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을에 영업 지점 만드는 건 어떻게 됐어? 사무실은 임대했고?”전태윤이 화제를 돌렸다.“네. 직원도 구했어요. 다음 주 월요일에 시공 들어가요.”전태윤이 그녀를 칭찬했다.“소현 씨랑 당신 장알못인데 일 처리하는 효율은 끝내주네.”“소현 언니 공로가 커요. 일할 때 화끈하잖아요. 근데 실마리가 조금 잡히니 내게 전부 떠맡기고 나 몰라라 하네요.”“내가 말했지. 소현 씨는 인내심이 부족해. 원래 그런 성격이야. 너라는 듬직한 파트너를 만났으니 다행이지 딴 사람한테 당해도 모른다니까.”할머니는 사람 보는 안목이 역시 탁월하다.성소현이 전태윤에게 대시할 때부터 할머니는 사석에서 손자에게 성소현 같은 여자는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되기에 부적절하다고 말씀하셨다.다만 할머니의 그 말씀이 없다고 해도 전태윤은 절대 성소현을 좋아할 일이 없다.그와 성기현은 만나면 앙숙인데 어찌 그런 사람의 여동생을 좋아하겠는가.만약 하예정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가 이경혜의 조카란 걸 알았더라면 할머니가 아무리 부추겨도 전태윤은 절대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결혼 후에 하예정과 이경혜가 친척 사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예정을 위해서라도 성기현과의 관계를 천천히 회복해야만 한다.다행히 성씨 일가에서 하예정 자매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전씨 일가를 겨냥할 때도 하예정을 고려하며 독하게 나오지 않고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뒀다.그리고 현재 두 기업은 협력 관계가 아니지만 이전처럼 앙숙으로 지내지는 않는다.“하지만 소현 언니는 장점도 많아요. 인맥도 넓고 자원도 풍부하잖아요. 단지 조금 게으르고 사람을 친하기를 꺼릴 뿐이죠.”하예정은 자신이 아직 성소현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성소현은 출발점에서 그녀보다 훨씬 높게 시작했으니.아무리 열심히 배우고 상류층에 스며들려고 노력해봐도, 서로 속고 속이는 비즈니스 업계에 적응하려 해도 시간이 짧다 보니 여전히 단점이 더 많다.전태윤이 다정하게 말했다.“당신이랑 소현 씨는 참 잘 맞
오래된 부부라서 하예정은 그의 말뜻을 알았다.그녀는 빠르게 기사와 조수석에 앉아있는 경호원을 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기사는 운전에 여념이 없었고 경호원은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그것은 경호원의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거나 소설을 보는 것으로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도련님과 사모님이 어떤 애정 표현을 하든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하예정이 재빨리 전태윤에게 입을 맞추고서야 전태윤은 그녀를 봐줬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강조했다.“내일 출근하기 전까지 네가 써준 고백 편지를 받고 싶어.”“알겠어요.”하예정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예준하 씨가 이곳으로 소현 언니를 데리러 올 거예요. 사실 두 사람 꽤 잘 지내고 있어요.”전태윤은 짧게 대답했다.“예준하 씨 당분간 관성을 떠날 거야.”“왜요? 출장 가는 거예요?”예준하는 성소현을 좋아했기에 하예정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잊었어? 모연정 씨가 이제 곧 출산하잖아. 출산하게 되면 예준하 씨는 삼촌이니까 당연히 조카를 보러 가야지. 병원에 있을 때면 볼 수 있지만 모연정 씨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가 몸조리를 한다면 그곳에 드나들기 좀 그렇잖아. 그래서 미리 돌아가서 며칠 지내려는 거야. 적어도 형수가 퇴원해서 산후조리 한 뒤에야 관성으로 돌아올 거야. 그리고 아기가 만 한 달 채우면 다시 그곳으로 갈 거야.”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그렇네요. 그 일을 깜빡했어요.”모연정이 아들 둘을 낳을지, 딸 둘을 낳을지, 아니면 딸 하나 아들 하나 낳을지 알 수 없었다.시간이 지나 모연정이 낳은 아이가 생후 1개월이 된다면 그들도 축하 파티에 참석해야 했다.하예정은 모연정의 좋은 기운을 받고 싶었다.두 부부가 일상적인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예준하와 성소현은 다른 차를 타고 있어서 대화를 나누기 쉽지 않았다.성씨 그룹 산하의 호텔에 도착한 뒤로 예준하는 예약해 둔 룸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성소현에게 말했다.“소현 씨, 나 내일 A시에 갔다 와야
연적이 있는 상황에서 예준하는 관성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성소현이 장연준의 여자친구가 돼 있을까 봐서 말이다.“집안 어른들 얼굴도 봬야죠.”성소현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말했다.“소현 씨, 나랑 같이 가고 싶은 생각 있어?”예준하가 물었다.그는 성소현과 함께 돌아가 집안 어른들을 뵙고 싶었다.어른들은 관성에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성소현의 사진도 보았으나 실물은 보지 못했다.성소현은 무신경한 성격임에도 예준하의 말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우리 아직 정식으로 만나는 것도 아닌데 부모님을 뵙는 건 너무 이른 거 아냐? 우리 엄마... 엄마만 괜찮다면 난 언제든 소현 씨랑 부모님 뵈러 갈 수 있어.”예준하의 눈동자에서 실망이 보였지만 그는 이내 투지를 불태우면서 부드럽게 웃었다.“그날이 너무 늦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꼭 아주머니께서 날 흡족하게 여기게 할 거야.”노력해도 성소현 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못한다면 부모님과 형수님에게 나서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다.이때 직원이 꽃다발을 안고 안으로 들어왔다.예준하는 종업원이 들어오자 일어나서 꽃다발을 받았다.그러고는 성소현에게 꽃다발을 주면서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봄바람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소현 씨, 이건 내가 미리 주문한 거야. 조금 전에 소현 씨 데리러 소현 씨 집에 갔을 때는 쑥스러워서 못 챙겨 갔어.”성소현은 웃는 얼굴로 꽃다발을 받았다.“나 매일 준하 씨에게서 꽃을 받네.”예준하의 꽃 공세는 맹렬했다.그는 매일 몇 송이씩 선물로 줬다.그리고 꽃 외에도 여러 가지 선물을 줬다. 성소현의 환심을 사려고 말이다.성소현은 사랑받는 기분을, 소중히 여겨지는 기분을 느꼈다.달콤하고 행복하고 취할 것만 같았다.“소현 씨 마음에 든다면, 소현 씨가 즐겁다면 난 좋아.”“마음에 들어. 그리고 기뻐. 매일 준하 씨처럼 멋진 남자가 꽃을 선물로 주니까 매일 기분 좋아.”예준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
이경혜는 웃으며 말했다.“그거 정말 좋은 소식이네. 진짜 희소식이야.”“소씨 집안사람들 다 기뻐했어요. 소 이사님은 긴장해서 효진 씨를 보물처럼 대하더라니까요.”이경혜는 웃었다.“그건 당연하지. 정남이는 처음 결혼한 거잖니? 효진이 배 속의 아이는 소씨 집안의 핏줄이고. 그러니까 소씨 집안사람들 다 중요시할 거야.”첫 번째 아이니 기대가 크고 그만큼 중요했다.“예정이는 어때?”이경혜는 예정이가 아직도 임신하지 않은 걸 떠올렸다. 심효진은 허니문 때 임신했으니 하예정이 낙심할까 봐 걱정됐다.성소현은 하예정의 반응을 떠올린 뒤 말했다.“정상이던데요? 엄마, 예정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예정이 이제 많이 내려놨어요. 순리에 따를 생각이라 조급한 건 아녜요. 그리고 우리도 워낙 바쁘니 아이 일은 신경 쓸 여력이 없을걸요.”예전에 하예정은 그녀와 심효진의 서점만 관리했다 보니 한가해서 임신에 관한 일을 자꾸만 생각했다.집에 한가히 있으면 괜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게 좋았다. 주의력도 분산시킬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그리고 여자가 결혼한 뒤에 돈을 벌 수 있다면 시댁에 가서도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었다.하예진의 결혼을 통해 성소현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남자가 돈을 얼마나 벌든 여자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자기가 먹여 살리겠다는 남자의 말은 믿을 바가 못 된다. 한동안 먹여 살리면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남자에게 돈 달라고 손을 내민다면 처음에는 흔쾌히 주다가 불평이 많아지기 시작하고 눈을 흘기면서 욕을 할 수도 있었고, 마지막에는 주지 않으려 할 수도 있었다.물론 모든 남자가 주형인 같은 건 아니다.이 세상에는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았다.“너 대부분 매일 예정이랑 같이 있으니까 혹시라도 예정이가 고민이 있는 것 같으면 네가 옆에서 잘 설득해.”“엄마,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예정이는 내 동생인걸요. 전 예정이가 잘 되길 누구보다도 바라요. 전 예
“엄마, 저 지금 우리 호텔 303호에 있어요.”성소현은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지금 호텔에 있다고 얘기해야 했다.이경혜는 잠깐 침묵한 뒤 물었다.“너 예준하 씨랑 같이 밥 먹는 거니?”“네.”성소현은 솔직히 인정했다.집안사람들은 그녀와 예준하가 만나는 걸 반대했지만 그녀는 가족 말에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예준하와 있으면 즐거웠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즐거움이었다.예준하와 있으면 즐거운데 왜 예준하를 만나면 안 된단 말인가?“저희 막 도착해서 아직 밥은 먹지 않았어요. 저 준하 씨랑 같이 가서 엄마랑 장연준 씨랑 같이 식사할까요?”이경혜는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엄마가 너 찾으러 갈게.”말을 마친 뒤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성소현은 휴대전화를 든 채로 예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가 장연준 씨에게 음식을 대접하는데 우리도 같이 갔으면 해. 잠시 뒤에 우리 엄마 올 테니까 일단 주문하지 말자.”그녀 집안에서 운영하는 호텔이었기에 어떤 음식이 잘 나가는지 성소현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예준하는 웃었다.“좋아.”그는 이경혜가 그를 마뜩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았다.장연준은 이경혜가 예준하를 상대하기 위해 찾은 연적이었다. 비록 장씨 집안은 줄곧 겸손했지만 거긴 장소민의 친정이었다. 장연준과 전태윤이 사촌지간이고 장씨 집안과 성씨 집안은 수준이 비슷했다.장연준은 이경혜가 고른 사람이고, 장연준과 성소현이 아는 사이가 되도록 이경혜가 직접 나선 걸 보면 장연준이 아주 우수한 남자라는 건 분명했다.성소현은 예준하가 흔쾌히 동의하자 말을 하려다 말았다.“소현 씨,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예준하가 다정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저러는 걸 보면 아마 나랑 장연준 씨를 이어주려는 것 같아. 난 처음엔 몰랐어. 엄마가 자꾸만 내 앞에서 장연준 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계속 말하더라고. 그리고 조금 전에야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깨달았어.”예준하는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알아. 장연준 씨를 처음 봤을 때, 또 아
성소현은 그에게 마음이 있었다.성소현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그와 사귀는 것에 아직 동의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사람의 애정을 받는, 사랑을 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성소현은 웃으며 말했다.“장연준 씨가 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우리 엄마가 쓸데없이 그러는 거고 나도 협조할 생각이 없으니 엄마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어. 내가 누굴 사랑할지는 내가 정하는 거니까.”장연준은 전태윤의 사촌 동생이었다. 비록 그녀와 장연준은 별다른 접점이 없지만 그녀가 전태윤을 짝사랑한 적이 있다는 건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비록 지금은 전태윤을 향한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장연준이 그걸 과연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엄마가 그러는 건 헛수고였다. 그리고 그녀도 협조할 생각이 없었고 장연준 또한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성소현의 말에 예준하는 마음을 놓았다.그는 자신이 일찍 성소현을 마음에 두고 일부러 그녀에게 접근한 것,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여 그녀와 감정을 키운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지금 움직였다면 장연준을 이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이경혜가 곧 도착했다.“아주머니.”예준하는 이경하가 들어오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이경혜는 예전에 그가 예의 바르고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매번 만날 때마다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예준하의 미소를 보면 교활할 여우 같았고 웃는 얼굴도 여우 같았다.이경혜는 그가 점잖고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예준성의 눈에 들어 중책을 맡으며 혼자 관성에 있는 예진 그룹의 지사를 관리하며 회사 경영 범위를 확대했다. 본사는 끊임없이 지사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그것은 예준하의 능력이 좋다는 걸 의미했다.물론 예준하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그가 사람들의 생각처럼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비즈니스를 하면서 이 업계에서 이 정도의 성과를 냈다는 건 그만큼 무자비하다는 걸 의미했다.“그래요.”이경혜는 지금 비록 예준하를 보고
“전 소현 씨가 이기적이고 난폭하고 성질머리가 고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누구나 화를 내기는 마련이죠. 소현 씨가 정말로 아주머니가 말한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전 성격이 좋거든요. 이해심도 많고요. 소현 씨 같은 성격과 아주 잘 어울리죠.”이경혜는 예준하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예준하는 확실히 성격이 좋은 편이고 이해심도 많았다.“아주머니, 제가 관성 사람이 아닌 것 외에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또 있으신가요? 제가 고치겠습니다.”이경혜가 대놓고 말했으니 예준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예준하 씨는 다 좋아요. 아주 훌륭해요. 예준하 씨가 내 딸을 좋아하기 전까지는 나도 예준하 씨를 좋게 봤어요. 그리고 내가 그런 얘기도 했었죠. 나한테는 딸이 한 명뿐이라 멀리 시집 보내고 싶지 않다고요. 예준하 씨는 우리 딸과 이제 막 만나기 시작했을 테니 정을 떼는 게 쉬울 거예요. 서로에게 그렇게 큰 상처가 되지 않을 거예요.”“전 장기간 관성에서 일했고 관성에서 지냅니다. 친구들도 거의 다 관성에 있어요. 새로 산 집은 아주머니 집과 아주 가까워요. 아주머니, 전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관성이 아닌 것뿐, 관성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소현 씨를 위해서라면 제 주민등록상 주소지도 관성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이경혜는 침묵했다.성소현이 고집스럽게 전태윤을 짝사랑한 것도 사실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면을 닮아서였다.이경혜는 가끔가다 어떤 일에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설득해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 한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예준하가 아무리 많은 것을 해도, 약속을 해도, 그녀는 절대 예준하와 딸의 결혼식을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띠링.예준하는 새 메시지를 받았다.휴대전화를 꺼내 카톡을 확인해 봤는데 성소현이 보낸 메시지였다. 엄마가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자기 얼굴을 봐서라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예준하의 눈동자에는 애정이 가득했다.그는 이경혜를 이미 장모님으로 여기고 있었
누군가를 마음에 들면 단점조차 장점으로 보이기 마련이고, 누군가를 혐오하면 장점조차 단점으로 보인다.“성소현 씨, 안녕하세요.”장연준은 웃는 얼굴로 성소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성소현의 뒤를 쳐다보았지만 이경혜는 없었다.이경혜가 밥을 사준다고 한 것이라 이경혜도 있을 줄 알았다.이경혜는 너무 예의를 차렸다. 그는 그저 길을 가다가 이경혜가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걸 보고 차를 세우고 왜 그러느냐고 묻고 가던 길에 집까지 바래다줬을 뿐이다. 그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그러나 이경혜는 그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듯 과도하게 열정적으로 굴고 감격해했다. 그래서 장연준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이경혜는 여러 차례 그에게 연락해서 보답으로 밥을 사주겠다고 했고, 장연준은 모두 거절했다.그동안 이경혜가 몇 번이나 초대한 탓에 장연준은 끝내 어쩔 수 없이 승낙하여 오늘 밥 한 끼 같이 먹으려고 했다. 이경혜가 보답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는 더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엄마는 룸 안에서 장연준 씨를 기다리고 계세요.”성소현의 설명에 장연준은 안도했다.성소현과 단둘이 밥을 먹는 것만 아니면 괜찮았다.비록 장연준은 성소현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성소현과 단둘이 밥 먹을 생각은 없었다. 기자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혔다가는 루머로 실검에 오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의 신분은 관성에서 많이 민감했다.전씨 가문 사모님의 친정 조카, 전태윤의 사촌 동생이 구설에 오른다면 실검에 오르기가 쉬웠다.장씨 가문 사람들은 조용히 지내는 걸 원했고 장연준은 장씨 일가에서 첫 번째로 실검에 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장연준 씨, 가시죠.”성소현이 장연준을 호텔 안으로 안내했다.장연준은 정중히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곧 이경혜가 있는 룸에 도착했고 성소현은 문을 열어 장연준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안으로 들어가자 이경혜와 예준하가 보였다. 장연준은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아주머니, 예준하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
하예진이 물었다.“예정이에게 없고 저한테 있는 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동명 씨가 재활을 꾸준히 하시고 제가 관성에 없을 때 자신을 돌보고 시간이 나면 우빈을 돌봐 주세요. 우빈이도 동명 씨를 보러 자주 갈 거예요. 녀석이 지금 자기 아빠보다 동명 씨를 더 좋아하니까요.”노동명은 의기양양하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우빈에게 진심으로 대해서 그래. 우빈이 친아빠는 늘 우빈이 앞에서 내 험담만 하거든. 우빈이는 똑똑하니까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 잘 알고 있어. 우빈이 친아빠가 내 험담을 하면 할수록 자기 친아빠를 더 싫어할걸.”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바라보았다.주형인에 관한 얘기가 언급되자 하예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그때 하예진이 입을 열었다.“뭘 봐요? 내가 아직도 그 남자를 신경 쓰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단지 우빈이 아빠일 뿐이에요. 제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죠? 그 사람을 언급하면 제 기분이 가라앉을 줄 알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제가 어떻게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직도 사랑했다면 애초에 이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마음이 찢어진 이상 최대한 빨리 이혼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주형인도 약속한 대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더는 하예진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관성은 우빈 뿐이었다.그러나 주형인은 하예진과 노동명이 함께 있는 모습을 태연자약하게 지켜보지 못했다.그는 또 노동명이 친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나은 계부로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을 했다.우빈이 아직 노동명을 두려워할 때,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우빈은 노동명을 대신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오늘날 우빈과 노동명의 사이가 매우 좋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주형인 부자가 만날 때마다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이 폐인으로 되었기에 하예진과 함께 한다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거나 다름없다면서 노동명의 험담했다.또
모두 웃기 시작했다.전호영은 노동명과 하예진이 돌아오면 요리들이 올라오게끔 미리 준비해 놓았다.그들은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 후 고현은 곧 자리를 떠나 고성 호텔로 박 대표를 만나러 갔다.다행히도 하루 호텔과 고성 호텔은 가까웠다. 두 호텔은 길을 건너면 바로 볼 수 있다.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해 주겠다고 고집했다.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호텔을 나와 호텔 근처 거리를 거닐며 강성의 밤거리를 구경시켜 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노동명이 뒤에 있는 하예진에게 물었다.하예진은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 앞으로 저에게 닥칠 일들이 지금보다 더 가혹할 거에요. 만약 이번 일조차 직면할 수 없다면 제가 강성에 있을 필요도 없이 관성으로 돌아가 계속 저의 레스토랑을 돌보는 게 나을걸요.”그렇게 하면 이경혜의 바람과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다행이네. 이렇게 오래 돌아다녔는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선물로 사줄게.”하예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제가 사면 돼요. 선물할 필요 없어요.”“난 지금 네 남자 친구거든.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할 남자라고.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준 적 없는데. 사실 우리 집 객실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러 선물로 가득 차 있거든. 전부 내가 너에게 준비한 선물들이야. 어떤 것은 너에게 선물했지만 네가 받지 않은 물건들이고 어떤 것은 내가 너에게 미처 선물하지 못한 것도 들어있어. 네가 받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방에 넣어두었거든. 앞으로 우리가 한 가족으로 되면 그 물건들은 어차피 너의 것으로 될 테니까. 네가 가지지 않으면 우리 집안의 돈이 낭비되는 거나 다름없을 텐데. 너도 우리 가정의 돈이 낭비되는 게 싫지?”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과거에 그녀는 노동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재혼하고 싶지 않고 돈만 벌고, 사업을 일으켜 우빈을 잘 키워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을 1층으로 안내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에서 고현에게 뽀뽀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그는 고씨 그룹에서 고현에게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어쨌든 고현은 고씨 그룹의 대표님이니까.전호영이 차를 몰고 고현과 함께 고씨 그룹을 떠났고 고현의 운전기사와 경호원들도 두 사람 뒤를 따랐다.식사를 마치고 나면 고현은 또 박 대표와 약속이 있었다.전호영은 그들이 하루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과 노동명은 아직 호텔에 돌아오지 않았다.하예진 일행은 약 30분 뒤에야 호텔로 돌아왔다.하예진은 어두운 얼굴로 노동명을 호텔로 밀고 들어갔다. 노동명은 계속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못 듣는 체했다.노동명은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위로의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하예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고 노동명도 더는 위로하지 않았다.하예진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위층으로 올라가 전호영이 안배해 준 식사하는 룸에 도착해서야 하예진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동명이 형.”전호영은 하예진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급히 일어나 하예진을 도우려고 했다.“호영 씨, 동명 씨가 혼자 몇 걸음 걸을 수 있어요.”하예진은 전호영의 도움 없이 노동명의 휠체어를 식탁 앞에 세웠고 노동명은 스스로 일어나 두 걸음 걷다가 다시 탁자 앞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고현도 일어섰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과 인사를 했다.“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하예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괜찮아요.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언니, 일은 다 처리했어요?”모두 자리에 앉은 후 고현은 두 사람에게 각각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주며 관심 있게 하예진에게 물었다.“다 처리했어요.”하예진이 대답했다.“잘됐네요. 노 대표님, 내일 돌아가시려고요?”고현은 나지막이 물었다.노동명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예진이 보러 온 것뿐이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
전호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니에요. 제가 고현 씨에게 꽃다발을 반년 넘게 보냈지만, 당신은 돈을 낭비한다면서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니 놀라서 그러죠. 고현 씨가 제 꽃다발을 좋아한다고 하니 저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고현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책상을 에돌아 꽃다발을 꽃병에 꽂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서 말했다.“너무 예쁘네요. 이 꽃병에 마침 꽉 찼네요.”“그럼요. 저의 마음이니까요.”고현은 다시 돌아서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도 책상 위가 깨끗해야 했고 퇴근할 때도 책상 위가 정연해야 했다.“가요. 밥 먹으러 가요. 예진 언니랑 노 대표님께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요.”전호영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제가 왔을 때 동명 형에게 전화했는데 예진 누나랑 지금 돌아오는 길이래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저희보다 조금 늦게 호텔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막히기 쉽거든요.”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고현은 남 비서에게 지시했다.“박 대표님께 미팅이 한 시간 늦어진다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비서는 고현이 박 대표와의 미팅을 취소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박 대표와 미리 말을 해 놓았다.전호영은 고현에게 물었다.“저녁에도 또 일 보려고요?”고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전호영은 곧 그녀의 눈빛의 뜻을 알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저도 사실 매우 바쁘거든요.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놀부가 아니라고요.”전호영에게는 미래의 아내에게 구애하는 일도 큰일이었다.그는 매일 고현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정말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호영 씨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이에요. 전씨 할머니도 호영 씨보다 더 바쁘실걸요.”전호영은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요. 저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덜 바쁘죠. 우리 어
저녁 무렵, 전호영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마이바흐를 몰고 제때 고씨 그룹에 들어섰다.고씨 그룹 건물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그는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양복 차림의 전호영은 언제나 그랬듯 늘 멋졌다.“전 대표님.”그는 꽃다발을 안고 걸어 들어갔고 모두 그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전호영이 지나가자 그 직원들은 웃음을 거두어들였다.전호영은 고씨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의 신분이 높지 않았다면 그 직원들은 가짜 웃음조차 그에게 주기 싫었을 것이다.‘휴, 현이 씨가 여전히 여성 신분을 폭로하기 싫은 거로 보면 아무래도 내 노력이 너무 부족했나 싶다...’전호영은 계속 동성애자라는 누명을 쓰며 강성의 젊은 여성들의 증오와 미움을 견뎌야 했다.그러나 전호영은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는 고현을 따르기로 한 그날부터 단단히 마음 먹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는 아내를 쫓아다닐 거라고 다짐했다.이렇게 하면 사실 좋은 점도 있다. 바로 고현이 원래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진정한 연적이 없다는 점이다.그리고 여자 연적들에 대해서도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고현의 여자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그 여자들의 마음은 아마 단번에 무너질 것이다.전호영은 그렇게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전호영은 남 비서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살금살금 들어갔다.“나가세요! 노크 다시 하고 들어와요!”고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호영은 멈칫했다.고현의 청력이 정말 대단했다.“현이 씨...”고현은 고개를 들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전호영은 즉시 항복했다.“네네네, 나가겠나이다. 노크하고 다시 들어오겠나이다.”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지만, 고현은 문 여는 소리를 듣더니 다시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전호영은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남 비서는 그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
“그래, 일 봐. 엄마가 지금 네 아빠 불러서 함께 드레스랑 하이힐을 사러 갈게.”진미리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떼자마자 진미리가 소리쳤다.“여보! 여보!”고진호가 밖에서 대답했다.“왜 그래?”고진호가 곧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무슨 일이에요?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허둥지둥 달려왔는데.”“가요. 당장 옷 갈아입고 나가서 치마 좀 사요. 제가 직접 우리 딸을 위해 드레스를 골라줘야겠어요. 드디어 예쁜 치마를 사서 우리 딸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게 됐어요.”고진호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너무 좋은 일이네요. 그럼, 사람 시켜 패션 디자인 사진을 가져오게 해요. 문 나설 필요 없이 사진만 고르면 되잖아요. 우리 현이가 입을 건데 당연히 가장 좋은 옷을 주문해서 제작해야죠.”“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일 저녁에 입을 드레스라서 시간이 안 돼요. 저한테도 드레스가 많지만, 중년 드레스라서 젊은이가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 백화점에 가서 먼저 현물을 사고 나중에 천천히 주문 제작해요.”고진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우리 현이가 치마를 입고 싶어 하다니... 호영이에게 미리 웨딩드레스를 맞추라고 알려줘야 겠어요. 그럼 곧 결혼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도 큰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겠네요.”그리고 나서 고진호 부부는 집중적으로 매일 시시덕거리고 껄렁껄렁한 고빈을 혼내줄 수 있을 것이다.서른이 다 되어가는 고빈 주위에는 예쁜 미인들이 많지만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장녀 고현이 있기 때문에 진미리 부부는 잠시 고현의 인생 대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현의 일이 곧 결실을 보게 되면 이번에는 고빈의 차례로 될 것이다.두 아이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내일 저녁 현이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당분간 호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현이도 갑자기 치마를 입고 여성 신분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을 호영이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진미리는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