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아, 나 먼저 간다? 다음에 또 너랑 우빈이 보러 올게.”김은희는 한마디 던지고는 도망치듯 떠났다.주우빈을 안은 하예정은 문밖으로 따라나가 김은희가 택시에 앉아 떠나는 것을 보며 말했다.“예전에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우빈이를 보러 오지도 않더니 지금 와서 무슨 좋은 할머니 행세를 하는 거야?”그녀는 김은희가 떠나기 전에 주우빈에게 준 장난감 차를 손에 들고 아이에게 물었다.“우빈아, 이 차가 마음에 들어?”“아니, 싫어요. 나에겐 장난감 차가 많아요. 진짜 자동차처럼 달릴 수도 있는걸요.”주우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할머니가 사준 장난감 차는 달릴 수도 없는 장난감이었다.“그럼 버리는 게 어때?”“아니요, 정한 형한테 줄래요.”주우빈는 이 장난감 차를 정한 형에게 주면 그가 다시는 자기의 장난감을 빼앗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우빈아, 앞으로 형은 네 장난감을 뺏지 못할 거야, 네가 버리기 아까우면 다른 친구들한테 줘도 돼. 하지만 임정한한테는 주지 마.”“그럼, 가희 누나한테 줄래요.”조카를 안고 가게로 돌아온 하예정이 언니에게 물었다.“언니, 가희가 누구야? 우빈이가 이 차를 가희 누나한테 주겠대.”“우빈이와 잘 노는 옆집 막내딸이야.”우빈이가 선물 받은 장난감 차를 누구에게 주든지 하예진은 상관하지 않았고 그저 자기 아들의 결정에 맡겼다.주우빈은 집에 장난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를 워낙 예뻐하는 성소현은 올 때마다 장난감을 가득 사다 주곤 한다.하예진은 모두의 이쁨을 받는 주우빈이 혹시나 나쁜 버릇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더 엄하게 다스리고 있다.“언니, 그 늙은이가 뭐 하러 온 거야?”하예정은 김은희가 한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이에 하예진은 웃으며 비꼬았다.“우빈이 보러 왔겠어? 서현주가 결혼 예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보석 장신구도 세 개나 사달라고 하고, 이것저것 사는 데 돈이 많이 든다고 흉보러 온 거야. 꼴 보기 좋아, 서씨네가 그 집안의 재산을 다 털어버렸으면 좋
“언니가 지금 재혼을 생각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언니도 아직 젊은데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아?”“왜 안 되는데? 난 지금이 아주 좋아. 남자를 시중들 필요도 없고, 고부갈등도 신경 쓸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얼마나 자유로운데.”자유를 되찾은 후에야 하예진은 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시집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예정아, 걱정하지 말아. 언닌 지금이 정말 좋아. 넌 지금의 내가 이혼 전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이지 않아?”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래. 난 그저 언니가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어.”“당연하지. 그러니 언니 앞에서 다신 재혼 얘기 꺼내지 마. 이제 막 고생에서 벗어났는데... 하지만 넌 결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너의 결혼은 언니와 달라. 태윤 씨는 매우 믿음직해 보여.”앞으로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태윤 씨는 출근한 거야?”“응.”“날씨도 추운데 태윤 씨보고 옷을 많이 입으라고 일깨워 줘. 몸이 가장 중요하니 일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 말고 말이야.”“애도 아닌데 혼자 알아서 잘 쟁기겠지 뭐. 이번 감기는 면역력이 떨어져서 걸린 것 같아, 매년 이맘때면 감기가 유행되잖아.”하예정은 전태윤이 감기에 걸린 이유가 그녀 때문에 냉수욕했기 때문은 아닌지 장담할 수 없었다.“언니, 우빈이를 업고 어디 가려고? 나하고 숙희 아주머니가 우빈이를 볼 테니 여기 두고 가. 아니면 내가 데려다줄까?”“지금 가게에 할 일이 없어 장 보러 가려고. 고추, 마늘, 생강, 그리고 콩 좀 사서 고추장을 만들어뒀다가 이제 영업하면 쓰려고해. 그리고 장아찌도 다른 사람이 절인 걸 사서 쓸지, 아니면 내가 직접 담글지 고민 중이야.”하예정은 언니를 도와 우빈이를 등에 업혀주었다.“직접 담그는 건 번거로우니 그냥 사, 하지만 다른 사람이 절인 것을 사면 원가가 좀 높아질 텐데... 아침 식사는 낮은 이윤에 많이 파는 거니 원가를 낮출 수 있으면 낮추는
“로얄 팰리스에 태윤 씨 명의로 된 앞뒤 마당이 딸린 크고 경치도 엄청 좋은 빌라가 하나 있는데 내가 찾아보니 그곳의 별장은 적어도 20억은 넘는 거야. 태윤 씨 말로는 자기 연봉이 수억이 되는데 평소에 큰돈을 쓰지 않고 모아서 주택구매용 대출로 산 거래.”“주택구매용 대출이 얼마나 된대?”“물어보지 않았어. 태윤 씨 집이니 대출이 얼마 되든지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이제 혹시 태윤 씨와 갈라지게 되더라도, 집 가지고 다투지 않을 거야.”“너 이런 소리 하지 마. 너와 태윤 씨는 이제 시작인데 잘 지내봐, 언니처럼 살지 말고.”하예진은 동생한테서 더 이상 이런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비록 결혼에 실패했지만, 동생과 전태윤은 백년해로하기를 바랐다.“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맞아, 그건 태윤 씨의 집이니 우린 욕심내면 안 되는 거야. 너희 이 일 때문에 다투고 그러지는 않았지?”여기까지 들은 숙희 아주머니는 도련님이 아직 겁을 먹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단지 사모님에게 그의 명의로 된 별장이 있다는 것만 밝히고는 또 다른 거짓말로 사모님을 속이고 있는데, 숙희 아주머니는 이런 도련님이 걱정됐다.평소에 무슨 일에서나 겁먹은 적 없는 전태윤이 하예정한테만은 대담하게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신분을 털어놓지 못하고 있으니 웬 영문일까?숙희 아주머니는 전태윤이 이 일에서 너무 겁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하예정 자매 앞에서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그땐 나를 믿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났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별일 아니었어. 별장이 있으니 나보고 거기 가서 살라고 하면 살면 되고, 살지 말라면 안 살면 그만이지 뭐. 이 일로 말썽을 부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게다가 지금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 것은 날 완전히 믿고 있다는 뜻 아니야?”전태윤의 수입으로 보면, 그가 주택구매용 대출로 별장을 살 만했다.하예진은 전태윤이 자기 동생을 믿지 않은 점을 억울하게 생각했지만, 동생이 신경 쓰지 않자 이렇게 말했다.“맞아, 생각을 바꾸면
“제부 출장 다녀왔으니 언제 시간 나면 제부랑 함께 이모네 댁으로 다녀와.”하예진이 화제를 돌렸다.전태윤이 재벌 전씨 일가와 연관이 있는지 그녀는 구분할 수 없다. 다만 이모 이경혜는 전씨 일가의 도련님들을 분명 만나봤을 테니 동생이 제부를 데리고 이모네 댁으로 다녀오면 된다.그렇게 되면 전태윤이 하예정에게 아직 숨긴 게 더 남아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숙희 아주머니는 옆에서 들으며 저녁에 집에 돌아가 도련님에게 꼭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도련님더러 하루빨리 사모님께 솔직하게 고백하라고 다그쳐야 할 듯싶었다.“태윤 씨 설 연휴 지나야 시간이 난대. 요즘 줄곧 바빠. 또 곧 회사 송년회이기도 하고.”“제부네 회사 송년회에 가족들도 참여할 수 있어? 제부가 너랑 함께 가자고 하진 않았어?”하예정은 회사에 다녀본 적 없지만 하예진은 잘 알고 있다. 전태윤이 만약 하예정을 전씨 그룹 연말 송년회에 데려간다면 그는 갑부 전씨 일가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하예진도 모든 의심을 내려놓을 것이다.“맞아, 초대장 가져와서 나 주겠대. 그때 가서 나도 함께 회사 송년회에 참가하래.”동생의 말을 들은 하예진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았다.회사 송년회에 대표님이 무조건 얼굴을 내비친다. 지금 전씨 그룹을 책임진 갑부 전씨 도련님이자 성소현이 수년간 짝사랑했던 그 남자가 틀림없이 등장한다. 일단 전씨 도련님이 얼굴만 내비치면 하예정도 전태윤이 갑부 전씨 도련님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하예정은 전태윤의 남동생들을 전부 만났었다.지난번 주형인 가족이 우빈이를 뺏어갔을 때 전태윤의 남동생들이 총출동하여 큰 도움을 줬다.만약 전태윤이 회사 송년회에도 하예정을 데려간다면 본인 신분을 아내에게 숨기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하예정은 시계를 바라보며 언니에게 말했다.“언니, 나 점심 언니네 집에서 먹을게. 지금은 일단 전씨 그룹에 가서 태윤 씨 퇴근하길 기다려야겠어.”그녀는 이젠 가게를 돌볼 필요가 없어 종일 전태윤과
하예정은 성소현이 전씨 도련님을 향한 감정을 한꺼번에 내려놓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성소현은 다시 전씨 도련님을 찾아가 집착한 지도 오래됐다. 지금 여기 있는 건 아마도 몰래 도련님을 보고 싶어서겠지.가질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전에 여기서 밀크티 몇 번 마셨는데 디저트랑 밀크티 다 괜찮아서 다시 맛보려고 왔어. 옛날 그 맛이랑 똑같아.”성소현이 제법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마치 진짜 밀크티를 마시기 위해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전에 여기서 밀크티를 마시긴 했었다. 그땐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밀크티가 달콤했겠지.지금은 더이상 기다릴 사람이 없어 밀크티도 맛이 별로였다.“제부 퇴근 마중 왔어? 출장도 다녀왔는데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인사 와야지!”“아마 구정이 지나서야 될 것 같아요. 요즘 하도 바빠서 시간을 빼낼 수가 없어요.”성소현이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들어가서 밀크티 한잔할래?”“저는 괜찮아요. 밀크티 마시면 집에 돌아가서 밥을 못 먹어요. 그럼 우리 언니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낭비한다고 잔소리할 거예요.”성소현이 웃으며 답했다.“예진 언니 지금 잘 있지? 엄마가 언니랑 너랑 도와주려고 했는데 전부 거절했다며? 우리 엄마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고만 계셔.”하예진 자매는 아무리 가난해도 남에게 절대 손 내밀지 않는다.“나랑 울 언니는 아직 젊고 사지도 멀쩡해서 충분히 제 밥벌이는 할 수 있으니까 이모도 우리를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오히려 주현 오빠랑 소현 언니의 인생이 걸린 결혼이 가장 큰 문제이죠.”성소현이 가볍게 웃었다.“주현 오빠는 능구렁이 같아서 본인이 일찍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못 말려. 나도 알다시피 짧은 시간 내에 벗어날 순 없어.”“언니는 충분히 더 멋진 사람을 만날 거예요.”성소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두 자매는 서로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성기현은 전에 하예정더러 성소현 앞에서 전태윤의 성씨도
성소현은 악셀을 꾹 밟았다. 원래 예준하의 뒤에 있던 그녀는 신속하게 그들 차를 추월했다.하지만 뜻밖에도 2분을 못 넘기고 그녀의 차가 고장 나버렸다.타이어에 바람이 새는 탓에 성소현은 어쩔 수 없이 급히 길가에 멈춰 세우고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점검했다.멀쩡한 차가 왜 바람이 샌 걸까?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뒤에 따돌렸던 예준하가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예준하의 기사도 저번에 그녀에게 길을 내준 덕에 성소현이 아주 인상 깊었다.“차 세워.”예준하가 기사에게 멈추라고 말했다.기사는 재빨리 길옆에 차를 세웠는데 마침 성소현의 차 옆에 주차했다.예준하가 기사에게 분부했다.“성소현 씨한테 무슨 일인지 물어봐봐.”성소현은 아마도 전태윤 때문에 이곳에 나타난 듯싶었다.예준하는 관성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그녀가 전태윤을 좋아하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 전태윤이 업계에 본인 기혼 사실을 알린 이후로 성소현도 오랫동안 그를 찾아와 집착하지 않았다.그러던 중 오늘 만나게 됐다.‘태윤 씨는 우리 형처럼 유부남이 돼도 여자들이 놔주질 않네.’예준하가 생각했다.기사는 분부대로 차에서 내려 성소현에게 다가가 물었다.“차 고장 났어요?”“타이어에 바람이 샜어요. 날카로운 사물에 찔린 것 같아요.”성소현은 바람이 새는 타이어 앞에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타이어에 날카로운 사물이 꽂혀 있었다.“많이 새었나요?”“타이어가 점점 납작해지니 많이 새어나가고 있겠죠.”성소현은 타이어에 꽂힌 날카로운 사물을 뽑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선 사람을 불러 차를 끌어가게 했다. 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예준하의 차 앞에 도착해 가볍게 도어를 두드렸다.예준하가 도어의 커튼을 걷고 성소현을 보더니 차에서 내렸다.성소현은 낯선 이의 얼굴에 흠칫 놀랐다.‘뭐야? 나랑 친분 있는 업계 쪽 사람이 아니잖아. 어쩐지, 차가 낯설더라니.’“성소현 씨,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있나요?”예준하가 친절하게 물었다.“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제 차 타이어가
들은 바로 예진 그룹과 전씨 그룹은 깊이 협력하고 있고 예진 그룹의 관성 계열사를 예준하가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준하가 전씨 그룹에서 나온 것이다.“예준하 씨.”성소현은 성씨 일가의 딸이라 A시의 예진 그룹에 대해 진작 들은 적이 있다. 예진 그룹은 전씨 그룹처럼 수조 원 자산의 대기업에 속하고 두 집안 모두 각자의 도시에서 갑부에 속한다.가장 부러운 것은 예씨 일가의 가풍이 전씨 일가처럼 아주 화목하여 온 가족이 화기애애하게 지낸다.성소현의 엄마는 전씨 일가가 갑부가 되고 재벌 1위를 오랜 시간 차지한 이유는 바로 가풍이 훌륭하고 자손들 교육이 현명하기 때문이라고 딸에게 자주 얘기했었다. 사소한 이익 때문에 형제가 서로 등지는 일이 없다. 그들 형제는 우애가 깊고 심지어 다들 가업을 물려받고 싶지 않아 한다.전태윤은 장손이자 직계 손주라 태어날 때부터 상속자로 정해져 하는 수 없이 어깨에 짐을 짊어졌다.그의 동생 중 일부분은 비즈니스 업계에 뛰어들어 전태윤을 도와주고 있고 또 일부는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에 종사하며 각자 제 분야에서 정점을 찍었다.“소현 씨, 제가 목적지로 바래다 드릴까요?”예준하가 다정하게 물었다. 그는 한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성소현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의 친절함에 성소현도 저도 몰래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졌다.“고맙지만 성의만 받을게요. 저희 기사님이 데리러 올 거예요.”그녀는 사실 이토록 강렬한 포스를 내뿜는 자가 누군지 알고 싶어 여기까지 따라왔다. 예준하인 걸 알게 됐고 타이어도 바람이 새니 더는 따라갈 필요가 없다.“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성소현이 머리를 끄덕였다.“네, 일 보세요, 예준하 씨. 저도 이따가 기사님이 도착하실 거예요.”예준하는 웃으며 몇 마디 인사치레를 나누고는 차에 돌아갔다. 예준하는 또다시 그녀에게 손 인사를 건네고 도어의 커튼을 내린 후 자리를 떠났다. 몇 분도 채 안 돼 예준하의 차량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한편 하예정은 전씨 그룹 문 앞에서 줄곧 전태윤을
하예정은 그의 볼을 두 번 더 꼬집고는 바로 손을 거둬들였다. 전태윤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내가 머리까지 숙였는데 키스 안 해줄 거야?”하예정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밖이에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요.”버블티 가게에 손님들이 꽤 많았다.하예정은 말만 거침없이 할 뿐 실전에는 겁쟁이나 다름없다.전태윤이 눈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그럼 내가 키스해줄까?”하예정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 가까이 다가와 빨간 입술에 키스했다.다만 딥 키스는 아니고 가볍게 입 맞춘 후 바로 놓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얼른 가서 밥 먹자. 처형 오래 기다리시겠어.”전태윤은 하예정의 손을 잡고 그녀의 차 쪽으로 걸어가 차 키를 가져오며 말했다.“내가 운전할게.”하예정도 아무 의견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운전할 줄 알기에 누가 하던 다 똑같으니까.차에 올라탄 후 그녀가 질문을 건넸다.“전씨 그룹 사모님은 아직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셨어요?”전태윤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덤덤하게 차를 몰았다.“왜? 우리 대표님 부인분께 관심 있어?”“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까 여기 왔을 때 소현 언니 봤거든요. 언니가 마침 밀크티 가게에 앉아 있었는데 태윤 씨네 회사 건물을 마주하고 있더라고요. 내 생각엔 아직도 태윤 씨네 대표님을 잊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전씨 그룹에서 몇 대의 차량이 빠져나갔는데 언니도 재빨리 뒤따라갔어요. 그 차가 전씨 그룹 대표님 전용차인지 모르겠어요. 태윤 씨네 대표님은 외출할 때마다 한 무리 경호원을 거느리고 다녀서 포스가 차 넘치잖아요. 대표님 말곤 또 누가 그렇게 전용차를 타고 다니겠어요.”전태윤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온몸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내가 늦게 나오길 천만다행이야. 하마터면 소현 씨한테 예정이랑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킬 뻔했어.’예준하가 A시로 돌아가기 전에 또다시 전태윤을 보러 온 것도 참 다행이었다.
“이씨 가문을 잘 꾸려나가려면 젊은 세대에게 의존해야죠. 우리 가문의 젊은 세대들도 능력만 있으면 모두 중히 여겨야 하는 거죠. 숙모님들, 맞죠?”이씨 가문의 셋째 삼촌 이지후는 야망이 있지만 이제 분투할 정력이 없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다만 그들의 후손의 앞날일 뿐이다.하예진이 방금 한 말은 승낙한 거나 다름없다.하예진이 방금 한 말은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가 하예진 쪽으로 돌아간다면, 가문의 젊은 세대들은 능력만 있다면 모두 적당한 자리에서 빛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의미이다.하예진은 자신이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두 사모님이 눈을 마주치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씨 가문의 넷째 숙모 김연희가 입을 열었다.“맞아요. 역시 전임 가주의 후손답네요. 전임 가주가 이씨 가문을 다스릴 때 우리 이씨 가문은 강성에서 그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존재였죠.”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이씨 가문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전임 가주 이은숙이 여전히 이씨 가문을 운영했을 때 김연희와 최순자는 아직 이씨 가문으로 시집오지 않았다. 당시 그녀들의 나이는 6세에서 12세 사이였고 가문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러나 그녀들의 남편들은 어느 정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적어도 학창시절에 이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괴롭히지 못했다.그 후, 가문의 어르신들 이야기를 통해 자주 듣게 되었다.전임 가주 이은숙의 인간 됨됨이나 일 처리 방면에서는 매우 훌륭했지만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 낳은 탓으로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하루가 멀다고 병으로 앓게 되어 이은화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그리고 두 숙모분께서도 안전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씨 가문에서 떠벌리며 다니지 않는 한 강성에서의 안전은 제가 보장해 드릴 수 있어요.”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무슨 일을 하든 너무 날뛰지 않고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으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그들이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한다면 하예진이 보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감히 협력하지
몇 분 후, 방에서 하예진을 기다리고 있던 전호영은 예진이 도착하자 바로 나와서 문을 열었다.“예진 누나.”“고마워요, 호영 씨.”“우리 사이에 무슨, 천천히 얘기 나눠요, 저는 일 보러 나가볼게요.”방을 나온 전호영은 하예진을 방으로 들여보내고는 일구를 포함한 경호원들에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단단히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펜트하우스가 출입이 통제되긴 하나 경각심을 높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일구와 다른 경호원들은 전호영의 말에 깍듯이 응했고 전호영은 자리를 떴다.하예진이 방으로 들어가자 두 숙모님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들을 위한 과자와 과일들이 놓여 있었고 따뜻한 물도 준비해져 있었다.“예진 씨.”하예진이 들어오자 두 숙모는 소파에서 일어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인사했다. 하예진 라인에 서기로 했으니 두 사람은 이제 본모습을 보일 때가 된 것이다.두 분은 나이가 있는 분들이셨지만 보양을 잘한 덕분에 겉보기에는 훨씬 젊어 보였다.“두 분 앉아계세요.”하예진은 차를 내와 찻잔에 부으면서 말했다. “차를 마시면 정신도 맑아지고 좋더라고요.”“우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차를 별로 안 마셔요. 차를 마시면 저녁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셋째 숙모가 웃으면서 답했다.하예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간식을 권했지만 두 분은 사양했다.“두 분께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하예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분과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니 다룰 얘깃거리도 별로 없었다.“예진 씨가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라고 우리 그이가 그러더군요. 우리 두 집안이 기꺼이 힘을 합쳐 도와드리겠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셋째 숙모가 입을 열자 넷째 숙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속으로는 하예진 앞에서 이 가주에 대해 불평하고 싶었지만 집을 나설 때 남편이 그러지 말라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했기에 꾹 참고 있었다. 그저 두 집안의 의사를 전달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고 얘기했다.하예진은 관성의 대표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하루 호텔은 안전 레벨이 아주 높은 곳으로 그곳에 가면 숙모님들이 마음을 좀 더 내려 놓을 수가 있었다.이에 하예진도 동의를 표하였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방을 예약 해놓을게요.”그녀는 뒤돌아서서 휴대폰을 꺼내어 전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루 호텔에서 제일 안전한 방이 어느 방이에요? 누가 엿듣거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으로 빌리려고요.”전호영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그야 무조건 펜트하우스에 있는 스위트룸이죠. 지금 제가 묵고 있어요, 누나가 필요하다면 제가 빌려드릴게요.”“고마워요, 이씨네 숙모님 두 분이 먼저 가실 거예요,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서 조용히 두 분을 방까지 모셔드리도록 해줘요. 카메라에 찍히지 않게 주의해 주시고요.”전호영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안배할게요. 두 분 호텔로 이동하시게 하세요, 거의 도착할 때 저희 쪽에 연락 주시면 돼요.”그러고는 하예진에게 번호 하나를 알려주었다.“누나, 조금 있다가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돼요, 펜트하우스까지 에스코트해 줄 거예요. 저도 조금 있다가 바로 돌아갈게요.”현재 그 방은 전호영이 지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방문을 열 수가 없었기에 호영이 호텔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부탁드릴게요.”“별말씀을요.”하예진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하던 일 계속 해요, 제가 두 분께 말해놓을게요. 여기서 호텔까지 가려면 약 20분 정도 걸릴거에요. 저는 30분 뒤쯤에 도착할 것 같아요.”“알겠어요.”통화를 마친 예진은 두 숙모한테 다가가 말했다.“제가 이미 말해놓았으니 두 분께서 지금 그쪽으로 출발하시면 되세요. 거의 도착할 즈음 이 번호에 전화하시면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그분들이 두 분을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실 거예요.”하예진은 전호영이 알려주었던 번호를 셋째 숙모한테 말해주었다.“먼저 가 계시면 돼요. 저는 십 분 뒤에 바로 출발할게요.”“그래요.”두 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지체없이 바로 출발했다.
“그 분들이랑은 어떻게 되는 사이신지?”하예진이 물었다.두 사람은 자신들의 남편 정체를 말한 후 하예진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녀가 침묵하자 두 사람은 하예진이 자신의 남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서둘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넷째 숙모고 이분이 셋째에요.”하예진은 그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실 때 뒤따르는 사람이 없었나요?”“없어요, 뒤처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예진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예진은 미소를 지었다. “저야 아무 걱정이 없지만 두 분께서 저를 찾아온 일이 이 가주님의 귀에 들어가 두 분께서 불리해질까 봐 걱정이에요.”하예진은 원래부터 이씨 집안을 노리고 있었으니 이씨 가족 사람들과 접촉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오히려 아무 접촉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씨 집안 사람들이 그녀를 먼저 찾아왔다면 이 가주가 그 사실을 알고 응징할 수도 있기에 그 후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보였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예진 씨, 잠깐 따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좋아요, 저는 아무 때나 괜찮아요. 어디서 얘기할까요? 장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곧 갈게요. 함께 이동하면 눈에 뜨일 수 있으니까 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진의 말에 그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담겨 있어 두 사람은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의 남편들은 집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지냈다. 이 가주는 그들을 비롯한 직계가 아닌 가족들에게 아주 인색하고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오히려 이 가주의 억압을 받아 두각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두 가족은 몰래 모여 이틀 동안이나 상의를 했고 결국에는 하예진 라인에 서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하예진이 이길 것이라고 배팅을 한 것이다. 만약 하예진이 이긴다면 그들이 하예진을 처음부터 지지해 온 사람들로서 앞으로의 발전이 나쁘
하예진은 경계심에 차 물었다.“날 스토킹하기라도 하는 건가?”그녀는 단지 공장을 보러 왔을 뿐 오래 머물지 않을 텐데 이씨 집안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니, 그녀가 이씨 집안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곳 강성에 온 목적은 하나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이씨 집안을 장악하는 것이다.이는 큰 이모가 그녀에게 맡긴 중대한 임무였다.곧 하예진은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이씨 집안에서 아무런 경계가 없다면 더 이상한 것이었다.“내가 나가 볼게.”그녀는 아마도 이씨 집안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의 부인이겠거니 생각했다.그날,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남녀 반반이었고 예진은 일구랑 함께 참석했었기에 만찬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일구는 얼굴이 익을 것이었다.예진은 경호원과 함께 나갔다.공장 입구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차에 앉은 사람들은 내리지 않았다. 하예진이 나오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마도 남들이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하예진은 그녀들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강성 시민 중에는 그녀들을 알아볼 사람이 많았다.하예진이 다가가자 한 분이 눈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건네왔다.“예진 씨,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예진은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구신지? 얘기를 나누려면 누구신지 알아야죠”그들은 예진이랑 같이 따라 나온 사람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성분이 말을 건넸다.“혹시 이씨네 셋째 큰아버지랑 넷째 큰아버지를 기억하시나요?”그 두 사람은 이 가주랑 동년배지만 직계가 아니고 데릴사위도 아니기에 자신들의 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엄격히 말하면 셋째 큰아버지는 이 가주의 집안 동생이고 이 가주는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데릴사위를 들이기 때문에 그녀의 자식들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보, 나도 이십몇 년 간의 남매 정을 생각해서 도와준 거야. 갈 데도 없고 돈도 없는데 불쌍하잖아. 당신이 싫다면 내가 내보낼게.”정일범은 아내 조윤이 엄마한테 이를까 봐 겁이 났다.외도 사실이 들통난 후 윤정이가 오빠들을 도와줬기에 조윤은 윤정이를 무척이나 미워했다.윤정의 처지가 딱하게 된 지금, 조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더욱 심하게 굴 것이 뻔했다.하지만 조윤 탓을 할 수가 없었다. 반병 남짓 남았던 술을 아버지에게 갖다준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조윤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당장 내보내요. 이후에도 연락하지 말고요, 그 애는 당신들의 동생이 아니잖아요. 당신들의 동생은 윤미라고요. 그 애 친아빠 때문에 당신들이랑 윤미가 이십 년이나 떨어져 살았는데 당연히 그 사람들을 싫어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윤미가 그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 사람들이 윤미한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봐요. 일범씨, 당신도 딸을 가진 아빠잖아요. 우리 딸이 다른 집에 바뀌어 가서 학대를 당했다고 생각해 봐요, 어떨 거 같아요?”정일범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그는 곧 하인 부부에게 지시했다. “가서 윤정의 짐을 모두 정리해서 줘.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해, 다시는 여기에 나타나지 말고.”윤미의 둘째 형수랑 셋째 형수도 자기 남편에게 눈치를 주었다.두 남자는 와이프한테 찰싹 붙어 실실 웃어대며 낮은 목소리로 다시는 윤정이를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사과했다.윤정이는 절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이제 진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오빠들도 도와주지 않고 일전한 푼도 없는 상황에 어떡하지?이제 진짜로 친엄마한테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형편이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고 시골과 도시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어릴 적부터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그녀가 시골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클럽에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기
이윤정은 조윤을 노려보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조윤은 이윤정에게 더는 해명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이윤정에게 알려준 다음 두 동서에게 걱정스레 말했다.“가요. 우리 들어가요. 밖이 추워 죽겠어요.”조윤은 몸을 돌려 뒤따라 나오는 김숙자에게 지시했다.“앞으로 제 동의 없이 이 천한 X을 우리 별장 안에 들여보내지 마세요. 일범 씨가 다시 감히 윤정이를 여기로 끌어들인다면 우리 어머님의 노여움을 감당할 수 있는지 한 번 물어 보세요.”이윤정은 넋을 잃고 주저앉아버렸다.얼마 후 정일범 형제가 도착했다.그들은 땅바닥에 앉아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 이윤정을 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손가락 자국들로 가득했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리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진 채로 옷도 너무 얇게 입어 입술이 퍼렇게 변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정일범은 무척 가슴 아팠다.“윤정아.“세 형제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구경꾼들은 조윤이 자리를 뜨자마자 흩어졌다.물론 이윤정에 대한 소문은 곧 강성에서 널리 퍼졌다.정일범은 양복 외투를 벗어 이윤정의 몸에 걸쳐주었고 그의 두 동생은 이윤정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오빠.”이윤정은 정신을 차리더니 정일범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형수님, 형수님들이 나를 이렇게 때렸어.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내가 오빠들이 바람피울 때 오빠 편을 들었다고 지금 내가 초라해진 틈을 타서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분명 이윤미일 거야. 이윤미와 형수님들이 연합해서 나를 상대하는 거라고. 오빠, 나와 아빠는 단지 오빠가 준 술 반병을 마신 것뿐인데 그렇게... 오빠가 나와 아빠를 함정에 빠뜨릴 리가 없잖아. 그럼 분명 형수님이 우리 술에 약을 탔을 거야.”정일범은 다급하게 이윤정의 말을 끊었다.“윤정아. 이런 일은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마. 엄마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거든.”정일범도 조윤이 이윤정을 함정에 빠뜨린 사실을 알고 있다.지금 이윤정은 이
“넌 내 남편의 친동생이 아니야. 혈연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내 남편이 널 여기로 데려와 살면서도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어. 첩을 이 별장에 몰래 감춘 게 아니면 뭔데! 이 별장은 우리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사주신 신혼 별장이고 부동산 소유증 위에도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나도 알 권리가 있어. 둘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내 남편이 몰래 여기로 널 데려온 것으로 보면 너희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야?”조윤은 이윤정이 이씨 가문에서 쫓겨난 이유를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윤정에게 죄를 덮어씌웠다.이윤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억울하다고 누군가의 음모에 말려든 것이라고 울부짖을 뿐 감히 다른 말은 내뱉지 못했다.이런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이 조윤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했고 이윤정을 보는 눈빛에는 혐오와 비난이 물들게만 했다.어떤 사람들은 이씨 가문의 예전 집사였던 이윤정의 친아버지가 나쁜 심보로 딸을 바꾸는 바람에 진정한 이씨 가문의 후계자인 이윤미가 고생하고 구박받으면서 자랐다고 여겼다. 하여 그 집사의 근본적인 인성부터 나쁘다고 비난했고 따라서 이윤정도 그 집사의 핏줄을 이어받아 아무리 이씨 가문에서 자랐다고 해도 환경과 상관없이 그 유전자가 나쁘다고 수군댔다.뿌리에서부터 상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이윤정은 악랄한 표정으로 과거 그녀의 비위를 맞추던 조윤 일행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이제 만족해? 당신들은 날 무너뜨리고 싶어서 날 당신들의 계략에 빠지게 한 거지? 당신들이 진범이지?”사건이 일어난 뒤로 이윤정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약을 타서 자신을 모함한 사람이 바로 조윤 일행이라고 추측했다.정군호의 술은 정일범이 준 술이고 가져왔을 때 이미 반병밖에 남지 않았다.그럼 정일범이 아니라면 분명 조윤일 것이다.조윤은 차가운 웃음을 날렸다.“윤정아,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울어도 소리쳐도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 엄청 화나지? 얼마 전에 우리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 안
예전에는 우아하고 오만하던 이씨 가문의 후계자였던 이윤정은 지금은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강아지처럼 어디로 가나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욕만 먹었다.“윤정이는요?“조윤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뒤 정원에서 그네에 앉아 계세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저대로 한참을 앉아 계세요.”김숙자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조윤 일행은 기세등등하게 뒤 정원으로 걸어갔다.김숙자는 정일범에게 알릴지 말지 고민하다가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알렸다. 그녀의 남편도 정일범에게 알릴지 말지 고민했다.결국, 두 사람은 정일범에게 전화를 걸었다.“큰 도련님, 큰사모님께서 둘째 사모님과 셋째 사모님과 함께 여기로 와서 다짜고짜 둘째 아가씨가 여기에 머물고 계시는지 물어보셨어요. 지금은 뒤 정원으로 둘째 아가씨 찾으러 가셨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큰 도련님, 얼른 돌아오세요.”정일범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어떻게 아셨대요?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조윤은 지금 이윤정을 무척 원망하고 있어서 과거의 감정이 사라진 지 오래다. 만약 정일범이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이윤정은 아마 조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김여희와 박수아도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정일범은 두 남동생도 불러 함께 별장에 갔다.김숙자 부부는 정일범과의 통화를 마친 뒤로 밖으로 나갔는데 이윤정의 울부짖음과 욕설 소리를 들었다. 물론 욕설 퍼붓는 사람들은 조윤 일행이었다.김숙자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서둘러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대로 달려갔다.조윤 일행과 이윤정의 소리가 너무 컸는지 이웃들은 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걷다 보니 결국 정일범 별장 입구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역시 남의 가십거리를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인가 보다.이윤정이 아무리 오만하고 조윤 일행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고 해도 그녀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이윤정은 조윤에게 머리채까지 잡혀 비참하게 뒤 정원으로부터 앞 정원까지 끌려갔다.아파 죽을 지경이다!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