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정은은 수험표, 펜, 그리고 필수적인 계산 도구를 전부 검사해 보았다.수민은 아침 일찍 그녀를 데려다 주겠다고 했는데, 정은은 수민이 요즘 두 개의 큰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은은 시험장 밖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수민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도 실망하지 않았다.어떤 친구들은 굳이 문자를 보내거나 시시각각 연락하지 않아도 우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정은과 수민은 여전히 수시로 상대방을 걱정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는 이것을 ‘응답이 없어도 단단한 우정’이라고 한다.시험은 두 시간 걸렸는데, 답안지를 제출할 때, 다른 사람들은 흥분 또는 실망을 느꼈지만, 정은은 오히려 매우 평온했다.시험장을 나서자, 밖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근처에서 택시를 잡기도 어려워, 정은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할 때,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정은 언니?”고개를 들자, 강서정이 복도 처마 밑에 서 있었다.“정말 언니였네요.”지난번에 정은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우며 그녀를 설득하지 못한 이후로, 서정은 더 이상 정은을 본 적이 없었다.6개월이 지난 지금, 서정은 정은과 강도겸이 줄곧 화해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이번 일로, 처음에 두 사람이 정말 헤어질 수 없다고 장담했던 서영숙조차도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다.서정은 가끔 서영숙이 집에서 중얼거리며 하는 말을 들었다.“도겸이는 요즘 왜 자꾸 위병이 도진 거지? 전에 소정은과 함께 할 때는 이렇게 자주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잖아.”“서정아, 이번에 두 사람 정말 헤어진 거야?”“소정은 정말 미친 거 아니니?! 성질도 적당히 부려야지. 우리 가문에 아예 들어오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그동안 서영숙은 줄곧 정은이 자신의 아들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 빨리 헤어지라는 말도 수백 번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정말 헤어지니. 그녀는 좀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서영숙은 말
정은은 서정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지 않았다.“언니 전에 서비대학교에서 나왔다고 했죠? 이번에 어느 학교에 들어갈 계획이에요?”“여전히 서비대학교야.”“일반대학원 석사과정이에요, 전문대학원 석사과정이에요?”“일반대학원 석사과정.”“전공은요?”“생물.”서정은 놀라움을 느꼈다. 뜻밖에도 그녀가 선택한 전공과 같았던 것이다.“이미 교수님을 정한 거예요?”정은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응, 오 교수님.”“네? 오미선 교수님을 말하는 거예요?”“응.”서정은 지난번 오미선의 집에서 시간제 도우미로 일한 정은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더니, 표정이 이상해졌다. “설, 설마 교수님 댁에 가서 청소를 도와주면, 교수님이 승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그건 오해였어.”“오해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오 교수님은 생물학 분야에서 최고의 학자이시고, 또 엄격하시기로 유명하거든요. 게다가 그동안 박사를 많이 책임지셨기에, 석사의 정원이 아주 적어요. 그래서...”서정은 잠깐 멈추었다.“그래서 오 교수님의 학생이 되려면 엄청 어려워요. 솔직히 나도 올해 오 교수님의 학생으로 되려고 이번 입학 시험에 참가한 거예요. 물론 언니는 내가 사심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여전히 충고를 하고 싶어요. 지금 아직 늦지 않은 틈을 타서 다른 교수님으로 바꿔요. 성적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충분히 다른 교수님에게 연락할 수 있어요.”서정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정은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고마워.” 정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먼저 가볼게.”말을 마치자, 그녀는 바로 떠났다.서정은 멍하니 서 있었다‘뭐야? 이게 다야?’...5시에 지하철을 탄 정은은, 난방을 느끼며 거의 얼어붙을 것 같은 손가락이 마침내 조금 따뜻해졌다.가방 속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녀는 장갑을 벗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다음, 정은은 웃으며 목소리까지 경쾌해졌다.“네, 교수님.”[
겨울의 밤은 일찍 찾아왔기에, 7시도 안 되자, 도로 양쪽의 가로등이 줄지어 켜지더니 쓸쓸한 밤에 따뜻함을 더했다.지하철역에서 서비대학교까지 가는 길에 상업거리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각종 노점이 있어 별의별 물건을 다 팔았다.정은은 다리를 건널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노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바람 때문에 약간 아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려 재석에게 말했다.“여기서 나 좀 기다려요.”재석은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고, 2분 후에 정은은 따끈따끈한 군고구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자요.”따끈따끈한 군고구마를 쪼개자, 김이 모락모락 났다. 한 입 먹으니 무척 달콤했지만, 너무 뜨거워서 혀를 델 뻔했다. 정은은 군고구마를 손에 넣고 호호 불었고, 또 조금씩 먹으며 단맛을 본 후, 미소를 활짝 지었다.정은은 고개를 돌려 재석에게 물었다.“선배님의 군고구마는 달아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렇게 단 군고구마는 처음이었다.정은은 득의양양해하며 말했다.“흠, 나도 운이 꽤 괜찮은 것 같아요, 매번 고른 고구마가 엄청 달거든요.”재석은 정은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구부리더니, 눈빛에도 웃음이 넘쳤다.두 사람이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7시였다.문을 열자, 방안의 따뜻한 온도에 정은은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녀는 책과 펜을 서재로 가져갔다.탁자 위에는 여러 권의 엇갈린 책이 널려 있었는데, 정은은 하나하나 책꽂이에 꽂은 다음, 그중 한 권이 지난주 재석이 빌려준 전문서적인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책을 들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재석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때 그는 마침 욕실에서 나왔는데,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었지만, 노크 소리에 재석은 얼른 가서 문을 열었다.“이건 선배님이 지난주에 빌려준 독일어 원판이에요. 돌려준다는 것을 깜박했네요.”은은한 박하 향기가 코끝을 맴돌자, 정은은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재석은 책을 받았는데, 위에 메모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한눈
토요일 날씨는 아주 좋았다.따뜻한 햇빛이 두꺼운 구름을 뚫었고, 정은은 조깅을 할 때 땀을 약간 흘렸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그녀는 미리 산 약을 들고 택시를 타고 오미선의 집에 갔다.“교수님, 이 약들은 모두 하루에 세 번 마셔야 해요. 지금은 날씨가 추워서 냉장고에 넣을 필요가 없으니까, 마실 때 살짝 데우시면 돼요.”오미선은 두려운 게 없었지만,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한약의 냄새였다. 맛은 더럽게 없을 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매우 고약했다. 그녀는 시커먼 약즙을 보며 묵묵히 거리를 두었고,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꼭 마셔야 해?”“그럼요.”정은이 말했다.“전 이미 이모님에게 하루에 세 번 꼭 교수님을 잘 감시하라고 했어요. 절대로 잊으면 안 돼요.”오미선은 시무룩해졌다.“그래, 알았어.”그녀는 학생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오미선을 보며, 정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약은 엄청 쓰지만, 제가 특별히 빈대떡을 사왔어요. 매번 약을 드신 때, 빈대떡 한 조각을 드시면 그렇게 쓰지 않을 거예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거지상을 하던 오미선은 바로 웃음을 지었다.“그럼 그렇지.”잡담을 나누다, 오미선은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내년에 서비대학교 생물학원은 실험팀을 설립할 의향이 있어. 이미 세 사람을 정했지만, 아직 나머지 두 명이 남은 상태야.”“거기에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성적 및 각 과목의 종합 평균점이 모두 우수여야 하고, 둘째는 실험 점수가 반드시 두 번 또는 두 번 그 이상의 A를 받아야 해.”실험팀의 조건이 이렇게 엄격한 것을 보자, 정은은 좀 놀랐다.오미선은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설명했다.“이 실험팀에 들어가면 기말에 가산점이 있어. 우수 팀원은 졸업한 후, 직접 박사 과정을 시작할 수 있고. 아니면 썬바이오 테크놀로지 연구개발회사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실험실에 가입할 수 있어.”썬바이오 테크놀로지는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존재였다. 그
정은도 오미선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잘 알고 있었다.“안심하세요. 저는 꼭 교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집에 돌아오자, 정은은 가져온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석사 과정에 비해, 이 과제는 구체적인 실험 및 연구성과와 관련된 동시에 또 실험경험에 대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그렇게 정신없이 읽어보다가, 이미 새벽이 다 되었다.정은은 피곤한 두 눈을 비비며 자려고 누웠는데, 침대에 눕자마자 누군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소정은- 문 열어! 네가 안에 있다는 거 다 알아!”거실과 침실을 사이에 두고도 강도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정은의 귀로 전해졌다.“쾅쾅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지난번 별장에서 하마터면 성추행을 당할 뻔했던 것을 생각하니, 정은은 입술이 창백해졌고, 이불을 잡고 있는 손에도 힘을 주었다.“소정은-”“문 열어--”“정은아-”정은은 귀를 막으며, 남자가 이대로 단념하고 떠나기를 바랐다.그러나 5분이 지나도 도겸은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정은이 열지 않으면 평생 부수려는 기세였다.오래된 아파트는 방음이 잘 안됐고, 또 한밤중에 소란을 피웠으니 이웃들의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누구야, 한밤중에 시끄러워죽겠네. 잠 좀 자자!”“어느 미친개가 밤에 짖어대는 거야?”“더 이상 꺼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정은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문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강도겸,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정은은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네가 집에 있을 줄 알았어.”“그래서?!”“문 열어, 빨리.”“왜? 당신이 누군데?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냐고 당신이!”도겸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계속 문을 두드릴게.”“당신--”“두드린다.”결국 정은은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도겸은 이 기회를 틈타 문을
도겸은 멍해졌다.“너...”정은은 그날 별장에서 발생한 일을 떠올리며, 도겸을 바라보는 눈빛은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가까이 오지 마! 나한테서 떨어져!”“정은아...”도겸은 가슴이 아팠다.“그날, 난...”“그만해! 이제 가봐, 우리 사이에 할 말이 더 이상 없으니까.”“정은아...”도겸은 눈시울을 붉힌 채 뻣뻣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우리 그만 화해하자, 응? 내가 잘못했어... 난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고, 그런 일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어...”“나, 난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서 저도 모르게...”“이번에 이렇게 찾아온 것도, 널 데리고 돌아가고 싶어서 그런 거야...”“돌아간다고?” 정은은 차갑게 눈을 들었다.“돌아가서 뭐 하려고? 내가 당신들 사이에 끼어들라는 거야?”“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난 즉시 서연희와 헤어질 거야.”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난 싫어.”“정은아...”도겸은 다시 앞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정은은 재빨리 침실로 달려가 문을 쾅 닫았다.얼마나 지났는지, 밖에 점차 인기척이 없어졌고, 그녀는 그제야 나와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도겸이 벽에 기댄 채 잠들었을 줄이야...해가 금방 떠오르자, 햇빛은 유리창을 뚫고 부드럽게 실내로 쏟아졌다.소파에서 웅크리고 있던 도겸은 살짝 움직이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현기증이 밀려왔고,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현기증이 좀 사라진 후에야 도겸은 일어나서 앉았고, 미간을 비비며 사방을 둘러보았다.낯선 환경에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깨끗하고 깔끔했다. 그러나 도겸에게 있어, 이곳은 여전히 초라하고 비좁았다.정은이 침실에서 나왔다.도겸은 눈을 들자, 맑고 차가운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정은아?”정은은 의자에 앉아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어젯밤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해?”도겸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역시... 술에 취하지 않으면, 강도겸은 결코 나
‘마음속에 아직 정은 누나가 있으면서, 왜 굳이 딴 여자를 찾은 거냐고? 이것 봐, 쯧쯧!’...어제 도겸이 다녀간 후, 정은의 집은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그녀는 대청소를 했다. 시간도 늦은 것 같아, 정은은 도서관에 가지 않고 집에서 문제를 풀며 오늘의 복습을 했다.저녁에 그녀는 김밥 두 개를 말았는데, 다 먹지 못했고 많이 남았다. 주방을 정리하고 나니, 시간은 이미 저녁 8시가 다 되었다.정은은 문제를 좀 더 푼 다음, 자려고 했다. 알람을 맞추자마자 갑자기 핸드폰에 알람이 들어왔다. 누군가 그녀의 톡 친구를 추가했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심현빈이었다.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이 사람은 왜 날 추가하려는 거지?’‘비록 강도겸의 절친이지만, 우린 딱히 친한 사이가 아닌데...’두 사람은 여러 번 같은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지만, 거의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생각에 잠긴 정은은 현빈에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추가했다.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상대방에게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마치 실수로 친구 신청을 잘못 누른 것 같았다.정은은 영문을 몰랐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핸드폰을 한쪽에 놓은 다음, 그녀는 계속 문제를 풀었다....술집에서, 현빈은 핸드폰을 거두며 방금 도겸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선우를 바라보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집까지 데려다줬어?”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빨리 도망가서 다행이에요. 도겸 형 어머니랑 부딪치면 정말 큰 일인데.”요 며칠 서영숙은 별장에 자주 찾아갔기에, 운이 좋지 않아 그녀에게 붙잡힌다면, 이것저것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참, 전에 몇 번이나 불렀는데 줄곧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 어떻게 시간이 난 거예요?”현빈은 술잔에 든 브랜디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일 다 끝냈거든.”“참!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어요!” 선우는 얼른 술잔을 내려놓았다.“뭔데?”“정은 누나 말이에요, 석사 입학시험 다 마쳤겠죠?”“그저께.”
말을 마치자, 선우는 즉시 핸드폰을 꺼내 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정은 누나, 요즘 잘 지내고 있었어요? 내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그의 설명을 들은 후, 정은은 침묵에 빠졌다.선우는 그녀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즉시 자신만만하게 맹세했다.“정은 누나, 안심해요. 이번에는 내가 밥 사는 거니까, 우리끼리 만나는 것뿐이에요. 난 절대로 도겸 형 부르지 않을 거예요.”[그래.]정은은 그제야 동의했다.전화를 끊자, 선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때 가서 두 사람이 ‘공교롭게’ 만났다면, 이건 그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이때 현빈이 입을 열었다.“그럼 내가 도겸에게 말할게.”“그래요, 그럼 이렇게 정한 걸로 해요!”선우는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만약 성공적으로 화해를 한다면, 내가 바로 큰 공을 세운 공신이지.’...햇빛이 맑고 화창한 날씨에, 선우는 미리 스프리암의 자리를 예약했다.전에 그들은 늘 이곳에 와서 밥을 먹었기에, 이름만 말하면 정은은 바로 찾아올 수 있었다.문에 들어서자마자, 정은은 선우가 웃으며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웨이터가 그녀를 안내했고, 정은은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정은 누나, 석사 입학시험이 끝났다고 해서요. 축하해요.”“나 방금 누나가 좋아하는 음식을 골라서 주문했는데, 이따가 우리 같이 한잔 마셔요!”선우는 도겸처럼 가문이 그렇게 잘나가는 편이 아니었지만, 사람은 없지만, 성격은 명문가 도련님 중 가장 좋았다. 그는 전에도 정은을 몇 차례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두 사람도 이렇게 조금씩 친해진 것이었다.“고마워. 나도 줄곧 네가 날 도와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어.”선우는 웃으며 대답했다.“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나 정말 서운해요! 우리 사이에 감사하는 무슨.”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를 내자, 음식이 차례대로 올라왔다.“선우야? 너도 여기에 있었어?” 나지막한 목소
웨이터에게 물어본 후에야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그러나 다가오자마자 송정후가 쫓아오더니, 더러운 손으로 정은을 잡으려 하는 것을 볼 줄이야. 재석은 다급해지는 바람에 바로 입을 뗐다.송정후는 몸이 굳어졌다.정은은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재석을 향해 걸어갔다.“교수님.”재석은 정은이 다치지 않았단 것을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왜 나왔어? 밖은 춥지도 않니?”지금 재석의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방금 송정후를 호통친 모습과 그야말로 극과극이었다.“안이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나왔는데, 뜻밖에도 미친 개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걸 그랬어요.”정은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그녀는 송정후의 코를 가리키며 ‘네가 바로 그 개’라고 말할 뻔했다.송정후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이때 갑자기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또 누구의 학생이 이렇게 날뛰는지 했는데, 알고 보니 조 교수의 학생이었구나? 어쩐지.”“한동안 못 봤는데, 조 교수는 언제 이렇게 예쁜 여학생을 제자로 삼은 거지? 가르칠 때 몸이, 아니지, 마음이 엄청 편하겠지? 말하자면, 네 곁에는 항상 예쁜 여자가 많았지. 정말 부럽네 부러워.”송정후는 갑자기 비아냥거리더니 재석을 모함했다.올해 초, 두 사람은 같은 국가급 프로젝트를 경쟁했는데, 송정후는 재석에게 졌기에 두 사람 사이가 이미 틀어졌다.그후 또 ‘가장 뛰어난 청년 연구원’ 선정에서 재석과 다투었는데, 송정후는 재차 실패를 거두었다.두 사람은 지금 라이벌과 다름이 없었다.송정후는 H시에 있고, 재석은 J시에 있는데, 두 사람은 일년 내내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송정후가 수를 써서 체면을 되찾으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지금 기회가 이렇게 찾아왔으니 당연히 잘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송정후는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나는 또 조 교수가 정말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지. 그런데 그저 눈이 좀 높았던 것뿐이었네?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만 손을 대다니,
“얘기 좀 해도 되지?”정은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되지만, 전 교수님과 같은 분야를 전공하지 않아서요.”“어제 포럼에서 발언할 때, 과학 연구의 매력의 절반은 교차 학문 연구 간의 협력에서 온다고 했잖아? 내가 잘못 기억한 건 아니겠지?”“네.”“하하...”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말 잘하네, 그래서 인상이 정말 깊었어.”정은은 남자의 일부러 웃는 소리에 좀 불편했다.‘선배님이 이런 웃음을 지을 때는 그렇게 듣기 좋았는데...’“에헴! 죄송하지만, 송 교수님. 전 잠깐 나온 것일 뿐이라, 교수님께서 저를 찾으실 거예요.”말을 마치자마자 정은은 떠날 준비를 했다.그러나 송정후는 그녀를 불렀다.“정은아.” 그리고 다시 물었다.“네 교수님은 누구시지? 고경학? 유개훈? 아니면... 조재석?”송정후가 언급한 ‘고경학’과 ‘유개훈’은 모두 오미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정은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송정후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나 다 봤어. 어젯밤 그 섬에서 아주 재밌게 잘 놀던데?”그의 말투는 일부러 무언가를 암시한 것 같았고, 징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아주 재밌게 잘 놀았다’는 말에 고의로 힘을 주었기에, 아무리 봐도 정은은 불쾌함을 느꼈다.정은은 냉정하게 말했다.“송 교수님, 말씀 조심하세요.”송정후는 웃음을 멈추더니 비아냥거리는 듯 말을 이었다.“하하, 시치미를 떼는군. 오늘 여기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들 덕분이잖아? 예상도 하지 못했어, 그분들이 널 공유할 줄은.”송정후는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래, 넌 젊고 예뻐서, 학계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라 할 수 있지. 독차지할 수 없는 이상, 차라리 대범하게 나서는 게 좋지 않겠어? 너한테도 이득일 텐데.”송정후의 비웃음이 짙어졌다.“그래, 이 방법이 얼마나 좋아!”정은은 송정후의 웃음을 다시 듣고서야 그 소리가 왜 불편했는지를 알아차렸다. 그 이유는
이 어르신들은 재석이라는 이 인기 있는 인물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척에게 소개하고 싶었고, 또 어떤 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인연을 맺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며, 수많은 시도 속에서 재석의 답변은 언제나 그 한마디뿐이었다.“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원래 임 교수도 이번에는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고, 어차피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오혜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국제 물리 교류회가 벌써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혜정은 여전히 재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모든 교수들에게 각자의 ‘정은’이 있었다. 임 교수도 자기 학생들을 위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고 싶었다."거절하면 거절했지 뭐, 허허. 거절 안 당한 것도 아니지만, 만약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잖아?"임 교수는 ‘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라는 말을 들을 준비를 했지만, 뜻밖에도...“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너무 놀란 임 교수는 재석이 떠났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누구를 좋아하는 거지?’...한편, 정은은 오미선을 따라 몇몇 교수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서 있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지루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배고프지? 가서 뭐 좀 먹어.”“네.”교수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었지만, 전공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야기하다가 결국 화제는 집안 이야기로 흘러갔다.‘역시, 노부인들이 모이면 이런 얘기는 피할 수 없지.’정은은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이런 얘기는 내가 듣기엔 좀 너무 과하잖아.’술장과 디저트 코너를 한 바퀴 돌면서, 정은은 따뜻한 음료를 한 잔 마시며 과자도 몇 개 먹었다.‘음, 이제야 배부르네.’오미선이 옛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은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연회장 뒷문으로 향했다.밖에는 작은 화원이 있었는데, 밤바람이 서서히
밤은 깊어졌고,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만찬은 호텔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리며, 참석자들은 잠시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올 수 있게 했다. 레드카펫도, 꽃도, 고급 차도 없고, 열어놓은 술장과 음식 코너만으로 만찬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진다. 대부분 남성들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간단한 셔츠를 입고 이번 만찬에 참석했다. 상대적으로,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은 좀 더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머리는 깨끗이 감은 데다가 옷차림도 단정했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한복을 입은 사람도 있으며, 일부 교수들은 새로운 한복을 곁들은 패션을 선호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자 교수는 여자 교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따르는 교수나 연구원을 따라 참석한 이들로, 이번 만찬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히고 싶어했다. 정은은 초대장을 들고 재석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오미선은 먼저 도착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재석은 여전히 양복을 입었고, 너무 격식을 차린 느낌보다는 약간 캐주얼한 디자인이 가미되어 있어 좀 더 자유롭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정은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을 위해 립스틱을 발랐고, 카멜색 외투에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단순했지만, 엄청나게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오히려 돋보였다. 너무 젊어서 이런 만찬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믿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또한 정은이 학문과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도 드물었다. 재석은 살짝 기침을 하며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정은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오미선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긴장돼?” “조금이요.” “걱정 마, 이따가 내가 사람 소개해줄게.” “좋
“이건 뭐죠?”정은은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스태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정은 씨, 오늘 저녁 학술 만찬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뛰어난 연구자시네요.”그 말을 끝으로 스태프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정은은 손에 든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더니, 놀람과 당황이 스치고 지나간 끝에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매년 열리는 정상희의가 끝나면 ‘학술 만찬’가 열리는데, 포럼 기간 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인 연구자들이 초청된다.그 만찬의 입장권이 바로 이 붉은 초대장이었다.오미선과 재석처럼 뛰어난 학자들은 포럼 첫날에 이미 초대장을 받았다.예년처럼 초대장 한 장으로 본인 외의 다른 한 사람만 초대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오미선은 정은과 미리 약속해두었다.“포럼 마지막 날 밤, 너 나랑 같이 가자.”정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그런데 다음 날, 재석이 또 찾아와 물었다.“나랑 같이 갈래?”‘앗!’정은은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교수님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그렇겠지.”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오 교수님이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널 안 데려가실 리 없지.”사실 정은도 의아했다.애초에 재석은 수지를 데리고 포럼에 참석했으니, 당연히 그녀와 함께 만찬에 갈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물어보다니.‘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이수지 선배는...’‘어휴, 생각만 해도 괜히 민망해지네.’그런데 이번엔 정은이 자신의 성과로 초대장을 받았다.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들뜨지 않을 수도 없었다.비록 초대장은 별거 아니지만, 정은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이건 ‘소정은’이라는 이름 자체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뜻이고, 단순히 ‘오미선의 제자’라는 이유로 인정받은 게 아니란 것이다....하지만 수지는 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포럼 내내 존재감 없이 지냈으니 당연히 단독 초대장을 받을 리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재석이 초대장을 가지
정은은 정말 조개를 주웠다.무슨 조개인지 모르지만, 보랏빛에 주황색이 섞여 있어서 정말 예뻤다.그녀는 기뻐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리 와서 봐요!”마치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재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정은의 곁으로 다가갔다.정은이 손바닥을 펼치자, 조개 하나가 드러났다.“예쁘죠?”재석은 정은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그럼... 신발 벗고 같이 놀아볼래요?”남자는 순간 놀란 듯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다음에.”정은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봐, 정은이도 다음에 나와 같이 바다에 올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두 사람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이 때때로 정은의 종아리까지 차올랐다.재석은 해변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선배님, 계속 걸어가면... 끝은 어디일까요?”정은은 뒤로 걸으며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돌려 물었다.여유롭고 편안한 자세였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해변의 끝은 모래사장이고, 모래사장의 끝은 바다겠지.”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난 또 선배님이 정색하면서, ‘해안선은 해양과 육지의 경계선이고, 대조평균고조면을 기준으로 정의돼. 조석이나 풍랑에 따라 달라지는 고정되지 않은 선이 아니라, 띠처럼 형성되는 공간적 개념이지. 물리적으로 접근하면 말이지...’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요.”그녀는 재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진짜 베테랑 학자처럼 그럴듯한 모습을 보였다.재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미 답을 다 생각해놓고, 나한테 왜 묻는 거야? 그래도 듣고 싶다면 물리학적으로도 설명해줄 수 있어.”정은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몇 가닥이 뺨을 스쳤다.“아니에요. 난 선
무엇보다 생명과학 분야는 오미선의 대표적인 인맥 기반이었다.누구나 정은이라는 젊은 후배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그것도 다 같은 전공에서 이어져온 인연 덕분이었다.우수한 학생을 싫어할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비록 정은이 직속 제자는 아니더라도, 생명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유망주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그다음은 물리학 분야였다.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재석의 신뢰와 명성만으로도 정은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이 친구는 소정은이라고,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예요...”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소개했다.말하는 도중, 자연스레 두 사람의 관계가 언급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난 재석이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거 처음 보네. 오늘 제대로 구경을 좀 하는구나, 하하하!”재석은 차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전에 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거든요. 정은이랑은 사실 선후배 사이고요. 그게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나요?”“아니! 전혀. 네가 좋다면야 뭐든 좋은 거지.”재석은 어이가 없었다.수지는 기회를 엿보며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재석의 소개도, 옹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조롱거리 같았다.국제 영화제에 자비로 입장해 레드카펫에 슬쩍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플래시가 아무리 번쩍여도, 그것은 수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오전의 네트워킹 세션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다.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버스를 타고 한 어촌 마을로 이동했다.이곳은 M시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어촌’으로 불린다.10여 년간의 보호 및 개발 정책을 통해 전통 어업 기반에서 관광 및 체험형 마을로 점진적인 전환에 성공했지만, 가능한 한 어촌 고유의 생활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이처럼 수준 높은 포럼이 열릴 때면, 지역 지자체에서는 인문학적 탐방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곤 한다.일종의 힐링이자, 참가자들에게 새로
복도에서, 오미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재석은 팔에 걸쳐 있던 정은의 숄을 건네주며 말했다.“괜찮아?”정은은 재석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숄을 받으며 웃었다.“걱정 마요. 나 안 취했어요.”“그럼 다행이네.”“선배님, 오늘 오전에 고마웠어요.”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고맙다고? 내가 너에게 질문을 부탁한 거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지.”“질문은 어렵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도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날 불러줘서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거예요.”“내가 기회를 준 건 맞지만, 그걸 잡은 건 너야. 그러니까 나보다 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지.”정은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나 자신에게요?”“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면 돼. 정은아,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거야.”“네, 맞아요.”“이제 들어가. 오늘 일찍 쉬고, 내일 하루 더 남았으니까.”“네.”재석은 정은이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그녀가 문을 꼭 닫은 걸 확인하고서야 룸카드를 꺼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수지는 문구멍을 통해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재석이 정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준 차가운 태도가 겹쳐지자, 수지는 입술을 거의 깨물 뻔할 정도로 질투를 느꼈다.그때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수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잽싸게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손태민’이었다.그녀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침대에 내던졌다.“왜 또 쟤야? 정말 짜증나 죽겠네!”“하루 종일 연락을 하다니, 지치지도 않나 봐!”수지는 차갑게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계속 울리는 진동음을 그대로 두었다. 결국 화면은 꺼졌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는 눈을 감았다.그 전에,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래, 이제 실컷 울려봐라.”...
“하하... 그래! 당연하겠지!”“어머, 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군. 미선아,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정은이도 함께 앉아야지...”정은은 이런 학계의 비공식적인 자리엔 처음이었고,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유쾌한 농담, 어쩌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오가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연회가 이어지는 중, 오미선은 보기 드물게 먼저 잔을 들었다.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정은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정은도 그걸 알았기에, 몇 잔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술잔이 세 바퀴쯤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한 베테랑 교수가 정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둘은 전공 이야기에서 시작해, 꿈에 대한 이야기, 논문, 실험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대화를 깊이 이어갔다.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교수의 눈빛에는 감탄과 호의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하하하...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머리가 참 잘 돌아가네! 내 제자 중엔 왜 이런 애가 하나도 없는 거야? 아이고, 사람은 비교하면 안 된다더니, 진짜 열받네!”그러더니 오미선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오 교수, 이런 학생을 어디서 발굴한 거야? 왜 좋은 인재는 전부 너한테만 가는 거지?”“정말 우리에겐 숨통도 안 틔워주는구나.”오미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글쎄... 아마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는 모양이겠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이렇게 귀한 인재는 딱 보면 알겠더라고.”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교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내가 네 제자 데려갈 것도 아닌데, 누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옆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고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지난번엔 누가 자긴 눈도 안 좋고 나이도 많다고, 제가 2년간 아껴둔 와인을 억지로 가져가신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