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지 한 달이나 흘렀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아빠가 준 번호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두려운 건지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인지 나는 연락할 용기도 나지 않았고 연락하고 싶지도 않았다.나에게 부모님은 영진에 계신 두 분 뿐인데 나를 낳기만 하고 버린 여자에게 연락을 해서 모녀 상봉을 한들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야 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연락해야만 했다.그리고 부모님 마음속의 두려움도 해소시켜 드려야만 부모님이 다시 운성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나는 고이 간직해두었던 번호를 꺼내었다.내가 다이얼을 누를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운성에 왔으면서도 데리러 오라는 연락도 안 해?”그 목소리에 온몸이 굳어버린 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연락 안 해도 내 소식 보고받잖아요.”내 말을 들은 고현성이 잠시 당황하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제정신임을 알아챈 나는 경계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걔는 없어요?”내가 물은 게 그의 또 다른 인격임을 고현성도 알기에 그도 담담히 대꾸했다.“지금은 없어.”“고현성 씨, 당신 안에 들어있는 걔가 내 인생에 너무 방해 돼요.”내가 탓하고 있는 사람 역시 고현성이라서 내 말투와 내뱉는 말 모두 그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를 이대로 놔두면 원태웅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저번에 당신이랑 고정재 씨가 물에 빠진 것도 태웅 오빠가 한 일이에요. 태웅 오빠도 석씨 집안 사람이고 내 셋째 오빠예요. 고현성 씨든 그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든 계속 이렇게 나 찾아오면 결과적으론 당신이 위험해질 거예요.”“내가 석씨 집안을 두려워할 것 같아?”고현성이 몇 년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애를 써와서 과학기술 영역에서 많은 성과를 거둔 건 알고 있었지만 집안 사업에는 손을
바닷가에서의 그날 밤에도 고현성이 나를 덮치려 들 때 그의 다른 인격이 튀어나와서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석지훈을 온전히 가져보게 되었다.고현성이 아니었다면 석지훈이 그렇게 충동적이지 못했을 텐데 생각해보면 고현성은 우리 둘 사이에서 촉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또 다른 고현성을 피해 별장의 문 쪽으로 달려갔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고현성은 나를 쫓아오지 않고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입꼬리를 올리며 묻는 그에 나는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문부터 잠그려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하지만 어차피 고현성은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별로 소용은 없을 것이다.그러던 중 나는 문득 그날 밤 고현성이 주차장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그가 정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여자의 힘으로는 그를 당해낼 수 없을 거라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아 두려워지던 찰나 고현성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놀라, 이 대낮에 내가 뭘 할 수 있다고.”그 말에 내가 한시름 놓자 고현성은 말 없는 나에게 흥미를 잃은 건지 그대로 별장을 나섰다.이렇게 쉽게 나가는 고현성에 나는 그의 병세가 호전된 건가 싶었지만 이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기에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럴 리가 없지.”그리 쉽게 나아질 병이 아니었기에 나는 더 이상 그를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서둘러 비밀번호부터 바꿨다.다시는 그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게 하나라도 안전장치를 더 해놓아야만 했다.한참 만에 소파로 돌아온 나는 바로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나 방금 운성 도착했어요. 저녁엔 오피스텔로 갈게요.]이곳은 고현성과 함께 살던 곳이라서 곳곳에 그의 체취가 남아있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문자를 보내고 차 키를 들고 일어섰지만 갈 곳이 없어 고민하던 때에 마침 담현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수아 언니, 지금 어디예요?”“왜?”“나와서 같이 놀래요?”“어딘데?”“운성에
윤다은은 또 고정재의 동생이었기에 나는 출발하기 전 고정재에게 문자를 보냈다.[금방 갈게.]답장을 보고 난 나는 바로 유흥가로 향했고 내가 도착했을 때 담현아는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소파에 가벼운 몸을 기대고 있었다.윤다은은 나를 보자마자 맥주를 따라주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요새 한약 먹고 있어서 술 못 마셔. 현아는 많이 마셨어? 아주 인사불성이 됐네.”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청이 째지게 울리고 있는 이곳 홀에서는 여러 커플들이 품위 없는 짓들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품위를 따지는 게 더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비서의 말로는 운성에서 유명한 가빈회가 이곳 3층에서 손님들을 접대한다던데 고현성도 가끔 출입하는 곳이라고 했었다.내 질문에 윤다은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한잔 먹고 저렇게 됐어요.”여전히 붙임성 좋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은 씨 오빠한테 연락했으니까 금방 데리러 올 거야.”내 말이 끝나자 어딘가 실망한 듯한 윤다은에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기분이 안 좋아 보여.”“아니에요.”저번에 윤다은이 날 구해준 일로 부쩍 가까워졌기에 나는 자연스레 그녀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윤다은의 기분이 다운된 건 아무래도 고정재와 관련돼있는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자세하게 묻기도 애매해서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여주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초록색 코트를 걸친 고정재가 라운지에 도착했는데 그는 한결같이 고상하고 기품있어 보였다.긴 다리로 빠르게 윤다은에게로 다가와 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던 고정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나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지.”“내가 부른 거잖아요. 다은 씨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 부를 걸 그랬네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내가 다급히 해명하자 고정재는 눈을 감았다 뜨며 온화하고도 거리감 있는 말투로 내 말에 답을 했다.“얘 여기 자주 와, 내가 안 오면 오늘도 경찰서에서 만났을 거야.”그동
누구보다 순결하던 석지훈이 이런 곳에, 그것도 하필 예쁜 여자들이 가장 많다는 3층에 있는 걸 본 나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내가 노려보는 걸 느낀 것인지 석지훈은 나를 향해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그에 기분이 조금 풀린 나는 윤다은을 향해 말했다.“나 지훈 씨 만나고 올 건데 같이 갈래?”“아니요, 난 그냥 집에 갈게요.”내 말에 맥없이 손을 젓던 윤다은은 이내 터덜터덜 라운지를 빠져나갔다.그 안쓰러운 뒷모습을 보는 나도 마음이 안 좋았지만 십몇 년 동안 고정재만 바라보며 속을 끓였을 그녀를 알기에, 이 감정에서 실패자라고도 불릴 수 있는 그녀의 처지를 하기에 뭐라 더 말할 수도 없었다.그녀가 다가갈수록 고정재는 자꾸만 밀어냈기에, 하필 그의 동생이었기에 윤다은은 고정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를 가질 자격이 없었다.윤다은이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다 지켜보고 나서야 나는 다시 석지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잠깐 사이에 그의 옆에는 문란한 생활을 즐기는 한량들이 가득 서 있었다.그중 한 사람은 길게 쭉 째진 눈매에 반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쇄골을 드러내며 자신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는데 내가 한참 동안 쳐다봐서 그런가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가 봐도 나를 도발하는 듯한 행동에 내 표정이 굳어지자 석지훈은 바로 옆에 있던 남자를 보며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대화의 내용은 모르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가자 쭉 째진 눈매를 가진 남자는 여전히 석지훈과 나란히 서 있었다.나는 당장이라도 다가가 석지훈의 팔짱을 끼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스킨십을 한 적이 없어서 혹시라도 석지훈이 거절할까 봐 우리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평소처럼 그를 불렀다.“오빠.”“응, 여기서 놀고 있었어?”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묻는 석지훈에 내가 해명하듯 답했다.“현아가 여기 있대서 걱정돼서 온 거예요.”석지훈이 천천히 뱉어내는
그에 나는 석지훈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을 따라가 봐도 허공뿐이었는데 아마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진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한민수는 내가 대답을 않자 석지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다들 우리 기다려, 담배 그만 피우고 들어가자. 몇 판 더 놀고 가.”“네가 얘 먼저 데리고 들어가.”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 둘 사이를 밝히지 않은 것만 해도 서운한데 이젠 나를 아예 모르는 남자 손에 맡겨버리는 그의 행동에 나는 살짝 언짢기까지 했다.한민수는 안에도 사람이 많은데 다 석지훈의 이 바닥 친구들이라고 일러주었다.처음 오는 곳에 나를 직접 데리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나 혼자 이곳으로 밀어 넣어버리면서 아까부터 연수아라고 나를 칭하는 그가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했다.나는 아무 말도 없이 한민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마작 테이블, 당구대, 다도 테이블, 그리고 바까지 없는 게 없었다.테이블 위에는 값비싼 술들이 줄 늘어져 있었고 넓은 공간에 사람은 일여덟 명쯤 있었는데 다들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었다.여자들은 더더욱 모공 하나 보이지 않게 두꺼운 화장을 올리고 있었는데 내가 아는 얼굴인 한민영도 보였다.전에 나를 눈 속에 파묻었던 한민영과 석지훈이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사실에 나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허리에 딱 달라붙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던 한민영은 나를 보자마자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얘는 왜 데리고 들어와?”“둘이 아는 사이야?”한민영도 나를 환영하지 않았고 나도 워낙 뒤끝이 길었기에 나는 바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아니요, 모르는 사이에요, 제가 아는 여자분들은 다 예쁘고 착한 분들이거든요.”내 말을 듣고 나와 한민영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음을 알아챈 한민수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지훈이가 데려온 사람이니까 예의 갖춰, 한씨 집안에 먹칠하지 말고.”한민영도 감정 기복이
답장을 마친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는 옆자리를 여자를 훑어보았다.아까 그 실수가 고의는 아닐 거라 믿고 싶었지만 보면 볼수록 일부러 그런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만약 그게 고의라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석지훈이 방으로 들어섰다.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의 시선은 단번에 그에게로 쏠렸는데 석지훈은 자연스레 내 옆에 와 앉았다.그건 오늘 밤 그의 행동 중에서 유일하게 내 마음에 든 것이었다.적어도 자신의 여자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또 자신이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그때 한민수가 방안의 불을 켜며 말했다.“우리 마작이나 놀자, 유진이 말처럼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적어도 2억씩은 배팅하자, 그리고 오늘 밤 꼴찌는 일등한테 새로 나온 스포츠카 선물해주는 거 어때?”마작 한판에 적어도 2억씩 배팅하면 진짜 몇십억은 쉽게 딸 텐데 돈을 제일 많은 사람은 새로 나온 스포츠카까지 사야 하는 큰 판이었다.스포츠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건 가격이 몇백 몇천억을 호가하는 동시에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건데 부자들의 놀이를 처음 본 나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돈은 문제가 되진 않지만 워낙 아는 사람이 적어서 이런 놀이에 가담해본 적도 없고 주위에 이런 친구들도 없었기에 나는 이 상황이 그저 낯설었다.하지만 그들은 차를 못 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없는지 하나둘 한민수의 제안에 동의했다.그때 한 남자가 나를 보며 곤란한 듯 물었다.“9명이면 두 테이블로 놀 수는 있는데 사람이 하나 남네 그러면.”“저는 괜찮으니까 알아서들 게임 하세요.”내가 웃으며 말하자 한민영은 조롱 섞인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그래, 딱 봐도 넌 질 돈도 없어 보여.”연씨 집안이 대대로 쌓아온 돈이 지금은 다 내 소유인데 내가 재수가 없어서 몇 달을 진다 해도 적어도 돈 걱정은 없을 것이다.한민영의 말은 대꾸할 가치도 없는 허무맹랑한 말이라서 나는 화는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여자를 담담하게 바라보던 나는 되려 그녀를 향해 반문했다.“그래요? 그쪽이 아는 지훈 오빠는 그런 사람인가 보죠? 나랑 아무 사이가 아닌데도 나를 옆에 둘만큼 가벼운 사람인가요?”내 말이 끝나자 여자의 얼굴은 순간 창백해졌지만 그녀는 이내 원래의 평정심을 되찾고는 내 말을 받아치려고 했다.그때 누군가에 의해 방문이 열리더니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에게로 달려오며 수아언니라고 불러댔다.크롭티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포니테일을 묶고 그 위에 핑크색 머리끈까지 더한 담현아는 귀여우면서도 아주 당차 보였다.그녀를 보자 자연스레 미소를 띤 나는 한민수와 그의 친구들에게 담현아를 소개해주었다.“제 동생이에요.”내 말이 끝나자 바로 코웃음을 치는 여자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게 싫었던 한민수가 서둘러 입꼬리를 올렸다.“얼른 해요, 좀 있다 지훈이 오면 우리 다 져요.”“오빠 마작 실력은 그냥 그렇던데요.”마작을 만지며 말하는 내 말에 유진은 웃으며 대꾸했다.“우리 중에 돈이 제일 많은 것도 지훈이 둘째 형이고 마작을 제일 잘 노는 것도 지훈이 형이에요. 그런데 형은 우리 돈은 안 따려고 하죠. 우리도 지금까지 형이 잘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저번에 민영이가 형 화나게 했을 때 형이 바로 저희들 회사 한 달 매출을 따간 거예요. 그때 알았죠, 일부러 봐주는 거.”다들 석지훈을 지훈이라고 칭하는데 유진이라는 사람만은 둘째 형이라고 칭하는 게 살짝 의아하기는 했지만 나는 계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유진은 잠시 말을 멈추다가 이번에는 한숨부터 내쉬었다.“지훈이 형이 우리를 이기려고 할 때는 대부분 한민영 때문이에요. 쟤는 항상 지훈이 형 심기를 거스른다니까요. 비아드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여자한테는 절대 손을 안 대는 형이 민영이를 때리기까지 했다잖아요. 물론 우리가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요.”한민영이 맞던 그 날의 증인이 나였는데 그 일 때문에 한민영이 나를 유독 싫어하는 것이었다.
경고라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니 석지훈이 아까 한민영의 행동을 따져 물으려고 그녀를 부른 것 같았다.하지만 한민영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지훈아, 지금 내가 네 여자한테 뭐라 했다고 이러는 거야? 전에 네가 나 때렸다는 것도 아무도 안 믿어.”잠시 말을 멈추던 한민영은 이번에는 애원하듯 언성을 높였다.“너는 날 친구로 생각 안 한다 해도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이렇게까지 날 개무시할 수는 없는 거잖아!”가만히 있으니까 점점 더 선을 넘는 한민영에 담뱃재를 털어내던 석지훈은 시린 음성으로 짜증 섞인 대답을 했다.“내 여자 앞에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한민영, 우리 사이에 어떻게 정이 있겠어?”석지훈의 말에 안색이 파래지던 한민영은 절망 어린 눈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다시 힘주어 뜨며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정이 없다고? 네가 비아드에서 얼어 죽게 됐을 때 누가 널 살려줬는지 잊었어?”그 말에 석지훈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마치 그의 치부를 건드린듯했다.“그날 일은 언급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희 집안이 날 도와준 건 맞아, 네가 한씨 집안 정통후계자인 것도 맞고. 그런데 내가 은혜를 은혜로만 갚는 놈은 아니라서. 한 번 더 그 입 멋대로 놀리면 후계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거야. 어차피 너희 할아버지가 더 아끼는 건 네 배다른 오빠 한민수잖아.”누가 봐도 틀림없는 협박이었기에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 망설이던 한민영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물었다.“너는 내가 한씨 집안 재산을 탐낸다고 생각해? 나도 전에는 안 이랬어!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도 지난날의 바보같이 착했던 내가 후회돼.”“내가 원하는 건 언제나...”석지훈은 한민영의 말을 막으며 차갑게 대꾸했다.“알아, 네가 뭘 원하는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한민영이 하려던 건 아마 석지훈의 사랑을 원한다는 말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그 말들을 채 내뱉지도 못하고
내가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고현성은 이제 끝났어. 잘나가던 인생이 재앙 덩어리를 아내로 맞는 바람에 망한 거잖아!”재앙 덩어리...나는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그때 고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그는 모든 것을 잊었지만 수아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오직 그의 수아만을 옹호하고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침묵하는 석지훈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오히려 담유미가 물었다.“그럼 넌 바보야?”바보에게 바보냐고 묻다니.나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입 다물어요!”“왜? 부끄러워서 화내는 거야?”한성범은 이때다 싶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그럼 고현성이 바보가 아니라는 거야? 연수아, 난 널 초대 안 했으니 나가. 곧 ‘바보극' 공연이 있거든!”한성범은 석지훈의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눈앞의 술잔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위해 막아냈다. 마음속에서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그때 고현성이 황급히 일어나 나를 진정시켰다.“저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 수아는 그냥 내 아내일 뿐이야!”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차가운 눈빛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저 사람을 감쌀 건가요?”석지훈은 차가운 침묵으로 나에게 답했다.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술잔을 다시 한성범에게 던졌다. 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받아 바닥에 던져버렸다.유리 조각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흩어졌다.그때 담유미가 차갑게 말했다“연수아 씨, 너무 건방지네요.”그러자 담현아가 차갑게 꾸짖었다.“입 닥쳐!”담유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원태웅은 황급히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윤아야, 화내지 마. 우리 여기서 나가자!”나는 눈
석지훈은 당연히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에서 위로 그를 올려다보며 비판했다.“오후에 그 일은 당신이 잘못했어요!”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음?”“나는 그 사람들과 친분이 있어요. 친구처럼. 그들이 나를 유람선에 초대한 건 내가 그들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석지훈 씨라고 했죠? 설마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당신 주변에 자주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근데 내가 당신의 무엇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우리 석씨 가문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내 말은 다소 따끔했고 석지훈의 얼굴은 차가워졌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어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생각에 빠져 착각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혹시 당신 마음속으로는 나를 좋아하는데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나를 피하고 당신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설마 마음이 흔들릴까 봐 두려운 건가요?”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말을 돌렸다.“물론.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 속마음을 알 수는 없죠. 됐어요, 당신이랑 말싸움하기 귀찮아요!”그는 차갑게 말했다.“허튼소리.”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평소에 나한테 신경 끄세요!”석지훈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못 참네. 그 성격에 어떻게 여자 없이 지금까지 버텼을까? 아마도 내가 운이 좋은가 봐. 안 그러면 당신을 어떻게 얻었겠어!”‘지훈 씨,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신앙처럼. 당신 말대로 이 길을 따라갈게! 당신이 나에게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 기억해둘 테니까! 나중에 똑같이 갚아줄 거야!’담현아는 몇 분 동안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나는 놀리듯 물었다.“부부끼리 무슨 달콤한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이제 푹 빠진 거야?”담현아는 웃으며 물었다.“푹 빠졌다는 게 사랑한다는 뜻이에요?”내가 되물었다.“그럼 아니야?
담현아는 의리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홀을 나와 뒤뜰을 찾아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갑자기 고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담현아가 먼저 그를 언급했던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나 아저씨한테 고현성의 현재 상황을 들었어요. 그의 지금 상황이... 아저씨는 아주 괴로워하더라고요. 결국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수아 언니는 어때요?”담현아는 내 마음이 아픈지 묻고 싶어 했다내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있겠는가?그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내 전남편인데.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게다가 지금의 고현성은 변하고 있었다.그는 예전의 그 남자와는 완전히 달랐다.그는 심지어 아이를 나의 생일선물로 돌려주기까지 했었다.나는 담현아 앞에서 고현성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희연이가 요즘 연락 오던?”“네.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아서 아이스랜드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한대요. 왕자현 씨가 옆에서 계속 돌봐주고 있다고 하더라고요.”담현아가 왕자현을 언급하자 나는 흥미가 생겨 말했다.“왕자현 씨 집안이 엄청 부자라며?”담현아는 뭔가 아는 듯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왕씨 가문은 세력은 없어도 돈은 엄청 많죠.”돈이면 다 되지. 돈이 곧 힘인데.담현아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급히 일어서며 고정재의 전화라고 했다.담현아가 남편 전화를 받으러 뒤뜰을 나가자 앉아서 할 일이 없던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나는 2층 발코니에서 고독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미소를 짓고 떠나려 했다.그런데 그가 뜻밖에도 나를 불러 세웠다.“연수아 씨.”나는 걸음을 멈췄다. 석지훈이 나를 부른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웠다.오후에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그가 그렇게 차가우니 나도 굳이 아부할 필요는 없었다.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우리가 그렇게 친했나요?”그는 내 질문
담현아는 옷을 갈아입고 싶어 했다. 내 차에도 여벌 옷은 있었지만 우린 키 차이가 있었고 예지한도 여기 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를 근처 쇼핑몰에 데려갔다.담현아는 쇼핑이 빨랐다. 핑크색 롱드레스를 입으니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그녀는 또 반지 몇 개를 손가락에 끼고는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뻐요?”담현아는 워낙 예뻤기에 뭘 입어도 예뻤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말했다.“아주 예뻐.”담현아는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꾸미는 걸 잘 안 해서...”그녀는 쇼핑몰 화장대에서 가볍게 화장을 하고 나서야 나와 함께 한씨 가문으로 갔다. 그리고 경호원을 많이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오늘 한씨 가문에는 일부러 트집 잡으러 가는 거라 나도 준비를 해뒀다. 휴가가 방금 끝난 비서에게 문자를 해두었던 것이다.한씨 가문에 도착하니 비서는 이미 와 있었다. 내 옆에 있는 23명 외에도 비서는 꽤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비서는 우리 뒤를 따라 들어가고 나머지는 입구를 지켰다. 담현아는 초대장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담유미를 발견했다.흰색 이브닝드레스에 진한 화장을 한 담유미는 큰 키 덕분에 드레스가 참 잘 어울렸다. 담현아는 그녀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담유미, 너 엄마 아빠 앞에서 무슨 말을 했어?”담유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 지금 언니한테 따지는 거야?”“미안하지만, 난 오빠밖에 없어.”담현아의 말은 너무 매몰찼다.담유미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곧 설명했다.“난 네 일에 관심 없어. 부모님은 오빠한테 네 남자친구 얘기 들으신 거야.”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너랑 상관없는 일이네!”담현아의 말투는 꽤나 퉁명스러웠지만 담유미는 별말 없이 얼굴만 굳힌 채 가버렸다.그녀가 가고 나서야 담현아가 말했다.“우리 집의 골칫거리는 바로 저 여자인데 집안 사업까지 쥐고 흔들고 있죠. 하지만 뭐, 나쁘진 않아요. 어차피 나랑 오빠는 담씨 가문의 사업에는 관심 없으니까!”담유미에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니.
석지훈을 이렇게 놀리는 건 한민수밖에 없을 것이다.석지훈은 침묵으로 한민수에게 답했다.한민수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수아 씨는 동성에서 잘나가는 집 딸이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줄 서는지 알아? 게다가 예쁘기도 하지!”크루즈선 위라서 석지훈은 평소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얇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실크 바지만 입고 있었다. 평소 차가운 이미지에 뭔가 좀 자유로운 느낌이 더해져 꽤 매력적으로 보였다.한민수가 계속 석지훈의 앞에서 나를 칭찬하자 옆에 있던 원태웅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윤아는 확실히 예쁘지.”석지훈은 원태웅을 홱 쳐다보며 물었다.“너 뭐라고 불렀어?”“윤아. 애칭이야!”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너희 둘, 앞으로 얘 내 앞에 데려오지 마.”그는 한민수와 원태웅의 속셈을 눈치챘던 것이다.그는 분명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다른 평범한 아가씨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래서 그들 두 사람에게 나를 자기 앞에 데려오지 못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이런 그를...지금 이 순간 나는 석지훈이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나는 착하게만 굴면 석지훈의 눈에 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내가 가죠. 뭐.”나는 한민수의 손을 뿌리치고 크루즈선에서 내려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차에 타니 원태웅의 문자가 왔다.[형님이 마누라 잡다가 나중에 엄청 후회할 것 같은데!]나는 입술을 깨물고 답장했다.[다 적어둘 거예요.]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켜서 몇 년 몇 월 며칟날에 석지훈이 나에게 한 일을 적었다. 나중에 그의 병이 나으면 모조리 계산할 생각이었다.나는 쪼잔하게 하나하나 다 적어둘 것이다.나는 차를 몰고 카페로 돌아왔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니 피곤해져서 나는 카운터에 엎드려 7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담현아를 깨우러 안으로 들어갔다.담현아는 이미 깨어 있었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서 그녀의 뺨
담현아는 지난번 일 때문에 계속 앙금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주민솔이 경찰서에서 나왔다고 하니 순순히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녀는 나에게 카페에서 30분 동안 기다리라고 했다.30분은 금방 지나갔다.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담현아가 까만 머리를 땋은 채 캐리어를 끌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겨우 끝났어요!”나는 웃으며 물었다.“왜 이렇게 힘들어?”“일찍 들어오려고 며칠 밤샜어요. 일단 카페에서 좀 자고 있을게요. 이따가 7시에 깨워줘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2층에 방 있어.”고양이 카페 2층은 며칠 전 내가 임대해 놓은 것이었다.담현아는 짐을 1층에 두고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고 나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끌고 그녀를 따라 올라가 방에 짐을 놓아주었다.내려와 보니 예지한이 얼굴을 찌푸리며 나에게 물었다.“사장님 가게에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자주 와요?”이상한 사람?어디가?그냥 다 그녀가 아는 사람일 뿐이지.나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며 말했다.“들켰네요!”그것도 내가 실수로 들키게 한 것이었다.이 말에 예지한은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내 정체를 알았어요?”“네. 방금.”내가 대답했다.“아, 여기 좀 더 있으려고 했는데.”예지한은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내가 물었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한 달 더 있을 거예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여기 떠나기 아쉬워요.”예지한은 여기서 2년을 살면서 모든 것에 정이 들었고 또 여기는 한가로워서 떠나기 아쉬울 만도 했다.하지만 한민수의 말이 맞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책임이 있었다. 예지한이 아직도 저렇게 놀 수 있는 건 할아버지가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었다.그리고 한민수, 예유진 그리고 진유겸, 심지어 나까지도 우리 모두는 자신이 가진 것을 굳건히 지켜야 했다.예지한도 마찬가지였다.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예 씨 가문이 있었다.예지한은 좀 시무룩해 하면서 다시 일하러 갔다. 나는 카운터를 보고
어젯밤 길바닥에서 자고 두 시간이나 걸었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감기 기운이 있었다.내가 막 나가려는데 원태웅의 문자가 왔다. [형이 방금 운성에 도착했어. 이틀 정도 여기에 머물 거야.]그는 바쁜 남자였다.항상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기에 이틀이나 머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석지훈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니 항상 만남은 짧고 헤어짐은 길었다. 며칠 함께 있으면 또 헤어져야 했고 헤어지면 한두 달, 길면 반년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나는 운성으로 돌아온 후 진유겸의 결혼식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나는 그가 왜 결혼식을 연기했는지 잘 몰랐지만 최희연이 국내에 없으니 그녀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운성에 도착한 후, 나는 고양이 카페에 가서 최희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 답장이 왔다.[나도 방금 알았어. 원래 일찍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미룰 수밖에 없네! 수아야, 나 방금 수술을 마쳤고 얼굴의 흉터가 아직 회복 중이라 아이스랜드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할 것 같아. 하나한테서 이미 영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가 시간이 된다면 카페를 좀 돌봐줘!]나는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후 다시 물었다.[흉터는 어때?]최희연이 답장했다.[아직 회복 중이지만 왕자현 씨가 흉터가 남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어. 나는 그를 믿어. 다 나으면 귀국할게!][그래. 그때의 너는 분명 아름다울 거야.]최희연은 바로 답장하지 않고 30분 뒤, 갑자기 슬픈 어조로 말했다.[왕자현 씨가 내가 그림을 배웠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싶어 해. 그는 그 분야에 조예가 깊거든. 근데 내 손목이... 수아야, 나는 붓을 잡을 수는 있는데 손이 떨려서 도저히 붓을 댈 수가 없어!]최희연은 그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정성을 쏟았다. 그 노력으로 힘들게 성과를 내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주민솔 그 여자는 정말 죽어 마땅했다.며칠 전에 진유겸은 그녀를 경찰서에서 꺼내주었다.나는 최희연에게 조심스럽게
석지훈은 내가 생떼를 부린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 섰고 그는 내가 따라오지 않자 몸을 돌려 차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아주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생떼 부리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석지훈: “...”이번에 석지훈은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그는 별장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돌려 별장 밖으로 나가 길가에서 도라지꽃 몇 송이를 꺾었다.나는 꽃을 옆에 두고 길가에 옆으로 누워 눈을 떴다. 늘씬한 몸매, 아름다운 드레스, 그리고 꽃 한 송이. 2층에서 보면 아름다운 그림 같을 것이다.내 행동은 아주 이상했다.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지금 술에 취한 상태였다. 비록 대부분은 연기였지만 술에 취한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석지훈은 분명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여기 누워서 그를 기다릴 것이다.석지훈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참을성이 있었다. 나는 그가 2층 방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도 몸을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나는 별장 입구에 밤새도록 누워 있었고 그러다가 먼저 잠들어 버렸다. 깨어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술에 취한 척할 수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서 의식이 흐릿했다고 해도 하룻밤이 지나면 알코올은 이미 다 날아가 버렸을 테니 말이다.나는 재채기를 하고 일어났다. 원래는 함승윤에게 전화해서 나를 데리러 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때야 내 가방이 석지훈의 차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초인종을 눌렀다.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내가 거의 포기하려고 할 때 정장 차림의 석지훈이 나왔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런 석지훈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리움이 더 컸다.예전처럼 차갑
이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설명해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형, 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 형의 석씨 가문을 빼앗은 여자야! 방금 보니까 술에 취했더라고. 곁에 비서도 없이 말이야. 전에 날 도와준 적이 있는데 차마 그녀를 혼자 둘 수 있어야지. 그래서 집에 데려다주려고.”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지?”원태웅: “...”석지훈이 지시했다.“이 여자를 네 차에 태워.”“형, 내 차 고장 났어. 우리 두 사람 좀 집까지 데려다줘! 얘는 술 취하면 얌전해. 절대 방해 안 할게.”석지훈: “...”석지훈은 결국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원태웅은 전화를 받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야 했다. 정말 일이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석지훈의 운전기사가 그를 길가에 내려주자 차에는 나와 석지훈 두 사람만 남았다.나는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는 신사답게 나를 밀어내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팔을 껴안고 웅얼거리며 말했다.“정우 씨.”“허, 정우까지 네 손에 넘어간 거야.”남자가 갑자기 뜬금없이 말하자 나는 당황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 운전기사가 물었다.“아가씨, 어디 사세요?”나는 계속 당황한 척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무관심하고 간결하게 말했다.“주소.”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무슨 주소요?”그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네 집 주소.”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정말 오랫동안, 거의 돌처럼 굳어 버릴 때까지 생각하다가 석지훈의 품에 쓰러졌다.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운전 기사에게 지시했다.“동성으로 돌아가.”2년 전 석지훈은 동성에 살았었다.동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보니 창밖에는 온통 도라지꽃이 피어 있었다. 여기는 석 씨 저택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석지훈은 몰래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나는 깨어난 후 계속 멍하니 차 안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행히 술에 취해서 그런지 그는 나를 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