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인이었고 석지훈을 만나기 전 3년간의 결혼 생활을 경험했기에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그는 나를 안아 주며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고 내가 그의 품에서 무슨 말을 하든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속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뭔가 비밀을 알아낸 것 같았던 것이다.국내에 도착하여 시차에 적응하고 나니 정오였다. 나와 석지훈은 몇 시간 더 차를 타고 운산 별장에 도착했다. 그때 석만호와 낯선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두 아이는 바닥을 기어 다니며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이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아직 아기였기에 나는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왠지 모를 떨림이 느껴져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석지훈은 내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안아 봐.”석지훈은 손을 뻗어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가 다가가자 석만호가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일어나 공손하게 불렀다.“가주님.”눈치 빠른 그 아주머니는 재빨리 아이 하나를 안아 나에게 건네주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이렇게 안아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도련님이 불편해하실 거예요.”아주머니가 안고 있던 아이는 석윤민이었다.내 아들.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안았다. 그를 품에 안는 순간 마음속에 따스함이 가득 차올랐고 문득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그에게 주고 싶었고 그가 이 세상에서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기를 바랐다.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오빠.”내 뒤에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어?”“나 윤민이 너무 사랑해요.”사랑한다.아주아주 많이.물론 석윤아도 사랑했다.난 내 두 아이를 모두 사랑했다.그들은 내 생명의 연장선이었다.석지훈은 내 어깨를 감싸 안아 나에게 힘을 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
“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현성 씨.”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 씨.”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왜?”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나는 꿈을 꾸었다. 그곳은 연씨 가문 별장이었고 집에 부모님과 고현성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23살 생일 파티를 어떻게 할까 상의하고 있었다.내가 소파 옆에 서 있는데 고현성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빨간색 좋아하니까 빨간 장미꽃을 세팅하는 건 어때요? 제가 피아노도 직접 연주할게요.”고현성의 표정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에게 비추면서 더욱 멋있어 보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미간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그를 뚫고 허공에 머물렀다. 당황한 내가 계속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가 목놓아 울부짖던 그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병실에 누워있었고 낮에 입었던 밝은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옆에는 싸늘한 표정의 고현성이 서 있었다.꿈속에서 다정했던 고현성을 봤던 탓인지 차가운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눈을 감았다.“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고현성은 시선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고승철이 갑자기 병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고현성을 째려보면서 화를 냈다.“방금 넘어져서 얼굴이 피범벅이 됐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병원에 와서 이런 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수아야, 너 평소에 현성이를 너무 풀어줬어. 남편을 잘 단속했어야지.”‘남편이라... 방금 이혼하자고 했는데.’나는 고현성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고 아버지의 얘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승철에게 말했다.“아버님, 우리 이혼했어요.”그 소리에 고현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고승철도 놀란 눈치였다. 다행히 내가 낮에 귀띔이라도 한 덕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낮에 그 얘기를 꺼내더니 벌써 이렇게 빨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빠른가요? 현성 씨는 3년 전에 이미 이혼하고 싶어 했어요. 지금까지 끌어도 아무도 득을 본 사람이 없고요. 아 참, 전 사업 머리가 없어서 선양 그룹이
나는 성인이었고 석지훈을 만나기 전 3년간의 결혼 생활을 경험했기에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그는 나를 안아 주며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고 내가 그의 품에서 무슨 말을 하든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속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뭔가 비밀을 알아낸 것 같았던 것이다.국내에 도착하여 시차에 적응하고 나니 정오였다. 나와 석지훈은 몇 시간 더 차를 타고 운산 별장에 도착했다. 그때 석만호와 낯선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두 아이는 바닥을 기어 다니며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이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아직 아기였기에 나는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왠지 모를 떨림이 느껴져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석지훈은 내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안아 봐.”석지훈은 손을 뻗어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가 다가가자 석만호가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일어나 공손하게 불렀다.“가주님.”눈치 빠른 그 아주머니는 재빨리 아이 하나를 안아 나에게 건네주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이렇게 안아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도련님이 불편해하실 거예요.”아주머니가 안고 있던 아이는 석윤민이었다.내 아들.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안았다. 그를 품에 안는 순간 마음속에 따스함이 가득 차올랐고 문득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그에게 주고 싶었고 그가 이 세상에서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기를 바랐다.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오빠.”내 뒤에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어?”“나 윤민이 너무 사랑해요.”사랑한다.아주아주 많이.물론 석윤아도 사랑했다.난 내 두 아이를 모두 사랑했다.그들은 내 생명의 연장선이었다.석지훈은 내 어깨를 감싸 안아 나에게 힘을 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
의외로 그는 나를 꺼리지 않았다...게다가 차 안에는 현정우와 운전기사도 있었다.그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생각해 보니 그가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키스한 것은 처음이었다.석지훈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놀리듯 말했다.“나는 윤아의 얼굴이 성벽처럼 두꺼워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줄 알았잖아.”나: “...”조금 전의 역겨운 일은 잊어버렸고 마음속에는 오로지 석지훈뿐이었다.나중에야 나는 석지훈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나를 조금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했던 것이다.그리고 그의 방식이란...그는 내가 자기 얼굴에 환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석지훈은 언제부터 자기 매력을 무기로 쓰는 걸 배운 거지?...우린 헬기 대신 전용기를 타고 F 국을 떠났다. 넓은 기내에는 나와 석지훈 단둘이 있었다.그리고 작지 않은 침대 하나가 있었다.침대는 매우 호화로웠고 그 위에는 비단 이불이 깔려 있었다.나는 비행기에 탑승한 후 입을 헹구고 석지훈의 품에 안겨 창밖의 야경을 감상했다. 특별히 볼 것은 없었지만 뭔가 기분 좋았다. 아마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내 곁에 있으면 나는 행복했다.석지훈은 내 귀밑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그의 질문을 들었다.“이게 뭐지?”나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는 부드럽게 물었다.“다쳤어?”나는 거짓말했다.“작은 상처예요.”나는 그에게 내 병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다.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듯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 묻고 거짓말했다.“실수로 다친 거예요. 자꾸 묻지 마세요. 오빠도 자주 다치잖아요? 그나저나 오빠 상처는 다 나았나요?”내가 화제를 돌리자 석지훈은 더 이상 캐묻지 않
엄마는 결국 목숨을 건지셨다. 최욱현은 일어서서 내 옆으로 와 노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또 장례식 치러줘야 하잖아.”그의 웃음은 차가웠고 소름 끼쳤다.나는 그에게 말했다.“어쨌든 네 친척이고 너도 어릴 때부터 이 사람의 보호 아래 자랐잖아. 좀 착하게 굴어.”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수아 넌 내가 착하지 않다고 생각해?”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적어도 난 그렇다고 생각해.”내 가방 속 휴대폰은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전화 너머에 석지훈이 있었기에 나는 최욱현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그는 변태적이고 잔인하지만 나를 해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어머니뿐이었다.그는 어머니를 제외하고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내 신장을 보관해두었다고 했다.하지만 그런 마음은 역겹고 두려웠다.내 말을 듣고 최욱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야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난 착한 사람이야. 근데 내 착한 면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수아야, 언젠가 네가 날 이해하는 날이 오면 좋겠어. 그럼 넌 날 이해하게 될 거야.”그를 이해한다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의 엄마에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방금 왜 거짓말 했어? 엄마가...”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네가 어머니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잃었다가 되찾는 기쁨을 느끼기를 바랐어. 수아야, 어머니는 널 사랑해. 진짜 많이. 그걸 꼭 알았으면 좋겠어.”나는 차갑게 말했다.“네가 말 안 해도 알아.”그때 집사 같은 사람이 와서 보고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욱현은 눈을 들어 말했다.“석지훈이 도착했어.”웬일로 그는 나에게 숨기지 않았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최욱현이 나를 내쫓는 소리가 들렸다.“가 봐.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 하면 내가 다시 연락할게.”내가 물었다.“나 엄마 옆에 있으면 안 돼?”“수아야, 어머니는 네가 슬퍼
편지를 읽고 나니 나는 이미 눈물범벅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네가 내 딸이라는 것 외에는 우리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모르겠구나.”사실 그 말은 나에게 일부러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그녀는 나와 친해져서 서로 얽히는 걸 싫어했다. 이 세상을 떠난 후 내가 슬퍼할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나를 멀리하셨고 조금 전까지도 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셨다.나는 엄마의 깊은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나는 급히 아까 방으로 돌아갔다.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한 그 노인에게 나는 영어로 물었다.“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아세요? 아시면 제가 지금 당장 모시고 나갈게요!”나는 엄마를 만나러 가야 했다.지금 당장.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어로 대답했다.“알아요.”나는 썩은 냄새를 참으면서 휠체어를 밀고 그를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포르말린에 담긴 10년 전에 망가졌어야 할 내 신장 두 개는 쳐다보지 않았다.최욱현은 정말 변태였다.노인의 정신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영어로 나를 재촉했다.“아가씨, 빨리 나를 데리고 나가 주세요. 난 그녀를 만나고 싶어요... 내가 제때 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 그녀를 잃을까 봐...”그는 아마도 나의 엄마를 말하는 것 같았다.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욱현이는 당신이 예전에 우리 엄마를 항상 때렸다고 했는데 지금 엄마를 잃을까 봐 두렵다고 할 자격 있어요?”그는 놀라며 물었다.“아가씨가 그녀의 딸이라고?”“네, 저는 그녀의 딸입니다.”이번 생에 하나뿐인 그녀의 딸이었다.노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나는 그녀가 내 후계자를 낳아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항상 거절했어요. 나는 당시 젊어서 화를 참지 못했죠! 게다가 부부 사이에 다툼은 흔한 일이 아니겠어요? 나는 당신 어머니를 때린 적이 있지만 당신 어머니는 자
수아에게 쓴 편지였고 편지를 쓴 사람은 안혜인이었다.이것은 나의 친어머니가 나에게 쓴 편지였다.그러나 봉투는 매우 낡았다.마치 오래전에 쓰여진 것처럼.나는 침대 곁에 앉아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사랑하는 수아야, 안녕.네가 태어난 지 9일째 되는 날이구나.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자 절망 속에서 본 유일한 빛이란다.사랑한다, 아주 아주 많이.네 아빠보다 훨씬 많이 사랑해.하지만 나는 직접 너를 키울 수 없구나.미안하다, 널 네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만 해서.수아야, 나는 네 아버지를 운성에서 만났단다.비가 계속 오는 날이었지.처음 만났을 때, 네 아빠는 엄청 차갑고 말도 없었어. 나한테 말도 잘 안 하고 맨날 빈정대고 무시했어. 그런데 다행히도 엄마가 엄청 쫓아다녔지. 안 그랬으면 아빠랑 인연도 없었을 거야.그랬을 거야...갑자기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네...수아야, 난 네 아빠 진짜 많이 사랑했어.진짜 진짜 많이.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엔 그이가 석씨 가문 사람인 줄도 몰랐고 너 갖기 전엔 아내랑 애가 있는 줄도 몰랐어.비록 나한테 최고로 잘해 주겠다고 했지만 난 자존심이 세서 다른 여자랑 아빠를 나눠 가질 수 없었어.수아야, 엄만 너무 슬퍼.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속임수를 당한 것 같고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모든 것이 한낱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았어...수아야, 엄마한텐 이제 너밖에 없단다.오직 너 하나뿐인데.너를 보내야만 하는구나.그건...너는 석씨 가문의 혈통이지만 상속받을 자격이 없단다. 너보다 위에 세 명의 오빠가 있기 때문이지. 근데 우린 그런 거 필요 없어. 내가 나중에 너한테 석씨 가문 못지않게 다 줄 테니까.엄마를 믿으렴. 내가 꼭 그렇게 해 줄게.하지만 엄마는 너를 F 국에 남겨두고 싶지 않구나.엄마가 성공하려면 주변에 위험한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거든.엄마는 네가 평안하게 자라기를 바랄 뿐이란다.그리고 석씨 가문은 네게 가장 좋은 안식처가 될 거야.그래서
최욱현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졌다. 나는 거부감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을 뜨고 말했다.“그 손으로 날 건드리지 마!”나는 그에게 명령했다.“당장 여기서 나가.”내가 돌아서서 가려는데, 그때 최욱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전화를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최욱현은 F 국어로 말했고 상대방의 대답도 F 국어였다.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최욱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는 나를 보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내 신념은 어머니였어. 내 목숨을 바쳐 어머니를 평생 지켜주는 거였다고. 그런데 수아야, 난 방금 어머니를 잃었어.”‘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우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 20분도 안 됐잖아. 어떻게 이렇게 빨리?!’나는 순간적으로 슬픔에 잠겼다.나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최욱현은 내 손목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두 번째 삶을 주셨지. 어머니는 나와 함께 있어 준 유일한 사람이거든.”말을 마친 최욱현은 황급히 달려갔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결국 나는 그를 쫓아갔지만 길을 잃고 말았다.그렇다, 나는 지하 통로에서 길을 잃었다.지하 통로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었다.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무리 걸어도 계속 통로 안이었으니까.나는 아까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10년 동안 포르말린에 담가 놓은 그 신장과 그 노인을 다시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절망에 빠졌다.그때야 비로소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나는 급히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장 먼저 석지훈이 떠올랐을 뿐, 현정우가 나와 가장 가깝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석지훈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윤아야?”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그는 부드럽게 물었다.“윤아야, 무슨 일이야?”“오빠, 나 지하에서 길을 잃었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욱현이가
부패하는 냄새에 속이 뒤틀렸다. 코를 막아도 메스꺼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욱현은 냄새가 좋으냐고 묻다니.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무슨 냄새야?”최욱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노인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며 계속 F 국어로 말했다. 나는 F 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최욱현에게 물었다.“이 사람, 네가 여기에 가둔 거야?”“어. 잘못을 저질렀거든.”최욱현의 말투는 담담했다.나는 다시 물었다.“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여기에 가둔 거야?”최욱현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흰 천을 벗겼다. 천 아래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신장처럼 보이는 모양의 물건이 담겨있었다.보기에도 역겨웠다.속이 뒤틀려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물었다.“내 물건이 있다고 했잖아. 뭐가 있는데?”최욱현은 나와 신장을 번갈아 봤다.나는 충격에 빠져 물었다.“설마...”“이건 너의 예전에 망가졌던 신장 두 개야. 내가 가져왔지. 이 일은 어머니도 몰라. 하지만 난 널 위해 계속 보관하고 있었어. 사실 훨씬 전부터 널 만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엄하게 감시했어. 내가 네 삶을 방해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거든.”어쩐지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했다.나는 결국 바닥에 토하고 말았다. 계속 토하는 나에게 최욱현은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많이 힘들어?”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너 정말 역겹다.”적출된 내 장기를 직접 보게 하다니...그 생각을 하니 더 심하게 토했다.한참을 토하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되었다. 최욱현은 내 옆에 서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점심에 먹었던 것을 다 토해내고 나니 담현아가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최욱현은 사람을 죽이는 방식이 잔인하다고 했다.그렇다면 그 부패한 냄새는...나는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그리고 급히 영어로 물었다.“영어 할 줄 아세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악마예요!”최욱현은 그가 말하
“괜찮아. 약으로 버티면 된대.”그녀가 말했다.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의 얼굴은 비록 창백했지만 꽤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 네 아버지와 약속했었어. 우리 둘이 다시 만나는 건 죽고 난 뒤라고. 이제 그가 나보다 먼저 떠났으니 지금의 나는 그저 그 뒤를 따르는 것뿐이야. 내 바램이기도 하지.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문득 운산 정상에 있는 그 비석이 떠올랐다.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있다.‘인연이 다시 이어질 때 부디 당신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를’그녀는 내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또한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그리고 내가 그 신장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다.마음 깊이 감춰져 있던 그녀의 사랑을 깨닫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그녀는 내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최욱현에게 말했다.“욱현아, 알랭이 곧 도착할 거야. 그와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먼저 수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구경 좀 하고 있어. 30분 후에 다시 오렴.”최욱현은 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말했다.“편찮은 걸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 결국 나 때문에... 나로 인해 시작되었고 결과도 내가 이렇게 만들었어. 다 내 잘못이야.”최욱현은 무심하게 물었다.“그게 전부야?”나는 촉촉해진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내 목숨은 그녀가 준 거야. 결국 나는 그녀에게 빚을 졌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넌 어머니가 목숨을 주셨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거야? 그럼 어머니가 원하는 건 단지 딸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나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무슨 말이야?”“넌 어머니의 딸이고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야. 예전에 나에게 신념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거 기억해?”“네 신념은 뭔데?”내가 물었다.그는 한때 신념이란 ‘목숨’이라고 했다.평생을 바쳐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그는 대답하지 않고 평소답지 않게 침묵했다.최욱현은 나를 데리고 엘
F 국의 초봄은 따뜻했다. 헬기에서 내리자 따스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외투를 벗었다. 최욱현은 내 뒤를 따라 내리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머니가 안에서 기다리셔.”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병원에 안 계시는 거야?”최욱현은 씩 웃으며 설명했다.“어머니는 개인 주치의가 있거든.”나는 일단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최욱현은 성 주변을 지키는 석씨 가문 사람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수아야, 뭘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는 핑계를 댔다.“얼마 전에 안 좋은 일을 당해서 크게 다쳤거든. 그래서 요즘 외출할 때 조심하는 거야. 너를 경계하는 건 아니야.”나는 최욱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거대한 성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성에 가정부가 없어?”최욱현은 내 옆에서 함께 걸으며 설명했다.“별로 없어. 어머니와 알랭, 두 사람만 살아.”나는 다시 물었다.“알랭?”“네 계부. 이 나라의 공작이셔.”공작은 귀족 중에서도 최고 등급이었으니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지위였다.그나마 엄마는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았다....성에 도착해서야 나는 ‘별로 없다’라고 말한 최욱현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넓은 거실에는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2층 복도에도 열 명이 넘는 가정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그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입고 있었는데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옷 같았다. 게다가 성 내부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나는 복도에 서 있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최욱현을 따라 F 국에 온 걸 후회하며 당장 여길 벗어나고 싶었다. 최욱현은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최욱현은 내 손을 잡고 긴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방은 50평 정도로 아주 넓었다.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