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선생님 의술은 정말 훌륭하죠. 이진 씨가 오기 전에 정 선생님께서도 오셨어요. 너무 바빠서 10분도 못 머무르고 떠났지만요.”정겨울은 예준하의 넷째 형수이고 또 성소현과 예준하가 커플이었기에 성씨 가문과 예씨 가문은 앞으로 사돈이 될 것이다. 하여 유청하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정겨울도 자연스레 아기 보러 병원으로 왔다.“맞아요. 또 환자들에게 진찰해 주어야 하니까요.”전이진은 늘 정겨울에게 감사했다. 정겨울은 의사 선배의 덕에 여운초의 눈이 이미 반쯤 치료되었다고 말했고 그녀가 여운초에게 약을 조금만 더 쓰면 여운초가 금방 빛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전이진은 여전히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이진 씨와 운초 씨 결혼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죠?”“네, 얼마 안 남았어요.”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전이진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형수님은 언제 퇴원하세요?”“순산이라 이틀이면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전이진은 또 알았다고 대답했다.전이진과 성기현은 서로 나눌 얘기가 별로 없었다. 주로 과거에 성씨 가문과 전씨 가문은 서로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이다.그 뒤로 하예정이 이모를 되찾은 후 친척 관계가 맺어지자 두 가문도 하예정을 위해 이전처럼 죽기 살기로 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가문이 서로 협력하거나 친구처럼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가끔 뒤에서 서로를 찌르기도 했지만, 너무 깊게 찌르지 못했다. 하예정이 알게 되면 중간에 끼여 난처해지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곧 이야기할 거리가 없어지자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성기현은 전이진에게 물었다.“TV 볼래요? 제가 TV를 켜드릴게요.”“괜찮아요. 이따가 리조트로 돌아갈 거에요.”“네.”또 할 말이 없어졌다.다행히 여운초가 안에서 빨리 나왔다.아기가 잠든 후 그녀는 아기를 유청하의 옆에 눕혀 엄마 옆에서 자도록 했다. 아기가 더 오래 잘 수 있기 때문이다.여운초가 나오자 전이진은 몸을 일으켜 약혼녀를 맞이하러 일어섰다.여운초가 입을 열었다.“청하 언니가 쉬
성씨 가문 별장 대문 앞에 세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선두에 선 그 차의 운전사는 경적을 울렸다.곧 집사가 나왔다.집사는 먼저 문을 열고 차창 앞으로 다가갔고 운전사가 제때 차창을 내리눌렀다.“누구를 찾으세요?”집사는 차 뒷좌석의 사람을 보았다. 늙은 여자가 앉아있었지만, 집사가 여태껏 본 적 없는 모르는 사람이었다.집사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감히 별장 안으로 쉽게 들여보내지 못했다.그러자 운전기사가 대답했다.“우리 가주님께서 성씨 가문의 큰 사모님께서 출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이곳으로 축하드리러 왔어요. 우리 집 가주의 성씨는 이씨 성입니다.”이씨 성이라고?집사는 조금 더 분명히 묻고 싶었지만, 갑자기 이윤미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억났고 집사도 무언가 깨달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들어가서 우리 사모님께 말씀드릴게요.”운전사가 고개를 돌려 이은화를 보았고 이은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운전사가 알았다고 대답했다.집사는 몸을 돌려 들어갔다.몇 분 후, 집사가 나왔다.집사는 별장의 문을 열어 이은화의 차가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집사의 도움으로 이은화의 차량은 주차장에 잘 주차되었다. 이은화가 곧 차에서 내렸고 그녀의 경호원들도 뒤를 따랐다.“선물을 들여보내고 바로 나와. 내가 여기서 기다릴게.”이은화가 경호원들에게 엄숙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경호원들도 공손하게 대답했다.집사가 이은화 일행을 집안으로 모셨다.이은화는 급하게 방에 들어오지 않고 성씨 가문의 정원 환경을 둘러보다가 한참 후에야 집사를 따라갔다.화장한 덕에 이은화의 늙은 얼굴을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 쓰인 불쾌함도 잘 감추었다. 그러나 집사는 그 표정을 포착하지 못했다.이은화는 이경혜가 직접 마중 나오지 않아 조금 불쾌했다. 이은화는 자신이 귀한 손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게다가 그녀는 이경혜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이기도 했다.비록 이은화는 이경혜가 자신의 조카딸이라고 백
이은화도 이경혜를 보면서 자신의 맏언니의 그림자를 찾으려고 애썼다. 듬직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맏언니를 닮았다는 것 빼고는 외모는 별로 안 닮았다. 하지만 형부를 많이 닮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그 누구도 나서서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이경혜가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앉으세요.”이은화는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경혜의 앞에서 멈추어 섰고 이경혜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우리 형부를 많이 닮았네. 어렸을 적 넌 네 아빠를 많이 닮았고 네 동생이 우리 맏언니를 많이 닮았는데.”“무슨 뜻이죠?”이경혜가 냉랭하게 물었다.이은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도 이미 많이 알고 있다는 걸 나도 알아. 강성에서 돌아다니는 헛소문을 너도 모를 리가 없겠지.”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은 강성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었다.다들 이씨 가문 전임 가주의 두 딸이 관성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그녀의 친딸까지 몰래 관성에 와서 그 일에 관해 조사했다.이은화도 그녀가 관성에 온 지 보름 만에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전부 알아냈다.주로 관성에서 이씨 성을 가지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연령대가 이은화의 조카딸에게 맞는 사람은 이경혜뿐이었다.게다가 이경혜의 젊은 시절의 위대한 업적으로 놓고 봐도 이은화는 의심할 필요 없이 이경혜가 바로 그녀의 조카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업계에서 장사하는 이경혜의 야무진 모습에는 맏언니의 그림자가 보였다.그 당시, 맏언니가 아이를 낳고 나서도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회사와 가족 일로 바삐 돌아쳐 이은화에게 부분적인 일을 맡기지 않았더라면 맏언니와 여동생을 쓰러뜨리고 가주 자리에 앉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이경혜는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알죠. 사람들은 모두 말하죠. 저와 제 여동생을 제외한 제 가족들이 모두 당신 손에 죽었다고. 그리고 제 이모도 당신 손에 죽었죠.”이은화의 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 앞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경호원들에게 그녀가 가져온
성문철이 차를 끓여왔다.이경혜는 이은화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고 그 찻잔을 이은화 앞에 놓으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우리가 나타났으니 그럼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우리에게 양보할 겁니까?”이경혜의 여동생은 죽었지만, 이경혜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또 두 자매가 모두 딸을 낳았다.이씨 가문의 규칙에 따르면, 이경혜의 딸은 이씨 성을 따서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를 계승해야 하지만 성소현이 원하지 않으면 이경혜의 여동생의 후손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이은화는 이경혜가 이런 물음을 물어볼 줄은 몰랐다.두 사람은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만났지만, 조카는 이은화와 이야기할 때 항상 말속에 가시 달린 말을 내뱉었고 이은화의 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이은화도 조카가 믿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이은화는 관성에 있는 이경혜의 전설도 낱낱이 조사했다.하지만 이은화는 여전히 이경혜가 그렇게 예리하게 말을 내뱉을 줄 몰랐다.이은화는 잠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이경혜는 똑바로 앉아 이은화를 빤히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위로 약간 올렸다. 마치 이은화의 허위를 풍자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이은화는 속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맏언니와 여동생을 꺾어버리고 가주 자리에 오른 뒤로 아무도 감히 이런 태도로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고 모두 공손한 태도로 이은화를 대했다.다른 사람의 존중과 공손함에 익숙해진 이은화는 이경혜에게 이런 소리 없는 수모를 겪었기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화를 내지 못했다.이곳은 성씨 가문의 저택이었다. 그것도 관성이었다. 이씨 가문의 땅이 아니었기에 이은화는 아무리 화가 나도 참아야 했다.“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가주님께서 우리 자매를 찾으셨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도 사실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 가주님께서 우리 자매를 찾아 잘 보살피려고 하는지 아니면 아예 뿌리를 뽑고 싶은지 누가 알겠어요.”“경혜야!“이은화는 낮고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이은
“네 여동생이... 잘 지내지 못한 것도 난 정말 마음이 아파. 내가 소용없어서 너희들을 이제야 겨우 찾았어. 좀 더 일찍 찾았더라면, 너의 여동생도 그렇게 비참하게 살지 않았을 건데. 그러면 하예진 자매도 기댈 곳도 생겼을 텐데.”“경혜야, 수십 년 전과 지금은 다르잖아. 잘 생각해 봐. 예전에는 사람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어. 휴대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먼 길을 떠나는 것도 엄청 어려웠고. 게다가 카메라도 얼마 없었어. 인터넷도 안 되는 시대라서 사람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어.”이경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이은화가 연기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이은화의 말이 끝나자 이경혜가 그제야 말을 이었다.“제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제가 우리 엄마의 장녀로서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겁니다. 그 자리를 이어받을 사람이 이모도 이윤정도 아닌 저라고요. 참, 이윤정은 이씨 가문의 혈육도 아니죠? 이모도 정말 대단하세요. 딸이 바뀐 줄도 모르고 이십여 년을 키우시다니.”이은화의 안색은 더 안 좋아졌다. 그러나 이경혜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후회스러운듯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윤미가 태어났을 때 집안에 일이 복잡했어. 내가 어쩔 수 없이 약한 몸을 이끌고 집안일을 처리해야 했기에 윤미를 소홀히 대한거지. 그래서 전 집사에게 기회가 주어진 거고.”“그 뒤로 다시 아기를 보았을 때 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았는데 며칠 못 봐서 모양이 변했나 싶었어. 갓 태어난 아기들이 다 똑같게 생겼으니 더는 의심하지도 않은 거지. 그런데 정말 전 집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꾸미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가장 노릇을 하는 것도 엄청 힘들어. 곳곳에 모두 신경을 써야 하거든. 우리 언니가 살아계셨을 때 너를 후계자로 삼아 키운 것도 가족 모두가 인정하는 일이었는데...”이은화는 그 찻물로 목을 추긴 후 계속 말을 이었다.“언니에게 사고가 생겼고 여동생도 따라서 떠났던 그 시절은 정말 우리 이씨 가문의 가장 어두운 기간이었어.
이은화는 할 말이 없었다.하예진도 함께 교육하라고 말했다.이은화는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녀는 이미 집주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고 그녀가 일할 수 없게 되면 틀림없이 친딸에게 집주인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이윤미는 이은화의 핏줄이었기 때문에 이윤정과 달리 하나를 가르쳐주면 두 개를 알았다.이윤미는 교활했다. 돼지 분장을 한 호랑이였기에 지금 강성의 사람들 모두 그 계집애에게 속고 있었다.다들 이윤미가 연약하고 만만하다고 생각했다.이윤미가 시골에서 자라 시야가 넓지 못해 이씨 가문으로 돌아온다 해도 능력이 없어서 성과를 얻는다고 해도 모두 그녀 팀원들의 덕분이라고 여겼다.겉으로 이은화가 친딸에 대한 태도가 항상 안 좋게 보였고 여전히 이윤정이라는 양녀를 더 아낀듯했다.이윤정이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은화는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이윤미라는 친딸을 받아들였다.이윤미가 그녀의 곁에서 자라지 않았고 또 이은화도 나이도 많아 몇 년만 더 버티고 퇴직해야 했다. 보편적으로 가주들은 아무리 건강해도 80세 이전에 은퇴했다. 늙을수록 혼란스러워지고 의사결정 또한 대가족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윤미가 빨리 모든 것을 익히게 하려고, 이윤미가 돼지로 분장한 호랑이라는 것을 발견한 이은화는 친딸을 협조해 함께 연기하게 되었다.그녀는 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비로소 가주 자리에 올랐고 또 수십 년을 거쳐 후계자를 길러냈는데 다시 이 모든 것을 언니의 후손에게 물려주라고 하면 그녀는 분명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이은화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을 보더니 이경혜는 또 “호호”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이은화의 귀를 푹푹 찌르는 것만 같았다.그녀의 이 조카는 어렸을 때 매우 대단했다. 그녀의 맏언니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십 년 후에 다시 만나도 여전히 대단했다.이경혜는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더 자질이 있다고 해도 이경혜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이경혜는 성씨 가문에 시집간 후 시아버지와 남편의 신
적을 놓치면 자신을 해치는 거나 다름없다.“우리 집에 보양식이 부족하지는 않아요.”이경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네 집에 보양식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도 난 잘 알아. 그런데 이 물건들은 내 마음을 대표하는걸. 우라 수십 년을 서로 못 봤잖아. 이젠 내가 널 찾게 되었으니 앞으로 우라 자주 만나자.”“얼마 전부터 확인하러 오고 싶었지만, 항상 시간이 없었어. 이번 전 대표님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는 김에 네가 내 조카딸이라는 것을 확인했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이은화는 이 말을 내뱉을 때 아주 부드럽고 자애로운 말투로 말했다.이경혜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한 둘째 이모에 대해 열정을 가질 수 없었고 심지어 가족 상봉에 대한 설렘도 찾아볼 수 없었다.“예정이가 전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다니 너무 좋은 소식이야.”이경혜가 무뚝뚝하게 앉아만 있는 것을 본 이은화는 스스로 화제를 찾아야 했다.“네 여동생도 이제 저승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거야. 두 딸이 지금 매우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야. 우리도 어른으로서도 안심할 수 있고.”전태윤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이은화는 하예정에게서 큰 언니의 그림자를 찾으려고 했지만, 하예정은 큰 언니와 닮지 않았다고 느꼈다. 오히려 꽃을 뿌리던 우빈이가 그녀의 맏언니와 아주 비슷하다고 느꼈다.당시 이은화는 요행을 바라면서 하예정이 맏언니의 후손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수소문하고 사실을 확인한 그녀는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이경혜가 바로 그녀의 큰 조카였다.그리고 하예정 자매는 맏언니의 후손이었다.하예정은 관성의 갑부 전씨 가문에 시집갔고 이경혜는 성씨 가문의 사모님으로 살고 있었다. 관성에서는 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이 가장 큰 가문이었다. 만약 두 가문이 서로 손을 맞잡는다면 이씨 가문은 아마도 패배하고 말 것이다.심사숙고 끝에 이은화는 결국 성씨 가문을 방문하여 허심탄회하게 조카딸과 관계를 인정하려 했다.그 깊은 원한은 수십 년이 흘렀는데 누가 맏언니를 죽였다는
“다른 일이 없으시면 돌아가세요. 제가 병원에 가서 손자를 보러 가야 하거든요.”이경혜는 이은화와 이제는 말을 나누기 귀찮아 몸을 일으켜 손님을 배웅할 준비를 했다.이은화가 아무리 뻔뻔해도 이제는 남아있지 못할 것이다.이은화는 그녀가 성씨 가문으로 오면 이경혜가 따뜻하게 맞이할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더니 이경혜가 그녀를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더니 또 이내 마음이 풀렸다.하지만 이경혜와 하예진 자매는 이은화와 보통 친척들처럼 지낼 수 없었다.그들은 은화가 살인자라고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은화가 일어나며 말했다.“며칠 후 강성으로 돌아갈 거야. 경혜야, 손자가 한 달 되는 날에 나한테 전화해. 내가 축하주 마시러 올게.”“얼른 가요.”이경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은화는 이경혜를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또 성문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조카사위도 집에서 정군호 같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그녀들 이씨 가문의 여자들은 모두 성격이 무척 강했다.성문철이 아내를 도와 이은화가 가져온 수많은 선물을 전부 이은화에게 돌려주었다.“이 선물들은 네 며느리가 몸보신하라고 가져온 거야. 우리가 몇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해서 감정이 없긴 하지만 우리 모두 같은 핏줄이 흐르고 있는데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 내가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영양제들을 선물한 거니 거절하지 마.”“감사해요. 우리 집에는 영양제들이 부족하지 않거든요. 가져가세요. 아니면 제가 쓰레기 처분할 겁니다.”이경혜는 자신의 며느리를 이은화가 보내준 영양제들을 먹게 하지 않을 것이다.이은화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이경혜는 이은화에게 어떠한 체면도 세워주지 않았다.이은화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설득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고 이내 이경혜에게 말했다.“이 물건은 내가 너희 집으로 가져온 선물이니 네가 처리하고 싶은 대로 해.”이은화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이경혜 부부는 물건을 든 채로 그녀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