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부는 아직 안 들어왔어요?”“저녁 약속이 있어서 아마 12시 전에는 안 들어올 거야.”김진우에게 대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이 있다. 겨울 방학이라 친구들과 여행 갔는데 구정 전에 돌아온다고 한다.하여 집 안에 그들 말고 아무도 없었다. 심미란과 심효진이 소파에 앉았고 김진우는 두 사람 옆에 앉아 긴장한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효진아, 할 얘기가 뭐야?”“고모, 일단 이 얘기부터 할게요. 이 일은 예정이 잘못이 아니니까 듣고 나서 화가 나시더라도 아들한테만 화내셔야 해요. 절대 예정이한테 화풀이해서는 안 돼요.”심효진은 하예정을 지키려고 고모에게 사전 주의를 주었다.“혹시라도 고모가 예정이한테 화풀이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고모 집에 오지 않을 거예요.”심미란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대체 뭔데 이리 심각해? 고모가 왜 예정이한테 화를 내? 예정이랑 너 십몇 년 지기 친구이고 고모도 예정이 크는 걸 봐왔어. 속이 깊은 아이라서 예뻐해도 모자랄 판에 화를 내다니. 어서 얘기해 봐. 대체 무슨 일이야? 진우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예정이 얘기까지 나와?”심효진이 얘기하려던 그때 김진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어머니를 보며 진지하게 얘기했다.“엄마, 나 예정 누나 사랑해. 짝사랑한 지 몇 년이나 됐어. 그런데 효진 누나가 자꾸 반대해. 엄마도 나랑 예정 누나를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엄마 예정 누나 예뻐한다고 했잖아. 그럼 나랑 예정 누나 허락해줄 수 있어?”그의 말에 심미란의 얼굴에 머금고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 심미란이 먼저 고개를 돌려 조카에게 물었다.“효진아, 예정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결혼했어요. 그리고 초고속 결혼한 남편이랑 지금 사이도 엄청 좋아요. 진우의 고백을 거절했는데도 진우는 포기하지 않아요.”심미란이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보았다. 김진우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데 그때 심미란이 아들의 따귀를 때리려 했지만 그만 어깨에 빗맞고 말았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김진우가 중심을 잃고 소파
“고모, 진우 차를 타고 온 바람에 제 차는 두고 왔어요. 기사님한테 저 좀 가게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주세요.”심미란은 차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도우미를 불렀다. 그러고는 도우미더러 운전기사에게 얘기하여 심효진을 데려다주라고 했다.심효진이 떠난 후 심미란은 또 한 번 아들의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김진우, 엄마가 화가 나서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예정이가 너보다 세 살 많고 가정 배경도 안 좋은데 너 눈이 삐었어? 예정이를 좋아하게?”“엄마, 엄마도 예정이 누나 좋아한 거 아니었어? 세 살 많으면 어때? 서른 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리고 예정 누나 가정 배경이 뭐가 안 좋아? 불법을 저지른 것도 없고 조상들도 평범한 농민 출신에 법을 어긴 짓을 한 적이 없는 청렴한 집안이야.”심미란은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엄마가 걔를 예뻐한 건 효진이 친구니까 조카처럼 생각한 거야.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엄마가 알았더라면 절대 못 만나게 했어. 김진우, 당장 그 마음 접어. 예정이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엄마는 두 사람 허락 못 해. 예정이 본가 식구들이 하나같이 다 진상이야. 그런 집안이랑 사돈을 맺으면 평생 재수 없어. 예정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지만 애가 바른 애라는 건 엄마도 알아. 하지만 너랑 어울리지 않아. 넌 김씨 가문의 도련님이고 이 집안의 후계자야. 앞으로 너의 짝은 반드시 재벌 집 딸이어야만 해.”“예정이가 너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어? 아무것도 못 줘. 네가 아무 배경 없는 여자랑 결혼하는 거 엄마는 절대 허락 안 해. 네가 예정이랑 결혼하고 그 집 친척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모른 척한다고 해도 우리 사돈이라는 명분으로 밖에서 온갖 파렴치한 짓을 하고 다닐 거야. 그러면 우리 김씨 가문의 명성에도 안 좋아.”김진우가 말했다.“엄마, 나 예정 누나 사랑해. 예정 누나한테 바라는 것도 없고 도움을 받을 생각도 없어. 예정 누나가 본가 친척들이랑 관계가 안 좋다는 거
어떤 일은 굳이 겪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의지할 데가 없는 하예정과 달리 그의 어머니는 김씨 가문의 사모님이다. 김씨 가문은 하예정에 비해 돈도 있고 권력도 있다. 만약 심미란이 마음먹고 하예정을 못살게 군다면 하예정은 아마 버티지 못하고 관성을 떠나야만 할 것이다.“노력이 아니라 반드시 접어야 해, 반드시!”심미란이 명령조로 말했다. 평소에도 말한 대로 이행하는 그녀는 바로 두 경호원을 불렀다.“지금부터 진우를 24시간 따라다녀. 관성 중학교 문 앞에 가기만 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김진우의 낯빛이 어둡기 그지없었다.그 시각, 김씨 가문의 운전기사가 심효진을 가게까지 데려다주었다.하예정은 가게 문 앞의 진열대를 전부 가게 안으로 옮긴 후 공예품 재료와 공구도 정리했다. 그리고 냉장고 안의 남은 채소와 간식 등도 전부 봉투에 담아 집에 가져갈 준비를 했다.내일부터 가게 문을 열지 않고 구정이 지나 학생들이 개학하면 다시 열 생각이었다.“예정아, 다 정리했어?”“응. 이 물건들은 일단 네 차에 실을까? 아니면 내일 다시 와서 가져갈까?”“내 차에 둬. 이따가 널 집에 데려다줄 때 다 갖고 가.”하예정은 심효진의 차에 물건을 실으며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술 마시러 가는데 날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음주 운전이면 네 차 못 타.”“대리운전 불러야지.”하예정은 문득 강일구가 떠올랐다.“강일구 씨 대리 운전기사야. 우리 남편도 그 사람이 꽤 믿음직스럽다고 하더라고. 이따가 다 마시고 강일구 씨한테 전화해서 대리운전을 해달라고 할게.”심효진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대리운전을 해줄 사람 이미 찾았어.”“누군데?”“내 동생 불렀어. 지누 바에서 기다리라고 했거든. 걔 알코올 알레르기 있어서 술 못 마셔. 그리고 내 친남동생이라서 우리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 여자끼리 술집에 가서 술 좀 마시는 건 괜찮지만 그래도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해. 취하면 사고 나기 쉽거든.”사실 심효진도 술집은 별로
하예정에게 ‘삐돌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전태윤은 사무실에서 몇 시간이나 자고 나서야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두꺼운 외투를 덮고 있었는데 누군가 덮어준 모양이다. 그는 외투를 옆으로 밀어내고는 시간을 확인했다.“벌써 밤 9시네.”전태윤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오래 잘 줄은 생각지 못했다.테이블 위에 보온 도시락이 놓여있었는데 계열사 대표가 사 온 저녁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너무 곤히 자서 깨우지 않고 그냥 놓고 간 모양이다. 그가 덮고 있었던 두꺼운 외투도 계열사 대표가 덮어준 듯싶다.전태윤은 자세를 고쳐잡고 몇 분 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려고 먼저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했다. 그러고는 몇 분이 지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테이블 앞에 다시 앉은 그는 보온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밥과 반찬에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그는 식사하며 휴대 전화를 꺼내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임원들이 보낸 일에 관한 문자 말고도 남동생들이 보낸 문자도 있었다.모든 문자를 확인한 전태윤의 눈빛이 어두웠다. 하예정의 문자가 단 한 통도 없었기 때문이다. 숙희 아주머니는 분명 하예정의 화가 풀렸다고 했었는데.지금 이 시각 가게에서 공예품을 만들 거나 언니네 집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내가 누군지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겠지...’전태윤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카카오톡을 나오자 다른 메시지가 와 있어 무심결에 클릭했는데 숙희 아주머니가 보낸 문자였다. 숙희 아주머니가 오후에 보냈지만 너무 깊이 자는 바람에 알림 소리를 듣지 못했다.「도련님, 사모님이랑 효진 씨 저녁에 술 마시러 술집 간대요.」짧은 문자 한 줄이었지만 전태윤의 낯빛이 확 굳어졌다. 그는 식사도 채 하지 않고 바로 숙희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숙희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다.“도련님, 밖에 쓰레기를 버리고 오겠다고 핑계 대고 나와서 도련님 전화를 받았어요.”숙희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도련님, 왜
말문이 막힌 소정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두 사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이도 점점 가까워지면서 애정행각도 서슴지 않더니 갑자기 싸웠다고? 어쩐지 형수님이 술집에 간다더라니, 다 너 때문이었구나.”전태윤이 말했다.“일단 두 사람 지금 어느 술집인지, 언제 갔는지, 취했는지부터 알아봐 줘. 알아내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알았어. 지금 당장 알아볼게.”소정남은 전화를 끊자마자 두 사람이 어느 술집으로 갔는지 알아보라고 부하들에게 분부했다.소정남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시에 전태윤은 전용기 스태프에게 연락하여 분부했다.“지금 당장 돌아갈 준비를 해요. 십여 분 후에 관성으로 돌아갈 겁니다.”출장 갈 때 공항까지 바래다주겠다는 하예정을 거절한 건 먼저 회사로 가봐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티켓을 끊지 않아서였다. 왜냐하면 늘 전용기를 타고 출장을 다녔기 때문이다.전태윤의 연락을 받은 스태프들은 재빨리 준비에 돌입했다. 전태윤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하예정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그 시각 하예정은 심효진, 그리고 심효진의 남동생 심서준과 함께 술집에서 한창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술을 마실 수 없었던 심서준은 옆에 가만히 앉아 연거푸 술을 들이켜는 두 누나를 바라만 보았다. 특히 예정 누나는 물을 마시듯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심서준이 참다못해 하예정을 말렸다.“예정 누나,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얼굴이 빨갛게 된 것 좀 봐. 누나 주량이 별로지? 더 마셨다간 취해.”그러자 하예정이 히죽 웃었다.“술에 취하면 온갖 걱정을 잊을 수 있잖아. 오늘 밤 제대로 취해서 전태윤이 누군지조차 잊고 싶어.”심서준이 심효진을 쳐다보자 그녀는 동생의 어깨를 토닥였다.“예정이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누나도 오늘 예정이랑 끝까지 달릴 거니까 넌 그냥 옆에서 보기만 해. 말릴 필요 없어. 내일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도 그건 얘 일이야. 아무도 얘한테 술로 기분 풀라고 한 사람 없어.”심서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예정이 절친의 어깨에 손을
전태윤이 더는 걸지 않고 포기하려던 그때 다행히 소정남의 연락을 받았다.“정남아, 두 사람 지금 어느 술집이래?”전태윤이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소정남이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장난쳤다.“아주 급해 죽겠지? 당장이라도 돌아오고 싶지?”“소정남!”지금 이 상황에 장난을 치다니.전태윤은 너무 조급한 나머지 당장 하늘을 날아서라도 관성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정남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아주 흔치 않은 일이잖아. 형수님 말고는 널 이토록 조급하게 할 사람이 없어.”전태윤은 늘 끄트머리에 가서야 조금이나마 표정 변화가 있었다. 그가 조급해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정말 거의 없다.“지금 지누 바에 있고 30분 전에 도착했어. 효진 씨 말고도 효진 씨 친남동생도 같이 있어.”그의 말에 전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효진 씨 동생 몇 살이야?”‘효진 씨한테 뭔 동생이 이렇게나 많아?’사촌 동생인 김진우는 심효진과 하예정이 절친인 바람에 하예정을 알게 되었고 사랑하기까지 했다. 전태윤은 연적이 또 한 명 나타날까 걱정되었다.“효진 씨보다 서너 살 정도 어릴걸? 아무튼 성인이야. 효진 씨 남동생이 몇 살인 건 알아서 뭐 하게? 그건 내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미래 처남이 될지도 모르는 동생한테 잘해줘야 하니까. 아, 알았다. 김진우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래서 효진 씨 동생이라면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지?”전태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넌 연적이 없어서 내 기분 몰라.”소정남은 어이가 없었다.“무슨 말을 그렇게 해...”그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지누 바 사장이 소지훈 씨 아니야?”술집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는 곳이라 복잡했지만 소식을 빨리 알아내기엔 그만한 데가 없었다.“응. 형 명의로 된 거라서 형수님이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 더 빨리 알아냈어. 내가 대충 계산해봤는데 지금쯤 아마 대여섯 잔은 마셨을 거야. 형수님 주량은 어때? 많이
“아직은 너무 멀쩡해서 두 잔 더 마셔도 안 취해.”“그만 마셔. 그냥 두어 잔 정도 마시러 왔잖아. 많이 마시면 몸 상해.”하예정이 그녀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심효진은 잠깐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동생에게 하예정을 잘 지켜보라고 했다.잠시 후 심효진은 펜과 종이 몇 장, 그리고 술 한잔을 들고 돌아왔다.“이 잔만 마시고 그만 마셔. 그림이나 그리게 종이 몇 장 가져왔어.”“누나, 예정이 누나 취했는데 그림 그릴 수 있어?”하예정은 자신이 멀쩡하다고 얘기했지만 사실은 이미 취한 상태였다.심효진은 남동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펜과 종이를 하예정에게 건넸다. 펜과 종이를 받아든 하예정은 술도 마시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새알 하나를 그렸다.심서준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쳐다보았다.취하고 나서 새알을 그리는 것쯤은 쉬웠다. 그도 쉽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하예정은 새알 하나를 그린 후 계속하여 호수를 그렸다. 호수 면에 특별히 동그라미를 많이 그렸는데 호수 바닥까지 동그라미가 가득했다. 마지막에는 호수 앞의 빈자리에 사람과 개를 그렸다.그 모습에 심서준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누나, 예정이 누나 술만 마시면 그림 그리기 좋아해?”심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욕하고 싶지만 욕이 안 나올 때 펜과 종이를 주면 그림으로 풀거든. 한참 그리고 나면 기분이 풀려.”심서준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정말 별난 사람이 다 있어.’심효진이 하예정을 이해하길래 망정이지, 그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예정은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인물을 그렸다. 심효진은 굳이 가까이 가서 보지 않아도 전태윤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심서준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하예정의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았다.전태윤의 상반신을 그린 하예정은 빤히 살펴보다가 심장 쪽에 심장 하나를 그렸다. 하지만 너무도 작아 잘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새 술잔을 들고 마시며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이번에 드디어 비슷하게 그린 것 같다. 전에는
“효진 씨 맞으시죠?”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심효진 남매는 나란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하예정은 소정남을 못 본 듯이 덤덤하게 술을 마셨다.“정남 씨?”여기서 소정남을 마주치다니, 심효진은 매우 의외였다.소정남은 얼른 상황을 설명했다.“주말에 몇몇 친구들이랑 함께 놀러 나왔는데 여기서 효진 씨를 다 보네요. 여기 앉아도 되죠?”심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이미 앉으셨잖아요. 친구분들은 아직인가 봐요?”그녀의 눈앞엔 소정남 한 명뿐이었다.소정남은 자리에 앉아 하예정에게도 인사했지만 그녀는 머리만 살짝 끄덕였다.“친구들은 다 가고 없어요.”소정남은 그림을 보며 심효진에게 물었다.“이거 누가 그렸어요? 제가 한 번 봐도 돼요?”심효진이 하예정을 힐긋 바라보자 소정남은 그림의 주인공이 그녀란 걸 바로 알아챘다. 하예정은 계속 술을 마시며 아무 말도 없었고 이에 소정남은 그녀가 반대하는 줄 알고 그림을 가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곁눈질로도 그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림 속의 사람은 바로 전태윤이었다.‘사모님께서 그림 솜씨가 탁월하네. 태윤이랑 너무 똑같게 그렸잖아. 다만 심장을 왜 일부러... 저렇게 작게 그렸지? 너무 선명한데... 태윤이가 속 좁은 남자란 걸 티 내려고 그런 거야? 태윤의 뒤엔 호수야 아니면 강이야? 수면 위에 한가득한 동그라미는 또 뭐지? 그리고 알까지 하나 있어.’소정남은 그림과 하예정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눈빛도 흐려진 걸 보아 취한 게 분명했다.“예정 씨, 이 그림 예정 씨가 그렸죠? 진짜 너무 잘 그렸네요!”‘그러니까 이 그림의 의미는... 태윤이가 물에 떠 있는 알이란 말인가?! 아니, 아니야!’소정남은 다시 그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태윤이는 호수에 떠 있는 알? 강에 떠 있는 알? 여러 개의 동그란 알?’소정남은 한참을 들여다보며 생각하다가 드디어 알게 됐다.전태윤의 마음이 저 알처럼 작아서 속이 좁고 널브러진 알들의 개수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