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위는 하나인데 아이는 둘이었다. 내 마음으로는 누구에게 줘도 상관없지만 아이들은 결국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감정을 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나중에 애들이 서로 사이가 멀어지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나는 연태훈에게 말했다.“신중하게 생각해 볼게요.”이 일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했다.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가서 석윤아를 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몹시 칭얼거렸지만 반대로 석윤민은 매우 조용했다.석윤아의 성격은 나를 닮았고 석윤민은 석지훈을 더 많이 닮았다.김은정은 웃으며 말했다.“윤아는 안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바닥에 두세 시간 내려놓아도 떼쓰지 않고 혼자 바닥에서 기어 다니면서 잘 놀아! 근데 윤민이는 달라. 조용하고 잘 웃지는 않지만 윤아랑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해.”“네. 윤민이는 아빠를 닮았어요.”내가 말했다.“남자아이는 보통 아빠를 닮고 여자아이는 엄마를 닮지. 근데 윤민이는 너무 조용해서 좀 걱정이 되는구나. 밝지가 않아서.”나는 석지훈이 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조용한 아이가 키우기 더 편해요. 그리고 윤민이는 아직 말을 못 하잖아요. 조금 더 크면 윤아보다 더 애먹일지도 몰라요.”김은정도 맞장구쳤다.“나는 윤민이가 좀 애를 먹였으면 좋겠어.”“그럴 거예요. 애들은 가만히 못 있으니까.”나는 연 씨 저택에서 아이들과 두 시간 정도 놀아주다가 강해온이 석씨 가문에서 처리해야 할 서류를 가져오는 바람에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에게 물었고 그는 모두 상세하게 답해주었다.나는 서류 처리를 마치고 그에게 건네주며 동성에 사람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운성 지사에 있을 생각 있는지도 물어봤다.그는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대표님의 곁에 있으면 일하기 편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네. 그럼 우선 그렇게 결정하죠.”강해온이 가자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저택을 지키고 있던 현정우에게 배고프냐고 물었다. 그
마침 내게 가장 부족하지 않은 것은 돈이었다.최희연에게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알리고 싶지 않아서 현정우에게 그녀와 함께 돌아다니라고 하고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카운터에는 아주 젊고 예쁜 아가씨가 고개를 숙이고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사장님 계세요?”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제가 사장인데요.”나는 정중하게 물었다.“이 가게를 저에게 양도해 주실래요? 제 친구가 가게를 열고 싶어 하는데,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거절할게요.”사장이 이렇게 차가울 수가 있나?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어떻게 해야 가능할까요?”“어떻게 해도 안 돼요.”그녀가 말했다.“돈 벌려고 가게 여는 거 아니었어요?”그러자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전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나: “...”말도 안 통하고 돈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나는 한숨을 쉬며 저도 모르게 말했다.“제 친구가 전에 여기서 카페를 했었는데 다시 하고 싶어 해서요. 친구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는데...”계산하던 사장의 손이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포도알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주 예쁜 눈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작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갑자기 기쁘게 물었다.“고양이 카페 말씀이세요? 주인 성이 최 씨였죠?”그녀의 갑작스러운 열정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네, 맞아요.”나는 대답했다.“좋아요, 양도해 드리죠.”그녀는 갑자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제가 당시 2억에 이 가게를 샀는데 그 가격에 사시고요. 내일 바로 가게 문 닫고 모레부터 인테리어 공사 시작하셔도 돼요. 다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나는 그녀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뀐 것에 놀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제 말 듣고 있어요?”“듣고 있어요.”내가 대답했다.“조건이 하나 있다고요.”나는 참을성 있게 물었다.“무슨 조건인가요?”“저는 고양이 카페에서 서빙을 하
예씨 성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나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두며 말했다.“그럼 내일 다시 올게요.”“네, 저는 계산 마저 할게요.”나는 밖으로 나와 현정우에게 문자를 보내 위치를 물었다.현정우가 답했다.[음악당.]나는 음악당으로 갔다. 현정우가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티켓을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최희연 씨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별로 말씀이 없으세요.”나는 티켓을 받으며 물었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네, 말이 없어요.”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음악당 안으로 들어가 최희연을 찾았다. 그녀는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 가서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최희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다 나았어. 근데 얼굴 흉터는... 의사들한테 물어봤는데 쉽게 없어지진 않을 것 같대. 흉터가 남을 것 같아. 일단은 이대로 두고 나중에 네가 더 좋은 성형외과 의사 소개해 줘.”그녀의 말투는 매우 담담했지만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를 보니 예전에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나와 최희연은 사랑 때문에 한번 또 한 번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웠다. 한때 나는 최희연이 진유겸을 만나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진유겸 그 남자는...자기 결혼식에 석지훈을 초대했다.그는 이미 최희연을 완전히 잊은 것이다.예전에는 최희연을 정말 사랑하는 것 같더니 어떻게 갑자기 이혼을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남자는 마음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 걸까?나는 마음속 슬픔을 감추고 안쓰럽게 말했다.“상처가 완전히 아물면 내가 예전에 다녔던 의사 소개해 줄게.”“어.”최희연은 짧게 대답했다. 마스크를 쓴 그녀의 눈은 차분하고 부드러워졌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죽음 같은 고요함이 있었다.나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지만 그녀가 다
담현아가 무섭다고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혼인 신고를 하자마자... 설마 결혼 공포증인가?“그럼 희연에게 연락해봐.”“네. 그럼 이따 봐요.”전화를 끊고 담현아는 나에게 위치를 보냈다.운성의 가장 큰 유흥가였다.담현아는 술을 마시지 못했지만 담이 아주 컸다.나는 어머니와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씀드리고 현정우와 함께 약속 장소로 갔다. 도착한 뒤, 나는 그에게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했고 그는 무슨 위험이 생기면 휴대폰의 경보 버튼을 누르라고 세심하게 당부했다.지난번 운성에서 사고가 있고 나서 함승윤은 기술팀에 내 휴대폰에 원터치 경보 시스템을 설치하도록 했다.하지만 그 후로는 사용할 일이 없었다.왜냐하면 나와 내 경호원들은 전원 크리스에게 포위되었기 때문이었다.그 후 함승윤은 내 보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서 내가 어디에 있든 감시하고 많은 사람을 배치해서 나를 지키도록 했다.핀란드 사건을 떠올리니 석지훈이 크리스 일당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했다. 설마 아직도 유럽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건 아니겠지?“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게요.”나는 차에서 내려 운성에서 가장 큰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 안은 사람들 소리와 음악 소리로 가득했고 젊은 남녀들이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2층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여기에 왔을 때 우연히 석지훈을 만났었다.그날은 석지훈의 친구들을 처음 본 날이기도 했다.그날 그의 표정은 멍하고 쓸쓸해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그때 석지훈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는 옛 생각을 그만두고 최희연과 담현아가 좋아하는 술을 몇 잔 주문했다. 종업원이 술을 막 가져다 놓았을 때 두 사람이 술집 입구에 나타났다.나는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여기야.”최희연은 긴팔 상의와 긴 바지에 마스크까지 쓴 아주 보수적인 차림이었다. 반면 담현아는 화려했다. 추운 것도 모르는지 봄에 입는 긴 원피스 하나만 걸
나는 저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고씨 가문 20주년 기념 파티에서 만났던 그 아가씨 같았다. 당시 나는 그녀의 몸을 발로 차기까지 했었는데.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이번엔 아예 담현아에게 뺨을 맞았다. 내가 놀란 것은 물론이고 그 아가씨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담현아를 바라보며 화를 꾹 참고 말했다.“왜 날 때려?”담현아는 손목을 풀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입을 함부로 놀리래? 최 참새? 네 꼴을 봐. 까투리 같은 주제에 어떻게 남을 욕해?”그 아가씨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담현아에게 말했다.“현아야, 까투리랑 뭘 그렇게 따져?”“못생긴 게 꼴값 떨잖아요.”담현아가 말했다.그 아가씨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창백했다가 파랗게 질렸다가 검게 변했다. 그때 2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이슬아, 아직도 아래에 있었어? 어머, 최희연 씨도 있었네? 위에 올라와서 놀래요?”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늘은 원수들만 만나는 날인가 보다.2층에서 부르는 사람은 솔이었다.일단은 솔이라고 부르겠다.이름을 다 알지 못하니까.그런데 그녀는 정말 대단했다. 최희연이 저렇게 온몸을 가리고 있는데도 알아봤기 때문이다. 마치 최희연과 아주 친한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나는 최희연과 친한데도 어제 가까이 가서야 알아봤는데 2층에서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지...아무래도 평소에 최희연을 많이 관찰한 모양이었다.솔이는 진유겸을 역겹다고 말했던 여자였다. 쿨하게 뒤돌아설 줄 알았던 그녀는 단순한 여우가 아니었다. 어쩌면 여우보다 더 높은 단계의 불여우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완벽한 연기는 나조차도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최희연에게 물었다.“갈래?”불여우의 수법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최희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관심 없어.”담현아는 눈치가 빨라서 이상한 낌새를 금방 알아챘다. 그
석지훈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고개도 들지 않았다.나는 갑자기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가서 뺨에 뽀뽀했다. 그는 재빨리 반응하며 나를 밀쳤고 나는 바닥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너무 창피했다. 석지훈은 그제야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차가웠고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어두웠다.나인 것을 알아보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다급한 모습에 나를 비웃던 사람들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한민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옆에서 말했다.“지훈은 여자가 가까이 오는 걸 싫어해요. 수아 씨가 누군지 몰랐으니까 그런 거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까이 가면 크게 혼나요.”담현아가 있었지만 그는 예전처럼 반갑게 그녀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마치 담현아를 자신의 세계에서 배제한 것 같았다.그럴 만도 했다. 담현아는 이제 고정재의 아내였고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100년짜리 혼인 신고를 했으니 한민수가 마음이 있어도 소용없었다.그의 마음은 분명 괴롭고 답답할 것이다.어린 여자를 2년이나 쫓아다녔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결국 다른 사람이 채가서 결혼까지 해버렸으니 말이다.사실 룸 안 분위기는 꽤 어색했다. 진유겸과 최희연 그리고 솔이, 한민수와 담현아, 나와 담유미까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처음부터 솔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담현아는 최희연을 데리고 한민수의 옆에 앉혔고 석지훈은 내 엉덩이를 계속 문질러 주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행동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오빠 눈빛이 나를 죽일 것 같았어요. 그리고 엉덩방아도 세게 찧어서 너무 아파요.”그가 방금 밀치는 바람에 배에 난 상처가 욱신거렸다.제발 상처가 터지지 않았기를.석지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너인 줄 몰랐어.”“그래
진유겸은 더 이상 말을 섞기 귀찮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솔이가 더 이상 최희연을 괴롭히지 않자 나도 조용히 있었다. 룸 안은 갑자기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때 예유진이 카드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마침 세 테이블을 채울 수 있는 인원이었다.예유진은 도박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지난번 모임도 그가 주최했었다.담현아, 솔이, 최희연 그리고 재벌가 아가씨가 한 테이블에 앉았고 석지훈, 예유진, 진유겸 그리고 한민수가 한 테이블을 차지했다. 나는 놀고 싶지 않아서 석지훈의 옆에 앉았고 담유미 역시 놀고 싶지 않아 예유진의 옆에 앉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테이블에서 카드놀이를 시작했다.담현아는 머리가 좋아서 패를 다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최희연이 같은 테이블이니 최희연이 괴롭힘을 당할 걱정은 아예 없었다.석지훈은 두 판을 치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네가 대신 좀 놀고 있어.”나는 테이블에 앉아 한민수에게 말했다.“좀 봐줘요.”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지훈이 돈인데 많이 잃어도 괜찮아요. 부자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는 거라고 생각하세요.”나는 거절했다.“지훈 씨 돈이면 내 돈이죠.”그 말을 들은 예유진은 나를 놀렸다.“형수님, 너무 쫀쫀한 거 아니에요?”예유진은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사람이었다.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나를 형수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말했다.“그럼 내가 나중에 몰래 패 좀 넘겨줄게요.”옆에 있던 한민수가 콧방귀를 뀌었다.“형수님 소리 한 번 들었다고 그렇게 좋아하다니. 내가 형수님이라고 몇 번 더 불러 주면 나 돈 따게 해 줄 거예요?”“민수 씨가 왜 나한테 형수님이라고 불러요?”그는 석지훈을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보였다.그가 원한다면 나야 좋았다. 나는 동의하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형수님이라고 몇
그중 가장 가난한 사람은 최희연이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니 돈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담현아도 그녀가 돈을 잃게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나는 계속 놀았고 계속 돈을 잃었다. 하지만 석지훈은 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는 이렇게 나에게 자리를 맡기고 가 버렸다.이때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재벌가 아가씨가 최희연을 비웃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얼굴 좀 보여 줘 봐.”나는 불쾌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재벌가 아가씨가 대답했다.“그냥 최희연 씨의 얼굴 좀 보고 싶은데 계속 가리고 있으니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잖아.”최희연은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고 재벌가 아가씨의 말을 듣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의 이 친구는 온갖 고난을 겪은 후 짧은 시간 안에 강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나는 웃으며 물었다.“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그때 담현아가 패를 탁 내려놓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도대체 놀 거야 말 거야? 돈도 없고 머리도 없는 재벌가 아가씨 주제에. 너랑 게임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아?”담현아의 말에 그 재벌가 아가씨는 자극을 받았는지 울먹거리며 솔이를 바라보았다.“솔이 언니, 내가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쟤네 다 날 괴롭혀요.”솔이는 나와 담현아를 번갈아 보고는 최희연을 지나쳐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진유겸은 차갑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놀 거면 놀고 안 놀 거면 빨리 꺼져.”솔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유겸아. 내 친구한테 왜 그래? 일부러 나랑 싸우자는 거지?!”이 세상에서 석지훈에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민영이었다면, 진유겸에게는 솔이가 있었다.하지만 솔이는 그럴 만도 했다.진유겸은 그녀의 약혼자였고 곧 결혼할 사이였으니까.그는 당연히 자기 여자 편을 들어줘야 했다.진유겸은 미간을 찌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