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로 최희연 옆에 앉지 않고 그들 옆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그린 마운틴 커피를 주문했다.최희연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를 훑어보다가 새해 밤 고정재가 보낸 문자를 발견했다.[현아가 한민수를 따라 말도 없이 핀란드로 떠났어.]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를 따라 그 남자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고정재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을 것이다.나는 답장을 보냈다.[미안해요. 이제 봤어요.]나는 생각하다가 담현아에게 어디 있는지 카톡을 보냈지만 바로 답장은 없었다. 이때 최희연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나를 만난 건 유겸 씨한테서 떠나 달라고 하려는 거죠?”최희연의 맞은편 여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복고풍의 영국 스타일 체크 무늬 원피스는 그녀의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한눈에 봐도 예전에 내가 만났던 석나은처럼 명문가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나는 유겸이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는 어렸을 때 나중에 나랑 결혼할 거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약혼녀라고 소개하기도 했죠. 그때 나는 그 말을 믿었고 그를 따랐어요. 그 후 그는 귀국했고 나는 계속 해외에서 생활했죠. 그러다 그의 소식을 다시 들었을 땐, 이미 다른 여자가 있더군요. 물론 마음이 아팠지만 남자들은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잖아요.”최희연은 놀라서 되물었다.“그럼 내가 내연녀라는 거예요?”여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굳이 뭔가를 쟁취하려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유겸이가 그쪽을 좋아한다면 나는 기꺼이 물러날 거예요. 오해 말아요. 사실 내가 멀리 운성까지 온 건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에요. 제 목적은 따로 있어요.”최희연은 차분히 물었다.“그럼 목적이 뭔데요?”여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유겸이랑 잤어요?”최희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하지만
그 여자는 진유겸 앞에서 매우 무리하게 굴었지만 진유겸의 표정에는 조금도 화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부드럽게 해명했다.“이 일은 나중에 설명할게. 일단 너를 서위스로 돌려보내야겠다.”“이렇게 빨리 날 내쫓고 싶어?”진유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솔아, 날 이해해 줘.”진유겸은 그녀의 이해를 바랐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바로 코앞에 최희연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최희연은 조용히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돌아갈 거니까.”출입구가 조용해졌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최희연은 테이블에 엎드려 억울함에 목놓아 울었다.나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진유겸은 석지훈과 비슷한 남자였다. 솔직하고 스캔들이라곤 없었으니까. 그러니 어쩌면 다른 오해가 있을지도 몰랐다.최희연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유겸 씨가 여자한테 저렇게까지 하는 건 처음 봤어. 누가 감히 그 사람을 발로 차겠어?”최희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팔로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나중에 집에 가서 물어봐. 어쩌면 상황이 다를 수도 있잖아.”나는 마음속으로 진유겸이 그런 남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최희연은 눈물을 닦으며 흐느끼며 말했다.“나중에 얘기해. 이런 짜증 나는 일은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나랑 드레스 사러 가자.”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드레스는 왜 사?”“내일 고씨 가문 창립 20주년 기념식이야. 각 도시의 많은 가문을 초대했는데 고현성이 나도 특별히 초대했어.”고씨 가문이 벌써 20주년이라니.처음에는 작은 IT 기업이었는데 이렇게 큰 기업으로 성장시키다니, 고현성이라는 그 남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기회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었다.나는 최희연과 함께 백화점에 가서 적당한 가격의 드레스를 골랐다. 그녀는 내일 나도 고씨 가문에 같이 가기를 바랐는지 나에게도 드레스를 골라 주었다. 그런데 가격은 정말 말도 안
[핀란드예요. 석지훈의 지시를 받고 일하러 왔어요.]나는 이 페이지를 캡처해서 고정재에게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재의 답장이 왔다.[고마워. 꼬마 아가씨.]그와 한민수 사이에서, 결국 난 고정재 편을 들었다.나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욕실로 가서 세수하고 나와 주방에서 컵라면 하나를 끓였다. 혼자 있을 때는 항상 컵라면을 먹었다.식사 후 고현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금은 의외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나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씨 가문 경축 행사에 나를 초대하려는 걸까?어젯밤 나는 최희연에게 저녁에 그녀를 따라 경축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주인의 초대 없이 함부로 가는 건 곤란했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오늘 밤은 고씨 가문 20주년 기념행사인데 널 초대하고 싶어. 수아야, 고씨 가문은 결국 네가 발전시킨 곳이잖아.”역시 그랬다.나는 대답했다.“알겠어요. 저녁에 갈게요.”내가 이렇게 흔쾌히 승낙하자 고현성은 조금 놀란 듯 말했다.“너...”“희연이랑 같이 갈게요.”전화를 끊고 손목시계를 보니 지금 화장하고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이때 마침 최희연에게서 문자가 왔다.고 씨 저택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그래. 이따 봐.]나도 답장했다.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느긋하게 화장을 했다. 진한 화장이 아니라 창백한 얼굴을 가리려고 볼 터치만 살짝 한 뒤, 어제 최희연이 선물해 준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코트를 들고 집을 나서니 현정우 일행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타면서 나는 현정우에게 제안했다.“함 집사에게 내 옆집 아파트 두 채를 사두라고 하세요. 내가 외출하지 않을 때는 거기서 쉬시고요.”현정우는 감격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가주님.”그들도 온종일 나를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현정우만 데리고 고 씨 저택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뒤뜰로 가서 사람들을 기다렸다.몇 분 지나
고 씨 저택은 환한 불빛에 잠겨 있었고 2층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석지훈은 너무나 낯설었다. 낯설고 차가워서 온몸에서 음침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석지훈은 진유겸을 무시했다. 나는 진유겸을 흘끗 쳐다보고는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본인 일이나 신경 쓰시죠.”“허, 협박하는 거예요?”나는 협박이 아니라 정중한 충고를 한 것이었다.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나는 진유겸이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묻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었다.“또 저 여자를 화나게 한 거야?”석지훈은 대답하지 않았고 진유겸은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는 정말 귀찮아.”그의 말투를 들으니 어젯밤 최희연이 그를 괴롭혔던 것 같았다.하지만 최희연의 성격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서서 방에 있는 생수를 찾아 한 모금 마시고 한참 후에 가방에서 항암제를 꺼내 두 알을 먹었다.내 병세는 확실히 악화됐다. 지금 내 상태로는... 그저 이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의사는 자궁 적출을 권유했다.자궁 적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겨둬도 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임신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는 내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난 이번 생에 엄마가 되긴 글렀다.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아 있는데,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정우 씨, 누구세요?”“가주님, 원태웅 씨입니다.”원태웅?맨발로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원태웅이 품에 붉은 장미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그는 꽃다발을 내 품에 안겨주며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이야. 이건 형이 너에게 주는 거야.”“오빠가 주는 거면 오빠가 준 거라고 해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형에게 점수 따주려고 그러는 거잖아.”나와 석지훈은 헤어졌지만 원태웅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항상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원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성으로 돌아온 후 형이 말하더라. 널 칼로 찔렀다고. 너도 알잖아. 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꾹 참고 말 안 하는 성격이라는걸. 그런데 이번에는... 네가 오해할까 봐 엄청 걱정하더라.”석지훈은 원태웅에게 말했고 원태웅은 내게 설명해주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날 송 어르신이 석지훈에게 나를 찌르라고 시켰던 게 떠올랐다. 그 얘기를 하자 원태웅은 잠시 침묵하더니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은 타이탄의 새 두목인데 형한테 기술은 많이 가르쳤지만 질투가 심하고 잔인해서 누구도 형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꼴을 못 봐. 그 상황에서 형은 너한테 관심 없는 척해야 널 살릴 수 있었어. 송 어르신의 질투심 달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지.”잠시 말을 멈춘 후, 원태웅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송 어르신은 네가 석씨 가문 사람이라는 게 좀 껄끄러웠겠지만 형이 너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드러냈다면 그는 석씨 가문과 척질 각오였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상황에선 형이 너한테 차가운 척해야 송 어르신의 질투심이 약해지고 네가 석씨 가문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널 보내줄 수 있었던 거라고.”그럼 석지훈이 날 찌른 건 날 살리기 위해서였던 건가?그럼 내가 그동안 힘들어했던 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단 말인가?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를 위한답시고 날 구했다.그야말로 따귀를 때리고 사탕을 주는 격이었다.이게 그 당시 고현성이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원태웅은 내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아직도 속으로 형을 원망해? 그런 상황에서, 네 생사가 걸린 선택 앞에서 형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비록 칼은 네게 꽂혔지만 형 가슴에 꽂힌 거나 마찬가지지! 형도 똑같이 아프고 괴로웠다고. 윤아야, 형이 널 얼마나 아끼는지 우린 다 알아. 넌 형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형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네가 다치거나 그로
석지훈: “...”고현성이 나를 말하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고현성의 이 말은 석지훈의 마음을 깊이 찔렀다.석지훈을 화나게 하기 딱 좋은 말들이었다.고현성은 나지막이 말했다.“난 예전엔 걔가 내 평생 마누라가 될 거라고 확신했었어. 날 사랑했으니까. 비록 그때 그녀는 자신이 엉뚱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몰랐지만 난 그녀를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지! 그런데 나중에... 난 그녀를 계속해서 실망시켰고 바로 그때 네가 그녀 옆에 나타나서 그녀가 원하는 따뜻함을 줬어. 난 그녀가 왜 널 선택했는지 항상 이해할 수 있었어.그녀라는 사람을 내가 너무 잘 아니까. 그녀는 따뜻함이 엄청 부족해서 조금이라도 따스하면 꼭 붙잡으려고 했어!”“그래. 그녀는 연씨 가문의 대표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린 나이에 유명하고 권력이 대단했지만 결국은 애에 불과했지.”이렇게 말한 건 석지훈이었다.나는 그가 고현성의 말에 대답할 줄은 몰랐다.그의 성격답지 않았다고현성은 후회와 억울함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난 그녀를 살리고 싶었어. 그녀가 잘 살기를 바랐기에 서정과 결혼했던 거지. 근데 그게 오히려 그녀를 무너뜨리는 마지막 계기가 돼서 그녀를 너한테 보내버렸어. 결국 난 아무것도 못 하고 그녀를 잃었던 거야! 그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다 내가 그때 너무 쉽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탓에 그녀랑 남이 돼버린 거야!”멀리서 석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마워.”고현성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뭐가?”“그녀를 내 곁으로 보내줘서.”두 사람의 대화에서 석지훈은 먼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고현성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넌 그저 줍줍남일 뿐이야! 너희 사랑이 순탄할 거 같아? 지금 그녀는...”석지훈은 담담하게 경고했다.“뒷말은 닥쳐.”고현성은 겁 없는 남자였고 제일 싫어하는 게 위협이었다. 그는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석지훈에게 물었다.“내가 길들인 여자, 만족스러워?”석지훈은 몸을 돌려 고현성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고현성
방금 고현성의 이름을 부른 건 일부러 석지훈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우리 사이는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까.그가 찌른 칼 때문이 아니라 가장 큰 이유는 내 병 때문이었다...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좋은 것 같았다.서로에게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켜줄 수 있으니까.나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난 현성 씨를 선택할게요.”난 고현성을 따라 아까 그 방으로 돌아갔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욕실에서 따뜻한 수건을 찾아 그에게 건넸다.그는 수건을 받아 얼굴에 대고 사과했다.“미안해, 방금 그 말들은... 일부러 그를 힘들게 하려고 한 말이야.”“괜찮아요. 나도 방금 당신 이용했으니까.”나는 그를 이용해서 석지훈을 밀어내려고 했다.고현성은 이해하는 듯했지만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알아, 네 몸 때문이라는 거. 2년 전처럼... 근데 2년 전엔 날 밀어내지 않고 사귀자고 했잖아. 근데 왜 지금은 그때만큼 용기가 없는 거야?”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당신은 그때 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이 말에 고현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현성이 날 사랑하지 않았으니 그와 연애를 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내가 떠날 때 그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석지훈은 날 사랑했다. 그래서 난 그가 나를 잃는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 난 석지훈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어딘가에 숨을 것이다.“찜질 좀 하세요. 희연이도 이젠 왔을 테니 내려가 볼게요.”난 서둘러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최희연이 여러 재벌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최희연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해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말이다.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누군가 묻는 말을 들었다.“솔이 씨는?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솔이?!설마 진유겸의 그 약혼녀인가?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최희연을 바라보며
현정우가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나는 그녀의 몸에 바로 발길질을 했다. 새하얀 드레스에는 순식간에 발자국이 남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때리지는 못하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지시했다.“최희연을 패!”그들을 화나게 한 것은 나였지만 그들이 때리려는 사람은 최희연이었다.요즘 세상은 이렇게 삭막했다.강한 자는 약한 자를 괴롭히고 어른은 아이를 괴롭혔다.나는 2층에서 두 남자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는 것을 곁눈질로 보고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유겸 씨, 당신 여자 안 챙길 거예요? 안 챙길 거면 평생 챙길 생각 말아요!”왠지 모르게 석지훈의 눈가에 미소가 어려있는 것 같았다.진유겸과 석지훈이 아래층으로 내려오기도 전에 그 재벌가 아가씨들의 어른들이 와서 그녀들을 끌어갔다. 최희연은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저 사람들 파리처럼 엄청 귀찮게 구네.”“아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 보여”내 질문에 최희연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솔이.”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왜?”“아까 계속 그녀가 유겸 씨를 차버렸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엄청 곤란했지. 마치 내가 둘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잖아!”“정말 네가 그랬다 해도 너도 피해자야!”최희연은 우울하게 말했다.“맞아. 난 유겸 씨에게 약혼녀가 있는 줄 몰랐어. 그리고 나랑 유겸 씨는... 우린 1년 전에 혼인 신고를 했단 말이야. 나는 그의 법적인 아내라고!”나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한 번도 말 안 했어?”“혼인 신고할 때 유겸 씨는 별로 날 사랑하지 않았어. 그래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우리 사이가 앞으로 더 굳건해지길 바랐었지! 수아야, 난 지금 유겸 씨가 나랑 이혼하자고 할까 봐 제일 두려워. 혼인 신고할 때 약속했거든. 누구든 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그만둘 수 있다고. 그건 내가 그에게 한 약속이야. 지금은 너무 후회되지만!”나: “...”최희연은 어떻게 진유겸에게 그런 바보 같은 약속을
그녀를 사랑할 기회...그녀의 삶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사랑이었다. 나는 평생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확실히 난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감정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네. 며칠 뒤에 F 국으로 갈게요.”운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나는 아이들을 볼 기력이 없어서 연 씨 저택 근처에 예전에 미리 사둔 별장으로 갔다. 이곳에 내 집이 있는 것을 보고 석지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는 나를 놀리듯 말했다.“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더니.”연 씨 별장을 제외하고 운성에 내 집은 마침 세 채가 있었다.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럼 여기서 살 거예요 말거예요?”내 말투에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버릇없다고 잔소리하려는 것 같아서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며 먼저 말했다.“나 피곤하고 배도 고파요. 오빠 뭐 먹고 싶어요?”내가 먼저 약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까 나의 무례함은 넘어가 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먹고 싶어?”나는 웃으며 말했다.“오빠를 먹고 싶어요.”석지훈: “...”그는 침묵으로 답했다.석지훈은 눈치가 빨랐다. 별장에 오자마자 그는 양복을 벗어 놓고는 주방으로 향했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흰 잠옷으로 갈아입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분주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채소를 준비하고 있었고 냄비에는 죽이 끓고 있었다.주방 입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석지훈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작은 냄비에 데운 후 컵에 따라 건네주었다. 컵을 쥔 내 손은 마치 그의 마음처럼 따뜻했다.석지훈은 항상 아무 불평 없이 나를 위해 요리하고 말없이 나를 예뻐했다. 정말 완벽한 남자였다.과거의 그 전남편과는 완전히 달랐다.이번 생에 그를 만난 건 정말 다행이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사랑해요. 지훈 씨.”뜬금없는 내 고백에 석지훈은 늘 그렇듯 침착한 모습으로 나지막이 응수하고는 온화한 눈빛으로 말했다.“알고 있어
나는 원태웅에게 쪽지를 보냈다.[오빠, 적당히 하세요.]원태웅은 인터넷을 하고 있었는지 장미꽃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했다.[윤아야, 나 아이디어가 고갈됐어. 내일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연재를 멈출 수는 없잖아!]그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나에게 영감을 구하고 있었다.나는 잠깐 생각한 후 답장했다.[생각해 볼게요.]사실 나는 원태웅의 이야기들을 꽤 좋아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전부 읽어볼 생각이었다.원태웅이 답장을 보냈다.[역시 윤아가 눈치가 빠르네. 많이 생각해 줘. 형에게는 절대 말 안 할게.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내가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면 맛있는 거 사줄게.]한창 원태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석지훈이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운전 기사에게서 우산을 받아 들고 내 머리 위로 씌워 주었다.석지훈의 다리는 길고 곧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의 길고 하얀 손이었다.하지만 너무 가볍게 보이긴 싫었다.나는 차에 탄 뒤,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피곤해?”“네. 졸려요.”내가 대답했다.“내 품에서 잠깐 눈 붙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무릎에 누웠다. 그의 손바닥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자, 내가 여기 있을게.”얼마 자지 못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친엄마의 전화였다. “너를 만나고 싶구나.”나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대답했다.“알겠어요. 하지만 장례식에는 참석하고 싶지 않아요. 며칠 후에 F 국에 찾아뵐게요.”엄마는 내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나는 공작 작위를 원하지 않았다.“수아야, 이건 내 마음이야.”“죄송해요, 하지만 이건 제 것이 아니에요.”이 말에 엄마는 따졌다.“석씨 가문도 네 것이 아니었지만 받아들였잖아. 아빠가 준 건 받으면서 왜 엄마가 주는 건 안 받아? 수아야, 내가 아빠보다 뭐가 부족해? 왜 자꾸 날 거절하는 거야?”나:
공작이 죽었으니 당연히 후계자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왕실에서 나를 초대했다는 것은 내가 그 상속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F 국 공작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함승윤에게 말했다.“일단 보류해 두세요.”그 노인은 사망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아마 며칠 더 걸릴 것이다. 아마도 내가 F 국에 갈 때까지 기다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를 F 국으로 초대하는 것은 엄마의 생각인 것 같았다.어쨌든 이것은 엄마가 나한테 물려주려고 만든 자리니까.나는 엄마가 의식을 되찾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습니다, 가주님.”“일보세요.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지훈 씨 기다릴 테니.”함승윤은 공손하게 말했다.“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가주님.”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아래층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트위터의 실시간 검색어를 훑어보았다.모두 현재 유행하는 내용으로 별로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나는 석지훈의 트위터에 들어가 보았다. 그가 올린 게시물은 약혼식 날 올린 단 하나의 게시물뿐이었다...수백만 개의 ‘좋아요’는 그의 인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나는 원대감이라는 아이디의 트위터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는 매일 게시물을 올리고 있었다.이를테면...[석 대표님은 연수아를 아주 예뻐한답니다~]예뻐한다고는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팬들의 눈에 그는 그저 인터넷 서핑이나 하는 사람이었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그저 심각한 커플 팬으로 보일 뿐이었다.그는 직접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예를 들어...[몇 년 몇 월 며칠, 연수아는 옆에 있는 잘생기고 차가운 석 대표님에게 물었다.‘지훈 오빠, 나의 어떤 점이 좋아요?'그러자 석 대표님이 되물었다.‘그럼 넌 내 어떤 점이 좋아?'‘나는 오빠가 잘생기고 돈이 많아서 좋아요.'석 대표님의 몸이 굳어졌다.‘그것뿐이야?'연수아는 남자의 차가워진 말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그리고
“피곤하지는 않은데 앞으로 매일 동성과 운성을 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무겁네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운성에 정착하려고 하니 석씨 가문의 본거지는 동성에 있었다.어떤 일들은 말로는 쉬웠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매우 어려웠다.더군다나 석지훈의 본거지는 유럽에 있었다.“함승윤에게 지시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운성으로 보내 달라고 해. 동성에서 운성까지 몇 시간 안 걸리니까 매일 한 번씩 보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급한 일 있으면 그때 동성에 가면 되고 최악의 경우엔 내가 뒤에서 도와줄게.”잠시 말이 없다가 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석씨 가문은 석씨 가문 나름대로 돌아가는 방식이 있어. 너무 힘들게 할 필요 없어.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서 조금씩 놓아 봐.”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어떻게 놓아요?”과거 석지훈은 석씨 가문을 장악하는 동시에 유럽의 권력까지 쥐고 있었다. 규모는 컸지만 그는 모든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고 자주 외부에서 활동했기에 석씨 가문의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원태웅은 그가 위험 속을 오가는 것을 즐긴다고 말했었다.“착하지, 저녁에 집에 가서 석씨 가문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이제 그는 ‘착하지’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했다.“네. 오빠는 어디에요?”내가 물었다.“너 데리러 가는 중이야. 널 데리고 운성으로 가야지.”나는 전화를 끊고 창밖의 아름다운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모든 것이 보기 좋았다.나는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와 함승윤을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곧바로 일어서서 불렀다.“가주님.”나는 웃으며 물었다.“뭐 해요?”“회사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나는 방금 석지훈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동의하며 말했다.“분명 가능한 방법입니다. 운성에도 석씨 가문의 지사가 있으니 가주님께서 운성에 머무르시고 싶으시다면 강 비서를 그곳에 파견하여 보좌하도록 하겠
석지훈이 갑자기 연 씨 별장을 언급하자 나는 그가 두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속으로는 아쉬움과 망설임이 교차했다. 석지훈은 내 주저함을 알아채고는 차분히 설명했다.“아이들을 우리 곁에 두더라도 유모만 시간을 내어 돌볼 수 있을 테니 차라리 아이들을 연 씨 별장에 보내는 게 낫지 않겠어. 부모님 두 분 다 별장에서 쓸쓸하게 계시는데 애들 키우면서 시간도 보내시고 손주들 재롱 보면서 즐겁게 지내실 수 있잖아.”나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석지훈은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아가야, 우리 집을 운성에 정하는 건 어떨까? 그러면 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연 씨 저택에 가서 아이들을 볼 수 있으니 곁에 두고 키우는 것과 다름없을 거야.”집을 운성에 정한다라...하지만 석지훈이 좋아하는 건 핀란드였다.그런데 나를 위해 운성에 집을 정하려 한다니.게다가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와 그에게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 부모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였다.더군다나 바로 가까이에 계시니 저녁에는 집으로 데려와 직접 돌볼 수도 있었다. 이 제안은 여러모로 좋은 방법이었다.당시 이 제안을 하는 석지훈은 매우 다정했기에 나는 순진하게도 그가 나를 위해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내가 아이들에게만 신경 쓰는 모습에 석지훈은 묘한 감정을 느꼈고 아이들을 곁에 두고 키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곡하게 나를 설득하여 아이들을 연 씨 저택으로 보내려 했던 것이다.그는 그녀의 사랑이 두 아이에게 너무 많이 분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요 이틀처럼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네. 이틀 더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부모님께 맡길게요. 한 번에 두 명의 외손주를 얻으시니 부모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시겠죠.”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 나도 같이 있어 줄게.”그 후 이틀 동안 운산에 있
나는 성인이었고 석지훈을 만나기 전 3년간의 결혼 생활을 경험했기에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그는 나를 안아 주며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고 내가 그의 품에서 무슨 말을 하든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속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뭔가 비밀을 알아낸 것 같았던 것이다.국내에 도착하여 시차에 적응하고 나니 정오였다. 나와 석지훈은 몇 시간 더 차를 타고 운산 별장에 도착했다. 그때 석만호와 낯선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두 아이는 바닥을 기어 다니며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이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아직 아기였기에 나는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왠지 모를 떨림이 느껴져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석지훈은 내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안아 봐.”석지훈은 손을 뻗어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가 다가가자 석만호가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일어나 공손하게 불렀다.“가주님.”눈치 빠른 그 아주머니는 재빨리 아이 하나를 안아 나에게 건네주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이렇게 안아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도련님이 불편해하실 거예요.”아주머니가 안고 있던 아이는 석윤민이었다.내 아들.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안았다. 그를 품에 안는 순간 마음속에 따스함이 가득 차올랐고 문득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그에게 주고 싶었고 그가 이 세상에서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기를 바랐다.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오빠.”내 뒤에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어?”“나 윤민이 너무 사랑해요.”사랑한다.아주아주 많이.물론 석윤아도 사랑했다.난 내 두 아이를 모두 사랑했다.그들은 내 생명의 연장선이었다.석지훈은 내 어깨를 감싸 안아 나에게 힘을 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
의외로 그는 나를 꺼리지 않았다...게다가 차 안에는 현정우와 운전기사도 있었다.그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생각해 보니 그가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키스한 것은 처음이었다.석지훈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놀리듯 말했다.“나는 윤아의 얼굴이 성벽처럼 두꺼워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줄 알았잖아.”나: “...”조금 전의 역겨운 일은 잊어버렸고 마음속에는 오로지 석지훈뿐이었다.나중에야 나는 석지훈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나를 조금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했던 것이다.그리고 그의 방식이란...그는 내가 자기 얼굴에 환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석지훈은 언제부터 자기 매력을 무기로 쓰는 걸 배운 거지?...우린 헬기 대신 전용기를 타고 F 국을 떠났다. 넓은 기내에는 나와 석지훈 단둘이 있었다.그리고 작지 않은 침대 하나가 있었다.침대는 매우 호화로웠고 그 위에는 비단 이불이 깔려 있었다.나는 비행기에 탑승한 후 입을 헹구고 석지훈의 품에 안겨 창밖의 야경을 감상했다. 특별히 볼 것은 없었지만 뭔가 기분 좋았다. 아마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내 곁에 있으면 나는 행복했다.석지훈은 내 귀밑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그의 질문을 들었다.“이게 뭐지?”나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는 부드럽게 물었다.“다쳤어?”나는 거짓말했다.“작은 상처예요.”나는 그에게 내 병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다.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듯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 묻고 거짓말했다.“실수로 다친 거예요. 자꾸 묻지 마세요. 오빠도 자주 다치잖아요? 그나저나 오빠 상처는 다 나았나요?”내가 화제를 돌리자 석지훈은 더 이상 캐묻지 않
엄마는 결국 목숨을 건지셨다. 최욱현은 일어서서 내 옆으로 와 노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또 장례식 치러줘야 하잖아.”그의 웃음은 차가웠고 소름 끼쳤다.나는 그에게 말했다.“어쨌든 네 친척이고 너도 어릴 때부터 이 사람의 보호 아래 자랐잖아. 좀 착하게 굴어.”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수아 넌 내가 착하지 않다고 생각해?”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적어도 난 그렇다고 생각해.”내 가방 속 휴대폰은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전화 너머에 석지훈이 있었기에 나는 최욱현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그는 변태적이고 잔인하지만 나를 해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어머니뿐이었다.그는 어머니를 제외하고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내 신장을 보관해두었다고 했다.하지만 그런 마음은 역겹고 두려웠다.내 말을 듣고 최욱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야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난 착한 사람이야. 근데 내 착한 면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수아야, 언젠가 네가 날 이해하는 날이 오면 좋겠어. 그럼 넌 날 이해하게 될 거야.”그를 이해한다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의 엄마에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방금 왜 거짓말 했어? 엄마가...”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네가 어머니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잃었다가 되찾는 기쁨을 느끼기를 바랐어. 수아야, 어머니는 널 사랑해. 진짜 많이. 그걸 꼭 알았으면 좋겠어.”나는 차갑게 말했다.“네가 말 안 해도 알아.”그때 집사 같은 사람이 와서 보고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욱현은 눈을 들어 말했다.“석지훈이 도착했어.”웬일로 그는 나에게 숨기지 않았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최욱현이 나를 내쫓는 소리가 들렸다.“가 봐.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 하면 내가 다시 연락할게.”내가 물었다.“나 엄마 옆에 있으면 안 돼?”“수아야, 어머니는 네가 슬퍼
편지를 읽고 나니 나는 이미 눈물범벅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네가 내 딸이라는 것 외에는 우리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모르겠구나.”사실 그 말은 나에게 일부러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그녀는 나와 친해져서 서로 얽히는 걸 싫어했다. 이 세상을 떠난 후 내가 슬퍼할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나를 멀리하셨고 조금 전까지도 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셨다.나는 엄마의 깊은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나는 급히 아까 방으로 돌아갔다.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한 그 노인에게 나는 영어로 물었다.“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아세요? 아시면 제가 지금 당장 모시고 나갈게요!”나는 엄마를 만나러 가야 했다.지금 당장.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어로 대답했다.“알아요.”나는 썩은 냄새를 참으면서 휠체어를 밀고 그를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포르말린에 담긴 10년 전에 망가졌어야 할 내 신장 두 개는 쳐다보지 않았다.최욱현은 정말 변태였다.노인의 정신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영어로 나를 재촉했다.“아가씨, 빨리 나를 데리고 나가 주세요. 난 그녀를 만나고 싶어요... 내가 제때 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 그녀를 잃을까 봐...”그는 아마도 나의 엄마를 말하는 것 같았다.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욱현이는 당신이 예전에 우리 엄마를 항상 때렸다고 했는데 지금 엄마를 잃을까 봐 두렵다고 할 자격 있어요?”그는 놀라며 물었다.“아가씨가 그녀의 딸이라고?”“네, 저는 그녀의 딸입니다.”이번 생에 하나뿐인 그녀의 딸이었다.노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나는 그녀가 내 후계자를 낳아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항상 거절했어요. 나는 당시 젊어서 화를 참지 못했죠! 게다가 부부 사이에 다툼은 흔한 일이 아니겠어요? 나는 당신 어머니를 때린 적이 있지만 당신 어머니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