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은 오늘 전 대표님이 유부남인 데다가 팔불출이란 빅 뉴스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녀는 저녁에 화장대 앞에 앉아 팩을 붙이며 전태윤에게 말했다.“있잖아요, 나 오늘 종일 태윤 씨 회사 대표님의 스캔들만 들었지 뭐예요.”전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스캔들?”“아직 몰라요?”하예정이 머리를 돌리고 그를 쳐다봤다.“태윤 씨 대표님께서 유부남인 걸 공개 선언했대요. 다만 부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소현 씨가 말하길 이 사건은 그들 상류층에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던데요. 태윤 씨는 전씨 그룹에서 출근하는데 뭐 알아낸 거 없어요? 전씨 그룹 사모님은 대체 누구래요? 기자들이 회사 문 앞에서 엄청 오래 기다렸는데 아무 소식도 얻지 못한 채 하는 수 없이 돌아갔대요.”전태윤은 의자를 끌고 와 아내 곁에 앉아서 그녀가 붙인 팩을 쳐다보다가 팩 포장의 브랜드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는 가격대가 있는 럭셔리 브랜드였다.“소현 씨가 줬어요. 오늘 밤에 어쩌다 한 번 효과 있나 보려고 붙였어요.”전태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앞으론 성소현 씨가 주는 화장품 쓰지 마. 네가 애용하는 브랜드를 내게 말하면 내가 알아서 사줄게.”“소현 씨가 엄청 많이 줬어요. 안 쓰면 다 버리잖아요. 소현 씨는 여자인데 지금 설마 여자까지 질투하는 거예요?”전태윤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네가 날 1순위로 두지 않는 한 너의 관심사를 뺏어간 사람은 누구든 다 질투할 거야.”“참 나, 애초에 ‘난 질투 같은 거 전혀 몰라’ 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전태윤은 말문이 막혔다.“태윤 씨, 얼른 말해봐요. 그래서 전씨 그룹 사모님이 누군데요?”전태윤이 웃으며 되물었다.“넌 우리 대표님한테 별로 관심 없잖아.”“없다기보단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죠. 어쨌거나 나랑 태윤 씨 대표님은 아예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잖아요. 태윤 씨는 전씨 그룹에 다니면서도 대표님 얼굴 한 번 뵙기 힘든데 난 더 말할 것도 있
“예정아, 너 소현 씨 어머님이랑 함께 한 유전자 확인 검사 결과 나왔지?”전태윤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더는 본인에 관한 스캔들을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그는 단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카카오 스토리에 유부남이란 사실을 공개했을 뿐인데 이렇게 큰 여파가 몰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의 아내까지 종일 그에 관한 스캔들만 들었으니 말이다.“소현 씨가 내일 결과서를 가지러 간대요.”전태윤이 알겠다며 대답한 후 곧이어 말을 이었다.“만약 결과서에 너랑 소현 씨 어머님이 혈연관계가 있다고 나오면 꼭 다시 만날 거야. 그땐 내가 너랑 함께 성씨 일가에 못 갈 것 같아. 내일 출장 가야 하거든.”하예정이 머리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난 또 태윤 씨가 출장 안 가도 되는 줄 알았어요.”전태윤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역시나 그녀는 전태윤이 빨리 출장 가길 바랐다.다만 그는 너무 두려웠다. 출장 갔다가 돌아오면 하예정이 아예 그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티켓 끊었어요? 몇 시 비행기예요? 내가 공항까지 바래다줄게요. 내일 아침 일찍 깨나서 태윤 씨 짐 정리를 도와줄게요.”하예정은 자신이 매우 자상하다고 느껴졌다. 남편이 출장 가니 짐 정리도 도와주고 공항까지 바래다주니 말이다.“오전 10시 35분 비행기야. 공항까지 바래다줄 필요 없어. 오전에 회사로 돌아가서 서류들 챙기고 동료들도 함께 가야 해. 회사에서 공항까지 가는 전용차를 마련해줬어.”하예정은 알겠다며 대답했다.‘그래, 그럼 난 홀가분하고 좋지.’“너랑 소현 씨 어머님 검사 결과가 나오면 내게 문자 보내. 출장 중엔 매우 바삐 돌아칠 거야. 보통 밤늦은 시간엔 문자 볼 시간이 나. 그러니까 문자만 보내면 내가 알아서 볼 거야.”“네, 결과 받으면 바로 문자 보낼게요.”전태윤은 출장 중에 바쁘니 밤이 깊어야만 문자를 확인할 수 있다고 일부러 강조했는데 이는 하예정이 낮에 그에게 전화했다가 성소현도 함께 있을까 봐 두려워서였다.“아 참, 효진이랑 소 대표님 일은 우리
집에 건물이 하도 많아 임대비용을 받다가 지쳐 쓰러질 정도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심씨 일가가 바로 이런 재벌 가문이다.“그냥 효진이랑 소 대표님이 계속 만나게 놔둬요. 서로 알고 지내다 보면 사랑이 싹틀 거예요.”성소현한테서 소정남에 관한 얘기를 듣자 심효진과 소정남은 같은 부류의 사람인 듯싶었다. 둘은 모두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고 소정남이 생생 정보통이다 보니 모든 가십거리를 제일 먼저 알게 된다.“소 대표님께 물어봤는데 효진 씨를 아주 좋게 보고 있더라고. 대표님께 시간을 좀 줘. 알아서 움직이실 거야. 인제 곧 구정이라 회사 전체가 바삐 돌아치고 있어. 소 대표님의 직급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설 연휴가 시작되면 대표님도 개인감정을 케어할 시간이 생길 거야.”전태윤이 출장 가는 동안 소정남과 전이진은 함께 회사에 남아 분주히 보내야 한다.하예정은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였다. 실은 그녀도 심효진을 멀리 시집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심효진과 소 대표가 함께 있으면 전태윤에게도 매우 유리하다. 소 대표의 도움을 받고 승승장구하여 연봉도 오르고 두 사람의 경제조건도 점점 더 여유로워질 테니까.‘나 지금... 친구 팔아서 돈을 벌려는 거야?’그들 부부는 소개팅에 관한 얘기를 한참 나눴다. 하예정은 팩을 뗄 시간이 다 돼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잠시 후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곧게 침대 머리맡에 다가가 슬리퍼를 벗고 침대에 누우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태윤 씨, 이리 와요. 내 몸 따뜻하게 녹여줘요. 몸이 따뜻해지면 금세 잠들 것 같단 말이에요.”전태윤은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날 핫팩 취급하는 거야?”“핫팩은 충전해야 하잖아요. 당신은 충전할 필요도 없고 핫팩보다 더 따뜻하니 가성비 굿이에요.”전태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그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향해 누워서 가볍게 이마를 톡 두드렸다.“그럼 난 너한테 핫팩 말곤 다른 용도는 없는 거야?”“당신한테 달라붙어 몸을 녹이는 것 말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알겠다고요. 나 다 기억해요. 금방 혼인 신고했을 때도 아니고 말이야.”하예정이 하품을 해댔다.“태윤 씨, 얼른 자요. 내일 출장 간다면서요. 푹 자야 머리도 맑아져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가까이 다가가더니 전태윤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여보, 잘 자요.”전태윤은 순간 짙은 눈빛으로 돌변하여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대론 도저히 놓아줄 수 없었다.그는 깊은 눈동자로 하예정의 예쁜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하예정은 평소 화장기 없이 민얼굴로 자주 나다니지만 피부관리에 엄청 신경 쓰다 보니 얼굴이 매끄럽고 촉감이 좋았다.그녀는 타고난 미모를 지녔다.전태윤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이 점을 바로 인정했다.다만 미인을 너무 많이 봐오다 보니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 뿐이다.“예정아, 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그가 처음 여보라고 불렀을 때 하예정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전태윤은 그 뒤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슴만 답답할 따름이었다.여보라는 애칭이 그다지 닭살 돋지 못하고 가벼운 감정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 두어 마디 부르곤 더 부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여보라고 불렀을 때 감미로운 목소리가 전율처럼 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태윤 씨.”“아니, 날 여보라고 불렀잖아.”“그게 왜요? 여보 맞잖아요. 내 여보.”전태윤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짓누르며 뜨거운 키스로 제 마음을 전달했다.진한 키스를 마친 후 하예정은 그가 떡하니 내려놓은 커다란 손을 뿌리치며 다시 몸을 돌리고 누워 말했다.“자요 얼른,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전태윤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먼저 자. 난, 샤워하고 올게.”그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황급히 욕실로 들어갔다.부부의 감정이 무르익어갈 때 진한 키스는 금물이다. 전태윤은 하마터면 선을 넘을 뻔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타이밍이 적절치 못했다.추운 겨울 찬물로 샤워하는 기분은 짜릿해서 죽을 지경이었다!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하예정도 다시 반듯하게 누우며 중얼거렸다.“그러게
“예정 씨, 언니는요? 언니더러 전화 좀 받으라고 해요!”김은희의 퉁명스러운 말투를 보아하니 지금 한창 분노에 차 있을 게 뻔했다.“언니는 왜요? 이미 그쪽 집안과 아무 연관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말하세요, 무슨 일이죠?”하예정이 느긋하게 물었다.아마도 주형인의 부모가 본가에서 이사를 왔는데 집 인테리어가 엉망진창이 되어 홧김에 하예진에게 따져 물을 기세인 듯싶었다.‘반응이 되게 느리네. 하긴, 인제야 알게 된 것도 그럴만하지.’그날 하예진과 주형인이 이혼 절차를 마무리한 후 김은희와 주경진은 택시를 타고 본가로 돌아갔다.다음날 바로 이사 오려고 했는데 주서인의 자녀가 학교에 돌아가 성적 수첩을 가져와야 하는 바람에 하루를 더 머물렀다.오늘 초등학교가 정식으로 방학을 했다.주형인의 부모는 주서인 가족과 함께 차 두 대로 움직여 크고 작은 짐들을 한가득 실은 채 도시에 와서 구정을 보낼 예정이었다.아침 일찍 출발한 것도 다 김은희의 작은 꼼수였다.일찍 오면 서현주더러 그들 한 가족을 위해 아침을 차려놓으라고 할 참이었으니까.시작부터 서현주의 기강을 잡을 생각이었다.다만 크고 작은 짐을 한가득 둘러업고 계단을 올라가 집 문을 열었더니 식겁하여 그만 짐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집을 잘못 들어온 게 아닌지 의심되어 여러 번 확인했지만 아들 집이 맞았다.주서인은 곧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형인은 요 이틀 협력업체가 갑자기 협력을 취소하는 바람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가족들에게 집 인테리어가 망가졌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누나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부모님과 누나네 가족이 모두 도시에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된 후 주형인은 그제야 이 일을 떠올리며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김은희는 그 자리에서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가 주씨 집안 사람들을 전부 블랙리스트에 넣은 바람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김은희는 마지못해 하예정에게 전화했다.“언니랑 함께 있는 거 아니었어요?”김은희가 퉁명스럽게
하예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주서인 씨, 화장실 가서 거울 좀 비춰봐 봐요. 어머, 거울도 없겠다. 우리 언니가 돈 주고 산 거울이라 겨우 다 뜯었거든요. 뭐 그럼 휴대폰 셀카 모드로 얼굴 좀 비춰봐요. 본인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생겼는지 보란 말이에요. 우리 언니랑 서인 씨 동생은 인제 이혼해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대체 무슨 체면으로 우리 언니한테 집을 구해달라고 해요? 언니가 당신들 길바닥에 나앉게 했어요? 그거 다 본인들이 자초한 일이잖아요. 자업자득이라고 하죠. 헤어질 때 좋게좋게 얘기해서 언니가 받을 손해배상 비용을 선뜻 줬더라면 지금처럼 길바닥에 나앉을 일은 없었겠죠. 어휴, 오늘 날도 참 추운데 창문까지 다 뜯어버려서 집에 칼바람이 휘몰아칠 거예요. 다들 잠은 제대로 잘 런지나? 뭐 그래도 다들 파렴치한 사람이라 인원수도 많겠다, 똘똘 뭉치면 칼바람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이불 안이 너무 따뜻해서 좀 더 자야겠어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하예정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어서 김은희의 휴대폰 번호를 바로 차단해버렸다.괜히 끝까지 들러붙어 전화를 걸어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주서인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하예정 이게 진짜 죽으려고! 못 된 년, 말발은 또 왜 이렇게 센 건데? 저년 남편은 어떻게 참는대? 엄마, 이젠 우리 어떡하냐고?”주서인이 엄마에게 물었다.“한 가족이 짐을 바리바리 싸서 왔는데, 시댁 식구들한테도 이리로 와서 설 연휴 보낸다고 다 얘기했는데 인제 와서 다시 돌아가라는 거야?”“엄마, 안아줘요.”아빠 품에서 금방 깨난 임정한이 손을 내밀어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했다.주서인은 짜증 섞인 얼굴로 아들을 안고 주경진에게 다시 얘기했다.“아빠,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너무 빨리 하예진의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계좌 이체하지 말라고 했잖아. 인제 봐봐, 연락 두절이야. 돈을 챙겼으니 우린 아예 안중에도 없다고. 앞으론 우빈이 만나기도 힘들 거야. 다들 그년한테
주경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내를 째려보았다.“당신 사돈댁의 어느 어르신을 찾아갔어?”“누구겠어요? 예정의 친할아버지죠. 걔네 친할머니가 입원해서 병원에 찾아갔더니 내 제안을 듣고 대뜸 2000만 원을 요구하는 거예요. 내가 안 된다고 하자 끈질기게 흥정하다가 결국 1200만 원을 줬어요. 반드시 직접 나서서 예정이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예정이는 제 언니의 이혼을 말리지도 않더라고요. 돈만 받고 약속을 어긴 셈이에요.”김은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주경진이 그녀의 손목을 세차게 내리쳤다.“당신 미쳤어? 예정이네 가족들도 믿는 거야? 심지어 예정이는 제 할아버지와 갈등이 깊다는 걸 당신도 다 알잖아. 찾아도 하필 그 사람들을 찾아가? 당신 정말 똑똑하다가도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모르겠어! 1200만 원, 무려 1200만 원을 날리다니!”주경진은 아내 때문에 화가 나 눈앞이 캄캄해지고 뒤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김은희가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난 그저 예정이랑 말이 안 통해서 그 집 식구들을 내세울 생각이었어요. 싸워도 그 집 식구들끼리 싸울 뿐 난 예정이 때문에 화낼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찾아간 거예요. 그 집 어르신이 마침 병원에서 아내 병원비용을 빨리 내라고 다그친다면서 800만 원이 필요하니 나더러 12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남은 400만 원은 예정이를 설득하는 차원에서 받는 거라면서요.”하씨 집안 할머니의 병원비용은 애초에 본인 돈으로 부담했고 나중엔 자녀들이 가족 단위로 얼마씩 대주었다. 그 돈까지 다 쓰고 나니 800만 원의 비용이 더 불어났고 이때 마침 김은희가 문 앞까지 찾아왔으니 하씨 어르신이 덥석 물지 않을 리가 없다.“당신 진짜 멍청해. 그 집안 사람들은 밑 빠진 독이야. 돈을 줘봤자 절대 돕지 않는다고!”주서인도 한마디 덧붙였다.“엄마는 내가 사람을 찾으랬지 언제 돈을 쓰라고 했어?”한편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엄마한테 언제 이렇게 많은 비상금이 있었대? 보아하니 형인이가 부모님께 돈을 꽤 많이
주서인은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누나, 나 지금 가고 있어.”주형인은 부모님과 누나네 가족이 다 온 걸 알고 얼른 일어나 서현주도 깨워서 대충 씻고 광명 아파트로 향했다.“형인아, 우리 아직 아침도 못 먹었어.”“누나, 나 도착하면 다 함께 아침 먹으러 가.”주서인이 말했다.“너 서현주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걔더러 우리 아침 준비하라고 해! 나가 먹으면 사람이 많아서 몇만 원은 들 거야.”“누나, 우리도 지금 호텔에 묵고 있어. 아직 집을 못 구했단 말이야. 그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밥을 할 수가 없어.”하예진이 그녀만의 방식으로 인테리어 비용을 돌려받았으니 주형인의 집엔 물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주방용품도 싹 다 옮겨가 텅 빈 주방에서 서현주가 밥을 해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주서인이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예진이가 우릴 모두 차단했어. 넌 어떻게 예진이랑 연락해? 우린 우빈이를 만나고 싶어도 못 보는 거 아니야?”“우빈이는 보통 예정의 가게에 있어. 그리로 가면 볼 수 있으니까 예진이한테 연락 안 해도 돼.”주형인은 예진이가 연락처를 차단한 일에 관하여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하예진이 인테리어를 무너뜨린 일은 그도 몹시 화가 나지만 후회는 전혀 없었다. 이혼 뒤 서현주가 질투할까 봐 그도 실은 하예진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연락 안 해도 돼. 그때 가서 이를 빌미로 우빈의 양육비를 안 줘도 되잖아. 매달 60만 원씩 아끼게 됐네.”주서인은 이렇게 저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다만 주형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가족들에게 이미 아들의 1년 치 양육비를 줬다는 걸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누나, 나 지금 운전 중이라 이따가 만나서 얘기해.”“그래.”주서인은 전화를 끊고 부모님께 말했다.“형인이 지금 오고 있대. 집에 물도 안 들어오고 전기도 다 차단해서 밥을 할 수가 없대. 이따가 다 함께 나가서 아침을 먹자고 하던데 우리 찻집에서 모닝 차를 마신 지도 오래됐으니 형인이 오면 찻집이나 가야겠어.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