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서는 계속 침착하게 심효진을 타일렀다.“효진아, 예정이와 자꾸 비교하지 마, 예정이는 예전에 무술을 배운 적이 있어서 몸이 튼튼하지만, 넌 상황이 다르잖아. 모든 일에 만족할 줄 알아야 즐거운 법이고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점점 더 작아지고 불행해져.”심효진은 나은서의 충고에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알겠어요. 이제부터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게요. 정남 씨도 내가 다른 임산부들처럼 배가 불러오고 나서도 악착같이 일할 필요 없이 그저 편안한 생활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정남이가 너한테 잘해준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네 시댁 식구들도 널 친딸이라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간섭을 하는 거야. 10달 동안 네가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산모와 아이가 모두 건강해.”심효진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효진아. 엄마가 예정이한테 줄 영양제들을 챙길 테니까 넌 과일을 좀 씻어서 아빠랑 정남이한테 가져다줘. 물론 예정이가 이런 게 부족한 건 아니겠지만, 엄마의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하예정이 열한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아이들과 싸우는 바람에 가방끈이 끊어졌고 옷도 구질구질해졌다.그때 심효진은 하예진이 알까 봐 두려워 감히 셋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하예정을 자기의 집으로 데려왔다.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자, 나은서는 하예정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하예정의 책가방을 기워줬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킨 후 효진의 옷으로 갈아입혔다.나은서는 아직도 그날 하예정의 머리를 헤어드라이어로 말려주면서 왜 싸웠냐고 물었던 기억이 생생했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눈에는 하예정이 너무나 온순해 보여서 반 친구들과 갈등이 생겨도 기껏해서 말다툼만 할 뿐, 주먹다짐은 안 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나은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하예정은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예정아, 왜 그래? 누구한테 맞은 거야? 어디 다쳤는지 아줌마한테 보여줄래?”하예정은 나은서가 곁으로 와서
하예정의 옷이 모두 더러워졌고 책가방의 끈도 그들에게 잡아당겨서 끊어졌다.그래서 그녀는 언니가 알면 속상할까 봐 월세방으로 돌아가지 못했다.언니는 고등학교에 다녀서 공부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에 돈도 별로 없었다.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받은 보상금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등이 나눠 가졌고 두 자매에게 조금만 남겨주었다.언니는 돈을 절약해서 사용해야 두 자매가 대학까지 다닐 수 있다고 하였다.그래서 하예정은 언니가 망가진 책가방을 보면 꼭 돈을 써서 새 가방을 사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감히 집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 심효진이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심효진의 어머니인 나은서는 그때 많이 놀랐고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하예정을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언니가 발견하지 못하게 책가방의 끈을 꼭 수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하예정의 더러워진 옷도 깨끗이 빨아주었고 마르면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게 하였다.나은서는 하예정의 교복 사이즈가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이에 하예정은 예전의 교복이 작아서 언니의 교복을 주워 입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언니는 다섯 살 위여서 옷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나은서는 옷을 만들 줄 알고 전기 재봉틀도 사용할 줄 알아서 하예정의 사이즈가 맞지 않는 교복을 몸에 맞게 수선해 주었다.며칠 지난 일요일에 하예진이 여동생을 데리고 사과 한 봉지를 사서 방문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나은서에게 있어서 하예정은 자기 딸의 동창이고 옷을 조금 수선해 주는 것은 그냥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예정 자매에게 있어서 나은서는 그들에게 따뜻함을 주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두 자매는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따뜻하고 차가운 인정과 친척의 무정함을 뼈저리게 느낀 후 나은서가 한 사소한 일은 겨울날의 따뜻한 햇살처럼 두 자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엄마가 키운 닭도 계란을
“엄마, 지금 바로 예정이에게 갖다주실 거예요?”심효진은 사과를 먹으면서 물었다.“당연히 지금 보내야지. 넌 저녁 먹고 갈 거야? 내가 예정이에게 물건을 보내고 돌아온 후 바로 저녁 준비할게.”나은서는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면서 딸에게 물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을 불렀다.“여보, 같이 가요. 이따가 물건을 위층으로 옮기는 것을 도와줘야죠.“심범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당신 안 불러도 따라가려고 했어.”그는 조수석의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러고 나서 딸과 사위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 떠났다.소정남은 집 앞의 계단에 서서 장인과 장모가 하예정에게 많은 물건을 준비했고 또 다급히 가져다주는 모습을 보고 마당의 문을 닫고 걸어 나오는 아내에게 말했다.“하예정에게 준 물건은 당시 우리 집에 보내준 것과 비슷한 것 같네.”“난 예정이와 십여 년 동안 친하게 지냈어. 엄마, 아빠도 예정이를 보고 자라서 벌써 딸로 여겼지. 지금 예정이가 임신했으니 엄마도 기뻐서 당연히 뭐 좀 챙겨줘야지.”심효진은 부모님의 행동은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좀 휴식하자.”소정남은 아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출근하려면 가. 난 좀 자고 나서 가게로 갈게.”“너랑 같이 자고 싶어. 네가 잠들면 회사로 갈게. 전씨 그룹은 전태윤의 것인데 쟤가 출근하지 않고 내가 가서 소처럼 일해줘야 하다니. 하, 전생에 내가 쟤한테 빚을 졌나 봐.”소정남은 불만이 있어도 결국은 다시 회사에 돌아가서 출근했다....관성 공항.성소현은 가방을 팔에 걸고 예준하와 깍지를 끼면서 걸어가고 있었다예준하는 그녀의 캐리어를 끌어주었다.사실 그는 성소현과 급히 관성에 올 필요가 없었다. 친조카가 막 백일 잔치를 치렀으니까. 하지만 성소현은 하예정이 임신한 사실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서 돌아오고 싶었다. 그래서 예준하도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돌아오게 되었다.두 사람은 걸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성소현의 기분이 현저하게 좋아 보였다. 예준하는 그녀가 기분이 좋은 것
“소현 씨.”앞에서 귀에 익은 소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래 기분이 좋은 성소현과 예준하는 소지훈의 건방지게 웃는 얼굴을 마주 보기 싫어서 손오공처럼 변신해서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소지훈은 너무 건방졌다. 성소현 옆에 예준하가 있고 두 사람이 깍지를 끼고 친밀하게 있는 모습을 봤으면서 여전히 눈꼴 사나운 사랑의 훼방꾼으로 되려고 하였다.예준하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리 성소현과 같이 관성에 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소현을 홀로 보냈다면 소지훈을 따라서 갔을지도 모른다. 소지훈은 분명히 성소현에게 진심이 아니면서 이렇게 매달리다 못해 매일 선물을 사다 줄 뿐만 아니라 성소현이 관성을 떠나면 공항까지 배웅해 주고 마중도 나와서 어찌 보면 자기보다 더 부지런했다.“소현 씨, 저 여기서 30분 기다렸는데 드디어 왔네요. 벌써 가신 줄 알았어요.”소지훈은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마스크를 썼고 올블랙을 입어서 자신의 모습을 빈틈없이 가려주었다. 그리고 평소에 잘 나타나지 않아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예전 같았으면 성소현과 예준하도 소지훈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소지훈에게 한동안 ‘구애’를 당한 후 성소현은 쉽게 소지훈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예준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소지훈을 연적으로 간주했기에 소지훈의 목소리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소지훈이 입만 열면 예준하는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고 잘생긴 얼굴도 숯처럼 검게 변한다.도대체 어느 놈이 자기에게 소지훈 같은 ‘연적’을 심어둔 거야?!다른 사람이라면 예준하는 벌써 연적을 때려눕혔다. 하지만 상대가 소지훈이어서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소지훈의 미움을 사면 도리어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억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예준하는 형에게 불평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본인은 하늘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고 감정도 진지하게 대했는데 하늘이 왜 그에게 이런 사랑의 시련을 줬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이전에 예준하는 전태윤이 초고속 결혼을
“준하 씨가 제 차를 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하니까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는 소현 씨를 마중하기 위해 나온 것이니까요. 겸사겸사 준하 씨를 챙기려고 했는데 싫다면 알아서 가시죠.”소지훈은 늘 웃으면서 말했지만, 예준하의 귀에는 말마다 가시가 있어서 가슴이 답답했다.소지훈은 성소현에게 물었다.“준하 씨가 들고 있는 캐리어가 소현 씨 거죠? 여자들이 핑크색을 좋아하니까 핑크색 캐리어가 소현 씨 거 맞죠?”그는 말하면서 예준하의 손에서 성소현의 캐리어를 가져와서 차 뒤로 끌고 갔다. 그는 캐리어를 가볍게 들어서 트렁크에 밀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웃으면서 성소현에게 말했다.“관성 호텔에서 자리를 예약했고 음식도 주문해 놨으니 가서 바로 식사하면 돼요.”“식사 후에 집에 돌아가든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든지 제가 사람을 보내서 곁에 있어 줄 게요.” 다시 말하면, 그는 성소현과 함께 있지 않겠다는 뜻이다.소지훈은 성소현을 마중해서 목적지에 데려다준 후 바로 튀려고 하였다.그의 아버지는 전태윤이 곧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가 그렇지 못했다고 한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아이를 낳지 못한 것처럼. 아, 그는 여자가 아니니까 확실히 낳지 못한다. 하예정의 임신 사실은 가까운 지인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씨 가문의 가주에게 있어서 비밀은 아니다. 그는 귀를 움직이기만 해도 많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지훈 씨, 고마워요. 저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성소현은 소지훈이 직접 나왔으니 그녀가 아무리 거절해도 결국은 그의 차를 타고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거절하지 않고 바로 예준하를 끌고 소지훈의 차에 올라탔다. 소지훈은 웃으면서 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는 돌아서 다른 쪽으로 차에 올라타려고 했는데 뭔가를 밟은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숙여 보니 한 열쇠고리였다. 열쇠고리에 작은 거울 같은 것이 달려 있는데 1인치의 사진이 있다. 소지훈은 그 열쇠고리를 주워서 먼지를 깨끗하게 닦아 내자 작은 사
소지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또 웃으면서 말했다.“이해할 수 있어요. 예정 씨가 태준 씨와 결혼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임신을 못 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이제 임신했으니 마음을 놓을 수 있고 다들 기뻐해 주는 것도 인지상정이죠.”이에 예준하는 한마디 건넸다.“지훈 씨가 이후에 아버지가 된다면 많은 사람이 기뻐해 줄 겁니다.”소지훈에게 감정이 없는 병이 있어서 그의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여인을 만나지 못하면 환관처럼 한평생 진정한 남자로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 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예준하의 이 말은 소지훈의 정곡을 찔렀지만, 소지훈은 이미 내려놓아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이런 병에 걸려도 죽지 않으니 평생 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그는 웃으면서 말했다.“제가 아버지로 될 기회가 있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집에 있는 영감이 가장 좋아하실걸요.”그가 감정이 없는 병에 걸리는 것을 모르고 있을 때, 부모님은 그의 결혼을 걱정하셨지만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런 병에 걸린 것을 아신 후 부모님은 완전히 미쳐버렸다.그들은 무슨 여자이든 모두 그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가 정상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여자가 나타나기를 바랐다.아쉽게도 부모님이 찾아 주신 여자에 대해 그는 추호의 반응도 없었다.“참, 당시 전씨 할머니께서 한 점쟁이를 청해서 태윤 씨와 예정 씨의 사주를 봐줬는데 예정 씨는 가을에 임신한다고 했죠?”소지훈은 문득 사주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성소현은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는 하예정과 사촌 자매 관계라 하예정은 평소에 늘 그녀에게 하소연해서 가장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사실이에요. 하지만 이 일은 전씨 할머니께서 예정이가 매일 임신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위로해 주기 위해서 꾸민 일이에요. 전씨 할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예정이는 의욕을 잃고 우울증에 걸렸을걸요. 예정이는 강해 보이지만 무너질 때도 있거든요.”성소현은 이어서 웃으면서 말했다.“근데 공교롭게도 가을이
“그건 그 사람들이 안목이 없는 거고. 눈이 장식품이나 마찬가지야.”예준하는 성소현의 손을 잡고 함께 성씨 가문의 별장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사람들이 안목이 없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수많은 연적이 생기게 되면 정말 질투 나서 쓰러질지도 몰라.”성소현은 히죽히죽 웃었다.예준하의 앞에서 성소현은 편안하고 솔직하게 지냈고 예준하도 그런 성소현의 진실된 성격이 좋았다.예준하 커플을 집으로 데려다준 소지훈은 성씨 가문을 떠나 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때마침 시어머니에게 불려 온 심효진을 만났다.심효진의 경호원은 소지훈의 차를 보더니 급히 차를 도로 옆으로 세워 소지훈의 차를 먼저 지나가게 했다.소지훈과 심효진은 동시에 차창 버튼을 내리눌렀다.“오빠.”심효진이 인사했다.소지훈은 따뜻하게 대답했다.“그래. 왜 지금 집에 가는 거야?”심효진이 다시 서점에 출근하게 된 후로 그녀는 늘 저녁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엄마가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전화하셔서 먼저 왔어요.”소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얼른 들어 가봐. 무슨 일이신지.”소지훈은 창문을 닫으며 왼편으로 차를 몰았다.그의 차가 떠난 후에야 심효진의 경호원은 다시 차를 몰고 오른쪽으로 향했다.소씨 가문 사람은 모두 모여 살았다.이 지역에서 사는 주민들은 모두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소정남과 소지훈은 사촌지간이다. 소정남의 집은 소씨 가문의 권력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겨우 몇 분밖에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경호원은 고풍과 현대화가 서로 어우러진 큰 별장 입구에서 차를 멈췄다.“들어갈 필요 없어요. 좀 있으면 또 나갈 가능성이 크니까.”시어머니가 그녀에게 전화해서 집으로 오라고 한 목적은 아마도 그녀가 소씨 가문을 대표하여 하예정에게 임신 선물을 보내려 하기 위함일 것이다.심효진과 하예정은 절친이었기 때문에 편리했다.“알겠습니다.”경호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심효진은 혼자 차에서 내려 큰 별장으로 들어갔다.별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여느
영양사 최서우는 밖에서 먹는 사람들의 자유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고모에 의해 집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식단을 책임진 사람이었기에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의 식단만 책임졌을 뿐 오지랖 넓게 집 밖의 사람들의 식단에는 관여하지 않았다.지금 최서우의 중점 관심 대상은 바로 사촌 동생의 아내였다.소정남은 같은 세대 중 가장 먼저 결혼한 사람이라 심효진의 배 속의 아기는 다음 세대의 첫 후대었다. 하여 최민주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의 사람들 전부 심효진의 배 속의 아기를 매우 중히 여겼다.심효진이 건강하고 똑똑한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최서우가 그녀에게 만들어준 임산부 식단은 영양이 풍부하고 종류들도 다양했다. 하지만 심효진이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식단이 반복되게 올려질 뿐 바뀌지는 않았다.다행히 심효진은 편식하지 않는 먹보라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그동안 별일 없이 잘 지내왔다.발소리가 들려오자 최민주와 최서우는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바라보았다.“효진아.”며느리가 돌아온 모습을 보자 최민주는 서둘러 손에 든 선물들을 내려놓고 심효진에게 다가가면서 웃었다.“더운 날 오느라 고생 많았지?”“차에 에어컨이 있어서 시원하고 괜찮았어요.”심효진은 웃으며 그 선물들을 바라보았고 또 최서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언니.”최서우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효진도 최서우의 침묵에 익숙했다.“내가 선물을 준비해서 예정에게 직접 주려고 했는데 너도 분명 예정이에게 임신 선물 줄 것 같아서 차라리 너에게 함께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불렀어.”최민주는 며느리에게 목이 마르냐고 관심했다.“안 말라요. 어머님, 고마워요. 이렇게 꼼꼼히 생각해주셔서.”심효진이 시어머니 곁으로 걸어오면서 곁에 있던 선물들을 힐끗 보았다. 시어머니께서 준비하신 선물들은 모두 임신부에게 적합한 선물들이었고 최서우가 곁에서 조언도 해주었기에 심효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효진 씨 매운 김치 비빔국수 드셨어요?”최서우가 갑자기 심효진에게 물었다.심효진은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