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벽에 가로막힌 듯 뚝 끊겼다.하예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묵묵히 창밖의 풍경만 바라봤다.가게에 돌아갔을 때, 하예진도 마침 도착한 참이었다."언니."하예정은 차에서 내리며 언니를 불렀다.고개를 돌린 하예진은 동생 부부를 보자 포동포동한 얼굴에 미소를 띄며 동생에게 물었다. "태윤 씨와 어디 다녀오는 거야?""같이 식사하자고 회사로 데리러 간 거였어. 언니, 어때? 일자리는 찾았어?"차에서 내린 전태윤도 하예진에게 처형이라고 불렀다.하예진은 웃으며 대답하다 동생이 일자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안색이 곧장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못 찾았어. 이력서를 한가득 넣었는데도 대답이 없으면 곧바로 거절하더라고."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가 이제 막 두 살 넘었다는 걸 알고는 나에게 아이가 그렇게 어린데, 일이 많으면 집중이 분산되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더라고. 그 말에 화가 확 차오르더라. 애가 있다고 일에 집중하지 않는 애 엄마가 어딨어?""그래서 나는 아이는 돌봐줄 사람이 있어서 출근 시간에는 일에 완벽히 집중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귀가 먹은 건지 귓등으로도 안 듣더라고. 언제부턴지 애를 낳고 난 여자는 일을 찾는 데도 차별을 받는 것 같아."하예진은 오전 내내 일자리를 찾느라 지치고 배도 고팠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그러다 시댁에서 욕을 하며, 주형인과 헤어지고 나면 어떻게 살겠냐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사회를 떠난 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났다.장점은 더 이상 장점이 아니었고, 일을 찾을 수가 없어, 그녀가 회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회사의 선택을 기다려야 했다.그녀는 다시 회계팀장이 되기를 바랐지만, 지금 보기에는 무슨 직책이든 일자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언니, 괜찮아.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찾아. 맞는 자리가 있을 거야."언니를 달랜 하예정을 팔짱을 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밥부터 먹고,
식사를 마친 뒤, 하예진은 집으로 가 쉬겠다고 말했다.오전 내내 일자리를 찾느라 그녀는 몹시 피곤했다.일도 못 찾은 데다 적잖이 충격도 받아 그녀는 집으로 가 이력서를 다시 쓸 생각이었다. 지망을 더 넓히면 다른 일자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언니, 내가 바래다줄게."하예진은 자신의 제부를 쳐다봤다.전태윤은 적당히 대답했다. "처형, 전 먼저 회사로 가보겠습니다.""그래요, 운전 조심하고." 하예진은 그에 당부를 건넸다. 그렇게 전태윤이 떠나고 난 뒤에야 그녀는 아직도 자고 있는 아들을 안은 뒤 동생의 차에 탄 뒤 말했다. "태윤 씨 점심 식사 시간이 길지 않으면 넌 그냥 도시락을 회사로 가져다줘. 괜히 왔다 갔다 하게 하지 말고, 점심시간인데 쉴 시간도 없잖아.""알았어."하예정은 시동을 걸었다.그녀는 이제 다시는 전씨 그룹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괜히 언니에게 잔소리만 들을 게 뻔했다. 척 보기에도 언니는 전태윤이라는 제부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전태윤이 회사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오후 업무 시간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그를 본 비서는 곧장 공경한 태도로 말했다. "대표님, 비서실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고개를 끄덕인 전태윤은 진중한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하며 비서에게 지시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만, 다른 건 다 빼고."그는 아메리카노만 좋아했다.비서는 본능적으로 물었다. "대표님, 오후에는 커피 안 드시지 않아요?"전태윤은 보통 오전에 한 잔 마시고 하루를 버텼다. 만약 오후에 마신다면 밤에 잘 자지 못하기 때문에 오후에는 보통 마시지 않았다.전태윤은 비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감히 더 묻지 못한 비서는 전태윤이 사무실에 들어가자 얼른 커피를 내리러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간 전태윤은 소정남이 망원경을 들고 창밖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는 모습에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망원경을 확 뺏어 든 전태윤이 입을 열었다. "내 물건 함부로 건
전태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예준하는 싸움 실력이 별로야. 그 예씨 가문도 A 시에서는 우리 가문과 마찬가지로 재계 서열 1위인 가문이라 안전을 위해서라도 예준하는 경호원을 더 두는 수밖에 없지. 너도 지금 안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놀라. 만약 예준하의 기세가 부러운 거면 너도 매일 경호원 주렁주렁 달고 다니든지."소정남은 원체 실력이 괜찮아 경호원은 필요 없었다.게다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 없어 경호원을 데리고 다닌다면 너무 눈에 띄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비서가 노크하고는 들어왔다."대표님, 분부하신 커피 가져왔습니다."비서는 막 내린 커피를 가지고 와 천천히 전태윤 앞에 내려놓았다.비서가 나간 뒤, 소정남은 친구 겸 상사인 전태윤을 놀렸다. "점심에 아내랑 애정행각 하러 다녀오니까 오후에는 일할 정신 없지? 커피 몇 잔 더 하지 그래?"전태윤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애정행각은 무슨 그는 그와 하예정 사이에 또 안 좋은 일이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같이 밥 먹으려고 퇴근하는 걸 데리러 온 하예정에게 자신은 기뻐하는 티를 내지 않았는데도 하예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아, 전태윤은 하예정이 앞으로는 절대로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왜 그래?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설마 부부 싸움한 거야? 내가 보기에 부인분 성격 엄청 좋아 보이던데."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한참을 침묵하던 전태윤은 끝내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소정남은 비록 입은 무거웠지만 가십을 너무 좋아했다. 전태윤은 소정남이 아는 게 너무 많아, 어느 날 취해서 자신에 대해 전부 다 이야기를 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그는 또 소정남에게서 하예정과의 어색한 침묵을 해결할 방법을 묻고 싶기도 했다.그리하여 전태윤은 입을 열었다. "나 어쩌면, 조금, 상처를 준 것 같아."그 말을 들은 소정남은 두 눈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곧장 물었다. "어떻게 상처를 줬는데? 말해 봐."전태윤은 책상
"동명이 내일 같이 늘 보던 데서 밥 먹자더라. 그 자식은 매번 밥 살 때면 늘 식객당으로 가자고 하네. 거기 음식이 맛있기는 하지만, 가게 옆이 할머님이 차린 소희 카페라 거기 가서 느긋하게 있을 수만 없었다면 가지도 않았을 거야.""그건 우리가 예전에 자주 가던 곳이잖아. 동명은 정과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녀석이잖아."예전에 세 사람이 아직 지금의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때, 전태윤은 아직 경험을 쌓고 있어 대표도 아니었을 때에는 신분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탓에 세 사람은 중급 정도 되는 식당에 자주 갔다.소희 카페는 관성에서 제일 크고 제일 세련된 카페였고 그 주변에 있는 것은 옷 가게든 식당이든 격이 너무 떨어지지는 않았다.격이 너무 떨어지면 소희 커페가 끌어오는 손님을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그 카페에서 소비를 하는 손님들은 대부분 고수입의 직장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늘 자신을 박하게 대하지 않아, 카페에서 나오면 늘 다른 맛집을 가거나 쇼핑을 하는 탓에 그 번화한 거리는 소희 카페를 중심으로 중고가 상권이 만들어졌다."갈 거야?""밥을 산다니 당연히 가야지."전태윤의 얼굴에 간만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와 소정남은 이동명과는 우정이 돈독한 편이었다.이동명이 밥을 산다니 얼굴을 내민다기보다는 괜히 집에서 하예정과 어색하게 서로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그럼 나도 갈게. 간만에 주말인데 놀기도 해야지. 밥 먹고 나면 너희 할머니네 카페에 가자. 밤에는 해변에게 바비큐하는 건 어때?"전태윤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바비큐를 할 바에는 차라리 골프를 치는 게 나았다.소정남은 한참 동안 재잘거린 뒤에야 사무실을 나섰다.소정남이 가자, 전태윤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태윤아, 예정이가 말했지?""했어요."전태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이가 지긋하셔서 그런지 기억력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할머니, 전 이미 할머니의 소원대로 하예정과 결혼했어요. 다른 일에는 절대로 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전태윤은 결국 도로 식탁에 앉아, 용기 뚜껑을 다시 열고 좋아하지 않는 스프링 롤을 묵묵히 먹었다.하예정과 함께 살다 보니, 그가 조금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평소에는 먹지도 않았던 간식들도 맛보게 됐다.아침 식사를 마친 전태윤은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그녀가 기르는 화초들을 감상했다.그러다 11시가 되자 울리는 소정남의 재촉 전화에 못 이겨, 전태윤은 방으로 들어가 옷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하예정이 언니의 집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 전태윤은 아내와 마주칠 리가 없다고 생각해, 현대 SUV가 아닌 여느 때처럼 고귀한 롤스로이스를 타고, 여러 대의 경호차의 호위 아래 위풍당당하게 식객당으로 향하였다.도착한 뒤에는 할머니의 카페에 주차를 하고 식당까지는 걸어간다면 큰 소란은 일지 않을 것 같았다.전태윤이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이동명과 소정남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전태윤을 발견한 그들이 손을 흔들자, 전태윤은 한 무리의 경호원들을 데리고 안쪽으로 걸어갔다.경호원들은 자연스레 세 사람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면 가까이서 도련님도 보호할 수 있었고, 도련님과 친구들의 식사도 방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오직 이동명과 소남정이 불러야만 그들의 도련님은 기꺼이 이곳까지 행차했다.전태윤 일행이 선택한 자리는 가장 외진 곳으로, 조용한 곳이었다."전태윤, 네가 주문해."이동명은 메뉴판을 전태윤에게 건네주었다.전태윤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자주 와봤잖아. 사장님한테 자주 먹던 걸로 달라고 해.""이번엔 좀 다른 거 먹지 않을래?"소정남이 맞받아쳤다. "얘는 입이 까다로워서 다른 메뉴는 못 먹을걸. 나도 늘 먹던 걸로."이동명은 친한 친구 두 명이 다 늘 먹던 걸로 하려는 것을 보자,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화장실 다녀올게."전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호원 한 명도 일어나더니 그의 뒤를 따라갔다.그들은 이곳에 있는 사람이 도련님에게 해를 끼칠까 걱정하는 것보다는, 도련님에게 반한
자리로 돌아온 전태윤은 덤덤한 표정으로 음식이 올라오자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친구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전태윤의 머릿속에는 온통 하예정이 김진우에게 반찬을 집어주던 장면뿐이었다."태윤아, 오늘 좀 이상한데?"음식을 한 술 집어 먹은 이동명이 맞은편에 앉아있는 전태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는 왜 말도 안 하고 먹기만 해?"소정남도 이동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전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 "배고파서."전태윤은 아침에 입맛에 맞지도 않는 스프링 롤을 먹은 데다 양도 얼마 되지 않아 진짜로 배가 많이 고팠다.물론 기분은 더더욱 나빴다.기분이 나쁘니, 계속 먹고 먹고 또 먹는 것이었다.하예정이 김진우에게 반찬을 집어주는 것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써야 하나? 질투를 해야 하나?그는 진작부터, 질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못나지 않은가!전태윤과 하예정은 쇼윈도 부부이며 계약서도 체결한 상태였다.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하예정이 결혼 기간에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도 김진우와 동거하는 등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눈을 감아줄 수밖에 없었다.전태윤이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달랬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태윤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하예정과 김진우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떠올랐다.두 친구는 전태윤이 할머니의 잔소리 때문에 할머니의 목숨을 구해준 하예정과 결혼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태윤이 배고프다고 말하자 소정남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 지금 유부남이잖아? 그런데 왜 배를 곯고 다녀? 아내가 아침을 안 차려줘?"평소에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 소정남이 전태윤에게 아침을 먹자고 하면 전태윤은 늘 자신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껏 으스대는 투로 말했었다.소정남이 손을 내밀어 전태윤이 입고 있는 옷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너는 아내도 있으면서 왜 자기가 산 옷을 입고 다니는 거야?"전태윤은 굳은 표정으로 소정남의 손을 내리치면서 말했다. "나와 하예정는 쇼윈도에
설령 쇼윈도 부부인 데다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이동명은 내키지 않았다.전태윤은 두 친구의 말장난에 끼어들지 않고 계속 식사만 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불러 식사를 멈췄다."난 할머니 카페에 가서 쉬고 있을 거니까, 너희 둘은 천천히 먹어."젓가락을 내려놓은 전태윤은 휴지를 뽑아 입을 닦은 뒤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우리도 다 먹었어. 같이 가자."이동명과 소정남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전태윤을 따라 옆에 있는 소희 카페로 가려고 했다.경호원도 식사를 마치고 도련님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묵묵히 일어섰다. 그리고 도련님을 경호하면서 조심스럽게 밖으로 따라 나갔다.그들은 하예정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하예정이 김씨 가문의 도련님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고 김씨 도련님은 전태윤 도련님을 만난 적이 있다. 하예정에게 들키면 전태윤 도련님의 신분이 발각될 수 있었다.이동명이 계산하려고 카운터로 향했다.소정남이 계산을 마친 이동명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명아, 오늘 전태윤이 약간 이상하지 않아? 아니, 올 때는 괜찮았어, 표정도 차갑지 않았고."사람들은 모두 전태윤이 진중하고 차갑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사석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는 차가운 모습보다는 친구들에게 온화하게 대했다."태윤이가 화장실을 다녀온 뒤부터 표정이 변했어."소정남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서서 가게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화장실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아봐야겠어."이동명이 소정남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면서 말했다. "뭘 봤든 간에 이미 지나간 일이야. 아직도 그대로 있지 않을 거야. 전태윤은 항상 그런 식이잖아. 별일 없었을 거야."이동명은 무슨 사람이나, 아무 일이 전태윤의 기분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전태윤은 성격이 진중해, 하늘이 무너져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아니야. 분명히 뭘 봤으니까 갑자기 차가워진 거야."소정남은 전태윤이 화장실에서 무엇을 목격했는지 몹시
하예정은 전태윤이 같은 식당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하예정은 친구와 김진우랑 한참 얘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했다.전화를 받은 김진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하예정이 말했다. "나랑 네 누나도 다 먹었어. 난 먼저 계산하러 갈게. 진우 너는 급한 일 있는 거면 얼른 가봐. 난 효진이랑 옆에 있는 카페에 갈 거야."지난번 심효진의 선 자리를 따라갔던 하예정은 조용한 소희 카페가 마음이 들었다.번화한 거리는 북적거렸지만 소희 카페의 사장님은 돈을 아끼지 않고 방음 소재로 벽을 세운 탓에 카페 안으로 들어오면 창밖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자신의 사촌 누나가 차를 몰고 왔으니, 조금 있다가 하예정을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김진우가 말했다. "효진 누나, 예정 누나, 나 그럼 가볼게.""가봐, 운전 조심하고."심효진이 사촌 동생한테 잔소리 한마디를 했다."누나, 그럼 이따가 예정 누나를 집까지 데려다줘, 부탁할게."사실 하예정에게도 자동차는 있었다. 하지만 기름값이 올라서, 기름을 한 번 가득 채우면 몇만 원이어서 자주 몰고 다니지 않았다.될 수 있으면 몰고 다니지 않았다.하예정은 살림을 위해서 돈을 아껴 쓰려고 했다.비록 전태윤이 준 생활비는 아주 넉넉했지만 하예정은 돈을 마구 낭비하지 않았다.심효진은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너희 예정이 누나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어. 얼른 일이나 보러 가. 주말에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네."대기업의 후계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김진우는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미련 가득한 걸음을 옮겼다.하예정은 계산을 마친 뒤 친구의 팔짱을 끼고 식당 옆에 있는 소희 카페로 걸어갔다.카페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전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그녀를 발견했다.그들은 곧바로 전태윤에게 알렸다.전태윤은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다. 그저 할머니 커피숍에서 머리를 조금 식히면서 잠깐 쉬려고 했다.하예정 때문에 복잡해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경호원
여천우가 바로 거부했다.“누나, 이건 내가 도울 수 없어. 운초 누나의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돈도 전부 운초 누나가 준 돈이니까. 나도 잠시 운초 누나가 먹여 살려줘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운초 누나의 생각을 바꿀 수 있겠어?”설령 여천우는 여운초가 여운별의 정지된 카드를 풀게끔 설득할 수 있다고 해도 여천우는 하지 않을 것이다.여천우와 여운초의 의도가 바로 여운별이 함부로 돈을 써서 재산을 탕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천우는 여운별을 궁지로 몰아넣어 그녀 스스로 돈을 벌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그렇지 않으면 여운별은 아마도 여운초에게 평생 눌리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어쨌든 여운별과 여운초는 친자매였기 때문에 여천우도 여운별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너도 운초가 도리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 이상 나와 손을 잡고 운초를 상대해야지, 운초의 말에 속아 넘어가 부모님을 만나면 어떡해? 그것도 부모님 재산을 너의 명의로 바꾸라고 한 것도 운초의 생각이지? 운초가 가르쳐준 거지?”“천우야, 운초는 우리 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하고 싶을 뿐이야. 내가 어떻게 우리 가문의 재산을 탕진할 수 있겠어? 우리 가문에 사업이 그토록 많은데 우리가 우리 재산을 가져오기만 한다면 돈은 떼처럼 굴러올걸. 우리 남매 3대가 쓰기에도 충분할 거라고.”이때 여천우가 또 반박했다.“운별 누나. 우리 집은 누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아. 일부 재산은 운초 누나 소유이고 또 우리 부모님 장사는 법을 어기는 장사야. 일찍 압류당하고 벌금도 낸 거 몰라? 합법적인 사업은 얼마 되지도 않아.”여운별이 말을 이었다.“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알아. 우리 집은 돈이 엄청 많다는걸. 엄마가 알려주셨어. 운초 장님이 뭐가 돈이 있다고... 둘째 삼촌이 돌아가시고 나서 여씨 그룹의 장사는 줄곧 우리 부모님께서 하고 계셨는데. 그 재산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한 가지만 물
여천우에게 엄하게 대하고, 어려서부터 독립시킨 것은 모두 그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후계자가 독립할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여씨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단 말인가!다만 여천우가 아직 젊어서 추미자 부부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여천우도 성인이 되었고 여운별이 출소하자마자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재산을 위해서라도 추미자 부부는 그들의 명의로 된 재산을 아들 여천우에게 넘겨주기로 했다.여천우는 여운별의 기본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고 여운별이 스스로 돈을 벌어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면 더는 여운별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여운별이 시집가게 되면 여천우는 그녀에게 후한 혼수를 줄 것으로 계획했다.여운초도 그깟 재산을 두고 그들과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여운초가 원하는 것은 단지 공평이었다.“엄마와 아빠는 모두 동의하지 않을 거야.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꿈도 꾸지 마!”사실 여운별도 그녀의 부모님이 동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결국, 추미자 부부가 선택한 사람이 그들이 가장 아끼는 친딸 여운별이 아니라 아들 여천우라는 사실을 믿기 싫었을 뿐이다.정녕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여천우에게 물려주려 했는가!여운별에 대한 사랑은 역시 성별을 초월할 수 없었던 건가!추미자 부부는 한 번도 여운별에게 재산을 넘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여운별은 이 사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의 부모님은 그들이 남자를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어릴 때부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었다.그러나 여천우가 원하는 것은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었고 심지어 얻지 못할 때도 있었다.여운별은 추미자 부부의 사랑이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했다.추미자 부부는 여운초를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기를 바랐다.여운별은 그녀의 부모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천우가 아닌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여천우는 여운별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더니 입술을 오므리다가 말을 이었다.“누나, 누나
“여천우, 이 나쁜 놈아! 이제 다 커서 여운초와 연합해 친누나를 괴롭히려고 들어? 난 네가 감옥으로 가서 단지 우리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찾아간 줄로 알았는데, 우리 부모님 재산을 노리고 간 거였어? 엄마 아빠 재산도 내 몫이니까 혼자 차지하려고 하지 마! 부모님이 가장 아끼는 사람은 나야. 우리 부모님은 그들의 명의로 된 재산을 전부 너에게 주지 주지는 않을걸. 그러니까 엄마 아빠 귀찮게 하지 마!”여운별도 면회하러 가서야 여천우가 그날 추미자 부부의 면회를 하러 간 것을 알게 되었다.여천우는 추미자 부부에게 그들이 압류당하지 않은 재산을 여천우 한 사람에게만 물려달라고, 여운별과 여운초에게는 재산을 주지 말자고 제안했다.여운초는 여태웅의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운별은 그녀의 부모님이 가장 아끼는 딸로서 자산을 가지지 못 가질 리가 없었다.여운별은 이미 변호사와 만나 여운초에게 소송을 걸어 여운초의 모든 재산을 되찾으려고 계획했다.그러나 남동생 여천우가 독점할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겉모습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평소에는 철이 들고 착한 동생인데 이토록 큰 야망을 품고 있었다니!아니, 여미란과 여미정의 말대로 여운초가 꾸민 짓일 것이다!여운초는 여운별이 정말로 소송을 걸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 소송 때문에 여운초가 현재 가진 재산 일부를 토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추미자가 그들의 재산을 전부 여천우에게 물려준다면, 여운초와 여천우의 두터운 친분으로 볼 때 그 재산도 여천우의 손에 잠시 머물러 있을 가능성도 아주 크다.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은 결국 여운초의 손에 넘어가고 심지어 여운별이 아무리 소송을 걸어도 이길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여운별의 부모님은 현재 살아계시고 또한 부모님의 재산도 그들의 의향대로 지정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리고 여운별도 성인이 다 되었기에 그녀의 부모님도 이제 그녀를 키울 책임이 없다
게다가 우빈이도 장점이 있는 어린이였다.그는 독서와 글씨를 쓰는 데 있어서 용정보다 조금 나은 편이다.용정은 숫자를 많이 읽는다지만 잘 쓰지 못했다. 이 또한 전태윤이 우빈을 칭찬할 때 자주 쓰는 말이었다.그러나 우빈은 전태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전태윤이 어른일 뿐만 아니라 전씨 그룹의 대표였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라고 믿었다.우빈은 이렇게 자신을 설득하더니 더는 입을 삐죽 내밀지 않고 용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가자, 우리 들어가서 뭐 먹자. 배고파.”“나도 배고프다.”두 녀석은 또 즐겁게 팔짝팔짝 뛰며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여씨 가문.여운별은 별장 입구에 멀찌감치 서 있다가 여천우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한참 후에야 여천우가 집안에서 나왔다.여천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여운별은 어두운 얼굴로 걸어가다가 손을 들어 여천우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짝!여천우는 여운별이 자신을 보자마자 뺨을 때릴 줄은 몰랐다.그는 단지 여운별이 자신이 곧 학교로 돌아갈 것을 알고 특별히 찾으러 온 줄로만 알았지만 만나자마자 뺨을 때릴 줄은 몰랐다.“누나. 왜 때려?”여천우는 맞은 얼굴을 만지며 여운별에게 물었다.여운별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누나라고 부르지 마. 내가 네 누나가 맞긴 한 거야? 어려서부터 너는 여운초를 좋아하고 나와 가깝게 지내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여운초와 연합해서 나를 상대하려고 해? 여천우! 너 미쳤어? 나야말로 너의 친누나거든! 같은 엄마 배에서 나온 친누나라고. 여운초는 네 사촌 누나일 뿐이야!”여천우도 바로 화를 냈다.“내가 미쳤다고? 누나! 누나는 우리 부모님 밑에서 응석받이로 자라면서 못된 것만 배웠잖아! 내가 미쳤다고? 누나가 미친 거 아니야? 운초 누나는 내 사촌 누나이자 내 친누나야. 운초 누나도 나와 같은 엄마 뱃속에서 나온 친누나야! 영원한 내 친누나라고!”여운별은 화가 나서 또 여천우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여천우가 막을 준비를 하고
우빈이가 툭하면 어린이집에 안 가는 데 익숙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에 명확하게 일러둬야 한다고 하예정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용정이 모처럼 놀러 왔고 또 용정이 관성에서 친구란 우빈이밖에 없으니, 이번만은 응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우빈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을 약속했다.용정도 따라서 말했다.“아주머니, 다음번에는 제가 여름방학 혹은 겨울방학을 하는 틈을 타서 올 게요. 그러면 누구도 휴가를 내지 않아도 되잖아요.”“이모, 지금 당장 엄마한테 전화해서 얘기하면 안 돼요?”우빈이한테는 지금 휴가를 내는 일이 급선무였다.그래야 시름 놓고 놀 수 있을 것 같았다.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전태윤을 째려보았다. 전태윤은 일부러 하예정의 시선을 피하여 고개를 돌려 딴 곳을 쳐다보는 척했다. 하혜정은 속으로 남편이 우빈이의 일을 자신한테 떠밀었다고 투덜댔다.“알았어.”하예정은 마지못해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예진이 전화를 받자 하예정이 말했다.“언니, 우빈이가 할 얘기 있대.”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우빈이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우빈아, 네가 직접 엄마하고 얘기해.”우빈이는 전화를 받아쥐고 하예진에게 휴가를 내려는 사유를 자초지종 말했다.하예진도 하예정과 똑같은 말을 하고 나서 우빈이가 하루 휴가를 내서 모처럼 찾아온 친구랑 노는 것에 응낙했다.그러자 우빈이는 휴대폰을 하예정에게 돌려준 후 용정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했다. 그러고는 대결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용정에게 말했다.“용정아, 나 요즘 아주 열심히 무술을 연마했어. 우리 한 번 대결해.”용정이 자신만만해서 말했다.“넌 나한테 질 거야. 나한테 져서 화내면 안 돼. 알았지?”지난 여름방학 때 두 사람이 함께 놀 때 우빈이가 항상 져서 기분이 언짢아했었다.용정은 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모연정이 용정이보고 우빈이는 손님인데 왜 양보하지 않았냐고 핀잔했다.하지만 용정은 어떻게 양보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 자연스럽게 져주는 법을 모르
전태윤이 말하면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예준성도 뒤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다행히 평소에 우리 두 집이 서로 가깝게 지냈고 또 앞으로 친척이 될 사이니 말이죠. 그렇지 않고야 제가 미안해서 어찌 이렇게 이른 아침에 찾아와서 폐를 끼치겠어요.”별장 구역은 아주 조용했다. 가끔 조깅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용정이 모처럼 왔는데 한시 급히 친구와 놀려고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용정의 무술 실력이 아주 많이 는 거 같아요. 아까 차에서 뛰어 내리는 동작과 달리는 속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우리 우빈이는 아무리 용을 써도 용정을 못 따라잡아요.”“사람마다 다 장점과 약점이 있어요. 용정의 약점은 식탐이 많아요. 매번 집에만 돌아오면 준영이를 얼려서 먹고 싶은 음식을 다 해달라 해요. 번마다 배를 두드리면서 먹어요.”“연정 씨는 애가 하도 많이 먹길래 배에 탈이라도 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다행히도 매일 무술을 연습하느라 많은 열량을 뺐지요. 그렇지 않으면 진작 뚱보가 되었을 겁니다.”“애들은 다 그래요. 크면 저절로 다 낫는 법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저도 어린 시절에 먹길 엄청나게 좋아했대요. 하지만 커서 난 식탐 많은 사람으로 취급받은 적 없어요.”커서는 혼자 통제할 수 있으니 제멋대로 먹지 않았을 뿐이었다.예준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제발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식탐 때문에 손해 볼 수도 있어요.”두 어른과 두 어린이는 반 시간 남짓이 달린 후 방향을 바꿔서 집으로 달렸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할 무렵에 하예정은 이미 일어나 마당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빈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대문 입구로 마중 나갔다.“이모!”두 꼬맹이가 먼저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예정을 본 우빈이는 깡충거리면서 뛰어갔다.용정도 우빈이 뒤를 따라 뛰어갔다.“아주머니.”“용정아, 네가 어떻게 왔니?”하예정은 용정을 보고 반색하며 맞았다.비록 마당에 세워진 예준하의 차를 보긴 했지만
전태윤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이러니 두 사람이 친구로 될 수 있는 거네요. 두 사람이 같은 부류의 사람이니 말이죠. 저도 꼭두새벽에 우빈이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나 함께 조깅하러 나가는 중입니다.”“같이 나가는 건 어때요? 같이 산책해요.”전태윤이 예준성 부자한테 함께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했다.예준성이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럽시다. 어차피 저도 이제 더 잘 수도 없는데요.” 예준성은 용정을 보면서 말했다.“우빈이 데리고 앞에서 놀아야 해.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알았지?”“우빈이더러 용정을 잘 데리고 놀라고 해야죠. 당신들은 멀리서 온 손님이니 응당히 우리가 주인답게 잘 대접해 드려야죠.”두 아이는 진작 손잡고 앞으로 뛰어 가버렸다.예준성은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용정은 낯 갈이도 잘 안 하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금방 친숙해져요. 기억력도 참 좋아요. 한 번 다녀갔던 길은 절대 안 잊어요. 길옆에 있는 화초까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어요. 걔는 식물 종류도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용정의 스승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의술이 최고인 정 선생님이잖아요.”정겨울은 바빠서 직접 용정을 가르치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용정이 신의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약재의 이름을 기억했다.용정의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용정은 성격이 참 좋아요.”“그건 모르고 하는 얘깁니다. 성격이 좋을 땐 좋아도 녀석이 횡포한 면도 있어요. 금방 집에 데리고 왔을 때는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말도 잘 안 하기에 똑똑하지 못한 먹보인가 했어요.”“정말 잘못 봤어요.”예준성이 겉으로는 양아들의 단점을 말하는 것 같지만 두 눈은 애틋한 눈빛으로 가득 찼다. 용정은 예준성을 약간 어려워하기에 여태 감히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고 아저씨라고만 불렀고 모연정을 엄마라고 불렀다. 하지만 자신이 모연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모연정을 모 엄마라고 불렀다.전태윤이 웃으면서 말했다.“운이 좋은 줄 아세요.
“알았어요. 제가 지금 태윤 씨 집 앞에 있어요. 집사가 문 열려고 나오네요. 그러면 만나서 얘기해요.”말을 마친 예준성은 전화를 끊었다.전태윤은 멍하니 서 있었다.전태윤이 어리둥절하여 머리를 숙여 우빈이를 쳐다보니 마침 우빈이도 머리를 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이모부, 왜 그래요? 무슨 일 생겼나요?”전태윤은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누군가 우빈이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또 아침 일찍 찾아왔단다.”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혹시 예준하와 성소현의 혼사에 문제가 생겨 예준성이 자신더러 로비스트 되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닐지 생각했다. 하예정은 그럴 재주가 있지만, 자신은 로비스트로 될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윽고 예준성이 동생이 평소에 타고 다니던 차를 운전해서 대문을 지나 마당에 세웠다.예준성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뒷좌석의 차 문이 열리면서 작고 탄탄한 몸매를 가진 어린애가 차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리더니 전태윤이 서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뛰어왔다.“우빈아, 우빈아, 내가 왔어!”전태윤이 눈여겨보니 용정이었다.“용정!”용정을 알아본 우빈이는 잡고 있던 전태윤의 손을 뿌리치고 용정이 뛰어오는 방향을 향해 깡충깡충 뛰어갔다.두 꼬맹이는 만나자마자 반갑다는 듯 어른들처럼 상대방한테 커다란 포옹을 해주었다.여름방학 때 작별한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두 아이의 키는 눈에 띄게 컸다.용정은 매일 많은 시간을 들여서 무술을 연마했기에 키가 우빈이보다 훨씬 더 컸으며 신체도 우빈이보다 퍽 탄탄해 보였다.방금 용정이가 차에서 뛰어 내리는 동작을 통하여 전태윤은 용정의 무술 실력이 또 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용정의 무술 솜씨는 우빈이 셋을 합쳐도 못 당할 것이었다. 이 아이는 무술 배우는 방면에서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용정아, 네가 어떻게 왔어?”친구를 만난 우빈이는 기뻐하면서 물었다.“나는 할아버지 따라서 모 엄마와 아저씨 보러 왔어. 사공이 유치원에 일주일 동안 휴가를 신청해
이날 저녁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돌아오는 날은 일요일이었다.휴식날인데 우빈이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우빈이는 일어난 후 곧장 하예정이 자는 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다. 전태윤이 안에서 방문을 열어주었다.“이모부, 이모 일어났어요? 들어가서 이모랑 같이 놀래요.”전태윤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꼬맹이와 화내지 말자고 스스로 가슴을 달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우빈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지? 평소에 어린이집 가야 하는 날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더니 쉬는 날만 되면 아주 일찍 일어나더라.”우빈이가 입을 뾰족이 내밀면서 말했다.“이모부, 나는 한 번 깨어나면 더는 못 자요. 나랑 놀아 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심심해요. 이모 찾아와서 노는 수밖에 없어요.”현재 우빈이는 시 중심에 자리 잡은 전태윤의 개인 별장에서 지내고 있다. 서원 리조트에 있을 때는 그나마 함께 놀아 주는 어린이들이 있었기에 이모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전태윤은 하는 수 없이 두 팔로 우빈이를 부쩍 들어 품에 안으면서 말했다.“이모는 아직도 자고 있어. 이모부가 우빈이랑 같이 놀아 줄게. 뭐 놀까?”“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면 좋지 않을까?”우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싫어요. 혼자 놀면 재미가 없어요. 이모부는 장난감도 안 놀 거잖아요.”전태윤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알았어. 이모부랑 같이 아침 조깅하러 나갈까? 이모부가 가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얌전하게 기다려야 해?”그는 우빈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려놓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신신당부했다.“침실에 들어가서 이모를 깨우면 안 돼. 알았지? 이모부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우빈이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전태윤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서 먼저 운동복 바지부터 바꿔 입고 우빈이가 그사이에 침실에 들어가서 하예정을 깨울까 봐 걱정되어 웃옷을 입으면서 밖으로 나왔다.우빈이가 조용하게 제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야 전태윤은 안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