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트위터의 실시간 검색어를 훑어보았다.모두 현재 유행하는 내용으로 별로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나는 석지훈의 트위터에 들어가 보았다. 그가 올린 게시물은 약혼식 날 올린 단 하나의 게시물뿐이었다...수백만 개의 ‘좋아요’는 그의 인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나는 원대감이라는 아이디의 트위터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는 매일 게시물을 올리고 있었다.이를테면...[석 대표님은 연수아를 아주 예뻐한답니다~]예뻐한다고는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팬들의 눈에 그는 그저 인터넷 서핑이나 하는 사람이었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그저 심각한 커플 팬으로 보일 뿐이었다.그는 직접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예를 들어...[몇 년 몇 월 며칠, 연수아는 옆에 있는 잘생기고 차가운 석 대표님에게 물었다.‘지훈 오빠, 나의 어떤 점이 좋아요?'그러자 석 대표님이 되물었다.‘그럼 넌 내 어떤 점이 좋아?'‘나는 오빠가 잘생기고 돈이 많아서 좋아요.'석 대표님의 몸이 굳어졌다.‘그것뿐이야?'연수아는 남자의 차가워진 말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그리고
나는 원태웅에게 쪽지를 보냈다.[오빠, 적당히 하세요.]원태웅은 인터넷을 하고 있었는지 장미꽃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했다.[윤아야, 나 아이디어가 고갈됐어. 내일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연재를 멈출 수는 없잖아!]그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나에게 영감을 구하고 있었다.나는 잠깐 생각한 후 답장했다.[생각해 볼게요.]사실 나는 원태웅의 이야기들을 꽤 좋아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전부 읽어볼 생각이었다.원태웅이 답장을 보냈다.[역시 윤아가 눈치가 빠르네. 많이 생각해 줘. 형에게는 절대 말 안 할게.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내가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면 맛있는 거 사줄게.]한창 원태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석지훈이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운전 기사에게서 우산을 받아 들고 내 머리 위로 씌워 주었다.석지훈의 다리는 길고 곧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의 길고 하얀 손이었다.하지만 너무 가볍게 보이긴 싫었다.나는 차에 탄 뒤,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피곤해?”“네. 졸려요.”내가 대답했다.“내 품에서 잠깐 눈 붙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무릎에 누웠다. 그의 손바닥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자, 내가 여기 있을게.”얼마 자지 못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친엄마의 전화였다. “너를 만나고 싶구나.”나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대답했다.“알겠어요. 하지만 장례식에는 참석하고 싶지 않아요. 며칠 후에 F 국에 찾아뵐게요.”엄마는 내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나는 공작 작위를 원하지 않았다.“수아야, 이건 내 마음이야.”“죄송해요, 하지만 이건 제 것이 아니에요.”이 말에 엄마는 따졌다.“석씨 가문도 네 것이 아니었지만 받아들였잖아. 아빠가 준 건 받으면서 왜 엄마가 주는 건 안 받아? 수아야, 내가 아빠보다 뭐가 부족해? 왜 자꾸 날 거절하는 거야?”나:
그녀를 사랑할 기회...그녀의 삶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사랑이었다. 나는 평생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확실히 난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감정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네. 며칠 뒤에 F 국으로 갈게요.”운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나는 아이들을 볼 기력이 없어서 연 씨 저택 근처에 예전에 미리 사둔 별장으로 갔다. 이곳에 내 집이 있는 것을 보고 석지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는 나를 놀리듯 말했다.“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더니.”연 씨 별장을 제외하고 운성에 내 집은 마침 세 채가 있었다.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럼 여기서 살 거예요 말거예요?”내 말투에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버릇없다고 잔소리하려는 것 같아서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며 먼저 말했다.“나 피곤하고 배도 고파요. 오빠 뭐 먹고 싶어요?”내가 먼저 약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까 나의 무례함은 넘어가 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먹고 싶어?”나는 웃으며 말했다.“오빠를 먹고 싶어요.”석지훈: “...”그는 침묵으로 답했다.석지훈은 눈치가 빨랐다. 별장에 오자마자 그는 양복을 벗어 놓고는 주방으로 향했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흰 잠옷으로 갈아입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분주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채소를 준비하고 있었고 냄비에는 죽이 끓고 있었다.주방 입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석지훈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작은 냄비에 데운 후 컵에 따라 건네주었다. 컵을 쥔 내 손은 마치 그의 마음처럼 따뜻했다.석지훈은 항상 아무 불평 없이 나를 위해 요리하고 말없이 나를 예뻐했다. 정말 완벽한 남자였다.과거의 그 전남편과는 완전히 달랐다.이번 생에 그를 만난 건 정말 다행이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사랑해요. 지훈 씨.”뜬금없는 내 고백에 석지훈은 늘 그렇듯 침착한 모습으로 나지막이 응수하고는 온화한 눈빛으로 말했다.“알고 있어
담현아: [...]유진도 놀라며 말했다.[이게 내가 알던 둘째 형이야? 이런 모습 진짜 멋있다. 천상 남자잖아!]유진의 아부는 정말 대단했다.그러고 나서 한마디 덧붙였다.[민수야, 정신 차려. 너 마누라 없잖아. 평소에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할 여자조차 없으면서.]한민수: [...]사진 속 석지훈은 흰 셔츠를 입고 옆으로 서 있었다. 날카로운 옆모습은 은은한 불빛에 더욱 잘생기고 온화해 보였다.모두가 처음 보는 석지훈의 모습이었다.나는 웃으며 답장했다.[민수 씨에게도 아내가 생길 거예요. 시간문제죠. 시간이 되면 예쁜 여자를 소개해 줄게요.]한민수는 지난 2년 동안 담현아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하지만 담현아의 마음은...담현아는 고정재에게 더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그때 유진이 담현아에게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현아 씨도 이제 성인인데 남자 친구 언제 사귀어서 보여줄 거예요?]그러자 담현아가 느긋하게 대답했다.[저 결혼했어요.]유진: [...]원태웅: [...]한민수: [...]나: [...]잠수 중인 담유미: [...]원태웅이 먼저 물었다.[누구랑?]담현아: [엄청 부드러운 남자랑요.]엄청 부드러운 남자...내 머릿속엔 고정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한민수: [...]유진이 캐물었다.[언제요?]담현아:[며칠 전, 아일랜드에서요.]원태웅: [아일랜드에서 결혼하면 이혼할 수 없지만 계약 기간이 있다고 들었는데, 몇 년 계약했어?]담현아: [100년이요.]단톡방 모든 사람들: [...]한민수는 더 이상 단톡방에서 말하지 않았다.아마 많이 상심했을 것이다.잠시 후 그가 나에게 개인톡을 보냈다.[현아가 누구랑 결혼했어요?]나는 잘 알지 못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정재밖에 없었다.나는 생각 끝에 말했다.[현아가 말하지 않았지만 정재 씨라고 생각해요. 현아는 그에게 마음이 있었으니까요.]한민수: [...]나는 그의 마음이 아플 것을 알고 위로하며 말했다.[속상해 말아요. 더 좋은 여자를 만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주는 느낌이 좋아요. 앞으로도 잘 모를 수 있지만, 노력해서 배울 거고 그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이것이 담현아의 대답이었다.나는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행복하길 바랄게. 난 너랑 희연이 그리고 다은이가 행복한 게 제일 보고 싶어.]송이연과 새언니도 있었지만 담현아는 그들을 몰랐기에 말하지 않았다.담현아가 답했다.[네. 언니도 행복하세요.]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지훈이 밥 먹으라고 불렀다. 내가 식탁으로 가서 앉자 그는 내 앞에 맑은 죽 한 그릇과 담백한 채소 두 접시를 놓았다.“배에 상처가 있어서 담백한 음식만 먹어야 해. 상처가 아물면 다른 요리도 해 줄게.”석지훈의 이런 세심한 배려가 참 좋았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응. 먹어.”석지훈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우아한 자세로 식사를 했고 곧 아무렇지 않게 밥 두 그릇을 비우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식사를 마치고 주방을 정리한 후 보니 그는 샤워를 마치고 2층 계단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농담처럼 물었다.“제가 그렇게 좋으세요?”그랬더니 석지훈이 두 글자를 던졌다.“자뻑.”나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보기 싫어요?”나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달콤한 말로 말했다.“나는 오빠를 보는 게 좋아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거든요.”“그래, 마음껏 봐.”그가 너그럽게 말했다.대박. 이런 석지훈은 정말 매력적이었다.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피곤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드물게 제안했다.“같이 산책 나갔다가 자자.”시간이 꽤 늦었는데도 석지훈은 여유롭게 산책을 제안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석지훈은 내 손을 잡고 저택을 나섰다. 우리는 뒤 정원으로 갔다. 따뜻한 봄날이어서 정원의 살구꽃은 나무 가득 피어 있었고 매화는 거의 다 져 가고 있었으며 복숭아꽃은 봉오리를 맺고
작위는 하나인데 아이는 둘이었다. 내 마음으로는 누구에게 줘도 상관없지만 아이들은 결국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감정을 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나중에 애들이 서로 사이가 멀어지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나는 연태훈에게 말했다.“신중하게 생각해 볼게요.”이 일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했다.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가서 석윤아를 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몹시 칭얼거렸지만 반대로 석윤민은 매우 조용했다.석윤아의 성격은 나를 닮았고 석윤민은 석지훈을 더 많이 닮았다.김은정은 웃으며 말했다.“윤아는 안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바닥에 두세 시간 내려놓아도 떼쓰지 않고 혼자 바닥에서 기어 다니면서 잘 놀아! 근데 윤민이는 달라. 조용하고 잘 웃지는 않지만 윤아랑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해.”“네. 윤민이는 아빠를 닮았어요.”내가 말했다.“남자아이는 보통 아빠를 닮고 여자아이는 엄마를 닮지. 근데 윤민이는 너무 조용해서 좀 걱정이 되는구나. 밝지가 않아서.”나는 석지훈이 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조용한 아이가 키우기 더 편해요. 그리고 윤민이는 아직 말을 못 하잖아요. 조금 더 크면 윤아보다 더 애먹일지도 몰라요.”김은정도 맞장구쳤다.“나는 윤민이가 좀 애를 먹였으면 좋겠어.”“그럴 거예요. 애들은 가만히 못 있으니까.”나는 연 씨 저택에서 아이들과 두 시간 정도 놀아주다가 강해온이 석씨 가문에서 처리해야 할 서류를 가져오는 바람에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에게 물었고 그는 모두 상세하게 답해주었다.나는 서류 처리를 마치고 그에게 건네주며 동성에 사람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운성 지사에 있을 생각 있는지도 물어봤다.그는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대표님의 곁에 있으면 일하기 편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네. 그럼 우선 그렇게 결정하죠.”강해온이 가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저택을 지키고 있던 현정우에게 배고프냐고 물었다. 그
최욱현은 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굳이 그의 화를 돋워서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리며 들어갔다. 석지훈은 그런 나를 보더니 다정하게 말했다.“네가 고양이야? 근데 누구야? 무슨 일 있어?”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욱현이에요. 윤민이를 운성시까지 데려다줬어요.”최욱현을 언급하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욱현 씨가 너를 가족처럼 여기는 것 같아. 그러니까 평소에 너무 멀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항상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성격이다 보니 멀리할수록 오히려 네가 더 위험할 수 있어.”나는 놀라서 물었다.“예전에는 욱현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요.”그는 몸을 느긋하게 소파에 기댄 채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윤승민은 눈치채고 얼른 경호원들과 함께 떠났다. “어쨌든 위험한 사람은 맞아. 성격이 변덕스럽고 결과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잖아. 예전에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던 건 너한테 이토록 집착할 줄 몰랐기 때문이야. 근데 이제는... 너의 어머니랑 가까운 사람이잖아. 만약 네 어머니가 떠나면 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너를 유일한 가족으로 여기겠지.”나는 몸을 곧게 펴고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 내다보았다. 귓가에 석지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윤아야,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마주하는 게 나아.”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건 오직 빛나는 별들뿐이었다. “알겠어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최욱현은 가족을 원했다. 나는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석지훈은 나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뭐가 보여?”“별이요. 하늘에 별이 가득해요.”별들은 까만 밤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그는 다시 물었다.“핀란드와 비교하면 어때?”핀란드는 석지훈이 유일하게 고향으로 여기는 곳이다.하지만 그는 나와 함께 운성시에 정착했다.“다 아름다워요.”“응, 핀란드는 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어. 시간 되면 F국으로 뵈러가자.”“네, 그래요.”나는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다.밤은 점점 깊어졌고 아이스랜드의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오늘은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요?”“별일 없으면 무조건 볼 수 있을 거야.”캠핑카 옆에는 흰색 천문 망원경이 준비되어 있었고 소파도 하나 놓여 있었다. 대개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크기였고 위에는 하얀 담요가 놓여 있었다. 나는 포근해 보이는 모습에 얼른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윤 비서님이 준비한 거예요?”뒤에 서 있던 윤승민이 웃으며 말했다.“아가씨가 추울까 봐 준비해 뒀어요.”“참 배려 깊으신 분이네요.”나는 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그는 윤승민에게서 새 양말 한 켤레를 건네받아 나한테 신겨줬다. 갑자기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윤아야, 아직도 추워?”이토록 세심하게 챙겨주는데 추울 리가.“감사해요, 둘째 오빠.”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별것도 아닌 걸 뭐.”뭔가 말하려던 찰나, 최욱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석지훈의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나는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옆으로 걸어갔다. 전화를 받자 최욱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아이는 비서한테 보냈어. 넌 언제 돌아올 거야?”“며칠 더 있다가.”“그럼 운성시에서 기다릴게.”나는 반문했다.“날 기다려서 뭐 해?”“얼굴 한 번 보고 가려고.”나는 별로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아 단번에 거절했다.“어머니가 기다릴 거야.”그는 내 말 뜻을 알아차리고는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날 만나고 싶지 않은 거야?”“아니야, 그냥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그는 또 내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운성시.여기는 연수아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다. 그래서 최욱현은 이곳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비록 연수아는 그를 오빠로 인정하
“네 인생.”내 인생에 감회가 있을 게 뭐가 있지?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내 어깨를 문지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비록 넌 석씨 가문의 자녀로, 어릴 때부터 권력과 부를 누렸지만 사실 네 인생은 고난이 많았잖아. 어쩌면 세상의 모든 고통을 거의 다 겪은 것 같아. 세상은 너한테 잔인하면서도 자상하네.”세상이 잔인한 건 내가 고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고 세상이 자상한 건 내가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세상에 완벽한 건 없었다.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하지만 나는 이제 지난 과거를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만이다.“괜찮아요, 원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에요. 난 지금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에요. 특히 우리 아이들이 결혼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어요. 가끔은 윤민이가 오빠 성격을 닮지 않을까 싶어요. 오빠를 닮길 바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그는 목구멍 깊숙이에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응?”그의 쌀쌀한 성격 탓에 만약 석윤민이 그를 닮는다면 여자 친구가 고생을 많이 할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마음을 얻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나 역시 석지훈의 마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나는 대충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내가 말을 꺼내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너한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어.”1년 전, 우리는 캠핑하러 나웨이에 갔다. 천문 망원경까지 샀었다. 그때 오로라를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하지만 그날 밤, 우리는 결국 오로라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때 조금 실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렸다. 그러나 석지훈은 그 일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이스랜드에 있었고 4월은 오로라를 보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차는 북쪽을 향해 계속 달렸다. 길은 멀었고 나는 몸이 나른해져서 그의 품에 기댄
윤승민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석지훈의 비서로서 분명히 알 텐데 나한테 숨기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내 호기심은 더 커졌다.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윤승민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비록 급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궁금한 마음에 계속해서 그를 귀찮게 했다.“대체 어디로 가는 건데요?”그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안 알려주면 지훈 씨한테 이를 거예요.”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말하면 더 빨리 죽겠어요. 제가 대표님의 행방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나는 그가 그렇게 충실할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만 포기하기로 했다. 문을 나서는 순간 최욱현이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윤민이는 잘 돌아갔어?”“응, 어머니가 윤민이랑 헤어지기 아쉬워하셔서 며칠 더 있다가 왔어. 근데 어머니도 윤민이를 곁에 계속 두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은지 얼른 나한테 데려가라고 재촉하더라. 방금 운성시에 도착했어. 넌 어디야? 찾으러 갈게.”“나 지금 아이스랜드야. 윤민이는 우리 엄마, 아빠한테 보내줘.”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네 엄마, 아빠라니?”“응, 양 부모님.”그때 나는 오두막과 가까운 도로에 고급 세단 한 대가 멈춰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뒤에는 작은 승용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그들은 모두 석지훈의 경호원들이었다.차 문이 열려 있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기다란 다리가 시선을 끌었다.심지어 나를 안은 채 그 기다란 다리로 걸어가는 모습조차 상상할 수 있었다.전화 너머로 최욱현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부모님이라니?”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왜?”그는 거침없이 말했다.“네 엄마는 우리 어머니 한 명뿐이야.”“...”나는 그가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쓸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이내 대화를 돌렸다.“나 지금 국내에 없으니까 아이는 내 비서한테 맡겨줘.”그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윤 비서는 약간 멍해 있는 나를 보
진유겸은 이런 상황에서도 최희연을 협박하고 있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이제 어떡해?”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유겸 씨는 항상 내 약점을 알고 있어. 내가 마음이 약하다는 것도, 하지만 더 이상 굴복하고 싶지 않아.”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게. 예전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려줘야지. 됐어, 우리는 밥 먹으러 가자.”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짱을 꼈다. 그녀가 혼자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만약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왕자현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마음속에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었다.최희연은 내 어깨에 떨어진 눈송이를 털어내며 말했다.“저녁 먹고 자현 씨는 시내로 가야 해, 나도 따라가려고. 너랑 지훈 씨는 여기 남아서 쉬어. 내일 아침에 오두막으로 돌아갈 거니까 그때 구경시켜 줄게... 아니다, 지훈 씨가 있으니 나랑 놀기 어렵겠네.”“얼른 가. 우리 신경 쓰지 말고.”“나 빨리 갔으면 좋겠지?” 그녀가 말했다.“그럴 리 없잖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거실에서 두 남자는 체스를 두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누가 더 잘하세요?”왕자현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수아 씨도 체스를 둘 줄 아세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이거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아빠가 종종 삼촌이랑 체스를 두셨거든요. 그래서 곁에서 좀 봐왔어요.”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분은 약간 부족하시네요.”약간 부족하다는 건 왕자현보다는 체스 실력이 낮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석지훈은 바로 체스판을 밀어버렸다.왕자현은 다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화났어요?”나는 왕자현이 일부러 화를 돋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석지훈은 싸늘한 눈빛으로 왕자현을 쳐다보았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최희연은 분위기를 풀어주며 말했다.“얼른 밥 먹어요.”나는 배 불리
석지훈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여전히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아마도 내가 왕자현을 칭찬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그는 내가 왕자현의 외모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내가 늘 그의 미모에 유혹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차갑게 나를 보며 물었다.“왜?”나는 일부러 물었다.“나한테 화났어요?”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니.”또 아니란다.나는 다시 물었다.“혹시 질투하는 거예요?”그는 차갑게 말했다.“아니.”“내 마음속에는 오빠가 제일 잘생겼어요!”나는 발끝을 세워 석지훈의 턱에 입을 맞춘 후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내 마음속에선 오빠가 제일 멋있어요! 아무도 오빠랑 비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오빠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난 오빠를 좋아했을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건 오빠라는 사람이지 오빠의 외모가 아니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거짓말.”그가 이렇게 대답한다는 것은 화가 풀렸다는 의미였다.나는 다시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중심을 잃고 몸이 살짝 기울어지자 석지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왕자현의 저택의 따뜻한 방에서...최희연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온몸에 피로를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석지훈은 방을 나가 왕자현을 만나러 갔다.왕자현이 그에게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다.[석지훈, 거실에서 얘기 좀 해.]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자현 씨의 아내이니 조만간 그와 관계를 갖게 될 거야.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나 처녀막 수술을 하고 싶어.”나는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최희연이 먼저 말했다.“내가 이러는 건 뭔가를 숨기려는 게 아니야. 그는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도, 내가 낙태를 했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두 남자를 만났다는 것도
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놓아주고 침대 옆에 가서 앉았다. 다리 한쪽을 의자에 올리고 팔꿈치를 무릎에 괴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건들거렸다.게다가 검은 코트 차림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그가 화가 났고 내가 달래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니면 내가 그에게 사과해야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오히려 그를 놀리고 싶었다.나는 그의 옆에 가서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갔다. 방은 매우 따뜻했다. 바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방안은 봄처럼 따스했다. 나는 조용히 패딩을 벗었다.안에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나는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석지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정말 잘생겼어?”석지훈은 아직도 그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잘생기지 않았어요? 왕자현 씨는 분위기가 끝내주잖아요. 정말 멋있어 보이던데!”석지훈: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발목을 잡고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내 입술에 키스했다.“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밖에 나갔다 온다고? 이건 너무하잖아!’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오빠.”그는 곁눈질로 나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흘끗 보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나: “...”그는 고의로 나를 벌주는 것이었다석지훈은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서 복수까지 하는 것이었다.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그가 언제 방으로 돌아올지 생각했다.하지만 문 앞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실망감이 점점 커져서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석지훈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그가 왕자현의 거실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거실에는 값비싸 보이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었다.왕자현도 거기에 있었고 차를 끓이고 있었다.내가 들어가자 두 남자는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은 미간을 찌
“희연아, 남편 정말 잘 얻었네!”최희연은 농담처럼 물었다.“부럽지?”나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얀 도포를 입은 절세 미남이라, 정말 너무 완벽해.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이잖아. 쯧, 진짜 부럽다!”“칭찬도 잘한다!”내가 왕자현을 이렇게 칭찬한 건 최희연이 그에게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였다. 왕자현은 그녀가 기댈 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리고 왕자현은 이런 칭찬을 받을 만했다.내가 통나무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왕자현은 연주를 멈추고 나를 보며 웃었다.“연수아 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저를 아세요?”“네. 희연이 절친이잖아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일어서더니 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내 옆을 보고 웃었다.“석 대표님도 와 계시는데.”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문 옆 복도에서 석지훈이 두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위치는 마침 왕자현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마침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게다가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이 어두워 보였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훈 씨, 왔어요.”그는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가 나를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왕자현과 최희연의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왕자현이 말했다.“연수아 씨, 희연이가 그러는데 두 분 여기서 며칠 묵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방금 손님방을 하나 정리해 두었어요. 뒤편에 있으니 사람을 시켜 안내해 드리죠.”왕자현은 사람을 시켜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석지훈은 앞서 걸었고 나는 1미터쯤 뒤에서 따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에게 거칠게 밀쳐져 문틀에 부딪혔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나는 당황하며 물었다.“왜 그래요?”석지훈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내가 그에게
석지훈이 떠나고 30분쯤 지났을까,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최희연이 온천 회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내 몸에 남은 흔적을 보고는 일부러 놀리듯 물었다.“방금 온천 옆에서 남자 바지랑 셔츠를 봤는데 어떤 차가운 남자 옷 같더라! 쯧쯧, 내가 눈치 없이 온 거 아니야?”나는 일어나 최희연이 보는 앞에서 옷을 입으며 되받아쳤다.“너랑 왕자현 씨는...”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최희연은 황급히 말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 나랑 자현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런 쪽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고 포옹이나 손잡는 것도 한 번도 없었어. 그는 항상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그리고 내 얼굴은... 어쨌든 그는 석지훈과 달라!”나는 웃으며 물었다.“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다 네가 말한 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지훈 씨를 그 사람이랑 비교하는 건데? 솔직히 말해 봐. 만약 그가 너를 원한다면, 넌 그에게 응할 거야?”내 질문을 들은 최희연은 잠시 멍해졌다.“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그가 원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이고 나는 왕씨 가문의 하나뿐인 안주인이니까.”나는 그녀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일부러 물었다.“희연아, 너에게 그는 그저 이용 가치가 있는 관계일 뿐이야?”최희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래. 이용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겠지!”나는 호기심에 다시 물었다.“무슨 은혜?”“내가 예전에 그를 구해준 적이 있어. 그가 운 좋게 나에게 구출된 게 아니라 내가 운 좋게 그를 구해준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그는 내 삶에 나타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됐지만 난 왠지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믿어. 세상에서 날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이야. 이런 믿음은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인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