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명은 할 말을 잃었다.“...”‘녀석 참,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우빈아.”하예진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이리로 다가왔다.노동명은 여전히 마음이 안 놓인 듯 다시 한번 아이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만 아이는 그의 당부를 듣는 척도 않고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내려오더니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갔다.“엄마.”하예진은 아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우빈이 다 놀았어?”“네, 이젠 집에 갈래요.”“그래, 그럼 집에 가자.”노동명이 다가오자 하예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동명 씨, 우빈이 돌봐줘서 고마워요.”“괜찮아, 우빈이 돌보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노동명은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빈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야.”하예진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동명 씨, 아이가 집에 가겠다네요. 우린 먼저 가볼게요.”노동명이 재빨리 대답했다.“내가 데려다줄게.”“아니에요.”하예진은 우빈을 안으며 노동명에게 인사하라고 했다.“예진아.”노동명은 엄마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하예진은 고개 돌려 가볍게 웃을 뿐 아이를 안고 떠나가려 했다.이에 노동명이 두 모자를 따라왔다.“엄마, 저 뭐 하나만 물을게요.”우빈이 입을 열자 노동명은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갈 심정이었다. 이 녀석이, 몇 번을 말했는데 왜 한사코 안 듣는 걸까?굳이 제 엄마랑 말하려나 보다.“그래.”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이에게 뭐라 말한 지 전혀 모른 채 아이의 물음에 호기심을 느꼈다.“엄마, 아저씨가 우리 가족에 합류하고 싶대요. 저한테 동의하냐고 묻는데 저는 아직 어린애라 결정권이 없잖아요. 그래서 엄마한테 물으라고 했어요. 엄마만 허락하면 저도 동의한다고요.”말을 마친 아이는 노동명을 향해 외쳤다.“아저씨, 빨리 와요. 제가 지금 대신 엄마한테 묻잖아요.”“...”쥐구멍은 어디에?대체 어디 있냐고, 당장이라도 파고 들어가야 할 텐데.아니면 하늘에서 천둥이 쳐서 두 동
우빈의 말로 노동명과 하예진 모두 난감할 따름이었다.그녀가 바라보자 노동명은 활짝 미소 지었다.하예진은 어이가 없어 침묵하며 아들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엄마.”우빈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엄마 동의 안 하는 거예요?”“우빈아.”하예진이 다정하게 말했다.“우빈이는 아빠가 있어. 동명 아저씨는 아저씨야, 우빈이한테 영원히 아저씨일 거야.”“예진아.”노동명이 불렀다.“동명 씨, 우빈이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요. 애한테 이런 말 삼가세요. 제 인생은 우빈이가 대신 결정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하예진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이에 노동명이 미안함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예진아, 내가 잘못했어. 아이한테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하지만 너한테만은 진심이야. 우빈이도 너무 사랑스럽고. 이 아이를 꼭 친자식처럼 대할 거야.”“동명 씨, 제가 분명 말했죠. 새로운 감정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고요.”하예진은 그의 앞에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동명 씨가 이해해주시고 그 마음을 접으셨으면 좋겠어요. 우린 안 어울려요.”윤미라의 말처럼 아무리 엄마가 아들의 고집을 못 꺾어 결혼을 승낙한다고 해도 며느리가 싫은 건 변치 않는다. 나중에 시집가게 되면 고부갈등이 계속 존재할 것이다.하예진은 자신의 출신을 개변할 수가 없다.게다가 그녀는 진짜 재혼 생각이 없다.전씨 할머니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결혼은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준 게 아니라 상처와 고통만 안겨주고 헌신과 희생 뒤엔 배신이라는 큰 ‘선물’만 남겨졌다.첫 결혼에서 큰코다치고 이제 겨우 벗어났는데 또다시 뛰어들 리가 있을까?지금의 그녀는 남자 없이도 충분히 잘살고 있다.“왜 안 어울려? 엄마가 대체 뭐라고 했는데? 너더러 멀리 떠나라고 다그쳤지?”“아무 말씀도 안 했어요. 제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예요. 동명 씨가 제게 잘해주는 건 매우 감격스럽게 여기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동명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동명 씨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요
우빈은 매우 고집스럽다.애초에 주형인이 아이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을 할 때도 아이는 동명 아저씨가 아주 무섭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니 아빠가 어떻게 말하든 아저씨에 대한 인상이 바뀌지 않았다.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인 거고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을 좋게 말할 수 없고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엄마 기분 안 나빠. 방금 뭐 좀 생각한 거야.”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봐, 엄마 지금 웃고 있잖아.”아이는 똑똑하면서도 예민했다.엄마가 웃으니 방금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화난 게 아니라고 믿었다.“엄마, 동명 아저씨가 엄마랑 결혼하고 싶다는데 진짜예요?”아이는 마음이 놓이자 선뜻 이런 질문을 해댔다.“...”하예진은 어이가 없었다.노동명도 참, 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지. 우빈이가 고작 몇 살인데 이런 말을 알아들을 리가 있을까?아무리 아이가 노동명을 아빠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이의 결정이 그녀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그건 아저씨가 우빈이한테 장난친 거야. 마음에 새겨두지 마.”아이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저씨가 장난친 거구나.”“가자. 엄마가 이모네 집으로 바래다줄게.”하예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아들의 작은 손을 잡고 하예정의 집으로 향했다.“네.”우빈은 이젠 매일 이모네 댁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에 적응됐다.전태윤의 피크 별장으로 가야 하니 그녀는 스쿠터를 타지 않았다. 배터리가 부족해 가는 도중에 멈춰서면 골치 아프니까.그녀는 아예 새 차를 타고 아들을 피크 별장으로 실어갔다.하예정은 이제 막 심효진과 통화를 마쳤다.심효진은 당연히 투자를 확대하고 땅을 사서 회사를 건축하는 일을 찬성했다.“예정아, 난 너랑 소현 언니 완전히 믿으니까 두 사람이 알아서 결정하고 나한테 얘기만 해주면 돼. 난 전부 찬성이야.”하예정과 그녀는 십여 년의 우정을 쌓아와 지피지기와 같은 존재이다.성소현은 성씨 일가의 따님이고 성품도 좋은 데다가 하예정의 사촌 언니이니 그녀가 파트너인
나오자마자 우빈이가 하예정의 볼에 뽀뽀하는 걸 보더니 아니 글쎄 세 살짜리 애와 질투하고 있었다.전태윤은 아이를 안고 먼저 방에 돌아가며 얘기했다.“이모부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아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이어서 이모부의 장편 연설이 시작됐다.아이는 마냥 한심할 따름이었다.이모부가 한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고 유일하게 캐치한 한 가지는 바로 우빈이도 남자기에 이모에게 자꾸 뽀뽀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다만 이모인데 대체 왜?이모는 우빈에게 뽀뽀할 수 있는데 왜?결국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가 참 복잡하다는 결론밖에 못 지었다.전태윤이 아이에게 한 말은 하예정을 어이없게 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우빈이 데리고 올라가서 씻어요.”“그래.”전태윤은 아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오늘 밤엔 이모부가 씻겨줄 거야.”“우빈이 장난감 가지고 가서 씻을 거예요.”“물총 챙겨.”“네.”어른과 아이가 사이좋게 조건을 상의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이때 하예진이 동생에게 말했다.“제부 저러면 우빈이 버릇 나빠져.”“아니야. 많이 예뻐해도 원칙은 있어. 그냥 예뻐해 주는 건 아니야. 언니가 애 교육을 잘 시켜서 응석받이로 크지 않았어.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알아.”우빈은 지금 만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성씨 일가와 전씨 일가 모두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살핀다.“너한테 할 얘기 있어.”하예정이 언니를 쳐다봤다.“동명 씨 어머님이 아까 밤에 잠깐 만나자고 해서 얘기 나누고 왔어.”동생 앞에서 하예진은 굳이 뭘 숨길 필요가 없다.하예정은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와 상의하고 그녀의 의견을 묻는다.언니인 그녀도 마찬가지이다.“사모님이 몇백억짜리 수표를 쥐여주며 언니더러 동명 씨 멀리 떠나래?”하예진이 째려보자 그녀가 웃었다.“드라마에서 자주 나오길래.”하예정은 언니가 윤미라와 만났다고 하여 절대 손해 볼 거란 걱정은 없다.“사모님이 많은 얘기
“예정아, 이래서 우린 자매인가 봐. 나도 똑같이 반박했어. 왜 내가 떠나야 하냐고, 왜 내가 희생해야 하냐고 되물었어.”“언니, 피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야. 지금 있는 그 거리에서 이사하지 마. 가게를 연 지도 한동안 됐고 이제 겨우 단골이 쌓여가는데 지금 이사하면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언니 마음만 잘 단속하고 동명 씨한테 넘어가지만 않으면 동명 씨가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어. 만약 사모님 요구대로 우빈이 데리고 관성을 떠났는데 동명 씨가 평생 언니를 잊지 못하고 여생을 언니네 모자만 찾는 일에 전념하면 어떡할 거야?”“한동안 구애했고 아무런 대답도 못 들었어. 게다가 사모님이 계속 설득하고 말리고 계시니 시간이 지나면 포기하고 마음 접을 거야. 그땐 언니도 훨씬 홀가분해질 거고.”하예진도 똑같은 생각이었다.떠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동생도 같은 뜻이니 가게를 옮기지도 않고 관성을 떠날 일은 더더욱 없다.본인의 마음은 본인이 꼭 잘 단속할 테니까.동생에게 털어놓고 동생의 의견도 들으니 하예진은 더는 사모님과의 대화를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다.애쓰고 싶다면 윤미라 스스로 애쓰면 될 일이다.어차피 하예진은 이미 윤미라에게 맹세했다. 윤미라가 반대하는 한 절대 노씨 일가에 시집갈 일이 없다고 말이다. 설사 윤미라가 허락한다고 해도 하예진은 반드시 노씨 일가에 시집간다는 보장이 없다.“먼저 갈게. 내일 또 가게 문 열어야 해.”하예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동생에게 말했다.“언니, 너무 늦었어. 그냥 여기서 자.”“이 길은 이젠 너무 익숙해졌어. 더 늦어도 혼자 운전해 갈 수 있어. 나 또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너랑 제부 쉬는 데 방해돼. 특히 제부는 업무가 다망한데 제대로 휴식하지 못하면 다음 날 어떻게 일하라고 그래.”하예진은 동생의 호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한사코 동생네 집에서 밤을 지새우지 않겠다고 하니 하예정도 어쩔 수 없이 언니를 배웅했다.“우빈이 어느 유치원 보낼지는 정했어?”하예정이 조카 유치원에 관해 묻자 하
“알았어. 그럼 바로 태윤 씨한테 전할게.”하예정은 우빈의 학비 문제로 언니와 다투지 않았다.언니가 우빈을 관성 유치원에 보내겠다고만 하면 된다. 언니도 학비쯤은 부담할 수 있으니까.하예진의 말대로 우빈은 그녀의 아들이니 당연히 엄마가 학비를 부담해야 한다.만약 언니인 하예진이 학비를 부담할 능력이 못 된다면 아이를 관성 유치원에 보낼 생각도 없을 것이다.하예정은 언니를 너무 잘 안다.그녀가 지금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되어 차고 넘치는 게 돈이라지만 언니는 끝까지 동생에게 돈 얘기를 언급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하예진은 동생에게 돈 얘기를 꺼냈다가 자신 때문에 동생이 시댁에서 지위가 흔들릴까 봐 늘 걱정이다.하예정도 돈만 받고 가족들의 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보다 상대에게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더 나으니까.“예정아, 고마워들. 너희 부부 덕분에 우빈이가 좋은 유치원에 들어갈 수 있겠어.”하예진은 동생 부부에게 너무 감격스러웠다.“언니, 또 이런 말 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언니가 없으면 난 무슨 지경이 됐을지도 몰라. 우린 친자매야.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자매라고. 우빈이도 내가 키워온 아이라 친자식이나 다름없어. 아이의 교육 문제에서 나도 언니만큼 중시해. 우리가 능력이 없고 조건이 안 될 땐 좋은 학교를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지만 이젠 능력도 있고 기회도 생겼으니 당연히 제일 좋은 곳으로 보내야지, 안 그래?”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알았어. 이젠 그런 겉치레의 말은 안 할게. 늦었어, 너도 얼른 들어가서 자. 마중 나올 필요 없어. 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 이젠 이곳이 내 집 같아.”“언니는 말로만 자기 집 같다면서 몸이 나으니 가장 먼저 월세방으로 돌아갔잖아. 새집 사준다고 해도 기어코 싫다고 하고.”하예정이 투덜댔다.“나 혼자 살 수 있어. 네 마음만 받을게. 차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내가 쓸 일이 생기면 당연히 혼자 가서 뽑아. 너희한테 받을 필요 없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예정은 얼른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잡은 채 방으로 돌아갔다.전태윤은 이제 막 위층에서 내려오며 이모와 조카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녀석 빨리도 도망치네. 옷 갈아입히자마자 토끼보다 더 빨리 도망쳐. 처형은 갔어?”“네, 갔어요.”곧이어 부부가 소파에 앉았다.우빈은 두 사람 앞에서 혼자 장난감을 놀았다.“여보, 우빈이 유치원 말인데 언니가 당신더러 도와 달라요. 우빈이를 관성 유치원으로 보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해줘요. 돈은 얼마가 필요하면 그때 가서 언니한테 말해주면 돼요. 언니가 비용을 부담하겠대요.”“내가 도울 수 없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 나한테 맡겨. 우빈이는 무조건 관성 유치원으로 보낼 거야. 비용도 신경 쓰지 마. 설사 비용이 생긴다고 해도 내가 대신 내면 돼. 학비는...”전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예정이 덥석 가로챘다.“언니가 우빈이는 제 아들이니 학비는 반드시 자신이 부담하겠대요. 엄마로서의 책임이래요 이건. 언니도 학비를 감당할 수 있으니 우빈이를 제일 좋은 유치원에 보내겠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언니랑 학비로 다투면 분명 우빈이를 관성 유치원에 안 보내려고 할 거예요. 여보, 당신이 내준 미션 나 너무 어려워요.”전태윤은 처형의 성격을 되새기며 말했다.“그래, 우리도 다투지 말자. 처형께 드리는 별장은 무조건 드릴 거야. 시간 날 때 집 보러 다니자 우리. 인테리어 다 된 거로 봐. 처형이 또다시 인테리어에 신경 쓸 필요 없게.”“그래요.”하예정은 남편에게도 오늘 밤 윤미라가 하예진을 만난 일을 알렸다.이에 전태윤은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만약 전씨 일가와 성씨 일가가 없었다면 윤미라의 성격상 일찌감치 하예진을 관성에서 내쫓아버렸을 것이다.“처형과 동명의 일은 두 사람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 사모님이 강압적으로 처형을 대하지만 않으면 우리도 끼어들지 말자.”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진은 홀로 월세방에 돌아오다가 의외로 전남편 주형인이 집 문 앞에 서 있는 걸 발견
병원에서 나온 후 주형인은 서현주와 함께 다른 백화점으로 가서 그녀가 사고 싶은 물건을 샀다.집에 돌아왔지만 줄곧 노동명과 우빈이가 친하게 지내던 장면이 떠올라 기분이 잡쳤다. 노동명이 진짜 아들을 뺏어가고 아빠 노릇을 할까 봐 걱정됐다.서현주가 잠든 후 그는 몰래 집에서 나와 간식거리와 장난감을 사서 바로 전 아내의 집으로 달려왔다.하예진의 마음은 되돌릴 생각이 없다.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 그와 하예진은 이번 생에 더는 불가능하다.하지만 아들은 그의 핏줄인데 어찌 전처에게 대시하는 남자와 그토록 친밀하게 지낸단 말인가? 노동명은 이젠 우빈의 아빠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당신 아내 뱃속의 아이는 괜찮지?”하예진이 차분하게 물었다.주형인은 난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아.”“우빈이는 먹을 것도, 장난감도 부족하지 않아. 이렇게 많이 사 올 필요 없어.”“알아 부족하지 않은걸. 하지만 이건 아빠로서의 내 마음이야. 예진아, 내가 떠나고 우빈이 실망하지 않았어?”주형인은 아들에게 미안했다.전에는 아들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었다.그때 마침 서현주와 불타는 사랑을 할 때라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 꽂혔다.이혼한 후에도 아들과 함께한 횟수가 손꼽힐 만큼 적었다.“조금 실망했는데 금방 나아졌어.”주형인은 아들이 자신이 떠난 것 때문에 실망했다고 하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아들은 친아빠인 그를 신경 쓰고 있으니까.하예진은 전남편에게 온수 한 잔 따랐다.주형인은 잠시 침묵한 후 하예진을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예진아, 너랑 동명 씨...”“왜?”하예진이 되물었다.“아니야, 아무것도. 난 왠지 너랑 동명 씨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네가 재혼하는 걸 말리진 않는데 우빈의 친엄마로서 재혼한다면 아이도 데리고 가야 하잖아. 만약 불행한 결혼을 해서 내 아들이 상처받으면 어떡할까 두려워.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주형인은 자신의 질투에 핑계를 둘러댔다.“예진아, 꼭 생각 잘하고 결정해야 해.
하예정은 무언가 떠오른 듯 전태윤에게 말했다. “태윤 씨, 우리도 리조트에 이틀 정도 지내러 갈까요? 주말에 출근도 안 하고 서점도 주말에는 문을 안 열잖아요.” 예전에는 서점만 운영할 때 주말에도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사업이 커지면서 서점은 그냥 하예정과 심효진의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돈을 더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애정으로 운영하는 곳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았다. 전태윤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친구인 소정남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를 읽고 나서 그는 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래, 우리도 리조트에 가서 주말을 보내자.” “어머님, 아버님, 할머니도 오늘 가시니까 소정남 씨와 효진이도 불러서 점심 같이 먹어요. 샤부샤부 어때요? 오랜만에 샤부샤부 먹고 싶어요.” 하예정이 자주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는 것에 전현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이의도 없이 받아들였다. 하예정이 자신의 어머니와 꽤 닮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것 같았다. 예전에 전씨 할머니가 일부러 하예정을 자신의 은인으로 만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덕분에 온 가족이 하예정에게 감사하게 되었고 전씨 할머니는 장남인 전태윤에게 하예정과 결혼하라고 했다. 전현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수법은 정말 대단해. 손자들도 어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다행히 전태윤과 하예정은 사이가 좋았으며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하예정을 아끼는 전태윤은 당연히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그는 소정남에게 답장을 보냈다. “예정아, 우리 아침 먹고 리조트로 가자. 소정남이랑 효진 씨도 리조트에서 만나자. 샤부샤부는 사람이 많아야 더 맛있잖아. 예준하 씨랑 소현 누나도 불러야겠다.” 전태윤이 제안했다. 하예정은 성소현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성소현은 사양했다. 그녀는 예준하와 A 시로 날아가 예진 리조트에서 며칠 지낼 예정이었다. 예준하를 계속 관
전태윤은 그를 속인 거였다. 하예정은 주우빈에게 답장을 보냈다. [눈이 왔구나. 우빈이 운이 좋네, 갔는데 바로 눈이 와서 진짜 눈을 볼 수 있게 됐구나.] [눈사람도 만들 수 있네. 이모는 지금까지 눈사람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아침 맛있게 먹었어? 옷 많이 입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너희 셋째 작은 아버지는 여행 갔는데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있어야 돌아올 거야. 네가 따라가면 유치원에 못 가잖아.] 다행히 전호영은 빨리 도망친 덕분에 주우빈에게 붙잡히지 않았다. 하예정의 답장을 받은 주우빈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하예정과 주우빈은 30분 동안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친 후, 전태윤은 중얼거렸다. “오늘에서야 우빈이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 알았네. 당신이랑 30분 동안이나 이야기하다니.” 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 “우빈이는 앞으로 수다쟁이가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따뜻한 남자가 될 거예요.” 따뜻한 남자에다 수다쟁이라니... “9시가 넘었네요. 부모님과 할머니도 일어나셨을 거예요. 우리도 얼른 서둘러야죠. 창빈 도련님은 오늘 원림성의 A 시로 가는 거예요?” 전태윤은 먼저 그녀의 옷을 가져오며 말했다. “월요일에 갈 거야. 이틀 정도는 집에서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려고.” 10여 분 후, 부부는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 거실 소파에는 전현림 혼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전씨 할머니와 장소민, 그리고 어제 형의 집에서 잔 전창빈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님.” 부부는 전현림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전현림은 부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일어났구나. 아침 식사 준비해 뒀어. 아직 따뜻할 거야. 먹으러 가.” “엄마랑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전태윤이 물었다. “창빈이는 아직 안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엄마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창빈이도 같이 갔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 할머니가 산책하러 나가시다니.” 전태윤이 말했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예진아, 늦었어. 얼른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내일 아침 같이 먹자.” 노동명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다. 하예진은 그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동명 씨, 잘 자요.” “잘자.” 하예진은 그를 밀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직접 휠체어를 조종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달콤한 미소였다. 그날 밤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지나갔다. 주말 아침, 출근할 필요도 없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평소 일찍 일어나던 전태윤도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다. 그는 침대에 늘어져 아내의 따뜻한 핫팩이 되어 주었다. 관성의 기온이 떨어져 정말 추웠지만 사실 기온은 아직 10도 정도였다. 낮에는 최대로 10도 중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관성 사람들은 너무 추웠다.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인터넷으로 두꺼운 옷을 주문했다. 관성 사람들이 옷을 주문하면 판매자들은 재빨리 발송했다. 며칠 후 주문이 취소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관성의 추위는 찬 공기가 남하할 때 며칠 동안 추워지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발송이 늦으면 날씨가 풀리고 나서 두꺼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지면서 주문을 취소하게 된다. 방에는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가장 추운 며칠 동안 전태윤은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그는 보일러를 켜면 하예정이 더워서 자신의 품에 안기지 않을까 봐 일부러 켜지 않았다. 그가 하예정이 자신의 품에 안기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건 절대 예정이에게 들키면 안 돼. 아니면 또 교활하다고 할 거야.’ ‘카톡!’ 하예정의 카톡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잠에서 깼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전태윤에게 말했다. “여보, 누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는지 좀 봐줘요. 너무 시끄러워요.” 전태윤이 말했다. “내 생각엔 우빈일 거야.” “우빈이는 엄마랑 있어서 이렇게 일찍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직 꿈나라에 있을지도 몰라요.”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꺼내 그녀에게 먹여줬다. 영화가 끝날 즈음, 하예진은 그가 챙겨준 음식으로 배부르게 먹고는 그를 보고 말했다. “이제 됐네요. 야식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예요. 또 산책하면서 소화라도 좀 시켜야겠어요.” 노동명이 일어나자 하예진과 보디가드가 그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노동명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를 밀면서 호텔까지 걸어가. 산책하면서 소화 시키는 거지.” 하예진도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뭐. 그런데 걸어가면 길을 못 찾을지도 몰라요. 길을 잘못 들면 우리 둘 다 강성의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돌아다녀야 할 거예요. 저 원망하지 마요.” “그럴 리 없어.” 지금은 밤이 더욱 깊어졌다. 영화관을 나오니 거리의 떠들썩함은 사라지고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하예진은 노동명을 천천히 밀며 걸었다. 보디가드들은 두 사람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보호했다. 걷다 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명 씨, 눈이 오네요. 빨리 차 타고 호텔로 돌아가요.” 어느 정도 걷자 하예진은 더 이상 배가 부르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오니 길이 미끄러워 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되었다. “그래.” 노동명은 아무런 이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에게는 그녀의 말이 곧 정답이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이내 그들은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주우빈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강일구는 주우빈과 함께 있었다. 하예진이 돌아오자 강일구는 방으로 돌아갔다. “우빈이 자고 있어?” 노동명은 방에 들어와 주우빈을 보았다. 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불을 살짝 덮어주며 말했다. “보일러 온도는 적당하면 돼, 너무 높일 필요 없어. 우빈이가 땀을 흘리고 있잖아.” 아이는 더우면 이불을 걷어차는 버릇이 있었다. 하예진은 온도를 조금 낮췄다. 노동명은 주우빈의 땀을 닦아주고 이불을 살짝 걷어내 더 덥지 않게 했다. 노동명의 행동을 보며 하예진의 눈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그는 주
노동명은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한 번, 손바닥에 한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하예진은 다급하게 손을 뺐다. 그녀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영화관 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그녀를 주시하지 않아 그녀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동명 씨, 진지하게 좀 굴어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노동명은 늘 거칠고 대범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쳤으며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그런 그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녀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마치 어린 소녀처럼 변했다. 하예정은 언니가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은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명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진지해질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예진아, 앞으로 네가 휴식을 원할 때,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서 바람을 좀 쐬고 싶다면 나에게 말만 해줘. 아무리 바빠도 내 손에 있는 일을 내려놓고 너와 함께 나갈 수 있어. 일도 중요하지만 너의 행복이 더 중요해. 나는 돈도 충분히 있어. 예전에 번 돈이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했어. 지금 일을 하는 건 그냥 시간을 보내고 약간의 용돈을 버는 정도야. 나에게는 너와 우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해.” 하예진은 그를 꾸짖듯 말했다. “동명 씨가 말하는 약간의 용돈은 다른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도 못 버는 금액이에요. 동명 씨,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하예진이 식당을 운영하며 매출이 좋아 월 순이익이 꽤 높다고 하더라도 그가 버는 돈에 비하면 그녀의 이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잇, 비교하니까 열 받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하며 온 힘을 다해야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다. 일반 직장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노동명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젊은 시절 고생하며 노력한 결과다. 노동명은 업계에서 십여 년을 뛰어다니며 오늘의 성과를 이루었다. 노
우빈은 새 장난감을 들고 호텔로 돌아가 놀고 싶었다.아직 강성의 밤 구경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하예진이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우빈아, 일구 삼촌과 함께 호텔로 돌아가서 놀아달라고 할래? 엄마랑 아저씨랑 좀 더 돌아다니다가 돌아갈게.”우빈은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하여 강일구는 우빈을 데리고 호텔로 돌아갔다.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계속 돌아다녔다. 이는 두 사람만의 데이트나 다름없다.“동명 씨, 우리 영화 보러 갈까요? 이 근처에 큰 영화관이 있거든요. 저는 거의 매일 그 영화관 입구를 지나다녔는데도 영화를 보러 갈 시간이 없었어요.”노동명이 간절히 원하던 바였다.그는 즉시 경호원에게 먼저 영화표를 사라고 지시했고 그와 하예진은 천천히 걸어갔다.십여 분 후, 두 사람은 영화관 입구에 도착했다.경호원은 표를 끊고 간식도 사 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간식을 먹으면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단지 영화를 보고 싶을 뿐이고 구매한 표도 곧 시작하게 된다.영화관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면 곧 들어갈 수 있었다.노동명은 휠체어를 타지 않고 한 손으로 경호원의 어깨를 잡고 나머지 한 손은 하예진이 부축하여 들어갔다.자리에 앉은 노동명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들 주변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그와 하예진, 그리고 몇 명의 경호원들이 두 사람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경호원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었다.“영화관에 와서 영화를 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노동명은 자리에 앉은 뒤 감개무량하게 한마디 했다.하예진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저도 몇 년 됐어요.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온 적 없어요.”결혼한 뒤로 영화를 보기는커녕 주형인은 그녀와 함께 쇼핑하는 것조차 점점 더 짜증을 냈다.그는 하예진이 물건을 살 때 항상 물건을 이리저리 비교하여 싼 물건을 고르는 모습을 싫어했다.하예진은 그때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배속의 태아를 돌봐야 했다. 저축한 돈은 모두 신혼집을 꾸미는 데 썼기에 돈 가방
하예진은 아들의 이마를 톡 쳤다.“뭐라고 한 거야?”우빈은 하예진이 때린 곳을 만지며 노동명에게 말했다.“아저씨, 엄마가 절 아프게 때렸어요. ‘호’ 해주세요.”노동명은 재빨리 불어주고는 다시 어루만져주며 하예진을 나무랐다.“예진아, 우빈 이마를 자꾸 치지 마. 똑똑한 애가 멍청해지면 어떡해.”“똑똑하면 똑똑하고 멍청하면 멍청한 아이인 거예요. 제가 몇 번 쳤다고 멍청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멍청한 건 녀석이 원래 멍청한 아이였기 때문이에요.”“우리 우빈은 똑똑하거든 멍청하지 않는단 말이야.”우빈은 하예진에게 혀를 내밀고는 얼른 노동명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노동명 아저씨가 그를 보호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우빈을 아껴주던 노동명은 결국 우빈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들어갔다.가게에 들어간 우빈은 노동명 품으로부터 바닥에 미끄러져 내려와 먼저 몇 권의 유아용 스케치북을 가져와서 하예진의 앞에서 귀여운 얼굴을 들고 물었다.“엄마, 이거요. 저 장난감을 더 사도 돼요?”노동명이 녀석에게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녀석은 엄마의 뜻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만약 하예진이 그에게 새 장난감을 사지 말라고 고집한다면 그도 사지 않을 것이다.하예진이 대답했다.“하나만 사.”우빈이가 대답했다.“네.”우빈은 장난감 몇 개 더 사려고 했지만, 하예진이 한 가지만 살 수 있다고 하니 하나만 사는 수밖에!녀석은 얼른 가서 그의 장난감을 고르고 있었다.노동명은 우빈이가 여러 장난감을 어루만지며 전부 가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우빈이 좋아하는 건 다 사자. 내가 선물로 사줄게.”“동명 씨, 너무 아이 뜻에만 따르면 안 돼요. 한 가지만 고르게 해요. 장난감도 가지고 왔던데.”그러나 하예진은 아들에게 장난감 하나만 사주겠다고 고집했다.노동명은 어쩔 수 없이 하예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는 우빈이가 원하는 것을 전부 사서 우빈에게 주고 싶었다.“우빈은 너무 많은 사람이 사랑해주고 아껴
“엄마, 하나만 사줘요. 네?”우빈은 계속해서 졸라댔다.“안 돼. 장난감을 사도 여기저기 쌓여 있을 텐데. 네가 놀다가도 정리하지 않으면 엄마가 대신 치워야 하잖아.”“엄마, 제가 다 치울게요. 앞으로 다 치울게요.”우빈도 스스로 정리하고 있었다. 다만 가끔 치우지 않을 때도 있었을 뿐이다.“장난감을 가지고 왔잖아.”하예진은 우빈에게 장난감을 너무 많이 사주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녀석이 장난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우빈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새 장난감 사고 싶어요. 제가 새것 사 가서 동생에게 줄게요.”“그 동생은 아직 어려서 못 놀아.”“그럼, 스케치북을 사줘요. 글씨를 쓰고 숫자도 적으면서 놀래요. 네?”우빈이는 한발 물러서서 스케치북이라고 사고 싶었다.그 장난감 가게에는 연필들과 책들도 많았다.우빈은 그 가게를 다 돌아본 후에야 엄마를 찾으러 돌아와서 사달라고 졸랐다.강일구는 우빈이가 좋아하는 것을 사준다고 했지만, 녀석은 감히 받지는 못하고 하예진의 뜻을 물어보려고 했다.하예진은 항상 우빈의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 두 번째 장난감 방도 가득 찼다고 잔소리했다.우빈은 장난감을 매우 사랑했다. 어떤 장난감은 실수로 망가져도 엄마가 버리겠다고 하면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다.하예진이 쓰레기통에 버리면 녀석은 전부 도로 주워왔다.“스케치북은 사줄게.”우빈은 금세 원숭이처럼 노동명의 허벅지에 올라가 자신을 안아달라고 요구했다.그리고 하에진이 그들을 밀고 앞으로 가게 했다.“엄마, 그럼 우리 스케치북 사러 가요.”가게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녀석이 원하는 것을 전부 이룰 수 있었다.우빈은 여러 대의 큰 장난감 차와 강아지 인형이 갖고 싶었다.정말 탐나는 장난감이었다!그는 엄청 좋아했다.“스케치북만 사. 이따가 돌아오면 그림도 그려.”하예진은 그녀의 아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그녀는 손을 뻗어 아들의 이마를 콕 찔렀다.“엄마가 네 곁에 없었는데 유치원에서 돌아와서
노동명은 다정하게 말했다.“널 위해서 늘 재활을 꾸준히 하고 있어. 회사 일은 특히 중요할 때만 나가서 처리하거든. 우리 형도 도와줘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노동명은 그윽한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예진아,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난 정말로 재활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하면서 평생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바보.”“아니거든. 난 단지 너와 우빈을 너무너무 사랑했을 뿐이야. 남들은 네가 이혼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어. 내가 널 알게 되었을 때에도 넌 뚱뚱하고 못생겼는데 내가 왜 널 좋아하게 되었는지 몰라... 근데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나도 그 이유를 찾고 싶지도 않아. 아마 너의 강인함과 감히 자신을 개변시키는 그 능력에 매료되었을지도 모르지. 난 우빈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사실 난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느껴져서 안 좋아하거든. 근데 처음으로 우빈을 보자마자 좋아하게 되었다.”“저도 알아요. 저도 제 아들 덕을 봤죠.”노동명은 우빈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빈의 엄마, 즉 하예진에게 조금 더 많은 관심과 포용력을 갖게 되었다.그러다가 접촉 횟수가 많아졌고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 정이 들었다.“우빈이가 우리 두 사람 중매를 선 거나 다름없어.”노동명은 헤벌쭉 웃었다.“태윤이도 마찬가지야. 태윤 때문이 아니었다면 널 알지도 못했을걸. 예진아, 네가 강성에서 일을 마치면 나랑 결혼하는 건 어때?”하예진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노동명이 계속하게 말했다.“내가 정상적으로 걷지 못해도 난 결혼하고 싶어. 난 이미 스스로 설 수 있어. 그리고 몇 걸음 정도는 앞으로 걸을 수 있게 됐고. 1년이란 시간을 더 주면 분명 정상적으로 걸어 다닐 수 있을 거야. 근데 난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노동명은 지금 36세이고, 2년만 더 기다리면 38세까지 될 것이다.곧 있으면 마흔이 된다.하예진은 속으로 흐뭇해하며 대답했다.“좋아요. 저야 지금 당장이라도 동명 씨와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요. 근데 동명 씨가 원하지 않잖아요.”노동명은 자신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