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기에 마지못해 종일 우빈을 핑계 삼아 간신히 그녀 곁에 남아있다. 우빈이를 앞세우면 하예진도 어쩔 수 없으니까.“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그게 바로 자업자득인 거야. 저 좋다고 잘 만나보려는 은경이는 내버려 두고 굳이 예진 씨를 좋아해? 예진 씨는 너한테 마음도 없다는데 뻔뻔스럽게 계속 들이대는 거야? 신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예진 씨한테만 질척대면 다야?”윤미라는 아들이 하예진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게 전혀 안쓰럽지 않았다.하예진이 끝까지 버텨서 아들이 모진 괴로움 끝에 단념하기를 바랐다.“엄마, 난 손은경 씨한테 호감이 전혀 없어요. 예진이만 좋다고요.”“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예진이 어디가 은경이보다 나아?”윤미라가 시큰둥하게 아들에게 질문했다.‘이 죽일 놈의 녀석이, 제 어미를 울화통이 터져 죽일 작정이지.’“손은경 씨는 손은경 씨만의 장점이 있고 예진이도 예진이만의 장점이 있어요. 사람마다 장점이 다 달라요.”노동명은 손은경이 싫은 게 아니다. 그저 본인 스타일이 아닐 뿐이다.손은경은 여강자 스타일이다.만약 그녀와 함께한다면 행복할 것 같지 못하다.물론 하예진도 지금 사업을 꾸준히 잘해나가고 있고 그 언젠가 여강자가 되겠지만 이 모든 과정을 그가 지켜봐 왔고 심지어 옆에서 함께 성장해왔기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예진의 성격과 손은경은 완전히 다르다.노동명은 하예진 같은 여자가 좋다.이유 따윈 필요 없다. 하예진이 손은경보다 잘난 점이 뭐가 있는지 굳이 찾아낼 필요가 없다.“엄마가 꼭 이유를 들으시겠다고 하면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요. 처음엔 우빈이라는 아이가 귀여워서 아이의 아빠가 되고 싶었어요. 새아빠라도 상관없고요. 이 점만으로 은경 씨는 예진이한테 안 돼요.”윤미라는 아들의 말에 기가 차서 표정이 다 굳었다.“노동명, 이 자식이 감히. 너 지금 날 화나게 해서 죽이려는 작정이지?”손은경은 미혼의 처녀인데 어딜 감히 애 딸린 여자와 비교하는 거지?윤
하예진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윤미라는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예진은 스쿠터를 세우고 헬멧을 벗은 후 윤미라에게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사모님.”윤미라는 아들과 대판 싸우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지만 하예진의 앞에서는 여전히 교양있게 온화한 미소를 선보였다.“그래요, 우리 얼른 안으로 들어가요.”윤미라는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하예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윤미라가 먼저 걸음을 옮긴 후에야 뒤따라갔다.노진규는 함께 나오지 않았다. 아내가 잠자코 차에 있으라고, 절대 내리지 말라고 명령했으니 말이다.윤미라는 구석진 테이블에 착석했다. 이곳은 다른 손님들과 멀리 떨어진 자리라 한적하게 하예진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딴사람들이 엿들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하예진이 자리에 앉은 후 그녀는 종업원을 불러와 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야심한 밤이라 커피는 삼갔다.“예진 씨 뭐 마실래요?”윤미라가 물었다.“온수 한 잔이면 돼요.”다이어트를 위해 하예진은 이미 오랫동안 저녁 6시 이후에 음식섭취를 하지 않는다. 이젠 다이어트에 성공했지만 몸에 밴 습관이라 쉽게 고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요요가 오면 안 되니까.윤미라는 종업원에게 말했다.“온수 한 잔 주세요.”종업원이 떠난 후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 돈 아껴주시는 거예요? 음료수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고작 온수를 시켰네요.”“사모님, 그게 실은 애초에 다이어트하면서 저녁에 온수만 마셨어요. 그것도 아주 목마를 때만 마시고 다른 건 일절 입에도 안 댔어요. 살 빠지지 않을까 봐서요. 이제 힘겹게 살을 다 뺐으니 요요가 오지 않게 입단속 잘해야죠.”하예진은 무려 반년이란 시간을 공들여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실로 대단한 일이다.다이어트도 결국 견지가 답이다.윤미라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칭찬을 남발했다.“예진 씨 지금 가서 다이어트 광고 찍어도 되겠어요. 처음 볼 때랑 아예 딴 사람 같아요.”하예진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무려 100킬로
“편하게 말씀하세요, 사모님.”윤미라는 다이어트에 성공해 화려한 미모로 컴백한 하예진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예진 씨는 젊은 시절 경혜 씨랑 조금 닮은 것 같네요. 경혜 씨도 젊었을 땐 예쁜 여강자 스타일이었거든요. 얼마나 많은 어르신들이 경혜 씨를 욕심냈는지 몰라요. 다들 며느리로 삼고 싶었으니까요.”“그러다 결국 성씨 일가 어르신이 선공해서 경혜 씨도 지금 성씨 가문의 사모님으로 되신 거죠. 성씨 일가는 이젠 경혜 씨가 좌지우지하고 있잖아요.”성소현의 할머니도 애초에 성문철과 이경혜의 혼사를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분에겐 주도권이 없었고 남편과 아들이 전부 좋다고 하니 마지못해 동의했다.그 뒤로 고부사이가 줄곧 좋지 못했다.그러다가 성씨 그룹에 문제가 생겨 이경혜가 제 실력으로 그룹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야 시어머니도 그녀의 마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성소현도 엄마가 금방 시집왔을 때 할머니께 갖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했다.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이모랑 저희 엄마가 친자매이다 보니 서로 닮은 부분이 있는 것도 당연한 거죠. 저 또한 엄마 딸이라 이모랑도 조금 닮았을 겁니다.”그녀가 엄마를 언급하자 윤미라는 또다시 하예진의 사망한 부모가 떠오르고 고향에 있는 인간쓰레기 같은 친척들이 떠올랐다.“예진 씨 지금은 동명이한테 호감이 있나요?”윤미라가 불쑥 물었다.하예진은 윤미라가 오늘 그녀를 보자고 한 용의를 진작 알아챘다.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사모님, 저는 늘 동명 씨를 가게 건물주로, 친구로 생각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동명 씨가 싫지는 않지만 그건 절대 사랑은 아닙니다.”윤미라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재벌가에서 지낸 수십 년 동안 윤미라는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 하예진이 지금 한 말은 전부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며 잡티 하나 없었다.만약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감히 이토록 따가운 윤미라의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하예진은 아마 그 정도로
손은경이 노동명을 포기한 이유는 그가 하예진을 좋아하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그녀는 거의 몸부림치지도 않은 채 바로 노동명을 단념했다.노동명의 독특한 취향을 그녀는 만족해줄 수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상책이었다. 괜히 질질 끌었다가 미움만 사면 앞으로 두 사람의 비즈니스 협력에도 영향을 주니까.“사모님, 저도 대신 동명 씨를 많이 설득해보았어요. 은경 씨가 참 좋은 분이라고, 두 분 너무 잘 어울린다고 했거든요.”하예진이 설득한 건 맞지만 효과가 없었을 뿐이다.윤미라의 말로는 노동명이 독립적이고 고집이 세서 본인이 정한 일은 스스로 포기하거나 마음이 바뀌기 전까지 아무도 개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예진 씨, 이건 예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문제는 예진 씨가 아니라 동명이한테 있어요.”만약 하예진이 노동명에게 집착했다면 윤미라는 일찌감치 강압적으로 나오며 하예진을 내쫓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하지만 하예진은 노동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니 윤미라도 딱히 그녀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다만 예진 씨, 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나요?”“무슨 부탁인데요? 말씀하세요.”윤미라는 이미 여기까지 말한 이상 더는 에돌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지금 있는 가게를 빼고 그 거리를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장사하는 건 어때요? 노씨 그룹을 멀리 떠나면 더 좋고요. 가게 이사로 인해 발생한 모든 손해배상은 제가 책임질게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예진 씨 새 가게는 어디로 정하든 다 돼요. 노씨 그룹만 멀리 떨어지면 돼요. 가게 인테리어 비용도 제가 다 책임질게요. 예진 씨는 일전 한 푼 쓸 필요 없어요.”노동명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금방 알았을 때 하예진도 가게를 빼고 멀리 이사 갈 생각을 했지만 결국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노동명이 그녀에게 구애하는 이상 제아무리 가게를 빼고 딴 곳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결국 끈질기게 따라올 사람이니까. 만약 안 그런다면 하예진은 하룻밤 사이에 짐을 챙
이게 과연 피한다고 될 일일까?근본을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겉치레도 변할 건 없을 듯싶다.“사모님께서 동명 씨를 설득하시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모님께서 좀 더 분발하셔서 동명 씨를 설득해보세요.”“...”하예진의 말을 들은 윤미라는 얼굴이 화끈거렸다.하예진더러 노동명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더니 그녀는 되레 윤미라가 제 아들을 설득하여 더는 본인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본인은 그저 잠잠하게 살아가고 싶으니까.한참 후 윤미라가 애원에 가까운 어조로 하예진에게 말했다.“예진 씨, 제가 조금이라도 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동명이 그 불효자식이 고집불통이라 제 말은 귀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진 씨를 찾아온 거예요.”“절대 예진 씨를 깔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결혼은 서로 조건이 대등해야 해요. 예진 씨도 현명한 사람이니 이 점은 잘 알고 있겠죠. 아무리 지금 예진 씨가 안일한 삶을 살고 싶고, 재혼을 고려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설사 재혼을 고려한다고 해도 동명이랑은 행복할 수 없을 거예요.”“두 사람은 계급이 다르고 함께 어울리는 환경이 달라서 연애할 때에는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그 열정이 다 식으면 갈등이 서서히 생겨날 거예요. 게다가 저는 예진 씨를 며느리로 들일 수가 없어요. 예진 씨가 정말 동명이랑 함께하겠다고 하면 그땐 제가 시어머니로서 예진 씨한테 무슨 짓을 벌일지 감히 장담할 수가 없네요.”윤미라가 말을 마친 후 하예진이 대답했다.“알고 있어요.”“그럼 이 아들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가여운 어미를 봐서라도 관성을 떠나줄 순 없나요? 보상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부르는 대로 다 만족해줄 수 있어요. 동생네랑 그리고 이모네랑 연락을 유지해도 돼요. 그분들이 예진 씨 행방을 비밀로만 해주면 돼요. 동명이가 절대 찾지 못하게요.”윤미라는 하예진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예진 씨, 가여운 저를 위해서라도 한 번만 봐주세요. 여길 떠나만 주신다면 다른
“또 다른 용건 있으세요?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빈이가 키즈 카페에 있어서 애 데리고 집에 가야 해서요.”하예진은 심기가 약간 불편했다.노동명을 넘본 적도 없는데 윤미라에게 이런 요구를 당해야 하니 누군들 심기가 편할까?그녀는 고작 노동명의 상가를 임대했을 뿐이고 노동명과 제부가 절친한 사이이며 평소에 노동명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좀 더 열정적으로 대했을 뿐인데, 절대 그를 넘볼 생각 따위 없었는데 윤미라에게 이런 식으로 협박을 당할 줄이야.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녀가 왜 관성을 떠나야 하는 걸까?“가봐요. 스쿠터 조심해서 몰아요. 길에 차가 많을 거예요.”윤미라는 애써 다정하게 말했다.하예진은 스쿠터 열쇠를 챙기고 윤미라에게 인사를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나간 후 노진규가 곧장 들어와 구석에 앉은 아내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어떻게 됐어? 왜 이렇게 빨리 끝난 거야?”노진규는 하예진이 나오는 모습을 보았는데 차분한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두 여자가 얘기가 잘 된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얘기도 끝났어요. 내 소원대로 되진 못했어요. 예진이도 당신 아들이랑 똑같아. 절대 머리 숙이지 않네요. 본인 문제가 아니래요...”윤미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확실히 예진의 문제가 아니죠.”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 방금 하예진과 나눴던 대화를 전부 남편에게 알렸다.그리고 말미에 이 한마디를 보탰다.“예진이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우리 집안에 시집오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여보, 예진이 너무 교활한 것 같지 않아요?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집안에 발을 들이지 않겠대요. 그건 동명이랑 내 사이를 이간질하는 거잖아요? 우리 모자 사이의 감정만 상한다고요.”“당신은 원래 반대했잖아. 당신이랑 동명이는 원래 사이가 틀어졌어. 예진의 잘못 아니야.”윤미라는 말문이 막혔다.하긴, 그녀는 아들과 하예진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하예진이 그런 맹세를 한 이후로
윤미라가 말했다.“대체 무슨 안목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들이 얼마나 우수한데. 왜 마다해? 대체 얼마나 더 훌륭한 집안에 시집가려고?”“이혼한 여자는 반드시 재혼해야 해? 내가 볼 때 예진이는 이미 마음이 철저히 식었어. 그리 쉽게 새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동명이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구애하는 데 몇 년은 걸릴 거야. 몇 년이라도 예진의 마음이 열려야 말이지. 그때 되면 당신은 두 사람 반대하는 게 아니라 얼른 동명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예진이한테 애원할지도 몰라.”윤미라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난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차라리 지구 종말이 더 빠르겠어요.”노진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무슨 말이나 섣불리 내뱉지 말아야 할 거야. 나중에 대가를 치를 거거든. 그때 가서 예진이한테 제발 우리 아들 받아달라고 애원하지나 마. 지구 종말이나 기다려.’...노동명은 키즈 카페에서 우빈이를 지키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었다.엄마와 예진이에게 찾아가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예진이가 이 때문에 그를 더 거부하는 건 아닌지 너무 알고 싶었다.하지만 갈 수가 없다.우빈을 지켜야 하니까.하예진이 우빈을 그에게 맡겼으니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녀의 부탁을 저버리는 거나 다름없다.노동명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키즈 카페 입구를 서성이며 하예진이 돌아오는지 두리번거렸다.“아저씨, 아저씨.”우빈이가 놀다 지쳐 집에 가려고 했다.나오고 싶은데 키즈 카페 직원이 아이 홀로 내보내지 않았다.“꼬마야, 엄마, 아빠 있는지 한번 봐봐. 없으면 안에서 좀 더 놀래? 이따가 부모님 오시거든 다시 나오자.”우빈은 엄마는 안 보이고 입구에 서 있는 노동명을 발견한 채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노동명은 아이가 뒷전이고 머릿속에 온통 하예진이라 우빈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못했다. 키즈 카페 주변이 또 워낙 시끌벅적하다 보니 아이의 목소리가 더욱 안 들렸다.이때 직원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노동명은 그제야 고개 돌
“너희 엄마 볼일 보러 가셨어. 금방 돌아올 거야.”노동명은 거짓말을 둘러댔다.“우리 밖에서 너희 엄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우빈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노동명은 아이를 안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재차 물었다.“우빈아, 간식 뭐 먹고 싶어? 아저씨가 사줄게.”“고마워요 아저씨. 우리 이모 집에 맛있는 간식이 너무 많아서 더는 살 필요 없어요.”우빈은 지금 대부분 이모네 집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강일구 아저씨가 학원까지 바래다준다. 수업이 없는 날에만 엄마와 함께 지낸다.이모네 부부는 그를 살뜰히 보살피며 수많은 간식거리를 사준다.“이모네 집에 것은 이모네 집에 것이고 아저씨가 사주는 건 아저씨 마음이야. 우빈이 아저씨한테 표현할 기회를 줘야지.”아이는 노동명을 쳐다보며 그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더 해명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우빈이는 아저씨를 아빠로 생각해본 적 있어?”“저는 아빠가 있어요.”노동명은 말문이 막혔다.“알아, 아저씨도. 누구나 다 아빠는 있지만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빠가 두 명이야. 우빈이도 아빠가 둘이면 안 될까? 아저씨가 우빈의 아빠 하면 안 될까?”우빈은 고개를 내저었다.“아저씨는 아저씨고 아빠는 아빠예요. 어떻게 아저씨가 아빠를 해요?”아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저는 아빠 한 명이면 돼요. 둘은 싫어요. 엄마가 늘 말씀하셨거든요.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안 돼요. 다른 사람 몫도 남겨줘야 해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딴사람 아빠 해요.”“...”어린 녀석이 총명한 건 알겠는데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 도통 설명할 수가 없었다.“우빈아,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아저씨가 너희 엄마를 무척 좋아해. 너희 엄마랑 결혼해서 새 가정을 이루고 싶어. 그럼 우린 한 가족 세 식구가 되는 거야. 우빈이도 그땐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그렇지만 저는 아빠가 있잖아요. 아저씨 우리 엄마랑 결혼하고 싶어요?”노동명이 웃으며 답했다.“맞아. 아저씨가 너희 엄마랑 함께하는 걸 허락해줄
“이씨 가문을 잘 꾸려나가려면 젊은 세대에게 의존해야죠. 우리 가문의 젊은 세대들도 능력만 있으면 모두 중히 여겨야 하는 거죠. 숙모님들, 맞죠?”이씨 가문의 셋째 삼촌 이지후는 야망이 있지만 이제 분투할 정력이 없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다만 그들의 후손의 앞날일 뿐이다.하예진이 방금 한 말은 승낙한 거나 다름없다.하예진이 방금 한 말은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가 하예진 쪽으로 돌아간다면, 가문의 젊은 세대들은 능력만 있다면 모두 적당한 자리에서 빛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의미이다.하예진은 자신이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두 사모님이 눈을 마주치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씨 가문의 넷째 숙모 김연희가 입을 열었다.“맞아요. 역시 전임 가주의 후손답네요. 전임 가주가 이씨 가문을 다스릴 때 우리 이씨 가문은 강성에서 그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존재였죠.”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이씨 가문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전임 가주 이은숙이 여전히 이씨 가문을 운영했을 때 김연희와 최순자는 아직 이씨 가문으로 시집오지 않았다. 당시 그녀들의 나이는 6세에서 12세 사이였고 가문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러나 그녀들의 남편들은 어느 정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적어도 학창시절에 이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괴롭히지 못했다.그 후, 가문의 어르신들 이야기를 통해 자주 듣게 되었다.전임 가주 이은숙의 인간 됨됨이나 일 처리 방면에서는 매우 훌륭했지만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 낳은 탓으로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하루가 멀다고 병으로 앓게 되어 이은화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그리고 두 숙모분께서도 안전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씨 가문에서 떠벌리며 다니지 않는 한 강성에서의 안전은 제가 보장해 드릴 수 있어요.”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무슨 일을 하든 너무 날뛰지 않고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으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그들이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한다면 하예진이 보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감히 협력하지
몇 분 후, 방에서 하예진을 기다리고 있던 전호영은 예진이 도착하자 바로 나와서 문을 열었다.“예진 누나.”“고마워요, 호영 씨.”“우리 사이에 무슨, 천천히 얘기 나눠요, 저는 일 보러 나가볼게요.”방을 나온 전호영은 하예진을 방으로 들여보내고는 일구를 포함한 경호원들에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단단히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펜트하우스가 출입이 통제되긴 하나 경각심을 높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일구와 다른 경호원들은 전호영의 말에 깍듯이 응했고 전호영은 자리를 떴다.하예진이 방으로 들어가자 두 숙모님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들을 위한 과자와 과일들이 놓여 있었고 따뜻한 물도 준비해져 있었다.“예진 씨.”하예진이 들어오자 두 숙모는 소파에서 일어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인사했다. 하예진 라인에 서기로 했으니 두 사람은 이제 본모습을 보일 때가 된 것이다.두 분은 나이가 있는 분들이셨지만 보양을 잘한 덕분에 겉보기에는 훨씬 젊어 보였다.“두 분 앉아계세요.”하예진은 차를 내와 찻잔에 부으면서 말했다. “차를 마시면 정신도 맑아지고 좋더라고요.”“우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차를 별로 안 마셔요. 차를 마시면 저녁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셋째 숙모가 웃으면서 답했다.하예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간식을 권했지만 두 분은 사양했다.“두 분께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하예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분과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니 다룰 얘깃거리도 별로 없었다.“예진 씨가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라고 우리 그이가 그러더군요. 우리 두 집안이 기꺼이 힘을 합쳐 도와드리겠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셋째 숙모가 입을 열자 넷째 숙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속으로는 하예진 앞에서 이 가주에 대해 불평하고 싶었지만 집을 나설 때 남편이 그러지 말라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했기에 꾹 참고 있었다. 그저 두 집안의 의사를 전달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고 얘기했다.하예진은 관성의 대표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하루 호텔은 안전 레벨이 아주 높은 곳으로 그곳에 가면 숙모님들이 마음을 좀 더 내려 놓을 수가 있었다.이에 하예진도 동의를 표하였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방을 예약 해놓을게요.”그녀는 뒤돌아서서 휴대폰을 꺼내어 전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루 호텔에서 제일 안전한 방이 어느 방이에요? 누가 엿듣거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으로 빌리려고요.”전호영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그야 무조건 펜트하우스에 있는 스위트룸이죠. 지금 제가 묵고 있어요, 누나가 필요하다면 제가 빌려드릴게요.”“고마워요, 이씨네 숙모님 두 분이 먼저 가실 거예요,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서 조용히 두 분을 방까지 모셔드리도록 해줘요. 카메라에 찍히지 않게 주의해 주시고요.”전호영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안배할게요. 두 분 호텔로 이동하시게 하세요, 거의 도착할 때 저희 쪽에 연락 주시면 돼요.”그러고는 하예진에게 번호 하나를 알려주었다.“누나, 조금 있다가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돼요, 펜트하우스까지 에스코트해 줄 거예요. 저도 조금 있다가 바로 돌아갈게요.”현재 그 방은 전호영이 지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방문을 열 수가 없었기에 호영이 호텔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부탁드릴게요.”“별말씀을요.”하예진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하던 일 계속 해요, 제가 두 분께 말해놓을게요. 여기서 호텔까지 가려면 약 20분 정도 걸릴거에요. 저는 30분 뒤쯤에 도착할 것 같아요.”“알겠어요.”통화를 마친 예진은 두 숙모한테 다가가 말했다.“제가 이미 말해놓았으니 두 분께서 지금 그쪽으로 출발하시면 되세요. 거의 도착할 즈음 이 번호에 전화하시면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그분들이 두 분을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실 거예요.”하예진은 전호영이 알려주었던 번호를 셋째 숙모한테 말해주었다.“먼저 가 계시면 돼요. 저는 십 분 뒤에 바로 출발할게요.”“그래요.”두 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지체없이 바로 출발했다.
“그 분들이랑은 어떻게 되는 사이신지?”하예진이 물었다.두 사람은 자신들의 남편 정체를 말한 후 하예진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녀가 침묵하자 두 사람은 하예진이 자신의 남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서둘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넷째 숙모고 이분이 셋째에요.”하예진은 그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실 때 뒤따르는 사람이 없었나요?”“없어요, 뒤처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예진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예진은 미소를 지었다. “저야 아무 걱정이 없지만 두 분께서 저를 찾아온 일이 이 가주님의 귀에 들어가 두 분께서 불리해질까 봐 걱정이에요.”하예진은 원래부터 이씨 집안을 노리고 있었으니 이씨 가족 사람들과 접촉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오히려 아무 접촉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씨 집안 사람들이 그녀를 먼저 찾아왔다면 이 가주가 그 사실을 알고 응징할 수도 있기에 그 후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보였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예진 씨, 잠깐 따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좋아요, 저는 아무 때나 괜찮아요. 어디서 얘기할까요? 장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곧 갈게요. 함께 이동하면 눈에 뜨일 수 있으니까 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진의 말에 그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담겨 있어 두 사람은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의 남편들은 집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지냈다. 이 가주는 그들을 비롯한 직계가 아닌 가족들에게 아주 인색하고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오히려 이 가주의 억압을 받아 두각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두 가족은 몰래 모여 이틀 동안이나 상의를 했고 결국에는 하예진 라인에 서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하예진이 이길 것이라고 배팅을 한 것이다. 만약 하예진이 이긴다면 그들이 하예진을 처음부터 지지해 온 사람들로서 앞으로의 발전이 나쁘
하예진은 경계심에 차 물었다.“날 스토킹하기라도 하는 건가?”그녀는 단지 공장을 보러 왔을 뿐 오래 머물지 않을 텐데 이씨 집안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니, 그녀가 이씨 집안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곳 강성에 온 목적은 하나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이씨 집안을 장악하는 것이다.이는 큰 이모가 그녀에게 맡긴 중대한 임무였다.곧 하예진은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이씨 집안에서 아무런 경계가 없다면 더 이상한 것이었다.“내가 나가 볼게.”그녀는 아마도 이씨 집안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의 부인이겠거니 생각했다.그날,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남녀 반반이었고 예진은 일구랑 함께 참석했었기에 만찬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일구는 얼굴이 익을 것이었다.예진은 경호원과 함께 나갔다.공장 입구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차에 앉은 사람들은 내리지 않았다. 하예진이 나오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마도 남들이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하예진은 그녀들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강성 시민 중에는 그녀들을 알아볼 사람이 많았다.하예진이 다가가자 한 분이 눈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건네왔다.“예진 씨,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예진은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구신지? 얘기를 나누려면 누구신지 알아야죠”그들은 예진이랑 같이 따라 나온 사람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성분이 말을 건넸다.“혹시 이씨네 셋째 큰아버지랑 넷째 큰아버지를 기억하시나요?”그 두 사람은 이 가주랑 동년배지만 직계가 아니고 데릴사위도 아니기에 자신들의 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엄격히 말하면 셋째 큰아버지는 이 가주의 집안 동생이고 이 가주는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데릴사위를 들이기 때문에 그녀의 자식들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보, 나도 이십몇 년 간의 남매 정을 생각해서 도와준 거야. 갈 데도 없고 돈도 없는데 불쌍하잖아. 당신이 싫다면 내가 내보낼게.”정일범은 아내 조윤이 엄마한테 이를까 봐 겁이 났다.외도 사실이 들통난 후 윤정이가 오빠들을 도와줬기에 조윤은 윤정이를 무척이나 미워했다.윤정의 처지가 딱하게 된 지금, 조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더욱 심하게 굴 것이 뻔했다.하지만 조윤 탓을 할 수가 없었다. 반병 남짓 남았던 술을 아버지에게 갖다준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조윤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당장 내보내요. 이후에도 연락하지 말고요, 그 애는 당신들의 동생이 아니잖아요. 당신들의 동생은 윤미라고요. 그 애 친아빠 때문에 당신들이랑 윤미가 이십 년이나 떨어져 살았는데 당연히 그 사람들을 싫어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윤미가 그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 사람들이 윤미한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봐요. 일범씨, 당신도 딸을 가진 아빠잖아요. 우리 딸이 다른 집에 바뀌어 가서 학대를 당했다고 생각해 봐요, 어떨 거 같아요?”정일범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그는 곧 하인 부부에게 지시했다. “가서 윤정의 짐을 모두 정리해서 줘.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해, 다시는 여기에 나타나지 말고.”윤미의 둘째 형수랑 셋째 형수도 자기 남편에게 눈치를 주었다.두 남자는 와이프한테 찰싹 붙어 실실 웃어대며 낮은 목소리로 다시는 윤정이를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사과했다.윤정이는 절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이제 진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오빠들도 도와주지 않고 일전한 푼도 없는 상황에 어떡하지?이제 진짜로 친엄마한테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형편이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고 시골과 도시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어릴 적부터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그녀가 시골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클럽에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기
이윤정은 조윤을 노려보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조윤은 이윤정에게 더는 해명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이윤정에게 알려준 다음 두 동서에게 걱정스레 말했다.“가요. 우리 들어가요. 밖이 추워 죽겠어요.”조윤은 몸을 돌려 뒤따라 나오는 김숙자에게 지시했다.“앞으로 제 동의 없이 이 천한 X을 우리 별장 안에 들여보내지 마세요. 일범 씨가 다시 감히 윤정이를 여기로 끌어들인다면 우리 어머님의 노여움을 감당할 수 있는지 한 번 물어 보세요.”이윤정은 넋을 잃고 주저앉아버렸다.얼마 후 정일범 형제가 도착했다.그들은 땅바닥에 앉아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 이윤정을 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손가락 자국들로 가득했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리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진 채로 옷도 너무 얇게 입어 입술이 퍼렇게 변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정일범은 무척 가슴 아팠다.“윤정아.“세 형제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구경꾼들은 조윤이 자리를 뜨자마자 흩어졌다.물론 이윤정에 대한 소문은 곧 강성에서 널리 퍼졌다.정일범은 양복 외투를 벗어 이윤정의 몸에 걸쳐주었고 그의 두 동생은 이윤정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오빠.”이윤정은 정신을 차리더니 정일범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형수님, 형수님들이 나를 이렇게 때렸어.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내가 오빠들이 바람피울 때 오빠 편을 들었다고 지금 내가 초라해진 틈을 타서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분명 이윤미일 거야. 이윤미와 형수님들이 연합해서 나를 상대하는 거라고. 오빠, 나와 아빠는 단지 오빠가 준 술 반병을 마신 것뿐인데 그렇게... 오빠가 나와 아빠를 함정에 빠뜨릴 리가 없잖아. 그럼 분명 형수님이 우리 술에 약을 탔을 거야.”정일범은 다급하게 이윤정의 말을 끊었다.“윤정아. 이런 일은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마. 엄마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거든.”정일범도 조윤이 이윤정을 함정에 빠뜨린 사실을 알고 있다.지금 이윤정은 이
“넌 내 남편의 친동생이 아니야. 혈연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내 남편이 널 여기로 데려와 살면서도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어. 첩을 이 별장에 몰래 감춘 게 아니면 뭔데! 이 별장은 우리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사주신 신혼 별장이고 부동산 소유증 위에도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나도 알 권리가 있어. 둘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내 남편이 몰래 여기로 널 데려온 것으로 보면 너희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야?”조윤은 이윤정이 이씨 가문에서 쫓겨난 이유를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윤정에게 죄를 덮어씌웠다.이윤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억울하다고 누군가의 음모에 말려든 것이라고 울부짖을 뿐 감히 다른 말은 내뱉지 못했다.이런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이 조윤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했고 이윤정을 보는 눈빛에는 혐오와 비난이 물들게만 했다.어떤 사람들은 이씨 가문의 예전 집사였던 이윤정의 친아버지가 나쁜 심보로 딸을 바꾸는 바람에 진정한 이씨 가문의 후계자인 이윤미가 고생하고 구박받으면서 자랐다고 여겼다. 하여 그 집사의 근본적인 인성부터 나쁘다고 비난했고 따라서 이윤정도 그 집사의 핏줄을 이어받아 아무리 이씨 가문에서 자랐다고 해도 환경과 상관없이 그 유전자가 나쁘다고 수군댔다.뿌리에서부터 상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이윤정은 악랄한 표정으로 과거 그녀의 비위를 맞추던 조윤 일행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이제 만족해? 당신들은 날 무너뜨리고 싶어서 날 당신들의 계략에 빠지게 한 거지? 당신들이 진범이지?”사건이 일어난 뒤로 이윤정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약을 타서 자신을 모함한 사람이 바로 조윤 일행이라고 추측했다.정군호의 술은 정일범이 준 술이고 가져왔을 때 이미 반병밖에 남지 않았다.그럼 정일범이 아니라면 분명 조윤일 것이다.조윤은 차가운 웃음을 날렸다.“윤정아,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울어도 소리쳐도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 엄청 화나지? 얼마 전에 우리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 안
예전에는 우아하고 오만하던 이씨 가문의 후계자였던 이윤정은 지금은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강아지처럼 어디로 가나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욕만 먹었다.“윤정이는요?“조윤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뒤 정원에서 그네에 앉아 계세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저대로 한참을 앉아 계세요.”김숙자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조윤 일행은 기세등등하게 뒤 정원으로 걸어갔다.김숙자는 정일범에게 알릴지 말지 고민하다가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알렸다. 그녀의 남편도 정일범에게 알릴지 말지 고민했다.결국, 두 사람은 정일범에게 전화를 걸었다.“큰 도련님, 큰사모님께서 둘째 사모님과 셋째 사모님과 함께 여기로 와서 다짜고짜 둘째 아가씨가 여기에 머물고 계시는지 물어보셨어요. 지금은 뒤 정원으로 둘째 아가씨 찾으러 가셨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큰 도련님, 얼른 돌아오세요.”정일범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어떻게 아셨대요?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조윤은 지금 이윤정을 무척 원망하고 있어서 과거의 감정이 사라진 지 오래다. 만약 정일범이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이윤정은 아마 조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김여희와 박수아도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정일범은 두 남동생도 불러 함께 별장에 갔다.김숙자 부부는 정일범과의 통화를 마친 뒤로 밖으로 나갔는데 이윤정의 울부짖음과 욕설 소리를 들었다. 물론 욕설 퍼붓는 사람들은 조윤 일행이었다.김숙자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서둘러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대로 달려갔다.조윤 일행과 이윤정의 소리가 너무 컸는지 이웃들은 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걷다 보니 결국 정일범 별장 입구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역시 남의 가십거리를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인가 보다.이윤정이 아무리 오만하고 조윤 일행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고 해도 그녀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이윤정은 조윤에게 머리채까지 잡혀 비참하게 뒤 정원으로부터 앞 정원까지 끌려갔다.아파 죽을 지경이다!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