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예정은 얼른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잡은 채 방으로 돌아갔다.전태윤은 이제 막 위층에서 내려오며 이모와 조카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녀석 빨리도 도망치네. 옷 갈아입히자마자 토끼보다 더 빨리 도망쳐. 처형은 갔어?”“네, 갔어요.”곧이어 부부가 소파에 앉았다.우빈은 두 사람 앞에서 혼자 장난감을 놀았다.“여보, 우빈이 유치원 말인데 언니가 당신더러 도와 달라요. 우빈이를 관성 유치원으로 보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해줘요. 돈은 얼마가 필요하면 그때 가서 언니한테 말해주면 돼요. 언니가 비용을 부담하겠대요.”“내가 도울 수 없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 나한테 맡겨. 우빈이는 무조건 관성 유치원으로 보낼 거야. 비용도 신경 쓰지 마. 설사 비용이 생긴다고 해도 내가 대신 내면 돼. 학비는...”전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예정이 덥석 가로챘다.“언니가 우빈이는 제 아들이니 학비는 반드시 자신이 부담하겠대요. 엄마로서의 책임이래요 이건. 언니도 학비를 감당할 수 있으니 우빈이를 제일 좋은 유치원에 보내겠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언니랑 학비로 다투면 분명 우빈이를 관성 유치원에 안 보내려고 할 거예요. 여보, 당신이 내준 미션 나 너무 어려워요.”전태윤은 처형의 성격을 되새기며 말했다.“그래, 우리도 다투지 말자. 처형께 드리는 별장은 무조건 드릴 거야. 시간 날 때 집 보러 다니자 우리. 인테리어 다 된 거로 봐. 처형이 또다시 인테리어에 신경 쓸 필요 없게.”“그래요.”하예정은 남편에게도 오늘 밤 윤미라가 하예진을 만난 일을 알렸다.이에 전태윤은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만약 전씨 일가와 성씨 일가가 없었다면 윤미라의 성격상 일찌감치 하예진을 관성에서 내쫓아버렸을 것이다.“처형과 동명의 일은 두 사람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 사모님이 강압적으로 처형을 대하지만 않으면 우리도 끼어들지 말자.”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진은 홀로 월세방에 돌아오다가 의외로 전남편 주형인이 집 문 앞에 서 있는 걸 발견
병원에서 나온 후 주형인은 서현주와 함께 다른 백화점으로 가서 그녀가 사고 싶은 물건을 샀다.집에 돌아왔지만 줄곧 노동명과 우빈이가 친하게 지내던 장면이 떠올라 기분이 잡쳤다. 노동명이 진짜 아들을 뺏어가고 아빠 노릇을 할까 봐 걱정됐다.서현주가 잠든 후 그는 몰래 집에서 나와 간식거리와 장난감을 사서 바로 전 아내의 집으로 달려왔다.하예진의 마음은 되돌릴 생각이 없다.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 그와 하예진은 이번 생에 더는 불가능하다.하지만 아들은 그의 핏줄인데 어찌 전처에게 대시하는 남자와 그토록 친밀하게 지낸단 말인가? 노동명은 이젠 우빈의 아빠 자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당신 아내 뱃속의 아이는 괜찮지?”하예진이 차분하게 물었다.주형인은 난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아.”“우빈이는 먹을 것도, 장난감도 부족하지 않아. 이렇게 많이 사 올 필요 없어.”“알아 부족하지 않은걸. 하지만 이건 아빠로서의 내 마음이야. 예진아, 내가 떠나고 우빈이 실망하지 않았어?”주형인은 아들에게 미안했다.전에는 아들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었다.그때 마침 서현주와 불타는 사랑을 할 때라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 꽂혔다.이혼한 후에도 아들과 함께한 횟수가 손꼽힐 만큼 적었다.“조금 실망했는데 금방 나아졌어.”주형인은 아들이 자신이 떠난 것 때문에 실망했다고 하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아들은 친아빠인 그를 신경 쓰고 있으니까.하예진은 전남편에게 온수 한 잔 따랐다.주형인은 잠시 침묵한 후 하예진을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예진아, 너랑 동명 씨...”“왜?”하예진이 되물었다.“아니야, 아무것도. 난 왠지 너랑 동명 씨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네가 재혼하는 걸 말리진 않는데 우빈의 친엄마로서 재혼한다면 아이도 데리고 가야 하잖아. 만약 불행한 결혼을 해서 내 아들이 상처받으면 어떡할까 두려워.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주형인은 자신의 질투에 핑계를 둘러댔다.“예진아, 꼭 생각 잘하고 결정해야 해.
임신 전에도 시댁 식구들이 우빈을 관심하는 걸 꺼렸는데 이젠 임신까지 했으니 더 질색한다.서현주를 언급하자 주형인은 역시나 좌불안석이었다.그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전남편을 보낸 후 하예진은 문을 닫고 안으로 잠그며 마음속으로 은은한 쾌감이 들었다.전남편이 재혼하고 난리법석인 나날을 보내서일까?한편 그녀와 우빈은 점점 더 나은 삶을 보내고 있다. 이게 바로 전남편에 대한 최고의 복수이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이어진 며칠 동안 하예정이나 하예진이나 전부 바삐 보냈다.노동명은 여전히 매일 아침 하루 토스트에 와서 아침을 먹고 하예진에게 꽃과 갖은 선물 공세를 했다. 하예진이 받지 않아도 그는 매일 견지했다.전태윤은 우빈을 성공적으로 관성 유치원에 등록시켰다. 9월이면 우빈은 관성 유치원으로 다닐 수 있다.날도 점점 무더워지고 곧장 6월에 접어들었다.관성의 6월은 그야말로 찜통더위였다.신혼여행 중이던 소정남, 심효진 부부는 이런 무더운 6월에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소정남은 아내와 신혼을 더 즐기려고 일부러 전태윤에게 신혼 휴가를 두 달이나 받았다.신혼여행을 떠날 때 이들 부부는 밖에서 두 달 동안 실컷 놀다가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한 달이 지나자마자 집에 돌아왔다.부부가 미리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하예정은 바로 수상한 조짐이 들었다. 그녀가 소식을 접했을 때 마침 성소현도 본가에서 돌아와 이참에 두 자매가 함께 소씨 일가로 방문했다.소씨 일가에 도착하니 심효진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두 자매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아줌마, 저 올라가서 효진이 볼게요.”하예정은 초조한 마음에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어 최민주와 더는 격식을 차릴 새도 없이, 의자에 얼마 앉아있지도 않고 바로 위층에 올라가려 했다.이에 최민주가 웃으며 말했다.“그래, 가정부랑 함께 올라가 봐.”소정남도 위층에 있었다.최민주는 가정부에게 분부하여 하예정과 성소현을 위
“처음 석 달은 각별히 조심해야 해. 여행하고 싶으면 나중에 애 낳고 나가 놀자. 네가 싫증 날 때까지 함께 놀게. 맹세해.”소정남은 아내에게 다짐했다.현재는 모든 중심을 그녀 뱃속의 아기에게 두어야 한다.심효진이 건강하고 이제 막 임신했다고는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소정남은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어 아내가 임신한 걸 알자마자 모든 여행 일정을 스톱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심지어 큰형에게 가정용 개인비행기를 빌려서 말이다.소지훈도 제수의 임신 소식을 매우 중시하며 소정남의 전화를 받자마자 그들 부부에게 개인비행기를 보내서 집까지 데려왔다.소정남은 그들 세대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한 사람이고 심효진 뱃속의 아이도 소씨 일가의 첫 후대이니 그녀의 임신 소식은 온 가족을 흥분케 했다. 부부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많은 친척들이 영양제를 보내왔다.일부 연장자 친척들은 아이가 태어난 후 사용할 생활용품까지 한가득 사 보냈다.다들 이토록 심효진의 아이를 중시하는데 소정남이 긴장을 늦출 수 있을까?“아이가 태어나면 또 애를 두고 나갈 순 없다고 여행을 마다할 거면서! 얼른 가서 예정이, 소현 언니 문 좀 열어줘.”심효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소정남이 재빨리 그녀를 말렸다.“누워있어. 금방 열어줄게.”소정남은 아내가 침대에서 내려올까 봐 얼른 가서 문을 열었다.“정남 씨.”소정남을 본 하예정과 성소현은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인사했다.“예정 씨, 소현 씨, 오셨어요. 효진이 방에서 쉬고 있어요.”소정남은 웃으며 길을 내주었다. 두 여자가 방으로 들어갈 때 그는 나지막이 하예정을 불렀다.하예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예정 씨, 저 대신 효진이 꼭 좀 잘 봐주세요. 침대에서 내려오면 안 돼요. 우리 몇 시간 동안 비행기 타고 이제 막 돌아와서 많이 피곤할 거예요. 효진이가 얌전히 있지 못하고 자꾸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해서 걱정이네요.”하예정이 웃으며 답했다.“알았어요. 제가 대신 잘 돌볼게요. 함부로 나다니지 않게 잘
성소현이 웃으며 말했다.“효진 씨네 부부 참 행복하네요. 신혼여행 갔다가 바로 임신하고요. 축하해요 효진 씨. 임신한 걸 미리 알았다면 올 때 영양제라도 사 오는 건데.”“예정이도 태윤 씨한테 두 분 미리 돌아온 걸 전해 들었어요. 소식 듣자마자 효진 씨가 걱정된다면서 바로 달려오느라 빈손으로 왔네요.”심효진이 재빨리 말했다.“영양제는 됐어요. 제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 집안 친척들이 갖은 영양제를 사 와서 깜짝 놀랐잖아요.”대가족이고 서로 관계가 좋다 보니 선물 스케일이 사람을 놀라게 할 따름이다.“아직 임신 초기라 그렇게 몸보신할 필요도 없어요. 하루 세끼 정상대로 먹으면 되니까. 두 사람은 절대 영양제 사 오지 마세요. 제가 부탁드릴게요.”심효진은 두 친구에게 싹싹 빌며 말했다. 그 모습에 다들 실소를 터트렸다.가정부가 과일이랑 디저트를 들고 들어왔고 심효진은 두 친구에게 음식을 권했다.하예정과 성소현도 더는 격식 차릴 것 없이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금방 하예정의 고향 집에서 돌아와 허기진 참이라 과일로 배를 채웠다.“효진 씨 입덧해요?”성소현이 컵에 물을 따르고 한 모금 마시더니 궁금한 듯 심효진에게 물었다.“우리 새언니는 아직도 입덧이 심해요. 아마 출산 때까지 토할 것 같아요.”성소현은 매번 새언니가 입덧으로 토할 때마다 엄마는 참 위대하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그녀는 사석에서 오빠에게 꼭 새언니를 잘해주라고, 절대 새언니를 저버리면 안 된다고, 저토록 힘들게 아이를 낳고 키우니 평생 잘해줘야 한다고 당부한다.오빠가 새언니에게 미안할 짓을 하면 그녀가 제일 먼저 오빠를 혼낼 것이다.성소현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성기현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내리친다.그도 그럴 것이 성기현은 아내 사랑이 지극해 웬만해서 그를 뛰어넘을 남편감이 없는데 동생이 아직도 그런 협박을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동생의 머리를 내리칠 따름이다.“금방 임신해서 아직은 아무 반응이 없어요. 입덧이 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심효진도
“그래요. 두 사람 알아서 해요.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요.”심효진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게 돈밖에 없는 것 같아서 내내 미안했다.이에 하예정과 성소현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일단 태교에나 전념해요.”심효진이 말했다.“임신해도 일할 수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임신 중에도 출근하는데. 출산할 때까지 회사 다니잖아.”“그건 다른 사람들이고. 넌 달라. 넌 그냥 집에서 얌전히 지내기만 하면 돼.”하예정이 가볍게 웃었다.“정남 씨가 저토록 긴장한 걸 봐서는 너 앞으로 가게 나가보려고 해도 허락하지 않을 기세인데.”“...”심효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세 여자가 잠시 수다를 떤 후 소정남이 노크했다.그는 문을 열고 쟁반에 죽 한 그릇 담아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안 봐도 심효진에게 먹일 영양죽이겠지.“예정 씨, 태윤이 왔어요. 아래에 있어요.”소정남은 가까이 다가오며 하예정에게 말했다.그는 죽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고 성소현에게도 말했다.“소현 씨, 예준하 씨도 소현 씨 데리러 왔어요. 함께 저녁을 하자네요.”세 여자는 그제야 날이 어두워졌다는 걸 알아챘다.“효진아, 잘 쉬고 있어. 우린 이만 가야겠어. 다음에 또 보러 올게.”하예정과 성소현은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데리러 왔다는 말에 더 머무르지 않았다.두 사람이 나간 후 소정남이 아내에게 말했다.“여보, 이거 엄마가 직접 끓이신 전복죽이야. 안 뜨거우니까 일단 먹고 반 시간 후에 밥 먹자.”심효진이 대답했다.“나 아직 배 안 고파.”“함께 디저트 먹었어?”“아니. 왠지 이젠 단 게 안 당겨.”심효진은 말로는 배가 안 고프다고 하지만 어느덧 죽을 들고 한 입 떠먹었다.시어머니가 그녀를 위해 직접 끓여주신 죽인데 마다할 리가 있을까. 당연히 한 그릇 싹 다 비워야지.“뭐 먹고 싶어? 내가 사 올게.”소정남은 여자가 임신하면 입맛이 바뀐다는 걸 알고 있다.“망고 먹고 싶어. 껍질 발라서 먹기 좋게 자른 거, 그 위에 고춧가루랑 진피가루 솔솔 뿌
“아니야, 아무것도. 방금 장인어른, 장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두 분도 엄청 기뻐하셔.”소정남은 집으로 돌아와서야 장인, 장모께 알리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심효진이 친구들과 얘기를 나눌 때 그는 곧바로 장모님께 전화 드려 이 소식을 알렸다.심씨 일가도 당연히 매우 기뻐했다.“엄마, 아빠만 알려주면 됐어. 온 세상에 소문 퍼뜨리려고 하지 마. 임신 초기는 불안정할 때라 일단 3개월이 지나거든 그때 천천히 알려도 돼.”소정남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임신한 첫 석 달은 유산기가 있어 대부분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너무 일찍 말했다가 유산이라도 하면 모두가 속상할 테니까.부부가 방에서 아기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 하예정과 성소현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전태윤, 예준하를 맞이했다.최민주가 한창 두 명의 대표님을 반겨주고 있었다.하예정이 내려오자 전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최민주에게 말했다.“아줌마, 저희 때문에 번거로우셨죠? 저는 이만 예정이 데리고 가볼게요.”“괜찮아. 번거롭긴, 예정 씨랑 소현 씨가 새아가 보러 와줘서 얼마나 고마운데. 나중에 시간 되면 자주 놀러 와요들.”최민주가 웃으며 답했다. 며느리가 임신한 이상 아들은 아무래도 그녀를 함부로 밖에 내보내지 않을 듯싶었다.그렇다고 종일 집에만 있는 것도 답답하니 하예정과 성소현이 자주 보러 오면 며느리가 두 친구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네, 꼭 그럴게요.”네 사람은 최민주와 인사한 후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소 씨네 별장을 나섰다.전태윤이 경호원을 거느리고 와서 하예정이 그의 차를 타고 본인 차는 경호원들에게 맡겼다.하예정은 차에 탄 후 웃음기가 사라지고 자신의 평평한 배를 어루만지며 전태윤에게 말했다.“우린 효진이네 부부보다 함께한 시간이 더 오래된데 왜 아직도 임신하지 못한 거죠? 효진이는 신혼여행 가서 바로 임신했어요.”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위로했다.“서두를 것 없어. 천천히 순리에 맡겨. 역술인이 말했잖아. 우린 가을이 돼야 좋은 소식이 있다고
“고향 마을에 영업 지점 만드는 건 어떻게 됐어? 사무실은 임대했고?”전태윤이 화제를 돌렸다.“네. 직원도 구했어요. 다음 주 월요일에 시공 들어가요.”전태윤이 그녀를 칭찬했다.“소현 씨랑 당신 장알못인데 일 처리하는 효율은 끝내주네.”“소현 언니 공로가 커요. 일할 때 화끈하잖아요. 근데 실마리가 조금 잡히니 내게 전부 떠맡기고 나 몰라라 하네요.”“내가 말했지. 소현 씨는 인내심이 부족해. 원래 그런 성격이야. 너라는 듬직한 파트너를 만났으니 다행이지 딴 사람한테 당해도 모른다니까.”할머니는 사람 보는 안목이 역시 탁월하다.성소현이 전태윤에게 대시할 때부터 할머니는 사석에서 손자에게 성소현 같은 여자는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되기에 부적절하다고 말씀하셨다.다만 할머니의 그 말씀이 없다고 해도 전태윤은 절대 성소현을 좋아할 일이 없다.그와 성기현은 만나면 앙숙인데 어찌 그런 사람의 여동생을 좋아하겠는가.만약 하예정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가 이경혜의 조카란 걸 알았더라면 할머니가 아무리 부추겨도 전태윤은 절대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결혼 후에 하예정과 이경혜가 친척 사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예정을 위해서라도 성기현과의 관계를 천천히 회복해야만 한다.다행히 성씨 일가에서 하예정 자매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전씨 일가를 겨냥할 때도 하예정을 고려하며 독하게 나오지 않고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뒀다.그리고 현재 두 기업은 협력 관계가 아니지만 이전처럼 앙숙으로 지내지는 않는다.“하지만 소현 언니는 장점도 많아요. 인맥도 넓고 자원도 풍부하잖아요. 단지 조금 게으르고 사람을 친하기를 꺼릴 뿐이죠.”하예정은 자신이 아직 성소현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성소현은 출발점에서 그녀보다 훨씬 높게 시작했으니.아무리 열심히 배우고 상류층에 스며들려고 노력해봐도, 서로 속고 속이는 비즈니스 업계에 적응하려 해도 시간이 짧다 보니 여전히 단점이 더 많다.전태윤이 다정하게 말했다.“당신이랑 소현 씨는 참 잘 맞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
하예진이 물었다.“예정이에게 없고 저한테 있는 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동명 씨가 재활을 꾸준히 하시고 제가 관성에 없을 때 자신을 돌보고 시간이 나면 우빈을 돌봐 주세요. 우빈이도 동명 씨를 보러 자주 갈 거예요. 녀석이 지금 자기 아빠보다 동명 씨를 더 좋아하니까요.”노동명은 의기양양하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우빈에게 진심으로 대해서 그래. 우빈이 친아빠는 늘 우빈이 앞에서 내 험담만 하거든. 우빈이는 똑똑하니까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 잘 알고 있어. 우빈이 친아빠가 내 험담을 하면 할수록 자기 친아빠를 더 싫어할걸.”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바라보았다.주형인에 관한 얘기가 언급되자 하예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그때 하예진이 입을 열었다.“뭘 봐요? 내가 아직도 그 남자를 신경 쓰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단지 우빈이 아빠일 뿐이에요. 제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죠? 그 사람을 언급하면 제 기분이 가라앉을 줄 알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제가 어떻게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직도 사랑했다면 애초에 이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마음이 찢어진 이상 최대한 빨리 이혼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주형인도 약속한 대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더는 하예진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관성은 우빈 뿐이었다.그러나 주형인은 하예진과 노동명이 함께 있는 모습을 태연자약하게 지켜보지 못했다.그는 또 노동명이 친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나은 계부로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을 했다.우빈이 아직 노동명을 두려워할 때,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우빈은 노동명을 대신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오늘날 우빈과 노동명의 사이가 매우 좋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주형인 부자가 만날 때마다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이 폐인으로 되었기에 하예진과 함께 한다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거나 다름없다면서 노동명의 험담했다.또
모두 웃기 시작했다.전호영은 노동명과 하예진이 돌아오면 요리들이 올라오게끔 미리 준비해 놓았다.그들은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 후 고현은 곧 자리를 떠나 고성 호텔로 박 대표를 만나러 갔다.다행히도 하루 호텔과 고성 호텔은 가까웠다. 두 호텔은 길을 건너면 바로 볼 수 있다.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해 주겠다고 고집했다.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호텔을 나와 호텔 근처 거리를 거닐며 강성의 밤거리를 구경시켜 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노동명이 뒤에 있는 하예진에게 물었다.하예진은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 앞으로 저에게 닥칠 일들이 지금보다 더 가혹할 거에요. 만약 이번 일조차 직면할 수 없다면 제가 강성에 있을 필요도 없이 관성으로 돌아가 계속 저의 레스토랑을 돌보는 게 나을걸요.”그렇게 하면 이경혜의 바람과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다행이네. 이렇게 오래 돌아다녔는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선물로 사줄게.”하예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제가 사면 돼요. 선물할 필요 없어요.”“난 지금 네 남자 친구거든.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할 남자라고.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준 적 없는데. 사실 우리 집 객실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러 선물로 가득 차 있거든. 전부 내가 너에게 준비한 선물들이야. 어떤 것은 너에게 선물했지만 네가 받지 않은 물건들이고 어떤 것은 내가 너에게 미처 선물하지 못한 것도 들어있어. 네가 받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방에 넣어두었거든. 앞으로 우리가 한 가족으로 되면 그 물건들은 어차피 너의 것으로 될 테니까. 네가 가지지 않으면 우리 집안의 돈이 낭비되는 거나 다름없을 텐데. 너도 우리 가정의 돈이 낭비되는 게 싫지?”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과거에 그녀는 노동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재혼하고 싶지 않고 돈만 벌고, 사업을 일으켜 우빈을 잘 키워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을 1층으로 안내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에서 고현에게 뽀뽀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그는 고씨 그룹에서 고현에게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어쨌든 고현은 고씨 그룹의 대표님이니까.전호영이 차를 몰고 고현과 함께 고씨 그룹을 떠났고 고현의 운전기사와 경호원들도 두 사람 뒤를 따랐다.식사를 마치고 나면 고현은 또 박 대표와 약속이 있었다.전호영은 그들이 하루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과 노동명은 아직 호텔에 돌아오지 않았다.하예진 일행은 약 30분 뒤에야 호텔로 돌아왔다.하예진은 어두운 얼굴로 노동명을 호텔로 밀고 들어갔다. 노동명은 계속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못 듣는 체했다.노동명은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위로의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하예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고 노동명도 더는 위로하지 않았다.하예진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위층으로 올라가 전호영이 안배해 준 식사하는 룸에 도착해서야 하예진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동명이 형.”전호영은 하예진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급히 일어나 하예진을 도우려고 했다.“호영 씨, 동명 씨가 혼자 몇 걸음 걸을 수 있어요.”하예진은 전호영의 도움 없이 노동명의 휠체어를 식탁 앞에 세웠고 노동명은 스스로 일어나 두 걸음 걷다가 다시 탁자 앞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고현도 일어섰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과 인사를 했다.“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하예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괜찮아요.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언니, 일은 다 처리했어요?”모두 자리에 앉은 후 고현은 두 사람에게 각각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주며 관심 있게 하예진에게 물었다.“다 처리했어요.”하예진이 대답했다.“잘됐네요. 노 대표님, 내일 돌아가시려고요?”고현은 나지막이 물었다.노동명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예진이 보러 온 것뿐이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
전호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니에요. 제가 고현 씨에게 꽃다발을 반년 넘게 보냈지만, 당신은 돈을 낭비한다면서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니 놀라서 그러죠. 고현 씨가 제 꽃다발을 좋아한다고 하니 저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고현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책상을 에돌아 꽃다발을 꽃병에 꽂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서 말했다.“너무 예쁘네요. 이 꽃병에 마침 꽉 찼네요.”“그럼요. 저의 마음이니까요.”고현은 다시 돌아서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도 책상 위가 깨끗해야 했고 퇴근할 때도 책상 위가 정연해야 했다.“가요. 밥 먹으러 가요. 예진 언니랑 노 대표님께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요.”전호영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제가 왔을 때 동명 형에게 전화했는데 예진 누나랑 지금 돌아오는 길이래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저희보다 조금 늦게 호텔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막히기 쉽거든요.”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고현은 남 비서에게 지시했다.“박 대표님께 미팅이 한 시간 늦어진다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비서는 고현이 박 대표와의 미팅을 취소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박 대표와 미리 말을 해 놓았다.전호영은 고현에게 물었다.“저녁에도 또 일 보려고요?”고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전호영은 곧 그녀의 눈빛의 뜻을 알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저도 사실 매우 바쁘거든요.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놀부가 아니라고요.”전호영에게는 미래의 아내에게 구애하는 일도 큰일이었다.그는 매일 고현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정말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호영 씨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이에요. 전씨 할머니도 호영 씨보다 더 바쁘실걸요.”전호영은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요. 저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덜 바쁘죠. 우리 어
저녁 무렵, 전호영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마이바흐를 몰고 제때 고씨 그룹에 들어섰다.고씨 그룹 건물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그는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양복 차림의 전호영은 언제나 그랬듯 늘 멋졌다.“전 대표님.”그는 꽃다발을 안고 걸어 들어갔고 모두 그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전호영이 지나가자 그 직원들은 웃음을 거두어들였다.전호영은 고씨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의 신분이 높지 않았다면 그 직원들은 가짜 웃음조차 그에게 주기 싫었을 것이다.‘휴, 현이 씨가 여전히 여성 신분을 폭로하기 싫은 거로 보면 아무래도 내 노력이 너무 부족했나 싶다...’전호영은 계속 동성애자라는 누명을 쓰며 강성의 젊은 여성들의 증오와 미움을 견뎌야 했다.그러나 전호영은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는 고현을 따르기로 한 그날부터 단단히 마음 먹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는 아내를 쫓아다닐 거라고 다짐했다.이렇게 하면 사실 좋은 점도 있다. 바로 고현이 원래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진정한 연적이 없다는 점이다.그리고 여자 연적들에 대해서도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고현의 여자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그 여자들의 마음은 아마 단번에 무너질 것이다.전호영은 그렇게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전호영은 남 비서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살금살금 들어갔다.“나가세요! 노크 다시 하고 들어와요!”고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호영은 멈칫했다.고현의 청력이 정말 대단했다.“현이 씨...”고현은 고개를 들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전호영은 즉시 항복했다.“네네네, 나가겠나이다. 노크하고 다시 들어오겠나이다.”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지만, 고현은 문 여는 소리를 듣더니 다시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전호영은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남 비서는 그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
“그래, 일 봐. 엄마가 지금 네 아빠 불러서 함께 드레스랑 하이힐을 사러 갈게.”진미리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떼자마자 진미리가 소리쳤다.“여보! 여보!”고진호가 밖에서 대답했다.“왜 그래?”고진호가 곧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무슨 일이에요?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허둥지둥 달려왔는데.”“가요. 당장 옷 갈아입고 나가서 치마 좀 사요. 제가 직접 우리 딸을 위해 드레스를 골라줘야겠어요. 드디어 예쁜 치마를 사서 우리 딸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게 됐어요.”고진호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너무 좋은 일이네요. 그럼, 사람 시켜 패션 디자인 사진을 가져오게 해요. 문 나설 필요 없이 사진만 고르면 되잖아요. 우리 현이가 입을 건데 당연히 가장 좋은 옷을 주문해서 제작해야죠.”“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일 저녁에 입을 드레스라서 시간이 안 돼요. 저한테도 드레스가 많지만, 중년 드레스라서 젊은이가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 백화점에 가서 먼저 현물을 사고 나중에 천천히 주문 제작해요.”고진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우리 현이가 치마를 입고 싶어 하다니... 호영이에게 미리 웨딩드레스를 맞추라고 알려줘야 겠어요. 그럼 곧 결혼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도 큰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겠네요.”그리고 나서 고진호 부부는 집중적으로 매일 시시덕거리고 껄렁껄렁한 고빈을 혼내줄 수 있을 것이다.서른이 다 되어가는 고빈 주위에는 예쁜 미인들이 많지만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장녀 고현이 있기 때문에 진미리 부부는 잠시 고현의 인생 대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현의 일이 곧 결실을 보게 되면 이번에는 고빈의 차례로 될 것이다.두 아이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내일 저녁 현이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당분간 호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현이도 갑자기 치마를 입고 여성 신분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을 호영이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진미리는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