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헌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재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서야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그가 떠나고 나자, 정은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느라 바빴다.이미숙과 소진헌은 오랜만에 딸의 거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방 두 개에 거실 하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집이었다.배치와 인테리어는 오래된 느낌이 강했지만, 안에 있는 가구들은 모두 새것이었다. 소파, 서랍장, 전자 기구들까지, 부족한 게 없어 보였다.낡아서 개선할 수 없는 흠집들은 아기자기한 장식품들로 가려져 있었다. 흠이 있었지만, 그 흠마저도 나름대로 정성껏 숨긴 흔적이 역력했다.전체적으로 보면 꽤나 정교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원래 정은의 부모는 낡은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딸의 거주 환경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미숙은 그런 딸의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정은이 직접 세낸 집을 이렇게 아늑하고 정성스럽게 꾸며놓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딸이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점에 대견함을 느꼈다.인생은 대충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활에 대한 태도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딸이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았다.이미숙이 소진헌과 막 결혼했을 당시, 소진헌의 월급은 겨우 60만 원에 불과했다.그중 40만 원은 부모님께 용돈으로 드려야 했으니, 젊은 부부에게 남겨진 돈은 20만 원뿐이었다.정은이 태어난 후, 살림살이는 더 빠듯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숙은 반달에 한 번씩 꼭 꽃을 샀다.형편이 괜찮을 때는 꽃집에서 비싼 꽃을 샀고, 월말이 되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주말에 등산을 가며 들꽃을 따다 꽃병에 꽂았다.정은은 어릴 적부터 이미숙이 참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심지어 가끔씩 보여주는 ‘대범함’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그러나 과거
소진헌이 물었다.“당신이 무슨 경찰이야? 게다가 정은이도 당연히 그 교수님의 개인 사정에 대해 잘 모르겠지. 다음에 직접 조 교수에게 물어보자.”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죠.”“아니... 진심이야?” 소진헌은 놀랐다.이미숙은 눈을 부라렸다.“정은아, 설탕 있어?”“네, 가져올게요.” 말하면서 정은이 일어섰다.딸이 떠나자, 이미숙은 그제야 소진헌에게 말했다.“정은이 평소에 혼자 지내는 데다가, 이 조 교수님과 이웃이잖아요. 두 사람의 관계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고. 그러니 좀 분명하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요?”“하긴, 역시 우리 마누라가 똑똑하네, 헤헤...”이미숙은 그를 노려보았다.“저리 좀 가요. 이따가 정은이가 나오면 어떡하려고요?”“에헴!” 소진헌은 바로 똑바로 앉았다.“그럼 조심해야지!”방은 이미 다 정리되었고, 정은은 심지어 부모님을 위해 새로운 침대를 바꾸기도 했다.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도 모두 새로 산 것이라,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린 다음 침대에 깔았다.“엄마, 아빠, 일단 낮잠 좀 주무세요. 이따가 두 분 데리고 나가서 구경할게요. J시에 몇 번이나 오셨는데, 두 분 데리고 놀 기회가 없었잖아요. 이번에 다 보충할게요.”소진헌과 이미숙은 J시에 온 적이 있었다.정은이 대학 다니는 동안, 그들은 그녀를 보러 세 번 찾아왔다.처음은 신입생으로 입학할 때 정은과 같이 등록하러 왔었다.두 번째는 정은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여름방학할 때 한 번 왔었다.강도겸을 한 번 보고 싶어서.그들이 온 지 3일이나 되었지만, 이틀 동안 줄곧 정은이 그들과 함께 했다. 도겸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나타나더니 황급히 식사를 한 후에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로 떠났다.세 번째는 정은의 졸업식이었다.두 사람은 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목격하며 무척 기뻤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그녀가 뜻밖에도 스스로 대학원으로 진입하는 것
“우리 여보밖에 없어.”“그만하고 좀 자요.”“어.”일찍 자는 것은 정말 정확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튿날 정은이 그들을 데리고 경복궁에 갔기 때문이다.날씨는 무척 맑았다.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 햇빛은 아직 심하게 내리쬐지 않았다.소진헌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기세가 웅장하다는 것밖에 느끼지 못했다.이미숙은 오히려 좀 멍해졌다.“왜 그래요, 엄마?” 정은은 그녀가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그곳이 바로 창덕궁이지?”“네.”“조선 왕조 도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있고, 응봉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에 자리잡은 그 궁궐?”“맞아요.” 정은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엄마, 이번에 미리 공부라도 하신 거예요?”이미숙은 인생을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었다.어디 놀라가도 미리 계획하지 않았고, 어디를 가든지 앉아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번에 미리 준비를 했다니?정은도 많이 놀랐다.이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약간의 의혹을 느낄 뿐이었다.사실 그녀는 여기에 오기 전에 아무런 계획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전에 창덕궁에 관한 자료도 찾지 않았다.그러나 이 정보들은 이미숙이 그곳을 본 순간,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것일까?’소진헌은 처음에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경복궁을 다 관람한 뒤 힘이 빠졌다.“안 되겠어, 너무 피곤하고 더우니까 좀 쉬었다가 가자.”이미숙은 그를 비웃었다.“누가 어제 큰소리를 떵떵 쳤죠? 그런데 이제 경복궁 하나 봤다고 벌써 힘이 든 거예요?”소진헌은 당당했다.“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래. 오래 걸어서 이렇게 숨을 헐떡이고 있잖아. 그 젊은이들 좀 봐. 얼마 가지도 못하고 바로 떠나다니! 나보다 훨씬 못하군.”밖에는 확실히 많은 젊은이들이 고개를 돌려 떠나기 시작했다.이미숙은 어이가 없었다.‘그래, 말로 그이를 이길 수가 없지.’정은은 부모님의 말다툼을 보면
정은이 이렇게 놀란 것도 당연했다.우선 평소 이 시간에 재석은 실험실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다른 곳에 나타날 리가 전혀 없었다.둘째, 그와 소진헌은 뜻밖에도 장기를 두고 있었고, 손에는 '탁상달력필기'가 놓여 있었다.두 사람은 매우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무척 화기애애했다.“정은아, 돌아왔어?”인기척을 듣고 소진헌은 즉시 현관을 바라보았다.재석도 고개를 돌렸는데, 정은과 시선을 마주했다.그 순간, 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여기에 있는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선배님이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정은은 반응하며 슬리퍼를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갔다.재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진헌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오전에 내가 네 엄마와 외출할 때 계단에서 조 교수를 만났거든. 그래서 집으로 초대했어.”그러나 얘기를 나누자마자, 소진헌은 자신이 어떤 화제를 언급하든 재석이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심지어 화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후에 물리와 관련된 일을 말하니, 그것은 재석의 본업이었기에, 두세 마디로 소진헌은 철저히 탄복했다.“나도 이제 늙었구나, 지금은 젊은이들의 세상이야!”재석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천만에요, 아저씨야말로 진정한 실력자시죠.”그도 인사치레를 하는 게 아니었다.소진헌은 엄청난 지식을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이 뛰어났다. 이는 그가 대학교를 다닐 때 착실하게 공부한 덕분이었다.재석도 이 점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정말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소진헌이 현재 물리 분야의 최신 연구 방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그 외에도 소진헌은 관련 분야의 일부 최신 연구 성과를 말해낼 수 있었다.이것은 일반 대학생이 아니었다. 장시간, 주기적으로 논문을 읽어야만 이런 실력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평소에 논문을 읽는 습관이 있으시죠?”“매일 수업 준비를 마치면 심심풀이 삼아 한두 편 정도 보곤 했지.”“방금 언급하신 플라스틱 표적의 중성미자에서 내부 양자 구
소진헌은 아직 흥을 다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조 교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말하면서 물 두 모금 마신 다음, 입맛을 다시며 계속 감탄했다.“확실히 괜찮네...”정은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아빠, 무슨 이상형이라도 만나신 거예요?”“헛소리! 내 이상형은 너희 엄마뿐이야!”‘또 애정을 과시하고 있군!’어제 돌아다니느라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오늘 소진헌과 이미숙은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쉬기로 결정했다.정은은 자연히 그들의 의사를 존중했다.푹 쉰 다음, 세 식구는 또다시 집을 나섰다.이번에 주로 한옥마을을 구경하러 갔다.정은은 일주일 전에 미리 예약을 했다.이미숙은 특별히 한복을 입고 사진까지 찍었다.스태프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우아하세요. 정말 그 시대에서 오신 분 같아요...”이미숙도 덩달아 웃었다.칭찬을 듣기 싫어하는 여자는 없었다.사진사의 안목은 확실히 괜찮았고, 마지막에 나온 사진들은 정말 아름다웠다.이날 밤, 소진헌은 혼자 잤고, 정은은 엄마와 같이 잤다.이미숙은 어릴 때처럼 그녀를 품에 안았다.정은은 어머니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곧 꿈나라로 들어갔다.이른 아침, 정은은 일어나서 이메일을 확인했다.뜻밖에도 전에 투고한 생물잡지의 답장을 받았는데, 그녀에게 관련 참고문헌을 완전하게 보충하라고 했다.정은은 원고를 확정하기 전에 이미 한 번 검사했지만, 빠뜨린 상황이 있을 수도 있었다.그러므로 만일을 대비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아빠, 엄마, 저 도서관에 좀 다녀올게요. 빠르면 점심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그래, 가서 일 봐, 우리 신경 쓸 거 없어!”점심에 날씨가 갑자기 변했다.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다가, 밥을 먹은 사이에 하늘이 흐려졌다.이미숙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곧 폭우가 쏟아질 텐데. 정은이가 나갈 때 우산을 안 가지고 나갔잖아요. 우리가 갖다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가까우니 시간도 얼마 안 걸리잖아요.”
“여긴 50미터 간격으로 도로 표지판이 있는데, 그 위에 도서관의 방향이 표시되어 있어요.”재석은 걸으면서 설명했다.“학교는 큰 고리형이라서, 왼쪽은 강의동이고, 오른쪽이 바로 도서관이에요...”소진헌은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노선을 그리려고 노력했다.그런데 세 사람이 말하는 사이에 정은은 마침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쳤다.“엄마 아빠? 나가시려고요? 밖에 곧 비가 내릴 것 같은데...”그리고 재석도 옆에 있었다.“선배님?”이미숙은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정은은 바로 재석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그러나 남자는 손을 흔들었다.“천만에, 돌아왔으면 됐어.”네 사람은 다시 올라갔다.“방금 정말 고마웠어. 다음에 집에 와서 밥 먹지 그래? 내가 직접 요리할 테니까 내 요리 솜씨 좀 맛봐!”소진헌은 열정적으로 초대했다.이미숙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그들 일가족은 남에게 밥을 해주기를 좋아했다.하지만 나름 다른 점도 있었다.소진헌은 요리 솜씨를 과시하기 위해서이고, 이미숙은 열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손을 쓸 필요가 없었으니 그냥 입만 놀리면 됐다.정은은 단순히 음식을 만들기를 좋아했다. 많이 하면 혼자 먹을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을 초대했던 것이다.재석은 내색하지 않고 정은을 바라보더니,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돌아오자, 이미숙은 소진헌을 비웃었다.“다급하긴요. 남이 당신 요리 솜씨가 좋다는 것을 모를까 봐 그래요?”소진헌은 헤헤 웃었다.“좋은 요리 솜씨가 있으면 당연히 보여줘야지. 보여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똥폼 잡긴!”정은은 슬리퍼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아빠, 선배님이랑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요?”조 교수라 하면서 말까지 놓았다니.“그거 모르지? 사람은 사귀어야 하는 법이거든. 나와 조 교수도 다 물리를 배웠고, 장기를 좋아하니 당연히 친해지는 거 아니겠어?”이미숙은 매정하게 그의 속마음을 들추어냈다.“네
말을 마치자, 소진헌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나갔다.정은은 멍해졌다.‘됐어, 두 분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자...’실험실에서.재석은 지난주에 나온 두 조의 데이터를 검사하고 있었다. 제2조 제4열에 편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태민을 부르려고 했는데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그는 즉시 전화를 받았다.“네, 누구시죠?”[선배님, 나예요, 소정은.]재석은 멈칫했다.자료를 쳐다보던 시선을 천천히 옮기며 말투도 누그러졌다.“무슨 일 있어?”[엊그저께 우리 아빠가 선배님을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직접 선배님에게 요리를 해주고 싶다면서... 시간 없어도 괜찮아요. 내가 다음에...]“시간 있어요.”정은은 잠시 멈칫했다.[실험실은 바쁘지 않는 거예요?]“응.”[그럼...]“저녁에 보자. 아저씨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 특별히 날 위해 요리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다고.”[천, 천만에요.]전화를 끊은 후, 정은은 좀 어리둥절해졌다.‘뭐지... 어제 미진 언니가 톡으로 최근 진도 때문에 바빠서 미칠 지경이라고 하셨는데. 선배님은 왜 바쁘지 않다고 말한 거지?’진욱은 재석이 전화를 끊는 것을 보고 일부러 그의 어깨를 쳤다.“누가 전화를 했는데? 정은이지? 나 정은이 목소리 들은 것 같아.”재석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알면서도 묻는 거야?”진욱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나는 삼일 째 밤을 새우고 있단 말이야. 미진이와 태민이도 너무 힘들다고 난리야. 그런데 우리 조 교수님은 오히려 바쁘지 않다고 말씀하시다니. 데이트가 있는 남자라서 그런가, 다르긴 정말 다르구나.”사실 재석은 그 누구보다도 밤을 많이 새웠다. 그러나 그는 아주 홀가분하고 유쾌해 보였다.‘설마 우리 모두 가짜 실험을 하고, 가짜 보고서를 내고, 가짜 논문을 쓴 것은 아니겠지?’재석은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진욱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 시계를 가리켰다.“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어제 너에게 초판 실험 데이터를 주지 않았어? 이미 9시간
음식이 차례대로 나오자, 이미숙은 재석이 가져온 와인을 열었다. 정은도 오늘 술을 조금 마실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그 결과, 그녀는 두 잔이나 마셨다.소진헌은 말을 하느라 바빴고, 이미숙은 음식에 집중했기에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그러나 재석은 달랐다.“정은아, 이미 세 잔째야.”“앗!” 술병을 들던 정은은 그 자리에 몸이 굳어졌다.소진헌과 이미숙은 그제야 그녀가 엄청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얘! 좀 마시라고 허락했지, 한 잔 한 잔 마시라는 게 아니잖아!”이미숙은 화가 났지만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그녀도 와인을 즐겨 마셨고, 여태껏 취한 적이 없었다. ‘이 바보 같은 딸을 어쩜 좋을까...’소진헌도 정은이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히려 다른 일을 관심했다.“조 교수는 정말 과학연구를 하는 사람답네. 어쩜 관찰력이 이렇게 뛰어난 거야! 어쩐지 젊은 나이에 이렇게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더라니...”그렇다, 소진헌은 이미 각종 경로를 통해 물리분야에서의 재석의 성과를 전부 알아냈다.그야말로 감탄이 끊어지지 않았다.이미숙이 말했다.“네 아빠가 이미 중독됐어.”정은은 전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석의 성과에 대해서, 오직 그를 접촉한 사람만이 재석이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두드러지며 얼마나 불가사의한지를 알 수 있었으니까.그러나 지금, 정은은 이미숙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 정도로 칭찬을 할 수 있다니? 우리 아빠 설마 눈에 콩깍지라도 씐 아니야! 그것도 엄청 많이 씐 것 같은데?’“자네 우리 정은이를 이렇게 많이 관심하다니. 이런 사소한 디테일까지 주의를 했잖아. 아버지인 내가 정말 부끄럽군...”소진헌은 이렇게 말하면서 술을 한 모금 마셨다.이때, 그는 갑자기 컵을 내려놓더니 정중하게 말했다.“우리 의형제를 맺는 건 어떤가? 앞으로 정은이가 자네를 삼촌이라고 부르게 하자!”“풉-”이미숙은 하마터면 금방 마신 와인을 토할 뻔했다.정은과 재석도 깜짝 놀랐다.소
J시, 무한 실험실에서.정은은 실험대 앞에 서서 데이터를 세 번이나 수정했다.서준과 민지는 눈을 마주쳤다. ‘뭔가 이상해!’“정은 언니, 어젯밤에 잘 못 잤어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데요?”“나도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어. 오늘 계속 마음이 불안하네.”“오늘 아침부터요?”“그래.”...점심에 정은은 낮잠을 잤는데 상황이 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고, 마치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저녁 무렵, 가까스로 일을 마친 정은은 데이터를 대조한 후 기지개를 켰다.“후, 드디어 끝났다.”민지가 말했다.“나도 다 끝냈는데. 쮼, 너는?”“나도.”“잘됐네! 오늘 밤 드디어 밤을 새울 필요가 없어. 같이 밥 먹으러 갈까? 내가 쏠게.”정은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너희들 가, 난 쉬고 싶어.”그동안 정말 피곤했기에 정은은 지금 집에 가서 푹 자고 싶었다.민지도 뭐라 하지 않았다.“그래요, 정은 언니, 그럼 일찍 돌아가서 쉬어요.”“좋아.”도중에 정은은 택시에 앉아 하마터면 잠들 뻔했다.갑자기 핸드폰 벨이 울리자 그녀는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어, 아빠.”[정은아, 네 엄마 다쳤으니 얼른 집으로 와!]“네? 엄마가 다쳐요? 왜요? 어쩌다가요?!”[오늘 유보영이 집에 찾아왔다...]이미숙은 컴퓨터를 보호하기 위해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그 순간 피가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다행히 소진헌이 제때에 돌아왔고,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그런데도 세 바늘을 꿰매었는데, 의사는 가벼운 뇌진탕이라면 이틀 동안 입원하여 관찰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유보영 그 여자는요?”[도망갔어.]정은은 이를 갈았다.그날 저녁, 그녀는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끊은 후, 마침내 새벽 3시에 L시에 도착했다.이튿날 아침, 정은은 자신이 만든 죽과 3시간 동안 끓인 보신탕을 가지고 병원에 찾아왔다.“정은아?!”소진헌과 이미숙은 모두 놀랐다.“언제 돌아왔어?”“왜 말 안 했어? 내가 데리
“능청스럽게 굴지 마요. 우리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어때요? 나는 이미 다른 출판사와 계약을 했어요. 당신이 본 『7일담』이 바로 그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이에요. 그러니 나는 당신과 재계약을 할 수 없어요. 지난 10년간의 감정을 봐서, 우리는 좋게 갈라지죠.”“좋게 갈라져?” 유보영은 냉소를 지으며 드디어 연기를 하지 않았다.“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누가 나의 손실을 배상하는 건데?”“당신이 무슨 손실을 입었다는 거죠?” 이미숙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내가 그렇게 많은 돈을 써서 너와 계약을 했어. 10년, 꼬박 10년, 당신은 좋은 책 한 권도 쓰지 못했잖아. 그런데 다른 사람을 찾아가 계약을 하더니 바로 인기 소설을 출시해? 이미숙, 너 지금 날 갖고 장난하는 거지?”“내가 쓰기 싫어서 그래요? 당신이 줄곧 나의 구상을 부정하고, 나에게 출판할 기회를 주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요. 이 10년 동안 내가 당신에게 몇 권의 책의 대강을 주었는지 계산해 본 적 있어요? 마지막에는 예외가 하나도 없이 전부 거절을 당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인기를 끄는 작품을 출판하라는 거예요?”“너...”“당초의 계약비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래요, 당신은 확실히 많은 돈을 주었지만, 당신도 날 10년 동안 ‘감금’했잖아요. 이 10년 동안 내 예전에 쓴 책의 판권으로 얼마를 벌었는지, 당신이 잘 알고 있겠죠.”유보영은 시선을 피하더니 다소 마음이 찔렸다.‘이미숙이 어떻게 그 판권에 대해 알았지?’“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죠? 나는 이미 변호사를 청해 계약서를 확인해 보았는데, 당신은 몰래 내 판권을 대리 운영하겠다는 조항을 추가했죠. 사인할 때 나에게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직접 이름을 쓰라고 했고요.”“허... 그래서? 이제 돈 계산을 하자는 거야? 변호사까지 불렀다고? 진작부터 날 방비했나 보네.”“당신이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어요. 전의 일은 더 이상 따지지 않겠지만, 지금부터 날 방해하지 마요.”이미숙은 일어나더니 손님을 내
이 시각, 소진헌은 학교에 수업하러 갔는데, 집에는 이미숙 혼자밖에 없었다.J시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새 책의 대강을 구상했고, 학교 괴담을 주제로 한 공포 소설을 창작할 계획이었다.그사이 정은이 전화를 걸어 실험실 완공식에 초청했지만, 부부는 아쉬움을 느끼며 거절했다.소진헌은 수업을 해야 했기에 떠날 수 없었고, 이미숙은 창작을 해야 해서 방해를 받으면 안 됐다.이야기가 이미 태반이 완성되고, 곧 마지막 장을 끝내려 해서 이미숙은 요즘 자신을 방에 가두었다.유보영이 문을 두드릴 때도 이미숙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다. 문을 열러 가는 길에 머릿속에서 줄거리를 구상하고 있었다.“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그...”유보영은 미소 지었다.“오랜만이에요, 이 작가.”이미숙은 이마를 찌푸렸다.“당신이었어요?”“그래요, 그래도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유보영은 내색하지 않고 안을 들여다보았다.‘인테리어가 이렇게 호화로운 걸 보니 정말 부자가 된 모양이야.’이미숙이 거절을 하기 전에 유보영은 하이힐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이미숙은 비록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유보영이 떠들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웃고 있었기에, 예의상 이미숙은 그녀를 내쫓지 못했다.더군다나 이미숙도 유보영이 오늘 무엇을 하러 왔는지 궁금했다.“앉아요.” 이미숙은 물 한 잔을 따라 탁자 위에 놓았다.유보영은 앉은 후,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당당하게 별장 곳곳을 살펴보았다.“이 작가님, 이사를 해도 왜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예전에 이 작가님이 살던 곳에 달려가서 얼만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전화해도 항상 전원이 꺼져 있어서 나도 이곳을 찾느라 애를 엄청 썼어요.”이미숙은 대답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그게요, 우리 계약도 곧 만기 되어 가잖아요. 그동안 우리는 아주 잘 협력했고, 재계약도 형식일 뿐이에요. 하지만 형식이라도 같이 사인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것 좀 봐요...”말하면
그리고 유보영의 밑에 이런 작가가 무려 수십 명이나 있었다.“어머!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 작가들은 바보 아니에요? 판권 같은 것을 팔려면 작가 본인의 동의를 거치고 사인까지 해야 되잖아요?”장민영은 가볍게 흥얼거렸다.“넌 매일 그렇게 많은 계약을 복사하는데, 위의 상세한 조항을 보지 않았니?”“어?”“유 사장님은 계약을 할 때 이미 작가의 명의로 된 기타 서적의 판권 대리권을 손에 넣었다고. 그럼 작가에게 통지할 필요도 없고, 사인할 필요도 없어. 유 사장님이 가서 잘 이야기한 다음, 작업실 쪽에 공인만 하나 더 찍으면 끝.”“만약 정말 사인해야 할 상황에 부딪히면, 아무나 찾아서 사인하면 되지 않겠어? 그 사람들 정말 작가 본인을 찾아 가서 대조할 수도 없잖아.”“어머, 그럼 유 사장님은 작가에게 주는 배당금까지 절약한 셈이네? 어차피 작가도 모르니, 돈을 모두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장민영은 커피 한 모금 마셨다.“그래, 넌 사장님이 좋은 차에 비싼 집을 산 돈이 어디서 났다고 생각하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명품인데, 내가 듣기로는 그 가방 하나만 해도 수천만 원이라잖아? 정말이야?”“정말이야, 그것도 에르메스.”“쯧쯧...”장민영은 감탄하면서 부러워했다.“가장 비참하게 당한 작가는 추리 소설을 썼다고 들었어. 일찍 엄청난 인기를 끈 두 권의 소설 판권은 유 사장님이 모두 팔았고. 최근 몇년간 또 기타 판권을 연장했는데, 그 작가 혼자만 해도 매달 최소 우리에게 수백만 원의 이익을 가져다줄수 있어.”“추리 소설 작가? 누구지? 요즘 한 추리 소설 작가가 대박 났는데. 이란 책을 써서 지금 아주 난리도 아니야. 작가 이름이... 이미숙이라 한 것 같아!”“이, 이미숙?!” 장민영은 깜짝 놀랐다.“그 제대로 당한 작가도 무슨 미숙이라고 한 것 같은데.”“같은 사람 아니겠지?”“아닐 거야. 유 사장님이 어떻게 새 책을 내줄 수 있겠어?” 장민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긴
봉수진이 말했다.“이 작가님은 이름이 이미숙이라고 하는데, 우리 미숙이와 이름이 똑같잖아.”이것은 그녀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표지의 작가 이름을 보았을 때, 봉수진은 완전히 멍해졌다.이춘재는 한숨을 쉬었다.보아하니 그도 이것 때문에 이 책을 펼친 것 같았다.그 결과, 이춘재는 이 책이 보면 볼수록 재밌다고 느꼈다.원래 봉수진은 그저 무심코 물었을 뿐, 현빈이 정말 알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알아요.”그는 이미숙과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했다.이춘재는 지난번 서점에서 본 그 소녀가 바로 이미숙의 딸이란 것을 깨달았다.그날, 위층에서 마침 이 책의 사인회가 열렸다.그는 웃음을 금지 못했다.“이런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봉수진은 지난번에 만났던 그 여자애를 떠올렸다. 말소리가 부드럽고 듣기 좋아 그녀는 갑자기 정은이 보고 싶어졌다.“그 아이는 딱 봐도 올바른 가르침을 받고 자란 게 분명해. 영리하고 철이 들었지, 또 예의가 바르지. 이렇게 우수한 부모만이 이렇게 우수한 아이를 가르칠 수 있어.”‘언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겨울이 되기도 전에 유보영은 호주로 휴가를 갔다.그녀는 해마다 그랬기에 작업실 사람들도 모두 익숙해졌다.유보영에게 돈이 많았으니 이렇게 즐기는 것도 당연했다.사실 유보영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 그녀의 직원들은 전혀 모른다.다들은 이곳이 출판사라는 것밖에 몰랐다.유보영은 매년 돈을 들여 이미 유명해진 작가들과 계약했고, 그 다음은 없었다.계약한 이 작가들은 더 이상 새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으며, 새 책을 출판하는 경우는 더욱 없었다.마치... 문학계에서 사라진 것처럼.예전에는 분명히 그렇게 유명했는데, 왜 유보영을 만난 후에 재능이 떨어진 것일까?그럼 유보영은 왜 또 그들과 계약을 한 것일까?작업실은 또 어떻게 돈을 버는 것일까?수입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좀 작작해, 이런 것들은 너와 나 같은 직장인이 걱정할 차례가 아니야.”“난 걱정하지 않
“이 시간이 됐으니까 그러지. 우리를 보러 와도 아침에 찾아왔을 텐데. 너답지 않게 왜 그래.”현빈은 웃으며 이춘재를 부축하고 거실로 향했다.“제가 오고 싶어서 그래요. 두 분이 무슨 손님이에요? 약속을 잡고 만나뵐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하하하, 넌 아주 바쁜 사람이니 시간을 좀 낼 수 있다는 게 쉽지 않아.”“할아버지, 지금 저를 헐뜯으시는 거예요, 칭찬하시는 거예요?”이춘재는 웃음을 터뜨렸다.현빈은 소파에 앉자, 엉덩이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책 한 권이었다.표지에는 뜻밖에도 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아, 이거 제가 차에 둔 책 아니에요?” 현빈은 한눈에 이 책이 자신의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책 모서리를 접는 것에 익숙해져서 접힌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맞아! 지난번에 네 차에서 내릴 때 가져갔는데, 이렇게 재밌을 줄은 몰랐어!”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읽어 보셨어요?”이춘재는 고개를 끄덕였다.“절반 봤지.”“그래서 제가 들어오기 전에 여기 앉으셔서 이 책을 읽고 계셨어요?”이춘재는 아직 벗지 않은 돋보기를 밀었다.“왜? 안 돼?”“눈이 아프지도 않으세요?”이때,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봉수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도 그렇게 말했다! 나처럼 다음 독서앱을 다운로드해서 읽어주는 것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 스스로 볼 필요도 없잖아. 한 글자 한 글자 안경을 쓰고 보는 것보다 더 편리하지 않니?”이번에 현빈은 정말 깜짝 놀랐다.“할머니도 이 책을 읽어... 아니다, 이 책을 듣고 계셨어요?”봉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현빈아, 이리 와, 내가 말하는데,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잘 썼어!”“재밌어요?”“그럼. 제1화와 2화에서 쓴 묘사 좀 들어봐. 글 보지 않고 듣기만 해도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니깐.”현빈이 이어폰 하나를 받아 귀에 꼈다.[임수천은 온몸이 흠뻑 젖었고,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때, 그는 갑자기 앞에 별장 한 채가 있는
“그래요.”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 먼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언니! 저도 데리고 같이 가요! 저도 같은 방향이잖아요!”서준은 그녀를 잡아당겼다.“넌 왜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건데? 이따가 내가 차로 데려다 줄게.”“그, 그럴 필요가 있을까?” 방금 민지는 너무 심하게 서준을 비웃었기에, 이따가 이 깍쟁이가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웠다.“당연하지.”현빈은 재석과 정은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좁고 긴 눈을 가늘게 떴다.차에 탈 때, 정은은 목도리를 벗었고 재석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정은이 뜻밖에도 정말 그에게 건네주었다니.임정식은 다가와서 현빈의 어깨를 두드렸다.“이 상태로 운전하려고? 방금 너 술 많이 마셨잖아. 법을 위반하는 일은 하지 말자...”현빈은 눈살을 찌푸렸다.“조 교수님은요? 술 안 마셨어요?”“아니.” 임정식은 손을 흔들었다.“그렇게 확신하세요?”“바로 내 옆에 앉았으니까. 그럼 나도 당연히 재석이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그런데 왜 옆에 술잔이 놓여 있었는데요? 안에 소주까지 따랐잖아요?”“소주? 난 재석이 사이다 따르는 것을 보았는데.”‘그래, 조 교수! 또 날 당하게 만들다니.’곧 기사가 차를 몰고 왔고, 현빈은 차를 타고 떠났다.창밖의 경치를 보면서 현빈은 턱을 매만졌다.‘정은이 집 근처에 집 하나 사야 되나? 다음에 또 이런 상황 생기면, 나도 조 교수처럼 핑계를 댈 수 있잖아!’그러나 이 생각도 잠시, 현빈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토끼가 무서워해. 겁을 먹으면 숨을 것이고, 다시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할 거야. 강도겸이 바로 그 예지. 그러니 난 같은 잘못을 범해서는 안 돼. 하지만... 조재석 그 자식 정말!’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별이 밤하늘을 꾸미기 시작했고, 귓가에서 울리던 도시 소음도 조금 사라진 것 같다.평일의 일정에 따라 기사는 현빈을 본가로 데려다 주어야 했다. 그러나 현빈은 갑자기
그리고 10살 된 서준의 사진이었다.“이렇게 뚱뚱했어?!” 정은은 놀라서 외쳤다.사진 속의 서준은 어릴 때처럼 귀엽지 않았는데, 마치 작은 곰처럼 뚱뚱해졌다.그렇다, 뚱뚱할 뿐만 아니라 엄청 까맸다.눈은 볼살에 의해 실눈으로 변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마침 여름이었는데, 상반신은 셔츠, 하반신은 반바지를 입고 있어 웅장하고 건장한 사지를 드러냈다.정은은 기침을 하며 엄숙하게 현빈을 제지했다.“보지 마요. 남의 프라이버시를 훔쳐보는 것은 좋지 않잖아요.”“너도 봤잖아?”“난 고의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지금 더 이상 보지 않았어요.”“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여기에 놓은 거 아니야? 아! 이 뚱뚱한 아이가 서준이었구나?! 어쩜 이렇게 부풀어 오른 풍선과 똑같니?”“정말 못됐어요.”현빈은 맞받아쳤다.“너도 마찬가지야. 지금 왜 활짝 웃고 있는데?” 정은은 재빨리 입술을 오므렸지만 여전히 참지 못했다.평소에 그렇게 관리를 잘하고, 탄산음료를 일절 건드리지 않는 서준이 뜻밖에도 이런 쓰라린 기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정은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어쩐지 몸매 관리에 그렇게 열중하더라니. 어릴 적 뚱보로 고생을 한 적이 있었구나.’현빈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괴로워하는 정은을 보고,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이때, 재석의 담담한 목소리가 두 사람 뒤에서 울려 퍼졌다.“무슨 일이 그렇게 웃겨요?” 정은은 웃음을 뚝 그쳤다.“선, 선배님이 여기 왜 왔어요?”현빈은 고개를 돌려 재석을 보았다.재석은 담담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다, 정은이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무슨 재밌는 일이길래 그래? 나에게 말해줄 수 있어?”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현빈이 먼저 말했다.“죄송하지만 이건 우리 사이의 비밀이에요.”그러나 재석은 아예 현빈을 보지 않았고, 시선은 오직 정은에게 떨어졌다.“그래?”정은은 즉시 눈을 부라렸다.“비밀은 무슨. 말도 참 이상하게 하네요... 선배님, 이것 좀 봐요.”재석은 여유
현빈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재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정식 형, 취하신 거 아니에요? 지금 아직 학생이니, 학업에 몰두해야지, 이런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면 안 되죠. 그러다 소문이 나면 누구에게도 안 좋잖아요.”임정식은 잠시 멈칫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 좀 봐, 술을 좀 마셨다고 말이 많아졌군... 맞아, 학생은 공부에 전념해야지. 다른 일들은 나중에 얘기하자!”말을 마치고 다른 손님과 인사하러 갔다.재석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앞을 쳐다보았다.“방금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요.”현빈은 웃으며 대답했다.“왜요? 교수님께서 무슨 의견이라도 있으세요?”“이 세상에 자신의 아이가 부족하다는 것을 듣고 싶어 하는 부모님은 없을 거예요. 심 대표님은 당연히 거리낌이 없겠지만, 다음에 입을 열기 전에 남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부터 먼저 생각해봐요.”현빈은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정은이를 위해 고려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세요?”“아니라고 할 건가요?” 재석은 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직시했다.“심 대표님은 똑똑한 사람이니, 내가 굳이 안 밝혀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은데.”“세심하고 다정한 척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교수님만 정은을 관심하는 것이 아니니까. 전 교수님보다 더 신경을 쓰고 있어요.”“좋아요, 신경 쓰는 이상 정은이를 위험에 빠뜨리지 마요.”“위험이라고요? 한 마디 말에 불과한데, 굳이 이렇게 겁을 먹으실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은 말 한마디에 불과하지만 내일은요? 제멋대로 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다른 일을 해도 남의 사정을 신경 쓰지 않아요.”“정식 형은 마음이 넓어서 이대로 넘어가겠지만, 다른 가문이나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면 정은이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현빈은 표정이 굳어지자 눈빛이 어두워졌다.“정말 정은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면을 고려해야죠.”말을 마치고 재석은 성큼성큼 떠났다....케이크를 먹은 정은은 손에 크림이 묻었다. 이미 휴지로 닦았지만 여전히 끈적끈적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