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이후로 하예진은 더는 주형인 때문에 속상해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우빈이.”문득 떠오른 아들 생각에 하예진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언니, 숙희 아주머니한테 우빈이 챙기러 가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우빈이도 보통 밤에 깨지 않잖아.”주우빈은 장난기가 많을 때는 그야말로 개구쟁이가 되어 장난감을 온 바닥에 널브러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얌전할 때는 또 무척이나 얌전했다. 특히 밤에 잘 때 불편한 데만 없으면 거의 깨질 않는다.하예진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예정아, 제부, 두 사람은 여길 어떻게 찾았어요?”아들 걱정이 사라지니 하예진도 그제야 다른 질문을 할 여유가 생겼다. 하예정이 언니를 탓했다.“언니, 우린 친자매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 자매끼리 서로 의지하며 15년을 살았어.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서로에게 알려서 상의해야지. 그런데 이번에 언니는 나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어. 그러니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 태윤 씨 친구가 주형인의 외도 증거를 모아줬었어. 아주 능력이 있는 분이라 그분한테 물어보니까 주형인이 이곳에 있다고 바로 알아내더라고. 그래서 나랑 태윤 씨 당장 달려왔지.”“언니, 앞으로 무슨 일이든 다 나한테 말해, 알았지? 혼자서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나 이젠 다 컸어. 예전에 언니가 지켜주던 꼬맹이가 아니야.”하예진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아까 두 년놈을 때리지 말라고 말린 건 그것들이 상해죄로 널 고소해서 치료비를 물어내라고 할까 봐 그랬어. 걔네들이 나한테 미안한 짓을 했더라도 네가 폭행을 저지르면 법적으로는 너한테 불리해. 하지만 언니가 직접 때리면 달라. 도둑이 제 발 저리니까 나한테 맞아도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지, 절대 배상해라고는 못해. 예정아, 언니를 믿어. 언니가 알아서 잘 해결할 수 있어. 정말로 너의 도움이 필요할 땐 언니가 직접 너한테 얘기할게.”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고작 15살이었다. 어린 그녀는 극성 친척들의 괴롭힘을 당하면서
‘태윤 씨를 아무리 믿어도 그렇지, 어떻게 제사상의 술을 훔쳐 마신 창피한 일까지 얘기할 수 있어.’전태윤이 하예정을 빤히 쳐다보자 하예정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언니, 그게 몇 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그 얘기야.”그것도 전태윤의 앞에서 말이다. 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너 그날 밥 먹고 침대에서 종일 잤어. 주량이 약하면서 마시기는 좋아한다니까. 술만 마시면 아주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져. 제부, 그냥 엄청난 경사가 아니면 얘한테 술 먹이지 말아요.”전태윤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대답했다.“네, 처형. 명심할게요.”하예진이 꺼낸 옛날얘기로 한바탕 웃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이혼하면 이혼했지,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지구에 누구 하나 사라진다고 자전이 멈추는 것도 아니고 주형인과 헤어진다고 해도 하예진은 여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다.호텔에 나선 하예진은 어두운 밤하늘을 잠깐 올려다보더니 동생네 부부를 불렀다.“가자, 언니가 맛있는 야식 사줄게. 아니지, 아침 먹을 때가 다 됐네. 언니가 싱글이 된 걸 미리 축하하자.”시간은 벌써 새벽 다섯 시가 되었다. 하예정과 전태윤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언니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곧장 아침을 먹으러 갔다. 식사를 마친 후 전태윤은 먼저 하예진을 광명 아파트에 데려다준 다음에 하예정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왔을 땐 날도 훤히 밝았다.“태윤 씨.”전태윤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고마워요, 태윤 씨.”전태윤은 그녀에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려는 순간 자신의 품에 와락 끌어안은 후 나지막이 말했다.“우린 부부야. 나한테 이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하예정은 그를 한참 동안 빤히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그의 목을 잡고 먼저 키스했다. 그런데 이번에 전태윤은 예전처럼 주객전도한 게 아니라 그녀의 입을 막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보며 물었다.“지금 이 키스는 나한테 주는 보수야? 아니면 날 좋아해서 하는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하예정은 뭔가 깨달은 듯 떠보듯이 물었다.“태윤 씨, 설마 나더러 얼굴 씻겨달라는 건 아니죠?”“너 때문에 얼굴에 검게 칠한 건데.”그 말인즉슨 그녀에게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다. 하예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왜 점점 뻔뻔스럽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지?’“알았어요, 나 때문에 얼굴에 검게 칠한 거니까 씻겨줄게요. 차라리 온 얼굴에 다 칠하지 그랬어요?”그러면서 그를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전태윤은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두어 걸음 옮기다가 이내 멈추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주방에는 왜 가?”“주방에 물이 있잖아요. 태윤 씨 방은 금지 구역이라 들어갈 수 없으니 주방에서 안 씻으면 어디서 씻어요?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래요? 내가 젖은 수건을 가져와서 닦아줄게요. 닦아질지는 모르겠지만.”전태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결국에는 제 발등을 제가 찍는 격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태윤이 한동안 입을 꾹 다물다가 덤덤하게 말했다.“내 방 화장실에 내가 평소에 쓰는 남성용 클렌징이 있어. 그걸로 지워질 거야.”그러고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던 그때 다시 고개를 돌려 명령조로 말했다.“얼른 와서 씻겨주지 않고 뭐해!”하예정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태윤 씨가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간 거예요. 내가 함부로 쳐들어간 게 아니라. 앞으로 싸우게 되면 이 일로 뭐라 하지 말아요. 난 늘 약속을 지키고 약속대로 움직이는 사람이거든요.”그녀의 말에 전태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갈 때 전태윤이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앞으로 또 싸우길 바라나 보지?”“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 싸우기 마련이에요. 싸우지 않는 부부가 어디 있어요?”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속은 좁아서 싸울 때마다 카톡 연락처를 지우고 그러잖아. 그러고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나랑 냉전하고.’그녀는 앞으로 함께 살면서 싸우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일리 있는 그녀의 말에 전태윤은 아무런 반박도
웃옷을 벗은 전태윤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하예정을 발견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하예정이 그에게 물었다.“더 벗어요?”그러더니 아직 벗지 않은 그의 바지를 가리켰다. 전태윤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세수하다가 웃옷이 젖을까 봐 벗은 거였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전태윤이 하예정 앞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을 만지작거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역시 평소 운동하는 남자의 몸매는 다르네요.”전태윤은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만지지 못 하게 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하예정, 내 몸을 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한 가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적응이 됐는지 전태윤은 하예정의 이마에 딱밤을 여러 번 때린 후 재미를 들였다. 물론 아프지 않게 살짝만 때렸다. 세게 때렸다가 아프다고 그와 등을 돌리면 안 되니까.하예정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날 감상하라고 옷 벗은 거 아니었어요? 그거 좀 만진다고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내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했어요?”“난 네가 내 얼굴을 씻겨주다가 옷이 젖을까 봐 벗은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아니면 다시 입을까? 내 얼굴 씻겨주다가 옷이 다 젖어서 나중에 옷까지 빨아줄래?”“그냥 벗어요.”전태윤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째려보았다.‘방심했네.’그녀는 예전부터 가끔 유혹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그녀 앞에서 옷을 벗었는데 그를 놀리지 않으면 하예정이 아니지.“하하하!”하예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전태윤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방자한 그녀를 통제하려면 뭔가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전태윤은 깔깔거리며 자신을 비웃는 하예정을 꽉 잡고 세면대 앞으로 확 당겼다. 순간 하예정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전태윤은 그녀를 꽉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제대로 세운 후 자주 쓰는
“어르신들은 퇴직해서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장사라도 하는 게 좋아. 힘들지 않고 돈도 얼마 되진 않겠지만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실 수 있잖아. 나도 전에는 부모님한테 용돈을 드렸었어. 그런데 기어코 싫다고 하더라고. 한번 드릴 때마다 오히려 배로 다시 주셨어. 마누라한테나 주라면서.”하예정은 지난번에 전태윤의 부모님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시아버지는 나이가 지긋하지만 부드럽고 점잖았고 관리도 아주 잘한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조금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교양이 있어 난처하게 굴진 않았다. 그녀와 얘기할 때도 나긋나긋한 말투를 잊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훨씬 더 관리를 잘하였기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걷는다면 자매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이젠 결혼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하예정이 시댁 식구 중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그래도 할머니였다. 다른 가족은 그저 지난번에 식사 자리에서 잠깐 만났을 뿐 그 후에는 별로 만난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시댁이 정확히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할머니와 사이가 가까운 하예정이 할머니에게 물었지만 할머니는 산 이름을 알려주면서 산꼭대기에 집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집이 엄청 많다면서 대충 어느 집이라고 얘기하셨지만 하예정은 더욱 어리둥절했다.결국 할머니는 전태윤이 데리고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전태윤은 그녀에게 집으로 가자는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계약서 생각에 하예정은 더는 시댁에 관해 묻지 않았다. 어차피 부부가 백년해로할 것도 아닌데 시댁이 어디인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시댁 식구들이 전부 교양이 넘친다는 것이다. 동년배의 시댁 식구들도 맏형수인 그녀에게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태윤 씨 부모님들은 상당히 깨어 있는 분들이에요.”전태윤이 피식 웃었다.“우리 집 어른들이 다 그래.”하예정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한참 동안 씻고 나서야 겨우 깨끗하게 씻어냈다.“다음부터는 이렇게 칠하지 말아요. 우리가
하예정은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은 후 문에 기댄 채 얼굴을 만져보았다. 얼굴이 아직도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도 왜 얼굴이 빨개졌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어젯밤에 간통 현장을 잡으러 갔다가 귀신이라도 씌었나...’하예정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샤워하러 들어갔다. 이따가 전태윤에게 아침을 준비해줘야 하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 숙희 아주머니 생각에 하예정은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머니, 이따가 우빈이 데리고 바로 가게로 오시면 돼요. 집에 들를 필요 없어요.”“알았어요.”“언니는 어때요?”“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요. 이따가 아침 먹고 출근해야 한다고 해서 지금 커피 한잔 타고 있어요.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해야 하니까 커피라도 마시면 정신이 들까 해서요.”하예정은 그런 언니가 마음 아팠지만 출근한 지 며칠 안 되어 휴가 내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언니한테 스쿠터 조심해서 타라고 전해주세요.”“그럴게요.”전화를 끊은 하예정은 곧장 샤워하러 들어갔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습관적으로 화장대 앞으로 가서 머리를 빗었다. 그런데 문득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뭔가가 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내가 그린 금비녀 어디 갔지?’그건 그녀가 직접 만들어서 인터넷에서 팔려고 그린 비녀 샘플이었는데 족히 이틀 저녁이라는 시간을 들여 그린 것이었다.하예정은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그림을 찾았다. 그런데 한참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왜 없어졌지? 분명 화장대 위에 놓았었는데? 내 방에 들어온 사람도 없는데...”그런데 문득 어젯밤 그녀가 곯아떨어져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는 바람에 안고 올라와 침대에 눕혔다는 전태윤의 말이 떠올랐다.전태윤이 그녀의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대장부인 전태윤이 금비녀를 가져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진짜도 아니고 그림인데 말이다.숙희 아주머니가 출근하신 후로 낮에는 줄곧 그녀와 함께 가게에 있었다.‘어젯밤에 먼저 들어가긴 했지만 설마 폐지라
하지만 그녀는 아무 기억이 없었다.‘고작 맥주 두 병에? 맥주 마시고 깊이 곯아떨어졌다고 해도 취하진 않았는데 왜 토했지? 너무 많이 먹어서 토했나?’하예정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그림 한 장인데 전태윤이 그녀를 속일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알겠다고 한 후 더는 캐묻지 않았다.‘역시 언니 말 들어야 해. 앞으론 술 적게 마셔야겠어.’“다시 찾아줄까?”“그걸 어떻게 찾아요? 찾아도 다 망가졌을 텐데. 괜찮아요. 나중에 시간 되면 다시 그리면 돼요.”전태윤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그 그림이 그렇게 중요한 건지 몰랐어. 그냥 아무거나 잡다 보니까 네 그림이더라고. 다음에 다 그리면 화장대 위에 놓지 마. 침대랑 너무 가까워.”“네.”하예정이 속으로 생각했다.‘그런 일이 맨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맨날 술 마시는 것도 아닌데, 뭐.’“태윤 씨, 자책하지 말아요.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내 책임이에요. 다시 그리면 되니까 괜찮아요.”“아니면 샘플로 쓰게 진짜 금비녀 하나 사줄까?”하예정이 황급히 거절했다.“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그리면 돼요.”전태윤은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왜 예정이가 내 재산 보고 나랑 초고속 결혼했다고 의심했었지? 아마 할머니가 맨날 뭐라 하신 것도 있고 할머니를 구한 적도 있어서 할머니를 구한 보수를 얻으려고 했다고 색안경 끼고 봤을 거야.’지금까지 계속 그녀를 오해하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원래는 계약서를 써서 그녀를 통제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계약서대로 잘 지키는 바람에 오히려 통제를 당하는 건 그였다.어젯밤 계약서를 없애버렸다는 생각에 전태윤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먹었다. 마음속의 돌덩이가 쑥 내려갔으니 앞으로는 아무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다.아침 식사 후, 하예정은 설거지를 했고 전태윤은 하예정이 내려준 커피를 들고 발코니로 가더니 그네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사실 인스턴트 커피였지만 그가 지금까지 마셨던 그 어떤 커피보다도 맛있었다
회사 건물 앞에서 전태윤을 기다리던 소정남이 전태윤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난 오늘 네가 회사에 안 나오는 줄 알았어.”소정남은 전태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경호원들은 건물 앞까지만 동행했다.“내가 회사에 안 나오고 너한테 회의 사회를 맡겼다간 전생에 나한테 빚진 걸 이번 생에 갚는다느니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 아니야.”“네가 날 계속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는 걸 알긴 아네.”전태윤은 그를 힐끗 째려보았다.“난 너한테 능력을 선보일 기회를 주는 거야. 내가 너한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더라면 너희 가문의 중시를 받을 수나 있었겠어?”소씨 가문의 젊은 세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났다. 소정남이 젊은 세대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건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전태윤과 가까이 지내면서 전씨 그룹의 핵심 임원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는 가주의 아들이 아님에도 가주의 중시를 받았고 소씨 가문의 중요한 조카였기에 소씨 가문에서 소정남의 지위가 아주 높았다. 게다가 가주 자리에도 관심이 없어 가주 아들의 신임을 얻었고 두 사람은 친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냈다.소정남이 배시시 웃었다.“그건 네가 날 너의 정보통으로 키우기 위해서 그런 거지. 마침 내가 또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잖아. 네가 나한테 부탁하는 사적인 일들은 전부 흥미로운 뉴스거리들이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돈이 부족해서 너의 개인적인 일을 연예 전문 기자한테 아무거나 말해도 엄청 많은 돈을 벌걸?”두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후 전태윤이 말했다.“너의 재산을 몽땅 나한테 넘기지 않는 이상 네가 돈이 부족할 일은 없어.”소정남은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고 구경하길 좋아하지만 그래도 입은 아주 무거운 사람이었다. 안 그러면 전태윤이 그에게 믿고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성기현이 소정남을 여러 번이나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정남을 빼앗아가려 했는지 모른다. 소정남에게서 전씨 그룹 내부의 기밀을 빼내려 했지만 전부 실패했
하예정은 무언가 떠오른 듯 전태윤에게 말했다. “태윤 씨, 우리도 리조트에 이틀 정도 지내러 갈까요? 주말에 출근도 안 하고 서점도 주말에는 문을 안 열잖아요.” 예전에는 서점만 운영할 때 주말에도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사업이 커지면서 서점은 그냥 하예정과 심효진의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돈을 더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애정으로 운영하는 곳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았다. 전태윤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친구인 소정남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를 읽고 나서 그는 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래, 우리도 리조트에 가서 주말을 보내자.” “어머님, 아버님, 할머니도 오늘 가시니까 소정남 씨와 효진이도 불러서 점심 같이 먹어요. 샤부샤부 어때요? 오랜만에 샤부샤부 먹고 싶어요.” 하예정이 자주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는 것에 전현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이의도 없이 받아들였다. 하예정이 자신의 어머니와 꽤 닮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것 같았다. 예전에 전씨 할머니가 일부러 하예정을 자신의 은인으로 만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덕분에 온 가족이 하예정에게 감사하게 되었고 전씨 할머니는 장남인 전태윤에게 하예정과 결혼하라고 했다. 전현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수법은 정말 대단해. 손자들도 어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다행히 전태윤과 하예정은 사이가 좋았으며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하예정을 아끼는 전태윤은 당연히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그는 소정남에게 답장을 보냈다. “예정아, 우리 아침 먹고 리조트로 가자. 소정남이랑 효진 씨도 리조트에서 만나자. 샤부샤부는 사람이 많아야 더 맛있잖아. 예준하 씨랑 소현 누나도 불러야겠다.” 전태윤이 제안했다. 하예정은 성소현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성소현은 사양했다. 그녀는 예준하와 A 시로 날아가 예진 리조트에서 며칠 지낼 예정이었다. 예준하를 계속 관
전태윤은 그를 속인 거였다. 하예정은 주우빈에게 답장을 보냈다. [눈이 왔구나. 우빈이 운이 좋네, 갔는데 바로 눈이 와서 진짜 눈을 볼 수 있게 됐구나.] [눈사람도 만들 수 있네. 이모는 지금까지 눈사람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아침 맛있게 먹었어? 옷 많이 입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너희 셋째 작은 아버지는 여행 갔는데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있어야 돌아올 거야. 네가 따라가면 유치원에 못 가잖아.] 다행히 전호영은 빨리 도망친 덕분에 주우빈에게 붙잡히지 않았다. 하예정의 답장을 받은 주우빈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하예정과 주우빈은 30분 동안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친 후, 전태윤은 중얼거렸다. “오늘에서야 우빈이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 알았네. 당신이랑 30분 동안이나 이야기하다니.” 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 “우빈이는 앞으로 수다쟁이가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따뜻한 남자가 될 거예요.” 따뜻한 남자에다 수다쟁이라니... “9시가 넘었네요. 부모님과 할머니도 일어나셨을 거예요. 우리도 얼른 서둘러야죠. 창빈 도련님은 오늘 원림성의 A 시로 가는 거예요?” 전태윤은 먼저 그녀의 옷을 가져오며 말했다. “월요일에 갈 거야. 이틀 정도는 집에서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려고.” 10여 분 후, 부부는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 거실 소파에는 전현림 혼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전씨 할머니와 장소민, 그리고 어제 형의 집에서 잔 전창빈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님.” 부부는 전현림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전현림은 부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일어났구나. 아침 식사 준비해 뒀어. 아직 따뜻할 거야. 먹으러 가.” “엄마랑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전태윤이 물었다. “창빈이는 아직 안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엄마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창빈이도 같이 갔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 할머니가 산책하러 나가시다니.” 전태윤이 말했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예진아, 늦었어. 얼른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내일 아침 같이 먹자.” 노동명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다. 하예진은 그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동명 씨, 잘 자요.” “잘자.” 하예진은 그를 밀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직접 휠체어를 조종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달콤한 미소였다. 그날 밤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지나갔다. 주말 아침, 출근할 필요도 없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평소 일찍 일어나던 전태윤도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다. 그는 침대에 늘어져 아내의 따뜻한 핫팩이 되어 주었다. 관성의 기온이 떨어져 정말 추웠지만 사실 기온은 아직 10도 정도였다. 낮에는 최대로 10도 중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관성 사람들은 너무 추웠다.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인터넷으로 두꺼운 옷을 주문했다. 관성 사람들이 옷을 주문하면 판매자들은 재빨리 발송했다. 며칠 후 주문이 취소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관성의 추위는 찬 공기가 남하할 때 며칠 동안 추워지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발송이 늦으면 날씨가 풀리고 나서 두꺼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지면서 주문을 취소하게 된다. 방에는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가장 추운 며칠 동안 전태윤은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그는 보일러를 켜면 하예정이 더워서 자신의 품에 안기지 않을까 봐 일부러 켜지 않았다. 그가 하예정이 자신의 품에 안기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건 절대 예정이에게 들키면 안 돼. 아니면 또 교활하다고 할 거야.’ ‘카톡!’ 하예정의 카톡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잠에서 깼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전태윤에게 말했다. “여보, 누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는지 좀 봐줘요. 너무 시끄러워요.” 전태윤이 말했다. “내 생각엔 우빈일 거야.” “우빈이는 엄마랑 있어서 이렇게 일찍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직 꿈나라에 있을지도 몰라요.”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꺼내 그녀에게 먹여줬다. 영화가 끝날 즈음, 하예진은 그가 챙겨준 음식으로 배부르게 먹고는 그를 보고 말했다. “이제 됐네요. 야식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예요. 또 산책하면서 소화라도 좀 시켜야겠어요.” 노동명이 일어나자 하예진과 보디가드가 그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노동명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를 밀면서 호텔까지 걸어가. 산책하면서 소화 시키는 거지.” 하예진도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뭐. 그런데 걸어가면 길을 못 찾을지도 몰라요. 길을 잘못 들면 우리 둘 다 강성의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돌아다녀야 할 거예요. 저 원망하지 마요.” “그럴 리 없어.” 지금은 밤이 더욱 깊어졌다. 영화관을 나오니 거리의 떠들썩함은 사라지고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하예진은 노동명을 천천히 밀며 걸었다. 보디가드들은 두 사람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보호했다. 걷다 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명 씨, 눈이 오네요. 빨리 차 타고 호텔로 돌아가요.” 어느 정도 걷자 하예진은 더 이상 배가 부르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오니 길이 미끄러워 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되었다. “그래.” 노동명은 아무런 이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에게는 그녀의 말이 곧 정답이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이내 그들은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주우빈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강일구는 주우빈과 함께 있었다. 하예진이 돌아오자 강일구는 방으로 돌아갔다. “우빈이 자고 있어?” 노동명은 방에 들어와 주우빈을 보았다. 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불을 살짝 덮어주며 말했다. “보일러 온도는 적당하면 돼, 너무 높일 필요 없어. 우빈이가 땀을 흘리고 있잖아.” 아이는 더우면 이불을 걷어차는 버릇이 있었다. 하예진은 온도를 조금 낮췄다. 노동명은 주우빈의 땀을 닦아주고 이불을 살짝 걷어내 더 덥지 않게 했다. 노동명의 행동을 보며 하예진의 눈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그는 주
노동명은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한 번, 손바닥에 한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하예진은 다급하게 손을 뺐다. 그녀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영화관 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그녀를 주시하지 않아 그녀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동명 씨, 진지하게 좀 굴어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노동명은 늘 거칠고 대범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쳤으며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그런 그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녀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마치 어린 소녀처럼 변했다. 하예정은 언니가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은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명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진지해질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예진아, 앞으로 네가 휴식을 원할 때,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서 바람을 좀 쐬고 싶다면 나에게 말만 해줘. 아무리 바빠도 내 손에 있는 일을 내려놓고 너와 함께 나갈 수 있어. 일도 중요하지만 너의 행복이 더 중요해. 나는 돈도 충분히 있어. 예전에 번 돈이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했어. 지금 일을 하는 건 그냥 시간을 보내고 약간의 용돈을 버는 정도야. 나에게는 너와 우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해.” 하예진은 그를 꾸짖듯 말했다. “동명 씨가 말하는 약간의 용돈은 다른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도 못 버는 금액이에요. 동명 씨,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하예진이 식당을 운영하며 매출이 좋아 월 순이익이 꽤 높다고 하더라도 그가 버는 돈에 비하면 그녀의 이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잇, 비교하니까 열 받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하며 온 힘을 다해야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다. 일반 직장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노동명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젊은 시절 고생하며 노력한 결과다. 노동명은 업계에서 십여 년을 뛰어다니며 오늘의 성과를 이루었다. 노
우빈은 새 장난감을 들고 호텔로 돌아가 놀고 싶었다.아직 강성의 밤 구경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하예진이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우빈아, 일구 삼촌과 함께 호텔로 돌아가서 놀아달라고 할래? 엄마랑 아저씨랑 좀 더 돌아다니다가 돌아갈게.”우빈은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하여 강일구는 우빈을 데리고 호텔로 돌아갔다.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계속 돌아다녔다. 이는 두 사람만의 데이트나 다름없다.“동명 씨, 우리 영화 보러 갈까요? 이 근처에 큰 영화관이 있거든요. 저는 거의 매일 그 영화관 입구를 지나다녔는데도 영화를 보러 갈 시간이 없었어요.”노동명이 간절히 원하던 바였다.그는 즉시 경호원에게 먼저 영화표를 사라고 지시했고 그와 하예진은 천천히 걸어갔다.십여 분 후, 두 사람은 영화관 입구에 도착했다.경호원은 표를 끊고 간식도 사 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간식을 먹으면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단지 영화를 보고 싶을 뿐이고 구매한 표도 곧 시작하게 된다.영화관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면 곧 들어갈 수 있었다.노동명은 휠체어를 타지 않고 한 손으로 경호원의 어깨를 잡고 나머지 한 손은 하예진이 부축하여 들어갔다.자리에 앉은 노동명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들 주변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그와 하예진, 그리고 몇 명의 경호원들이 두 사람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경호원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었다.“영화관에 와서 영화를 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노동명은 자리에 앉은 뒤 감개무량하게 한마디 했다.하예진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저도 몇 년 됐어요.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온 적 없어요.”결혼한 뒤로 영화를 보기는커녕 주형인은 그녀와 함께 쇼핑하는 것조차 점점 더 짜증을 냈다.그는 하예진이 물건을 살 때 항상 물건을 이리저리 비교하여 싼 물건을 고르는 모습을 싫어했다.하예진은 그때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배속의 태아를 돌봐야 했다. 저축한 돈은 모두 신혼집을 꾸미는 데 썼기에 돈 가방
하예진은 아들의 이마를 톡 쳤다.“뭐라고 한 거야?”우빈은 하예진이 때린 곳을 만지며 노동명에게 말했다.“아저씨, 엄마가 절 아프게 때렸어요. ‘호’ 해주세요.”노동명은 재빨리 불어주고는 다시 어루만져주며 하예진을 나무랐다.“예진아, 우빈 이마를 자꾸 치지 마. 똑똑한 애가 멍청해지면 어떡해.”“똑똑하면 똑똑하고 멍청하면 멍청한 아이인 거예요. 제가 몇 번 쳤다고 멍청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멍청한 건 녀석이 원래 멍청한 아이였기 때문이에요.”“우리 우빈은 똑똑하거든 멍청하지 않는단 말이야.”우빈은 하예진에게 혀를 내밀고는 얼른 노동명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노동명 아저씨가 그를 보호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우빈을 아껴주던 노동명은 결국 우빈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들어갔다.가게에 들어간 우빈은 노동명 품으로부터 바닥에 미끄러져 내려와 먼저 몇 권의 유아용 스케치북을 가져와서 하예진의 앞에서 귀여운 얼굴을 들고 물었다.“엄마, 이거요. 저 장난감을 더 사도 돼요?”노동명이 녀석에게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녀석은 엄마의 뜻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만약 하예진이 그에게 새 장난감을 사지 말라고 고집한다면 그도 사지 않을 것이다.하예진이 대답했다.“하나만 사.”우빈이가 대답했다.“네.”우빈은 장난감 몇 개 더 사려고 했지만, 하예진이 한 가지만 살 수 있다고 하니 하나만 사는 수밖에!녀석은 얼른 가서 그의 장난감을 고르고 있었다.노동명은 우빈이가 여러 장난감을 어루만지며 전부 가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우빈이 좋아하는 건 다 사자. 내가 선물로 사줄게.”“동명 씨, 너무 아이 뜻에만 따르면 안 돼요. 한 가지만 고르게 해요. 장난감도 가지고 왔던데.”그러나 하예진은 아들에게 장난감 하나만 사주겠다고 고집했다.노동명은 어쩔 수 없이 하예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는 우빈이가 원하는 것을 전부 사서 우빈에게 주고 싶었다.“우빈은 너무 많은 사람이 사랑해주고 아껴
“엄마, 하나만 사줘요. 네?”우빈은 계속해서 졸라댔다.“안 돼. 장난감을 사도 여기저기 쌓여 있을 텐데. 네가 놀다가도 정리하지 않으면 엄마가 대신 치워야 하잖아.”“엄마, 제가 다 치울게요. 앞으로 다 치울게요.”우빈도 스스로 정리하고 있었다. 다만 가끔 치우지 않을 때도 있었을 뿐이다.“장난감을 가지고 왔잖아.”하예진은 우빈에게 장난감을 너무 많이 사주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녀석이 장난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우빈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새 장난감 사고 싶어요. 제가 새것 사 가서 동생에게 줄게요.”“그 동생은 아직 어려서 못 놀아.”“그럼, 스케치북을 사줘요. 글씨를 쓰고 숫자도 적으면서 놀래요. 네?”우빈이는 한발 물러서서 스케치북이라고 사고 싶었다.그 장난감 가게에는 연필들과 책들도 많았다.우빈은 그 가게를 다 돌아본 후에야 엄마를 찾으러 돌아와서 사달라고 졸랐다.강일구는 우빈이가 좋아하는 것을 사준다고 했지만, 녀석은 감히 받지는 못하고 하예진의 뜻을 물어보려고 했다.하예진은 항상 우빈의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 두 번째 장난감 방도 가득 찼다고 잔소리했다.우빈은 장난감을 매우 사랑했다. 어떤 장난감은 실수로 망가져도 엄마가 버리겠다고 하면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다.하예진이 쓰레기통에 버리면 녀석은 전부 도로 주워왔다.“스케치북은 사줄게.”우빈은 금세 원숭이처럼 노동명의 허벅지에 올라가 자신을 안아달라고 요구했다.그리고 하에진이 그들을 밀고 앞으로 가게 했다.“엄마, 그럼 우리 스케치북 사러 가요.”가게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녀석이 원하는 것을 전부 이룰 수 있었다.우빈은 여러 대의 큰 장난감 차와 강아지 인형이 갖고 싶었다.정말 탐나는 장난감이었다!그는 엄청 좋아했다.“스케치북만 사. 이따가 돌아오면 그림도 그려.”하예진은 그녀의 아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그녀는 손을 뻗어 아들의 이마를 콕 찔렀다.“엄마가 네 곁에 없었는데 유치원에서 돌아와서
노동명은 다정하게 말했다.“널 위해서 늘 재활을 꾸준히 하고 있어. 회사 일은 특히 중요할 때만 나가서 처리하거든. 우리 형도 도와줘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노동명은 그윽한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예진아,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난 정말로 재활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하면서 평생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바보.”“아니거든. 난 단지 너와 우빈을 너무너무 사랑했을 뿐이야. 남들은 네가 이혼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어. 내가 널 알게 되었을 때에도 넌 뚱뚱하고 못생겼는데 내가 왜 널 좋아하게 되었는지 몰라... 근데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나도 그 이유를 찾고 싶지도 않아. 아마 너의 강인함과 감히 자신을 개변시키는 그 능력에 매료되었을지도 모르지. 난 우빈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사실 난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느껴져서 안 좋아하거든. 근데 처음으로 우빈을 보자마자 좋아하게 되었다.”“저도 알아요. 저도 제 아들 덕을 봤죠.”노동명은 우빈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빈의 엄마, 즉 하예진에게 조금 더 많은 관심과 포용력을 갖게 되었다.그러다가 접촉 횟수가 많아졌고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 정이 들었다.“우빈이가 우리 두 사람 중매를 선 거나 다름없어.”노동명은 헤벌쭉 웃었다.“태윤이도 마찬가지야. 태윤 때문이 아니었다면 널 알지도 못했을걸. 예진아, 네가 강성에서 일을 마치면 나랑 결혼하는 건 어때?”하예진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노동명이 계속하게 말했다.“내가 정상적으로 걷지 못해도 난 결혼하고 싶어. 난 이미 스스로 설 수 있어. 그리고 몇 걸음 정도는 앞으로 걸을 수 있게 됐고. 1년이란 시간을 더 주면 분명 정상적으로 걸어 다닐 수 있을 거야. 근데 난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노동명은 지금 36세이고, 2년만 더 기다리면 38세까지 될 것이다.곧 있으면 마흔이 된다.하예진은 속으로 흐뭇해하며 대답했다.“좋아요. 저야 지금 당장이라도 동명 씨와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요. 근데 동명 씨가 원하지 않잖아요.”노동명은 자신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