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그의 품에 꼭 안긴 채로 말했다.“비밀번호 9977이에요.”석지훈은 한 손으론 나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비밀번호를 치고 집 안으로 들어섰고 그대로 내 방으로 향했다.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상황에 들떠있었는데 나를 내려놓고 전에 두고 갔던 셔츠를 챙겨 욕실로 들어가 버리는 석지훈에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마침 담현아에게서 문자가 왔다.[저 방금 집에 도착했어요 언니, 오늘 저 구해주신 거 언니라고 들었어요. 언니는 저 담현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될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17살 난 아이의 말투답지 않은 문자에 미소 짓던 나는 담현아에게 미안한 게 있다던 고정재의 말이 떠올라 서둘러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너 전에 고정재 씨 만난 적 있어? 고정재 씨가 너한테 미안한 일이 있다고 하던데.]그러자 담현아는 빠르게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별일도 아니었어요, 일본에서 작은 오해가 있었는데 이미 다 해결돼서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되는 일이에요.”나긋나긋한 음성은 그 나이 또래의 생기를 담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한 말투는 또 두려움이 없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그녀의 말에 어떤 답장을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담현아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어두운 밤, 희미한 불빛을 빌어 절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다들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사진 속에는 담현아와 고정재의 모습도 보였는데 담현아는 검은색 바탕에 수많은 분홍색 꽃들이 수놓아진 기모노를 입은 채로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늘어뜨리고 티 없이 맑은 어린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원래도 어리지만 이런 복장에 저런 미소를 짓고 있으니 한결 더 앳돼 보였다.하지만 경찰서에서의 그 당돌한 모습을 봐버린 나는 그녀가 이를 드러낼 시기를 노리는 검은 옷을 두른 악동 같아 보였다.고정재는 검은 참대가 그려진 베이지색 기모노를 입고 있었는데 진중한 그의 성격에 잘 어울리는 옷 같았다.그림같이 짙은 눈썹과 별을 박아 넣은 듯 빛나는 눈동
온몸으로 날 유혹하고 있는 석지훈과 한 달 만에 그를 봐서 아까 문 앞에서부터 달아오른 내 몸 때문에 나는 바로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내 행동에 잠시 당황하던 석지훈은 이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날 밝겠어, 얼른 자. 나 좀 있다 운성에 가봐야 해.”“이렇게 빨리요?”석지훈을 알게 된 뒤로 그는 늘 집에 가지 않고 내 옆에 머물렀었다.그래서 내가 어느 도시에 있든 내가 필요할 때마다 그가 빠르게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일이 좀 생겼어.”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나를 달래듯 말하는 석지훈에 나는 실망한 채로 욕실로 들어갔고 내가 씻고 나오자 석지훈은 이미 정장을 차려입고 진지하고도 틀에 박힌 원래의 그로 돌아가 있었다.그가 떠나는 게 아쉬웠던 나는 팔짱을 낀 채 욕실 문에 기대어 물었다.“언제 가는데요?”“좀 있다.”마음속으로는 당연히 그가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그의 일을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볼멘소리로 알겠다고 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조심히 다녀와요.”석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그대로 침대에 가 벽을 바라보며 누웠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방문이 열리더니 내 곁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그게 석지훈임을 알았기에 나는 가까워져 오는 그의 숨결에 숨을 참다가 그가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떨어지자마자 석지훈의 옷소매를 잡으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석지훈은 그런 내 코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몇 번 쓸어주며 물었다.“잠 안 와서 그래?”“오빠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보고 싶다는 내 말에 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려 가볍게 웃으며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이런 말에는 반응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또다시 질문을 해왔다.“어떻게 보고 싶은데.”그의 말에 내가 대답으로 그의 옷소매를 더 세게 잡아당기자 석지훈은 못 이기는 척 내 옆에 누워 손으로 매끄러운 내 볼을 쓰다듬었다.여자가 관리를 했는지 안
거리도 멀어서 거절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나는 그래도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네, 가능해요.][고마워, 수아야.][아니에요.]사실 내가 운성에 가려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석지훈이 있었기에 그의 옆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그래서 나는 바로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언제 와요?][내일 저녁에 갈게, 조금만 기다려.]문자의 끝에 항상 조금만 기다리라고 덧붙이는 건 나의 걱정을 덜어주고 나를 다독이기 위한 그의 배려였다.나는 그의 문자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나 내일 운성 갈 일 있는데, 저녁에 같이 올까요 그럼?”[응, 내가 내일 데리러 갈게.]그 문자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가 진하진 않지만 생기 도는 가벼운 화장을 하고는 분홍색 탑으로 갈아입고 포니테일을 묶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연한 립스틱까지 바르고 차 키를 들고 내려가려 하는데 마침 담현아가 문자를 보내왔다.[언니, 우리 저녁에 클럽 가는데 같이 갈래요?]놀 때도 나를 부르는 걸 보니 담현아는 나를 정말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아니, 나 내일 운성 가야 해.][거긴 왜 가는데요?][수업 대타해주러. 내일 저녁에 올 거야.]그에 담현아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나도 데려가서 같이 놀면 안 돼요?]물론 놀러 가는 건 아니었지만 담현아를 거절할 수 없었던 나는 주차장에서 그녀가 좋아할 만한 차를 골라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흰색 탑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담현아는 나보다 더 시원한 옷차림을 하고서 기다리는 게 지루했는지 돌멩이들을 차고 있었다.볼이 발그스레한 담현아는 나를 보자마자 차를 에워싸고 돌며 감탄했다.“수아 언니, 스포츠카가 왜 이렇게 많아요?”나보다 어린 애가 불러주는 수아라는 이름은 오혜원이 부를 때와는 달리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그래서 나는 웃으며 물었다.“나랑 드라이브 갈래?”“당연하죠.”담현아는 신나게 선글라스를 끼며 차에 올라탔는데 그녀가 앉자마자 누
담현아와 고정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담현아가 그냥 작은 오해일 뿐이라고 해서 더 물어보지 못했는데 고정재의 말을 들어보면 전혀 작은 일 같지 않아 나는 늘 그 둘 사이가 궁금했었다.그래서 나는 숨을 죽이고 고정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네가 아직 어려서 잘 분간 못할 수도 있는데 너한테는 작은 일일지 몰라도 나한테는...”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무엇일지는 몰랐지만 왠지 비밀스러운 이야기일 것 같아 나는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고 있었는데 담현아가 짜증 난다는 듯 그의 말을 끊으며 대꾸했다.“아저씨,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별일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그런데 왜 계속 이렇게 질척대는데요?!”31년 동안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홀대를 받아본 적도 없고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불린 적도 없을 고정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담현아가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이제 갓 서른이 넘은 그를 아저씨라 칭한 게 좀 너무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녀와 고정재의 나이 차이로 보면 아저씨라 부르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고정재도 그걸 느낀 건지 그녀의 호칭을 굳이 바로잡지 않고 담담히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현아야, 며칠 전에 내가 한 말 잘 생각해봐.”“다시는 연락하지 마요.”억지 미소를 지은 담현아는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조수석에서 한숨을 내쉬었다.“진짜 별거 아닌 일인데 왜 이렇게 질척대는지 모르겠어요. 말도 많고 진짜 짜증 난다니까요. 아 그때 잘생겼다고 한 게 제일 후회돼요 지금.”“무슨 일인데 그래?”웃으며 넌지시 묻는 내 말에도 담현아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에요.”담현아가 얘기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나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나랑 고정재 씨도 뭐 별다른 연락은 안 했어도 알고 지낸 지 오래됐어. 내가 아는 그 사람은 모든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담담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신경 쓰는 일이라면 본인한테는 엄청 중요한 일일 거야.”“진짜 어른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이나 흘렀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아빠가 준 번호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두려운 건지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인지 나는 연락할 용기도 나지 않았고 연락하고 싶지도 않았다.나에게 부모님은 영진에 계신 두 분 뿐인데 나를 낳기만 하고 버린 여자에게 연락을 해서 모녀 상봉을 한들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야 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연락해야만 했다.그리고 부모님 마음속의 두려움도 해소시켜 드려야만 부모님이 다시 운성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나는 고이 간직해두었던 번호를 꺼내었다.내가 다이얼을 누를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운성에 왔으면서도 데리러 오라는 연락도 안 해?”그 목소리에 온몸이 굳어버린 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연락 안 해도 내 소식 보고받잖아요.”내 말을 들은 고현성이 잠시 당황하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제정신임을 알아챈 나는 경계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걔는 없어요?”내가 물은 게 그의 또 다른 인격임을 고현성도 알기에 그도 담담히 대꾸했다.“지금은 없어.”“고현성 씨, 당신 안에 들어있는 걔가 내 인생에 너무 방해 돼요.”내가 탓하고 있는 사람 역시 고현성이라서 내 말투와 내뱉는 말 모두 그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를 이대로 놔두면 원태웅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저번에 당신이랑 고정재 씨가 물에 빠진 것도 태웅 오빠가 한 일이에요. 태웅 오빠도 석씨 집안 사람이고 내 셋째 오빠예요. 고현성 씨든 그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든 계속 이렇게 나 찾아오면 결과적으론 당신이 위험해질 거예요.”“내가 석씨 집안을 두려워할 것 같아?”고현성이 몇 년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애를 써와서 과학기술 영역에서 많은 성과를 거둔 건 알고 있었지만 집안 사업에는 손을
바닷가에서의 그날 밤에도 고현성이 나를 덮치려 들 때 그의 다른 인격이 튀어나와서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석지훈을 온전히 가져보게 되었다.고현성이 아니었다면 석지훈이 그렇게 충동적이지 못했을 텐데 생각해보면 고현성은 우리 둘 사이에서 촉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또 다른 고현성을 피해 별장의 문 쪽으로 달려갔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고현성은 나를 쫓아오지 않고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입꼬리를 올리며 묻는 그에 나는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문부터 잠그려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하지만 어차피 고현성은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별로 소용은 없을 것이다.그러던 중 나는 문득 그날 밤 고현성이 주차장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그가 정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여자의 힘으로는 그를 당해낼 수 없을 거라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아 두려워지던 찰나 고현성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놀라, 이 대낮에 내가 뭘 할 수 있다고.”그 말에 내가 한시름 놓자 고현성은 말 없는 나에게 흥미를 잃은 건지 그대로 별장을 나섰다.이렇게 쉽게 나가는 고현성에 나는 그의 병세가 호전된 건가 싶었지만 이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기에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럴 리가 없지.”그리 쉽게 나아질 병이 아니었기에 나는 더 이상 그를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서둘러 비밀번호부터 바꿨다.다시는 그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게 하나라도 안전장치를 더 해놓아야만 했다.한참 만에 소파로 돌아온 나는 바로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나 방금 운성 도착했어요. 저녁엔 오피스텔로 갈게요.]이곳은 고현성과 함께 살던 곳이라서 곳곳에 그의 체취가 남아있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문자를 보내고 차 키를 들고 일어섰지만 갈 곳이 없어 고민하던 때에 마침 담현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수아 언니, 지금 어디예요?”“왜?”“나와서 같이 놀래요?”“어딘데?”“운성에
윤다은은 또 고정재의 동생이었기에 나는 출발하기 전 고정재에게 문자를 보냈다.[금방 갈게.]답장을 보고 난 나는 바로 유흥가로 향했고 내가 도착했을 때 담현아는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소파에 가벼운 몸을 기대고 있었다.윤다은은 나를 보자마자 맥주를 따라주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요새 한약 먹고 있어서 술 못 마셔. 현아는 많이 마셨어? 아주 인사불성이 됐네.”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청이 째지게 울리고 있는 이곳 홀에서는 여러 커플들이 품위 없는 짓들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품위를 따지는 게 더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비서의 말로는 운성에서 유명한 가빈회가 이곳 3층에서 손님들을 접대한다던데 고현성도 가끔 출입하는 곳이라고 했었다.내 질문에 윤다은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한잔 먹고 저렇게 됐어요.”여전히 붙임성 좋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은 씨 오빠한테 연락했으니까 금방 데리러 올 거야.”내 말이 끝나자 어딘가 실망한 듯한 윤다은에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기분이 안 좋아 보여.”“아니에요.”저번에 윤다은이 날 구해준 일로 부쩍 가까워졌기에 나는 자연스레 그녀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윤다은의 기분이 다운된 건 아무래도 고정재와 관련돼있는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자세하게 묻기도 애매해서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여주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초록색 코트를 걸친 고정재가 라운지에 도착했는데 그는 한결같이 고상하고 기품있어 보였다.긴 다리로 빠르게 윤다은에게로 다가와 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던 고정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나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지.”“내가 부른 거잖아요. 다은 씨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 부를 걸 그랬네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내가 다급히 해명하자 고정재는 눈을 감았다 뜨며 온화하고도 거리감 있는 말투로 내 말에 답을 했다.“얘 여기 자주 와, 내가 안 오면 오늘도 경찰서에서 만났을 거야.”그동
누구보다 순결하던 석지훈이 이런 곳에, 그것도 하필 예쁜 여자들이 가장 많다는 3층에 있는 걸 본 나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내가 노려보는 걸 느낀 것인지 석지훈은 나를 향해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그에 기분이 조금 풀린 나는 윤다은을 향해 말했다.“나 지훈 씨 만나고 올 건데 같이 갈래?”“아니요, 난 그냥 집에 갈게요.”내 말에 맥없이 손을 젓던 윤다은은 이내 터덜터덜 라운지를 빠져나갔다.그 안쓰러운 뒷모습을 보는 나도 마음이 안 좋았지만 십몇 년 동안 고정재만 바라보며 속을 끓였을 그녀를 알기에, 이 감정에서 실패자라고도 불릴 수 있는 그녀의 처지를 하기에 뭐라 더 말할 수도 없었다.그녀가 다가갈수록 고정재는 자꾸만 밀어냈기에, 하필 그의 동생이었기에 윤다은은 고정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를 가질 자격이 없었다.윤다은이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다 지켜보고 나서야 나는 다시 석지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잠깐 사이에 그의 옆에는 문란한 생활을 즐기는 한량들이 가득 서 있었다.그중 한 사람은 길게 쭉 째진 눈매에 반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쇄골을 드러내며 자신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는데 내가 한참 동안 쳐다봐서 그런가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가 봐도 나를 도발하는 듯한 행동에 내 표정이 굳어지자 석지훈은 바로 옆에 있던 남자를 보며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대화의 내용은 모르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가자 쭉 째진 눈매를 가진 남자는 여전히 석지훈과 나란히 서 있었다.나는 당장이라도 다가가 석지훈의 팔짱을 끼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스킨십을 한 적이 없어서 혹시라도 석지훈이 거절할까 봐 우리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평소처럼 그를 불렀다.“오빠.”“응, 여기서 놀고 있었어?”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묻는 석지훈에 내가 해명하듯 답했다.“현아가 여기 있대서 걱정돼서 온 거예요.”석지훈이 천천히 뱉어내는
하물며 그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모두 평범했다... 내가 이렇게 경호원을 데리고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다.현정우는 기타 경호원은 대기시키고 그만 나를 따라다녔다.마침 내려와 보니 문준혁이 지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어 우리는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그는 내 곁으로 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다은 씨는 안전감이 부족하지만 또 독립적인 여자예요. 저는 왠지 다은 씨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나는 대뜸 그 말을 알아들었다.“다은이의 속마음을 물어보는 거죠?”“아마 연수아 씨는 알 것 같아서요.”문준혁이 말했다.문준혁은 잘 생겼고 외모로 보면 윤다은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윤다은을 배려했으며 태도도 비굴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괜찮아 보였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임신으로 인한 우울증이 아닐까요? 임산부라면 다 그럴 겁니다.”윤다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사람은 고정재였다. 물론 이건 이전의 상태였고 지금은 잘 모른다.의사는 멍해졌다.“임신이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몰랐어요?”“죄송해요. 저도 방금 들었어요.”“아니. 남편과 아빠가 될 분이 어떻게...”“연수아 씨, 전 다은 씨를 만지지 않았어요.”나는 거의 도망하다시피 떠났고 방에 돌아와 윤다은에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도 몰랐다. 윤다은의 어른으로서, 또 그녀를 관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일은 꼭 물어봐야 했다.나는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있는 윤다은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아이의 아빠가 누구야? 닥터 문을 아빠로 만들어줄 생각이었어?”윤다은은 나에게 진심을 알려주기 싫어 건성으로 대답했다.“수아 언니, 묻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에게 설명할게요.”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닥터 문은 호텔을 떠났어.”윤다은은 말이 없었다....오후 3시쯤, 최희연과 담현아가 도착했고 기타 세 들러리도 도착했는데 보아하니 문준혁은 결혼식을 계속할 계획인 것 같다.내가 윤다은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
[보고 싶어요. 미친 듯이 보고 싶어요.]석지훈은 답장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기뻐할 거로 생각했다. 감정을 마음속 깊이 숨기는 남자로서 어떤 때 나는 그를 달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오늘 밤을 통해 나는 석지훈이 내가 좋은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고 평소에 찰떡처럼 곁에 붙어있는 나를 좋아했다. 역시 겉보기엔 신사지만 속마음은 내숭쟁이였다.나는 휴대폰을 놓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공식 석상에서 입을 옷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현정우가 마침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금운시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차로 가는지 아니면 비행기로 가는지 물었다.내일 금운시에서 비아드로 가기 때문에 운전이 불편해서 나는 현정우더러 석씨 가문에서 헬기를 동원해 금운시로 간 후 비아드로 가는 출입국 문제를 처리해달라고 했다.그는 명령을 받고 떠났고 30분도 안 되어 석씨 가문에서는 헬기를 보내와 나는 탑승 후에 윤다은에 전화했다.윤다은은 나에게 주소를 주었는데 이 헬기는 마침 현지 호텔의 뒷마당에 착륙할 수 있었다. 윤다은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잘 생겼고 분위기가 부드러운 남자가 함께 있었다.나는 이분이 바로 그 의사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윤다은의 말처럼 그의 두 눈은 정말 예뻤다. 이렇게 예쁜 눈을 가진 남자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내가 헬기에서 내려 큰 소리로 다은이를 부르자 후 그녀는 달려와 나를 안고 달콤하게 말했다.“저의 결혼식에 와주셔서 고마워요.”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당연한 거야. 최희연도 도착했어? 들러리가 몇 명이나 돼?”“선생님 집에서 준 의견에 따라 들러리가 6명이에요. 그들 셋을 빼고 나머지 세 명은 다 선생님 집안의 아랫사람이에요.”나는 알았다고 가볍게 대답하며 말수가 적은 의사 선생님을 쳐다봤다. 그러자 윤다은은 그의 팔을 잡고 인사했다.“선생님, 이분은 연수아, 전에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수아 언니예요. 수아 언니, 이분이 바로 문준혁 선생님이
이번 생에는 석지훈의 엄마를 포함해 그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석지훈이 떠난 뒤 나는 소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정신 상태가 많이 회복됐고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나는 기분 좋게 밥을 지어 먹은 뒷일을 처리하러 서한 그룹으로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이미 늦었다.나는 샤워를 한 후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언제 결혼하는지 묻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갓 약혼했어요.”“그저 물어본 거야.”“걱정하지 마세요. 꼭 잘 안배할게요.”그러자 엄마도 시름을 놓았는지 계속해서 말했다.“음, 이런 널 보니 시름이 놓여. 연시혁은... 넌 왜 그 아가씨의 가정환경에 대해 말하지 않아?”이 말을 듣자 나는 그들이 이미 송이연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두고 물었다.“그쪽은 어떤 태도예요?”“네 아빠가 낮에 상주시에 송이연 만나러 갔었어. 예쁜 아가씨인데 시혁을 말하니 다시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어.”나는 추궁했다.“다시 시작할 마음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말로는 아이를 위해 생각해 보겠지만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혀 1, 2년 시간을 들여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나도 찬성했다.“잘 됐어요. 시혁이도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데 아이는... 승아는 아마 시혁이랑 친하지 않을 수 있어요.”아직 두 살이 안된 승아는 아빠라는 단어가 서먹했다.“이제 시간이 있으면 시혁이랑 다시 얘기해 봐야겠어.”“네. 저 먼저 쉴게요.”“저녁 꼭 챙겨 먹어.”“네. 제 자신을 잘 돌보고 있어요.”전화를 끊은 후 나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보름 남짓한 기간에 나는 열심히 몸을 보양했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서한 그룹에서 업무를 처리하거나 병원에 검진받으러 갔다. 다행히 선생님은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문제가 없다고 해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 몸은 더는 탈이 나면 안 된다.석지훈이 떠난 지 30일이 되는 날에 윤다은이 전화 와서 웃으며 물었다.“수아 언니, 언제 금운시에 오세요?”나는 그제야
‘내가 울었어요?’손을 뻗어 눈가를 닦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촉촉했다.나는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저도 제가 왜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최근에 답답한 일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석지훈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쉽게 구별할 수 있어 나는 두려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탄식했다.“전 그저 사랑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이 길은 너무 험난했어요. 심지어 오빠의 엄마도...”석지훈은 몸에 얇은 하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앞머리가 헝클어졌으나 두 눈은 어두워졌다.나의 말을 듣고 그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가 다시 말했다.“엄마는 어린아이인 나를 입양했고 살아갈 기회를 줬어. 난 엄마를 존중하지만 그 전제 조건은 엄마도 나를 존중해줘야 해. 난 이미 기회를 줬었지만 만약 예전처럼 고집만 피운다면 난 더는 말리지 않을 거야.”그러자 내가 물었다.“자살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어요?”석지훈은 답이 없었다.“오빠의 엄마잖아요. 죽음으로 위협한다면 오빠의 마음은... 석지훈 씨, 솔직히 마음이 괴로웠죠.”어머니를 잃은 것은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약 또 다른 사람을 더 잃는다면...사람의 일생에서 사랑은 확실히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사랑 말도고 가족도 있었고 더욱이 결혼은 두 가정의 결합이니 한쪽에서 말린다면 아랫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어른들의 확고한 생각을 버릴 수 있을까?특히 석지훈의 어머니는 나를 미워했다.내 말이 그의 심장을 찔렀는지 그는 목소리가 한결 차가워졌다.“깊게 생각하지 마. 내가 잘 처리할 거야.”나는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실은 지금 상태도 좋아요. 전 결혼이 급하지 않으니 오빠의 어머니께서... 아마 몇 년 정도 기다린다면 언젠가 저의 엄마에 대한 미움을 잊을 수 있고 그럼 저를 받아주어 더는 오빠를 강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그러나 그때 내가 아직도 살아 있을까?“두려웠어?”나는 부인했다.“그저 오빠를 위해 고민했을 뿐이에요.”나는 석지훈의 엄마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그녀가
그가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다정하게 물었다.“아직 졸려?”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장례를 치르는 건가요?”“그래,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나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은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석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러 나섰다. 관을 덮는 순간, 석지훈의 눈가가 계속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장례는 아침 9시에 끝났다. 우리는 석씨 집안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동성시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아랫배는 계속 아팠고 목에서는 쇳맛이 점점 짙어졌다.우리는 오후 한두 시쯤 아파트에 도착했다. 석지훈은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샤워를 한 뒤 곧장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나는 그가 잠든 틈을 타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도착한 곳은 석씨 집안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병원장은 내가 온 것을 알고 급히 달려와 나를 친절히 안내하며 검사를 도왔다. 그러나 CT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의사는 내 암이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나는 충격을 받은 채 물었다.“암이 완치됐다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재발할 수 있죠?”“가주님, 조금 전에 이전 진료 기록을 검토했는데 전에 앓으셨던 자궁암이 말기였습니다. 말기라는 건... 완치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현재 의료 기술로는 재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넉 달 전 난산을 겪으셨잖아요. 비록 치료가 제때 이루어졌지만 몸에 무리가 갔던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상태는 재발 초기 징후가 보이고 있으니 항암제를 다시 복용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재발 초기 징후라니... 언제든 병이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인가?나는 이미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었는데 이번에도 과연 또 기회가 있을까?죽음이 이번에도 나를 비켜가 줄까?나는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항암제 효과는 얼마나 있나요?”“가주님께서 이전에 드셨던 항암제는 석씨 집안에서 만든 약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치료 효과가 뛰어나 병세를
석지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내가 질문을 던지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 깊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누가 뭐라고 했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냥 물어보고 싶어서요.”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석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넌 거짓말할 때마다 고개를 젓고 눈빛이 흔들려서 날 똑바로 보지 못해. 윤아야, 어떤 소문을 들었든 한 가지만 믿어. 난 어떤 이유로도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네 손을 놓지 않을 거고.”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지만 고집스럽게 물었다.“그럼 오빠가 나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예요?”이전 같았더라면 석지훈 어머니의 말을 들은 뒤 혼자 속앓이하며 복잡한 생각에 빠졌겠지만 석지훈과 함께하면서부터는 모든 걸 명확히 물어보고 싶어졌다.석지훈은 내가 진지하게 답을 원한다는 걸 알고 한참 생각한 뒤 차분히 대답했다.“전에 네 이름은 들어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네 얼굴도 몰랐어. 너한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건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였고 네가 연씨 집안의 대표이자 고현성의 전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였어. 사실 네 신분을 더 일찍 알 수 있었지만 난 네 신분조사에 관심이 없었거든. 네가 연윤아라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었어. 진실이든 거짓이든 당시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석지훈이 우리가 민박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을 때 나는 믿었다.그가 뭐라 하든 난 그의 말을 믿었으니까.게다가 그 시기 석지훈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는 내가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가 그때 내 정체를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그러니 우리의 만남엔 어떤 불순한 의도도, 다른 요인도 없었다.그가 내가 접근하도록 내버려둔 건 단지 내가 ‘연윤아’였기 때문이지 모두가 오해하는 그 ‘신장’ 때문이 아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오빠는 왜 그때 내가 접근하도록 둔 거예요?”왜 내 오빠가 되어
공식 자리에서 나는 석수아로만 불릴 수 있다.석씨 성은 내가 석씨 집안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석지훈의 차분하지만 위압적인 말이 끝나자 한 중년 여성이 나섰다. 그녀는 뚱뚱한 청년의 팔을 붙잡아 끌어내며 담담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아이가 철없이 행동해 사모님을 언짢게 했네요. 지금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그녀가 바로 석지훈이 석지윤일 것이다.정당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석씨 집안의 방계 식구들은 적지 않았다.석지윤은 청년이 석지훈을 모욕하도록 내버려두다가 석지훈이 나를 언급하자 그제야 가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모욕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석지훈이 했던 ‘없앨 수도 있다’는 말은 석씨 집안의 방계들이 있는 곳에서 가주의 위엄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리고 이 뚱뚱한 청년은 본보기가 될 만한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그에게 문제였던 건 단 하나, 자신의 입을 조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호랑이가 개에게 무시당한다 해도 여전히 호랑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청년과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석씨 집안은 예로부터 규율과 존비귀천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상과 벌도 분명해야 하고요. 댁의 자제가 규율을 어겼으니 어쩔 수 없이 석씨 집안이 직접 가르쳐야겠습니다.”몇 달 전 함승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석씨 집안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부서가 있는데 처벌이 워낙 혹독해 사람들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석지윤은 내가 말한 ‘석씨 집안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가주님, 제 아이를 용서해 주십시오.”나는 비웃으며 답했다.“잘못을 저질렀으니 집안의 규율대로 가르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단...”잠시 멈춘 뒤 나는 말했다.“단, 당신의 아이가 석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 달라지죠.”정당에 모인 방계 식구들의 안색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때 지훈이는 날 친어머니라고 믿었기에 나를 많이 그리워했어. 하지만 나는... 나는 지훈이한테 늘 차갑게 대했지. 생일날에만 잠깐씩 만났고. 지훈이가 네 곁에 나타난 이유는 네 몸속의 신장이 내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널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여자를 멀리하던 남자가 유독 너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쏟겠니?”‘석지훈이 나를 그렇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니!’나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석지훈이 정말 널 사랑한다고 믿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넌 지훈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석지훈은 예전에 사랑을 모른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이 어떤 건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정작 그의 행동은 내가 느끼기에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나는 침묵했고 그녀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지훈이는 석씨 집안에서 자란 아이야. 고독 속에서 자라 강인하고 잔인하고 냉혹해. 그런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니?”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음속으로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남자들은 다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 그런데 만약 지훈이가 너와 함께 있는 이유가 단지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라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녀가 이번에는 더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수아야, 지훈이의 또 다른 비밀을 알고 있니? 그 아인 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그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며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함승윤이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가주님, 그분이 뭐라고 하셨나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답했다.“아니에요.”함승윤과 함께 정당으로 향하자 석지훈이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