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라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니 석지훈이 아까 한민영의 행동을 따져 물으려고 그녀를 부른 것 같았다.하지만 한민영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지훈아, 지금 내가 네 여자한테 뭐라 했다고 이러는 거야? 전에 네가 나 때렸다는 것도 아무도 안 믿어.”잠시 말을 멈추던 한민영은 이번에는 애원하듯 언성을 높였다.“너는 날 친구로 생각 안 한다 해도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이렇게까지 날 개무시할 수는 없는 거잖아!”가만히 있으니까 점점 더 선을 넘는 한민영에 담뱃재를 털어내던 석지훈은 시린 음성으로 짜증 섞인 대답을 했다.“내 여자 앞에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한민영, 우리 사이에 어떻게 정이 있겠어?”석지훈의 말에 안색이 파래지던 한민영은 절망 어린 눈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다시 힘주어 뜨며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정이 없다고? 네가 비아드에서 얼어 죽게 됐을 때 누가 널 살려줬는지 잊었어?”그 말에 석지훈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마치 그의 치부를 건드린듯했다.“그날 일은 언급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희 집안이 날 도와준 건 맞아, 네가 한씨 집안 정통후계자인 것도 맞고. 그런데 내가 은혜를 은혜로만 갚는 놈은 아니라서. 한 번 더 그 입 멋대로 놀리면 후계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거야. 어차피 너희 할아버지가 더 아끼는 건 네 배다른 오빠 한민수잖아.”누가 봐도 틀림없는 협박이었기에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 망설이던 한민영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물었다.“너는 내가 한씨 집안 재산을 탐낸다고 생각해? 나도 전에는 안 이랬어!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도 지난날의 바보같이 착했던 내가 후회돼.”“내가 원하는 건 언제나...”석지훈은 한민영의 말을 막으며 차갑게 대꾸했다.“알아, 네가 뭘 원하는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한민영이 하려던 건 아마 석지훈의 사랑을 원한다는 말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그 말들을 채 내뱉지도 못하고
석지훈은 늘 말보다 행동이 먼저였다.행동은 없고 말 뿐인 남자들보다야 백배 천배 나은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자꾸만 그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아까도 사람들 앞에서 나를 선양 그룹 대표 연수아라고 소개하는 그에 그가 일부러 나와의 거리를 두려는 줄 알고 혼자 서운해했는데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될 것 같았다.그때 입술을 말아 물던 한민영이 그의 말에 답을 전했다.“석지훈, 나 개한테 이미 많이 참아서 그 정도만 한 거야.”말을 마친 한민영은 당당하게 3층을 벗어났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한민영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얻지도 못하고 가는 모습이 가련해 보였지만 그도 잠시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와 나는 적일 뿐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일러주었다.한민영이 떠나간 뒤에도 석지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다시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는데 이번에는 피지 않고 그저 담배가 타들어 가는 걸 지켜만 보고 있었다.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앞으로 나설 생각도 못 하고 큰 화초 뒤에 몸을 숨기고만 있었다.아까 한민영이 석지훈의 부모님을 언급하던데 아마도 그게 그의 기분에 영향을 미친 것 같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화초 뒤에서 나와 석지훈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으며 물었다.“오빠,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왜 갑자기 그렇게 물어?”“그냥, 오빠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내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젓던 석지훈은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를 언급했다.“엄마 오십 세 생신이 얼마 뒨데 생신 때마다 꼭 시간 내서 엄마 보러 갔었거든. 그래서 그날이 나한테는 매년 제일 행복한 하루였어.”석지훈이 말하는 엄마는 석씨 집안 별채에 머무는 석지훈의 친엄마일 텐데 왜 친부모를 일 년에 한번밖에 못 보는지 궁금해진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친어머닌데... 왜 일 년에 한번만 보는 거예요?”“엄마는 한 번도 나한테 이유를 알려주신 적이 없어, 나도 아버지한테 묻지 않았었고
그냥 집에서 나갔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왜 갑자기 그러신 거예요..?”1층에서는 청춘남녀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시끄러운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는데 화려한 조명은 3층에 있던 우리 둘도 비껴지나 가며 소용돌이쳤다.그 조명이 석지훈의 얼굴에 비추자 복잡한 그의 심경이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아버지가 아프신 틈을 타서 다 버리고 운성으로 오셨어.”석지훈이 운성에 온 게 어머니를 만나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아챈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그럼 어떡해요?”“아까 어머니 만나서 물어봤는데 집엔 안 가시겠대, 그리고...”천천히 얘기를 이어나가던 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보며 물었다.“게임은 끝난 거야?”나는 석지훈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적대며 대답했다.“현아가 나 대신하고 있어요.”“너도 가서 같이 놀아.”“오빠는요?”“난 누구 좀 기다려야 해서.”볼일이 남아있다는 석지훈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던 나는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방으로 향했다.“고마워, 현아야.”“괜찮아요, 어차피 제 돈도 아닌데요 뭘.”담현아는 이미 그들에게 잘 어우러진 채로 마작을 하고 있었고 한민수도 간만에 돈을 땄는지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그들은 수표로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오고 가는 수표에는 석지훈의 이름이 적혀있었다.“얼마나 잃었어?”“저는 안 져요.”내가 담현아의 옆으로 다가가며 묻자 그녀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우리 애기가 아직 입만 살았네.”한민수의 말에 담현아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에게 놀 거냐고 묻지 않는 담현아에 나는 그녀가 계속하고 싶다는 걸 알아채고는 자리에 앉아 아까보다 표정이 더 굳어져 있는 담유미를 바라보았다.가만히 앉아 그들의 게임을 지켜보던 나는 담현아는 일부러 적은 돈은 져주면서 큰돈이 걸릴 때만 마지막까지 버텨내서 셋에게 타격을 입히는 걸 보아냈다.게임이 거듭될수록 다들 그 수법을 눈치챘고 한민수는 감탄을 하며 말했다.“와, 이걸 지금까지 들고
한결같이 스포츠카에 관심을 보이는 담현아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여기서 가장 많이 잃은 사람이 제일 많이 딴 사람한테 코닉세그 주기로 따로 걸었거든.”“그럼 우리 엄청 많이 딴 거네요?”그때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담현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지만 나머지 세 명이 잃은 돈을 다 계산했을 때, 나를 포함한 네 명은 모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담유미는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이 혼자 차분하게 앉아있었다.세 명이 잃은 돈은 모두 액수가 정확히 같아서 이긴 사람은 한 명인데 내기에서 진 사람은 세 명인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그 말인즉 석지훈은 몇천억짜리 코닉세그를 세 대나 얻게 된다는 뜻이었다.물론 연수아 본인도 재벌이었지만 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금액에 그는 재벌들의 놀이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코닉세그의 금액보다 담현아가 놀라웠던 한민수는 웃으며 말했다.“꼬맹이 좀 치네.”그렇게 별로 유쾌하지 않게 게임을 끝내고 나는 담현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웬일인지 석지훈이 보이지 않았다.일단은 담현아를 병원에 데려다주는 게 우선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가면서 놀랍다는 듯 물었다.“돈은 어떻게 맞춘 거야?”담현아는 차창을 내리더니 바람을 맞으면서 차분하게 설명했다.“언니 가고 나서 누가 제일 많이 잃었냐고 물었더니 다들 언니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수표도 보니까 석지훈 씨 이름밖에 없고.”잠시 말을 멈추던 담현아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잃고 이긴 액수에 차이가 있으니까 일부러 몇 번 봐줬어요. 그럼 손에 쥔 돈의 금액이 같아지잖아요, 결국 잃은 것도 같아지는 거고. 왜 그랬냐고 물으면 전 그냥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한 건데 거기에 코닉세그가 걸려있는 줄은 몰랐죠!”담현아는 그냥 재미를 위해서 한 일인데 담유미는 그걸 치욕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담현아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그와 석지훈 모두 사람을 손아귀 위에 올려두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신 같은 부류의 사람이
“내가 누군진 네가 더 잘 알잖아.”목소리는 여름날에 내리는 보슬비처럼 부드러웠지만 내뱉는 말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내가 누군진 네가 더 잘 알 거라는 그 말은 나를 버린 것에 대한 그 어떠한 죄책감도 없다는 듯이 들렸다.나를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나에게 해명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왜 굳이 전화까지 했는지 어이가 없어 그녀에 대한 나의 증오심은 커지고만 있었다.“저한테는 왜 전화하신 건데요.”그녀를 보면 가슴에 억눌렀던 분노가 터져 나와 뭐든지 따져 물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겨우 이런 말들밖에 할 수 없었다.“네 아빠가 보낸 사람이 널 거의 다 찾았대.”“그래서요?”내 친아빠가 나를 찾고 있다는 건 아빠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나는 담담하게 되물었다.“수아야, 난 널 지키고 있는 거야, 나 아니었으면 네 아빠 진작에 영진에 있는 네 부모님까지 다 찾아냈을 거야. 그랬다면 그 사람들은 진작 죽었겠지. 너는 왜 자꾸 알아서 위험한 짓을 하는 거야?”“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나한테는 지켜야만 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어. 그 아이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두 달 동안 네 아빠가 너를 못 찾게 하는 거야.”“네 아빠가 널 찾게 되면 내 아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왜 그렇게 걱정하나 했더니 친엄마라는 사람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었나 보다.그리고 그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내다 버린 자식인 나한테 이렇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그래서 어쩌라고요.”“동성 떠나서 프랑으로 가.”아들 하나 지키겠다고 한번 버린 나한테 프랑으로 가서 숨어 있으라는 이기적인 엄마에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수아야...”그녀는 또다시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그 이름이 낯설기만 했다.어차피 별 기대는 하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그 여자가 나를 낳아준 내 친어머니였기에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되니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가 없었다.한평생 얼굴도 본 적 없는 친엄마라는 사람이 갑자기 전화 와서 하는 말이 제 아들을
그 여자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한 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석지훈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집 비밀번호 뭐야?]문자를 본 내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자 큰 키로 문을 가리고 서 있던 석지훈이 익숙하게 나를 안아 들며 웬일로 투정 부리듯 말했다.“나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가버리기야?”그 말에 나는 웃으며 해명했다.“내가 나갔을 때는 오빠가 없었어요. 그래서 현아 병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바로 왔죠. 오빠는 어디 갔었어요?”“다른 방에서 얘기하고 있었지.”내 머리를 쓰다듬던 석지훈이 셔츠 단추를 풀며 욕실로 들어가자 나는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변덕스러운 운성 날씨답게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어차피 핸드폰을 보는 것도 지겨웠던 나는 일어나서 커튼을 열어젖혔다.내가 지내는 오피스텔은 거실에서는 동네가 보이고 방에서는 강이 보이는 구조였기에 나는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빗물에 출렁이는 강을 바라보았다.결벽증이 살짝 있는 석지훈은 밖에서 돌아오면 늘 샤워부터 했는데 원래는 그를 기다리려고 했지만 나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그리고 그가 다 씻고 나와서 움직이는 소리에 다시 눈을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수건으로 머리와 몸의 물기를 깨끗이 다 닦아낸 석지훈은 그제야 내 옆으로 와 앉으며 물었다.“내일 약속 있어?”“우리 아직 데이트도 안 했는데.”여전히 유혹적인 몸을 드러낸 채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는 석지훈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런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요즘의 석지훈은 내가 처음 알던 석지훈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커플끼리 하는 일들도 하려 노력하고 있는 지금 모습이 나는 예전보다 더 좋았다.그래서 나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말했다.“내일 수업하러 가야 하는 데 11시면 끝나요.”“무슨 수업?”“피아노요.”석지훈이 놀라며 묻자 나는 차분하게 설명
석지훈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도 이런 얘기를 꺼낸 적 없어서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오늘따라 저기압인 데다가 어머니 얘기까지 꺼냈던 그를 떠올리고는 혼자 슬퍼했을 그를 다독이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석지훈의 볼에 뽀뽀를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진짜 힘든 일 있거나 그러면 나한테 털어놔도 돼요. 내가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나 그래도 오빠 여자잖아요. 힘든 건 같이 나눠야죠.”하지만 석지훈은 이내 괜찮은 척 나를 떼어내더니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괜찮아, 내일 일 끝나면 내가 데리러 갈게. 그리고 아버지 상태도 많이 좋아지셨대. 나랑 같이 아버지 보러 가자.”“석씨 집안 사람들이 하나같이 유난이긴 하지만 내가 엄마 아들이라서 아버지는 나한테 특별히 더 잘해주셨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은 마.”내 손을 잡아 오며 말하는 석지훈에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이렇게 빨리 어른들 만나는 거예요?”그에 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나는 다독여주었다.“그냥 얼굴만 뵙는 거야, 그리고 아버지 몸도 안 좋으셔서... 지금 아니면 기회도 없을 것 같아서 그래.”점점 더 나랑 얘기를 나누려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석지훈에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안으며 일어서더니 바로 침대로 향했다.내가 일부러 꼬신 것도 아닌데 이렇게 먼저 내 옷을 벗긴 건 이번이 처음이라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나를 다루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하고 조심스러워서 나는 그대로 그에게 몸을 맡겨버렸다....아침에 눈을 뜨자 이미 자리를 비운 석지훈에 나는 등이 다 파인 초록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브라운 계열의 아이섀도를 꺼내어 서둘러 화장을 마쳤다.마지막으로 올림머리를 하고 큰 귀걸이까지 껴주니 거울 속의 내가 세상 예뻐 보였다.석지훈이 이렇게 과감한 노출을 싫어할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미간을 찌푸리는 그가 보고 싶어 나는 지하철을 타고
나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내 남자친구야.”다른 사람들 앞에서 석지훈을 남자친구라고 소개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분명 내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남자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것을 보았으니까.“연 샘 남자친구분 정말 멋지세요.”나는 웃으며 서둘러 말했다.“수업 계속해.”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석지훈에게 달려갔다. 그는 팔을 뻗어 나를 품에 안고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끝났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끝났어요.”석지훈의 손이 내 매끈한 등에 닿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다음에는 이런 옷 입지 마.”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렇게 입는 게 예쁜데.”석지훈: “...”그는 나를 흘끗 보고는 위압적으로 말했다.“이후에는 집에서 나한테만 보여주면 돼.”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너무 막무가내 아니에요.”석지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실 문 앞에서 구경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 장난기 많고 대담한 학생 하나가 짓궂게 말했다.“연 샘 남편분을 뭐라고 부를까요? 설마 사부님? 사부님, 연 샘 잘 대해줘야 해요! 안 그러면 우리 반 애들 수십 명이 가만 안 둘 거예요.”그 학생은 석지훈을 내 남편이라고 불렀다...석지훈은 그 학생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물었다.“나를 뭐라고 불렀지?”“사부님이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드려요?”석지훈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칭찬했다.“얘 장래가 유망하네.”석지훈을 쳐다보니 그의 기분은 엄청 좋아 보였다. 그 말을 마친 후 그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자리를 떠났다.석지훈의 차는 입구에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가 차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뒤따라오는 차를 발견했다.그는 날카롭게 추측하며 물었다.“네 경호원이야?”“네. 안전을 위해 붙여 놨어요.”석지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돌아가라고 해. 석씨 가문은 은둔 가문이라 외부인은 반경 십 리 안에도 접근하기 어려워.”내게 석씨 가문은 끝없이 펼쳐진 담장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고향에서 부랴부랴 달려오신 윤다은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수아야.”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아주머니.”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맙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윤다은도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인터넷에서 화제였던 그 연수아 맞죠? 이혼한 사람이 어떻게 다은이의 들러리를 설 수 있죠?”맞다. 이혼한 내가 어떻게 들러리를 설 수 있겠는가?사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윤다은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지적하다니.윤다은의 결혼식이었기에 나는 그 사람과 논쟁하기 싫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윤다은은 내가 억울한 거 같았는지 립스틱 내려놓고 정색하면서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한 건 맞지만, 지금은 미혼이에요. 왜 들러리를 설 수 없다는 거죠?”그 여자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불길해요.”하지만 윤다은은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길하다고 하면 길한 거예요.”“집안이 좋다고 우리 이씨 가문을 무시하지 마세요. 작은어머니께 말씀드릴 테니, 그때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요!”알고 보니 그녀는 이주원 쪽 친척이었다.그녀가 방을 나가자 나는 윤다은을 달래며 말했다.“저 사람 말이 맞아. 나는 이혼했으니 네 들러리로는 적합하지 않아.”나는 혹시라도 이씨 가문 사람들이 윤다은을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윤다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나는 언니가 꼭 내 들러리를 서 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나: “...”점심때쯤 이주원이 신부를 데리러 왔다. 이주원의 들러리들은 모두 같은 과 의사들이나 오랜 친구들이었는데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주원에게 들러리 중 한 명을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이주원은 나와 최희연에게 이미 남
담현아와 나는 호텔에서 근처 야시장까지 걸어갔고 배가 고파진 그녀는 꼬치구이를 먹자고 했다. 그녀가 이것저것 엄청 많이 시키는 걸 보자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둘이서 다 먹을 수 있겠어?”그녀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희연 언니에게 전화해서 같이 먹자고 해요. 희연 언니는 술도 잘 마시니까 오늘 취할 때까지 마셔보자고요.”나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누군가는 술 한 잔에 취했던 것 같은데?”담현아는 투덜거렸다.“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웃음을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최희연에게 카톡을 보냈다. 곧 그녀의 답장이 왔다.[미안. 유겸 씨가 왔어.]나: ...진유겸은 꽤 집착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최희연이 금운에 오자마자 바로 따라온 걸 보면 말이다.문득 나도 석지훈이 보고 싶어 졌다.그는 떠난 지 한참이 되었고 그동안 나는 그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나는 휴대폰을 들고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잘 자요.]하지만 그는 답장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오빠, 자요?]잠시 후, 그의 답장이 왔다.[어?]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듯했다.그는 최소한의 안부 인사조차 없었다.나는 더 이상 그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담현아가 메뉴를 고르고 내 옆에 앉자 나는 그녀가 주문한 맥주를 보며 물었다.“취하지 마. 난 너 호텔까지 못 업고 가니까. 그럼 정재 씨를 불러야 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담현아는 겁도 없이 대답했다.“아저씨는 완전 신사예요.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진작 일어났겠죠! 그 사람은 보수적이라 그의 신혼 아내 외에는 누구에게도 선을 넘지 않을걸요. 그런 사람한테 뭘 하기를 바라겠어요?”나는 숨은 뜻을 알아채고 물었다.“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얘기 같은데?”담현아는 나를 흘겨보았다.“내가 언제요?”나는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한 거잖아.”“수아 언니, 나이 들면 다 이렇게 생각이 구려지는 거예요?”나: “...”내가 늙었나?갑자기 좀 서운했다.
그는 두 사람의 표정 차이가 워낙 커서 분간할 수 있었다. 고정재는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고현성은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윤다은과 고정재는 강가를 따라 그의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윤다은은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었다.뭔가 겁먹고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이주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윤다은의 긴장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오빠, 미안해. 이제야 결혼한다는 얘기를 해서. 난 그저... 미안해... 많이 보고 싶었어.”고정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어떤 위로를 담고 있었다.“다은아, 네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었는데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 같아.”“오빠, 난 수십 년 동안 오빠를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수아 언니를 놓치게 만들었어... 미안해. 내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알아. 사실 오래전부터 오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 오빠, 난 이제 오빠를 놓았고 내 행복을 찾았어. 그러니 오빠도 날 축복해 줬으면 좋겠어.”그 말을 듣고 이주원은 마침내 윤다은이 마음속에 숨겨온 비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 행복은 진정한 행복일까?윤다은은 한 남자를 수십 년 동안 사랑했고 그를 따라 전 세계를 누볐다.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이주원은 그녀가 안쓰러웠다.“다은아, 네 행복을 빌어.”고정재는 손을 들어 윤다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다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내가 성인이 된 후로 오빠는 더 이상 이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어. 내가 그동안 오빠에게 짐이 되고 불편하게 했지?”고정재는 그녀를 불렀다.“다은아.”“오빠...”“너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야.”윤다은은 고정재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연수아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었다.그렇다, 그는 그녀를 가족으로 여겼다.담현아는 고정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여자였다.“오빠, 지금까지 날 지켜줘서 고마워.”고정재는 웃으며 말했다.“오빠는 평생 너를 지켜줄 거야.”
“그 사람은 누구야? 너한테 뭘 요구했어?”내가 다그쳐 묻자 윤다은은 어물거리며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담현아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머리를 나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얼굴이 어두워진 윤다은을 보고 나는 그녀가 너무 난처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더는 캐묻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그러다가 갑자기 고현성이 떠올랐는데 그의 머리가 공백이 된 것을 생각하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물었다.“정재 씨는 아직 안 왔어?”담현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저야 모르죠.”1년 시간이 지났어도 고정재에 대한 태도가 여전한 담현아를 보며 나는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했다.내가 담현아의 머리를 톡톡 치자 그녀는 두 손으로 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저랑 내려가서 산책할래요?”담현아는 어리지만 눈치가 빨랐다. 나와 윤다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우리 둘을 갈라놓아 냉정함을 되찾으려는 것이다.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다.담현아와 아래층에 내려오자마자 마침 호텔 문 앞에 주차하고 있는 고정재를 만났는데 그도 나와 담현아를 보고 멍해졌다.“나를 마중하러 온 거야?”담현아가 발끈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망상이 심하네요.”이 말을 듣고 고정재는 부드럽게 웃었고 나도 웃으면서 설명했다.“우린 산책 중이에요.”“먼저 다은이 보러 갈게.”......고정재는 호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우람지고 곧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담현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고정재는 내가 어렸을 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어. 너무 눈부셔서 탐욕이 생겼지만 빛은 여전히 빛이었을 뿐 난 다가갈 수 없었어...”오늘따라 금운시의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였다. 담현아는 나의 팔을 잡고 호기심에 물었다.“왜 다가갈 수 없어요?”나는 담현아의 예쁘고 어린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빛은 너무 뜨거워서 사람은 그 빛에 다칠 수 있거든. 내가 그
하물며 그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모두 평범했다... 내가 이렇게 경호원을 데리고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다.현정우는 기타 경호원은 대기시키고 그만 나를 따라다녔다.마침 내려와 보니 문준혁이 지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어 우리는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그는 내 곁으로 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다은 씨는 안전감이 부족하지만 또 독립적인 여자예요. 저는 왠지 다은 씨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나는 대뜸 그 말을 알아들었다.“다은이의 속마음을 물어보는 거죠?”“아마 연수아 씨는 알 것 같아서요.”문준혁이 말했다.문준혁은 잘 생겼고 외모로 보면 윤다은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윤다은을 배려했으며 태도도 비굴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괜찮아 보였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임신으로 인한 우울증이 아닐까요? 임산부라면 다 그럴 겁니다.”윤다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사람은 고정재였다. 물론 이건 이전의 상태였고 지금은 잘 모른다.의사는 멍해졌다.“임신이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몰랐어요?”“죄송해요. 저도 방금 들었어요.”“아니. 남편과 아빠가 될 분이 어떻게...”“연수아 씨, 전 다은 씨를 만지지 않았어요.”나는 거의 도망하다시피 떠났고 방에 돌아와 윤다은에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도 몰랐다. 윤다은의 어른으로서, 또 그녀를 관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일은 꼭 물어봐야 했다.나는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있는 윤다은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아이의 아빠가 누구야? 닥터 문을 아빠로 만들어줄 생각이었어?”윤다은은 나에게 진심을 알려주기 싫어 건성으로 대답했다.“수아 언니, 묻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에게 설명할게요.”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닥터 문은 호텔을 떠났어.”윤다은은 말이 없었다....오후 3시쯤, 최희연과 담현아가 도착했고 기타 세 들러리도 도착했는데 보아하니 문준혁은 결혼식을 계속할 계획인 것 같다.내가 윤다은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
[보고 싶어요. 미친 듯이 보고 싶어요.]석지훈은 답장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기뻐할 거로 생각했다. 감정을 마음속 깊이 숨기는 남자로서 어떤 때 나는 그를 달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오늘 밤을 통해 나는 석지훈이 내가 좋은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고 평소에 찰떡처럼 곁에 붙어있는 나를 좋아했다. 역시 겉보기엔 신사지만 속마음은 내숭쟁이였다.나는 휴대폰을 놓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공식 석상에서 입을 옷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현정우가 마침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금운시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차로 가는지 아니면 비행기로 가는지 물었다.내일 금운시에서 비아드로 가기 때문에 운전이 불편해서 나는 현정우더러 석씨 가문에서 헬기를 동원해 금운시로 간 후 비아드로 가는 출입국 문제를 처리해달라고 했다.그는 명령을 받고 떠났고 30분도 안 되어 석씨 가문에서는 헬기를 보내와 나는 탑승 후에 윤다은에 전화했다.윤다은은 나에게 주소를 주었는데 이 헬기는 마침 현지 호텔의 뒷마당에 착륙할 수 있었다. 윤다은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잘 생겼고 분위기가 부드러운 남자가 함께 있었다.나는 이분이 바로 그 의사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윤다은의 말처럼 그의 두 눈은 정말 예뻤다. 이렇게 예쁜 눈을 가진 남자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내가 헬기에서 내려 큰 소리로 다은이를 부르자 후 그녀는 달려와 나를 안고 달콤하게 말했다.“저의 결혼식에 와주셔서 고마워요.”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당연한 거야. 최희연도 도착했어? 들러리가 몇 명이나 돼?”“선생님 집에서 준 의견에 따라 들러리가 6명이에요. 그들 셋을 빼고 나머지 세 명은 다 선생님 집안의 아랫사람이에요.”나는 알았다고 가볍게 대답하며 말수가 적은 의사 선생님을 쳐다봤다. 그러자 윤다은은 그의 팔을 잡고 인사했다.“선생님, 이분은 연수아, 전에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수아 언니예요. 수아 언니, 이분이 바로 문준혁 선생님이
이번 생에는 석지훈의 엄마를 포함해 그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석지훈이 떠난 뒤 나는 소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정신 상태가 많이 회복됐고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나는 기분 좋게 밥을 지어 먹은 뒷일을 처리하러 서한 그룹으로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이미 늦었다.나는 샤워를 한 후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언제 결혼하는지 묻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갓 약혼했어요.”“그저 물어본 거야.”“걱정하지 마세요. 꼭 잘 안배할게요.”그러자 엄마도 시름을 놓았는지 계속해서 말했다.“음, 이런 널 보니 시름이 놓여. 연시혁은... 넌 왜 그 아가씨의 가정환경에 대해 말하지 않아?”이 말을 듣자 나는 그들이 이미 송이연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두고 물었다.“그쪽은 어떤 태도예요?”“네 아빠가 낮에 상주시에 송이연 만나러 갔었어. 예쁜 아가씨인데 시혁을 말하니 다시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어.”나는 추궁했다.“다시 시작할 마음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말로는 아이를 위해 생각해 보겠지만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혀 1, 2년 시간을 들여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나도 찬성했다.“잘 됐어요. 시혁이도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데 아이는... 승아는 아마 시혁이랑 친하지 않을 수 있어요.”아직 두 살이 안된 승아는 아빠라는 단어가 서먹했다.“이제 시간이 있으면 시혁이랑 다시 얘기해 봐야겠어.”“네. 저 먼저 쉴게요.”“저녁 꼭 챙겨 먹어.”“네. 제 자신을 잘 돌보고 있어요.”전화를 끊은 후 나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보름 남짓한 기간에 나는 열심히 몸을 보양했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서한 그룹에서 업무를 처리하거나 병원에 검진받으러 갔다. 다행히 선생님은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문제가 없다고 해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 몸은 더는 탈이 나면 안 된다.석지훈이 떠난 지 30일이 되는 날에 윤다은이 전화 와서 웃으며 물었다.“수아 언니, 언제 금운시에 오세요?”나는 그제야
‘내가 울었어요?’손을 뻗어 눈가를 닦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촉촉했다.나는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저도 제가 왜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최근에 답답한 일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석지훈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쉽게 구별할 수 있어 나는 두려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탄식했다.“전 그저 사랑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이 길은 너무 험난했어요. 심지어 오빠의 엄마도...”석지훈은 몸에 얇은 하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앞머리가 헝클어졌으나 두 눈은 어두워졌다.나의 말을 듣고 그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가 다시 말했다.“엄마는 어린아이인 나를 입양했고 살아갈 기회를 줬어. 난 엄마를 존중하지만 그 전제 조건은 엄마도 나를 존중해줘야 해. 난 이미 기회를 줬었지만 만약 예전처럼 고집만 피운다면 난 더는 말리지 않을 거야.”그러자 내가 물었다.“자살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어요?”석지훈은 답이 없었다.“오빠의 엄마잖아요. 죽음으로 위협한다면 오빠의 마음은... 석지훈 씨, 솔직히 마음이 괴로웠죠.”어머니를 잃은 것은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약 또 다른 사람을 더 잃는다면...사람의 일생에서 사랑은 확실히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사랑 말도고 가족도 있었고 더욱이 결혼은 두 가정의 결합이니 한쪽에서 말린다면 아랫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어른들의 확고한 생각을 버릴 수 있을까?특히 석지훈의 어머니는 나를 미워했다.내 말이 그의 심장을 찔렀는지 그는 목소리가 한결 차가워졌다.“깊게 생각하지 마. 내가 잘 처리할 거야.”나는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실은 지금 상태도 좋아요. 전 결혼이 급하지 않으니 오빠의 어머니께서... 아마 몇 년 정도 기다린다면 언젠가 저의 엄마에 대한 미움을 잊을 수 있고 그럼 저를 받아주어 더는 오빠를 강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그러나 그때 내가 아직도 살아 있을까?“두려웠어?”나는 부인했다.“그저 오빠를 위해 고민했을 뿐이에요.”나는 석지훈의 엄마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그녀가
그가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다정하게 물었다.“아직 졸려?”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장례를 치르는 건가요?”“그래,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나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은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석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러 나섰다. 관을 덮는 순간, 석지훈의 눈가가 계속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장례는 아침 9시에 끝났다. 우리는 석씨 집안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동성시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아랫배는 계속 아팠고 목에서는 쇳맛이 점점 짙어졌다.우리는 오후 한두 시쯤 아파트에 도착했다. 석지훈은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샤워를 한 뒤 곧장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나는 그가 잠든 틈을 타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도착한 곳은 석씨 집안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병원장은 내가 온 것을 알고 급히 달려와 나를 친절히 안내하며 검사를 도왔다. 그러나 CT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의사는 내 암이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나는 충격을 받은 채 물었다.“암이 완치됐다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재발할 수 있죠?”“가주님, 조금 전에 이전 진료 기록을 검토했는데 전에 앓으셨던 자궁암이 말기였습니다. 말기라는 건... 완치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현재 의료 기술로는 재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넉 달 전 난산을 겪으셨잖아요. 비록 치료가 제때 이루어졌지만 몸에 무리가 갔던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상태는 재발 초기 징후가 보이고 있으니 항암제를 다시 복용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재발 초기 징후라니... 언제든 병이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인가?나는 이미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었는데 이번에도 과연 또 기회가 있을까?죽음이 이번에도 나를 비켜가 줄까?나는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항암제 효과는 얼마나 있나요?”“가주님께서 이전에 드셨던 항암제는 석씨 집안에서 만든 약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치료 효과가 뛰어나 병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