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것저것 팔고 있지.”담담히 대꾸하던 연시혁은 이내 말을 덧붙였다.“학력도 없고 경험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일밖에 없더라.”“그런 것도 다 경험 쌓는 거니까 도움 될 거야.”“나는 안정된 직업을 찾고 싶어. 이연이가 나 용서 안 해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내가 아이 아빠잖아. 혼자가 아니니까 적어도 내 일 하나는 잘 해내야지. 아직은 내가 이연이랑 우리 딸 볼 자격이 없겠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이연이가 결혼을 안 했다면 나 꼭 우리 이연 다시 데려올 거야.”“승승장구하는 게 쉽진 않을 거야.”송이연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녀를 다시 데려오는 것도,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내 말에 공감하는 건지 연시혁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내가 여기 온 이유를 물었다.아이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한 송이연 때문에 나는 순발력으로 거짓말을 꾸며냈다.“나 골수 이식해야 된다는 데, 좀 도와줄 수 있나 해서 왔어.”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연시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너 또 무슨 병 걸렸어?”“이번에는 백혈병이라네.”“너도 참 사는 게 힘들겠다. 자궁암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백혈병이야. 어릴 때는 신장이 문제더니.”연시혁은 말로는 나를 나무라면서도 결국에는 기증에 동의해줬다.나와 그의 사이는 늘 이랬다.우리는 서로 투덕거리면서도 진짜 한 가족처럼 끝까지 서로의 손만은 놓지 않는 사이였다.병원에 가서 적합성 검사를 마치고 나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연시혁은 마침 간병인에게 안겨있는 승아를 보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이연이 닮지 않았어?”연시혁의 말을 들은 나는 일부러 간병인을 향해 손을 저어 보이자 그는 나를 아는체하지 않고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갔다.“너 승아 본 적 없어?”간병인의 어깨에 얼굴을 걸친 채 웃고 있는 승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연시혁이 아쉬운 듯 답했다.“응, 이연이가 못 보게 해서.”송이연이 마음을 독
“보통 임산부들은 12주에 건강검진을 하거든요. 혹시 쌍둥이나 세쌍둥이를 임신했을 수도 있는데 안 궁금하세요?”의사도 그냥 경우의 수를 제시한 것 뿐이기에 나는 의연하게 말했다.“기형아 검사할게요.”내가 침대에 눕자 초음파검사를 시작한 의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만에 입을 연 의사가 쌍둥이라는 말을 할 때 나는 정신이 멍해지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그래서 나에게 태아 심박을 들어보겠냐고 물어보는 의사에 나는 그게 뭐냐는 멍청한 질문까지 해버렸다.“너무 기뻐서 정신 못 차리는 거 아니에요?”“우리 아기 심장 소리 말씀하시는 거예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의사에 내가 고개를 저으며 묻자 의사는 나에게 청진기를 건네주며 말했다.“네, 와서 들어보세요.”청진기를 귀에 꽂으니 미약한 아이의 심장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들어 본 소리 중에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이게 두 아이의 심장 소리예요?”“자세히 들어봐요.”내 전문분야가 아니어서 청진기를 계속 끼고 있어 봐도 두 아이의 심장 소리를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그 소리들은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까지 와닿아 있었다.기형아 검사를 마치고 산부인과를 나온 나는 뒤에 있던 현정우를 보며 말했다.“기형아는 없고 오히려 쌍둥이래요. 애들은 다 건강한데 내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나는 내가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가장 의문이었다.그런 내 우려를 보아낸 듯 현정우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주님, 아이들은 괜찮을 겁니다.”“네, 괜찮아야죠.”얼마 뒤 연시혁의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자 나는 바로 송이연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그가 골수를 기증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송이연은 기뻐하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시혁 씨가 언제 검사를 한 거에요?”“며칠 전에 내가 백혈병 걸렸다고 거짓말하고 검사시켰거든요. 그래서 시혁이는 승아가 아픈 거 몰라요. 이연
“걱정 마세요 엄마.”엄마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나는 아빠를 보며 말했다.“아빠, 엄마 데리고 이만 돌아가 보세요. 아이 낳고 나서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지금은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고 부모님이 있으면 고현성에게 마음대로 짜증 낼 수도 없었기에 나는 일단 그들부터 돌려보내려 했다.그리고 미국에 가서 치료를 했다고 한들 잘됐는지도 모르기에 나는 늘 그의 다른 인격이 갑자기 튀어나올까 봐 무서웠다.지금까지 이를 악물며 버텨왔으니 끝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만 했다.그러기 위해선 요주의 인물은 고현성을 만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내 강한 의지를 보아 낸 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나가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너는 항상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으니 우리한테 돌아가라고 하는 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겠지. 그럼 우린 이만 가볼 테니까 무사하다는 연락만이라도 해줘.”“고마워요 아빠.”부모님이 나가자마자 나는 현정우를 불러들였다.“부르셨습니까 가주님?”“앞으로 보름 동안은 이곳에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상해 가는 몸에 나는 보름도 되기 전에 수술대 위에 누워야만 했다.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지키고 싶었던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워서도 의사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부터 살려요.”“힘 아껴야 하니까 말씀 그만 하세요.”자연분만은 어려운 몸이었기에 나는 마취를 하고 제왕절개를 하기로 했다.마취제 때문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산모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빨리 출혈부터 잡아!”...고현성은 병실을 빠져나가 의사에게로 향했다.“당신 석씨 집안 사람이지?”“그런데요?”“내가 4개월 동안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봤거든.”목적성이 다분해 보이는 고현성의 말에 의사는 자연스레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왜 제 뒷조사를 하신 거죠?”“아이 나한테 넘겨.”고현성이 가리키는 아이는 연수아가 낳을 아이들이었
수술을 하는 동안 나는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아직 걸을 줄도 모르는 아이 둘은 기어 다니고 있었고 옆에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앉아있었다.그렇게 네 식구 모두가 행복하게 웃는 달콤한 꿈이었다.“수아 씨, 눈 좀 떠봐요...”꿈결에 나를 부르는 한 목소리를 들은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물었다.“아이는요?”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간호사는 봉합을 하며 말했다.“일단 봉합부터 하고 나가면 애들 볼 수 있을 거예요.”곧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웃을 수 있었다.당장이라도 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싶은 마음에 나는 입이 귀에 걸린 채 VIP 병실로 향했는데 송이연은 줄곧 빨개진 눈을 한 채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큰 눈물방울이 매달려있는 그 눈을 보며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우리 애들 예뻐요?”“네, 엄청 예뻐요. 그렇게 예쁜 아이들은 처음 봐요.”“둘 다 딸이에요 아니면 아들이에요?”“일남 일녀에요.”“그런데 이연 씨는 별로 기뻐 보이지가 않네요.”나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하고서도 기쁘게 웃어 보였다.“너무 힘드네요. 상태가 안 좋아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애들도 신생아실에 있어야 하니까 볼 수가 없잖아요. 저 얼른 자고 몸 회복해서 만나러 가야겠어요.”기절하듯 잠든 나는 또다시 아까 그 꿈을 꿨는데 이번에는 아이들 없이 석지훈만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윤아야.”꿈속의 남자는 나를 부르며 나에게 손짓했지만 두 번이나 그를 보러 핀란드까지 간 나를 거절한 남자였기에 나는 그에게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혹시 또 상처를 받게 될까 무서웠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때 차가운 표정을 한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윤아야, 애들은?”그 질문에 깜짝 놀란 나는 순간 눈을 떠버렸고 송이연은 놀란 나를 진정시키며 손을 잡아주었다.“무슨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애들은요?”송이연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묻자 불길한 예
희망을 잃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막막했다.“수아 씨한테는 아직 남은 날이 많아요, 아이들도 항상 수아 씨 곁을 지키고 있을 거니까 힘내요.”송이연의 위로를 듣고 난 나는 냉랭해진 아이의 팔을 부여잡으며 한참을 울다가 결국 기절해서 병실로 옮겨졌다.3일 뒤, 내가 눈을 떴을 때 현정우는 함승윤의 분부에 따라 아이들은 석씨 가문 묘지에 묻혔다고 알려주었다.“내가 아이를 낳았었나요?”하지만 내 질문에 현정우는 바로 말을 바꿨다.“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나는 이렇게 나 자신부터 속이기로 하고는 눈을 감고 말했다.“동성으로 갑시다.”현정우가 나가고 병실에 홀로 남은 나는 창밖에 펼쳐진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노을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건 곧 밤이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아무리 눈이 부셔도 어차피 밤이 되면 사라질 빛들이었다.하지만 아직은 남아있는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나는 눈을 감고 아이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아가들아, 안녕.너희들만 떠올리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앞으로는 너희 생각을 이렇게 자주 하지는 못할 것 같아, 언젠가 엄마가 무뎌지면 그때 다시 너희들을 떠올려볼게.일 처리 하나는 빠른 현정우 덕분에 나는 곧바로 동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혹시라도 송이연과 인사를 하게 되면 승아를 보고 내 아이들을 떠올리기라도 할까 봐 나는 그녀 몰래 동성으로 떠났다.그렇게 8월에 태어난 사자자리의 아이들은 성도 이름도 얻지 못한 채 그곳에 잠들어버렸다....동성에 돌아간 뒤 나는 오피스텔에서만 묵으며 두 달 동안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타투이스트를 찾아가서 제왕절개를 한 자국 위로 리시안서스를 그려 넣었다.꽃잎이 한 겹 한 겹 쌓일수록 내 상처도 조금씩 가려지는 것 같았다.집에서 쉬는 두 달 동안 부모님, 윤다은, 고정재 등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상황을 물어왔는데 나는 그들에게 일일이 아이는 지키지 못했다는 답장을 보내주었다.짧디짧은 그 한 문장을 보낼 때마다 나는 영혼이 깎여나가는 고통을 감
오피스텔 주소를 보내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윤다은이 디저트까지 사 들고 집안으로 들어섰다.“디저트는 뭐하러 사와?”“그래도 빈손으로 올 순 없잖아요.”“고마워.”윤다은은 전혀 어색함 없이 알아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술 두 병을 골라내왔다.하지만 내 몸 상태를 걱정해준 건지 나에게는 한 잔만 따라주고 나머지는 본인이 다 마셔버렸다.주량이 꽤 센 윤다은은 술을 두 병이나 마시고 나서도 나에게 농담을 건넬 정신이 남아있었다.그녀는 바로 일어나서 술을 한 병 더 꺼내왔지만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그 한 병까지 마시고 나니 윤다은은 비로소 인사불성이 되어 내 옆에 쓰러졌다.나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다은 씨, 우리 둘 다 참 불쌍한 것 같아.”한숨을 내쉰 나는 하얀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진하게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경호팀은 그냥 여기 있어요.”“하지만 가주님 신변에...”“안 죽어요.”현정우는 나를 보며 당황했지만 단호한 내 명령에 토를 달지 않고 나에게 검은 우산을 건네주었다.8개월 전 그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그날 석지훈은 기어코 내 손을 놓아버렸다.제 처지가 우스워 헛웃음을 흘린 나는 바로 택시를 잡아 반 씨 가문으로 향했다.오늘은 반경우 누나의 약혼식이 있는 날이라서 반 씨 가문은 평소와 다르게 아주 북적거렸다.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반경우는 나를 한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좀 있다 담현우도 올 거야.”아까 담현아가 술 마시자고 연락한 일을 떠올린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현아도 와?”“걔는 금방 귀국했다고 힘들어서 안 온대.”반경우는 내가 건네는 우산을 받아들며 나에게 당부했다.“오늘 오는 손님 많으니까 얌전히 있어. 괜히 아무 말이나 하고 다녔다가 너만 손해 봐.”“지금의 내가 무슨 손해를 보겠어.”“하긴, 넌 이제 석씨 가문 가주니까 별문제는 없겠다.”나를 향해 웃어 보인 반경우는 다른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고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정원 뒤편
나는 말을 채 끝맺지 않고 담배부터 끈 다음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주님, 지시하실 일 있으십니까?”나는 스피커폰으로 돌린 채 입을 열었다.“유서정 씨 지금 반 씨 가문 저택에 있어요. 유서정 씨가 고현성 씨한테 했던 거 그대로 돌려주세요.”“네, 가주님.”내가 전화를 끊자 유서정은 벌써부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앞으로는 사람도 봐가면서 건드려요.”지금의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만만하던 연수아가 아니었기에 상황파악을 마친 유서정은 무릎을 꿇고 내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애원했다.“수아 씨, 나 한 번만 봐줘요. 한 번만 살려줘요...”나는 몸을 낮춰 유서정의 화려한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이제 겁이 좀 나나 봐요?”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오혜원이랑 짜고 내 사랑을 망친 것도, 고현성한테 최면을 건 것도 다 유서정 씨 본인이에요. 그런 짓을 했으면 죽은 듯이 살아갈 것이지 왜 내 앞에 나타나요. 그래놓고 나한테 봐달라고 하는 건 경우가 아니지.”유서정이 고현성한테 최면만 걸지 않았더라면 고현성이 그렇게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지도 않았을 것이다.“연수아 씨만 아니었으면...”나는 유서정의 말을 자르며 내 할 말만 전했다.“나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고현성과 결혼 했을 거라고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고작 결혼 따위가 고현성 발목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그럼 내 지난 3년은 뭐였죠?”나한테 빌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느낀 유서정은 바로 담유미에게 사정해봤지만 담유미는 하이힐을 신은 채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정원을 빠져나갔다.나는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절망스러울 유서정에게로 다가가 속삭였다.“봐요, 이게 유서정 씨가 그렇게 믿던 우정이니까.”유서정의 팔을 차며 걸어가던 나는 2층에서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보았는데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무표정으로 내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1년 전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나를 복 있는 그에 나는 웃으며 물었다.“재
동성시는 운성에 버금갈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었는데 그 명성답게 지금도 소나기가 매서운 바람과 함께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다.나는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고 내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에 나는 하이힐을 신은 발로 땅을 디디며 말했다.“비켜주실래요?”내리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고 있어 석지훈의 표정의 희미하게 보여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그때 그가 갑자기 손을 뻗더니 차가운 손바닥으로 뜨거운 내 볼을 매만졌다.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윤아야, 내가 미워?”석지훈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 내 마음을 불타는 것처럼 뜨겁기만 했다.그와 헤어지고 나서 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석지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전처럼 이렇게 내 볼을 쓰다듬어 왔다.그에 화가 난 나는 뒤로 한발 물러나며 언성을 높였다.“누구신데 이러세요? 한 번만 더 제 몸에 손대시면 저도 안 참을 겁니다.”“나 기억 안 나?”내 말에 석지훈은 놀란 듯 물었지만 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그를 지나쳐갔다.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모르고 싶었다.그냥 다시는 그를 알고 싶지 않았다.그와 헤어질 때, 그에게 두 번이나 만남을 거절당할 때 받았던 상처가 너무 커서 내 마음에는 이미 상처가 날 자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래서 나는 그냥 모른 척 자리를 떠나버렸다.디자인으로 등에 구멍이 뚫려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 내리는 비 때문에 안이 살짝씩 들여다보였지만 다행히도 오는 길에 사람은 얼마 없었다.오피스텔 단지에 들어선 나는 주위에 한 명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든 채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었고 또 눈을 떠서 번개가 치는 것도 보았다.빗줄기는 마치 이 세상을 무너뜨리기라도 할 작정으로 거세져 갔다.나는 그 빗속에서 한마디를 남기고는 이만 집으로 들어갔다.“재미없어.”가뜩이나 재미없는 내 생활에 석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