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훈의 어머니가 한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내 신분이 불확실해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그런 지금 이미연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녀가 나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해 마음이 초조해졌다.진실이 알고 싶어 석지훈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려고 머리를 기울였을 때, 전화기 너머로 이미연은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한숨을 고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그 여자는 고현성의 전처야. 그런 몸으로 어떻게 내 아들이랑 어울릴 수 있겠어?”이미연이 말하려는 게, 내가 고현성의 전처라는 사실이었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미연의 우아한 목소리를 들었다.“지훈아, 내가 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는 네 엄마야. 적어도 며느리에 대한 요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니? 네가 그 여자와 잤을 때 그 여자가 피를 흘리기라도 했니? 그 여자는 그렇게 순수하지 않아. 그런데도 감히 내 아들을 넘보다니. 너 설마 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할 건 아니지? 지훈아, 넌 결벽증이 누구보다 심하잖아.”이미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찔렀다. 나는 순간 마음속에서 열등감이 한없이 커져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석지훈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석지훈은 줄곧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차가운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자 따스한 위로가 전해졌다.그 순간 내 마음속의 서운함은 눈 녹듯 사라졌고 방금 생겨난 열등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석지훈은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전화 너머의 이미연에게 말했다.“어머니,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머니는 날 친아들처럼 여기는 게 습관이 되셨나 봐요?”‘석지훈의 말은 무슨 뜻일까? 설마 석지훈이 석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는 뜻일까?’전화기 너머에서 이미연이 놀라며 말했다.“너 그걸 알고 있었구나.”석지훈은 이미연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그쪽하고 그 여자가 벌인 게임 따위에 나는
그 문자를 보니 나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연시혁이 언제 이렇게 망연자실한 적이 있었지?’하지만 이번엔 분명히 연시혁이 잘못한 일이었다.나는 송이연이 아니기에 연시혁을 대신 용서할 수도 없었지만 연시혁은 나의 가족이기에 나는 두 사람이 잘되길 바랐다.내가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연시혁에서 다시 메시가 도착했다.[내가 지금 너한테 말한 건 네가 날 좀 도와주길 바라서요.]나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미안해, 시혁아. 이연 씨의 행방은 나도 몰라. 이연 씨도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지만 이연 씨는 송씨 가문의 대표야. 너를 만나지 않을 방법은 이연 씨에게 얼마든지 있어.]연시혁은 짧게 답장을 보내왔다.[나도 알아.]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연시혁에게 물었다.[아이들은?][이연이가 데려갔어.]나는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몰라 핸드폰을 내려놓았지만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이때 석지훈이 몸을 돌려 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응? 잠이 안 와?”석지훈의 목소리는 막 잠에서 깬 듯 살짝 거칠었다.“그냥 별로 졸리지 않아요.”나는 대답한 뒤 살짝 몸을 돌려 석지훈의 목을 끌어안았다.그러자 석지훈은 나의 머리를 다독이며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나를 달랬다.“좀 더 자. 내일은 우리 동성으로 돌아가야 해.”나는 조금 실망하며 말했다.“며칠 더 있다가 가는 거 아니었어?”내 말을 들은 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들었어?”석지훈이 묻는 건 아침에 그와 비서가 나눴던 대화를 내가 들었냐는 것이었다.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조금 들었어요.”석지훈은 손바닥으로 나의 귀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남은 시간이 몇 달도 안 될 거야. 내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라 곁에 있어야 해.”유일한 아들이라는 단어가 석지훈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석씨 가문의 이번 대에는 자식이 오빠 혼자인 거예요?”윤승민의 말로는 석지훈에게 세
“전부 석씨 가문 묘지에 있어.”“전부 돌아가셨어요?”“응.”“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자살했어.”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석지훈은 이미 곁에 없었다. 손을 뻗어 창문을 열어 보니 윤승민이 정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지훈 오빠는 어디 갔어요?”내가 찡그리며 묻자 윤승민은 웃으며 대답했다.“대표님께서는 이른 아침에 석씨 가문의 사립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아가씨를 동성으로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어요.”나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윤승민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물었다.“아가씨, 기분이 안 좋으세요?”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사실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석지훈이 곁에 없으니 마음이 허전했다.윤승민은 나를 아파트로 데려다주었고 나는 집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와서 약을 바꿔주었다.다리의 상처는 내가 직접 확인해서 사실 심각해 보이진 않았지만 문제는 등 쪽의 상처였다.등에 큰 압력을 받아 자주 통증이 찾아왔다.의사가 떠난 뒤 나는 휠체어에 앉아 스스로 한약을 끌여 마시고 나서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언제 집에 와요?]석지훈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이번 달 말쯤.]이제 겨우 월초였다.석지훈은 혹시라도 내가 복잡하게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는지 곧바로 메시지 하나를 더 보내왔다.[며칠 뒤 비아드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비아드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한민영이 떠올랐다.한씨 가문은 석지훈과 특별한 관계였다. 한민영이 석지훈을 화나게 했음에도 석지훈은 한민영을 용서한 적이 있었다. 석지훈 같은 남자는 좀처럼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비록 석지훈이 한민영에게 한 차례 교훈을 주었지만 한민영이 나를 해친 일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에 나는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겠다고 다짐했다.나는 더 이상 석지훈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그 뒤로 한 달 동안 석지훈은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몇 번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꺼져 있었다
“어제 막 동성에 돌아왔어요.”담현아의 말에 나는 예의상 물었다.“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언니가 롤스로이스 최신 모델을 가지고 있다면서요?”담현아의 목적은 아주 명확했다.“회사에 세워뒀으니까 네가 와서 가져가.”나는 이런 것에 대해 별로 인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친구로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타이밍이 딱 좋게도 내가 퇴근하려던 참에 담현아가 도착했다.차 키를 들고 아래로 내려가니 담현아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언니, 내가 선물을 갖고 왔어요.”담현아는 이렇게 말하더니 나에게 천 가방 하나를 건넸다.가방을 열어보니 안에는 치즈 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담현아는 웃으며 설명했다.“베스니의 특산품이에요. 언니한테만 주는 거니까 싫어하지 마요. 내가 너무 가난해서 비싼 걸 살 수 없었어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담씨 가문의 딸인데 어떻게 가난할 수 있어? 근데 너 아직 운전면허도 못 땄지?”담현아는 아직 만 18세도 되지 않았으니 내가 괜히 물은 것이었다.“몰래 몰고 다니려고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담현아의 대담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차 키를 건넸다. 그녀는 차 키를 건네받고서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그 모습을 보니 담현아가 이전의 냉랭함과는 달리 요즘 유난히 친절한 것 같았다.혹시 차를 빌려달라고 부탁한 것이 미안해서 이러는 걸까?담현아가 차 키를 가지고 떠나자 마침 비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대표님, 저녁에 갑작스럽게 파티가 잡혔습니다.]나는 메시지로 물었다.[무슨 파티요?][담현우의 생일 파티입니다.]연씨 가문은 최근 담씨 가문과 비즈니스 관계를 맺고 있었다. 더구나 반경우가 소개해 준 친구였기에 이번 파티는 반드시 참가해야 했다. 역시 담현아가 오늘 동성으로 돌아온 것도 이유가 있었다.나는 비서에게 물었다.[장소는 어디죠?][크루즈 위입니다.]비서는 나를 데리러 내려왔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정교한 메이크업을 받고 비서와 함께
고정재는 나를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난간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눈에는 짙은 소유욕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크루즈 난간에 서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웃었다.나는 불안한 마음에 시선을 돌려 비서를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눈앞에 두 명의 경호원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그중 한 명이 냉랭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연 대표님, 고 대표님께서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거절한다면요?”경호원은 차갑게 말했다.“연 대표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실 겁니다.”그 모습을 보니 나를 강제로 크루즈에 태울 것 같았지만 나는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고현성이나 고정재와 어떤 접점도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나는 더 이상 그들과 엮여 스캔들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가 그들에게 가벼운 경고를 날렸다.“저쪽에 우리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아서 물러나세요.”그러나 경호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비서의 말을 무시했다. 나는 상황을 지켜보다 결국 고개를 돌려 고현성에게 말했다.“날 보내줘.”나와 고현성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기에 그는 나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그런데도 고현성은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나는 비서와 함께 바닷가를 떠나 차에 오르려는 순간 크루즈에서 피아노곡 [바람이 머무는 거리]가 들려왔다.나는 멈춰 서서 비서에게 물었다.“고정재가 연주하는 건가요?”고현성이 있는 자리라면 고정재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그 형제는 같은 자리에 함께 있는 법은 없었지만 담현우가 분명 고정재를 초대했다고 했다.비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고정재 씨는 아닌 것 같습니다.”나는 고정재의 연주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다른 사람과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이 곡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기술이며 감정 모두 고정재의 연주와 똑같았기에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고정재가
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담현아는 왜 바다에 빠진 거야?”나는 서둘러 담현우를 찾으러 갔다. 담현우는 마침 구조대와 대화하며 함께 바다로 나가겠다고 했다.담혀우는 나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현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담현우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인지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급히 담현우를 제지하며 말했다.“그럴 일 없을 거예요.”비록 나와 고현성 그리고 고정재는 관계를 이미 정리했지만 사랑을 떠나 두 사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들이었다.두 사람은 나를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지금의 나를 석지훈의 곁으로 이끌어준 존재들이었다.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걱정하며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다.나는 담현우에게 말했다.“나도 바다로 나갈게요.”담현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하지만 수아 씨는.”“현우 씨, 나도 두 사람과 현아가 걱정돼요.”결국 담현우는 요트를 준비해 나와 윤다은을 데리고 바다로 나갔다.출발 전 우연히 뒤를 돌아봤는데 바닷가에서 자리를 떠나려는 원태웅이 보였다.나는 마음속으로 의아했다.‘원태웅이 왜 여기 있는 거야?’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담현우에게 물었다.“현우 씨 원태웅도 초대했어요?”“아니요. 왜요? 원태웅 씨가 왔어요?”이 순간 바닷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들 크루즈에서 내린 사람들이었다. 나도 처음부터 원태웅을 보지 못했기에 우연히 그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원태웅도 분명 나를 봤을 텐데 왜 나에게 와서 인사를 하지 않은 걸까?‘원태웅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그냥 물어봤어요.”밤바다는 평온하지 않았다.다행히 담현우는 배를 다룬 경험이 풍부했고 구조대와 함께 주변 섬들을 수색했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설마 이미.’담현우는 나와 윤다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집 현아는 아주 강인한 아이예요.”담현우의 말투는 마치
“석씨 가문은 자선 사업을 하는 가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냉혹하고 무자비하죠. 석씨 가문과 협력하는 누구도 그들의 규칙을 깨뜨릴 수 없어요. GPS 글로벌 위치 추적 시스템을 다시 활성화하는 건 정말 꿈 같은 일이에요. 그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요.”담현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무력하게 말했다.“내가 원태웅에게 전화하면 분명 거절당할 거예요. 하지만 수아 씨가 전화한다면.”담현우는 내가 석지훈과 얽혔던 소문만 알고 있었다.아니 소문이라기보다는 석지훈이 성당에서 나를 안고 떠나거나 경찰서에서 나를 데려갔던 일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담현우는 아직 내가 석지훈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만약 알았다면 진작에 부탁했을지도 모른다.나는 핸드폰을 꺼내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태웅은 전화를 받자마자 나를 윤아라고 부르며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로 날 찾았어?”바닷바람이 갑자기 매서워졌다.우리 셋은 요트 안으로 몸을 피했고 나는 급히 원태웅에게 물었다.“담현아의 GPS를 활성화해 줄 수 있어요?”원태웅은 나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을 끊었다.“미안해.”나는 간절히 부탁했다.“오빠.”원태웅은 난감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윤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만 GPS 글로벌 위치 추적 시스템은 형이 전적으로 관리하는 거라 나에게는 권한이 없어. 직접 형에게 전화해야 해.”나는 알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원태웅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형에게 부탁해서 너의 전남편과 옛 연인을 구하려고? 윤아야, 너라면 이 상황을 참을 수 있겠어?”나는 핸드폰을 꽉 쥐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원태웅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담현우를 쳐다보았다.담현우는 진지하게 말했다.“생명이 달린 문제예요. 수아 씨, 결정을 내려야 해요.”석지훈이 구해야 할 사람이 고씨 가문의 형제들이라는 걸 알게 되면 나는 결국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여전히 원태웅이 왜 여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더군다나 고현성과 그들이 어떻게 바다에 빠졌는지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마치 누군가 고의로 그 형제를 노린 것 같았다.십여 분 뒤 우리는 GPS가 가리키는 섬에 도착했다. 우리는 요트를 해변에 정박한 뒤 차가운 바닷물을 밟으며 상륙해 섬을 한 바퀴 돌며 수색한 끝에 마침내 그들 셋을 발견했다.담현아는 아무 걱정도 없는 표정으로 해변에 누워 있었고 고현성과 고정재는 해변에 앉아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 보고 있었다.나는 그들 쪽으로 다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셋 모두 옷이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그리고 담현아는 고정재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담현아는 우리를 보자 재빨리 재킷을 벗어 던지고서는 담현우에게 달려가 안겼다.담현우는 담현아를 꼭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추워?”담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많이 추워.”담현우는 슈트 재킷을 담현아에게 벗어주려 했지만 아까 윤다은에게 벗어줬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어쩔 수 없이 셔츠를 벗어 담현아에게 감싸 준 뒤 품에 꼭 껴안았다.윤다은도 빠르게 달려가 고정재를 껴안았다. 고정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윤다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난 괜찮아.”“오빠, 정말 걱정했잖아.”윤다은은 방금까지도 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지만 고정재의 품에서 조용히 느끼며 안정을 찾는 듯했다.나는 윤다은이 왜 그렇게 걱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몇십 년 동안 고정재를 사랑해 왔기 때문이다.고정재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은아, 나 괜찮아.”이 모습을 지켜보던 고현성은 비웃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윤다은, 네가 고정재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무시할 줄은 말랐네. 네 눈에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거니?”고현성의 말에 고정재는 윤다은을 살짝 밀어내며 담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담현아는 여전히 담현우의 품에 안겨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윤다은은 고정재가 밀어내
그가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다정하게 물었다.“아직 졸려?”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장례를 치르는 건가요?”“그래,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나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은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석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러 나섰다. 관을 덮는 순간, 석지훈의 눈가가 계속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장례는 아침 9시에 끝났다. 우리는 석씨 집안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동성시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아랫배는 계속 아팠고 목에서는 쇳맛이 점점 짙어졌다.우리는 오후 한두 시쯤 아파트에 도착했다. 석지훈은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샤워를 한 뒤 곧장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나는 그가 잠든 틈을 타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도착한 곳은 석씨 집안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병원장은 내가 온 것을 알고 급히 달려와 나를 친절히 안내하며 검사를 도왔다. 그러나 CT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의사는 내 암이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나는 충격을 받은 채 물었다.“암이 완치됐다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재발할 수 있죠?”“가주님, 조금 전에 이전 진료 기록을 검토했는데 전에 앓으셨던 자궁암이 말기였습니다. 말기라는 건... 완치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현재 의료 기술로는 재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넉 달 전 난산을 겪으셨잖아요. 비록 치료가 제때 이루어졌지만 몸에 무리가 갔던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상태는 재발 초기 징후가 보이고 있으니 항암제를 다시 복용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재발 초기 징후라니... 언제든 병이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인가?나는 이미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었는데 이번에도 과연 또 기회가 있을까?죽음이 이번에도 나를 비켜가 줄까?나는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항암제 효과는 얼마나 있나요?”“가주님께서 이전에 드셨던 항암제는 석씨 집안에서 만든 약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치료 효과가 뛰어나 병세를
석지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내가 질문을 던지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 깊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누가 뭐라고 했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냥 물어보고 싶어서요.”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석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넌 거짓말할 때마다 고개를 젓고 눈빛이 흔들려서 날 똑바로 보지 못해. 윤아야, 어떤 소문을 들었든 한 가지만 믿어. 난 어떤 이유로도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네 손을 놓지 않을 거고.”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지만 고집스럽게 물었다.“그럼 오빠가 나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예요?”이전 같았더라면 석지훈 어머니의 말을 들은 뒤 혼자 속앓이하며 복잡한 생각에 빠졌겠지만 석지훈과 함께하면서부터는 모든 걸 명확히 물어보고 싶어졌다.석지훈은 내가 진지하게 답을 원한다는 걸 알고 한참 생각한 뒤 차분히 대답했다.“전에 네 이름은 들어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네 얼굴도 몰랐어. 너한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건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였고 네가 연씨 집안의 대표이자 고현성의 전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였어. 사실 네 신분을 더 일찍 알 수 있었지만 난 네 신분조사에 관심이 없었거든. 네가 연윤아라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었어. 진실이든 거짓이든 당시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석지훈이 우리가 민박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을 때 나는 믿었다.그가 뭐라 하든 난 그의 말을 믿었으니까.게다가 그 시기 석지훈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는 내가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가 그때 내 정체를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그러니 우리의 만남엔 어떤 불순한 의도도, 다른 요인도 없었다.그가 내가 접근하도록 내버려둔 건 단지 내가 ‘연윤아’였기 때문이지 모두가 오해하는 그 ‘신장’ 때문이 아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오빠는 왜 그때 내가 접근하도록 둔 거예요?”왜 내 오빠가 되어
공식 자리에서 나는 석수아로만 불릴 수 있다.석씨 성은 내가 석씨 집안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석지훈의 차분하지만 위압적인 말이 끝나자 한 중년 여성이 나섰다. 그녀는 뚱뚱한 청년의 팔을 붙잡아 끌어내며 담담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아이가 철없이 행동해 사모님을 언짢게 했네요. 지금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그녀가 바로 석지훈이 석지윤일 것이다.정당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석씨 집안의 방계 식구들은 적지 않았다.석지윤은 청년이 석지훈을 모욕하도록 내버려두다가 석지훈이 나를 언급하자 그제야 가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모욕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석지훈이 했던 ‘없앨 수도 있다’는 말은 석씨 집안의 방계들이 있는 곳에서 가주의 위엄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리고 이 뚱뚱한 청년은 본보기가 될 만한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그에게 문제였던 건 단 하나, 자신의 입을 조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호랑이가 개에게 무시당한다 해도 여전히 호랑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청년과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석씨 집안은 예로부터 규율과 존비귀천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상과 벌도 분명해야 하고요. 댁의 자제가 규율을 어겼으니 어쩔 수 없이 석씨 집안이 직접 가르쳐야겠습니다.”몇 달 전 함승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석씨 집안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부서가 있는데 처벌이 워낙 혹독해 사람들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석지윤은 내가 말한 ‘석씨 집안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가주님, 제 아이를 용서해 주십시오.”나는 비웃으며 답했다.“잘못을 저질렀으니 집안의 규율대로 가르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단...”잠시 멈춘 뒤 나는 말했다.“단, 당신의 아이가 석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 달라지죠.”정당에 모인 방계 식구들의 안색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때 지훈이는 날 친어머니라고 믿었기에 나를 많이 그리워했어. 하지만 나는... 나는 지훈이한테 늘 차갑게 대했지. 생일날에만 잠깐씩 만났고. 지훈이가 네 곁에 나타난 이유는 네 몸속의 신장이 내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널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여자를 멀리하던 남자가 유독 너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쏟겠니?”‘석지훈이 나를 그렇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니!’나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석지훈이 정말 널 사랑한다고 믿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넌 지훈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석지훈은 예전에 사랑을 모른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이 어떤 건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정작 그의 행동은 내가 느끼기에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나는 침묵했고 그녀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지훈이는 석씨 집안에서 자란 아이야. 고독 속에서 자라 강인하고 잔인하고 냉혹해. 그런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니?”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음속으로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남자들은 다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 그런데 만약 지훈이가 너와 함께 있는 이유가 단지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라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녀가 이번에는 더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수아야, 지훈이의 또 다른 비밀을 알고 있니? 그 아인 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그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며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함승윤이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가주님, 그분이 뭐라고 하셨나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답했다.“아니에요.”함승윤과 함께 정당으로 향하자 석지훈이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젯밤, 석지훈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슬프기는 했지만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의 슬픔을 보며 나도 점점 그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었다.그가 방금 말했던 어머니 김혜정과 나를 증오하는 김윤정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혜정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녀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석지훈만 있었다.그녀는 단지 그가 건강하고 평온하길 바랐다.심지어 석지훈이 나와 결혼하려 할 때 그녀는 이를 찬성하기까지 했다.석지훈은 방금 그녀가 늘 쉽게 양보했다고 말했다.문득, 내가 두 번째로 석씨 가문에 갔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온화한 태도가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늘 한복 차림으로 석지훈만 바라보던 부드러운 여인은 결국 시들어버렸다.그녀는 분명 석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그녀가 언니 김윤정에게 몰려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그녀가 죽기 전에 느꼈을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석지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이것 또한 석지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분명히 그도 슬펐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요.”석지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난 먼저 가서 빈소를 지킬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나는 함 집사에게 상복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에게서 상복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함 집사가 내 팔에 검은 완장을 채워주었다.함 집사와 함께 정원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앞쪽에 검은 상복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지훈 오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은 사람은 나의 어머니야. 평생 다른 신분으로 석씨 가문에서 살아가며 나를 아들처럼 키워준 분이야.”석지훈의 말투는 차분했고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있는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아홉 살 때 석씨 가문을 떠났어.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그 당시 나를 입양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알지 못했어. 그 아홉 해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어.”“그때 나는 후계자가 아니었고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 작은 사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나를 지켜주셨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석씨 가문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던 11년 동안 어머니는 항상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며 버티라고 하셨어. 석씨 가문에서도 내 몫을 항상 챙겨주셨지.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해서 석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야.”석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나는 어머니를 정말 존경했어. 어머니 역시 나를 매우 존중해주셨지. 내 평생 어머니가 반대했던 유일한 일은 너와 나의 관계였어.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허락하셨어.”“어머니는 나를 위해 언제나 쉽게 양보하셨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었어. 얼마 전에도 너를 며느리로 잘 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어.”석지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산산조각 난 듯 보였다.나는 그의 허리를 가만히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도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미안해요...혹시 우리의 약혼 때문일까요?”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잘못은 너에
석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단호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잘 모르겠어요.”우울한 마음에 나는 석만호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장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담현아 옆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번 일은 지훈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담현아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정이 있으니 당연하지 않을까요?”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현아야, 우리 동성시에 돌아가자.”담현아가 대답했다.“정재 아저씨가 내일 지인들과 같이 캠핑한다면서 초대했어요. 나는 곧 운성시로 가야 해요.”‘고정재 씨가 운성시에 친구가 있다고?’아마도 담현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말을 마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차 키를 들고 별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였다.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응, 잘 자.]석지훈은 아직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나는 시간을 내어 석씨 가문 회사에 들렀다.석씨 가문의 업무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반년간 배운 경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함 집사가 세심하게 가르쳐 주어서 모르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저녁 무렵, 함 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안주인께서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석씨 가문의 다른 계파들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나는 놀라며 물었다.“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