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됐네요, 승아랑 이연 씨 같이 돌 볼 수 있어서.”내 손을 꽉 잡으며 말하는 송이연은 마치 힘내라고 나를 응원을 해주는 것 같았다.“괜찮아요, 정우 씨랑 다른 경호원들도 있어서 난 알아서 잘 있을 수 있어요.”내 말에 송이연은 내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보며 말했다.“그래도 다 남자들이잖아요, 난 또 유경험자니까 도움 될 거에요.”“고마워요.”송이연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되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니에요, 수아 씨 그럼 나 대신 우리 승아 잠깐만 봐줄 수 있어요? 나 회사 가서 일 처리하고 승아 골수 이식해줄 사람도 구해봐야 할 것 같아요.”“당연하죠, 저도 사람 시켜서 알아볼게요.”송이연이 승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병실을 나가자 나는 바로 연시혁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아서 결국 문자를 남겼다.[어디야?]연시혁의 문자를 받기도 전에 석씨 집안 사람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가주님, 한민수 씨가 방금 돈 보내왔습니다.”“네, 강해온 씨는요?”“아직 집안 업무를 익히고 있습니다.”“그럼 저 대신 강해온 씨가 업무 빨리 익힐 수 있게 좀 도와주세요. 함 집사님도 아시다시피 석씨 집안 가주들 옆에는 항상 믿을만한 비서가 있었잖아요. 강해온 씨는 제가 선택한 사람이긴 하지만 함 집사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석씨 집안에서 저를 도와 비밀리에 일 처리를 할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에요.”석씨 가문의 책임자로서 지위가 내 바로 아래인 사람이 바로 함승윤인데 강해온이 갑작스레 등장해서 권력을 나눠 가지면 혹시라도 못마땅한 감정이 생길 수 있으니 나는 그를 다독이기 위해 일부러 말을 길게 했다.하지만 함승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그런 말씀 마세요, 석씨 집안에서 오랫동안 있어 와서 저도 할 일 못 할 일 정도는 가릴 줄 압니다. 석만호 집사님이 강해온 씨가 가주님 따라서 집안에 들어올 테니 잘 가르치라고 당부도 하셨는걸요.”함승윤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연수아에게 자신의 충성
“무슨 일입니까?”그때 잠에서 깬 승아가 울며 칭얼대자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함승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석지훈 씨가 두 달 전 본인이 석씨 집안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윤 비서를 시켜서 진짜 신분에 대해서 알아봤답니다.”두 달 전이면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전이니 그때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석지훈은 나에게는 단 한 번의 언질도 없었고 자신의 미래가 어떨지 뻔히 다 알면서도 나를 막지 않았다.그저 나에게 석씨 가문을 돌려주기 위해 자신을 궁지에 빠뜨리는 이런 헌신적인 사랑은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나를 석씨 집안에 들일 수 있었을 텐데 석지훈은 일부러 나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이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내 손에 모든 걸 쥐여준 것이다.그래서 내가 두 번이나 핀란드에 찾아갔을 때도 나를 만나주지 않은 것이다.석지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왔지만 나는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말을 이었다.“앞으로 그 사람에 관한 건 보고 안 해도 돼요. 출산 전 까진 상주시 병원에 있을 테니까 사람 시켜서 석씨 가문 자료 좀 보내주세요.”“제가 직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 그럼 수고해주세요.”전화를 끊고 난 나는 현정우를 보며 물었다.“함 집사는 지훈 오빠를 언급할 수 있어도 경호팀은 그럴 수 없죠?”“저희 스무 명은 더 이상 그분을 입에 올릴 수 없습니다.”“아쉽네요. 오빠를 옆에서 지켜주었으니 그 사람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게 경호팀인데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도 경호팀이니.”담담히 웃으며 내뱉는 내 말에 현정우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나도 더는 말하지 않고 승아를 달래고 있었는데 때마침 연시혁이 문자를 보내왔다.[지금 상주시야.]문자를 확인한 내가 승아를 현정우에게 넘겨주자 그는 혹시 힘을 주었다가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엉거주춤한 자세로 승아를 꼭 안고 있었다.나는 곧바로 연시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입을 열었다.“상주시 어디에 있는데
“그냥 이것저것 팔고 있지.”담담히 대꾸하던 연시혁은 이내 말을 덧붙였다.“학력도 없고 경험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일밖에 없더라.”“그런 것도 다 경험 쌓는 거니까 도움 될 거야.”“나는 안정된 직업을 찾고 싶어. 이연이가 나 용서 안 해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내가 아이 아빠잖아. 혼자가 아니니까 적어도 내 일 하나는 잘 해내야지. 아직은 내가 이연이랑 우리 딸 볼 자격이 없겠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이연이가 결혼을 안 했다면 나 꼭 우리 이연 다시 데려올 거야.”“승승장구하는 게 쉽진 않을 거야.”송이연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녀를 다시 데려오는 것도,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내 말에 공감하는 건지 연시혁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내가 여기 온 이유를 물었다.아이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한 송이연 때문에 나는 순발력으로 거짓말을 꾸며냈다.“나 골수 이식해야 된다는 데, 좀 도와줄 수 있나 해서 왔어.”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연시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너 또 무슨 병 걸렸어?”“이번에는 백혈병이라네.”“너도 참 사는 게 힘들겠다. 자궁암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백혈병이야. 어릴 때는 신장이 문제더니.”연시혁은 말로는 나를 나무라면서도 결국에는 기증에 동의해줬다.나와 그의 사이는 늘 이랬다.우리는 서로 투덕거리면서도 진짜 한 가족처럼 끝까지 서로의 손만은 놓지 않는 사이였다.병원에 가서 적합성 검사를 마치고 나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연시혁은 마침 간병인에게 안겨있는 승아를 보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이연이 닮지 않았어?”연시혁의 말을 들은 나는 일부러 간병인을 향해 손을 저어 보이자 그는 나를 아는체하지 않고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갔다.“너 승아 본 적 없어?”간병인의 어깨에 얼굴을 걸친 채 웃고 있는 승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연시혁이 아쉬운 듯 답했다.“응, 이연이가 못 보게 해서.”송이연이 마음을 독
“보통 임산부들은 12주에 건강검진을 하거든요. 혹시 쌍둥이나 세쌍둥이를 임신했을 수도 있는데 안 궁금하세요?”의사도 그냥 경우의 수를 제시한 것 뿐이기에 나는 의연하게 말했다.“기형아 검사할게요.”내가 침대에 눕자 초음파검사를 시작한 의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만에 입을 연 의사가 쌍둥이라는 말을 할 때 나는 정신이 멍해지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그래서 나에게 태아 심박을 들어보겠냐고 물어보는 의사에 나는 그게 뭐냐는 멍청한 질문까지 해버렸다.“너무 기뻐서 정신 못 차리는 거 아니에요?”“우리 아기 심장 소리 말씀하시는 거예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의사에 내가 고개를 저으며 묻자 의사는 나에게 청진기를 건네주며 말했다.“네, 와서 들어보세요.”청진기를 귀에 꽂으니 미약한 아이의 심장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들어 본 소리 중에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이게 두 아이의 심장 소리예요?”“자세히 들어봐요.”내 전문분야가 아니어서 청진기를 계속 끼고 있어 봐도 두 아이의 심장 소리를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그 소리들은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까지 와닿아 있었다.기형아 검사를 마치고 산부인과를 나온 나는 뒤에 있던 현정우를 보며 말했다.“기형아는 없고 오히려 쌍둥이래요. 애들은 다 건강한데 내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나는 내가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가장 의문이었다.그런 내 우려를 보아낸 듯 현정우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주님, 아이들은 괜찮을 겁니다.”“네, 괜찮아야죠.”얼마 뒤 연시혁의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자 나는 바로 송이연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그가 골수를 기증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송이연은 기뻐하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시혁 씨가 언제 검사를 한 거에요?”“며칠 전에 내가 백혈병 걸렸다고 거짓말하고 검사시켰거든요. 그래서 시혁이는 승아가 아픈 거 몰라요. 이연
“걱정 마세요 엄마.”엄마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나는 아빠를 보며 말했다.“아빠, 엄마 데리고 이만 돌아가 보세요. 아이 낳고 나서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지금은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고 부모님이 있으면 고현성에게 마음대로 짜증 낼 수도 없었기에 나는 일단 그들부터 돌려보내려 했다.그리고 미국에 가서 치료를 했다고 한들 잘됐는지도 모르기에 나는 늘 그의 다른 인격이 갑자기 튀어나올까 봐 무서웠다.지금까지 이를 악물며 버텨왔으니 끝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만 했다.그러기 위해선 요주의 인물은 고현성을 만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내 강한 의지를 보아 낸 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나가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너는 항상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으니 우리한테 돌아가라고 하는 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겠지. 그럼 우린 이만 가볼 테니까 무사하다는 연락만이라도 해줘.”“고마워요 아빠.”부모님이 나가자마자 나는 현정우를 불러들였다.“부르셨습니까 가주님?”“앞으로 보름 동안은 이곳에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상해 가는 몸에 나는 보름도 되기 전에 수술대 위에 누워야만 했다.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지키고 싶었던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워서도 의사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부터 살려요.”“힘 아껴야 하니까 말씀 그만 하세요.”자연분만은 어려운 몸이었기에 나는 마취를 하고 제왕절개를 하기로 했다.마취제 때문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산모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빨리 출혈부터 잡아!”...고현성은 병실을 빠져나가 의사에게로 향했다.“당신 석씨 집안 사람이지?”“그런데요?”“내가 4개월 동안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봤거든.”목적성이 다분해 보이는 고현성의 말에 의사는 자연스레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왜 제 뒷조사를 하신 거죠?”“아이 나한테 넘겨.”고현성이 가리키는 아이는 연수아가 낳을 아이들이었
수술을 하는 동안 나는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아직 걸을 줄도 모르는 아이 둘은 기어 다니고 있었고 옆에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앉아있었다.그렇게 네 식구 모두가 행복하게 웃는 달콤한 꿈이었다.“수아 씨, 눈 좀 떠봐요...”꿈결에 나를 부르는 한 목소리를 들은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물었다.“아이는요?”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간호사는 봉합을 하며 말했다.“일단 봉합부터 하고 나가면 애들 볼 수 있을 거예요.”곧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웃을 수 있었다.당장이라도 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싶은 마음에 나는 입이 귀에 걸린 채 VIP 병실로 향했는데 송이연은 줄곧 빨개진 눈을 한 채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큰 눈물방울이 매달려있는 그 눈을 보며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우리 애들 예뻐요?”“네, 엄청 예뻐요. 그렇게 예쁜 아이들은 처음 봐요.”“둘 다 딸이에요 아니면 아들이에요?”“일남 일녀에요.”“그런데 이연 씨는 별로 기뻐 보이지가 않네요.”나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하고서도 기쁘게 웃어 보였다.“너무 힘드네요. 상태가 안 좋아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애들도 신생아실에 있어야 하니까 볼 수가 없잖아요. 저 얼른 자고 몸 회복해서 만나러 가야겠어요.”기절하듯 잠든 나는 또다시 아까 그 꿈을 꿨는데 이번에는 아이들 없이 석지훈만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윤아야.”꿈속의 남자는 나를 부르며 나에게 손짓했지만 두 번이나 그를 보러 핀란드까지 간 나를 거절한 남자였기에 나는 그에게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혹시 또 상처를 받게 될까 무서웠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때 차가운 표정을 한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윤아야, 애들은?”그 질문에 깜짝 놀란 나는 순간 눈을 떠버렸고 송이연은 놀란 나를 진정시키며 손을 잡아주었다.“무슨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애들은요?”송이연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묻자 불길한 예
희망을 잃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막막했다.“수아 씨한테는 아직 남은 날이 많아요, 아이들도 항상 수아 씨 곁을 지키고 있을 거니까 힘내요.”송이연의 위로를 듣고 난 나는 냉랭해진 아이의 팔을 부여잡으며 한참을 울다가 결국 기절해서 병실로 옮겨졌다.3일 뒤, 내가 눈을 떴을 때 현정우는 함승윤의 분부에 따라 아이들은 석씨 가문 묘지에 묻혔다고 알려주었다.“내가 아이를 낳았었나요?”하지만 내 질문에 현정우는 바로 말을 바꿨다.“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나는 이렇게 나 자신부터 속이기로 하고는 눈을 감고 말했다.“동성으로 갑시다.”현정우가 나가고 병실에 홀로 남은 나는 창밖에 펼쳐진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노을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건 곧 밤이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아무리 눈이 부셔도 어차피 밤이 되면 사라질 빛들이었다.하지만 아직은 남아있는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나는 눈을 감고 아이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아가들아, 안녕.너희들만 떠올리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앞으로는 너희 생각을 이렇게 자주 하지는 못할 것 같아, 언젠가 엄마가 무뎌지면 그때 다시 너희들을 떠올려볼게.일 처리 하나는 빠른 현정우 덕분에 나는 곧바로 동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혹시라도 송이연과 인사를 하게 되면 승아를 보고 내 아이들을 떠올리기라도 할까 봐 나는 그녀 몰래 동성으로 떠났다.그렇게 8월에 태어난 사자자리의 아이들은 성도 이름도 얻지 못한 채 그곳에 잠들어버렸다....동성에 돌아간 뒤 나는 오피스텔에서만 묵으며 두 달 동안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타투이스트를 찾아가서 제왕절개를 한 자국 위로 리시안서스를 그려 넣었다.꽃잎이 한 겹 한 겹 쌓일수록 내 상처도 조금씩 가려지는 것 같았다.집에서 쉬는 두 달 동안 부모님, 윤다은, 고정재 등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상황을 물어왔는데 나는 그들에게 일일이 아이는 지키지 못했다는 답장을 보내주었다.짧디짧은 그 한 문장을 보낼 때마다 나는 영혼이 깎여나가는 고통을 감
오피스텔 주소를 보내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윤다은이 디저트까지 사 들고 집안으로 들어섰다.“디저트는 뭐하러 사와?”“그래도 빈손으로 올 순 없잖아요.”“고마워.”윤다은은 전혀 어색함 없이 알아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술 두 병을 골라내왔다.하지만 내 몸 상태를 걱정해준 건지 나에게는 한 잔만 따라주고 나머지는 본인이 다 마셔버렸다.주량이 꽤 센 윤다은은 술을 두 병이나 마시고 나서도 나에게 농담을 건넬 정신이 남아있었다.그녀는 바로 일어나서 술을 한 병 더 꺼내왔지만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그 한 병까지 마시고 나니 윤다은은 비로소 인사불성이 되어 내 옆에 쓰러졌다.나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다은 씨, 우리 둘 다 참 불쌍한 것 같아.”한숨을 내쉰 나는 하얀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진하게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경호팀은 그냥 여기 있어요.”“하지만 가주님 신변에...”“안 죽어요.”현정우는 나를 보며 당황했지만 단호한 내 명령에 토를 달지 않고 나에게 검은 우산을 건네주었다.8개월 전 그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그날 석지훈은 기어코 내 손을 놓아버렸다.제 처지가 우스워 헛웃음을 흘린 나는 바로 택시를 잡아 반 씨 가문으로 향했다.오늘은 반경우 누나의 약혼식이 있는 날이라서 반 씨 가문은 평소와 다르게 아주 북적거렸다.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반경우는 나를 한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좀 있다 담현우도 올 거야.”아까 담현아가 술 마시자고 연락한 일을 떠올린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현아도 와?”“걔는 금방 귀국했다고 힘들어서 안 온대.”반경우는 내가 건네는 우산을 받아들며 나에게 당부했다.“오늘 오는 손님 많으니까 얌전히 있어. 괜히 아무 말이나 하고 다녔다가 너만 손해 봐.”“지금의 내가 무슨 손해를 보겠어.”“하긴, 넌 이제 석씨 가문 가주니까 별문제는 없겠다.”나를 향해 웃어 보인 반경우는 다른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고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정원 뒤편
최희연은 이곳에서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문을 열고 나가자, 왕자현은 붉은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컬러가 그에게는 전혀 과하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매력적인 느낌을 더했다.그는 복도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악기가 놓여 있었다. 그 악기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재민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자현 씨, 악기 다룰 줄 아세요?”정원에는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고 온천에서는 여전히 증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악기를 다루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배웠어요.”그는 말 그대로 고귀함이 물씬 풍겼다.최희연은 속으로 감탄했다. 왕자현은 정말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와도 같았다. 모든 게 완벽할뿐더러 온화하며 세심하게 다듬어진 느낌이었다.“자현 씨는 어릴 적부터 많은 걸 배우셨네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집안이 부유하다 보니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죠. 원하지 않는 걸 배울 이유도 없고 여유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악기를 배운 거죠.”부유한 집안에 대해 그는 마치 당연한 듯 말했다.그녀는 조금 시큰둥하게 말했다. “정말 부럽네요.”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부러워하는 거죠?”“부유한 집안이요.”그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더 이상 그녀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최희연은 그 곡을 이해할 수 없었다.악기라고 배운 적이 없었기에 감상하기 어려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률이 매우 아름다운 곡이었다.그녀는 왕자현 곁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진유겸이었다. 그녀는 별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혹여나 여기까지 찾아올까 봐 할 수없이 통화 버튼을 클릭했다.진유겸은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복도 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전화해서 뭐 하려고요?”진유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수아 씨가 그러는데 네가 결혼했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VIP 병실이었고 나는 크고 부드러운 병상에 누워 있었다. 눈앞에는 소파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그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더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깨어났어요?”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네, 지금 몇 시예요?” 석지훈은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새벽 3시예요.”“아, 그렇군요. 고마워요.”“별말씀을.”“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그는 가볍게 대답한 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유진이랑 태웅이는 수아 씨가 형수님이 되어주길 바라던데 전 아직 여자 친구 찾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네?”“수아 씨도 저를 둘째 오빠라고 부르세요.”둘째 오빠...석지훈은 2년 전부터 자신을 둘째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었다.마치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일부러 물었다.“왜요?”그는 돌아서서 나를 향해 물었다.“원하는 게 뭐예요?”나는 술에 취해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말했다.“절 가지세요.”웃음이 피식 나오는 석지훈이었다.“전 수아 씨를 갖고 싶지 않아요.”“너무 단호하시네요. 저 되게 쉬운데, 한 번 해보세요.”그 역시 그날 밤처럼 대답했다.“흥미 없어요.”나는 웃으며 말했다.“마침 잘됐네요. 우리 그냥 이렇게 끝내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왜 시나리오대로 안 가는 거예요?”나는 물었다.“뭔 시나리오죠?”“그날 술 취해서 비슷한 말을 했잖아요.”석지훈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전 이미 다 잊었어요. 그날 밤 술에 취했다 보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그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진짜 취했어요?”혹시 내가 취한 척하는 걸 눈치라도 챘나?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건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모습이었다.나는 그의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시크한 척은.비는 쏟아졌고 고현성은 계속해서 내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는 원래 그를 무시하고 떠날 생각이었지만 석지훈이 가볍게 말했다. “협박하고 싶지 않아요.”협박하고 싶지 않다...이미 협박이었다.나는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죠?”“말했잖아, 민수가 수아 씨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석지훈의 말투는 너무나 가벼워서 마치 오늘 이 일을 끝내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도 나를 놓아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어쨌든 이 일은 그냥 지나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고현성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비서한테 부탁해서 집까지 데려다줄게. 며칠 후에 다시 너랑 놀아주면 어때?”그의 눈빛엔 실망이 담겨 있었지만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 말을 따랐다.“알겠어.”그 말을 듣고 비서는 즉시 차에 올라타더니 고현성을 집으로 데려다줬다.고현성이 떠난 뒤 나는 석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지훈 씨의 성격상 민수 씨 부탁으로 절 데려갈 사람이 아닌데요? 혹시 저한테 관심이라도 생겼어요?”석지훈은 내 말을 듣더니 차갑게 쏘아봤다.나는 다시 물었다. “혹시 질투하는 건 아니죠?”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차로 돌아갔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윤 비서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수아 씨, 농담 그만하시고 얼른 차에 타세요.”나는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접고 차에 올랐다. 석지훈은 곁에서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몸이 계속해서 나른하고 불편해서 결국 눈을 감고 쉬기로 했다. 차가 거의 도착할 즈음, 석지훈이 갑자기 물었다.“자주 연락하세요?”석지훈이 가리키는 건 고현성이었다.“지훈 씨랑 상관없을 텐데요.”“그래, 상관없지.”석지훈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나는 몸 상태가 안 좋다 보니 힘없이 석지훈에게 말했다. “약속대로 저를 데려왔으
그의 촉촉한 눈망울을 마주하며 나는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먼저 옷부터 갈아입어.”고현성은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의 모습에 나는 잠시 눈이 반짝였다. 비서는 그에게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사주었고 흰색 니트는 그의 몸에 딱 맞아 보였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는 더욱 훤칠해 보였다.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가자.”나는 먼저 문을 나섰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 나섰다. 비서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서는 고현성에게 우산을 씌워주었고 나는 혼자서 우산을 썼다. 그런데 고현성은 나를 위해 우산을 씌워주고 싶어 했다.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했다.“말 들어.”고현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우산을 쓰고 앞서갔고 고현성과 비서는 뒤에서 따랐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를 때 나는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그때, 석지훈이 갑자기 몸을 살짝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윤아야.”기억을 되찾은 건가?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태웅이가 그렇게 불렀죠?”괜히 설렜네.내가 답을 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고현성이 급히 설명했다. “수아예요.”고현성은 내 앞에 서서 소유욕을 보이며 석지훈을 막아섰다.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쪽은?”“전 수아의 남편, 고현성이라고 해요”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조금 망설였다. 마치 자기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듯했다.계속해서 그를 현성이라고 부르자 석지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다시 물었다. “남편?”고현성은 확고하게 말했다.“네!”석지훈은 나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태웅이가 어젯밤까지 전남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고현성은 잠시 멈칫하더니 내게 물었다. “수아야, 전 남편이 뭐야?”석지훈은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그의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그는 절대로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물론 어젯밤에 그
“우리 와이프는 당연히 예쁘지.”“...”그 순간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뜨거운 우유 한 잔을 가져와 내내 뒤를 따라오던 고현성에게 건넸다.“따뜻한 우유 좀 마셔.”고현성은 내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고 원피스 밑단은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순순히 우유를 받아 마시고는 고양이처럼 입술을 핥았다.나는 갑자기 그 뚱뚱한 고양이가 떠올랐다.그 고양이는 언제나 고현성의 별장에서 먹고 마시며 돌아다니던 녀석이었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우유 잔을 손에 쥔 채 마치 초등학생처럼 공손하게 내 옆에 앉더니 지긋이 나를 쳐다봤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계속 나만 쳐다보는 거야?”“수아가 사라질까 봐.”나는 그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그는 손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우유 잔을 꽉 쥔 채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나는 항상 수아를 볼 수 없어. 꿈에서도 볼 수 없고, 사실 난... 진심으로 수아가 그리워. 언제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형은 수아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근데 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형은 수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 만약 수아가 사랑하는 사람이...”그는 잠시 멈추더니 계속해서 말했다.“그럼 난 누구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우리는 이미 과거의 인연일 뿐이었다.그는 대답을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으려 했다.나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지만 갑자기 고현성은 두려운 눈빛을 띠고 손을 뗐다.“수아야, 나 무서워.”“고현성,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나.”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분명히 나보다 더 예쁠 거야.”그는 급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안 돼, 난 수아만 원해. 형이 말했잖아, 수아는 내 와이프라고. 그게 과거일지라도 나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모
며칠 전에 석씨 별장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미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어젯밤 강물에 빠진 후로 바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파서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의사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약을 처방받은 뒤 링거를 맞았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깨어나니 이미 점심이었다.운성시는 다시 우중충한 날씨가 되었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고 눈은 오지 않았지만 초봄이라 비가 유난히 자주 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한민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그는 의도적으로 말했다.“오늘 밤 놀러 갈래?”“안 가요.”“알겠어, 그럼 끊을게.”전화를 끊고 배가 고팠지만 아직 링거를 맞고 있는 상태라 배달을 시킬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고정재가 전화를 걸어왔다.“집이야?”어젯밤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운성시의 아파트로 갔고 고정재는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그가 물어본 집은 바로 그 아파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어 고정재에게 물었다.“어느 집이요?”“아파트, 여기서 보니까 현성의 위치가 네 집 근처에 있더라. 근데 나 지금 지금 국내에 없어서 혹시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미안,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현성이가 네 말만 듣는 것 같아서.”“알겠어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나는 링거를 빼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고현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검은 우산을 들고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비에 젖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여전히 비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급히 달려가서 물었다.“여기서 뭐 해?”고현성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너 오늘 나 보러 온다고 했잖아. 근데 집에서 기다리다 못 참고 여기까지 왔어. 네 연락처도 없고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수아는 역시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그는 본능적인 기억을 따라 이곳으로 찾아왔다.“그럼 왜 비를 피하지 않고
방금 그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원태웅은 갑자기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방금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맞혀볼래?”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얼른 알려줘요.”“네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어.”이건 석지훈에게 꽤 어려운 일이었다.나는 웃으며 물었다.“그거 말고 또 있어요?”“그리고 오늘 밤에 한 말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냐고 하더라? 네가 형 앞에서 몇 번이고 그 얘기를 했다고.”석지훈은 이혼한 여자를 좋아할 이유가 있냐고 했었다.나 역시 그 말을 생각하면서 그의 앞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다. 나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럼 뭐라고 대답했어요?”“답을 못 할 뻔했지. 눈치도 못 채고 되레 형한테 물었단 말이야. 다른 여자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냐고?”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리고 오빠는 전화를 끊었겠죠?”“내가 방심했나 봐! 바로 둘째 형한테 메시지 보낼 거야. 누구든지 그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지, 특히 예쁘고 자존심 강한 여자는 더욱 상처받을 거라고 해야겠어.”원태웅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오빠들은 항상 둘째 오빠 앞에서 내가 예쁘다고 말하네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 원래 예쁘잖아. 아무래도 우리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형도 궁금해하지 않을까?”“괜찮아요, 이미 나에게 관심을 가진 것 같은데요?”이제는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우리 수아 자신감 넘치는데?”“당연한 거 아닌가요? 유진 씨도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오늘 깜짝 놀랐잖아요, 다행히 잘 넘겼지만.”그 말을 꺼내자마자 원태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네가 말 안 했으면 까맣게 잊었을 거야, 유진 때문에 둘째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전화해서 경고해야겠어.”원태웅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다른 한편...통유리 창 너머로 반짝이는 온 도시의 네온 불빛과 달리 집 안은 깜깜했다. 유일하게 석지훈의 핸드폰만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영상을 보고 나서 원태웅이 보낸 메
나만 손해를 보게 될 거라고?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손해 보는 게 그와 무슨 상관이지?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순간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내게 경고하듯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 세상에는 항상 더 강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수아 씨가 석씨 가문을 쥐고 있지만 그것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여지를 두는 게 결국 좋을 겁니다.”강가에 파도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훈 씨라는 건가요?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지훈 씨도 잘 알잖아요.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상처만 남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제가 왜 가만히 있어야 하죠? 그때마다 항상 사람들에게 당하기만 했는데 이제 석씨 가문을 제 손에 쥐었는데 제가 왜 참아야 하죠?”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말 고집이 심하네요.”나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지훈 씨 마음대로 하세요.”석지훈과 처음 만난 건 우리가 강에 빠졌을 때였다.그때 나는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었고 그 일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방금 내가 했던 말이 상처가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나는 서로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석지훈은 내 태도에 한참을 멈춰 서 있다가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강에 뛰어들었다.차가운 강물에 휩쓸려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수영을 거의 할 줄 몰랐다. 석지훈이 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 경호원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가 있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석지훈이 나를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쯤 누군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나를 물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나는 급히 그의 목을 끌어당긴 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속에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분명히 그에게 입을
나는 잠시 멈춘 뒤 말했다.“한씨 가문 쪽은 함 집사에게 맡겨. 어르신께서 운성시를 떠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만약 떠나려고 하면 지훈 씨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가두어 두면 돼. 참, 아까 어르신께서 에르크 별장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비서가 설명했다.“오늘 금방 운성시에 도착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속에 쌓인 분노를 가라앉혔다.고현성은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내 손을 꼭 잡은 채 위로를 건넸다.“수아야, 나 때문에 화내지 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이제 와서야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다니.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 화 안 났어.”그리고 곧장 물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고현성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훤칠했다.비록 정신이 온전치 않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다.“아까 민영이 따라 쇼핑몰에 갔다가 민영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거든. 그때 갑자기 그 여자가 나타난 거야. 나를 수아한테 데려다주겠다고 했어.”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여자는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난 수아를 만났고 수아는 내 손도 잡아 줬잖아.”그는 우리가 맞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나는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집까지 데려다주세요.”그러자 고현성은 서운한 듯 물었다.“수아야, 나를 보내려고? 이제 금방 만났는데...”그는 예전에도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그는 내가 이런 모습에 약하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곁에 있던 비서가 나를 대신해 말했다.“현성 씨,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대표님께서 현성 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 나면 곧 찾아가실 겁니다.”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수아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