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막 동성에 돌아왔어요.”담현아의 말에 나는 예의상 물었다.“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언니가 롤스로이스 최신 모델을 가지고 있다면서요?”담현아의 목적은 아주 명확했다.“회사에 세워뒀으니까 네가 와서 가져가.”나는 이런 것에 대해 별로 인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친구로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타이밍이 딱 좋게도 내가 퇴근하려던 참에 담현아가 도착했다.차 키를 들고 아래로 내려가니 담현아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언니, 내가 선물을 갖고 왔어요.”담현아는 이렇게 말하더니 나에게 천 가방 하나를 건넸다.가방을 열어보니 안에는 치즈 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담현아는 웃으며 설명했다.“베스니의 특산품이에요. 언니한테만 주는 거니까 싫어하지 마요. 내가 너무 가난해서 비싼 걸 살 수 없었어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담씨 가문의 딸인데 어떻게 가난할 수 있어? 근데 너 아직 운전면허도 못 땄지?”담현아는 아직 만 18세도 되지 않았으니 내가 괜히 물은 것이었다.“몰래 몰고 다니려고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담현아의 대담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차 키를 건넸다. 그녀는 차 키를 건네받고서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그 모습을 보니 담현아가 이전의 냉랭함과는 달리 요즘 유난히 친절한 것 같았다.혹시 차를 빌려달라고 부탁한 것이 미안해서 이러는 걸까?담현아가 차 키를 가지고 떠나자 마침 비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대표님, 저녁에 갑작스럽게 파티가 잡혔습니다.]나는 메시지로 물었다.[무슨 파티요?][담현우의 생일 파티입니다.]연씨 가문은 최근 담씨 가문과 비즈니스 관계를 맺고 있었다. 더구나 반경우가 소개해 준 친구였기에 이번 파티는 반드시 참가해야 했다. 역시 담현아가 오늘 동성으로 돌아온 것도 이유가 있었다.나는 비서에게 물었다.[장소는 어디죠?][크루즈 위입니다.]비서는 나를 데리러 내려왔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정교한 메이크업을 받고 비서와 함께
고정재는 나를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난간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눈에는 짙은 소유욕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크루즈 난간에 서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웃었다.나는 불안한 마음에 시선을 돌려 비서를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눈앞에 두 명의 경호원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그중 한 명이 냉랭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연 대표님, 고 대표님께서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거절한다면요?”경호원은 차갑게 말했다.“연 대표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실 겁니다.”그 모습을 보니 나를 강제로 크루즈에 태울 것 같았지만 나는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고현성이나 고정재와 어떤 접점도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나는 더 이상 그들과 엮여 스캔들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가 그들에게 가벼운 경고를 날렸다.“저쪽에 우리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아서 물러나세요.”그러나 경호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비서의 말을 무시했다. 나는 상황을 지켜보다 결국 고개를 돌려 고현성에게 말했다.“날 보내줘.”나와 고현성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기에 그는 나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그런데도 고현성은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나는 비서와 함께 바닷가를 떠나 차에 오르려는 순간 크루즈에서 피아노곡 [바람이 머무는 거리]가 들려왔다.나는 멈춰 서서 비서에게 물었다.“고정재가 연주하는 건가요?”고현성이 있는 자리라면 고정재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그 형제는 같은 자리에 함께 있는 법은 없었지만 담현우가 분명 고정재를 초대했다고 했다.비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고정재 씨는 아닌 것 같습니다.”나는 고정재의 연주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다른 사람과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이 곡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기술이며 감정 모두 고정재의 연주와 똑같았기에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고정재가
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담현아는 왜 바다에 빠진 거야?”나는 서둘러 담현우를 찾으러 갔다. 담현우는 마침 구조대와 대화하며 함께 바다로 나가겠다고 했다.담혀우는 나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현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담현우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인지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급히 담현우를 제지하며 말했다.“그럴 일 없을 거예요.”비록 나와 고현성 그리고 고정재는 관계를 이미 정리했지만 사랑을 떠나 두 사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들이었다.두 사람은 나를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지금의 나를 석지훈의 곁으로 이끌어준 존재들이었다.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걱정하며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다.나는 담현우에게 말했다.“나도 바다로 나갈게요.”담현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하지만 수아 씨는.”“현우 씨, 나도 두 사람과 현아가 걱정돼요.”결국 담현우는 요트를 준비해 나와 윤다은을 데리고 바다로 나갔다.출발 전 우연히 뒤를 돌아봤는데 바닷가에서 자리를 떠나려는 원태웅이 보였다.나는 마음속으로 의아했다.‘원태웅이 왜 여기 있는 거야?’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담현우에게 물었다.“현우 씨 원태웅도 초대했어요?”“아니요. 왜요? 원태웅 씨가 왔어요?”이 순간 바닷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들 크루즈에서 내린 사람들이었다. 나도 처음부터 원태웅을 보지 못했기에 우연히 그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원태웅도 분명 나를 봤을 텐데 왜 나에게 와서 인사를 하지 않은 걸까?‘원태웅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그냥 물어봤어요.”밤바다는 평온하지 않았다.다행히 담현우는 배를 다룬 경험이 풍부했고 구조대와 함께 주변 섬들을 수색했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설마 이미.’담현우는 나와 윤다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집 현아는 아주 강인한 아이예요.”담현우의 말투는 마치
“석씨 가문은 자선 사업을 하는 가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냉혹하고 무자비하죠. 석씨 가문과 협력하는 누구도 그들의 규칙을 깨뜨릴 수 없어요. GPS 글로벌 위치 추적 시스템을 다시 활성화하는 건 정말 꿈 같은 일이에요. 그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요.”담현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무력하게 말했다.“내가 원태웅에게 전화하면 분명 거절당할 거예요. 하지만 수아 씨가 전화한다면.”담현우는 내가 석지훈과 얽혔던 소문만 알고 있었다.아니 소문이라기보다는 석지훈이 성당에서 나를 안고 떠나거나 경찰서에서 나를 데려갔던 일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담현우는 아직 내가 석지훈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만약 알았다면 진작에 부탁했을지도 모른다.나는 핸드폰을 꺼내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태웅은 전화를 받자마자 나를 윤아라고 부르며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로 날 찾았어?”바닷바람이 갑자기 매서워졌다.우리 셋은 요트 안으로 몸을 피했고 나는 급히 원태웅에게 물었다.“담현아의 GPS를 활성화해 줄 수 있어요?”원태웅은 나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을 끊었다.“미안해.”나는 간절히 부탁했다.“오빠.”원태웅은 난감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윤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만 GPS 글로벌 위치 추적 시스템은 형이 전적으로 관리하는 거라 나에게는 권한이 없어. 직접 형에게 전화해야 해.”나는 알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원태웅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형에게 부탁해서 너의 전남편과 옛 연인을 구하려고? 윤아야, 너라면 이 상황을 참을 수 있겠어?”나는 핸드폰을 꽉 쥐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원태웅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담현우를 쳐다보았다.담현우는 진지하게 말했다.“생명이 달린 문제예요. 수아 씨, 결정을 내려야 해요.”석지훈이 구해야 할 사람이 고씨 가문의 형제들이라는 걸 알게 되면 나는 결국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여전히 원태웅이 왜 여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더군다나 고현성과 그들이 어떻게 바다에 빠졌는지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마치 누군가 고의로 그 형제를 노린 것 같았다.십여 분 뒤 우리는 GPS가 가리키는 섬에 도착했다. 우리는 요트를 해변에 정박한 뒤 차가운 바닷물을 밟으며 상륙해 섬을 한 바퀴 돌며 수색한 끝에 마침내 그들 셋을 발견했다.담현아는 아무 걱정도 없는 표정으로 해변에 누워 있었고 고현성과 고정재는 해변에 앉아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 보고 있었다.나는 그들 쪽으로 다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셋 모두 옷이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그리고 담현아는 고정재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담현아는 우리를 보자 재빨리 재킷을 벗어 던지고서는 담현우에게 달려가 안겼다.담현우는 담현아를 꼭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추워?”담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많이 추워.”담현우는 슈트 재킷을 담현아에게 벗어주려 했지만 아까 윤다은에게 벗어줬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어쩔 수 없이 셔츠를 벗어 담현아에게 감싸 준 뒤 품에 꼭 껴안았다.윤다은도 빠르게 달려가 고정재를 껴안았다. 고정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윤다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난 괜찮아.”“오빠, 정말 걱정했잖아.”윤다은은 방금까지도 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지만 고정재의 품에서 조용히 느끼며 안정을 찾는 듯했다.나는 윤다은이 왜 그렇게 걱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몇십 년 동안 고정재를 사랑해 왔기 때문이다.고정재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은아, 나 괜찮아.”이 모습을 지켜보던 고현성은 비웃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윤다은, 네가 고정재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무시할 줄은 말랐네. 네 눈에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거니?”고현성의 말에 고정재는 윤다은을 살짝 밀어내며 담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담현아는 여전히 담현우의 품에 안겨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윤다은은 고정재가 밀어내
내 마음속에 원태웅이 왜 파티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담현우에게 원태웅을 초대했는지 아니면 원태웅이 직접 온 것인지 물었다. 원태웅은 나를 보고도 인사조차 없이 조용히 바닷가를 떠났다. 이런 은밀한 행동은 원태웅의 평소 태도와 너무 달랐다.심지어 내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석씨 가문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GPS 글로벌 위치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정도의 권한은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부탁을 거절했다.심지어 나에게 직접 석지훈에게 전화하라고 했다.전화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원태웅은 나의 마음을 찌르는 질문까지 던졌다.그 순간 나는 고현성과 고정재가 이곳에 있게 된 것이 바로 원태웅의 계획이었고 원태웅이 석지훈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 모든 정황을 봤을 때 나는 석지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태웅과 고현성 형제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기에 원태웅이 그들에게 이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석지훈 역시 고현성 형제와 원한이 없었다.만약 석지훈과 원태웅이 나를 위해 복수해주려는 것이었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고현성과 고정재를 바다에 빠뜨리는 건 너무 과했다.만약 두 사람이 수영을 못 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나는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웠다. 고정재는 멀리 있는 윤다은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나를 불렀다.“꼬마 아가씨.”나는 대답했다.“네.”고정재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내가 해외 순회공연을 할 때 담현아를 만난 적이 있어.”고정재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솔직히 말했다.“알고 있어요. 현아가 정재 씨를 만났다고 말했거든요. 그리고 정재 씨를 잘생겼다며 칭찬하기도 했어요.”고정재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물었다.“담현아는 담씨 가문의 막내딸이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담현우가 현아의 오빠예요.”“꼬마 아가씨, 담현아는
나는 어렵게 물었다.“어떻게 해야 날 놔줄 건데요?”“네가 석지훈를 떠날 때까지.”“난 그럴 수 없어요.”고현성은 몸을 돌려 내 말을 끊더니 차가운 눈빛을 번쩍였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넌 예전에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었지. 수아야, 우리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 너와 석지훈도 그럴 거야. 나는 이미 너와 일생을 함께할 준비를 했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제멋대로 떠나는 걸 보고만 있겠어?”고현성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이마 위로 헝클어진 채 늘어져 있었다.내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고현성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너를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내가 이번 생에 너를 쉽게 놓아줄 리는 없어.”이 말을 듣자 나의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으며 고현성과의 과거가 떠올랐다.우리는 아름다운 기억을 많이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고현성이 나를 진심으로 대했던 적도 있었다.그 당시 나는 자신을 잃을 정도로 고현성을 사랑했다. 그때는 고현성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내가 고현성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양심적으로 말해서 나는 고현성을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늘 고현성이 나에게 상처를 줬었다. 지금 와서 이런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문제는 고현성이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고현성이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결국 석지훈까지 다치게 될 것이다.“고현성 씨, 제발 나를 놔줘요.”내 목소리는 너무 간절하고 나약했다.고현성은 그런 나를 비웃듯 아무 말 없이 웃었다.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는 현성 씨를 한 번도 해치지 않았어요. 인정할게요. 나는 석지훈과 4개월 동안 함께 했어요.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추억들을 값싸 보이게 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내가 잘못한 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석지훈은 내가 암에 걸렸을 때 나를 치료해 줬어요.”“석지훈이 내 삶에 나타난 건 4개월 전부터였고 그때 우
나는 엉망이 된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 다가온 사람을 보며 말했다.“오빠예요?”“넌 석지훈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해?”그는 다시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나는 속으로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설명했다.“내가 석지훈에게 설명할 거니까. 오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나도 신경 쓰고 싶진 않아. 하지만 너와 고현성이 이렇게 얽히고설킨 걸 석지훈이 모를 거라 생각해?”원태웅은 석지훈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말했다.그가 석지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다소 의외였다.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침묵했고 원태웅은 내 앞에 함께 쪼그려 앉아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런 일을 두고 지훈이 형이 너를 너그럽게 봐줄 리 없어.”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지훈 오빠에게 다 설명할 거예요.”하지만 내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가슴 한가운데에 거대한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했다.원태웅은 인내심을 갖고 내게 당부했다.“앞으로 외출할 때 혼자 다니지 마. 항상 고현성을 경계해. 안 그러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오늘 해변에서 봤던 원태웅과 고정재가 들었던 원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떠올라 나는 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오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원태웅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오빠가 두 사람을 같은 장소에 일부러 불러 모은 거죠? 크루즈에 나를 초대한 것도 반경우를 통해 오빠가 꾸민 일이죠?”“오빠는 내가 보는 앞에서 두 사람에게 망신을 줘서 경고하려던 거겠죠. 앞으로 두 사람과 엮이지 말라고. 하지만 내가 중간에 자리를 뜨자 오빠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을 직접 바다에 밀어 넣으라고 지시한 거죠? 그런데 왜 담현아까지 바다에 뛰어들게 된 거예요?”나의 말이 거의 다 맞자 원태웅은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그래, 네 말대로야. 너에게 경고하려 했지. 원래 네 앞에서 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 다음에 네게 충고하려 했어. 그런데 네가 중간에 떠났으니 차라리 두 사람을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