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자마자 우빈이가 하예정의 볼에 뽀뽀하는 걸 보더니 아니 글쎄 세 살짜리 애와 질투하고 있었다.전태윤은 아이를 안고 먼저 방에 돌아가며 얘기했다.“이모부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아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이어서 이모부의 장편 연설이 시작됐다.아이는 마냥 한심할 따름이었다.이모부가 한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고 유일하게 캐치한 한 가지는 바로 우빈이도 남자기에 이모에게 자꾸 뽀뽀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다만 이모인데 대체 왜?이모는 우빈에게 뽀뽀할 수 있는데 왜?결국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가 참 복잡하다는 결론밖에 못 지었다.전태윤이 아이에게 한 말은 하예정을 어이없게 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우빈이 데리고 올라가서 씻어요.”“그래.”전태윤은 아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오늘 밤엔 이모부가 씻겨줄 거야.”“우빈이 장난감 가지고 가서 씻을 거예요.”“물총 챙겨.”“네.”어른과 아이가 사이좋게 조건을 상의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이때 하예진이 동생에게 말했다.“제부 저러면 우빈이 버릇 나빠져.”“아니야. 많이 예뻐해도 원칙은 있어. 그냥 예뻐해 주는 건 아니야. 언니가 애 교육을 잘 시켜서 응석받이로 크지 않았어.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알아.”우빈은 지금 만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성씨 일가와 전씨 일가 모두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살핀다.“너한테 할 얘기 있어.”하예정이 언니를 쳐다봤다.“동명 씨 어머님이 아까 밤에 잠깐 만나자고 해서 얘기 나누고 왔어.”동생 앞에서 하예진은 굳이 뭘 숨길 필요가 없다.하예정은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와 상의하고 그녀의 의견을 묻는다.언니인 그녀도 마찬가지이다.“사모님이 몇백억짜리 수표를 쥐여주며 언니더러 동명 씨 멀리 떠나래?”하예진이 째려보자 그녀가 웃었다.“드라마에서 자주 나오길래.”하예정은 언니가 윤미라와 만났다고 하여 절대 손해 볼 거란 걱정은 없다.“사모님이 많은 얘기
“예정아, 이래서 우린 자매인가 봐. 나도 똑같이 반박했어. 왜 내가 떠나야 하냐고, 왜 내가 희생해야 하냐고 되물었어.”“언니, 피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야. 지금 있는 그 거리에서 이사하지 마. 가게를 연 지도 한동안 됐고 이제 겨우 단골이 쌓여가는데 지금 이사하면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언니 마음만 잘 단속하고 동명 씨한테 넘어가지만 않으면 동명 씨가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어. 만약 사모님 요구대로 우빈이 데리고 관성을 떠났는데 동명 씨가 평생 언니를 잊지 못하고 여생을 언니네 모자만 찾는 일에 전념하면 어떡할 거야?”“한동안 구애했고 아무런 대답도 못 들었어. 게다가 사모님이 계속 설득하고 말리고 계시니 시간이 지나면 포기하고 마음 접을 거야. 그땐 언니도 훨씬 홀가분해질 거고.”하예진도 똑같은 생각이었다.떠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동생도 같은 뜻이니 가게를 옮기지도 않고 관성을 떠날 일은 더더욱 없다.본인의 마음은 본인이 꼭 잘 단속할 테니까.동생에게 털어놓고 동생의 의견도 들으니 하예진은 더는 사모님과의 대화를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다.애쓰고 싶다면 윤미라 스스로 애쓰면 될 일이다.어차피 하예진은 이미 윤미라에게 맹세했다. 윤미라가 반대하는 한 절대 노씨 일가에 시집갈 일이 없다고 말이다. 설사 윤미라가 허락한다고 해도 하예진은 반드시 노씨 일가에 시집간다는 보장이 없다.“먼저 갈게. 내일 또 가게 문 열어야 해.”하예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동생에게 말했다.“언니, 너무 늦었어. 그냥 여기서 자.”“이 길은 이젠 너무 익숙해졌어. 더 늦어도 혼자 운전해 갈 수 있어. 나 또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너랑 제부 쉬는 데 방해돼. 특히 제부는 업무가 다망한데 제대로 휴식하지 못하면 다음 날 어떻게 일하라고 그래.”하예진은 동생의 호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한사코 동생네 집에서 밤을 지새우지 않겠다고 하니 하예정도 어쩔 수 없이 언니를 배웅했다.“우빈이 어느 유치원 보낼지는 정했어?”하예정이 조카 유치원에 관해 묻자 하
“알았어. 그럼 바로 태윤 씨한테 전할게.”하예정은 우빈의 학비 문제로 언니와 다투지 않았다.언니가 우빈을 관성 유치원에 보내겠다고만 하면 된다. 언니도 학비쯤은 부담할 수 있으니까.하예진의 말대로 우빈은 그녀의 아들이니 당연히 엄마가 학비를 부담해야 한다.만약 언니인 하예진이 학비를 부담할 능력이 못 된다면 아이를 관성 유치원에 보낼 생각도 없을 것이다.하예정은 언니를 너무 잘 안다.그녀가 지금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되어 차고 넘치는 게 돈이라지만 언니는 끝까지 동생에게 돈 얘기를 언급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하예진은 동생에게 돈 얘기를 꺼냈다가 자신 때문에 동생이 시댁에서 지위가 흔들릴까 봐 늘 걱정이다.하예정도 돈만 받고 가족들의 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보다 상대에게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더 나으니까.“예정아, 고마워들. 너희 부부 덕분에 우빈이가 좋은 유치원에 들어갈 수 있겠어.”하예진은 동생 부부에게 너무 감격스러웠다.“언니, 또 이런 말 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언니가 없으면 난 무슨 지경이 됐을지도 몰라. 우린 친자매야.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자매라고. 우빈이도 내가 키워온 아이라 친자식이나 다름없어. 아이의 교육 문제에서 나도 언니만큼 중시해. 우리가 능력이 없고 조건이 안 될 땐 좋은 학교를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지만 이젠 능력도 있고 기회도 생겼으니 당연히 제일 좋은 곳으로 보내야지, 안 그래?”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알았어. 이젠 그런 겉치레의 말은 안 할게. 늦었어, 너도 얼른 들어가서 자. 마중 나올 필요 없어. 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 이젠 이곳이 내 집 같아.”“언니는 말로만 자기 집 같다면서 몸이 나으니 가장 먼저 월세방으로 돌아갔잖아. 새집 사준다고 해도 기어코 싫다고 하고.”하예정이 투덜댔다.“나 혼자 살 수 있어. 네 마음만 받을게. 차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내가 쓸 일이 생기면 당연히 혼자 가서 뽑아. 너희한테 받을 필요 없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예정은 얼른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잡은 채 방으로 돌아갔다.전태윤은 이제 막 위층에서 내려오며 이모와 조카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녀석 빨리도 도망치네. 옷 갈아입히자마자 토끼보다 더 빨리 도망쳐. 처형은 갔어?”“네, 갔어요.”곧이어 부부가 소파에 앉았다.우빈은 두 사람 앞에서 혼자 장난감을 놀았다.“여보, 우빈이 유치원 말인데 언니가 당신더러 도와 달라요. 우빈이를 관성 유치원으로 보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해줘요. 돈은 얼마가 필요하면 그때 가서 언니한테 말해주면 돼요. 언니가 비용을 부담하겠대요.”“내가 도울 수 없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 나한테 맡겨. 우빈이는 무조건 관성 유치원으로 보낼 거야. 비용도 신경 쓰지 마. 설사 비용이 생긴다고 해도 내가 대신 내면 돼. 학비는...”전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예정이 덥석 가로챘다.“언니가 우빈이는 제 아들이니 학비는 반드시 자신이 부담하겠대요. 엄마로서의 책임이래요 이건. 언니도 학비를 감당할 수 있으니 우빈이를 제일 좋은 유치원에 보내겠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언니랑 학비로 다투면 분명 우빈이를 관성 유치원에 안 보내려고 할 거예요. 여보, 당신이 내준 미션 나 너무 어려워요.”전태윤은 처형의 성격을 되새기며 말했다.“그래, 우리도 다투지 말자. 처형께 드리는 별장은 무조건 드릴 거야. 시간 날 때 집 보러 다니자 우리. 인테리어 다 된 거로 봐. 처형이 또다시 인테리어에 신경 쓸 필요 없게.”“그래요.”하예정은 남편에게도 오늘 밤 윤미라가 하예진을 만난 일을 알렸다.이에 전태윤은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만약 전씨 일가와 성씨 일가가 없었다면 윤미라의 성격상 일찌감치 하예진을 관성에서 내쫓아버렸을 것이다.“처형과 동명의 일은 두 사람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 사모님이 강압적으로 처형을 대하지만 않으면 우리도 끼어들지 말자.”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진은 홀로 월세방에 돌아오다가 의외로 전남편 주형인이 집 문 앞에 서 있는 걸 발견
병원에서 나온 후 주형인은 서현주와 함께 다른 백화점으로 가서 그녀가 사고 싶은 물건을 샀다.집에 돌아왔지만 줄곧 노동명과 우빈이가 친하게 지내던 장면이 떠올라 기분이 잡쳤다. 노동명이 진짜 아들을 뺏어가고 아빠 노릇을 할까 봐 걱정됐다.서현주가 잠든 후 그는 몰래 집에서 나와 간식거리와 장난감을 사서 바로 전 아내의 집으로 달려왔다.하예진의 마음은 되돌릴 생각이 없다.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 그와 하예진은 이번 생에 더는 불가능하다.하지만 아들은 그의 핏줄인데 어찌 전처에게 대시하는 남자와 그토록 친밀하게 지낸단 말인가? 노동명은 이젠 우빈의 아빠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당신 아내 뱃속의 아이는 괜찮지?”하예진이 차분하게 물었다.주형인은 난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아.”“우빈이는 먹을 것도, 장난감도 부족하지 않아. 이렇게 많이 사 올 필요 없어.”“알아 부족하지 않은걸. 하지만 이건 아빠로서의 내 마음이야. 예진아, 내가 떠나고 우빈이 실망하지 않았어?”주형인은 아들에게 미안했다.전에는 아들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었다.그때 마침 서현주와 불타는 사랑을 할 때라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 꽂혔다.이혼한 후에도 아들과 함께한 횟수가 손꼽힐 만큼 적었다.“조금 실망했는데 금방 나아졌어.”주형인은 아들이 자신이 떠난 것 때문에 실망했다고 하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아들은 친아빠인 그를 신경 쓰고 있으니까.하예진은 전남편에게 온수 한 잔 따랐다.주형인은 잠시 침묵한 후 하예진을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예진아, 너랑 동명 씨...”“왜?”하예진이 되물었다.“아니야, 아무것도. 난 왠지 너랑 동명 씨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네가 재혼하는 걸 말리진 않는데 우빈의 친엄마로서 재혼한다면 아이도 데리고 가야 하잖아. 만약 불행한 결혼을 해서 내 아들이 상처받으면 어떡할까 두려워.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주형인은 자신의 질투에 핑계를 둘러댔다.“예진아, 꼭 생각 잘하고 결정해야 해.
임신 전에도 시댁 식구들이 우빈을 관심하는 걸 꺼렸는데 이젠 임신까지 했으니 더 질색한다.서현주를 언급하자 주형인은 역시나 좌불안석이었다.그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전남편을 보낸 후 하예진은 문을 닫고 안으로 잠그며 마음속으로 은은한 쾌감이 들었다.전남편이 재혼하고 난리법석인 나날을 보내서일까?한편 그녀와 우빈은 점점 더 나은 삶을 보내고 있다. 이게 바로 전남편에 대한 최고의 복수이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이어진 며칠 동안 하예정이나 하예진이나 전부 바삐 보냈다.노동명은 여전히 매일 아침 하루 토스트에 와서 아침을 먹고 하예진에게 꽃과 갖은 선물 공세를 했다. 하예진이 받지 않아도 그는 매일 견지했다.전태윤은 우빈을 성공적으로 관성 유치원에 등록시켰다. 9월이면 우빈은 관성 유치원으로 다닐 수 있다.날도 점점 무더워지고 곧장 6월에 접어들었다.관성의 6월은 그야말로 찜통더위였다.신혼여행 중이던 소정남, 심효진 부부는 이런 무더운 6월에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소정남은 아내와 신혼을 더 즐기려고 일부러 전태윤에게 신혼 휴가를 두 달이나 받았다.신혼여행을 떠날 때 이들 부부는 밖에서 두 달 동안 실컷 놀다가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한 달이 지나자마자 집에 돌아왔다.부부가 미리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하예정은 바로 수상한 조짐이 들었다. 그녀가 소식을 접했을 때 마침 성소현도 본가에서 돌아와 이참에 두 자매가 함께 소씨 일가로 방문했다.소씨 일가에 도착하니 심효진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두 자매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아줌마, 저 올라가서 효진이 볼게요.”하예정은 초조한 마음에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어 최민주와 더는 격식을 차릴 새도 없이, 의자에 얼마 앉아있지도 않고 바로 위층에 올라가려 했다.이에 최민주가 웃으며 말했다.“그래, 가정부랑 함께 올라가 봐.”소정남도 위층에 있었다.최민주는 가정부에게 분부하여 하예정과 성소현을 위
“처음 석 달은 각별히 조심해야 해. 여행하고 싶으면 나중에 애 낳고 나가 놀자. 네가 싫증 날 때까지 함께 놀게. 맹세해.”소정남은 아내에게 다짐했다.현재는 모든 중심을 그녀 뱃속의 아기에게 두어야 한다.심효진이 건강하고 이제 막 임신했다고는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소정남은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어 아내가 임신한 걸 알자마자 모든 여행 일정을 스톱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심지어 큰형에게 가정용 개인비행기를 빌려서 말이다.소지훈도 제수의 임신 소식을 매우 중시하며 소정남의 전화를 받자마자 그들 부부에게 개인비행기를 보내서 집까지 데려왔다.소정남은 그들 세대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한 사람이고 심효진 뱃속의 아이도 소씨 일가의 첫 후대이니 그녀의 임신 소식은 온 가족을 흥분케 했다. 부부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많은 친척들이 영양제를 보내왔다.일부 연장자 친척들은 아이가 태어난 후 사용할 생활용품까지 한가득 사 보냈다.다들 이토록 심효진의 아이를 중시하는데 소정남이 긴장을 늦출 수 있을까?“아이가 태어나면 또 애를 두고 나갈 순 없다고 여행을 마다할 거면서! 얼른 가서 예정이, 소현 언니 문 좀 열어줘.”심효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소정남이 재빨리 그녀를 말렸다.“누워있어. 금방 열어줄게.”소정남은 아내가 침대에서 내려올까 봐 얼른 가서 문을 열었다.“정남 씨.”소정남을 본 하예정과 성소현은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인사했다.“예정 씨, 소현 씨, 오셨어요. 효진이 방에서 쉬고 있어요.”소정남은 웃으며 길을 내주었다. 두 여자가 방으로 들어갈 때 그는 나지막이 하예정을 불렀다.하예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예정 씨, 저 대신 효진이 꼭 좀 잘 봐주세요. 침대에서 내려오면 안 돼요. 우리 몇 시간 동안 비행기 타고 이제 막 돌아와서 많이 피곤할 거예요. 효진이가 얌전히 있지 못하고 자꾸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해서 걱정이네요.”하예정이 웃으며 답했다.“알았어요. 제가 대신 잘 돌볼게요. 함부로 나다니지 않게 잘
성소현이 웃으며 말했다.“효진 씨네 부부 참 행복하네요. 신혼여행 갔다가 바로 임신하고요. 축하해요 효진 씨. 임신한 걸 미리 알았다면 올 때 영양제라도 사 오는 건데.”“예정이도 태윤 씨한테 두 분 미리 돌아온 걸 전해 들었어요. 소식 듣자마자 효진 씨가 걱정된다면서 바로 달려오느라 빈손으로 왔네요.”심효진이 재빨리 말했다.“영양제는 됐어요. 제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 집안 친척들이 갖은 영양제를 사 와서 깜짝 놀랐잖아요.”대가족이고 서로 관계가 좋다 보니 선물 스케일이 사람을 놀라게 할 따름이다.“아직 임신 초기라 그렇게 몸보신할 필요도 없어요. 하루 세끼 정상대로 먹으면 되니까. 두 사람은 절대 영양제 사 오지 마세요. 제가 부탁드릴게요.”심효진은 두 친구에게 싹싹 빌며 말했다. 그 모습에 다들 실소를 터트렸다.가정부가 과일이랑 디저트를 들고 들어왔고 심효진은 두 친구에게 음식을 권했다.하예정과 성소현도 더는 격식 차릴 것 없이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금방 하예정의 고향 집에서 돌아와 허기진 참이라 과일로 배를 채웠다.“효진 씨 입덧해요?”성소현이 컵에 물을 따르고 한 모금 마시더니 궁금한 듯 심효진에게 물었다.“우리 새언니는 아직도 입덧이 심해요. 아마 출산 때까지 토할 것 같아요.”성소현은 매번 새언니가 입덧으로 토할 때마다 엄마는 참 위대하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그녀는 사석에서 오빠에게 꼭 새언니를 잘해주라고, 절대 새언니를 저버리면 안 된다고, 저토록 힘들게 아이를 낳고 키우니 평생 잘해줘야 한다고 당부한다.오빠가 새언니에게 미안할 짓을 하면 그녀가 제일 먼저 오빠를 혼낼 것이다.성소현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성기현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내리친다.그도 그럴 것이 성기현은 아내 사랑이 지극해 웬만해서 그를 뛰어넘을 남편감이 없는데 동생이 아직도 그런 협박을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동생의 머리를 내리칠 따름이다.“금방 임신해서 아직은 아무 반응이 없어요. 입덧이 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심효진도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