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이후로 하예진은 더는 주형인 때문에 속상해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우빈이.”문득 떠오른 아들 생각에 하예진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언니, 숙희 아주머니한테 우빈이 챙기러 가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우빈이도 보통 밤에 깨지 않잖아.”주우빈은 장난기가 많을 때는 그야말로 개구쟁이가 되어 장난감을 온 바닥에 널브러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얌전할 때는 또 무척이나 얌전했다. 특히 밤에 잘 때 불편한 데만 없으면 거의 깨질 않는다.하예진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예정아, 제부, 두 사람은 여길 어떻게 찾았어요?”아들 걱정이 사라지니 하예진도 그제야 다른 질문을 할 여유가 생겼다. 하예정이 언니를 탓했다.“언니, 우린 친자매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 자매끼리 서로 의지하며 15년을 살았어.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서로에게 알려서 상의해야지. 그런데 이번에 언니는 나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어. 그러니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 태윤 씨 친구가 주형인의 외도 증거를 모아줬었어. 아주 능력이 있는 분이라 그분한테 물어보니까 주형인이 이곳에 있다고 바로 알아내더라고. 그래서 나랑 태윤 씨 당장 달려왔지.”“언니, 앞으로 무슨 일이든 다 나한테 말해, 알았지? 혼자서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나 이젠 다 컸어. 예전에 언니가 지켜주던 꼬맹이가 아니야.”하예진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아까 두 년놈을 때리지 말라고 말린 건 그것들이 상해죄로 널 고소해서 치료비를 물어내라고 할까 봐 그랬어. 걔네들이 나한테 미안한 짓을 했더라도 네가 폭행을 저지르면 법적으로는 너한테 불리해. 하지만 언니가 직접 때리면 달라. 도둑이 제 발 저리니까 나한테 맞아도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지, 절대 배상해라고는 못해. 예정아, 언니를 믿어. 언니가 알아서 잘 해결할 수 있어. 정말로 너의 도움이 필요할 땐 언니가 직접 너한테 얘기할게.”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고작 15살이었다. 어린 그녀는 극성 친척들의 괴롭힘을 당하면서
‘태윤 씨를 아무리 믿어도 그렇지, 어떻게 제사상의 술을 훔쳐 마신 창피한 일까지 얘기할 수 있어.’전태윤이 하예정을 빤히 쳐다보자 하예정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언니, 그게 몇 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그 얘기야.”그것도 전태윤의 앞에서 말이다. 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너 그날 밥 먹고 침대에서 종일 잤어. 주량이 약하면서 마시기는 좋아한다니까. 술만 마시면 아주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져. 제부, 그냥 엄청난 경사가 아니면 얘한테 술 먹이지 말아요.”전태윤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대답했다.“네, 처형. 명심할게요.”하예진이 꺼낸 옛날얘기로 한바탕 웃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이혼하면 이혼했지,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지구에 누구 하나 사라진다고 자전이 멈추는 것도 아니고 주형인과 헤어진다고 해도 하예진은 여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다.호텔에 나선 하예진은 어두운 밤하늘을 잠깐 올려다보더니 동생네 부부를 불렀다.“가자, 언니가 맛있는 야식 사줄게. 아니지, 아침 먹을 때가 다 됐네. 언니가 싱글이 된 걸 미리 축하하자.”시간은 벌써 새벽 다섯 시가 되었다. 하예정과 전태윤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언니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곧장 아침을 먹으러 갔다. 식사를 마친 후 전태윤은 먼저 하예진을 광명 아파트에 데려다준 다음에 하예정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왔을 땐 날도 훤히 밝았다.“태윤 씨.”전태윤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고마워요, 태윤 씨.”전태윤은 그녀에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려는 순간 자신의 품에 와락 끌어안은 후 나지막이 말했다.“우린 부부야. 나한테 이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하예정은 그를 한참 동안 빤히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그의 목을 잡고 먼저 키스했다. 그런데 이번에 전태윤은 예전처럼 주객전도한 게 아니라 그녀의 입을 막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보며 물었다.“지금 이 키스는 나한테 주는 보수야? 아니면 날 좋아해서 하는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하예정은 뭔가 깨달은 듯 떠보듯이 물었다.“태윤 씨, 설마 나더러 얼굴 씻겨달라는 건 아니죠?”“너 때문에 얼굴에 검게 칠한 건데.”그 말인즉슨 그녀에게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다. 하예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왜 점점 뻔뻔스럽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지?’“알았어요, 나 때문에 얼굴에 검게 칠한 거니까 씻겨줄게요. 차라리 온 얼굴에 다 칠하지 그랬어요?”그러면서 그를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전태윤은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두어 걸음 옮기다가 이내 멈추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주방에는 왜 가?”“주방에 물이 있잖아요. 태윤 씨 방은 금지 구역이라 들어갈 수 없으니 주방에서 안 씻으면 어디서 씻어요?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래요? 내가 젖은 수건을 가져와서 닦아줄게요. 닦아질지는 모르겠지만.”전태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결국에는 제 발등을 제가 찍는 격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태윤이 한동안 입을 꾹 다물다가 덤덤하게 말했다.“내 방 화장실에 내가 평소에 쓰는 남성용 클렌징이 있어. 그걸로 지워질 거야.”그러고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던 그때 다시 고개를 돌려 명령조로 말했다.“얼른 와서 씻겨주지 않고 뭐해!”하예정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태윤 씨가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간 거예요. 내가 함부로 쳐들어간 게 아니라. 앞으로 싸우게 되면 이 일로 뭐라 하지 말아요. 난 늘 약속을 지키고 약속대로 움직이는 사람이거든요.”그녀의 말에 전태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갈 때 전태윤이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앞으로 또 싸우길 바라나 보지?”“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 싸우기 마련이에요. 싸우지 않는 부부가 어디 있어요?”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속은 좁아서 싸울 때마다 카톡 연락처를 지우고 그러잖아. 그러고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나랑 냉전하고.’그녀는 앞으로 함께 살면서 싸우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일리 있는 그녀의 말에 전태윤은 아무런 반박도
웃옷을 벗은 전태윤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하예정을 발견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하예정이 그에게 물었다.“더 벗어요?”그러더니 아직 벗지 않은 그의 바지를 가리켰다. 전태윤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세수하다가 웃옷이 젖을까 봐 벗은 거였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전태윤이 하예정 앞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을 만지작거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역시 평소 운동하는 남자의 몸매는 다르네요.”전태윤은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만지지 못 하게 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하예정, 내 몸을 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한 가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적응이 됐는지 전태윤은 하예정의 이마에 딱밤을 여러 번 때린 후 재미를 들였다. 물론 아프지 않게 살짝만 때렸다. 세게 때렸다가 아프다고 그와 등을 돌리면 안 되니까.하예정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날 감상하라고 옷 벗은 거 아니었어요? 그거 좀 만진다고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내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했어요?”“난 네가 내 얼굴을 씻겨주다가 옷이 젖을까 봐 벗은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아니면 다시 입을까? 내 얼굴 씻겨주다가 옷이 다 젖어서 나중에 옷까지 빨아줄래?”“그냥 벗어요.”전태윤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째려보았다.‘방심했네.’그녀는 예전부터 가끔 유혹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그녀 앞에서 옷을 벗었는데 그를 놀리지 않으면 하예정이 아니지.“하하하!”하예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전태윤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방자한 그녀를 통제하려면 뭔가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전태윤은 깔깔거리며 자신을 비웃는 하예정을 꽉 잡고 세면대 앞으로 확 당겼다. 순간 하예정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전태윤은 그녀를 꽉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제대로 세운 후 자주 쓰는
“어르신들은 퇴직해서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장사라도 하는 게 좋아. 힘들지 않고 돈도 얼마 되진 않겠지만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실 수 있잖아. 나도 전에는 부모님한테 용돈을 드렸었어. 그런데 기어코 싫다고 하더라고. 한번 드릴 때마다 오히려 배로 다시 주셨어. 마누라한테나 주라면서.”하예정은 지난번에 전태윤의 부모님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시아버지는 나이가 지긋하지만 부드럽고 점잖았고 관리도 아주 잘한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조금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교양이 있어 난처하게 굴진 않았다. 그녀와 얘기할 때도 나긋나긋한 말투를 잊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훨씬 더 관리를 잘하였기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걷는다면 자매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이젠 결혼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하예정이 시댁 식구 중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그래도 할머니였다. 다른 가족은 그저 지난번에 식사 자리에서 잠깐 만났을 뿐 그 후에는 별로 만난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시댁이 정확히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할머니와 사이가 가까운 하예정이 할머니에게 물었지만 할머니는 산 이름을 알려주면서 산꼭대기에 집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집이 엄청 많다면서 대충 어느 집이라고 얘기하셨지만 하예정은 더욱 어리둥절했다.결국 할머니는 전태윤이 데리고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전태윤은 그녀에게 집으로 가자는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계약서 생각에 하예정은 더는 시댁에 관해 묻지 않았다. 어차피 부부가 백년해로할 것도 아닌데 시댁이 어디인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시댁 식구들이 전부 교양이 넘친다는 것이다. 동년배의 시댁 식구들도 맏형수인 그녀에게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태윤 씨 부모님들은 상당히 깨어 있는 분들이에요.”전태윤이 피식 웃었다.“우리 집 어른들이 다 그래.”하예정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한참 동안 씻고 나서야 겨우 깨끗하게 씻어냈다.“다음부터는 이렇게 칠하지 말아요. 우리가
하예정은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은 후 문에 기댄 채 얼굴을 만져보았다. 얼굴이 아직도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도 왜 얼굴이 빨개졌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어젯밤에 간통 현장을 잡으러 갔다가 귀신이라도 씌었나...’하예정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샤워하러 들어갔다. 이따가 전태윤에게 아침을 준비해줘야 하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 숙희 아주머니 생각에 하예정은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머니, 이따가 우빈이 데리고 바로 가게로 오시면 돼요. 집에 들를 필요 없어요.”“알았어요.”“언니는 어때요?”“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요. 이따가 아침 먹고 출근해야 한다고 해서 지금 커피 한잔 타고 있어요.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해야 하니까 커피라도 마시면 정신이 들까 해서요.”하예정은 그런 언니가 마음 아팠지만 출근한 지 며칠 안 되어 휴가 내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언니한테 스쿠터 조심해서 타라고 전해주세요.”“그럴게요.”전화를 끊은 하예정은 곧장 샤워하러 들어갔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습관적으로 화장대 앞으로 가서 머리를 빗었다. 그런데 문득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뭔가가 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내가 그린 금비녀 어디 갔지?’그건 그녀가 직접 만들어서 인터넷에서 팔려고 그린 비녀 샘플이었는데 족히 이틀 저녁이라는 시간을 들여 그린 것이었다.하예정은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그림을 찾았다. 그런데 한참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왜 없어졌지? 분명 화장대 위에 놓았었는데? 내 방에 들어온 사람도 없는데...”그런데 문득 어젯밤 그녀가 곯아떨어져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는 바람에 안고 올라와 침대에 눕혔다는 전태윤의 말이 떠올랐다.전태윤이 그녀의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대장부인 전태윤이 금비녀를 가져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진짜도 아니고 그림인데 말이다.숙희 아주머니가 출근하신 후로 낮에는 줄곧 그녀와 함께 가게에 있었다.‘어젯밤에 먼저 들어가긴 했지만 설마 폐지라
하지만 그녀는 아무 기억이 없었다.‘고작 맥주 두 병에? 맥주 마시고 깊이 곯아떨어졌다고 해도 취하진 않았는데 왜 토했지? 너무 많이 먹어서 토했나?’하예정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그림 한 장인데 전태윤이 그녀를 속일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알겠다고 한 후 더는 캐묻지 않았다.‘역시 언니 말 들어야 해. 앞으론 술 적게 마셔야겠어.’“다시 찾아줄까?”“그걸 어떻게 찾아요? 찾아도 다 망가졌을 텐데. 괜찮아요. 나중에 시간 되면 다시 그리면 돼요.”전태윤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그 그림이 그렇게 중요한 건지 몰랐어. 그냥 아무거나 잡다 보니까 네 그림이더라고. 다음에 다 그리면 화장대 위에 놓지 마. 침대랑 너무 가까워.”“네.”하예정이 속으로 생각했다.‘그런 일이 맨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맨날 술 마시는 것도 아닌데, 뭐.’“태윤 씨, 자책하지 말아요.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내 책임이에요. 다시 그리면 되니까 괜찮아요.”“아니면 샘플로 쓰게 진짜 금비녀 하나 사줄까?”하예정이 황급히 거절했다.“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그리면 돼요.”전태윤은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왜 예정이가 내 재산 보고 나랑 초고속 결혼했다고 의심했었지? 아마 할머니가 맨날 뭐라 하신 것도 있고 할머니를 구한 적도 있어서 할머니를 구한 보수를 얻으려고 했다고 색안경 끼고 봤을 거야.’지금까지 계속 그녀를 오해하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원래는 계약서를 써서 그녀를 통제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계약서대로 잘 지키는 바람에 오히려 통제를 당하는 건 그였다.어젯밤 계약서를 없애버렸다는 생각에 전태윤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먹었다. 마음속의 돌덩이가 쑥 내려갔으니 앞으로는 아무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다.아침 식사 후, 하예정은 설거지를 했고 전태윤은 하예정이 내려준 커피를 들고 발코니로 가더니 그네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사실 인스턴트 커피였지만 그가 지금까지 마셨던 그 어떤 커피보다도 맛있었다
회사 건물 앞에서 전태윤을 기다리던 소정남이 전태윤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난 오늘 네가 회사에 안 나오는 줄 알았어.”소정남은 전태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경호원들은 건물 앞까지만 동행했다.“내가 회사에 안 나오고 너한테 회의 사회를 맡겼다간 전생에 나한테 빚진 걸 이번 생에 갚는다느니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 아니야.”“네가 날 계속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는 걸 알긴 아네.”전태윤은 그를 힐끗 째려보았다.“난 너한테 능력을 선보일 기회를 주는 거야. 내가 너한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더라면 너희 가문의 중시를 받을 수나 있었겠어?”소씨 가문의 젊은 세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났다. 소정남이 젊은 세대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건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전태윤과 가까이 지내면서 전씨 그룹의 핵심 임원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는 가주의 아들이 아님에도 가주의 중시를 받았고 소씨 가문의 중요한 조카였기에 소씨 가문에서 소정남의 지위가 아주 높았다. 게다가 가주 자리에도 관심이 없어 가주 아들의 신임을 얻었고 두 사람은 친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냈다.소정남이 배시시 웃었다.“그건 네가 날 너의 정보통으로 키우기 위해서 그런 거지. 마침 내가 또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잖아. 네가 나한테 부탁하는 사적인 일들은 전부 흥미로운 뉴스거리들이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돈이 부족해서 너의 개인적인 일을 연예 전문 기자한테 아무거나 말해도 엄청 많은 돈을 벌걸?”두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후 전태윤이 말했다.“너의 재산을 몽땅 나한테 넘기지 않는 이상 네가 돈이 부족할 일은 없어.”소정남은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고 구경하길 좋아하지만 그래도 입은 아주 무거운 사람이었다. 안 그러면 전태윤이 그에게 믿고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성기현이 소정남을 여러 번이나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정남을 빼앗아가려 했는지 모른다. 소정남에게서 전씨 그룹 내부의 기밀을 빼내려 했지만 전부 실패했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