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정은 멈칫하더니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오빠!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우리가 오는 게 반갑지 않으면 지금 당장 돌아갈게요!”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또 말했다.“그리고 여기가 오빠 혼자 사는 집도 아니잖아요? 우린 외할아버지랑 외삼촌, 숙모님을 뵈러 왔어요! 오빠 만나러 온 게 아니라고요! 그래도 반갑다고 문앞까지 나와서 기다렸는데!”서준명은 흠칫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실수했네.”그러자 고소정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상은이가 외삼촌은 어떻게 생겼냐면서 친구 아빠들보다 더 잘생기지 않았냐고 기대해서… 그래서 같이 마중 나온 건데….”서준명은 그제야 고소정의 손을 잡고 선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고개를 들고 서준명을 바라보더니 울먹이며 말했다.“외삼촌….”서준명은 가슴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그는 자세를 숙여 아이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너 몇 살이니?”“외삼촌, 저 올해 여섯 살이에요. 고상은이라고 해요. 저번 주에 한 번 왔었는데 외삼촌이랑 증조외할아버지를 못 만나서 서운했어요. 선물도 준비해 왔는데….”서준명은 깊은 죄책감을 느끼며 아이에게 물었다.“그랬어? 그 선물 아직도 유효해?”“그럼요.”“외삼촌이 한 번 봐도 될까?”“네!”아이는 흔쾌히 대답하고는 서준명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을 열었다.그러던 아이가 갑자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그래, 아가?”서준명이 물었다.“사탕이 못 생겨졌어요….”고상은은 형태가 약간 변형된 사탕을 서준명에게 건네며 말했다.일주일이나 가방 속에 있었던 사탕은 이미 녹아서 구깃구깃해진 상태였다.하지만 그 사탕에는 ‘할아버지 행복하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그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고소정에게 고개를 돌렸다.“그게… 미안해. 내가 밖에서 좀 힘든 일이 있어서 실수했네.”“괜찮아요, 오빠. 우린 가족이잖아요. 스트레스 받는 일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요! 밖에서 모르는
고소정이 20대 중반이라는 걸 미리 알지 않았더라면 눈앞의 여자를 고작 40대 초반으로 생각했을 것이다.여자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온몸에서 흐르는 귀티를 보니 전혀 생활고를 겪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서는 알 수 없는 우월감이 넘치고 있었고 이로 보아 해외에서 전혀 고생하지 않은 티가 났다.서준명은 자신의 고모가 떠올랐다.서진희 역시 서씨 가문의 핏줄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차별과 모욕을 받으며 이 집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태어났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고 음악을 사랑했지만 돈이 없어 공부를 포기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오랜 방랑 생활을 했다.두 여자는 다 남자를 잘못 만났지만 서진희는 눈앞의 이 여자처럼 운이 좋지 않았다.눈앞의 중년 여자는 남자를 잘못 만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녀의 뒤에는 강대한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해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해외에서 편안하게 살았다.하지만 서진희는 달랐다.쫓기듯 먼 시골로 가서 남편과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지만 사람들의 괴롭힘을 당했고 감금까지 당했다.사랑하는 딸에게 행복한 생활을 줄 수 없을 것 같아 딸을 남편에게 보내고 스스로 방랑 생활을 선택했다.극심한 차이 때문에 서준명은 꺼졌던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그는 약간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네.”그러고는 고가령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준명아, 이분도 네 고모야. 아빠의 사촌 여동생이고.”아버지는 그에게 태도를 주의하라고 경고하듯 말했다.서준명은 약간 딱딱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안녕하세요.”고가령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준명에게 말했다.“준명이는 고모가 낯설지? 고모는 어릴 때부터 네 아빠랑 친남매처럼 같이 자랐어. 네 아빠가 날 엄청 아꼈거든. 집에 맛있는 거 있으면 전부 나한테 줬을 정도니까.”이런 말을 하는 고가령의 얼굴에는 어느새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었다.태어나서부터 귀하게 자란 사람만 가지는 우월감.서준명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준명아, 고모는 어릴 때부터 여
고가령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친구가 참 많았는데 어떤 친구를 말하는 거야?”“초등학교 친구도 많고 대학교에도 많았어. 애들이 나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다가오다 보니… 누굴 말하는 거지?”서준명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고모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서요!”“그랬구나. 사실 어릴 때는 고민이 별로 없었어. 주변에서 알아서 다 해줬거든.”고가령은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듯 감상에 젖었다.서준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먹을 불끈 쥐는 것으로 분노를 참았다.고개를 들자 아버지의 애원하는 듯한 눈빛이 보였다.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누가 뭐래도 아버지에게는 사촌여동생이었다.서준명은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집어삼켰다.다행히 고가령도 계속 떠들지는 않았다.서준명이 불쾌해 한다는 것을 눈치챈 걸까?아니면 이 집에서 자신이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던 걸까?고가령은 점심도 먹지 않고 작별인사를 했다.그들을 문밖까지 바래다준 서준명은 불쾌한 얼굴로 부모님에게 말했다.“두 분이 응대할 수 있었잖아요. 꼭 저를 불러야만 했나요?”“고모랑 오붓하게 만두나 먹으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나요?”아들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의 어머니는 다급히 다가와서 아들을 위로했다.“준명아, 너를 집으로 부를 생각은 없었어. 소정이가 너 꼭 보고 싶다고 전화한 거야. 우리도 저 사람들을 일주일이나 피했어. 계속 피할 수는 없는 거잖아?”부친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사실 가령 고모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어릴 때 우리 집에서 같이 자란 것도 사실이고. 네 할머니가 딸을 잃고 힘들어할 때 가령 고모가 옆에서 기쁨을 줬어.”서준명은 그런 말을 듣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죄송해요, 아버지.”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고소정이었다. 서준명은 보자마자 짜증이 치밀었다. 핸드폰을 부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어머니가 옆에서 그를 달랬다.“전화 받
전화를 끊은 고가령은 그 뒤에도 한참 흐느꼈다.차에서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고소정이 말했다.“엄마! 서준명이 우리한테 하는 거 못 봤어? 그리고 할아버지도! 엄마는 할아버지 그립다며 찾아왔는데 그분은 엄마한테 어떻게 했어? 그게 어떻게 오랜만에 딸을 본 아버지의 태도야!”고가령은 미간을 찌푸리고 딸을 잠시 쏘아보다가 말했다.“넌 아직 너무 어려! 세상 살아가는 법을 그렇게 몰라서야. 그렇게 해야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하지!”고소정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이 엄마가 누구야? 난 그냥 네 이모할머니의 조카딸일 뿐이야. 고씨라고! 서씨가 아니라.”“저 집에서 나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은 내 이모, 그러니까 네 이모할머니뿐이야. 그런데 그분은 돌아가신 지 오래됐잖아. 그 집 사람들은 우리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당연해.”고소정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엄마에게 쏘아붙였다.“그러니까 싫어하는데 왜 그렇게 빌빌대야 하는 거냐고!”“그러지 않으면 우린 뭘 먹고 살아? 거리에서 방랑 생활이라도 할 거야?”고소정은 할 말을 잃었다.“엄마가 들고 있는 명품백, 그리고 옷들, 네가 들고 다니는 백과 옷, 네 직장과 신분 모두 저 집에서 준 거야. 어떻게든 저 가문의 배경을 이용해서 괜찮은 남자를 만나야지. 엄마는 네가 엄마처럼 사는 거 절대 못 봐! 알겠어?”고소정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알았어, 엄마.”고가령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엄마는 외국 남자를 선택해서 이렇게 된 거야. 그때는 국내에 나랑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평생을 망쳤어.”“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해외에서 무시당하며 사는 바에야 남성으로 돌아오는 게 낫겠더라고.”“남성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 서씨 가문이라는 배경만 있으면 남성에서 어떤 남자든 네 남자로 만들 수 있어!”“난 너한테 미모를 줬고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학력까지 줬어.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는 도도하고 자신감 넘쳐야 한다고 가르쳤지. 서씨 가문에서 우리
서준명이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역시 세희는 똑똑하구나. 네 눈을 속일 수 없겠어.”“난 괜찮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도 친척이잖아요. 친척이 친척을 보러 오는데 뭐라 할 수는 없죠. 게다가 우리 엄마랑은 상관없는 일이고요.”잠시 숨을 고른 신세희는 간절한 눈빛으로 서준명에게 물었다.“오빠, 이 일을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줄 수 있어요?”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엄마가 그 집 사람들을 가족으로 인정하기는 싫어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던 안 좋은 기억이 있잖아요. 그냥 먼 친척집 딸이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걸 보고 어떤 심정이었겠어요? 친딸인 자신은 항상 외면당했는데….”“나도 알아.”서준명이 말했다.“고모가 많이 상처받은 거 알아. 나한테도 고모는 한 명뿐이야. 내 고모는 네 엄마야. 네 엄마한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을 생각이야.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만나달라고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고마워요, 준명 오빠.”“이제 만두 먹으러 가자.”그날 식사는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마쳤다.식사가 끝나고 오후에는 가볍게 산책을 했다. 아이는 외할머니의 안방에서 낮잠을 잤고 서준명은 정원을 정돈한다며 잡초를 뽑았다. 부소경은 사람을 불러 장모님의 피아노를 다시 세팅했다.신세희는 엄마의 춤 연습을 도왔다.그렇게 오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저녁식사는 여전이 이곳에서 먹었다.하지만 서진희가 피곤할 것을 고려해 신세희 부부는 저녁만 먹고 작별인사를 했다.물론 서준명도 함께였다.대문을 나선 신세희는 서준명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준명 오빠, 엄마를 자주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엄마도 자식이 둘이나 생긴 것 같다며 좋아하셨어요.”“걱정하지 마. 난 끝까지 고모를 돌볼 거야.”“오빠가 좋은 사람인 건 알아요. 선희 씨는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게요. 오빠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희 씨를 위해서요.”서준명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고마워.”“조심히 들어가요.”“그래,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윤희 언니도 그렇게 생각할까?“그 여자가 자처한 거잖아요.”신세희가 말했다.“물론이지!”서준명도 웃음을 터뜨렸다.“나도 나중에 알았어. 그 여자 해외로 돌아다니면서 구경민 대표 돈을 펑펑 써댔다면서? 그러면서 태도는 어찌나 거만했는지. 몇 년을 떠나 있었으면서 돌아오면 자기 자리는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나? 사람을 바보로 아나 봐. 이제 자기 잘못을 알았으니 울어야지.”신세희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속으로 묵묵히 고윤희를 위해 기도했다.‘언니, 잘 살아 있어줘요. 꼭 그래야 해요. 구경민은 평생을 두고 언니한테 속죄하며 살아야 할 거예요. 돌아오면 언니를 여왕처럼 모시겠죠! 언니 괴롭히던 사람들 꼭 밟아줘요!’깊은 밤, 신세희는 꿈에서도 고윤희 걱정을 했다.“임신한 몸으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소경은 가슴이 아팠다.그녀가 이렇게까지 고윤희를 걱정하는 이유가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고윤희가 지금 겪는 일들이 너무 비슷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임신한 몸으로 방랑 생활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걸 알기에 그녀는 이렇듯 고윤희를 걱정하고 있었다.신세희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부소경은 그 느낌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그는 아내를 품에 꼭 안고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남편의 품에 안긴 신세희는 다시 악몽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었다.월요일.신세희는 활력이 넘쳤다.유리를 유치원에 데려가는 길, 그녀는 고소정과 또 마주쳤다.물론 이제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고소정은 자신의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그녀는 엄마의 성을 따랐고 그건 그의 딸 고상은도 마찬가지였다.고소정을 본 신세희는 싱긋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체했다.하지만 고소정은 여전히 일관된 차가운 얼굴이었다.마치 넌 부자고 나는 독립적이고 자존심 강한 사람이니 너 같은 사람이랑 상종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신세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남편과 오래 함께하면서 그의 침착하고
신세희는 흥분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언니… 윤희 언니…. 언니 맞죠?”수화기 너머로 온화한 고윤희의 목소리가 전해졌다.“세희 씨, 그냥 이 말 전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빌려준 돈 2년 좀 지나야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신세희는 즉시 눈물을 흘렸다.“그런 말 하지 마요. 언니….”방랑 생활을 할 때도 이렇게 울어본 적 없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아이를 임신하고 지방에서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사는 느낌이 어떤 건지 신세희는 알고 있었다.그건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나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어요.”고윤희가 오히려 신세희를 위로했다.“언니… 돌아와요. 내가 언니를 보살필게요.”고윤희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세희 씨, 난 잘 지내고 있어요. 평화롭고 평범하게….”고윤희의 말은 사실이었다.최소한 살 곳은 해결했다.그녀와 한진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한진수 소유의 시골 땅에서 거처를 마련했다.주광수가 그들을 놓아준 뒤로 두 사람은 택시를 갈아타며 50만원이라는 큰 돈을 들여 힘겹게 고향에 도착했다.한진수의 고향은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마을이었다.그들의 집은 산기슭에 위치한 헌 기와집에다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었다.다행히 집 안에 쓰던 이불이 남아 있었다.집으로 돌아온 첫날, 고윤희는 이불을 깨끗이 빨아 햇빛에 말렸다. 한진수는 집 안팍을 깨끗이 청소했다.하루 사이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처가 마련되었다.그날 밤, 고윤희는 한진수 어머니 옆을 지켰고 한진수는 산을 올라갔다.날이 거의 밝을 때쯤, 한진수는 꿩 두 마리를 잡아 집으로 돌아왔다.그들은 아침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팔아서 10만원 정도를 마련했다.한진수는 그 돈으로 쌀 20kg와 밀가루, 기름, 야채를 샀다.그날 그들은 드디어 따뜻한 밥과 채소, 그리고 한진수 어머니가 직접 만든 만두를 먹을 수 있었다.밥을 먹으며 고윤희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윤희 씨, 친구한테 빌린 돈으로 농기구를 장만할까 하는데… 어떻게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한진수는 뒷산의 공터에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심었다. 모든 일을 끝낸 뒤, 그는 읍내에 일을 찾으러 갔다.“윤희 씨는 집에서 푹 쉬어요. 너무 심심하면 엄마랑 같이 밖에서 산책 좀 해도 괜찮아요. 산밖에 없는 시골이라 남성 같은 대도시에 비교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한 달이 지나도 사람 하나 찾아보기 힘든 곳이니까요.”떠나기 전, 한진수가 고윤희에게 한 말이었다.고윤희는 한진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진수 씨, 나는 고독이 두렵지 않아요.”한진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과거에 빛도 안 들어오는 방에 갇힌 적 있어요. 그렇게 몇 년을 갇혀 살았죠. 외로움에는 이미 적응됐어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신과 같이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어요. 저녁에 퇴근할 때, 당신과 같이 집에 돌아오면 좋겠어요. 나는 배속의 아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고윤희는 간절한 눈빛으로 한진수를 바라보았다.한진수는 여자의 이런 갈망을 이해했다.많은 일을 겪고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자신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임신한 몸으로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진수는 그녀의 결정에 동의했다.“좋아요. 그럼 같이 읍내로 가요.”“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요.”고윤희가 말했다.“무슨 일이요? 옷을 사고 싶으면 같이 사러 가요.”고윤희는 고개를 저었다.“세희 씨한테 돈을 빌렸으니 전화라도 한 통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난 진수 씨와 평생 살기로 했으니 어떤 부담도 끼치기 실어요. 세희 씨한테 그쪽 일을 좀 해결해 달라고 부탁할 거예요.”한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렇게 하루가 지난 뒤, 고윤희는 신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세희 씨, 나는 지금이 정말 좋아요.”고윤희가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언니, 걱정하지 마요. 언제든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요.”신세희가 다급히 말했지만 고윤희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우린 두 사람이에요. 손도 있고 발도 있어요. 평소에 돈을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