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는 시름을 놓으며 서현주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주는 안색이 변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말했다.“어머니, 저 배 아파요.”그 말을 들은 김은희는 즉시 밖에 있는 주서인을 향해 소리쳤다.“서인아, 얼른 119 불러. 현주가 배 아프대.”거실에 있는 주서인은 김은희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도 건들건들 걸어가서 방 문틀에 기대어 손에 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엄마, 쟤 하루에도 백 번, 천 번은 배 아프다는 소리를 해요. 믿지 말아요. 119는 무슨, 거짓 신고하면 의료 자원 낭비인 거 몰라요? 더 필요한 사람들한테 양보하자고요.”“현주가 방금 자빠졌어!”김은희는 매섭게 소리 지르며 주서인을 재촉했다.“빨리 구급차 불러, 빨리!”서현주가 침대에 누워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자 주서인은 그제야 진짜라 믿고 구급차를 불렀다....오후 4시, 따스한 햇볕이 가게 안으로 들이치고 있었다.점심때면 가게 문을 닫았던 예전과는 달리 오늘, 하루 토스트는 하루 내내 문을 활짝 열었다.하예진은 우빈과 함께 가게 안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두 점원은 이미 퇴근했고, 가끔 손님이 들어오게 되면 하예진은 그들을 맞아 음식을 만들었다.이 시각,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우빈은 애니메이션에 한창 정신이 팔려있고 하예진은 그 옆에 앉아 만두를 빚고 있었다.유리문이 열렸다.고개를 돌아보니 아주 한동안 그녀 앞에 나타난 적이 없던 전 시누이, 주서인이었다.“고모!”우빈이 보고 그녀를 불렀다. 주서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까이 걸어와 우빈을 품에 안았다.“우빈이 애니메이션 보고 있었구나.”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주서인은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사 온 과일 꾸러미를 하예진한테 건넸다.그걸 받으며 하예진이 말했다.“그냥 오면 되는데 뭘 또 사 들고 오세요.”“조카 보러 오는데 맨손으로 올 수 있나. 먹을 거라도 사 와야지.”주서인은 하예진이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시 자리
물론 주서인은 절대 그 일이 자신과 관련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서현주 그 악독한 년이 하예진이 남편 잡아먹을 팔자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주형인을저주하고 자신의 두 아들까지 저주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를 당한 거라 생각했다.서현주의 배 안에 아이는 남아였다. 유산되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김은희와 서현주는 숨이 넘어가게 울어 젖혔다. 주서인도 마음이 좋지 않긴 하였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뿐이었다.그 찢어놓고 싶은 입으로 그녀의 두 아들이 무사하게 자라지 못할 것이라며, 다 커서도 변고가 생길지 모른다며 씨불이더니 결국 말이 씨가 돼버린 것이다. 그것도 저 자신한테로.주서인은 이런 게 바로 업보라고 굳게 믿었다.“예진아, 넌 모를 거야, 그년이 얼마나 악독한지. 노 대표가 사고 났다는 뉴스에 그 양심 없는 언론 기자들이 너를 맘대로 갖다 붙이면서 추측성 기사를 낸 걸 그년이 보고서는 널 팔자가 사나워서 남자를 잡아먹는다고 하더라. 노 대표가 널 좋아했기 때문에 사고 난 거라고.”“그리고 우리 집에서 너랑 형인이가 재결합하길 바란다는 걸 비아냥거리면서, 그렇게 되면 형인이도 너 때문에 차 사고 날 거라고 하는 거야. 형인이가 지금 콜택시를 하고 있는데 사고 나기 딱 좋다고 하면서. 네가 말해 봐. 그거 미친년 아니야?”주서인은 서현주가 자기 두 아들을 저주한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들려주었다.“애가 유산된 건 나도 막 깨 고소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진짜 그년이 인과응보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년 너무 악독해. 예전엔 몰랐어, 그 정도로 악독한 줄은. 그 동네에 서현주랑 말 섞는 사람 찾아볼 수가 없어. 애들도 보면 멀리 찍 피해 다녀, 그 여자한테 해코지당할까 봐.”“예진아, 기사에서 떠드는 내용은 맘에 담아둘 거 없어. 네가 진짜 남자 잡아먹을 사주면 형인이가 저대로 잘 살아있겠어? 형인이가 너랑 같이 살 땐 사업도 잘 나가고 했는데 서현주 그년과 같이 있으면서 하락세를 맞게 된 거야. 분명 그년이 팔자가 사납고 남자를 잡아먹는 관상인 게
주서인은 멋쩍게 웃으며 우빈이를 두어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우빈이도 아빠가 필요하지 않겠어?”“우빈이는 지금도 아빠가 있어요. 나랑 형인 씨가 어떤 사이가 됐던 그 사람은 우빈이 아빠예요. 평생 변하지 않아요, 그건.”“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예진아. 난 우빈이가 아빠가 있는 건전한 가정에서 자라야 더 즐겁게 성장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뜻이야.”“제 생각에 우빈이는 지금 매우 즐거워요. 언제나 그랬어요. 예전에도 형인 씨는 매일 일하느라 바쁘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느라 바빠서 아이랑 놀아준 적이 별로 없어요. 지금도 그저 가끔 와서 보고 가는데, 예전이랑 다를 게 뭐에요? 우빈이는 아빠가 곁에 없는 것에 이미 습관 됐어요. 저랑 예정이가 아이한테 부족하지 않게 잘 챙겨주고 있어서 저희 우빈이는 걱정이나 고민 없이 충분히 즐겁게 잘 성장하고 있어요.”주서인은 할 말이 없었다. 우빈이를 핑계 삼는 건 통하지 않았다.주씨 집안 사람들은 줄곧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예진을 수도 없이 설득했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다.주형인도 속으로 후회하고 있지만 하예진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그가 마음을 바꿔먹고 그녀를 쫓아다녀도 받아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정말로 형인 씨 위하는 거면 친정집 일을 그만 간섭하세요. 부모님 앞에서도 올케 욕을 그만하시고 그만 이간질 하세요. 그래야 형인 씨도 잘 살 수 있어요. 그게 아니면 올케 백 명을 바꾼다 해도 다 똑같을 거예요.”“난 언니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동생이라곤 한 명뿐인데, 나중에 부모님이 연세 드셔서 돌아가시게 되면 친정에서 반겨줄 사람은 형인 씨와 형인 씨 와이프뿐이잖아요. 그렇게 자꾸 올케를 못살게 굴고 올케와 척을 지면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후에 동생 내외랑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세요? 다 큰 동생네 부부 사이 일에 그렇게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부모님까지 부추겨서 며느리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나 하는 거 삼가시라고요. 이미 동생을 한 번 이혼하게 했잖아요. 그래서 속이 후련
주형인이 완전 그녀한테로 돌아설 기회를 호시탐탐 엿본 것이나 다름없다.그리하여 지금 이 지경이 된 것도 순 자업자득이니 동정할 가치가 한 개도 없었다.“엄마, 아저씨는 오늘 왜 안 와요?”우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쳐들고는 하예진한테 물었다.그리고 어제 엄마와 같이 병원에 가서 노동명을 봤던 걸 떠올리며 또 물었다.“엄마, 아저씨 아직도 안 나았어요?”아저씨는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했다. 우빈은 오늘이면 아저씨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예진은 부드럽게 대답했다.“아저씨가 다 나으려면 시간이 좀 걸려. 우빈이 아저씨가 보고 싶어?”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노동명을 매일 보는 것에 습관 됐다. 갑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약간 불안하기도 하고 뭔가 허전했다.“엄마, 날 데리고 병원에 가서 아저씨 보러 가면 안 돼요?”노동명이 하예진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으나 우빈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예진도 그의 상처가 걱정됐다. 병실에서 쫓겨난 게 바로 아침인데, 하루도 채 지나가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빨리 나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병원에 아저씨 보러 가자.”우빈이 좋아서 방방 뛰었다.하예진은 채 빚다 만 만두를 냉장고에 넣고 간단히 정리를 한 뒤, 우빈을 데리고 토스트 가게를 나섰다.우빈이 갑자기 어른스러운 제안을 했다.“엄마, 우리 꽃을 사서 아저씨 드릴까요?”전에 하예진이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을 오는 사람마다 꽃다발을 들고 왔던 게 기억난 것이다. 그 후로 병원에 병문안을 가게 되면 반드시 꽃을 들고 가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좋아.”하예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차를 몰고 꽃필무렵으로 향했다....“예진 언니.”꽃을 사 들고 떠나려는 그때, 여운초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언니, 제가 방금 누구한테 부탁해서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을 좀 사 온 거 있는 데 노 대표님 드리려고 했거든요. 언니가 지금 병원에 가는 거면 대신 그 건강식품을 전달해줄수 있
여운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제가 직원한테 전화해서 언제 도착하는지 한 번 물어볼게요.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지 나갈 수 있어요.”노씨 집안과 친분을 쌓으려면 직접 가서 인사드리는 게 더 성의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여운초는 점원한테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전화가 연결됐다.“사장님, 저 다 왔는데요.”점원이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스쿠터를 세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하예진 모자를 보자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고 우빈을 들어 품에 안았다.미녀의 품에 안긴 우빈은 자신의 인기에 감탄하며 우쭐했다.여운초는 점원한테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 건강식품을 들고 하예진 모자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도착하니 노동명은 여전히 하예진을 만나기를 거부했다.노동명이 만나기 싫다고 하는 말을 듣고 여운초는 의아하여 눈을 크게 떴다.하예진뿐만 아니라 그가 제일 예뻐하던 우빈이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병실 밖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은 하예진 모자를 들여보내지 않았다.우빈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문밖에서 큰 소리로 아저씨, 아저씨 하며, 노동명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노동명은 들어오라는 소리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여운초만 윤미라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여운초는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노동명과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니 병문안용 인사만 몇 마디 나누고 건강식품을 남겨놓고 병실에서 나왔다.윤미라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동명아, 아무리 예진이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왜 우빈이까지 들여보내지 않는 거니? 넌 우빈이 예뻐했잖아. 걔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야. 네가 이러면 저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 거야.”노동명은 눈을 꾹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록 전태윤의 할머니한테서 한바탕 꾸지람이 아닌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는 아직도 내심 갈등하고 있었다.어떤 선택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말이 없는 노동명을 보며 윤미라는 눈시울을 붉혔다.‘내 탓이야. 전부 내 탓이야!
정겨울은 남편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예쁜 눈매를 접혔다.그녀는 현재 배불뚝이 임산부라 결혼식을 미루고 혼인신고만 했다.모연정과 은서윤은 이미 출산했고, 그녀 배 속에 있는 이 꼬물이도 출산일이 멀지 않았다. 모연정의 아기는 그녀의 아기와 거의 비슷한 날짜에 출산해야 하는데 쌍둥이기 때문에 좀 더 일찍 세상에 나왔다. 모연정은 이제 가뿐하게 다닐 수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배 속에 큰 수박을 쑤셔 넣은 것처럼 거동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배 속의 어린놈은 활발한 녀석임이 틀림없었다. 태동이 어찌나 심한지 가끔 발이나 손이 뱃가죽 아래로부터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배 속의 아이와 노는 게 예준일의 낙이었다. 매일 밤 태동이 제일 심할 때면 부자가 그녀의 뱃가죽을 사이에 두고 놀곤 한다.정겨울은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남아인 걸 안다.그녀는 의사니까. 그것도 아주 출중한 의술을 가진.예준일이 정겨울이 그의 뺨을 꼬집는 것이 싫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애당초 정겨울이 그의 ‘해독약’이 되어준 것도 이 준수한 얼굴 덕분이다. 그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 받은 아이라면 분명 외모 금수저로 태어날 터이니.예준일은 정겨울과 같이 리조트에서 산책을 즐겼다.예전에 정겨울은 환자를 보느라 일 년의 반 이상을 하늘에서 떠다녔다.예진 리조트로 와 넷째 사모님이 된 이후로 모든 사람은 그녀를 깨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유리구슬처럼 다뤘다. 그리하여 하루하루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만삭이 된 배로 바깥출입을 하긴 너무나 불편했다. 어쩔 수 없이 맨날 예준일을 붙잡고 저랑 같이 리조트 안에서 산책을 하게 되었다.리조트가 다행히 크고 풍경도 아름다워 매일 반나절씩 거닐고 다녀도 경치가 질리지 않았다.이때 집사가 걸어왔다.“넷째 도련님, 넷째 사모님. 전씨 집안 둘째 도련님이 또 찾아왔습니다.”전이진은 요 며칠 쩍하면 이리로 왔다. 하루에 세 탕, 네 탕씩 올 때도 있었다.예준일은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모여왔다. “그 사
예준일은 마뜩잖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정겨울은 정자에 들어와 앉았고 예준일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간식이랑 마실 것 좀 가져다주세요. 이따 전이진 씨가 오면 대접할 수 있게요.”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리조트 내선 전화에 전화를 걸어 간식과 과일, 음료를 내오게 했다. 물론 정겨울이 즐겨 먹는 간식도 같이 가져오라 했다.정겨울은 임신 후부터 깨어나기만 하면 간식을 찾았다. 하루 삼시세끼도 빼먹지 않고 꼭꼭 챙겨 먹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본인은 살이 찌지 않고 모두 배 속 아이한테 영양분이 흡수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아무리 먹어도 배만 커지고 다른 곳은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다.대략 십 분 뒤.전이진은 집사를 따라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예준일 씨, 정겨울 선생님.”환하게 웃는 얼굴로 전이진은 인사를 했지만 예준일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겨울이 눈길을 한 번 주어서야 그는 대뜸 온화한 낯빛으로 바꾸며 인사치레를 건넸다.“전이진 씨, 어서 앉으세요.”전이진은 그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루가 멀다 하고 서너 번씩 찾아오니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났을 터. 웬만한 수양과 인품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그를 문밖으로 내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운초를 위해 예준일의 차갑고 굳은 표정을 마주하는 것 정도야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그는 뻔뻔하고 개의치 않은 척 의자에 앉았다.정겨울이 차도 마시고 간식도 드시라고 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마시고 먹으며 아주 편한 듯 행동했다.“정 선생님 댁, 이 간식들이 아주 맛있네요.”전이진은 속에도 없는 칭찬을 꺼내놓았다. 그는 사실 그의 형님과 똑같이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하지만 저번에 예진 리조트에 오게 된 후, 정겨울이 각종 간식 디저트를 즐겨 먹는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녀와 같은 과인척하느라 좋아하는 표정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그의 말을 듣고 정겨울은 의심 없이 웃으며 말했다.“네, 맛있어요. 전 아무리
하지만 지금 정겨울은 배가 남산만 하게 나와서 산전 검사를 받으러 나갈 때도 그가 경호원을 몇 명 대동시켜 곁에 딱 붙어서 보살펴야 한다.전이진은 그의 말을 듣고 서둘러 말했다.“네, 저도 알아요. 정 선생님이 제 약혼녀의 눈을 치료해 주신다고 하셔도 전 사절할 겁니다.”전이진은 눈길을 정겨울한테 돌리며 사정했다.“그렇지만 정 선생님께서 스승님한테 진찰을 요청드릴 순 없나요? 돈이 얼마 들던 제가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어떠한 조건이라도 만족시켜 드릴게요.”정겨울의 의술도 상당하지만 신의는 더 말도 못 하게 입신의 경지에 이른 의술을 갖고 있다. 그녀의 스승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신의라는 그 명칭은 몇십 년이나 전해져올 만큼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세간에 ‘신’자를 붙일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만약 신의님을 모셔 여운초의 눈을 치료한다면 치유될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신의와 정겨울, 두 사람은 여운초한테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전이진은 전에 여운초한테 꼭 신의를 모셔 와 그녀의 눈을 치료해 주어 앞을 다시 보게 만들어 줄 것이라 약속했다.비록 실명한 상태라 하여도 그는 상관없었지만 그녀는 열등감으로 인해 그가 아무리 잘 해줘도 시종 자신이 그에 비해 부족하고 뒤떨어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의 마음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할머니가 준 1년의 기한이 절반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전이진은 속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그렇다고 날짜가 되어 그녀를 억지로 구청으로 끌고 가서 혼인 신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건 날강도나 할 법한 강제 혼인이다. 그의 집안에서 지금까지 그런 선례는 없었다. 그도 그 선례를 깨뜨릴 첫 번째 후손이 될 수는 없다.하지만 셋째가 아직도 아무런 기미가 없다는 걸 생각하며 전이진은 조금 안심하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최소한 여운초와 어느 정도 진전이 있다.신의 얘기가 나오니 예준일은 입을 다물었다.신의의 제자 남편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대신 환자를 받을 처지까지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