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서현주가 그녀의 두 외손자를 악독한 말로 저주한 데 대해 김은희도 매우 화가났지만 서현주가 배를 끌어안고 아프다고 소리치자 얼른 다가가서 부축하며 잔뜩 긴장한 채 말했다.“어서 앉아. 아니면 방에 들어가서 누워있던가.”“엄마, 쟤 그냥 꾀병이야. 쩍하면 배 아픈 척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야?”서현주의 배 아프다는 말을 주서인은 아예 믿지도 않았다.“서인아...”김은희는 딸한테 그만하라고 눈치 주며 서현주를 부축해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눕혔다. 주서인한테 맞은 뺨이 벌겋게 퉁퉁 부어오른 걸 보고 그녀는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딸과 싸울까 봐 걱정됐다.“현주야, 네 얼굴에 찜질하게 내가 가서 얼음 좀 가져올게.”서현주는 얼굴을 만져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은희는 얼음을 가지러 갔다.침대에 누운 서현주는 지금 살고 있는 꼴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어찌 됐든 이건 그녀의 선택이었다.주형인과 하예진, 둘 사이에 끼어든 것도 누가 부추긴 것이 그녀가 원해서 한 짓이니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친정에 갈 수도 없고 시댁에서 맨날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한다. 못된 시누이에 시누이 편만 하는 시부모... 그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배 안에 아이라도 있지 않았으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거다.이 아이가 있기에 그나마 감옥에서 잠시 해방되어 편안히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 아이를 꽤 중요시하게 생각하여 주서인으로 인해 유산되는 일이 없게 잘 보호해 왔다.불현듯 서현주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이때 김은희가 얼음주머니를 갖고 들어왔다.“현주야, 어딜 가려고?”그녀가 물어보자 서현주가 대답했다.“화장실에요.”서현주는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고 김은희는 침대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서현주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주형인한테 문자를 보내 시누이의 ‘악행’을 일러바쳤다.하지만 주형인은 오더를 받아 손님을 공항으로 모셔야 한다며 알겠다고 한 마디 딸랑 보내놓고
김은희는 시름을 놓으며 서현주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주는 안색이 변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말했다.“어머니, 저 배 아파요.”그 말을 들은 김은희는 즉시 밖에 있는 주서인을 향해 소리쳤다.“서인아, 얼른 119 불러. 현주가 배 아프대.”거실에 있는 주서인은 김은희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도 건들건들 걸어가서 방 문틀에 기대어 손에 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엄마, 쟤 하루에도 백 번, 천 번은 배 아프다는 소리를 해요. 믿지 말아요. 119는 무슨, 거짓 신고하면 의료 자원 낭비인 거 몰라요? 더 필요한 사람들한테 양보하자고요.”“현주가 방금 자빠졌어!”김은희는 매섭게 소리 지르며 주서인을 재촉했다.“빨리 구급차 불러, 빨리!”서현주가 침대에 누워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자 주서인은 그제야 진짜라 믿고 구급차를 불렀다....오후 4시, 따스한 햇볕이 가게 안으로 들이치고 있었다.점심때면 가게 문을 닫았던 예전과는 달리 오늘, 하루 토스트는 하루 내내 문을 활짝 열었다.하예진은 우빈과 함께 가게 안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두 점원은 이미 퇴근했고, 가끔 손님이 들어오게 되면 하예진은 그들을 맞아 음식을 만들었다.이 시각,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우빈은 애니메이션에 한창 정신이 팔려있고 하예진은 그 옆에 앉아 만두를 빚고 있었다.유리문이 열렸다.고개를 돌아보니 아주 한동안 그녀 앞에 나타난 적이 없던 전 시누이, 주서인이었다.“고모!”우빈이 보고 그녀를 불렀다. 주서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까이 걸어와 우빈을 품에 안았다.“우빈이 애니메이션 보고 있었구나.”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주서인은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사 온 과일 꾸러미를 하예진한테 건넸다.그걸 받으며 하예진이 말했다.“그냥 오면 되는데 뭘 또 사 들고 오세요.”“조카 보러 오는데 맨손으로 올 수 있나. 먹을 거라도 사 와야지.”주서인은 하예진이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시 자리
물론 주서인은 절대 그 일이 자신과 관련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서현주 그 악독한 년이 하예진이 남편 잡아먹을 팔자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주형인을저주하고 자신의 두 아들까지 저주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를 당한 거라 생각했다.서현주의 배 안에 아이는 남아였다. 유산되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김은희와 서현주는 숨이 넘어가게 울어 젖혔다. 주서인도 마음이 좋지 않긴 하였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뿐이었다.그 찢어놓고 싶은 입으로 그녀의 두 아들이 무사하게 자라지 못할 것이라며, 다 커서도 변고가 생길지 모른다며 씨불이더니 결국 말이 씨가 돼버린 것이다. 그것도 저 자신한테로.주서인은 이런 게 바로 업보라고 굳게 믿었다.“예진아, 넌 모를 거야, 그년이 얼마나 악독한지. 노 대표가 사고 났다는 뉴스에 그 양심 없는 언론 기자들이 너를 맘대로 갖다 붙이면서 추측성 기사를 낸 걸 그년이 보고서는 널 팔자가 사나워서 남자를 잡아먹는다고 하더라. 노 대표가 널 좋아했기 때문에 사고 난 거라고.”“그리고 우리 집에서 너랑 형인이가 재결합하길 바란다는 걸 비아냥거리면서, 그렇게 되면 형인이도 너 때문에 차 사고 날 거라고 하는 거야. 형인이가 지금 콜택시를 하고 있는데 사고 나기 딱 좋다고 하면서. 네가 말해 봐. 그거 미친년 아니야?”주서인은 서현주가 자기 두 아들을 저주한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들려주었다.“애가 유산된 건 나도 막 깨 고소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진짜 그년이 인과응보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년 너무 악독해. 예전엔 몰랐어, 그 정도로 악독한 줄은. 그 동네에 서현주랑 말 섞는 사람 찾아볼 수가 없어. 애들도 보면 멀리 찍 피해 다녀, 그 여자한테 해코지당할까 봐.”“예진아, 기사에서 떠드는 내용은 맘에 담아둘 거 없어. 네가 진짜 남자 잡아먹을 사주면 형인이가 저대로 잘 살아있겠어? 형인이가 너랑 같이 살 땐 사업도 잘 나가고 했는데 서현주 그년과 같이 있으면서 하락세를 맞게 된 거야. 분명 그년이 팔자가 사납고 남자를 잡아먹는 관상인 게
주서인은 멋쩍게 웃으며 우빈이를 두어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우빈이도 아빠가 필요하지 않겠어?”“우빈이는 지금도 아빠가 있어요. 나랑 형인 씨가 어떤 사이가 됐던 그 사람은 우빈이 아빠예요. 평생 변하지 않아요, 그건.”“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예진아. 난 우빈이가 아빠가 있는 건전한 가정에서 자라야 더 즐겁게 성장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뜻이야.”“제 생각에 우빈이는 지금 매우 즐거워요. 언제나 그랬어요. 예전에도 형인 씨는 매일 일하느라 바쁘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느라 바빠서 아이랑 놀아준 적이 별로 없어요. 지금도 그저 가끔 와서 보고 가는데, 예전이랑 다를 게 뭐에요? 우빈이는 아빠가 곁에 없는 것에 이미 습관 됐어요. 저랑 예정이가 아이한테 부족하지 않게 잘 챙겨주고 있어서 저희 우빈이는 걱정이나 고민 없이 충분히 즐겁게 잘 성장하고 있어요.”주서인은 할 말이 없었다. 우빈이를 핑계 삼는 건 통하지 않았다.주씨 집안 사람들은 줄곧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예진을 수도 없이 설득했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다.주형인도 속으로 후회하고 있지만 하예진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그가 마음을 바꿔먹고 그녀를 쫓아다녀도 받아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정말로 형인 씨 위하는 거면 친정집 일을 그만 간섭하세요. 부모님 앞에서도 올케 욕을 그만하시고 그만 이간질 하세요. 그래야 형인 씨도 잘 살 수 있어요. 그게 아니면 올케 백 명을 바꾼다 해도 다 똑같을 거예요.”“난 언니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동생이라곤 한 명뿐인데, 나중에 부모님이 연세 드셔서 돌아가시게 되면 친정에서 반겨줄 사람은 형인 씨와 형인 씨 와이프뿐이잖아요. 그렇게 자꾸 올케를 못살게 굴고 올케와 척을 지면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후에 동생 내외랑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세요? 다 큰 동생네 부부 사이 일에 그렇게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부모님까지 부추겨서 며느리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나 하는 거 삼가시라고요. 이미 동생을 한 번 이혼하게 했잖아요. 그래서 속이 후련
주형인이 완전 그녀한테로 돌아설 기회를 호시탐탐 엿본 것이나 다름없다.그리하여 지금 이 지경이 된 것도 순 자업자득이니 동정할 가치가 한 개도 없었다.“엄마, 아저씨는 오늘 왜 안 와요?”우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쳐들고는 하예진한테 물었다.그리고 어제 엄마와 같이 병원에 가서 노동명을 봤던 걸 떠올리며 또 물었다.“엄마, 아저씨 아직도 안 나았어요?”아저씨는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했다. 우빈은 오늘이면 아저씨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예진은 부드럽게 대답했다.“아저씨가 다 나으려면 시간이 좀 걸려. 우빈이 아저씨가 보고 싶어?”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노동명을 매일 보는 것에 습관 됐다. 갑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약간 불안하기도 하고 뭔가 허전했다.“엄마, 날 데리고 병원에 가서 아저씨 보러 가면 안 돼요?”노동명이 하예진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으나 우빈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예진도 그의 상처가 걱정됐다. 병실에서 쫓겨난 게 바로 아침인데, 하루도 채 지나가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빨리 나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병원에 아저씨 보러 가자.”우빈이 좋아서 방방 뛰었다.하예진은 채 빚다 만 만두를 냉장고에 넣고 간단히 정리를 한 뒤, 우빈을 데리고 토스트 가게를 나섰다.우빈이 갑자기 어른스러운 제안을 했다.“엄마, 우리 꽃을 사서 아저씨 드릴까요?”전에 하예진이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을 오는 사람마다 꽃다발을 들고 왔던 게 기억난 것이다. 그 후로 병원에 병문안을 가게 되면 반드시 꽃을 들고 가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좋아.”하예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차를 몰고 꽃필무렵으로 향했다....“예진 언니.”꽃을 사 들고 떠나려는 그때, 여운초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언니, 제가 방금 누구한테 부탁해서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을 좀 사 온 거 있는 데 노 대표님 드리려고 했거든요. 언니가 지금 병원에 가는 거면 대신 그 건강식품을 전달해줄수 있
여운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제가 직원한테 전화해서 언제 도착하는지 한 번 물어볼게요.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지 나갈 수 있어요.”노씨 집안과 친분을 쌓으려면 직접 가서 인사드리는 게 더 성의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여운초는 점원한테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전화가 연결됐다.“사장님, 저 다 왔는데요.”점원이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스쿠터를 세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하예진 모자를 보자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고 우빈을 들어 품에 안았다.미녀의 품에 안긴 우빈은 자신의 인기에 감탄하며 우쭐했다.여운초는 점원한테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 건강식품을 들고 하예진 모자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도착하니 노동명은 여전히 하예진을 만나기를 거부했다.노동명이 만나기 싫다고 하는 말을 듣고 여운초는 의아하여 눈을 크게 떴다.하예진뿐만 아니라 그가 제일 예뻐하던 우빈이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병실 밖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은 하예진 모자를 들여보내지 않았다.우빈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문밖에서 큰 소리로 아저씨, 아저씨 하며, 노동명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노동명은 들어오라는 소리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여운초만 윤미라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여운초는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노동명과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니 병문안용 인사만 몇 마디 나누고 건강식품을 남겨놓고 병실에서 나왔다.윤미라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동명아, 아무리 예진이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왜 우빈이까지 들여보내지 않는 거니? 넌 우빈이 예뻐했잖아. 걔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야. 네가 이러면 저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 거야.”노동명은 눈을 꾹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록 전태윤의 할머니한테서 한바탕 꾸지람이 아닌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는 아직도 내심 갈등하고 있었다.어떤 선택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말이 없는 노동명을 보며 윤미라는 눈시울을 붉혔다.‘내 탓이야. 전부 내 탓이야!
정겨울은 남편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예쁜 눈매를 접혔다.그녀는 현재 배불뚝이 임산부라 결혼식을 미루고 혼인신고만 했다.모연정과 은서윤은 이미 출산했고, 그녀 배 속에 있는 이 꼬물이도 출산일이 멀지 않았다. 모연정의 아기는 그녀의 아기와 거의 비슷한 날짜에 출산해야 하는데 쌍둥이기 때문에 좀 더 일찍 세상에 나왔다. 모연정은 이제 가뿐하게 다닐 수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배 속에 큰 수박을 쑤셔 넣은 것처럼 거동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배 속의 어린놈은 활발한 녀석임이 틀림없었다. 태동이 어찌나 심한지 가끔 발이나 손이 뱃가죽 아래로부터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배 속의 아이와 노는 게 예준일의 낙이었다. 매일 밤 태동이 제일 심할 때면 부자가 그녀의 뱃가죽을 사이에 두고 놀곤 한다.정겨울은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남아인 걸 안다.그녀는 의사니까. 그것도 아주 출중한 의술을 가진.예준일이 정겨울이 그의 뺨을 꼬집는 것이 싫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애당초 정겨울이 그의 ‘해독약’이 되어준 것도 이 준수한 얼굴 덕분이다. 그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 받은 아이라면 분명 외모 금수저로 태어날 터이니.예준일은 정겨울과 같이 리조트에서 산책을 즐겼다.예전에 정겨울은 환자를 보느라 일 년의 반 이상을 하늘에서 떠다녔다.예진 리조트로 와 넷째 사모님이 된 이후로 모든 사람은 그녀를 깨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유리구슬처럼 다뤘다. 그리하여 하루하루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만삭이 된 배로 바깥출입을 하긴 너무나 불편했다. 어쩔 수 없이 맨날 예준일을 붙잡고 저랑 같이 리조트 안에서 산책을 하게 되었다.리조트가 다행히 크고 풍경도 아름다워 매일 반나절씩 거닐고 다녀도 경치가 질리지 않았다.이때 집사가 걸어왔다.“넷째 도련님, 넷째 사모님. 전씨 집안 둘째 도련님이 또 찾아왔습니다.”전이진은 요 며칠 쩍하면 이리로 왔다. 하루에 세 탕, 네 탕씩 올 때도 있었다.예준일은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모여왔다. “그 사
예준일은 마뜩잖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정겨울은 정자에 들어와 앉았고 예준일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간식이랑 마실 것 좀 가져다주세요. 이따 전이진 씨가 오면 대접할 수 있게요.”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리조트 내선 전화에 전화를 걸어 간식과 과일, 음료를 내오게 했다. 물론 정겨울이 즐겨 먹는 간식도 같이 가져오라 했다.정겨울은 임신 후부터 깨어나기만 하면 간식을 찾았다. 하루 삼시세끼도 빼먹지 않고 꼭꼭 챙겨 먹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본인은 살이 찌지 않고 모두 배 속 아이한테 영양분이 흡수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아무리 먹어도 배만 커지고 다른 곳은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다.대략 십 분 뒤.전이진은 집사를 따라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예준일 씨, 정겨울 선생님.”환하게 웃는 얼굴로 전이진은 인사를 했지만 예준일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겨울이 눈길을 한 번 주어서야 그는 대뜸 온화한 낯빛으로 바꾸며 인사치레를 건넸다.“전이진 씨, 어서 앉으세요.”전이진은 그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루가 멀다 하고 서너 번씩 찾아오니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났을 터. 웬만한 수양과 인품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그를 문밖으로 내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운초를 위해 예준일의 차갑고 굳은 표정을 마주하는 것 정도야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그는 뻔뻔하고 개의치 않은 척 의자에 앉았다.정겨울이 차도 마시고 간식도 드시라고 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마시고 먹으며 아주 편한 듯 행동했다.“정 선생님 댁, 이 간식들이 아주 맛있네요.”전이진은 속에도 없는 칭찬을 꺼내놓았다. 그는 사실 그의 형님과 똑같이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하지만 저번에 예진 리조트에 오게 된 후, 정겨울이 각종 간식 디저트를 즐겨 먹는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녀와 같은 과인척하느라 좋아하는 표정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그의 말을 듣고 정겨울은 의심 없이 웃으며 말했다.“네, 맛있어요. 전 아무리
전호영의 전화를 받은 고현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핑계를 주었다.고현은 자신의 하이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자태를 감시하고 있는 진미리에게 말했다.“엄마, 호영 씨 전화예요.”“그래.”고현은 소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고 그녀의 걸음걸이 자태를 보던 진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왔다.남자의 분장에 익숙해진 고현이 치마로 갈아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진미리의 요구대로 잘 걸을 수 없었다. 재벌가 딸들의 우아한 자태로 걷는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현은 하이힐을 신고 삐뚤삐뚤 걸어 다녔다.어쨌든 진미리는 고현이 하이힐을 신고 걷는 모습이 매우 못마땅했다.고현은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진미리는 고현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걷는 연습을 시켰다. 비록 연회에 참석할 때 신을 하이힐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말이다.고현은 내심 불만이었다.하지만 진미리는 굽 높은 신발로 연습을 해야 연회 때 신어야 할 하이힐을 쉽게 신을 수 있다고 했다.“호영 씨.”고현은 부드럽게 전호영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처럼 전호영의 전화를 기다린 적이 없었고 또한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전호영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다.그녀는 성격이 차가운 편이라 전호영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가끔 고현이 전호영과 이야기할 때 약간의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건네기만 해도 전호영은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오후에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반나절을 쉬려고 우리 부모님 집으로 왔어요.”고현의 부드러움은 전호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만 사용됐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을 때는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갔다.전호영이 물었다.“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워커홀릭이라 결혼하기 전의 전태윤처럼 평일에 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말이 되어 집에서 쉰다 해도 사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고현은 가끔
임원들은 고빈의 주위에는 적어도 여성 지인들이 많아 그녀들과 만나면서 먹고 놀 수 있다지만, 고현은 그야말로 전호영에 의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아주 훌륭하고 관성의 제일 갑부인 전씨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뭐가 소용 있겠는가!동성연애는 국내 사람들이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고빈 씨에게 드리는 꽃이 아니거든요. 고현 씨는 회사에 없어요? 나가셨어요?”전호영이 물었다.고빈은 손이 전호영에 의해 뿌리쳐졌지만, 화도 내지 않고 일부러 전호영에게 말했다.“우리 형에게 매달리더니 너무 심하게 매달린 건 아닌가 봐요? 우리 형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우리 형이 오후에 회사에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모르셨어요?”전호영은 정말 몰랐다.그는 고현이 오늘 저녁에 그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밖에 몰랐다.오늘 밤 두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는 강성에 있는 한 재벌가의 저택에서 열리기 때문에 전호영은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왔다.그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왔다.전호영은 매일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선천적으로 잘생긴 외모로 옷을 대충 입어도 쉽게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다.“호영 씨 표정을 보니 우리 형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하하! 우리 형을 반년 넘게 귀찮게 하여 동성애자로 만들더니 결국 우리 형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이지는 못했네요.”고빈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전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시간이 없어서 잔소리 그만할게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고빈은 전호영을 뒤로 한 채 임원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프런트 데스크로 돌아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에게 물었다.“고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 정말로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어요?”“네, 오후에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전호영이 다시 물었다.“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안 하셨어요? 사업 때문에 나가신 거예요?”전
하예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살며시 노동명을 안아주었다.잠시 후 노동명은 그녀를 가볍게 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쉬어.”“잘 자요. 동명 씨도 내일 관성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두 사람은 서로 인사한 뒤 하예진은 노동명의 방을 나섰다. 노동명은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현관문 밖으로 나와 그녀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았다.밤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다음 날 노동명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진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하루 호텔을 떠났다.하예진은 공항까지 따라가지 않고 노동명을 차에 태우고 호텔 입구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공항까지 배웅하면 더 아쉬울 것 같았다.노동명이 타고 있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하예진은 그제야 경호원들과 함께 전호영이 안배해 준 차를 향해 걸어갔다.노동명이 관성으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계속 일을 해야 했다.바쁠 때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난다.날이 조금 전에 밝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저녁이 되었다.전호영은 고현이 오후에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그는 평소처럼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가서 고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그리고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고현은 사업이 무척 바빠서 전호영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매일 식사 시간이 바로 그와 고현이 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그의 차는 고씨 그룹에 들어가서 늘 주차하던 곳에 멈춰 섰고 전호영은 조수석에서 꽃다발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전호영은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고빈을 만났다. 고빈은 회사 임원 몇 명과 함께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전호영을 본 고현 일행은 멈추어 섰다.“회사엔 왜 왔어요?”고빈이 입을 열자마자 물었다.전호영은 그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제가 왜 당신 회사에 올 수 없어요?”전호영은 매일 고씨 그룹으로 왔다.그럼 전호영을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고빈이 감히 그를 쫓아낸
“응, 내일 돌아가려고. 예진이도 너무 바빠서 영향 줄까 봐 그래. 관성으로 돌아가서 우빈이도 돌봐야 예진이가 걱정하지 않지. 내가 강성으로 돌아가서 나와 우빈을 위해 강산을 다스려야 되거든. 하하!”노동명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하예진이 말했다.“나중에 빚이 쌓일까 봐 두렵네요.”노동명이 되물었다.“뭐가 두려워? 수십 조의 빚만 아니라면 다 갚아줄 수 있어. 넌 마음 놓고 가서 일해.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버텨줄 테니까. 파산될 걱정은 하지 마.”수십 조의 빚이라고?하예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현재 하예진의 상황으로 놓고 보면 수억 원의 빚만 져도 그녀는 너무 걱정되어 흰머리가 나올 것 같았다.전태윤은 또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우리 처형에게 너 같은 후원자가 있으니 반드시 강성에서 성공할 거야.”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전태윤의 음성메시지를 들려주며 말했다.“들어봐, 태윤이가 너를 엄청나게 믿고 있어.”“항상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제가 더 열심히 해야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네요.”“너도 혼자 견디지 말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다리를 다쳤지만 머리가 다친 건 아니거든. 나도 너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하예진은 노동명이 다리를 다쳤다는 둥 머리를 다쳤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동명 씨의 다리는 좋아질 거예요. 저는 그런 말 듣기 싫어요. 앞으로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동명 씨가 다리 나아지면 저랑 결혼도 하셔야죠.”노동명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런 말을 해 주니 내 다리도 분명 나아질 거야.”하예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너무 오래 얘기하지 마세요. 일찍 쉬어요. 저도 방에 가서 쉴게요. 내일 또 회사 일로 많이 뛰어다녀야 하거든요.”“응, 가. 잘 자.”노동명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달라고 암시했다.하예진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노동명의 칼자국이 있는 얼굴에 입을 맞추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
하예진이 물었다.“예정이에게 없고 저한테 있는 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동명 씨가 재활을 꾸준히 하시고 제가 관성에 없을 때 자신을 돌보고 시간이 나면 우빈을 돌봐 주세요. 우빈이도 동명 씨를 보러 자주 갈 거예요. 녀석이 지금 자기 아빠보다 동명 씨를 더 좋아하니까요.”노동명은 의기양양하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우빈에게 진심으로 대해서 그래. 우빈이 친아빠는 늘 우빈이 앞에서 내 험담만 하거든. 우빈이는 똑똑하니까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 잘 알고 있어. 우빈이 친아빠가 내 험담을 하면 할수록 자기 친아빠를 더 싫어할걸.”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바라보았다.주형인에 관한 얘기가 언급되자 하예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그때 하예진이 입을 열었다.“뭘 봐요? 내가 아직도 그 남자를 신경 쓰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단지 우빈이 아빠일 뿐이에요. 제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죠? 그 사람을 언급하면 제 기분이 가라앉을 줄 알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제가 어떻게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직도 사랑했다면 애초에 이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마음이 찢어진 이상 최대한 빨리 이혼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주형인도 약속한 대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더는 하예진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관성은 우빈 뿐이었다.그러나 주형인은 하예진과 노동명이 함께 있는 모습을 태연자약하게 지켜보지 못했다.그는 또 노동명이 친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나은 계부로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을 했다.우빈이 아직 노동명을 두려워할 때,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우빈은 노동명을 대신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오늘날 우빈과 노동명의 사이가 매우 좋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주형인 부자가 만날 때마다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이 폐인으로 되었기에 하예진과 함께 한다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거나 다름없다면서 노동명의 험담했다.또
모두 웃기 시작했다.전호영은 노동명과 하예진이 돌아오면 요리들이 올라오게끔 미리 준비해 놓았다.그들은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 후 고현은 곧 자리를 떠나 고성 호텔로 박 대표를 만나러 갔다.다행히도 하루 호텔과 고성 호텔은 가까웠다. 두 호텔은 길을 건너면 바로 볼 수 있다.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해 주겠다고 고집했다.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호텔을 나와 호텔 근처 거리를 거닐며 강성의 밤거리를 구경시켜 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노동명이 뒤에 있는 하예진에게 물었다.하예진은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 앞으로 저에게 닥칠 일들이 지금보다 더 가혹할 거에요. 만약 이번 일조차 직면할 수 없다면 제가 강성에 있을 필요도 없이 관성으로 돌아가 계속 저의 레스토랑을 돌보는 게 나을걸요.”그렇게 하면 이경혜의 바람과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다행이네. 이렇게 오래 돌아다녔는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선물로 사줄게.”하예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제가 사면 돼요. 선물할 필요 없어요.”“난 지금 네 남자 친구거든.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할 남자라고.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준 적 없는데. 사실 우리 집 객실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러 선물로 가득 차 있거든. 전부 내가 너에게 준비한 선물들이야. 어떤 것은 너에게 선물했지만 네가 받지 않은 물건들이고 어떤 것은 내가 너에게 미처 선물하지 못한 것도 들어있어. 네가 받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방에 넣어두었거든. 앞으로 우리가 한 가족으로 되면 그 물건들은 어차피 너의 것으로 될 테니까. 네가 가지지 않으면 우리 집안의 돈이 낭비되는 거나 다름없을 텐데. 너도 우리 가정의 돈이 낭비되는 게 싫지?”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과거에 그녀는 노동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재혼하고 싶지 않고 돈만 벌고, 사업을 일으켜 우빈을 잘 키워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을 1층으로 안내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에서 고현에게 뽀뽀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그는 고씨 그룹에서 고현에게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어쨌든 고현은 고씨 그룹의 대표님이니까.전호영이 차를 몰고 고현과 함께 고씨 그룹을 떠났고 고현의 운전기사와 경호원들도 두 사람 뒤를 따랐다.식사를 마치고 나면 고현은 또 박 대표와 약속이 있었다.전호영은 그들이 하루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과 노동명은 아직 호텔에 돌아오지 않았다.하예진 일행은 약 30분 뒤에야 호텔로 돌아왔다.하예진은 어두운 얼굴로 노동명을 호텔로 밀고 들어갔다. 노동명은 계속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못 듣는 체했다.노동명은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위로의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하예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고 노동명도 더는 위로하지 않았다.하예진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위층으로 올라가 전호영이 안배해 준 식사하는 룸에 도착해서야 하예진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동명이 형.”전호영은 하예진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급히 일어나 하예진을 도우려고 했다.“호영 씨, 동명 씨가 혼자 몇 걸음 걸을 수 있어요.”하예진은 전호영의 도움 없이 노동명의 휠체어를 식탁 앞에 세웠고 노동명은 스스로 일어나 두 걸음 걷다가 다시 탁자 앞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고현도 일어섰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과 인사를 했다.“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하예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괜찮아요.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언니, 일은 다 처리했어요?”모두 자리에 앉은 후 고현은 두 사람에게 각각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주며 관심 있게 하예진에게 물었다.“다 처리했어요.”하예진이 대답했다.“잘됐네요. 노 대표님, 내일 돌아가시려고요?”고현은 나지막이 물었다.노동명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예진이 보러 온 것뿐이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