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씨 저택은 석씨 가문의 부패한 냄새로 가득했고 이 방에는 특히 석지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계속되는 불안한 마음에 결국 나는 얼마 눕지도 못하고 일어났다.휴대폰을 들고 정원 입구로 가보니 현정우가 계속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운성으로 돌아가요.”예전에 고현성이 있는 곳을 떠나고 싶어서 연 씨 가문을 동성으로 옮겼다. 비록 나중에 연 씨 가문은 동성에서 몰락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적어도 노력은 했으니까.그런데 이젠 석지훈을 떠나고 싶어서 다시 운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고 돌아, 나는 역시 운성의 습한 기후가 더 좋았다.현정우는 순순히 대답했다.“바로 준비하겠습니다.”현정우가 정원을 나섰다. 예전에 이렇게 큰 석 씨 저택에 왔을 때, 석지훈은 나에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 내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염려됐던 것이다.그럼에도 결국엔 이미연에게 당하고 말았다.하지만 이제는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석씨 가문 전체가 내 것이니까.나는 자갈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뒤에 경호원들이 따라오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을 부르면 되었다.게다가 길을 잃지도 않았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저택 입구에 도착했고 석지훈이 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저 멀리 하늘은 안개가 자욱했고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발밑의 눈도 아직 녹지 않았는데 말이다.몇 분 후 현정우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를 따라 석지훈을 지나쳐 차에 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내가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이번에는 정말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운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 나는 산꼭대기 별장으로 가지 않고 시내에 있는 내 아파트로 향했다.아파트는 매우 썰렁했다. 현정우는 차에 있던 책을 나에게 건네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나는 책을 들고 현관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책을 침대에 놓은 뒤, 욕조에 몸을
나는 바로 최희연 옆에 앉지 않고 그들 옆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그린 마운틴 커피를 주문했다.최희연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를 훑어보다가 새해 밤 고정재가 보낸 문자를 발견했다.[현아가 한민수를 따라 말도 없이 핀란드로 떠났어.]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를 따라 그 남자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고정재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을 것이다.나는 답장을 보냈다.[미안해요. 이제 봤어요.]나는 생각하다가 담현아에게 어디 있는지 카톡을 보냈지만 바로 답장은 없었다. 이때 최희연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나를 만난 건 유겸 씨한테서 떠나 달라고 하려는 거죠?”최희연의 맞은편 여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복고풍의 영국 스타일 체크 무늬 원피스는 그녀의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한눈에 봐도 예전에 내가 만났던 석나은처럼 명문가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나는 유겸이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는 어렸을 때 나중에 나랑 결혼할 거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약혼녀라고 소개하기도 했죠. 그때 나는 그 말을 믿었고 그를 따랐어요. 그 후 그는 귀국했고 나는 계속 해외에서 생활했죠. 그러다 그의 소식을 다시 들었을 땐, 이미 다른 여자가 있더군요. 물론 마음이 아팠지만 남자들은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잖아요.”최희연은 놀라서 되물었다.“그럼 내가 내연녀라는 거예요?”여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굳이 뭔가를 쟁취하려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유겸이가 그쪽을 좋아한다면 나는 기꺼이 물러날 거예요. 오해 말아요. 사실 내가 멀리 운성까지 온 건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에요. 제 목적은 따로 있어요.”최희연은 차분히 물었다.“그럼 목적이 뭔데요?”여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유겸이랑 잤어요?”최희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하지만
“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현성 씨.”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 씨.”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왜?”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나는 바로 최희연 옆에 앉지 않고 그들 옆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그린 마운틴 커피를 주문했다.최희연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를 훑어보다가 새해 밤 고정재가 보낸 문자를 발견했다.[현아가 한민수를 따라 말도 없이 핀란드로 떠났어.]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를 따라 그 남자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고정재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을 것이다.나는 답장을 보냈다.[미안해요. 이제 봤어요.]나는 생각하다가 담현아에게 어디 있는지 카톡을 보냈지만 바로 답장은 없었다. 이때 최희연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나를 만난 건 유겸 씨한테서 떠나 달라고 하려는 거죠?”최희연의 맞은편 여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복고풍의 영국 스타일 체크 무늬 원피스는 그녀의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한눈에 봐도 예전에 내가 만났던 석나은처럼 명문가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나는 유겸이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는 어렸을 때 나중에 나랑 결혼할 거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약혼녀라고 소개하기도 했죠. 그때 나는 그 말을 믿었고 그를 따랐어요. 그 후 그는 귀국했고 나는 계속 해외에서 생활했죠. 그러다 그의 소식을 다시 들었을 땐, 이미 다른 여자가 있더군요. 물론 마음이 아팠지만 남자들은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잖아요.”최희연은 놀라서 되물었다.“그럼 내가 내연녀라는 거예요?”여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굳이 뭔가를 쟁취하려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유겸이가 그쪽을 좋아한다면 나는 기꺼이 물러날 거예요. 오해 말아요. 사실 내가 멀리 운성까지 온 건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에요. 제 목적은 따로 있어요.”최희연은 차분히 물었다.“그럼 목적이 뭔데요?”여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유겸이랑 잤어요?”최희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하지만
석 씨 저택은 석씨 가문의 부패한 냄새로 가득했고 이 방에는 특히 석지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계속되는 불안한 마음에 결국 나는 얼마 눕지도 못하고 일어났다.휴대폰을 들고 정원 입구로 가보니 현정우가 계속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운성으로 돌아가요.”예전에 고현성이 있는 곳을 떠나고 싶어서 연 씨 가문을 동성으로 옮겼다. 비록 나중에 연 씨 가문은 동성에서 몰락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적어도 노력은 했으니까.그런데 이젠 석지훈을 떠나고 싶어서 다시 운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고 돌아, 나는 역시 운성의 습한 기후가 더 좋았다.현정우는 순순히 대답했다.“바로 준비하겠습니다.”현정우가 정원을 나섰다. 예전에 이렇게 큰 석 씨 저택에 왔을 때, 석지훈은 나에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 내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염려됐던 것이다.그럼에도 결국엔 이미연에게 당하고 말았다.하지만 이제는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석씨 가문 전체가 내 것이니까.나는 자갈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뒤에 경호원들이 따라오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을 부르면 되었다.게다가 길을 잃지도 않았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저택 입구에 도착했고 석지훈이 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저 멀리 하늘은 안개가 자욱했고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발밑의 눈도 아직 녹지 않았는데 말이다.몇 분 후 현정우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를 따라 석지훈을 지나쳐 차에 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내가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이번에는 정말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운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 나는 산꼭대기 별장으로 가지 않고 시내에 있는 내 아파트로 향했다.아파트는 매우 썰렁했다. 현정우는 차에 있던 책을 나에게 건네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나는 책을 들고 현관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책을 침대에 놓은 뒤, 욕조에 몸을
한참 만에야 여기가 석씨 가문의 저택인 석지훈의 정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옷을 걸치고 문을 열자 남자의 훤칠한 등이 나를 향해 있었다.등을 보인 남자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고 검은색은 그의 고독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도망치는 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문턱을 나서며 그에게 물었다.“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마치 눈앞의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마음속의 답답함과 슬픔은 너무나도 뚜렷했다.그때 문득 머릿속에 한마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내 세상에서 혼란스럽지만 그는 그의 세상에서 바위처럼 굳건하다.바위처럼 굳건하다니...석지훈은 언제나 바위처럼 굳건했다.정원에는 가랑눈이 내리고 있었고 복도의 등불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의사가 요양이 필요하다고 해서 조용하고 경치 좋은 석 씨 저택으로 데려온 거야.”나는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모든 감정과 그에 대한 증오를 억누르고 가볍게 말했다.“아. 그럼 이젠 가셔도 돼요.”석지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만약 그날 내가...”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에게 줄 인내심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짜증스럽게 그의 말을 끊었다.“갈 거예요, 말 거예요?”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윤아야, 나를 원망해?”“지훈 씨,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요! 이 말 당신 입으로 직접 한 거잖아요. 난 그 말, 평생 못 잊어요!”석지훈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침묵했고 그 차가운 눈빛은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좀 쉬어.”석지훈이 떠나자 나는 온몸에 힘이 풀려 문틀을 잡고 간신히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잘못한 건 그였고 헤어지자고 한 것도 그였다.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석지
‘내가 천벌 받는 게 두려울까? 잘못은 내가 한 게 아니잖아. 그때 그 칼, 내가 스스로 찌른 것도 아니잖아?’나는 그 칼을 석지훈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막상 이 순간이 되니 두렵고 마음이 약해졌다.나는 그의 앞으로 가서 불렀다.“지훈 씨.”내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내 오빠가 아니었다.그는 너무 키가 커서 내가 올려다봐야 했다.석지훈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칼끝을 그의 배에 겨누었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하는 듯한 당당한 모습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괴롭혔다.“윤아야, 이 칼은 내가 받아 마땅해.”그 자신도 이 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에게 되갚아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게 하고 싶었다.내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 함승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몸이 먼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석지훈은 재빨리 나를 품에 안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석지훈이 동성을 떠나 핀란드로 간 후, 그는 나에게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내 문자에도 거의 답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내가 잘 자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땐 정말 행복했고 이 남자가 내 운명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한 달 전, 모든 환상이 깨졌다.나는 마치 넓은 바다의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얼음이 산산이 조각나 차가운 바닷속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차디찬 바다에 빠져 차가운 물에 휩싸여 숨 막혀 죽고 말았다.나는 힘없이 턱을 석지훈의 어깨에 기댔다. 함승윤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고 석지훈은 차갑게 물었다.“왜 이래?”나의 몸 상태에 대해 나는 함승윤에게 함구령을 내렸기에 그는 대충
한 달 만에 만난 석지훈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 차가웠고 그의 옆에는 무장한 크리스가 서 있었다.크리스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곧 내 주머니 속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받을 필요가 없었다.조소를 담아 크리스를 쏘아보자 그는 움찔하며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눈을 감고 물었다.“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죠?”“가주님, 대략 10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네.”대답을 마치고 나는 아래에서 벌어질 참혹한 상황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7, 8분쯤 흘렀을 때, 함승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끝났습니다! 가주님, 크리스를 생포했습니다.”“네. 석지훈은요?”내가 물었다.“석 대표님은 스스로 투항했습니다. 지금 저희 요원들이 그들을 끌어오는 중입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몇십 미터 정도 남았습니다.”함승윤은 시종일관 석지훈을 ‘석 대표님’이라고 불렀다.지금은 우리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석지훈에게 늘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송 어르신이라는 작자는 어디 있어요?”“아일랜드에는 없습니다.”눈을 떠보니 아무도 석지훈을 제압하지 않고 있었다. 현정우가 그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았다. 반면 크리스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이고 상처투성이였다.그들은 크리스를 마대 자루처럼 내 앞에 내던졌고 석지훈은 크리스 옆에 서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당연했다. 석지훈 이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나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나는 그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추스르고 크리스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뻔뻔스럽게 히죽거리며 말했다.“연수아 씨는 지훈의 여자이고 나는 지훈의 친구야. 결국 보면 다 같은 편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리고 그날 일은 내가...”나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아일랜드의 눈은 잠깐만 내렸고 기온은 영하 2도 정도로 크게 춥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몸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치게 쇠약해진 몸 상태 때문일 것이다.WT의 위치는 아일랜드 북쪽의 깊은 숲속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6시였다.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현정우는 차를 WT 기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다.나는 두꺼운 옷을 단단히 여미고 차에서 내렸다. 백미러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숨이 넘어갈 듯 창백했고 붉게 충혈된 눈은 생기가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내 창백한 얼굴과 대비되어 더더욱 비참해 보였다. 나는 눈 덮인 땅 위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옆을 돌아보니 석씨 가문의 수백 명이 무기를 들고 현정우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그들이 모두 내 곁을 지나간 뒤에야, 나는 조용히 옆에 있던 함승윤에게 물었다.“제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요?“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켜 복수를 한다는 것. 이 방법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싶었다.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함승윤은 차분하게 답했다.“희생은 원치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석씨 가문이 복수를 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전 세계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결단을 내리신 것은 옳은 선택입니다.“그의 말이 논리적임은 알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메시지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죽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에게 최소한의 정의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WT 기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현정우와 나머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은 내 바로 뒤에서 내 안전을 지키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5분 정도를 걸었을 때, 우리는 눈더미를 돌아 WT 기지
‘이걸 왜 인제서야 떠올린 거지? 나도 참 멍청해.’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원태웅에게 물었다.“태웅 오빠, 무슨 일이세요?”“수아야, 석지훈 말이야. 한 달째 실종됐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가 에르크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랑도 연락이 전혀 닿지 않아. 마치 모든 걸 버리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아.”나는 대략 석지훈이 아직 WT에 머물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하지만 원태웅의 말투로 보아 그는 내가 석지훈과 갈라섰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왜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이 사실을 내게 말하는 걸까? 그리고 왜 석지훈은 계속 WT에 머물러 있는 걸까?크리스가 말하길 WT는 그의 영역이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이 맞다고 믿었다.하지만 석지훈이 왜 원태웅과의 연락을 끊고 한 달이나 자취를 감춘 걸까?이건 그의 평소 행동과는 너무도 달랐다. 가슴 한구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와 나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왜 이제야 저한테 말해요?”그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전부터 계속 너한테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 됐잖아. 그뿐만 아니라 지훈이도 실종되고 너도 연락 두절이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며칠 전이라면...나는 그때 계속 의식이 없었다. 며칠 전 깨어났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핸드폰 기록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게다가 저장된 통화 기록만 해도 수백 개라 누구한테 전화가 왔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미안해요. 제가 그동안 핸드폰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요.”원태웅은 석지훈의 행방을 걱정하며 그의 소식을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저도 지훈 오빠와 연락하지 않았어요. 우리 둘은... 이미 헤어졌어요.”그는 충격을 받은 듯 물었다.“헤어졌다고?”“네, 지훈 오빠가 먼저 얘기했어요.”원태웅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지훈 오빠는 너랑 헤어질 리가 없다고!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수아야, 제발 오해하지 마.”나는
2년 전, 나는 고현성의 세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내가 깨어난 후, 최희연이 그가 얼마나 슬프고 절망했는지 과장되게 이야기해 줬다. 그녀는 그때 그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이후로 계속 그를 편들었다고 말했다.“이번에는 내가 알아.”그가 했던 이 말은 무겁고 낮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지금의 고현성은 나를 마주할 때마다 끝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과거 내가 그를 대할 때처럼.그 모습은 내 마음을 찌르고 흔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고현성을 보고 있기가 어려워 눈을 감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세요. 좀 쉬고 싶어요.”그는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갑자기 눈을 뜨며 날카롭게 외쳤다.“그러지 마세요!”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간절히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런 목소리로, 그런 태도로 저를 대하지 말아 주세요. 저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고현성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더니,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그 순간, 내가 너무 가혹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통증이 한참 가라앉고 나서야 나는 멍하니 링거 주사를 바라보다가 문밖에 있는 함승윤을 불렀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자 나는 물었다.“제 상태가 어떤가요?”그는 이미 내가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숨김없이 말했다.“가주님의 몸 상태는 현재로선 좋지 않습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의사는 뭐라고 하나요?”“병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약을 제때 먹고 치료를 잘 따라야 병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조용히 물었다.“얼마나 더 살 수 있나요?”병이 억제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 그건 의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진지하게 말했다.“이 일은 절대 외부로 새지 않게 하세요. 고현성 외에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책임을 물을 겁니다.”
안쪽에서 한 남자가 빛을 등지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속으로 애타게 외쳤다.“구해주세요, 현성 씨...”곧 고현성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나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 했고 나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속삭였다.“핸드폰...”고현성은 방으로 돌아가 내 핸드폰을 챙겨왔다. 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나는 간신히 힘을 내어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주님, 제가 석씨 가문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운성에는 석씨 가문이 인수한 병원이 있었고 이런 병원은 운성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 퍼져 있었다.“알겠어요.”내 대답을 들은 함승윤이 물었다.“현정우는요? 왜 가주님 곁에 없습니까?”나는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대답했다.“오늘 하루만 쉬라고 했어요.”함승윤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주님, 이런 결정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정우가 저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어요.”“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면 반대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산 아래에는 석씨 가문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잖아요. 저는 별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니 위험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함승윤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가주님,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은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처럼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실 겁니까? 가주님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절대 혼자 계셔선 안 됩니다.”그가 내 건강 상태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대답했다.“알겠어요. 병원 주소를 보내주세요.”전화를 끊은 뒤, 함승윤은 곧바로 병원 주소를 보내왔다.나는 핸드폰을 고현성에게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고 말았다.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누구세요?”이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야.”나는 무의식중에 물었다.“누구죠?”“수아야, 넌 한때 나를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야.”“제가 사랑했던 사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