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진은 할머니를 모시고 로비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호텔로 식사하러 갔다.문밖을 나서자마자 눈치 빠른 전이진이 바로 하예정을 발견했다.“할머니, 태윤 형이 왜 나더러 할머니 모시고 식사하러 가라고 했는지 드디어 알았어요.”그는 회사 문 앞을 가리키며 할머니께 말했다.“형수님이 오셨어요. 도시락까지 들고 온 걸 보니 태윤 형한테 주는 건가 봐요.”‘어쩐지 태윤 형이 성급하게 나더러 할머니 모셔가라고 하더라니, 할머니가 방해꾼이 될까 봐 그런 거였어.’어르신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정말 예정이네. 얼른 태윤이한테 전화해서 사무실 바꾸라고 해. 네 사무실로 가면 되겠다. 절대 예정이한테 들켜선 안 돼.”전이진은 알겠다고 말한 후 곧바로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알리지 않아도 전태윤은 진작 하예정이 올 걸 알고 있었다.그의 서랍 속에 망원경이 있어 할머니를 보내자마자 망원경을 들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하예정의 차가 들어온 걸 확인한 후 그는 망원경을 제자리에 넣어놓고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전이진은 할머니를 모시고 직접 운전했다.그는 회사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도어를 내리며 하예정에게 인사했다.“할머니, 이진 씨.”하예정이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할머니가 여긴 어쩐 일이세요?”어르신은 일부러 표정을 찡그리며 대답했다.“한두 마디로 얘기하기 힘들 것 같구나. 예정아, 우리 먼저 밥 먹으러 갈게. 나 너무 배고파. 저녁에 다시 얘기해.”“무슨 일이신데요? 알겠어요, 할머니. 얼른 가서 식사하세요.”“형수님, 저 할머니 모시고 밥 먹으러 가요. 태윤 형은 아직 사무실에 있어요. 전화하시면 바로 마중 나올 거예요.”말을 마친 전이진은 할머니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멀리 운전해서 나간 후 그가 웃으며 말했다.“나 매일 이 차 타고 출근하는 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혹여나 형수님이 회사로 찾아왔다가 내가 고급 외제차 타는 거 보시면 바로 나부터 의심할 거 아니에요. 그때 되면 태윤 형이 날 아작낼
“난 이미 먹었어요.”하예정은 곧바로 대답하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그럼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태윤 씨 다 먹으면 돌아갈게요.”전태윤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우리 사무실로 가.”하예정은 또다시 붐비는 인파를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난 태윤 씨 회사 직원도 아닌데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어요?”“나랑 함께 들어가면 돼.”그가 손을 내밀자 하예정은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몰래 웃음을 훔쳤다. 물론 하예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전태윤은 한 손에 그녀가 준 도시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 다들 놀라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대표님.”“대표님.”다들 전태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하예정에게도 인사치레로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그녀의 정체를 추측하기에 바빴다.대표님께서 손까지 잡았으니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일 게 틀림없었다.그나저나 전 대표한테 언제 여자친구가 생겼었지?그야말로 철통 보안이었다. 오늘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다들 전 대표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믿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성소현도 더는 전 대표를 찾아오지 않더라니,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런 듯싶었다.성소현은 비록 교만하고 제멋대로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재벌 출신이라 딴사람과 한 남자를 빼앗으려 하진 않는다.누군가가 휴대폰으로 전태윤과 하예정을 찍으려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황급히 말렸다.“죽고 싶어 환장했어? 감히 대표님을 도촬하려 해?”그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정면을 찍은 것도 아니고 뒷모습만 찍겠다잖아. 우리 대표님이 드디어 연애하시는데 이런 빅 뉴스가 어디 있어. 카카오 스토리에 올리고 싶단 말이야.”“뒷모습도 안돼. 대표님께서 공개하지 않은 이상 절대 촬영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서도 안 돼.”그 사람은 잠시 생각하더니 사색이 되어 재빨리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말려준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전 대표의
전태윤은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출근해보면 알아. 여긴 대표, 부대표가 엄청 많아. 다들 책임진 구역이 다르거든. 아무튼 회사에서 내 위치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아.”하예정이 혀를 쏙 내밀었다.“내가 이 회사에 들어올 실력이 없어서 참 다행이네요. 입사했더라면 그 많은 대표님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어요.”전태윤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넌 지금 이대로가 좋아. 자유롭지, 수입도 낮은 편이 아니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 같은 자영업자를 부러워하는지 알아?”“난 누군가에게 속박당하는 느낌이 싫어서 졸업하자마자 효진이랑 함께 가게를 꾸렸어요. 효진의 집에서 도와줬으니 망정이지 우리 하마터면 경영권을 못 가져올 뻔했다니까요.”학교 근처에서 가게를 꾸리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저 파키라는 내 온라인 스토어에서 샀어요?”하예정은 전이진의 책상에 놓인 파키라를 바라보며 물었다.전태윤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전이진의 파키라가 너무 눈에 거슬렸다. 왜냐하면 둘째가 일전 한 푼 안 쓰고 얻어왔으니까.“아까 큰 칸 사무실 지나오면서 못 발견했어? 다들 책상에 파키라나 머니 트리 공예품을 하나씩 놓았어. 혹은 뭐 럭키 캣도 있고, 아무튼 전부 다 네 온라인 스토어에서 구매한 거야.”하예정은 문득 성취감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이게 다 태윤 씨랑 이진 씨 덕분이에요. 소현 씨 공로도 크고요. 카카오 스토리에 올려서 홍보도 해주었고 소현 씨 오빠한테도 내 공예품을 사서 사무실에 놓으라고 했어요. 매출을 올려주겠다고 엄청 신경 써줬죠. 지금은 온라인 스토어 매출이 서점을 훌쩍 뛰어넘었다니까요.”친구가 많으면 길이 많이 트이는 법이고 성소현처럼 전폭적으로 도와주는 친구가 있으면 나아갈 길이 탄탄대로가 될 것이다.전태윤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와이프의 공예품이 라이벌의 사무실에까지 놓이다니.그도 아직은 성씨 그룹에 성공적으로 투입되지 못했는데 와이프가 그보다 유능하여 먼저 성씨 그룹에 침입해 들어갔다.‘역시
“나랑 있으면 더 귀찮아하실 거야. 항상 내가 말주변이 없다고 불만이셨거든. 할머니는 나보다 널 더 좋아해.”하예정이 곧바로 대답했다.“그럼 우리 함께 할머니 모시고 기분 풀어드려요.”전태윤은 드디어 낚였다는 표정으로 바로 대답했다.“좋아. 서교 쪽에 펜션이 하나 있는데 내일 우리 할머니 모시고 거기로 가자.”모레는 처형과 주형인이 합의 이혼 하는 날이라 처가댁 식구로서 그들은 반드시 뒷받침해주러 가야 한다.하여 아내와 데이트할 시간은 내일 단 하루밖에 없다.펜션도 전씨 일가의 산업 중 하나지만 대외적으로 운영 중이라 매년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거기 엄청 예쁘고 놀거리도 많다고 들었어요. 나도 아직 못 가봐서 잘 몰라요.”하예정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 펜션 이미지를 검색해 보더니 내일이 오기를 기대하기 시작했다.혼자서 먹으면 입맛이 없다던 전씨 일가 도련님은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하예정이 보내온 음식을 말끔히 먹어치웠다.그가 도시락통을 씻으려 하자 하예정이 재빨리 말렸다.“내가 할게요. 오전에 힘들었겠는데 푹 쉬어요. 이 사무실 너무 아늑하네요. 상사님 소파에 누워서 눈 좀 붙여요. 태윤 씨 책상에서 엎드려 자는 것보다 훨씬 편할 거예요.”그녀의 걱정어린 말투에 전태윤의 마음이 흐뭇해졌다.그도 확실히 피곤이 밀려와 하예정이 설거지할 때 소파에 기대 잠들었다.하예정이 나오자 그는 이미 깊이 잠들었다. 그녀는 살금살금 다가가 잠자는 전태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잘생긴 사람은 자는 모습도 너무 멋있었다.하예정은 도시락통을 내려놓고 그의 옆에 앉아 계속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차갑고 도도한 이 남자는 갓 혼인 신고했을 때 그녀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아 했었다.그랬던 그가 언제부터인지 한없이 자상해지고 말도 점점 늘어났으며 서로 조금씩 믿음이 쌓였다.감정은 키워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예정은 드디어 믿게 되었다.그녀와 전태윤의 감정이 얼마나 깊어졌다고 단정 지을 순 없으나 혼인신고를 할 때보단 확실히 단
다만 화장대 위에 있던 계약서가 사라졌다. 계약서 뒷면에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데...어머!하예정은 곤히 잠든 전태윤을 노려봤다. 그가 무심코 그녀의 그림을 버렸는데 이는 둘 사이의 계약서, 아니, 그녀만의 계약서를 버린 거나 다름없다. 정작 전태윤 본인의 계약서는 보물처럼 고이 모셔두고 있을 것이다.하예정은 가볍게 그의 얼굴을 찔렀다. 그가 아무 반응 없자 그녀는 또다시 살짝 찌르며 중얼거렸다.“내 계약서는 무심결에 버려놓고 정작 당신 계약서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네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난 아무런 보장이 없잖아요.”‘이참에 태윤 씨 계약서도 훔쳐 와서 망가뜨릴까? 그럼 서로 공평해지잖아. 누구에게도 계약서가 없으니 서로 구속할 수 없어. 그래야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다만 그녀는 전태윤의 방에 들어갈 기회조차 없었다. 순간 하예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의 계약서를 훔쳐 와서 망가뜨릴 수 있을까?만취시킬까?기절시킬까?아니면 유혹해볼까?하예정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다 포기하고 천천히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아직도 한참 더 기다려야 전태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로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날 밤에 괜찮은 기회가 차려졌다.할머니는 갑자기 찾아오셨는데 전이진과 함께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바로 하예정의 가게로 간 게 아니라 호텔에서 휴식하다가 밤 9시가 다 돼서야 전이진을 불러와 발렌시아 아파트로 보내 달라고 했다.밤 10시, 어르신은 캐리어를 끌고 전태윤의 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 잠시만요.”숙희 아주머니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었다.할머니를 본 숙희 아주머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어르신, 여긴 어쩐 일이세요?”“태윤이랑 예정이 안에 없어?”“지금 돌아오는 중이에요. 아직 도착하지 못했어요. 제가 먼저 돌아왔어요.”매일 저녁 하예정이 퇴근하고 돌아와 주우빈을 데려가기에 숙희 아주머니는 가게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숙희 아주머니는 어르신의 캐리어를
전태윤 아래로 남동생이 8명 더 있는 건 제쳐두고 전태윤 한 명만으로도 할머니는 속이 재가 되어간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홉 손자를 일일이 분석하며 전태윤이 가장 효심 있지만 또 할머니를 가장 애태우게 한다고 하셨다. 만약 할머니가 전태윤의 혼사에 간섭하지 않으면 그 녀석은 아마 평생 독신으로 지낼 거라고 말씀하셨다.인제 보니 할아버지의 분석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어르신, 사람 감정이라는 건 절대 다그칠 수 없어요. 인생의 큰일이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예정 씨가 사람을 바로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또 요즘 이혼이 대수이긴 하지만 청춘을 몇 년이나 허비하는 거라 대가가 너무 커요.”이때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사모님께서 돌아오셨어요.”어르신이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호칭 조심해.”숙희 아주머니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전태윤 부부가 안으로 들어오자 숙희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태윤 씨, 예정 씨, 오셨어요.”숙희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태윤 씨, 할머님 오셨어요.”“할머니.”하예정도 가까이 다가갔다.“할머니 먼저 돌아오셨네요. 저 아까도 태윤 씨한테 할머니 왜 가게에 안 오시는지 물어봤거든요.”하예정은 전씨 집안에서 할머니와 가장 가깝다.두 사람은 마치 친할머니와 손녀처럼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이에 전태윤도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하예정은 그와 함께 있을 때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니 말이다.‘할머니는 나한테서 예정이를 뺏어가려고 집에 들어오셨나?’“어머, 어떡해요!”하예정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전태윤의 다리를 툭 치며 말했다.“태윤 씨, 우리 집에 침대가 있는 침실이 단 세 개뿐인데 할머니 오늘 어디서 주무셔야 하죠?”숙희 아주머니께 침구 용품을 사드릴 때 그녀는 다른 손님방에도 침대를 하나 더 마련했어야 했다.할머니가 오니 마땅히 주무실 침대조차 없으니 말이다.전태윤은 제 다리를 내리친 그녀의 손을 보더니 다시 할머니
하예정의 방에서 그녀는 한창 할머니를 도와 캐리어 안의 물건을 꺼내 정리했다. 할머니는 그녀의 집에서 마실 물병까지 챙겨왔다.“할머니,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나오셨어요?”“어휴, 말도 마라. 이게 다 내가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서지. 종일 속만 썩이고 잘해줘도 내 마음 몰라. 그래서 아예 다 내려놓고 당분간 너희 집에서 지내려고.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하예정은 물건을 다 정리한 후 욕실에 들어가 할머니를 위해 온수를 받았다.“할머니, 물 다 받았어요. 들어와서 따뜻하게 샤워하세요.”할머니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잠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이래서 딸이나 손녀가 필요하다니까. 여자애는 얼마나 세심해. 너도 봤지, 내가 오고 나서 태윤이 그 녀석 관심하는 말 한마디 없었어. 그래도 우리 예정이밖에 없네.”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할머니 애초에 저랑 태윤 씨 엮어주실 때 태윤 씨가 엄청 자상하고 꼼꼼하다고 하셨잖아요. 자식들은 알아서 자기 인생 잘 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할머니는 이젠 노후를 잘 보내시기만 하면 돼요. 불필요한 것들 신경 쓰지 말아요.”하예정이 볼 때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들은 다들 효심이 지극했다.“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처럼 쉽니? 내가 태윤이가 자상하고 꼼꼼하다고 했었어? 그럼 넌 어때? 걔가 정말 내 말처럼 자상하고 꼼꼼해?”하예정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전태윤은 그녀를 신경 쓸 때 정말 꼼꼼하고 자상한 편이었다.어디 전태윤뿐이겠는가,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몹시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기면 항상 그 사람만 주시하고 한없이 자상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어르신은 샤워를 마친 후 하예정의 침대에 누웠다.하예정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어르신은 이미 단꿈에 빠져 있었다.다만...어르신은 엄청 요란하게 코를 골았다.하예정은 속수무책해졌다.그녀는 술을 마셔야만 코를 골든 천둥이 치든 깊이 잠들지만 평상시엔 작은 인기척에도 밤잠을 설친다.하예정은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이 할
이제 막 몇 걸음 걸어갔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그녀의 방이 아니라 전태윤의 방이었다.그는 따뜻한 잠옷을 입고 물컵을 들고 나왔는데 보아하니 물 마시러 가려는 듯싶었다.정면으로 마주친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전태윤은 불을 켜고 하예정에게 물었다.“아직 안 잤어?”하예정은 살짝 난처한 얼굴로 나지막이 속삭였다.“그게... 할머니가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아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어서요.”전태윤은 그녀의 방문 앞에 다가가 문을 열고 안을 힐긋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의 요란한 코골이 소리가 일부러 연기하는 소리라는 걸 그는 바로 알아챘다. 전태윤은 방문을 닫고 하예정에게 물었다.“그럼 넌 어디서 자려고?”“숙희 아주머니 방에 들어가려 했는데 좀처럼 깨어나지 않으세요. 방문도 안으로 잠겨서 들어갈 수 없어요. 그냥 소파에서 자야죠 뭐.”전태윤이 물을 따르러 가면서 소파에 놓인 베개와 외투를 보았다.“오늘 밤 꽤 춥더라고요. 비까지 오니 발이 너무 차가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방에 돌아가 양말 챙겨 신고 나오려고요. 태윤 씨, 우리 내일 이불 몇 개 더 사 와요. 손님방에 침대도 하나 마련하고요.”애초엔 부부가 각방을 쓰느라 손님방에 침대를 놓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숙희 아주머니가 오신 후에도 아주머니의 침대와 옷장만 마련했을 뿐 다른 손님방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여 오늘 밤 이 집안의 안주인 하예정은 잘 곳이 없어졌다.“태윤 씨 방에 물 있잖아요.”하예정은 그에게 얼굴을 씻겨줄 때 방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없는 게 없었다.전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물은 있는데 아직 끓이지 않았어.”하예정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그녀는 소파에 앉아서 물을 따르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전태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태윤 씨.”문 앞까지 도착한 전태윤이 그녀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혹시... 태윤 씨 방에 이불 하나 더 있어요?”“없어.”“그럼... 태윤 씨 침대 시트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