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담현아는 왜 바다에 빠진 거야?”나는 서둘러 담현우를 찾으러 갔다. 담현우는 마침 구조대와 대화하며 함께 바다로 나가겠다고 했다.담혀우는 나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현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담현우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인지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급히 담현우를 제지하며 말했다.“그럴 일 없을 거예요.”비록 나와 고현성 그리고 고정재는 관계를 이미 정리했지만 사랑을 떠나 두 사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들이었다.두 사람은 나를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지금의 나를 석지훈의 곁으로 이끌어준 존재들이었다.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걱정하며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다.나는 담현우에게 말했다.“나도 바다로 나갈게요.”담현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하지만 수아 씨는.”“현우 씨, 나도 두 사람과 현아가 걱정돼요.”결국 담현우는 요트를 준비해 나와 윤다은을 데리고 바다로 나갔다.출발 전 우연히 뒤를 돌아봤는데 바닷가에서 자리를 떠나려는 원태웅이 보였다.나는 마음속으로 의아했다.‘원태웅이 왜 여기 있는 거야?’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담현우에게 물었다.“현우 씨 원태웅도 초대했어요?”“아니요. 왜요? 원태웅 씨가 왔어요?”이 순간 바닷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들 크루즈에서 내린 사람들이었다. 나도 처음부터 원태웅을 보지 못했기에 우연히 그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원태웅도 분명 나를 봤을 텐데 왜 나에게 와서 인사를 하지 않은 걸까?‘원태웅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그냥 물어봤어요.”밤바다는 평온하지 않았다.다행히 담현우는 배를 다룬 경험이 풍부했고 구조대와 함께 주변 섬들을 수색했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설마 이미.’담현우는 나와 윤다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집 현아는 아주 강인한 아이예요.”담현우의 말투는 마치
“석씨 가문은 자선 사업을 하는 가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냉혹하고 무자비하죠. 석씨 가문과 협력하는 누구도 그들의 규칙을 깨뜨릴 수 없어요. GPS 글로벌 위치 추적 시스템을 다시 활성화하는 건 정말 꿈 같은 일이에요. 그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요.”담현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무력하게 말했다.“내가 원태웅에게 전화하면 분명 거절당할 거예요. 하지만 수아 씨가 전화한다면.”담현우는 내가 석지훈과 얽혔던 소문만 알고 있었다.아니 소문이라기보다는 석지훈이 성당에서 나를 안고 떠나거나 경찰서에서 나를 데려갔던 일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담현우는 아직 내가 석지훈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만약 알았다면 진작에 부탁했을지도 모른다.나는 핸드폰을 꺼내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태웅은 전화를 받자마자 나를 윤아라고 부르며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로 날 찾았어?”바닷바람이 갑자기 매서워졌다.우리 셋은 요트 안으로 몸을 피했고 나는 급히 원태웅에게 물었다.“담현아의 GPS를 활성화해 줄 수 있어요?”원태웅은 나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을 끊었다.“미안해.”나는 간절히 부탁했다.“오빠.”원태웅은 난감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윤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만 GPS 글로벌 위치 추적 시스템은 형이 전적으로 관리하는 거라 나에게는 권한이 없어. 직접 형에게 전화해야 해.”나는 알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원태웅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형에게 부탁해서 너의 전남편과 옛 연인을 구하려고? 윤아야, 너라면 이 상황을 참을 수 있겠어?”나는 핸드폰을 꽉 쥐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원태웅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담현우를 쳐다보았다.담현우는 진지하게 말했다.“생명이 달린 문제예요. 수아 씨, 결정을 내려야 해요.”석지훈이 구해야 할 사람이 고씨 가문의 형제들이라는 걸 알게 되면 나는 결국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여전히 원태웅이 왜 여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더군다나 고현성과 그들이 어떻게 바다에 빠졌는지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마치 누군가 고의로 그 형제를 노린 것 같았다.십여 분 뒤 우리는 GPS가 가리키는 섬에 도착했다. 우리는 요트를 해변에 정박한 뒤 차가운 바닷물을 밟으며 상륙해 섬을 한 바퀴 돌며 수색한 끝에 마침내 그들 셋을 발견했다.담현아는 아무 걱정도 없는 표정으로 해변에 누워 있었고 고현성과 고정재는 해변에 앉아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 보고 있었다.나는 그들 쪽으로 다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셋 모두 옷이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그리고 담현아는 고정재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담현아는 우리를 보자 재빨리 재킷을 벗어 던지고서는 담현우에게 달려가 안겼다.담현우는 담현아를 꼭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추워?”담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많이 추워.”담현우는 슈트 재킷을 담현아에게 벗어주려 했지만 아까 윤다은에게 벗어줬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어쩔 수 없이 셔츠를 벗어 담현아에게 감싸 준 뒤 품에 꼭 껴안았다.윤다은도 빠르게 달려가 고정재를 껴안았다. 고정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윤다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난 괜찮아.”“오빠, 정말 걱정했잖아.”윤다은은 방금까지도 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지만 고정재의 품에서 조용히 느끼며 안정을 찾는 듯했다.나는 윤다은이 왜 그렇게 걱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몇십 년 동안 고정재를 사랑해 왔기 때문이다.고정재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은아, 나 괜찮아.”이 모습을 지켜보던 고현성은 비웃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윤다은, 네가 고정재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무시할 줄은 말랐네. 네 눈에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거니?”고현성의 말에 고정재는 윤다은을 살짝 밀어내며 담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담현아는 여전히 담현우의 품에 안겨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윤다은은 고정재가 밀어내
내 마음속에 원태웅이 왜 파티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담현우에게 원태웅을 초대했는지 아니면 원태웅이 직접 온 것인지 물었다. 원태웅은 나를 보고도 인사조차 없이 조용히 바닷가를 떠났다. 이런 은밀한 행동은 원태웅의 평소 태도와 너무 달랐다.심지어 내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석씨 가문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GPS 글로벌 위치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정도의 권한은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부탁을 거절했다.심지어 나에게 직접 석지훈에게 전화하라고 했다.전화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원태웅은 나의 마음을 찌르는 질문까지 던졌다.그 순간 나는 고현성과 고정재가 이곳에 있게 된 것이 바로 원태웅의 계획이었고 원태웅이 석지훈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 모든 정황을 봤을 때 나는 석지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태웅과 고현성 형제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기에 원태웅이 그들에게 이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석지훈 역시 고현성 형제와 원한이 없었다.만약 석지훈과 원태웅이 나를 위해 복수해주려는 것이었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고현성과 고정재를 바다에 빠뜨리는 건 너무 과했다.만약 두 사람이 수영을 못 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나는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웠다. 고정재는 멀리 있는 윤다은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나를 불렀다.“꼬마 아가씨.”나는 대답했다.“네.”고정재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내가 해외 순회공연을 할 때 담현아를 만난 적이 있어.”고정재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솔직히 말했다.“알고 있어요. 현아가 정재 씨를 만났다고 말했거든요. 그리고 정재 씨를 잘생겼다며 칭찬하기도 했어요.”고정재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물었다.“담현아는 담씨 가문의 막내딸이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담현우가 현아의 오빠예요.”“꼬마 아가씨, 담현아는
나는 어렵게 물었다.“어떻게 해야 날 놔줄 건데요?”“네가 석지훈를 떠날 때까지.”“난 그럴 수 없어요.”고현성은 몸을 돌려 내 말을 끊더니 차가운 눈빛을 번쩍였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넌 예전에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었지. 수아야, 우리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 너와 석지훈도 그럴 거야. 나는 이미 너와 일생을 함께할 준비를 했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제멋대로 떠나는 걸 보고만 있겠어?”고현성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이마 위로 헝클어진 채 늘어져 있었다.내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고현성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너를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내가 이번 생에 너를 쉽게 놓아줄 리는 없어.”이 말을 듣자 나의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으며 고현성과의 과거가 떠올랐다.우리는 아름다운 기억을 많이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고현성이 나를 진심으로 대했던 적도 있었다.그 당시 나는 자신을 잃을 정도로 고현성을 사랑했다. 그때는 고현성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내가 고현성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양심적으로 말해서 나는 고현성을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늘 고현성이 나에게 상처를 줬었다. 지금 와서 이런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문제는 고현성이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고현성이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결국 석지훈까지 다치게 될 것이다.“고현성 씨, 제발 나를 놔줘요.”내 목소리는 너무 간절하고 나약했다.고현성은 그런 나를 비웃듯 아무 말 없이 웃었다.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는 현성 씨를 한 번도 해치지 않았어요. 인정할게요. 나는 석지훈과 4개월 동안 함께 했어요.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추억들을 값싸 보이게 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내가 잘못한 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석지훈은 내가 암에 걸렸을 때 나를 치료해 줬어요.”“석지훈이 내 삶에 나타난 건 4개월 전부터였고 그때 우
나는 엉망이 된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 다가온 사람을 보며 말했다.“오빠예요?”“넌 석지훈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해?”그는 다시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나는 속으로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설명했다.“내가 석지훈에게 설명할 거니까. 오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나도 신경 쓰고 싶진 않아. 하지만 너와 고현성이 이렇게 얽히고설킨 걸 석지훈이 모를 거라 생각해?”원태웅은 석지훈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말했다.그가 석지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다소 의외였다.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침묵했고 원태웅은 내 앞에 함께 쪼그려 앉아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런 일을 두고 지훈이 형이 너를 너그럽게 봐줄 리 없어.”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지훈 오빠에게 다 설명할 거예요.”하지만 내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가슴 한가운데에 거대한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했다.원태웅은 인내심을 갖고 내게 당부했다.“앞으로 외출할 때 혼자 다니지 마. 항상 고현성을 경계해. 안 그러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오늘 해변에서 봤던 원태웅과 고정재가 들었던 원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떠올라 나는 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오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원태웅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오빠가 두 사람을 같은 장소에 일부러 불러 모은 거죠? 크루즈에 나를 초대한 것도 반경우를 통해 오빠가 꾸민 일이죠?”“오빠는 내가 보는 앞에서 두 사람에게 망신을 줘서 경고하려던 거겠죠. 앞으로 두 사람과 엮이지 말라고. 하지만 내가 중간에 자리를 뜨자 오빠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을 직접 바다에 밀어 넣으라고 지시한 거죠? 그런데 왜 담현아까지 바다에 뛰어들게 된 거예요?”나의 말이 거의 다 맞자 원태웅은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그래, 네 말대로야. 너에게 경고하려 했지. 원래 네 앞에서 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 다음에 네게 충고하려 했어. 그런데 네가 중간에 떠났으니 차라리 두 사람을
“네 발로 윤 비서에게 가서 벌을 받아.”나는 석지훈이 왜 원태웅를 벌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원태웅은 석지훈을 대신해 분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나는 다급히 석지훈을 말리며 말했다.“지훈 오빠, 사실 태웅 오빠는 나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하지만 나도 마음속에서 원태웅을 원망하고 있었기에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원태웅을 벌할 필요까지는 없었다.그런데 석지훈이 원태웅에게 벌을 받으러 가라고 한 걸 보면 분명 우리가 나눈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것이었다.그 순간 나의 마음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나는 석지훈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고 너무나 난처했다. 무엇보다 석지훈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석지훈은 말없이 침묵을 지켰고 원태웅은 더 머무를 엄두도 못 내고 다급히 두 손을 저으며 웃었다.“내가 윤 비서를 찾아가서 바로 벌받을게.”원태웅은 빠르게 주차장을 떠났다.석지훈은 허리를 굽혀 나를 일으켜 세웠다.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려 제대로 설 수 없어 손바닥으로 석지훈의 팔을 힘껏 붙잡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요?”“원태웅이 네가 바다에서 밤새 사람을 찾느라 잠을 못 잤다고 전화해서 네가 걱정돼서 동성으로 일찍 돌아왔어.”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나는 석지훈의 목을 감싸며 뺨을 그의 가슴에 파묻었다.석지훈은 안정적인 걸음으로 나를 안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 안은 좁고 답답했다.내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 나는 석지훈에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방금 일은 내 의지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 내가 석지훈에게 잘못한 것은 사실이었다.게다가 전에 내가 GPS 글로벌 위치추적 시스템을 활성화해달라고 요청했던 것도 있었다.만약 석지훈이 자신의 자원을 이용해 옛 연인을 구하려 했다면 나도 분명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자기가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 모든 건 원태웅이 꾸민 일이야. 원태웅은 네가 제일 나약한 순간에 고현성과 나 중에서 누굴 고르는지 보고 싶었던 거야. 알아, 너한테도 너만의 과거가 있다는 거. 고현성, 고정재와 함께했었던 그때가 좋았다면 계속 기억하고 있어도 돼. 슬프고 힘들었던 과거도 억지로 잊지 않아도 돼. 그냥 네가 더 이상 간직하고 싶지 않아졌을 때 나한테 얘기해줘. 걱정하지 마. 네가 바보같이 한 사람만 사랑했다고 비웃지 않을 거니까. 그것 또한 너의 과거니까 난 존중해.”나는 고개를 들어 석지훈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석지훈은 고개를 떨구고 날 보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차분하기만 했던 두 눈이 오늘따라 유독 더 뜨거워 보여서 그 눈빛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지금처럼 언제나 나를 존중해주었다.마음대로 나를 오해하고 나와 감정싸움을 하던 사람들과 달리 언제나 내 입장에 서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석지훈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도 느끼게 했다.하지만 그럴수록 석지훈이 너무 좋아서 나는 점점 더 내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아지는 것 같았다.선양 그룹 대표의 신분으로 권력 같은 건 다 무시하고 고 씨 집안에 시집갔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초라함이었다.석지훈 앞에 서 있을 때는 자신이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 나약한 마음이 만들어낸 바다에 잠겨 점점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석지훈은 나를 안고 나가며 다정하게 달래듯 말했다.“원태웅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오늘 일은 여기까지 하고 더는 얘기하지 말자. 하지만 다음에는 꼭 나한테 말해줘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자세히 설명해 줘. 혼자 속앓이하지 말고.”오늘에는 어쩐지 말이 많아진 석지훈이 눈물을 닦아내는 나를 보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인간의 생은 너무 짧아, 그리고 너와 함께 걸어가는 인생이라면 더 짧게 느껴질 거야. 지난 30년 동안 내 인생에 너란 존재는 없었어. 그러니까 윤아야, 오해나 거짓말 같은
그가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다정하게 물었다.“아직 졸려?”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장례를 치르는 건가요?”“그래,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나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은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석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러 나섰다. 관을 덮는 순간, 석지훈의 눈가가 계속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장례는 아침 9시에 끝났다. 우리는 석씨 집안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동성시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아랫배는 계속 아팠고 목에서는 쇳맛이 점점 짙어졌다.우리는 오후 한두 시쯤 아파트에 도착했다. 석지훈은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샤워를 한 뒤 곧장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나는 그가 잠든 틈을 타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도착한 곳은 석씨 집안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병원장은 내가 온 것을 알고 급히 달려와 나를 친절히 안내하며 검사를 도왔다. 그러나 CT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의사는 내 암이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나는 충격을 받은 채 물었다.“암이 완치됐다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재발할 수 있죠?”“가주님, 조금 전에 이전 진료 기록을 검토했는데 전에 앓으셨던 자궁암이 말기였습니다. 말기라는 건... 완치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현재 의료 기술로는 재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넉 달 전 난산을 겪으셨잖아요. 비록 치료가 제때 이루어졌지만 몸에 무리가 갔던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상태는 재발 초기 징후가 보이고 있으니 항암제를 다시 복용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재발 초기 징후라니... 언제든 병이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인가?나는 이미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었는데 이번에도 과연 또 기회가 있을까?죽음이 이번에도 나를 비켜가 줄까?나는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항암제 효과는 얼마나 있나요?”“가주님께서 이전에 드셨던 항암제는 석씨 집안에서 만든 약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치료 효과가 뛰어나 병세를
석지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내가 질문을 던지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 깊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누가 뭐라고 했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냥 물어보고 싶어서요.”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석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넌 거짓말할 때마다 고개를 젓고 눈빛이 흔들려서 날 똑바로 보지 못해. 윤아야, 어떤 소문을 들었든 한 가지만 믿어. 난 어떤 이유로도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네 손을 놓지 않을 거고.”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지만 고집스럽게 물었다.“그럼 오빠가 나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예요?”이전 같았더라면 석지훈 어머니의 말을 들은 뒤 혼자 속앓이하며 복잡한 생각에 빠졌겠지만 석지훈과 함께하면서부터는 모든 걸 명확히 물어보고 싶어졌다.석지훈은 내가 진지하게 답을 원한다는 걸 알고 한참 생각한 뒤 차분히 대답했다.“전에 네 이름은 들어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네 얼굴도 몰랐어. 너한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건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였고 네가 연씨 집안의 대표이자 고현성의 전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였어. 사실 네 신분을 더 일찍 알 수 있었지만 난 네 신분조사에 관심이 없었거든. 네가 연윤아라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었어. 진실이든 거짓이든 당시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석지훈이 우리가 민박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을 때 나는 믿었다.그가 뭐라 하든 난 그의 말을 믿었으니까.게다가 그 시기 석지훈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는 내가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가 그때 내 정체를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그러니 우리의 만남엔 어떤 불순한 의도도, 다른 요인도 없었다.그가 내가 접근하도록 내버려둔 건 단지 내가 ‘연윤아’였기 때문이지 모두가 오해하는 그 ‘신장’ 때문이 아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오빠는 왜 그때 내가 접근하도록 둔 거예요?”왜 내 오빠가 되어
공식 자리에서 나는 석수아로만 불릴 수 있다.석씨 성은 내가 석씨 집안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석지훈의 차분하지만 위압적인 말이 끝나자 한 중년 여성이 나섰다. 그녀는 뚱뚱한 청년의 팔을 붙잡아 끌어내며 담담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아이가 철없이 행동해 사모님을 언짢게 했네요. 지금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그녀가 바로 석지훈이 석지윤일 것이다.정당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석씨 집안의 방계 식구들은 적지 않았다.석지윤은 청년이 석지훈을 모욕하도록 내버려두다가 석지훈이 나를 언급하자 그제야 가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모욕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석지훈이 했던 ‘없앨 수도 있다’는 말은 석씨 집안의 방계들이 있는 곳에서 가주의 위엄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리고 이 뚱뚱한 청년은 본보기가 될 만한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그에게 문제였던 건 단 하나, 자신의 입을 조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호랑이가 개에게 무시당한다 해도 여전히 호랑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청년과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석씨 집안은 예로부터 규율과 존비귀천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상과 벌도 분명해야 하고요. 댁의 자제가 규율을 어겼으니 어쩔 수 없이 석씨 집안이 직접 가르쳐야겠습니다.”몇 달 전 함승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석씨 집안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부서가 있는데 처벌이 워낙 혹독해 사람들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석지윤은 내가 말한 ‘석씨 집안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가주님, 제 아이를 용서해 주십시오.”나는 비웃으며 답했다.“잘못을 저질렀으니 집안의 규율대로 가르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단...”잠시 멈춘 뒤 나는 말했다.“단, 당신의 아이가 석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 달라지죠.”정당에 모인 방계 식구들의 안색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때 지훈이는 날 친어머니라고 믿었기에 나를 많이 그리워했어. 하지만 나는... 나는 지훈이한테 늘 차갑게 대했지. 생일날에만 잠깐씩 만났고. 지훈이가 네 곁에 나타난 이유는 네 몸속의 신장이 내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널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여자를 멀리하던 남자가 유독 너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쏟겠니?”‘석지훈이 나를 그렇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니!’나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석지훈이 정말 널 사랑한다고 믿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넌 지훈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석지훈은 예전에 사랑을 모른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이 어떤 건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정작 그의 행동은 내가 느끼기에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나는 침묵했고 그녀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지훈이는 석씨 집안에서 자란 아이야. 고독 속에서 자라 강인하고 잔인하고 냉혹해. 그런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니?”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음속으로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남자들은 다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 그런데 만약 지훈이가 너와 함께 있는 이유가 단지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라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녀가 이번에는 더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수아야, 지훈이의 또 다른 비밀을 알고 있니? 그 아인 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그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며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함승윤이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가주님, 그분이 뭐라고 하셨나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답했다.“아니에요.”함승윤과 함께 정당으로 향하자 석지훈이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젯밤, 석지훈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슬프기는 했지만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의 슬픔을 보며 나도 점점 그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었다.그가 방금 말했던 어머니 김혜정과 나를 증오하는 김윤정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혜정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녀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석지훈만 있었다.그녀는 단지 그가 건강하고 평온하길 바랐다.심지어 석지훈이 나와 결혼하려 할 때 그녀는 이를 찬성하기까지 했다.석지훈은 방금 그녀가 늘 쉽게 양보했다고 말했다.문득, 내가 두 번째로 석씨 가문에 갔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온화한 태도가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늘 한복 차림으로 석지훈만 바라보던 부드러운 여인은 결국 시들어버렸다.그녀는 분명 석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그녀가 언니 김윤정에게 몰려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그녀가 죽기 전에 느꼈을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석지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이것 또한 석지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분명히 그도 슬펐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요.”석지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난 먼저 가서 빈소를 지킬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나는 함 집사에게 상복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에게서 상복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함 집사가 내 팔에 검은 완장을 채워주었다.함 집사와 함께 정원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앞쪽에 검은 상복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지훈 오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은 사람은 나의 어머니야. 평생 다른 신분으로 석씨 가문에서 살아가며 나를 아들처럼 키워준 분이야.”석지훈의 말투는 차분했고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있는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아홉 살 때 석씨 가문을 떠났어.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그 당시 나를 입양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알지 못했어. 그 아홉 해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어.”“그때 나는 후계자가 아니었고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 작은 사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나를 지켜주셨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석씨 가문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던 11년 동안 어머니는 항상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며 버티라고 하셨어. 석씨 가문에서도 내 몫을 항상 챙겨주셨지.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해서 석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야.”석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나는 어머니를 정말 존경했어. 어머니 역시 나를 매우 존중해주셨지. 내 평생 어머니가 반대했던 유일한 일은 너와 나의 관계였어.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허락하셨어.”“어머니는 나를 위해 언제나 쉽게 양보하셨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었어. 얼마 전에도 너를 며느리로 잘 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어.”석지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산산조각 난 듯 보였다.나는 그의 허리를 가만히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도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미안해요...혹시 우리의 약혼 때문일까요?”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잘못은 너에
석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단호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잘 모르겠어요.”우울한 마음에 나는 석만호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장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담현아 옆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번 일은 지훈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담현아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정이 있으니 당연하지 않을까요?”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현아야, 우리 동성시에 돌아가자.”담현아가 대답했다.“정재 아저씨가 내일 지인들과 같이 캠핑한다면서 초대했어요. 나는 곧 운성시로 가야 해요.”‘고정재 씨가 운성시에 친구가 있다고?’아마도 담현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말을 마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차 키를 들고 별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였다.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응, 잘 자.]석지훈은 아직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나는 시간을 내어 석씨 가문 회사에 들렀다.석씨 가문의 업무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반년간 배운 경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함 집사가 세심하게 가르쳐 주어서 모르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저녁 무렵, 함 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안주인께서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석씨 가문의 다른 계파들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나는 놀라며 물었다.“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