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서정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지 않았다.“언니 전에 서비대학교에서 나왔다고 했죠? 이번에 어느 학교에 들어갈 계획이에요?”“여전히 서비대학교야.”“일반대학원 석사과정이에요, 전문대학원 석사과정이에요?”“일반대학원 석사과정.”“전공은요?”“생물.”서정은 놀라움을 느꼈다. 뜻밖에도 그녀가 선택한 전공과 같았던 것이다.“이미 교수님을 정한 거예요?”정은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응, 오 교수님.”“네? 오미선 교수님을 말하는 거예요?”“응.”서정은 지난번 오미선의 집에서 시간제 도우미로 일한 정은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더니, 표정이 이상해졌다. “설, 설마 교수님 댁에 가서 청소를 도와주면, 교수님이 승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그건 오해였어.”“오해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오 교수님은 생물학 분야에서 최고의 학자이시고, 또 엄격하시기로 유명하거든요. 게다가 그동안 박사를 많이 책임지셨기에, 석사의 정원이 아주 적어요. 그래서...”서정은 잠깐 멈추었다.“그래서 오 교수님의 학생이 되려면 엄청 어려워요. 솔직히 나도 올해 오 교수님의 학생으로 되려고 이번 입학 시험에 참가한 거예요. 물론 언니는 내가 사심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여전히 충고를 하고 싶어요. 지금 아직 늦지 않은 틈을 타서 다른 교수님으로 바꿔요. 성적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충분히 다른 교수님에게 연락할 수 있어요.”서정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정은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고마워.” 정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먼저 가볼게.”말을 마치자, 그녀는 바로 떠났다.서정은 멍하니 서 있었다‘뭐야? 이게 다야?’...5시에 지하철을 탄 정은은, 난방을 느끼며 거의 얼어붙을 것 같은 손가락이 마침내 조금 따뜻해졌다.가방 속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녀는 장갑을 벗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다음, 정은은 웃으며 목소리까지 경쾌해졌다.“네, 교수님.”[
겨울의 밤은 일찍 찾아왔기에, 7시도 안 되자, 도로 양쪽의 가로등이 줄지어 켜지더니 쓸쓸한 밤에 따뜻함을 더했다.지하철역에서 서비대학교까지 가는 길에 상업거리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각종 노점이 있어 별의별 물건을 다 팔았다.정은은 다리를 건널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노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바람 때문에 약간 아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려 재석에게 말했다.“여기서 나 좀 기다려요.”재석은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고, 2분 후에 정은은 따끈따끈한 군고구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자요.”따끈따끈한 군고구마를 쪼개자, 김이 모락모락 났다. 한 입 먹으니 무척 달콤했지만, 너무 뜨거워서 혀를 델 뻔했다. 정은은 군고구마를 손에 넣고 호호 불었고, 또 조금씩 먹으며 단맛을 본 후, 미소를 활짝 지었다.정은은 고개를 돌려 재석에게 물었다.“선배님의 군고구마는 달아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렇게 단 군고구마는 처음이었다.정은은 득의양양해하며 말했다.“흠, 나도 운이 꽤 괜찮은 것 같아요, 매번 고른 고구마가 엄청 달거든요.”재석은 정은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구부리더니, 눈빛에도 웃음이 넘쳤다.두 사람이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7시였다.문을 열자, 방안의 따뜻한 온도에 정은은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녀는 책과 펜을 서재로 가져갔다.탁자 위에는 여러 권의 엇갈린 책이 널려 있었는데, 정은은 하나하나 책꽂이에 꽂은 다음, 그중 한 권이 지난주 재석이 빌려준 전문서적인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책을 들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재석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때 그는 마침 욕실에서 나왔는데,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었지만, 노크 소리에 재석은 얼른 가서 문을 열었다.“이건 선배님이 지난주에 빌려준 독일어 원판이에요. 돌려준다는 것을 깜박했네요.”은은한 박하 향기가 코끝을 맴돌자, 정은은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재석은 책을 받았는데, 위에 메모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한눈
토요일 날씨는 아주 좋았다.따뜻한 햇빛이 두꺼운 구름을 뚫었고, 정은은 조깅을 할 때 땀을 약간 흘렸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그녀는 미리 산 약을 들고 택시를 타고 오미선의 집에 갔다.“교수님, 이 약들은 모두 하루에 세 번 마셔야 해요. 지금은 날씨가 추워서 냉장고에 넣을 필요가 없으니까, 마실 때 살짝 데우시면 돼요.”오미선은 두려운 게 없었지만,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한약의 냄새였다. 맛은 더럽게 없을 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매우 고약했다. 그녀는 시커먼 약즙을 보며 묵묵히 거리를 두었고,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꼭 마셔야 해?”“그럼요.”정은이 말했다.“전 이미 이모님에게 하루에 세 번 꼭 교수님을 잘 감시하라고 했어요. 절대로 잊으면 안 돼요.”오미선은 시무룩해졌다.“그래, 알았어.”그녀는 학생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오미선을 보며, 정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약은 엄청 쓰지만, 제가 특별히 빈대떡을 사왔어요. 매번 약을 드신 때, 빈대떡 한 조각을 드시면 그렇게 쓰지 않을 거예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거지상을 하던 오미선은 바로 웃음을 지었다.“그럼 그렇지.”잡담을 나누다, 오미선은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내년에 서비대학교 생물학원은 실험팀을 설립할 의향이 있어. 이미 세 사람을 정했지만, 아직 나머지 두 명이 남은 상태야.”“거기에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성적 및 각 과목의 종합 평균점이 모두 우수여야 하고, 둘째는 실험 점수가 반드시 두 번 또는 두 번 그 이상의 A를 받아야 해.”실험팀의 조건이 이렇게 엄격한 것을 보자, 정은은 좀 놀랐다.오미선은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설명했다.“이 실험팀에 들어가면 기말에 가산점이 있어. 우수 팀원은 졸업한 후, 직접 박사 과정을 시작할 수 있고. 아니면 썬바이오 테크놀로지 연구개발회사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실험실에 가입할 수 있어.”썬바이오 테크놀로지는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존재였다. 그
정은도 오미선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잘 알고 있었다.“안심하세요. 저는 꼭 교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집에 돌아오자, 정은은 가져온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석사 과정에 비해, 이 과제는 구체적인 실험 및 연구성과와 관련된 동시에 또 실험경험에 대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그렇게 정신없이 읽어보다가, 이미 새벽이 다 되었다.정은은 피곤한 두 눈을 비비며 자려고 누웠는데, 침대에 눕자마자 누군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소정은- 문 열어! 네가 안에 있다는 거 다 알아!”거실과 침실을 사이에 두고도 강도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정은의 귀로 전해졌다.“쾅쾅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지난번 별장에서 하마터면 성추행을 당할 뻔했던 것을 생각하니, 정은은 입술이 창백해졌고, 이불을 잡고 있는 손에도 힘을 주었다.“소정은-”“문 열어--”“정은아-”정은은 귀를 막으며, 남자가 이대로 단념하고 떠나기를 바랐다.그러나 5분이 지나도 도겸은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정은이 열지 않으면 평생 부수려는 기세였다.오래된 아파트는 방음이 잘 안됐고, 또 한밤중에 소란을 피웠으니 이웃들의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누구야, 한밤중에 시끄러워죽겠네. 잠 좀 자자!”“어느 미친개가 밤에 짖어대는 거야?”“더 이상 꺼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정은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문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강도겸,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정은은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네가 집에 있을 줄 알았어.”“그래서?!”“문 열어, 빨리.”“왜? 당신이 누군데?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냐고 당신이!”도겸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계속 문을 두드릴게.”“당신--”“두드린다.”결국 정은은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도겸은 이 기회를 틈타 문을
도겸은 멍해졌다.“너...”정은은 그날 별장에서 발생한 일을 떠올리며, 도겸을 바라보는 눈빛은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가까이 오지 마! 나한테서 떨어져!”“정은아...”도겸은 가슴이 아팠다.“그날, 난...”“그만해! 이제 가봐, 우리 사이에 할 말이 더 이상 없으니까.”“정은아...”도겸은 눈시울을 붉힌 채 뻣뻣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우리 그만 화해하자, 응? 내가 잘못했어... 난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고, 그런 일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어...”“나, 난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서 저도 모르게...”“이번에 이렇게 찾아온 것도, 널 데리고 돌아가고 싶어서 그런 거야...”“돌아간다고?” 정은은 차갑게 눈을 들었다.“돌아가서 뭐 하려고? 내가 당신들 사이에 끼어들라는 거야?”“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난 즉시 서연희와 헤어질 거야.”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난 싫어.”“정은아...”도겸은 다시 앞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정은은 재빨리 침실로 달려가 문을 쾅 닫았다.얼마나 지났는지, 밖에 점차 인기척이 없어졌고, 그녀는 그제야 나와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도겸이 벽에 기댄 채 잠들었을 줄이야...해가 금방 떠오르자, 햇빛은 유리창을 뚫고 부드럽게 실내로 쏟아졌다.소파에서 웅크리고 있던 도겸은 살짝 움직이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현기증이 밀려왔고,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현기증이 좀 사라진 후에야 도겸은 일어나서 앉았고, 미간을 비비며 사방을 둘러보았다.낯선 환경에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깨끗하고 깔끔했다. 그러나 도겸에게 있어, 이곳은 여전히 초라하고 비좁았다.정은이 침실에서 나왔다.도겸은 눈을 들자, 맑고 차가운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정은아?”정은은 의자에 앉아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어젯밤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해?”도겸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역시... 술에 취하지 않으면, 강도겸은 결코 나
‘마음속에 아직 정은 누나가 있으면서, 왜 굳이 딴 여자를 찾은 거냐고? 이것 봐, 쯧쯧!’...어제 도겸이 다녀간 후, 정은의 집은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그녀는 대청소를 했다. 시간도 늦은 것 같아, 정은은 도서관에 가지 않고 집에서 문제를 풀며 오늘의 복습을 했다.저녁에 그녀는 김밥 두 개를 말았는데, 다 먹지 못했고 많이 남았다. 주방을 정리하고 나니, 시간은 이미 저녁 8시가 다 되었다.정은은 문제를 좀 더 푼 다음, 자려고 했다. 알람을 맞추자마자 갑자기 핸드폰에 알람이 들어왔다. 누군가 그녀의 톡 친구를 추가했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심현빈이었다.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이 사람은 왜 날 추가하려는 거지?’‘비록 강도겸의 절친이지만, 우린 딱히 친한 사이가 아닌데...’두 사람은 여러 번 같은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지만, 거의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생각에 잠긴 정은은 현빈에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추가했다.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상대방에게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마치 실수로 친구 신청을 잘못 누른 것 같았다.정은은 영문을 몰랐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핸드폰을 한쪽에 놓은 다음, 그녀는 계속 문제를 풀었다....술집에서, 현빈은 핸드폰을 거두며 방금 도겸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선우를 바라보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집까지 데려다줬어?”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빨리 도망가서 다행이에요. 도겸 형 어머니랑 부딪치면 정말 큰 일인데.”요 며칠 서영숙은 별장에 자주 찾아갔기에, 운이 좋지 않아 그녀에게 붙잡힌다면, 이것저것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참, 전에 몇 번이나 불렀는데 줄곧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 어떻게 시간이 난 거예요?”현빈은 술잔에 든 브랜디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일 다 끝냈거든.”“참!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어요!” 선우는 얼른 술잔을 내려놓았다.“뭔데?”“정은 누나 말이에요, 석사 입학시험 다 마쳤겠죠?”“그저께.”
말을 마치자, 선우는 즉시 핸드폰을 꺼내 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정은 누나, 요즘 잘 지내고 있었어요? 내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그의 설명을 들은 후, 정은은 침묵에 빠졌다.선우는 그녀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즉시 자신만만하게 맹세했다.“정은 누나, 안심해요. 이번에는 내가 밥 사는 거니까, 우리끼리 만나는 것뿐이에요. 난 절대로 도겸 형 부르지 않을 거예요.”[그래.]정은은 그제야 동의했다.전화를 끊자, 선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때 가서 두 사람이 ‘공교롭게’ 만났다면, 이건 그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이때 현빈이 입을 열었다.“그럼 내가 도겸에게 말할게.”“그래요, 그럼 이렇게 정한 걸로 해요!”선우는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만약 성공적으로 화해를 한다면, 내가 바로 큰 공을 세운 공신이지.’...햇빛이 맑고 화창한 날씨에, 선우는 미리 스프리암의 자리를 예약했다.전에 그들은 늘 이곳에 와서 밥을 먹었기에, 이름만 말하면 정은은 바로 찾아올 수 있었다.문에 들어서자마자, 정은은 선우가 웃으며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웨이터가 그녀를 안내했고, 정은은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정은 누나, 석사 입학시험이 끝났다고 해서요. 축하해요.”“나 방금 누나가 좋아하는 음식을 골라서 주문했는데, 이따가 우리 같이 한잔 마셔요!”선우는 도겸처럼 가문이 그렇게 잘나가는 편이 아니었지만, 사람은 없지만, 성격은 명문가 도련님 중 가장 좋았다. 그는 전에도 정은을 몇 차례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두 사람도 이렇게 조금씩 친해진 것이었다.“고마워. 나도 줄곧 네가 날 도와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어.”선우는 웃으며 대답했다.“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나 정말 서운해요! 우리 사이에 감사하는 무슨.”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를 내자, 음식이 차례대로 올라왔다.“선우야? 너도 여기에 있었어?” 나지막한 목소
현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러니까 생물학은 광범위한 개념이고 응용생명과학은 구체적인 실천인 거지. 생물정보학은 컴퓨터 방향에 치우쳐 응용수학, 정보학, 통계학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생물학 문제를 연구하는 건가?”정은은 현빈을 바라보는 눈빛이 저도 모르게 달라졌다.“아주 정확해요.”“그래?” 현빈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네가 해석을 잘해서 그래, 난 단지 총결을 해서 더 알기 쉬운 단어로 설명을 한 거지.”정은은 자기도 모르게 맞은편의 남자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기억 속에서, 현빈은 레스토랑 아니면 술집 또는 어떤 클럽에 자주 나타났는데, 그야말로 플레이보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생물학 분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니.‘정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구나.’정은은 도겸과 6년을 함께 했지만, 그는 심지어 정은의 전공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으니, 이 방면의 화제에 대해 얘기할 리도 없었다.그들은 술집에서 친구들과 모이거나, 별장 침실의 큰 침대에서 뒹굴었다.그래서 현빈이 그녀가 익숙한 전문적인 단어를 말할 때, 정은을 나름 의외였다. 옆에 앉은 선우는 완전히 멍해졌다. 그 낯선 단어들을 들으면서 그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그렇게 겨우 밥을 다 먹은 다음, 선우는 가장 먼저 일어나서 계산하러 갔다.현빈은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살짝 구부렸다. 고개를 돌리자, 정은의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니, 그의 눈빛도 점점 그윽해졌다.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빈은 핸드폰을 확인했다.“선우는 임시로 일이 좀 생겼다고 하네. 정은 씨를 대신 데려다주라고 부탁했어.”정은은 손목시계를 보았는데, 확실히 늦은 시간이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택시를 타고 가면 되니까요.”“신사로서 어떻게 식사를 한 후에 여인이 혼자 집에 가게 할 수 있겠어? 게다가 나도 남의 부탁을 받고 움직이는 거라서.”정은은 입술을 오므렸다.“그럼... 부탁할게요.”“내 영광이지.”두 사람이 레스토랑을 나서자, 현빈은 정은의 장갑을 받으며 조수석
어떤 곡인지, 어떻게 변주를 했는지 현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현장의 어두운 조명은 가장 좋은 은폐가 되어, 현빈이 거리낌 없이 부드러움과 깊은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다.그의 시선은 통제되지 않고 정은의 하얀 손에 떨어졌다. 몇 번이나 그 손을 꽉 쥐고 영원히 놓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잠시 후, 현빈은 스스로를 억제하며 이성을 되찾았다.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 이 밤만 지나면... 더 이상 급해할 필요 없어, 정은이를 놀라게 해선 안 돼...’두 시간, 어떤 사람에게는 괴로움과 시련이겠지만, 정은에게는 엄청난 시청각 향연이었다.그렇기에 공연이 끝난 후에도 정은은 입맛을 다셨다.“방금 그 ‘크로아티아 랩소디’ 들었어요? 록 요소를 추가한 거 있죠! 예상치 못한 낭만과 생동감이 넘쳤고, 특히 중간의 변주는 더욱 놀라웠어요! 심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해요?”현빈은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응? 그래, 듣기에는 확실히 괜찮았지.”정은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남자의 이상한 반응을 놓쳤다.홀을 나서자, 가로등이 켜지고, 네온사인이 땅에 비추는 빛과 그림자가 쏟아져 내리며, 그때서야 정은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깨달았다.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것이다.정은은 논문을 아직 끝내지 못했고, 내일 실험실에 가져갈 점심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먼저 가려고 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현빈이 갑자기 말했다.“나랑 어디 좀 가줄래?”“네?”“안 돼?” 남자의 검은 눈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이며 놀라울 정도로 밝았다.정은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승낙했다.하지만...“9시 전에 집에 가야 돼요.”“좋아.” 현빈은 그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정은은 자신의 차에 올라 현빈의 차를 따라 근교로 향했다.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두 사람은 산 꼭대기에 도달했다.“정은아, 봐봐...”두 사람은 바람을 맞으며 차를 멈추자, 정은은 고개를 숙이고 패딩으로 자신을 꼭 싸맸다. 이때 현빈이 갑자기 입을 열
“켁...” 정은은 놀라서 기침을 했다.밥을 잘 먹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다니? 정은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우린 사귀는 사이가 아니지만, 심 대표님에게 있어 이번 식사는 확실히 공짜와 다름없죠. 왜냐하면...”정은은 웃으며 사장을 바라보았다.“제가 사는 거니까요.”사장은 멍하니 있다가 이어서 의미심장하게 현빈을 바라보았다.‘이 녀석도 당하는 날이 있군! 잘됐어!’다 먹고 정은은 주동적으로 계산하러 갔다.사장은 현빈을 잡아당겨 목소리를 낮추었다.“야, 너도 열심히 노력 좀 해. 얼른 그 친구의 마음을 얻어야지. 다음에 올 때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 정말 널 비웃을 거야!”현빈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그러고 싶지.” “이야, 이 세상에 드디어 너를 혼내 줄 여자가 나타났구나, 희한하다.”“야...”“그래! 이 친구가 도와줄게.”정은은 이미 계산대에 가서 결제를 하려 했다.결제한 후, 그녀는 뒤에 있는 현빈을 바라보았다.“갈까요?”“에이, 잠시만요!” 사장이 먼저 입을 열더니 웃으며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직원에게 물건을 건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네?” 직원은 어리둥절해졌다.“티켓.”“아!”사장은 받아서 현빈에게 주었다.“자, 내 여동생이 피아노 연주회 티켓 두 장을 구했는데, 음치인 내가 또 어떻게 그걸 들으러 가겠어? 자리에 앉으면 정말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거잖아! 하하... 오늘 마침 만났으니 너한테 줄게!”현빈은 참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세웠다.“이건 정말 구하기 어려운 건데, 정말 나한테 줄 거야?”“그럼, 가져가!”“그래, 그럼 나도 고맙게 받을게.”두 사람은 사장의 배웅을 받고 샤브샤브 가게를 떠났다.현빈은 손에 든 티켓을 흔들며 정은에게 물었다.“맥심 피아노 연주회, 가고 싶어?”“맥심이요? 진짜예요?” 정은은 의아함을 참지 못했다.“연주회 티켓은 정말 구하기 어려운데.”“자, 직접 확인해 봐...”정은이 머리를 숙였는데 정말 맥심의 연주회였다.“내 친구가 호의로 우
현빈이 말했다.[일단 생각 좀 해볼게. 만나서 얘기하자.]“좋아요.”통화를 마치고 정은은 3분 안으로 패딩 코트를 걸치고 두꺼운 스노우부츠를 신은 뒤 가방을 들고 외출했다.소한이 지난 후, 그렇게 춥지 않은 것 같지만,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에 숨어 얼굴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정은은 아래층에 도착하자마자 현빈이 골목 어귀에 서서 한정판 마이바흐 옆에 기대어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자동차 열쇠를 들고 노는 것을 보았다.그녀를 본 순간 현빈은 갑자기 똑바로 섰다.정은은 웃으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아까까지만 해도 얼굴이 덤덤했던 남자가 순식간에 입꼬리를 들어올렸다.차에 오르자 현빈은 그녀에게 아침을 건네주었다.“두유와 만두, 뜨거울 때 먹어.”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심 대표님은 기사로 됐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아침까지 사온 거예요? 쯧쯧, 꿈도 꾸지 못한 대우를 받았네요.”현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왜? 넌 심지어 더 대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정은은 말을 받지 않고 두유만 들고 몸을 녹였다. “왜 안 먹어?”“뜨거우니까요.”“에헴! 방금 수리점에서 전화가 왔는데, 네 차 앞부분이 심하게 손상된 것은 아니니, 다시 페인트를 칠한 후에는 이미 흔적을 볼 수 없대.”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20분 후에 두 사람은 수리점에 도착했다.정은은 사인을 하고 차를 운전했고, 현빈에게 밥을 사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생각 다 했어요? 뭐 먹을래요?”“이렇게 추운 날에는 샤브샤브 먹기 딱이지.”정은은 표정이 환해졌다.샤브샤브 가게는 현빈이 골랐는데, 정은은 도착해서야 그것이 아주 유명한 가게라는 발견했다.입구에 길게 줄이 늘어졌고, 모두 젊은이들이었다.정은은 침을 삼켰다.“우리 그냥 다른 집으로 갈까요?”‘언제까지 줄을 서야 하는 거야?’그러나 현빈은 그녀를 데리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뭘 바꿔? 따라와.”“아니...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새치기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종업원은 현빈을 보자 제지하기는커녕 웃으며
“정은아, 우리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어? 조 교수님, 정은아! 두 사람 여기서 뭐 해? 안 올라가고?”갑자기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것은 두 사람의 아래층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지금 그녀는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단지 입구로 들어오며 활짝 웃었다.“이 추운 날씨에 하마터면 꽁꽁 얼 뻔했네... 할인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 늦은 시간에 나올 리가 없었을 텐데!”근처 대형 마트는 밤 9시 이후부터 할인 행사를 했다.살림에 알뜰한 아주머니는 종종 늦은 저녁 장을 보러 나가곤 했다.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재석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재석은 입가까지 올라왔던 말을 조용히 삼켰다.“같이 올라가자.” 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말했다.정은은 곧장 다가가 그녀의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제가 도와드릴게요.”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재석이 자연스럽게 정은의 손에서 장바구니를 넘겨받으며 앞장섰다.“내가 들게.”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행동은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아주머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조 교수님은 말이야, 정말 다정해! 너희 젊은이들은 그걸 뭐라고 했더라... 매너! 맞아, 매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은아?”정은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렇게 좋은 총각이면 진작에 여자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조 교수는 그저 연구와 학술밖에 모르잖아! 하루 종일 실험하고 논문 쓰느라 바쁘다니까!”“노벨상이라도 받으려는 건지 원. 그래, 남자가 일 열심히 하는 건 좋지! 그런데 연애도 좀 하고, 일도 하면 더 좋잖아?”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정은을 보며 말을 이었다.“정은아, 넌 몰라서 그래. 나랑 3층 왕 교수님이 조 교수한테 여자아이를 얼마나 많지 소개해 주려고 했는지 알아? 말로는 좋다고 해놓고, 막상 약속 잡으려고 하면 갑자기 사라지는 거야! 며칠씩 집에도 안 들어오고! 우리가 그걸 모를 줄 아나 봐?”앞에서 조용히 걸어가던 재석은 갑자기 움찔했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착하니,
정은은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재석은 순간 숨이 멎을 듯했다. 왜인지 그녀의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덜컥하게 만들었다.마치... 무언가 중요한 걸 놓쳐버린 것만 같았다.두 사람이 공장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경비도 교대 시간이라, 유쾌하고 농담을 잘하던 아저씨는 퇴근했고, 대신 젊은 청년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성격이 조금 내성적인지, 청년은 말없이 열쇠를 받아 제자리에 두고는 조용히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배웅했다.밤이 완전히 찾아오기 전, 하늘가에는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고, 길가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황혼 속 적막함을 한층 더 짙게 만들었다.정은과 재석은 나란히 걸으며, 둘 사이에는 자연스레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재석은 입을 떼려다 망설였다. 그녀의 감정이 흔들리는 걸 느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결국,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중, 정은은 문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선배님이 정성껏 준비해 준 생일 선물, 정말 의미 있었어요. 덕분에 기뻤어요. 고마워요. 그럼, 나도 보답으로 저녁을 살 테니, 뭐 먹고 싶어요?”재석은 그녀가 눈을 드리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멍해졌다.정은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결정했어요?”재석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매운 요리 어때? 괜찮겠어?”“좋아요!” 정은은 망설임 없이 답하며 밝게 웃었다.매운 걸 먹고 나오자, 정은은 입김을 불며 목도리를 꼭 맸다.재석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목도리를 벗어 숄처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려 했다.그러나 정은은 한 발짝 물러서며 환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선배님. 안 추워요.”재석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곰곰이 생각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고, 차가운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가로등 불빛마저 옅은 안개에 덮인 듯 흐릿하게 퍼
두 사람의 학술 토론이 마침내 끝나자, 수민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다음에 또 이런 얘기할 거면 나 부르지 마, 정말 지루해...”수민은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음식을 올리라고 했다.그리고 모두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밥을 다 먹은 뒤, 수민은 정은과 쇼핑을 하려 했는데, 레스토랑을 나서자마자 회사의 전화를 받았다.“알았어, 알았다고! 하루조차 기다릴 수 없는 거야 뭐야?!”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민은 전화를 끊고 급히 회사로 달려갔다.떠나기 전에 재석에게 당부했다.“오빠, 오늘 정은 생일이니까 뭐든 다 들어줘야 지!”“알았어.”“어디로 가고 싶어?” 수민을 보낸 후, 재석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어디든 다 되는 거예요?” 정은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재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그럼 그 다이아몬드를 만든 곳으로 가봐도 돼요?”“정말 가고 싶어?”“네!”“좋아.”정은은 그곳이 실험실이나 조작실 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재석이 자신을 공장으로 데리고 갈 줄은 몰랐다.“조 교수! 무슨 일로 또 온 거야?” 재석이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경비 아저씨가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점심 드셨어요?”“그럼! 오늘 식당에서 족발을 삶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맞다. 그 다이아 목걸리 여자친구가 어땠어?”콜록콜록-재석은 좀 어색해하며 자연스럽지 않게 몇 번 기침을 했다.정은은 옆에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경비 아저씨가 그제야 재석 곁에 한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마? 이 친구가 바로 네 다이아몬드를 받은 여...”“아저씨! 7호 작업장의 열쇠 좀 주시겠어요?” 재석은 소리를 높여 경비의 말을 끊었다.“그래!” 경비는 바로 열쇠를 찾으러 고개를 돌렸다.재석은 어색하게 정은을 바라보았다.“아저씨가 워낙 농담을 좋아하셔서...”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거 같았어요.”열쇠를 받고 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7호 작
“자, 내가 끼워줄게.”수민은 팔찌를 정은의 가녀린 손목에 끼워주었고, 이는 정은의 손을 더욱 하얗게 돋보이게 했다.“이럴 줄 알았어! 이 디자인과 컬러는 너와 아주 잘 어울려!”정은은 고개를 숙이며 팔찌를 바라보았고,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수민이 입을 열었다.“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응?” 정은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뭐가 더 있어?”수민은 웃으면서 말을 하지 않고 웨이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레스토랑에서 베토벤의 ‘환희의 찬가’가 울려펴졌다.잔잔한 음악소리 속에서 재석은 케이크를 밀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핑크색 크림 위에 예쁜 인형이 하나 서 있었다. 커다란 눈,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정은과 똑 닮았고, 주위는 핑크색 진주로 장식되었다.심플하면서도 예뻤다.“선배님?” 정은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재석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며 담담하게 웃었다.음악이 점차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 레스토랑 안이 너무 따뜻해서, 남자의 미소가 너무 눈부시고,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수많은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정은은 일시에 멍해졌다.재석은 정은의 앞에 멈춰 서며 손에 든 파란 아이리스를 건넸다.“생일 축하해.”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고, 고마워요, 선배님. 꽃과 케이크 정말 너무 예뻐요...”파란 아이리스의 꽃말은 우아함과 생기, 꿈과 희망, 그리고 찬양과 애모였다.수민은 이 상황을 보고 웃으며 일깨워주었다.“정은아, 잘 봐봐, 정말 꽃과 케이크밖에 안 보여?”정은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그 파란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은은 멈칫했다.은색과 핑크색으로 된 작은 선물함이 꽃다발 속에 숨겨져 있었다.수민의 주시와 재석의 기대를 감지한 정은은 그 선물함을 열었는데, 예쁜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이건...?”수민이 대답했다.“우리 오빠가 준비한 생일 선물이야.”목걸이 외곽은 둥근 호형으로, 마치 행성 궤도와 같았다. 그리고 그 ‘궤도’에는 9개의 다이아몬드가 분포
이미숙은 계속 말했다.[정은아, 생일 축하해. 원래 나와 네 아빠는 며칠 전에 J시에 가서 너와 같이 생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출판사에서 임시로 『7일담』 재판을 하기로 한 거야. 심지어 속표지 세 상자나 부쳤고. 정말 떠날 수가 없어서 네 아빠와 상의 끝에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널 보러 가기로 했어.]이미숙도 어쩔 수 없었다.새 책이 대박 나서, 이미 세 번째로 재판되었고, 지금 서재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속표지가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때로는 책이 너무 잘 팔리는 것도 고민이었다.정은은 눈을 깜빡이며 다정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얼마나 인기 많으신데, 좀 바쁘신 것도 다 정상이잖아요.”자랑스러운 정은의 말투에 이미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참, 넌 몰라, 네 엄마 지금 인기가 정말 장난도 아니야! 얼마 전에 한 독자가 어디에서 네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얻었는지, 전화하면서 자신에게 따로 사인을 해달라고 한 거 있지? 심지어 돈 2천만 원을 주겠다잖아.]이미숙이 전화를 받을 때, 소진헌은 마침 옆에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독자의 요구대로 축복의 말을 써주기만 하면 2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니?소진헌은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어?” 정은조차도 좀 놀랐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그때 네 엄마는 멍해서 반응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네 엄마가 가격에 불만이 있는 줄 알고 직접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어. 쯧쯧...]지금 생각해도 소진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그럼 엄마는 허락하셨어요?”[사인해 주겠다고 했지만, 돈은 받지 않았어. 그 사람도 J시 사람인 것 같아!]전화를 끊자, 정은은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그녀는 어렵게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커튼을 열었다.어젯밤에 또 눈이 내렸기에 창밖은 온통 새하얬다.이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정은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펑!리본이며 반짝이는 종이가 정은의 머리와 몸에 떨어졌다.정은은 멍해졌다.수민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 앞에 붉은색
추운 섣달, 낡은 주택 단지는 저녁 9시가 넘으면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근처의 가로등은 또 켜졌다 꺼졌다 했으니, 재석은 정은이 걱정되어 틈만 나면 시간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가 기다렸다.비록 정은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고정되지 않았지만, 겨우 20분에서 30분 정도 차이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옹근 두 시간이나 늦었다.그리고 현빈의 차에서 내렸다.재석은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밤바람이 불자, 이따금 한기를 안겨왔고, 재석은 정은의 코가 얼어서 빨개진 것을 보았다.“가자, 밖은 너무 추우니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손바닥에 입김을 불었고, 고개를 돌려 현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가로등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고, 걸음걸이까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복도의 음향 제어등은 층층이 켜져 있는데, 은은한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응시했다. 정은이 재석을 언급할 때 엄청 기뻐해하며 그란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보고, 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때는 나와 강도겸이 절친이었기에 정은을 놓쳤는데, 지금은 또 정은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을 지켜볼 거야?’일이 자연스럽게 성사되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이 순간, 현빈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이러다가 무슨 이변이 생길지도 몰라.’그는 전에 망설였기에 6년이란 기다림을 바쳤고, 정은도 이제 겨우 도겸과 헤어졌다.‘같은 잘못은 절대로 다시 범하면 안 돼. 그건 바보와 다름없으니까.’몸을 돌리는 순간, 남자의 눈빛은 마치 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확고해졌다....이 날은 소한이었다.사람들은 소한과 대한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섣달 그믐날 전의 마지막 두 번째 절기이기도 했다.그러나 정은에게 있어, 이것은 또 다른 특수한 의미가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생일이었다.이른 아침, 가장 먼저 축복을 보낸 사람은 정은의 아버지 소진헌이었다.정은이 아직 자고 있을 때, 그의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