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의 겨울은 유독 차가웠다. 그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어 고정재의 마음마저 얼어붙게 했다.어젯밤, 고정재는 급하게 동성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의 댁에서 담현아와 그녀의 오빠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중에야 선생님의 아내가 담현아의 고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담현아는 고정재를 보고도 별다른 놀라움 없이 담담히 인사하고는 어린 조카와 놀기 시작했다.고정재는 담현아가 가족들 앞에서 무척 순수하고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았다. 담현아는 고정재의 앞에서 차갑고 무관심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리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치 가족들의 분위기에 녹아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완벽히 연기하려는 듯했다.그제야 고정재는 담현아가 남들 앞에서 연기를 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과 뒤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고정재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담현아의 고모는 고정재가 담현아와 함께 공연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두 사람이 친한 사이인 줄 알고 담현아에게 배웅하라고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눈 내리는 밤길을 아무 말 없이 함께 걷다가 헤어질 때쯤 고정재가 물었다."현아야, 나 많이 싫어하니?"고정재는 31년 동안 살아오면서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쓴 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 사람만은 달랐다.담현아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고정재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정재가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윤다은의 말처럼 이것이 바로 신경 쓰이는 마음일지도 몰랐다.고정재는 처음으로 담현아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연수아에게 느꼈던 지켜주고 싶다는 단순한 감정보다 더 깊었고 담현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그 순간 고정재는 최근 느꼈던 혼란의 이유가 바로 이 감정 때문임을 깨달았다.눈 내리는 밤 담현아의 곁에 서 있는 지금 고정재는 자신의 마음을 피하지 않고 인정했다.고정재는 담현아를 사랑하고 있었다.고정재는 자기가 언제부터 담현아를 신경
담현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더니 기쁜 듯 말했다."나 오빠들이랑 내기했어요. 만약 내가 여기 와서 언니가 오빠들을 초대해 밥을 먹게 하면 오빠들이 각각 나한테 천만 원씩 세뱃돈을 준대요.이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너희 진짜 유치하다."담현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내가 올해 세뱃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맞혀봐요."담현아는 돈을 잘 벌 줄 아는 사람이었고 실제로도 잘 벌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이었다.나는 대충 추측하며 물었다."2억 정도 돼?담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1억도 안 돼요."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왜 그렇게 적어?"명문가의 자녀라면 설날마다 세뱃돈으로 엄청나게 많이 받을 것이다.담현아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귀찮아서 친척들 안 찾아갔거든요. 그냥 부모님이랑 오빠들만 나한테 세뱃돈을 줬어요. 근데 정재는 진짜 짠돌이예요. 어젯밤에 일부러 고정재가 준 세뱃돈을 열어봤는데 안에 겨우 100만 원밖에 안 들어 있더라고요. 언니는 그래도 나한테 200만 원을 줬잖아요.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내가 준 세뱃돈 언제 열어봤어?"담현아는 손으로 돈봉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두께가 다르잖아요. 만져보면 알 수 있어요."나는 담현아에게 제안했다."내 방에 세뱃돈 봉투 하나 더 있는데 줄까?"담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돼요. 그러면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 보이잖아요."나는 담현아의 정교한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그럼 다음번에는 더 많이 줄게."담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스포츠카 키를 흔들며 말했다."이거보다 더 큰 게 있을까요?"최근 느껴졌던 답답함은 담현아와 함께 있으니 사라졌고 나는 모처럼 담현아와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담현아는 세뱃돈과 차 키를 소파 위에 놓고 계속 게임을 했다.이때 갑자기 고정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꼬마 아가씨, 동성으로 돌아가는 걸 잠시 미뤘어. 이따 너희 집으로
담현아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급히 그녀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밥 먹자."내 말을 들은 담현우는 분위기를 알아차리고서는 입을 다물더니 주방으로 와서 도왔다.다들 식탁에 앉은 뒤 나는 맥주를 가져왔다. 담현아도 술을 마시고 싶어 했지만 나는 담현아가 술을 한 잔도 버티지 못한다는 걸 떠올리고 급히 막으며 말했다."넌 아직 어려."담현아는 순순히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고정재를 제외한 남자들은 모두 말이 많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갔다.대화는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주제로 흘러갔고 반경우는 결국 화제를 나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우리 아기, 너희 석지훈은 왜 안 와?"반경우는 나와 석지훈 사이의 구체적인 사정을 알지 못했다.나는 잠시 생각한 뒤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핀란드에서 일하느라 바빠."내가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은 태도를 보이자 반경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대신 지난날을 회상하며 말했다."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넌 지금의 현아보다 세 살 더 어렸잖아.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버렸고 또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네. 이제 몇 달 뒤면 엄마가 된다니. 믿어지지 않아."반경우가 엄마라는 두 글자를 언급하자 나의 마음은 따뜻해졌고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모습이 몹시 기대되었다.나는 과일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너도 이제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리 잡아야지."반경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비혼주의자야."옆에서 이 말을 들은 담현아는 푸아그라를 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진정한 비혼주의자가 어디 있겠어? 그냥 좋아하는 사람을 못 만났거나 좋아해도 마음을 얻지 못했겠지."담현우는 웃으며 물었다."현아야, 네 말은 경우가 좋아해도 얻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거야?"반경우는 담현아를 살짝 째려보며 위협하듯 말했다."너한테 줄 천만 원 아직 안 준 것 같은데?"담현아는 순간 화제를 바꾸더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경우
동성의 하늘에는 가벼운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정재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정재의 입장을 생각했을 때 내가 너무 많은 걸 묻는 건 부적절해 보였지만 또 그와 오해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나는 신중하게 설명했다."현아가 말한 그 사람은 석지훈이에요. 현아는 석지훈의 보호 아래 자랐거든요. 현아에게 석지훈은 평생 따를 사람이에요. 다만 현아는 석지훈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없어요. 그냥 일적으로 멘토이자 따르는 대상일 뿐이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고정재는 똑똑했기에 나에게 물었다."석지훈과 담현아가 어떻게 얽힌 거야?"모든 걸 캐물으려는 고정재의 태도에 나는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어 먼저 그에게 물었다."정재 씨는 현아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내 말을 들은 고정재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나는 고정재가 담현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나는 설명을 이어갔다."현아는 담씨 가문과 예전 석씨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소녀예요."예전의 석씨 가문은 석지훈의 세대를 뜻했다.고정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석씨 가문이 왜 현아를 보호했는데?""고정재 씨, 현아는 천재 소녀예요."고정재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뭔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나는 간단히 말했다."많은 걸 어떻게 정재 씨에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현아는 보통 사람보다 아이큐와 감성 지수가 높아요. 우리보다 훨씬 많은 걸 볼 수 있고 생각도 더 예민하죠."고정재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곤란하네."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요?"고정재는 천천히 눈을 떠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현아는 어젯밤 분명히 나를 거절했어."나는 순간 멈칫했다. 평소에 냉담하고 차가운 고정재가 정말 어린 소녀 담현아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수십 년 동안 고정재를 쫓아다닌 윤다은조차 고정재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는데 고정재는 몇 번 보지도 못한
고정재는 인내심을 갖고 다시 물었다."그 사람이 누군데?"나는 원태웅이 전화로 담현아를 핀란드로 초대한 것이 한민수의 지시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담현아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말했다."석지훈이죠. 원태웅은 석지훈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핀란드로 가야 해요."고정재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담현아는 설명을 덧붙였다."석지훈은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대요. 내가 딱 적임자죠."나는 담현아의 기술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컴퓨터 분야의 얘기는 처음 들었다.그러나 담현아는 워낙 똑똑했기에 못 하는 게 없을 것이다.담현아는 지금 석지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하지만 나는?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다.고정재가 방을 나가자 다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영재반과 예전 석지훈의 사람들이 모두 핀란드에 모였어요. 원태웅의 말에 따르면 나도 그곳에서 몇 달 머물러야 한대요."석지훈은 그의 인맥과 세력을 다시 구축하려 했다.나는 갑자기 담현아가 석지훈의 곁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담현아가 물었다."언니도 나랑 같이 갈래요?"두 번이나 핀란드에 갔지만 석지훈을 만나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현아야, 나는 석지훈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담현아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왜요?""나랑 석지훈은 싸우고 헤어졌어."담현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함께하자고 하면 함께하는 거고.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지고. 어른들의 감정은 왜 이렇게 장난 같아요?"나는 말문이 막혔다.담현아의 생각에는 내가 이미 여러 남자를 만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담현아가 나를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지만 고현성이든 석지훈이든 그 어느 관계도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게다가 이번에는 내가 석지훈에게 상처를 줬다."현아야, 나는 석지훈을 정말 사
의사는 다른 산모들도 20주쯤 되면 다 하는 검사라면서 기형아 검사를 추천했지만 나는 왠지 불안했다.물론 태아 기형 검사를 하고 나면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그건 아무 일이 없을 때 얘기고 만약 아이에게 문제라고 생긴다면 연수아는 정말 마지막 희망까지 잃는 것이었기에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망설여졌다.그래서 나는 의사에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현정우를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와서 약을 먹으니 조금 가라앉은 통증에 나는 그대로 잠을 잤고 이튿날 아침 바로 상주시로 향했다.상주시에 도착한 나는 조민수와 새언니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일단 송이연이 있는 병원부터 갔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두 눈이 빨개진 채 계속 울고 있는 송이연이 보여 나는 다급히 그녀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승아는요? 아직도 수술 중이에요?”내가 승아라 칭하는 사람이 바로 내 조카인 승아였다.9시 9분에 태어난 걸 기념하기 위해 승구라는 이름을 지었지만 다들 남자아이로 오해해서 송이연이 얼마 전에 개명한 이름이었다.송이연 뒤편으로 보이는 수술실의 등이 아직 꺼지지 않아서 물은 건데 그녀는 맥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승아 어젯밤에도 계속 토했어요.”“괜찮을 거예요.”내가 그런 송이연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자 늘 강인하던 그녀는 버팀목이 생긴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수아 씨, 나 이제 더는 못 버티겠어요. 6개월밖에 안 된 저 아이가 아파할 때마다 내 가슴이 다 찢겨나가는 것 같아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요, 그때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승아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일도 없었을 텐데...”나는 온몸을 떨며 우는 송이연을 보니 덩달아 마음이 아파 난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고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요. 이연 씨도 승아한테 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잖아요. 그리고 승아도...”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던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승아 꼭 괜찮아질 거예요.”송이연은 그렇게 나에게 안겨 한참
“잘됐네요, 승아랑 이연 씨 같이 돌 볼 수 있어서.”내 손을 꽉 잡으며 말하는 송이연은 마치 힘내라고 나를 응원을 해주는 것 같았다.“괜찮아요, 정우 씨랑 다른 경호원들도 있어서 난 알아서 잘 있을 수 있어요.”내 말에 송이연은 내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보며 말했다.“그래도 다 남자들이잖아요, 난 또 유경험자니까 도움 될 거에요.”“고마워요.”송이연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되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니에요, 수아 씨 그럼 나 대신 우리 승아 잠깐만 봐줄 수 있어요? 나 회사 가서 일 처리하고 승아 골수 이식해줄 사람도 구해봐야 할 것 같아요.”“당연하죠, 저도 사람 시켜서 알아볼게요.”송이연이 승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병실을 나가자 나는 바로 연시혁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아서 결국 문자를 남겼다.[어디야?]연시혁의 문자를 받기도 전에 석씨 집안 사람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가주님, 한민수 씨가 방금 돈 보내왔습니다.”“네, 강해온 씨는요?”“아직 집안 업무를 익히고 있습니다.”“그럼 저 대신 강해온 씨가 업무 빨리 익힐 수 있게 좀 도와주세요. 함 집사님도 아시다시피 석씨 집안 가주들 옆에는 항상 믿을만한 비서가 있었잖아요. 강해온 씨는 제가 선택한 사람이긴 하지만 함 집사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석씨 집안에서 저를 도와 비밀리에 일 처리를 할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에요.”석씨 가문의 책임자로서 지위가 내 바로 아래인 사람이 바로 함승윤인데 강해온이 갑작스레 등장해서 권력을 나눠 가지면 혹시라도 못마땅한 감정이 생길 수 있으니 나는 그를 다독이기 위해 일부러 말을 길게 했다.하지만 함승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그런 말씀 마세요, 석씨 집안에서 오랫동안 있어 와서 저도 할 일 못 할 일 정도는 가릴 줄 압니다. 석만호 집사님이 강해온 씨가 가주님 따라서 집안에 들어올 테니 잘 가르치라고 당부도 하셨는걸요.”함승윤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연수아에게 자신의 충성
“무슨 일입니까?”그때 잠에서 깬 승아가 울며 칭얼대자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함승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석지훈 씨가 두 달 전 본인이 석씨 집안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윤 비서를 시켜서 진짜 신분에 대해서 알아봤답니다.”두 달 전이면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전이니 그때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석지훈은 나에게는 단 한 번의 언질도 없었고 자신의 미래가 어떨지 뻔히 다 알면서도 나를 막지 않았다.그저 나에게 석씨 가문을 돌려주기 위해 자신을 궁지에 빠뜨리는 이런 헌신적인 사랑은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나를 석씨 집안에 들일 수 있었을 텐데 석지훈은 일부러 나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이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내 손에 모든 걸 쥐여준 것이다.그래서 내가 두 번이나 핀란드에 찾아갔을 때도 나를 만나주지 않은 것이다.석지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왔지만 나는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말을 이었다.“앞으로 그 사람에 관한 건 보고 안 해도 돼요. 출산 전 까진 상주시 병원에 있을 테니까 사람 시켜서 석씨 가문 자료 좀 보내주세요.”“제가 직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 그럼 수고해주세요.”전화를 끊고 난 나는 현정우를 보며 물었다.“함 집사는 지훈 오빠를 언급할 수 있어도 경호팀은 그럴 수 없죠?”“저희 스무 명은 더 이상 그분을 입에 올릴 수 없습니다.”“아쉽네요. 오빠를 옆에서 지켜주었으니 그 사람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게 경호팀인데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도 경호팀이니.”담담히 웃으며 내뱉는 내 말에 현정우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나도 더는 말하지 않고 승아를 달래고 있었는데 때마침 연시혁이 문자를 보내왔다.[지금 상주시야.]문자를 확인한 내가 승아를 현정우에게 넘겨주자 그는 혹시 힘을 주었다가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엉거주춤한 자세로 승아를 꼭 안고 있었다.나는 곧바로 연시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입을 열었다.“상주시 어디에 있는데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넘쳐났다.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석지훈이 나를 상대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잠시 생각하다가 원태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셋째 오빠, 날 다시 단톡방에 추가해 줄 수 있어요?”그는 빠르게 답장했다. “또 마음이 바뀐 거야?”“제발 부탁이에요.”원태웅은 나를 다시 탄톡방에 추가해 주었다. 나는 바로 단톡방에서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핀란드 날씨가 좀 춥네요.”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나 추워요.”그는 항상 나를 아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 앞에서 약해진 모습을 보이며 사과하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질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석지훈은 여전히 나를 무시했다.순간 눈물이 핑 돌며 핀란드의 바람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눈 내리지 않는 날이 눈 내리는 날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수술 부위도 은근히 다시 아려왔다.계속해서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담유미가 갑자기 영상 하나를 올렸다.낮에 고현성의 회사 앞에서 그를 때리던 장면이었다.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했던 말들이었다.듣기엔 차가워 보이는 말들이었지만 사실은 과거 고현성에게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묻어나 있었다.지금 우리 둘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게 분명했다.이제 그는 나를 만나고 싶지도 않을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 내 아이들이 그의 손에 있는 이상 나는 반드시 그를 만나야 했다.그 순간 원태웅은 단톡방에 짧고 굵게 한마디를 던졌다.“왜 쓸데없는 걸 마음대로 올리고 지랄이냐? 추방당하고 싶어?”단톡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제 석지훈은 날 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9977.”원태웅은 물었다.“형, 그게 무슨 뜻이야?”그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나는 급히 별장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마치 아픈 곳을 건드린 듯 고현성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나 강인해 보였던 그는 지금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터져 나오는 울분을 억누르며 말했다.“넌 정말 너무해.”고현성은 정말 사람을 너무 몰아붙였다.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에 그는 급히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수아야, 우선 지금 중요한 일부터 해결하자, 응?”지금 중요한 일은 바로 아이들 문제였다.나는 급히 자리를 떠났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차에 타려던 순간,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그를 무시한 채 차를 몰고 떠났다.얼마 가지 않아 급하게 차를 길가에 세우고 유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나는 급히 별장으로 돌아가 현정우를 찾았고 헬리콥터를 타고 바로 산꼭대기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고현성의 별장에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다섯,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었지만 유독 쌍둥이만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별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도우미는 나를 발견하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가까이 와서 말했다.“이 아이는 전유입니다.”내 눈앞의 아이는 이제 겨우 서너 달 정도 되어 보였다.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물었다.“사별은요?”도우미는 설명했다.“잘 모르겠어요. 연휴가 끝나고 다시 출근했을 때 사별이와 사현이는 없었어요. 제가 사모님께 물었더니 친부모님과 함께 있다고 하셨어요.”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의 친부모라면...나는 급히 물었다.“서당시에 있나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나는 또 물었다.“유 회장님은 집에 계신가요?”이제야 사별이와 사현이가 내 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그들을 품에 꼭 안은 채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손을 잡고 싶었다. 평범한 엄마들처럼 그들에게 젖을 물리고 싶었다.하지만...나는 이미 모유 수유를 끝냈다.아이들에게 젖을 물
“난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는 웃으며 물었다.“희연아, 내가 투자해도 될까?”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고마워, 수아야.”“네가 돌아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하자.”“윤아야, 너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나는 웃으며 답했다.“나도 마찬가지야.”난 이생에서 그녀를 만난 걸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다.통화를 마친 뒤 나는 비서와 함께 검사를 받으러 병원으로 갔다. 아직 예약 시간 전에 여유가 좀 있기에 오피스텔에 들러 석지훈의 책, 을 챙겼다.그만 떠나려던 찰나 침대 머리맡에 있던 선물 상자를 치고 말았다.그건 새해에 고현성이 준 선물이었다.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고현성이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그가 과거에 많은 잘못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지금의 그는...과연 누가 사랑에서 후회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나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잘못까지.손을 뻗어 상자를 여는 순간 안에 든 사진을 보고 그만 충격을 받았다.놀람과 기쁨, 그리고 분노와 증오가 금세 뒤섞였다.어느새 가슴속의 설렘은 증오로 완전히 덮어버렸다.상자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더니 비서는 급히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차 키 줘.”그는 순순히 차 키를 건네주었다.나는 직접 운전해서 고씨 가문으로 향했지만 집사 말로는 고현성이 집에 없다고 했다. 그에게 전화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그의 회사로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 회사 건물 아래에서 그와 마주친 순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그의 얼굴을 향해 세게 내리쳤다.이토록 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운지 멍해 있었고 나는 울먹이며 외쳤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어떻게 내 두 아이를 숨길 수 있는 거지?나는 상자를 꼭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펑펑 울었다.상자 안에는 두 장의 아기 사진과 고현성이
나는 새벽 1시에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입이 바짝 말라 있었지만 다행히 비서가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나는 힘겹게 입을 열어 물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곧바로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왔다.“수술 결과는 어떤가요?”비서는 다정하게 대답했다.“수술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시간에 맞춰 약을 복용하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면서 더 이상 무리하지 않으시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뜻은 병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병의 악화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의 결과였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의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가서 쉬세요.”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머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내가 프랑스에 온 사실을 어쩌면 엄마한테 숨길 수 없는 게 당연했다.하지만 엄마가 나를 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나한테 엄마는 단지 혈연만 있을 뿐 낯선 존재였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적당히 핑계 대고 거절하세요.”비서가 방을 나간 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수술 부위가 너무 아파와서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의사는 진통제를 처방했고 이곳에서 계속 요양하라고 당부했다.원래는 빨리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몸이 너무 쇠약하다 못해 일주일 뒤에 실밥을 풀고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며칠 더 머물렀다. 거의 2월 초가 되어서야 운성시로 돌아갔다.2월은 이미 눈이 녹는 시기였고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봄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운성시로 돌아오자 그제야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시간이 되면 연씨 별장에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부모님께서 석지훈에 대해 이야기하실까 봐 두려웠다.나는 아직 부모님께 그와의 일을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모르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어쨌든 나와 고현성의 스캔들로 떠들썩했으니 말이다.그런데도 사건 이
윤 비서는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감정의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석지훈을 슬쩍 보더니 강해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라인에 떠도는 소문들 때문에 대표님께서 화가 나신 거죠.. 제 생각엔 아마 질투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연 대표님을 걱정하시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급히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까지 오신 거죠.”한쪽은 석지훈의 측근 비서, 다른 한쪽은 연수아의 측근 비서였다.두 사람 모두 자신의 대표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강해온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대표님도 하루 종일 석지훈 씨 생각뿐이었어요. 두 분께서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윤 비서는 날카롭게 지적했다.“석 대표님은 질투심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아마 연 대표님은 석 대표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숨기신 거겠죠. 오해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네요.”질투?질투심?!지금 석지훈을 귀머거리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갑게 경고했다.“다음엔 이런 일 없도록 해.”석지훈의 경고에 윤 비서는 이내 얼굴이 굳어졌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떠났다.그는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어쩔 바를 몰랐다. 다행히 수술은 순조롭게 끝났다.다만 그녀의 자궁은 제거되지 않았고 그녀한테는 비밀이었다.석지훈이 그녀에게 준 서프라이즈이기도 했다.수술이 끝난 뒤 그는 병실에서 그녀 곁을 지켰다.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차마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그녀가 거의 깨어날 때쯤 그는 서둘러 떠났다.굳이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자신의 병을 모른 척해주길 바랐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석지훈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윤 비서를 보더니 물었다.“아이 문제는 해결됐어?”윤 비서는 대답했다.“유씨 가문에서 돌려보냈습니다.”석지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운성시로 돌아가자.”헬리콥터를 타고 운산 별장에 도착하자 멀리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
진유겸이 정말로 최희연과 이혼할 줄이야!내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였는지 옆에 있던 현정우는 나를 달래며 말했다.“가주님, 희연 씨가 거짓말한 건 가주님이 걱정하실까 봐 그런 거 아닐까요?”나는 그녀가 나를 걱정해서 거짓말한 걸 이해한다.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났다.지금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일까?진유겸을 찾아가서 따지기라도 해야 할까?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내가 그러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아니면 굳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나를 속이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나는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운성시.몇 시간 동안 차를 탔더니 몸이 지쳐 있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쉬었다. 그러다 내일 수술을 하면 오랫동안 씻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이내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욕조에 몸을 담근 채 30분을 보냈다. 하마터면 잠들 뻔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얇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실로 돌아왔다.다음날, 나는 아직 해가 뜨기 전 깨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강해온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놀라서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죠?”그는 공손하게 설명했다.“대표님, 전 금방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부대표님께서 저한테 대표님을 프랑스까지 모시라 하셨습니다. 절차까지 모두 알려주셨으니 문제없을 겁니다.”연씨 가문이 고현성 때문에 파산한 뒤 강 비서는 내 곁에서 일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석씨 가문에 가서도 줄곧 출장만 했었다.함승윤은 석씨 가문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고 설명했고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강해온 역시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게 확실했다.물론 그 과정에서 고생이 많았겠지만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으니 다행이다.예전부터 함께했던 사람이 곁에 있으니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강해온과 현정우를 데리고 프랑스로 향했다.친엄마가 프랑스로 이민한 것 때문인지 프랑스에 대해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다만 함승윤이
내 목소리를 듣자 최희연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밝아졌다.그녀 역시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고 상처 위에는 노란 약물이 발라져 있었다. 보기에 아주 흉한 상태였다.하지만 그녀의 밝은 눈동자만이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나는 다정하게 대답했다.“그래, 나야.”“수아야, 와줘서 고마워.”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감사가 가득 담겨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그 말을 듣고 최희연은 고개를 저으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그냥 서준 씨가 좀 보고 싶어서... 서준 씨가 나를 떠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네. 이 2년 동안 내 삶은 정말 지옥 같았어. 너랑 유겸 씨가 곁에 없었더라면 난 아마 버티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어... 난 결국 서준 씨를 잊지 못했다는 걸.”그녀가 진유겸을 언급하자 나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퇴원하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결코 진유겸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그녀에게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고?”“유겸 씨랑 이혼하고 여기서 서준 씨를 지키며 살고 싶어.”그때 나는 그녀가 이미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이혼 증명서를 받은 상태라는 걸 알지 못했다.그녀는 오히려 내가 걱정할까 봐, 유겸 씨를 찾아가 문제를 일으킬까 봐 그렇게 말했다.그래서 그날 그녀는 나한테 거짓말을 했고 진유겸과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너 유겸 씨랑 이혼하겠다고? 미쳤어?”최희연은 휠체어에 앉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랫동안 고민한 결과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서준 씨야. 수아야, 난 이제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어.”그녀가 앉아 있는 휠체어는 말하지 않아도 진서준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진서준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죽을 만큼,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사랑했다. 심지어 진서준이 죽었다고 믿었을 때도 그의 곁에 남기를 원할 만큼 사랑했다.진서준이 없는 지난 10여 년 동안, 그녀는 마음
나는 사실 살고 싶었다. 이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수술하여 병세를 억제할수 있다면 약간 주저하더라도 시도해 보기로 했다.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 하나는 확실하다.전에 고현성과 함께 있을 때의 마음과는 완전히 달랐다.아마도 석지훈 때문일 것이다.나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지만 오직 그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텅 빈 상태였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온기조차도 석지훈이 준 것이었다.하지만 그는 이제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결국 이 모든 것은 헛된 꿈이었다....저녁 무렵 함승윤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가주님,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디죠?”함승윤은 메시지로 설명했다.“프랑스에 있는 의료 기관이 이 방면에서 매우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거기로 정했습니다. 수술을 진행하시는 분들은 모두 의학계에서 손꼽히는 권위자들이며 성공률은 95% 이상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함승윤은 항상 일을 철저하게 처리했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나는 그에게 답했다.“집사님 말대로 하겠습니다.”함승윤이 물었다.“가주님께서는 언제 프랑스로 출발하실 예정입니까?”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내일이요.”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고 프랑스라면 석지훈에게 들킬 가능성도 작았다.그러나 나는 몰랐다. 내가 가는 모든 길이 그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나는 그만 핸드폰을 치우고 최희연을 보러 떠났다. 문을 열자 현정우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왜 방에서 쉬지 않고 여기 있는 거죠?”현정우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어젯밤 가주님께서 혼자 밖에 나가셨으니까요.”어젯밤 고현성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단지 입구에서 쓰러졌을 것이다.나는 미안한 마음에 웃으며 말했다.“미안해요. 같이 병원에 가주세요.”병원에 도착하자 최희연은 없었다. 의사는 그녀가 어젯밤에 이미 퇴원했다고 했다.어제만
나는 문득 어젯밤 나한테 재수 없다고 말했던 그 택시 기사를 떠올렸다.이미 고현성이 이 일에 개입했으니 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나는 내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하지만 석지훈에게 연락할 용기는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차마 짐작할 수 없었다.하지만 고현성과 의사가 한 말은 옳았다. 나는 그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것만이 내 병을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나는 함승윤에게 메시지를 보내 내 결정을 전했다.그는 이내 답장을 보냈다.“바로 이 분야의 교수님을 섭외하겠습니다.”...석지훈은 별장에서 밤새 그녀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 윤 비서는 그녀가 또다시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했다.실시간 검색어라는 말만 들어도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왜냐하면 그녀는 항상 다른 남자와 얽혀서 검색어에 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한 행동이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비난 역시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다.석지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사진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고현성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더 큰 건 연수아를 향한 분노였다.그녀는 끊임없이 그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정말로 질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정말로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걸까?석지훈은 차가운 목소리로 윤 비서에게 말했다.“고현성한태 전해. 만약 다시 선을 넘는다면 고씨 가문을 잃을 각오를 하라고.”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수아 쪽은 잠시 석씨 가문의 자리를 남겨둬.”석지훈은 석씨 가문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그 자리에서 석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에게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건드리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그녀의 것이기 때문이었다.윤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머뭇거리자 석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뭔데?”윤 비서는 답했다.“현정우가 전화를 걸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