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나도 안심이네. 노 대표가 언니한테 뭐라고 하던, 어떻게 성질을 부리던, 그건 다 진심이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하예정이 병원에 갔을 때 노진규가 그들 부부한테 모든 것을 얘기해줬다.그녀는 노동명이 한 말은 진심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불구가 되어 평생 휠체어를 타게 될까 봐, 다른 사람들이 그를 연민하는 눈길로 바라볼까 봐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랬다고 생각했다.잠자코 있던 하예진이 입을 열었다.“동명 씨가 자포자기 안 했으면 좋겠어. 퇴원하고 나서도 꾸준히 재활해서 빨리 회복하길 바라.”“그럴 거야.”하예정은 하예진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나랑 뭐 더 할 말 있어?”“노 대표 사고 난 거, 관성 실시간 검색어에 떴는데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면서 언니 이름까지 거론됐어.”하예정은 잠깐 멈칫하더니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현지 뉴스를 열어 확인했다. 노씨 그룹 대표이사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실검에 뜨긴 했지만 순위는 높지 않았다.그녀는 기사를 열어보았다.“태윤 씨가 실검 순위를 하위로 내렸어. 금방 실검에서 볼 수 없을 거야.”하예정은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난 괜찮은데 이 일이 노씨 그룹에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이야.”노씨 그룹은 노동명 개인에 속하는 기업이라 회사의 모든 결정권은 그 혼자한테만 있다. 노진 그룹처럼 노씨 집안의 가족 사업체가 아니기 때문에 대표가 일이 생겨도 대표직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다.그한테 지금 변고가 생겼으므로 잠시는 회사 임원들이 잘 알아서 운영하겠지만 시간이 오래 갈수록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해질 것이고 그 틈을 타 딴마음을 먹는 이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태윤 씨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노씨 집안에서도 노 대표 둘째 형을 회사로 보낼 거야.”노동명의 큰 형은 노진 그룹의 대표로서 노씨 그룹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 그리하여 둘째 형을 보내 회사의 안정을 유지하도록 했다. 노씨 집안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또 전씨 그룹에서도 같이 챙기고
어르신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나무라는 투로 얘기했다.“왜? 지금 여기 누워있는다고 벌써 자신감이 사라져서 예진이를 남한테 떠미는 거야?”그리고 노동명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또 말을 이었다.“너 예진이를 뭐로 생각해, 대체? 걔 인생을 네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남한테 떠밀기 전에 먼저 네 사람이 되는 게 우선 아니야? 네 사람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남한테 떠밀어? 네 이놈, 예진이 손도 못 잡아봤지? 너흰 시작도 안 했는데 주제넘게 예진이한테 남자를 소개해 줘라 말아라 하는 거야?”“여기 아프냐?”노동명의 다친 다리를 약간 힘을 줘 누르며 어르신이 물었다.“아... 어르신, 아파요, 아파요!”다리로부터 전해져 오는 통증은 노동명으로 하여금 이마에 식은 탐이 송골송골 맺히게하였지만 그는 줄곧 꾹 참으며 한 번도 앓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어르신 앞에서는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어 어리광 부리듯이 솔직하게 아픔을 호소했다.“아픈 줄 아는 건 좋은 일이야. 감각이 있다는 거잖아. 감각이 있으면 불구 될 일 없어. 물론 근육이나 뼈가 다치면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 퇴원하고 나서 재활센터를 찾아 열심히 재활 하도록 해. 네가 옛날처럼 씽씽 날아다니는 모습을 꼭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난 믿는다.”노동명은 괴롭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르신, 난 두려워요. 평생 휠체어에 앉아 다녀야 할까 봐서요.”“지금 의사도 네가 꼭 휠체어 신세가 될 거라고 단정 못 짓는데 왜 섣불리 그런 걱정을 해. 너 불구가 돼서 예진이 고생시킬까 봐 걔를 안 보려고 하는 거구나. 그래서 태윤이까지 병실에 들이지 않고 또 예진이한테 그딴 맘에도 없는 말을 하고. 예진이랑 원래부터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런 형편없는 소리로 걔 마음에 상처 주기까지 하다니. 너 진짜 이대로 예진이 포기할 셈이냐?”“내가 전에 우리 집안의 그 불효막심한 손주 놈들 때문에 며느릿감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물색하면서 젊고 괜찮은 놈 몇몇 눈여겨 본 게 있다. 내가 손녀
어르신은 일어나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병실을 나갔다....주씨 집안.서현주는 소파에 가로누워 즐거운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그때 집 문이 열리고 김은희와 주서인이 밖에서 들어왔다.주서인을 본 서현주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저 염치없는 여자가 또 왔네.’주서인도 서현주와 똑같은 얼굴이었다.서현주와 주형인은 신혼집으로 다시 이사왔다. 물론 인테리어도 새로 했다. 원래 인테리어는 하예진이 사람을 데리고 와 다 망가뜨렸기 때문이다.비록 이젠 셋집살이가 아니지만 여전히 매일 소란스러웠다.주서인은 전혀 눈치라는 걸 보지 않고 그들의 신혼집을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빈손으로 와서는 갈 때 냉장고를 열어 안에 있는 것들을 싹 다 털어가곤 했다.낯짝에 철판을 깐 게 아닌지 심히 의심되었다.그 때문에 서현주는 주형인과 몇 번 싸웠는지 모른다.그녀는 임신한 후로 시집에서 보배처럼 떠받들려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시어머니는 그나마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주서인은 전혀 변화가 없이 제멋대로였다. 서현주는 주서인 때문에 자꾸 열받으면 유산할지도 모른다고 주형인한테 불만을 토로했다.아이가 유산되면 그녀는 다시 감옥에 들어가 채 받지 못한 형을 마저 받아야 한다.“현주야, 휴대폰 좀 그만 봐. 아이한테 안 좋아.”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는 서현주를 보게 된 김은희는 참지 못해 한마디 핀잔을 줬다.하마터면 하예진 모자를 죽일 뻔한 눈꼴 사나운 여자지만 하필 감옥에 들어간 후 주씨 집안 핏줄을 잉태한 것으로 드러났다.주형인이 형 집행 정지를 신청하여 서현주를 데리고 나왔을 때 김은희는 분에 겨워 화병이 날 것 같았지만 결국 그녀의 배 속에 주씨 집안 손주가 있으므로 참았다.“뉴스 보고 있었어요.”서현주는 일어나 앉으며 주서인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형님 또 오셨어요? 어머니, 형님 시집가지 않았나요? 왜 쩍하면 친정집에 들락날락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혼하여 시집에서 쫓겨난
주서인은 서현주를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우리 집안의 애를 임신하지만 않았더라면 난 벌써 네 뺨을 때리고도 남았을 거야. 내가 볼 때 예진이가 팔자 사나운 게 아니라 네가 사나워, 네가! 이런 독한 년! 그따위로 네 남편 되는 사람을 저주해? 네가 형인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감옥에 처박혀있었어, 알아? 걔가 널 형 집행 정지로 꺼내줬는데 지금 차 사고 나라고 저주나 퍼붓고 말이야.”“그 노 대표인가 뭔가 하는 인간이 사고 났는데 예진이랑 무슨 상관있다고? 예진이는 그 남자랑 사귀지도 않는데. 제가 찾아가다가 엄마가 뒤쫓는 바람에 사고 난 걸 왜 예진이 한테 덤터기 씌워? 그건 언론에서 헛소리하면서 주작질 한 거라고. 눈길 좀 끌어보려고 예진이를 같이 엮어서. 그것들은 완전 양심 없는 쓰레기 언론사야.”주서인은 따발총처럼 욕설을 내뱉었다. 서현주는 반박할 틈을 찾지 못했다. 목청도 여간 높은 게 아니라서 아마 위아래층 할 것 없이 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씨 집안이 이 동네의 사람들이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씹어대는 안줏거리로 전락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하예진이 사람을 데리고 와 이 집의 인테리어를 깨부술 때부터 주씨 집안 명성은 아파트단지에 자자하게 퍼졌다. 그 후 주형인과 하예진이 이혼하고 내연녀가 안주인이 된 것도, 또 내연녀가 시댁과 자주 불화가 일고 범죄까지 저질러 임신하지만 않았다면 감옥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평소 서현주가 동네에서 산책을 할 때 이웃들은 그녀를 꺼림칙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녀와 말을 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더더욱 서현주를 보면 애를 데리고 피해 도망가며, 그녀가 인신매매범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애한테 보게 되면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고 재삼 일러주기까지 했다.“네가 형인이와 예진이 사이에 끼어든 다음부터 형인이는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어. 그건 다 네 팔자가 사나워 그런 거야. 넌 진짜 재수 옴 붙은 년이야. 주제에 예진이를 들먹이긴, 네가 그럴 자
방금 서현주가 그녀의 두 외손자를 악독한 말로 저주한 데 대해 김은희도 매우 화가났지만 서현주가 배를 끌어안고 아프다고 소리치자 얼른 다가가서 부축하며 잔뜩 긴장한 채 말했다.“어서 앉아. 아니면 방에 들어가서 누워있던가.”“엄마, 쟤 그냥 꾀병이야. 쩍하면 배 아픈 척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야?”서현주의 배 아프다는 말을 주서인은 아예 믿지도 않았다.“서인아...”김은희는 딸한테 그만하라고 눈치 주며 서현주를 부축해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눕혔다. 주서인한테 맞은 뺨이 벌겋게 퉁퉁 부어오른 걸 보고 그녀는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딸과 싸울까 봐 걱정됐다.“현주야, 네 얼굴에 찜질하게 내가 가서 얼음 좀 가져올게.”서현주는 얼굴을 만져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은희는 얼음을 가지러 갔다.침대에 누운 서현주는 지금 살고 있는 꼴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어찌 됐든 이건 그녀의 선택이었다.주형인과 하예진, 둘 사이에 끼어든 것도 누가 부추긴 것이 그녀가 원해서 한 짓이니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친정에 갈 수도 없고 시댁에서 맨날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한다. 못된 시누이에 시누이 편만 하는 시부모... 그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배 안에 아이라도 있지 않았으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거다.이 아이가 있기에 그나마 감옥에서 잠시 해방되어 편안히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 아이를 꽤 중요시하게 생각하여 주서인으로 인해 유산되는 일이 없게 잘 보호해 왔다.불현듯 서현주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이때 김은희가 얼음주머니를 갖고 들어왔다.“현주야, 어딜 가려고?”그녀가 물어보자 서현주가 대답했다.“화장실에요.”서현주는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고 김은희는 침대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서현주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주형인한테 문자를 보내 시누이의 ‘악행’을 일러바쳤다.하지만 주형인은 오더를 받아 손님을 공항으로 모셔야 한다며 알겠다고 한 마디 딸랑 보내놓고
김은희는 시름을 놓으며 서현주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주는 안색이 변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말했다.“어머니, 저 배 아파요.”그 말을 들은 김은희는 즉시 밖에 있는 주서인을 향해 소리쳤다.“서인아, 얼른 119 불러. 현주가 배 아프대.”거실에 있는 주서인은 김은희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도 건들건들 걸어가서 방 문틀에 기대어 손에 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엄마, 쟤 하루에도 백 번, 천 번은 배 아프다는 소리를 해요. 믿지 말아요. 119는 무슨, 거짓 신고하면 의료 자원 낭비인 거 몰라요? 더 필요한 사람들한테 양보하자고요.”“현주가 방금 자빠졌어!”김은희는 매섭게 소리 지르며 주서인을 재촉했다.“빨리 구급차 불러, 빨리!”서현주가 침대에 누워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자 주서인은 그제야 진짜라 믿고 구급차를 불렀다....오후 4시, 따스한 햇볕이 가게 안으로 들이치고 있었다.점심때면 가게 문을 닫았던 예전과는 달리 오늘, 하루 토스트는 하루 내내 문을 활짝 열었다.하예진은 우빈과 함께 가게 안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두 점원은 이미 퇴근했고, 가끔 손님이 들어오게 되면 하예진은 그들을 맞아 음식을 만들었다.이 시각,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우빈은 애니메이션에 한창 정신이 팔려있고 하예진은 그 옆에 앉아 만두를 빚고 있었다.유리문이 열렸다.고개를 돌아보니 아주 한동안 그녀 앞에 나타난 적이 없던 전 시누이, 주서인이었다.“고모!”우빈이 보고 그녀를 불렀다. 주서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까이 걸어와 우빈을 품에 안았다.“우빈이 애니메이션 보고 있었구나.”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주서인은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사 온 과일 꾸러미를 하예진한테 건넸다.그걸 받으며 하예진이 말했다.“그냥 오면 되는데 뭘 또 사 들고 오세요.”“조카 보러 오는데 맨손으로 올 수 있나. 먹을 거라도 사 와야지.”주서인은 하예진이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시 자리
물론 주서인은 절대 그 일이 자신과 관련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서현주 그 악독한 년이 하예진이 남편 잡아먹을 팔자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주형인을저주하고 자신의 두 아들까지 저주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를 당한 거라 생각했다.서현주의 배 안에 아이는 남아였다. 유산되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김은희와 서현주는 숨이 넘어가게 울어 젖혔다. 주서인도 마음이 좋지 않긴 하였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뿐이었다.그 찢어놓고 싶은 입으로 그녀의 두 아들이 무사하게 자라지 못할 것이라며, 다 커서도 변고가 생길지 모른다며 씨불이더니 결국 말이 씨가 돼버린 것이다. 그것도 저 자신한테로.주서인은 이런 게 바로 업보라고 굳게 믿었다.“예진아, 넌 모를 거야, 그년이 얼마나 악독한지. 노 대표가 사고 났다는 뉴스에 그 양심 없는 언론 기자들이 너를 맘대로 갖다 붙이면서 추측성 기사를 낸 걸 그년이 보고서는 널 팔자가 사나워서 남자를 잡아먹는다고 하더라. 노 대표가 널 좋아했기 때문에 사고 난 거라고.”“그리고 우리 집에서 너랑 형인이가 재결합하길 바란다는 걸 비아냥거리면서, 그렇게 되면 형인이도 너 때문에 차 사고 날 거라고 하는 거야. 형인이가 지금 콜택시를 하고 있는데 사고 나기 딱 좋다고 하면서. 네가 말해 봐. 그거 미친년 아니야?”주서인은 서현주가 자기 두 아들을 저주한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들려주었다.“애가 유산된 건 나도 막 깨 고소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진짜 그년이 인과응보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년 너무 악독해. 예전엔 몰랐어, 그 정도로 악독한 줄은. 그 동네에 서현주랑 말 섞는 사람 찾아볼 수가 없어. 애들도 보면 멀리 찍 피해 다녀, 그 여자한테 해코지당할까 봐.”“예진아, 기사에서 떠드는 내용은 맘에 담아둘 거 없어. 네가 진짜 남자 잡아먹을 사주면 형인이가 저대로 잘 살아있겠어? 형인이가 너랑 같이 살 땐 사업도 잘 나가고 했는데 서현주 그년과 같이 있으면서 하락세를 맞게 된 거야. 분명 그년이 팔자가 사납고 남자를 잡아먹는 관상인 게
주서인은 멋쩍게 웃으며 우빈이를 두어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우빈이도 아빠가 필요하지 않겠어?”“우빈이는 지금도 아빠가 있어요. 나랑 형인 씨가 어떤 사이가 됐던 그 사람은 우빈이 아빠예요. 평생 변하지 않아요, 그건.”“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예진아. 난 우빈이가 아빠가 있는 건전한 가정에서 자라야 더 즐겁게 성장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뜻이야.”“제 생각에 우빈이는 지금 매우 즐거워요. 언제나 그랬어요. 예전에도 형인 씨는 매일 일하느라 바쁘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느라 바빠서 아이랑 놀아준 적이 별로 없어요. 지금도 그저 가끔 와서 보고 가는데, 예전이랑 다를 게 뭐에요? 우빈이는 아빠가 곁에 없는 것에 이미 습관 됐어요. 저랑 예정이가 아이한테 부족하지 않게 잘 챙겨주고 있어서 저희 우빈이는 걱정이나 고민 없이 충분히 즐겁게 잘 성장하고 있어요.”주서인은 할 말이 없었다. 우빈이를 핑계 삼는 건 통하지 않았다.주씨 집안 사람들은 줄곧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예진을 수도 없이 설득했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다.주형인도 속으로 후회하고 있지만 하예진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그가 마음을 바꿔먹고 그녀를 쫓아다녀도 받아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정말로 형인 씨 위하는 거면 친정집 일을 그만 간섭하세요. 부모님 앞에서도 올케 욕을 그만하시고 그만 이간질 하세요. 그래야 형인 씨도 잘 살 수 있어요. 그게 아니면 올케 백 명을 바꾼다 해도 다 똑같을 거예요.”“난 언니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동생이라곤 한 명뿐인데, 나중에 부모님이 연세 드셔서 돌아가시게 되면 친정에서 반겨줄 사람은 형인 씨와 형인 씨 와이프뿐이잖아요. 그렇게 자꾸 올케를 못살게 굴고 올케와 척을 지면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후에 동생 내외랑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세요? 다 큰 동생네 부부 사이 일에 그렇게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부모님까지 부추겨서 며느리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나 하는 거 삼가시라고요. 이미 동생을 한 번 이혼하게 했잖아요. 그래서 속이 후련
전호영의 전화를 받은 고현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핑계를 주었다.고현은 자신의 하이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자태를 감시하고 있는 진미리에게 말했다.“엄마, 호영 씨 전화예요.”“그래.”고현은 소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고 그녀의 걸음걸이 자태를 보던 진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왔다.남자의 분장에 익숙해진 고현이 치마로 갈아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진미리의 요구대로 잘 걸을 수 없었다. 재벌가 딸들의 우아한 자태로 걷는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현은 하이힐을 신고 삐뚤삐뚤 걸어 다녔다.어쨌든 진미리는 고현이 하이힐을 신고 걷는 모습이 매우 못마땅했다.고현은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진미리는 고현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걷는 연습을 시켰다. 비록 연회에 참석할 때 신을 하이힐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말이다.고현은 내심 불만이었다.하지만 진미리는 굽 높은 신발로 연습을 해야 연회 때 신어야 할 하이힐을 쉽게 신을 수 있다고 했다.“호영 씨.”고현은 부드럽게 전호영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처럼 전호영의 전화를 기다린 적이 없었고 또한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전호영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다.그녀는 성격이 차가운 편이라 전호영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가끔 고현이 전호영과 이야기할 때 약간의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건네기만 해도 전호영은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오후에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반나절을 쉬려고 우리 부모님 집으로 왔어요.”고현의 부드러움은 전호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만 사용됐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을 때는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갔다.전호영이 물었다.“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워커홀릭이라 결혼하기 전의 전태윤처럼 평일에 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말이 되어 집에서 쉰다 해도 사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고현은 가끔
임원들은 고빈의 주위에는 적어도 여성 지인들이 많아 그녀들과 만나면서 먹고 놀 수 있다지만, 고현은 그야말로 전호영에 의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아주 훌륭하고 관성의 제일 갑부인 전씨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뭐가 소용 있겠는가!동성연애는 국내 사람들이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고빈 씨에게 드리는 꽃이 아니거든요. 고현 씨는 회사에 없어요? 나가셨어요?”전호영이 물었다.고빈은 손이 전호영에 의해 뿌리쳐졌지만, 화도 내지 않고 일부러 전호영에게 말했다.“우리 형에게 매달리더니 너무 심하게 매달린 건 아닌가 봐요? 우리 형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우리 형이 오후에 회사에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모르셨어요?”전호영은 정말 몰랐다.그는 고현이 오늘 저녁에 그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밖에 몰랐다.오늘 밤 두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는 강성에 있는 한 재벌가의 저택에서 열리기 때문에 전호영은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왔다.그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왔다.전호영은 매일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선천적으로 잘생긴 외모로 옷을 대충 입어도 쉽게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다.“호영 씨 표정을 보니 우리 형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하하! 우리 형을 반년 넘게 귀찮게 하여 동성애자로 만들더니 결국 우리 형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이지는 못했네요.”고빈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전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시간이 없어서 잔소리 그만할게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고빈은 전호영을 뒤로 한 채 임원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프런트 데스크로 돌아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에게 물었다.“고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 정말로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어요?”“네, 오후에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전호영이 다시 물었다.“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안 하셨어요? 사업 때문에 나가신 거예요?”전
하예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살며시 노동명을 안아주었다.잠시 후 노동명은 그녀를 가볍게 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쉬어.”“잘 자요. 동명 씨도 내일 관성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두 사람은 서로 인사한 뒤 하예진은 노동명의 방을 나섰다. 노동명은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현관문 밖으로 나와 그녀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았다.밤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다음 날 노동명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진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하루 호텔을 떠났다.하예진은 공항까지 따라가지 않고 노동명을 차에 태우고 호텔 입구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공항까지 배웅하면 더 아쉬울 것 같았다.노동명이 타고 있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하예진은 그제야 경호원들과 함께 전호영이 안배해 준 차를 향해 걸어갔다.노동명이 관성으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계속 일을 해야 했다.바쁠 때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난다.날이 조금 전에 밝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저녁이 되었다.전호영은 고현이 오후에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그는 평소처럼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가서 고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그리고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고현은 사업이 무척 바빠서 전호영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매일 식사 시간이 바로 그와 고현이 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그의 차는 고씨 그룹에 들어가서 늘 주차하던 곳에 멈춰 섰고 전호영은 조수석에서 꽃다발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전호영은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고빈을 만났다. 고빈은 회사 임원 몇 명과 함께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전호영을 본 고현 일행은 멈추어 섰다.“회사엔 왜 왔어요?”고빈이 입을 열자마자 물었다.전호영은 그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제가 왜 당신 회사에 올 수 없어요?”전호영은 매일 고씨 그룹으로 왔다.그럼 전호영을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고빈이 감히 그를 쫓아낸
“응, 내일 돌아가려고. 예진이도 너무 바빠서 영향 줄까 봐 그래. 관성으로 돌아가서 우빈이도 돌봐야 예진이가 걱정하지 않지. 내가 강성으로 돌아가서 나와 우빈을 위해 강산을 다스려야 되거든. 하하!”노동명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하예진이 말했다.“나중에 빚이 쌓일까 봐 두렵네요.”노동명이 되물었다.“뭐가 두려워? 수십 조의 빚만 아니라면 다 갚아줄 수 있어. 넌 마음 놓고 가서 일해.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버텨줄 테니까. 파산될 걱정은 하지 마.”수십 조의 빚이라고?하예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현재 하예진의 상황으로 놓고 보면 수억 원의 빚만 져도 그녀는 너무 걱정되어 흰머리가 나올 것 같았다.전태윤은 또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우리 처형에게 너 같은 후원자가 있으니 반드시 강성에서 성공할 거야.”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전태윤의 음성메시지를 들려주며 말했다.“들어봐, 태윤이가 너를 엄청나게 믿고 있어.”“항상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제가 더 열심히 해야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네요.”“너도 혼자 견디지 말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다리를 다쳤지만 머리가 다친 건 아니거든. 나도 너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하예진은 노동명이 다리를 다쳤다는 둥 머리를 다쳤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동명 씨의 다리는 좋아질 거예요. 저는 그런 말 듣기 싫어요. 앞으로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동명 씨가 다리 나아지면 저랑 결혼도 하셔야죠.”노동명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런 말을 해 주니 내 다리도 분명 나아질 거야.”하예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너무 오래 얘기하지 마세요. 일찍 쉬어요. 저도 방에 가서 쉴게요. 내일 또 회사 일로 많이 뛰어다녀야 하거든요.”“응, 가. 잘 자.”노동명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달라고 암시했다.하예진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노동명의 칼자국이 있는 얼굴에 입을 맞추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
하예진이 물었다.“예정이에게 없고 저한테 있는 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동명 씨가 재활을 꾸준히 하시고 제가 관성에 없을 때 자신을 돌보고 시간이 나면 우빈을 돌봐 주세요. 우빈이도 동명 씨를 보러 자주 갈 거예요. 녀석이 지금 자기 아빠보다 동명 씨를 더 좋아하니까요.”노동명은 의기양양하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우빈에게 진심으로 대해서 그래. 우빈이 친아빠는 늘 우빈이 앞에서 내 험담만 하거든. 우빈이는 똑똑하니까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 잘 알고 있어. 우빈이 친아빠가 내 험담을 하면 할수록 자기 친아빠를 더 싫어할걸.”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바라보았다.주형인에 관한 얘기가 언급되자 하예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그때 하예진이 입을 열었다.“뭘 봐요? 내가 아직도 그 남자를 신경 쓰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단지 우빈이 아빠일 뿐이에요. 제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죠? 그 사람을 언급하면 제 기분이 가라앉을 줄 알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제가 어떻게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직도 사랑했다면 애초에 이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마음이 찢어진 이상 최대한 빨리 이혼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주형인도 약속한 대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더는 하예진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관성은 우빈 뿐이었다.그러나 주형인은 하예진과 노동명이 함께 있는 모습을 태연자약하게 지켜보지 못했다.그는 또 노동명이 친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나은 계부로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을 했다.우빈이 아직 노동명을 두려워할 때,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우빈은 노동명을 대신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오늘날 우빈과 노동명의 사이가 매우 좋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주형인 부자가 만날 때마다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이 폐인으로 되었기에 하예진과 함께 한다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거나 다름없다면서 노동명의 험담했다.또
모두 웃기 시작했다.전호영은 노동명과 하예진이 돌아오면 요리들이 올라오게끔 미리 준비해 놓았다.그들은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 후 고현은 곧 자리를 떠나 고성 호텔로 박 대표를 만나러 갔다.다행히도 하루 호텔과 고성 호텔은 가까웠다. 두 호텔은 길을 건너면 바로 볼 수 있다.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해 주겠다고 고집했다.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호텔을 나와 호텔 근처 거리를 거닐며 강성의 밤거리를 구경시켜 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노동명이 뒤에 있는 하예진에게 물었다.하예진은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 앞으로 저에게 닥칠 일들이 지금보다 더 가혹할 거에요. 만약 이번 일조차 직면할 수 없다면 제가 강성에 있을 필요도 없이 관성으로 돌아가 계속 저의 레스토랑을 돌보는 게 나을걸요.”그렇게 하면 이경혜의 바람과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다행이네. 이렇게 오래 돌아다녔는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선물로 사줄게.”하예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제가 사면 돼요. 선물할 필요 없어요.”“난 지금 네 남자 친구거든.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할 남자라고.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준 적 없는데. 사실 우리 집 객실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러 선물로 가득 차 있거든. 전부 내가 너에게 준비한 선물들이야. 어떤 것은 너에게 선물했지만 네가 받지 않은 물건들이고 어떤 것은 내가 너에게 미처 선물하지 못한 것도 들어있어. 네가 받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방에 넣어두었거든. 앞으로 우리가 한 가족으로 되면 그 물건들은 어차피 너의 것으로 될 테니까. 네가 가지지 않으면 우리 집안의 돈이 낭비되는 거나 다름없을 텐데. 너도 우리 가정의 돈이 낭비되는 게 싫지?”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과거에 그녀는 노동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재혼하고 싶지 않고 돈만 벌고, 사업을 일으켜 우빈을 잘 키워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을 1층으로 안내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에서 고현에게 뽀뽀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그는 고씨 그룹에서 고현에게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어쨌든 고현은 고씨 그룹의 대표님이니까.전호영이 차를 몰고 고현과 함께 고씨 그룹을 떠났고 고현의 운전기사와 경호원들도 두 사람 뒤를 따랐다.식사를 마치고 나면 고현은 또 박 대표와 약속이 있었다.전호영은 그들이 하루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과 노동명은 아직 호텔에 돌아오지 않았다.하예진 일행은 약 30분 뒤에야 호텔로 돌아왔다.하예진은 어두운 얼굴로 노동명을 호텔로 밀고 들어갔다. 노동명은 계속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못 듣는 체했다.노동명은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위로의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하예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고 노동명도 더는 위로하지 않았다.하예진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위층으로 올라가 전호영이 안배해 준 식사하는 룸에 도착해서야 하예진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동명이 형.”전호영은 하예진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급히 일어나 하예진을 도우려고 했다.“호영 씨, 동명 씨가 혼자 몇 걸음 걸을 수 있어요.”하예진은 전호영의 도움 없이 노동명의 휠체어를 식탁 앞에 세웠고 노동명은 스스로 일어나 두 걸음 걷다가 다시 탁자 앞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고현도 일어섰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과 인사를 했다.“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하예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괜찮아요.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언니, 일은 다 처리했어요?”모두 자리에 앉은 후 고현은 두 사람에게 각각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주며 관심 있게 하예진에게 물었다.“다 처리했어요.”하예진이 대답했다.“잘됐네요. 노 대표님, 내일 돌아가시려고요?”고현은 나지막이 물었다.노동명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예진이 보러 온 것뿐이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